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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1-01)


배은한  남유다에게 임한 심판

이사야 1장 1-20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자 자녀로 부름 받았지만, 그 특권을 남용했습니다. 소나 나귀도 자기 주인을 알아보건만, 사랑으로 자신들을 양육한 하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배은망덕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스라엘처럼 새 백성으로 불러 더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회복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 이사야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반역을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은 배은망덕한 자식이요 소와 나귀보다 못한 자들입니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이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죄악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멀리해야 할 죄들이 이스라엘의 본성과 성품의 중심에 주인처럼 자리를 잡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죄를 고발하신 하나님(1-3)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악행은 짐승들도 하지 않을 만큼 지독했습니다.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많은 기회를 주었지만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게 호되게 심판을 하셨어도 그 완악한 마음을 돌이킬 줄 모릅니다. 주님의 자비가 없었으면 소돔과 고모라 같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마저 감당하지 못할 정도면 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1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2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1-3)

 

이스라엘을 참된 회개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을 분명히 깨닫도록 해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기 전에,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부터 말씀하시는 내용이 모든 만물이 동의할 만한 내용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1) 이사야가 본 이상(1)

 

이사야서의 머리말이라 할 수 있는 첫 절은 매우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언의 메시자 자체로 들어가기에 앞서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연구해 볼 가치와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주전 8세기 중반부터 7세기로 넘어가는 어간까지, 약 40년 동안 남 유다에서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그 시대적인 배경으로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라고 왕들을 나열합니다. 그는 웃시야가 죽던 해 소명을 받은 후, 히스기야 통치 시기까지 계속해서 사역을 했습니다.

남 유다는 주전 8세기 초에 주변 세력에 약화됨으로 번영을 누리지만, 주전 745년에 앗수르가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해서 앗수르의 압제 하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는 이사야가 메시지를 전달할 대상은 남 ‘유다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는 민족들의 신탁을 포함해 이사야에 수집된 모든 말씀이 이사야가 본 하나님의 계시(환상)이고, 그 내용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과 관련됐음을 알려줍니다.

 

(2) 깨닫지 못하는 백성(2-3)

 

남 유다를 향한 이사야의 비난은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라고 매우 충격적이고 자극적이었습니다. 이 말은 1장에서만 다섯 번 등장하고(2,5,20,23,28), 이사야 마지막 구절(66:24)에서도 다시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거역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상심하시는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고소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자신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상심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확실한 증인 둘을 재판정에 불러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발합니다(2). 땅은 피 흘림과 황폐함을 초래한(7) 이스라엘의 죄악을 직접 경험한 증인이고, 하늘은 이들의 범죄 행위를 낱낱이 지켜본 증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배반을 두 개의 잘 알려진 비유를 통해 고발하십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스라엘을 친아들처럼 키워주고 돌봐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배반한 파렴치한 아들입니다. 고대적 가치관에 따르면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아들은 죽음에 넘겨집니다(신 21:18-21). 여호와를 배반한 이스라엘의 행태는 아버지를 거역한 아들의 패역과 같기에, 멸망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주인과 주인이 키우는 짐승의 비유입니다(3). 말 못하는 짐승인 소나 나귀보다도 지각이 없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3)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무시하는 가축일지라도 그것들은 절대로 자신에게 먹이는 주는 주인을 모른 체하거나 주인에게 대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찮은 짐승에 비하여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한 예는 또 있습니다. 즉 소나 나귀도 먹이를 주고 키워준 주인을 알아보고 따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즉 예레미야 선지자는 가축보다 더 하등 동물인 날짐승을 들어 이스라엘을 배은망덕과 어리석음을 지적했습니다.

