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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5-02)


유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이유

이사야 5장 18-30절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처럼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심도 그렇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심판을 내리시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가학적으로 학대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자기 백성을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는 항상 공의롭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내리실 화가 선포되는 대상의 신분이 본문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고발의 내용은 이들이 하나님 백성의 지배 계층에 속한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은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전면적이고 총체적이어서, 어디에서도 하나님 백성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화의 선포(18-24)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입니다. 얼마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가에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유리한대로 사용하면 멀어진 것입니다. 그 말씀을 진지하게 듣지 않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위로와 용서의 약속도 말씀해줍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18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19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 20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1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2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3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24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18-24)

 

유다에는 여러 악습이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첫 번째의 악습은 거짓이었습니다. 악을 선하다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죄악은 교만입니다. 스스로 잘난 체하고 지혜로운 척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죄악은 방탕함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포도주와 독주에 취해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했습니다.

 

(1) 세 번째 화의 선포(18-19)

 

세 번째 화의 선포 대상이 어떤 사회적 집단에 속한 자들인지는 불분명합니다. 구원사적 전통에 근거해 이사야의 심판 선포에 대놓고 맞서는 자들이기에 일반 백성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이사야는 심판 선포를 조롱하는 자들에게 단호하게 화를 선포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조롱하는 자들은 거짓의 끈으로 악과 죄를 끌어당기는 자들입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문은 달리 설명하지 않습니다. 19절에 따르면, 여호와를 구원의 하나님으로 주장하면서 백성을 멸망으로 이끄는 자들을 조롱하는 표현 같습니다. 이들은 수레의 줄을 당기듯 죄악을 끌어당겨 징벌을 자초합니다. 멸망을 피하려고 애쓰기는커녕 멸망에 떨어지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악과 죄를 끌어당기다’는 죄와 벌에 관한 이스라엘의 통합적 사고를 전제하는 표현입니다.

죄와 악에 이미 징계(벌)가 포함됐기에, 죄를 짓는 행위는 그 자체로 징계의 벌을 자초하는 행위가 됩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고,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이 징벌로 작용하게 됩니다. 예언의 즉각적 성취를 기대하는 자들에게 거듭 선포되는 이사야의 심판 예언은 거짓 예언처럼 보였습니다. 이들은 이사야가 참 예언자임을 인정할 수 있게 그가 선포한 대로 모든 일이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조롱합니다. 구원사적 전통에 매인 자들은 반복적 선포에서 사태의 위중함과 심판 의지를 거두시려는 하나님의 절박한 기다림을 읽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조롱거리로 삼았습니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도록 거듭 외치는 심판 메시지가 이들을 더 완악하게 만들어 선포된 심판을 되돌릴 수 없게 합니다.

 

(2) 네 번째 화의 선포(20)

 

네 번째 화의 선포도 그 대상이 불분명합니다. 이들은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어둠을 빛으로 만들고 빛을 어둠으로 만드는, 쓴 것을 단 것으로 만들고 단 것을 쓴 것으로 만드는 자들입니다. 사실이나 옳고 그름을 임의로 뒤바꿀 수 있는 힘(권력, 부, 지혜, 능력)을 가진 자들이기에 일반 사람은 아닙니다.

남에게 치명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들은 여러 집단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뇌물을 받고 법과 정의를 왜곡하고 불의한 자를 의인으로 죄 없는 사회경제적 약자를 죄인으로 판결하는 재판관을, 지혜문학과 관련하여 허황한 말만 번듯하게 하면서 속이는 자들을(잠언 26:24 이하; 28:24), 여호와의 가르침을 성전의 제의종교로 축소시키고 그분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주장하는 종교인들을, 여호와를 예루살렘 성전에 고립시키고 정치의 독립을 떠드는 왕궁의 통치자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단것과 쓴 것이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에 의지해서 공정하게 판단되지 않고, 집단의 이기적 목적과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됩니다.

 

(3) 다섯 번째 화의 선포: 자칭 지혜로운 자들(21)

 

다섯 번째 화는 지혜자들에게 선언됩니다. 이들은 자기지혜와 총명만으로 모든 일을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지혜자는 자기 분야의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가진 자로, 모든 분야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고발이 특히 왕궁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에게 집중되기에 왕의 관료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지혜의 전통적 이해에 따르면, 관료들은 다 지혜자가 됩니다. 지혜를 자랑하는 자들이 지혜의 근원이신 여호와께 의존하지 않고 자기 지혜에 의지해 정치를 합니다. 지혜자들의 어리석음이 나라를 멸망으로 이끕니다.

 

(4) 여섯 번째 화의 선포: 술에 용감한 자들(22-24)

 

두 번째 화의 선포와 주제가 연결됩니다. 이사야는 지배 계층에 속한 자들을 다시금 포도주와 독주에 빠져 사는 자들이라고 조롱합니다. ‘화가 있어라, 포도주를 마시는 데는 용사들이요 독주를 섞는 데는 용맹한자들!’ 유다의 용맹을 자랑하는 자들은 술자리에서 용맹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술 마시기에 용감하고 술에 관해 박식한 자들입니다. 맡겨진 직분과 역할에 관해서는 배우려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맛있고 독한 술을 빚을 수 있을지에 열심인 자들입니다. 법의 공정한집행이나 부당하게 위협당하는 자들의 권리 보호는 술과 향락에 빠진 자들의 안중에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술자리를 즐기는 데 필요한 뇌물뿐입니다. 이들은 뇌물을 받고 죄가 있는 자를 죄 없다고 선언하고, 죄가 없는 자에게서는 법적 권리를 박탈합니다. ‘이로 말미암아’(그러므로)로 시작하는 24절은 전체단락(8-23)을 맺는 절입니다. 이사야는 제 이익과 향락만 추구하는 지배 계층에게 일상적인 경험에 속하는 비유를 사용해 멸망을 선포합니다. 이들은 지푸라기처럼, 마른 풀처럼 심판의 불에 타 사라질 것입니다. 이들의 뿌리는 썩어서 죽고, 꽃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티끌(먼지)처럼 날려갑니다. 뿌리의 썩음과 꽃의 날아감은 이들의 멸망이 전면적일 것을, 온 집안이 완전히 멸절할 것을 시사합니다. 심판의 근거는 분명합니다. 이들이 여호와의 율법(가르침)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공동체의 연대를 짓밟아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은 