 

7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예레미야 8:7)

 

 

이스라엘의 완악함(4-9)

 

옛날부터 은혜를 모르면 짐승만도 못한 자라고 합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은 치유의 가능성을 더 어렵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사랑의 매를 드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발바닥부터 머리가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더 큰 매를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4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7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8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 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9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4-9)

 

이사야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양육해준 부모이며 또한 자신들에게 양식을 공급해준 주인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악하게 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상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두 번째 단락은 깨닫지 못함의 구체적인 예로, 이미 이뤄진 심판의 서술입니다. 여호와께서 거듭 치셨지만,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하고 그분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거의 죽기까지 맞았음에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1) 여호와를 버린 자들(4)

 

본문은 주전 701년 예루살렘의 함락을 목전에 둔 앗수르 군대가 갑작스럽게 철군한 직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4)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가 이제는 범죄한 나라에 속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를 업신여겨 등을 돌리고 악을 쫓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악행이 뼛속까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남 유다의 파괴된 정체성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2) 상처 투성이뿐인 이스라엘(5-6)

 

하나님께 반항하다가 맞아 중상을 입었는데도 반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5). 병이 머리와 마음(가슴)을 덮쳤음은 환자가 목숨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위험에 처했음을 시사 합니다. 병뿐만 아니라 환부의 범위도 심각했습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온몸에 성한 데라고는 한 곳도 없이 상처와 상흔과 새로 맞은 자국뿐이었습니다(6).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할 중환자인데도 무지한 이스라엘은 치료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살리기 위해 거듭 매를 드셨지만, 이스라엘은 아버지의 경고에 어리석게 조금도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행동이 지속되는 한 상처를 치료 받기 어렵습니다.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기름이 그분의 손에 들려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그분께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3) 이방에 황폐해진 이스라엘(7-8)

 

매를 맞고도 돌이키지 않아 만신창이가 된 이스라엘의 구체적 상태를 보려주고 있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병의 비유가 언급됩니다. 이사야는 거듭된 패악의 결과가 현재 유다의 상태에 황폐함과 파괴임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대적을 통해 남 유다를 파괴하셨고, 땅은 황폐하고 성읍은 불에 탔고 토지소산은 이방인의 차지가 됐습니다(7). 초라한 모습으로 남게 하셨습니다.

사용된 표현은 대부분 언약 전통에 속하는 것들로, 언약 파기의 결과로 이스라엘에 저주가 임했음을 시사 합니다. ‘파괴됨’의 ‘마흐페카(מהכהפ)’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언급할 때만 사용된 단어입니다(신 29:22; 사 1:7;13:19; 렘 49:18; 50:40; 암 4:11). 완전히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될 정도로, 유다가 침략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됐습니다.

시온만 겨우 포도원의 초막처럼, 참외밭(오이밭)의 원두막처럼, 포위된 성읍처럼 남았습니다(8). 시온은 파괴된 포도원과 참외밭에 홀로 초라하게 남겨진 초막과 같았습니다. ‘포도원의 망대’, ‘원두밭의 상직막’은 열매를 맺는 동안 과실들을 도둑이나 동물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밭에 임시로 세워놓는 것으로서, 겨우 비와 햇볕을 피할 정도의 역할을 하는 가건물입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이 외롭게 동떨어져 있고 또 쉽게 허물어질 건물과 같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방인의 침략에서 겨우 목숨을 구한 시온을 기다리는 것은 추수할 열매가 하나도 없는 절망적 현실이었습니다.

 

(4) 하나님의 긍휼(9)

 

예루살렘은 외부의 작은 공격 앞에서도 쉽게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원두막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소돔이나 고모라 같이 취급하여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멸시켜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제 선지자 이사야의 시선은 매를 맞은 이스라엘에서 매를 들어 치고 계신 여호와께로 옮겨집니다. 여호와께서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일부를 남겨주셔서 시온은 소돔과 고모라가 당했던 완전한 멸망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9). 그분이 어떤 이유에서 마지막 순간에 시온을 구하셨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지만(29:1-8), 이스라엘의 긍정적 태도 변화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22:1-14). ‘여호와께서’ 생존자를 남겨두셨음은 다른 한편으로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사보다 말씀의 순종(10-17)

 

이스라엘은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 못지않게 악하게 행하면서도 돌이킬 줄 모릅니다. 온갖 종교 행위로 이를 덮고 상쇄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의도를 담은 종교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교회의 부끄러운 면을 감추고 화려한 종교 의식으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 하지 않습니까?

 

10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11-17)

 

이스라엘은 많은 제물로 자신들의 악행을 가렸습니다. 자신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은 많은 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서는 만나지 못하고 마당만 밟고 가는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1)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10)

 

예루살렘의 지배계급과 유다 백성은 소돔의 관원들과 고모라의 백성과 다르지 않았습니다(10).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법(가르침)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제의적 행사에만 열심이었습니다.

 

(2) 제의적인 경건(11-15)

 

여호와께서는 이들이 무슨 생각에서 그처럼 많은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바치는지 당혹해하십니다(11). 그분은 이들이 끊임없이 불에 살라 바치는 제물에 넌더리를 내십니다. 이들은 단지 예물을 드리기 위해 성전 뜰을 열심히 밟을 뿐이었습니다(12). 이들은 제사와 예물로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무를 대체하려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인 단 불에 살라지는 제물은 ‘헛된 제물’로, 이들의 제사는 무익한 짓이었습니다(13). 제단의 분향은 그분께 역겹고 가증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열심을 내서 온갖 절기를 지키지만, 이들의 경건은 성전의 담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성회로 모이면서도 그 마음에는 악을 품고 있었습니다. 한계에 도달한 여호와의 인내심이 제의적 모임과 절기의 축제에만 열심인 자들과의 단절을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의 축제와 절기는 ‘너희’의 종교적 행사로, 그분께는 이교적 풍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14). ‘무거운 짐’을 계속 짊어지기에는 그분이 이제 지치셨습니다. 제사와 제의적 모임뿐 아니라 기도마저도 거절됩니다(15). 기도하는 자의 두 손이 이웃의 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무죄하게 흘린 피의 호소를 들어주시는 분이기에(창세기 4:10), 불의를 행한 자의 기도는 그분께 상달될 수 없습니다.

 

(3) 선행과 정의(16-17)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신앙을 제의 규정의 준수로 축소해버린 자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시는 대신 이들에게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성전예배 참석의 전제 조건이 제의적 정결에서 윤리적 정결로 바뀝니다(16). 제의에 참여하는 자는 악한 행실을 제거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윤리적 갱신을 끌어내지 못하는 기도와 제사(예배)는 그분이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숭배에 불과할 뿐입니다. 악에서 떠나 선행과 정의의 실천으로 나가야 합니다(17). 구체적으로,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과부를 위해 변호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가난한 자들의 보호자이시기에(신명기 10:18; 시편 68:5; 82:3-4; 146:9), 그분께 제사 드리는 자들은 이들의 법적 권리를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선택의 요청(18-20)

위기에 처한 공동체가 치유 받는 길은 행악을 그치고, 정의를 구하며, 약한 자를 대변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신앙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심각한 죄를 외면한 채, 종교 행위로 사소하게 다루려 하지 않습니까? 공평과 정의, 인애와 사랑만이 유일한 답니다.

 

18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19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18-20)

 

가망 없어 보이는 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손을 내미십니다. 회개하여 죄를 씻고 악한 행실을 버리고 행학을 그치고 다시 정의와 선행의 삶으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주홍 같은 죄라도 양털 같이 희게 해주실 거라고 약속하십니다.

 

(1) 여호와의 용서 의지(18)

 

선행과 정의의 실천은 하나님의 용서 의지에서 출발합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심판보다 구원을 원하시기에 죄에 물든 이스라엘에게 용서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됩니다. 죄로 파괴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화해가 그분이 값없이 주시는 용서에 의해 가능해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용서 의지에 긍정적으로 응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2) 순종의 결과(19)

 

이스라엘이 그분의 자기희생적 결단에 부응하여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고, 거절하고 자기 길을 가면 칼에 멸망당할 것입니다.

 

(3) 불순종의 결과(20)

 

여호와는 언약 전통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에게 축복(순종)과 저주(불복종)를 선택하라고 촉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참과 절망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백성을 남기십니다. 참회하지 않는 백성에게 ‘와서 서로 변론하자’며 초대하십니다. 긍휼을 구하는 이에게, 씻음과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만이 희망입니다. 기회 주실 때 서둘러 삶을 돌아보고 돌이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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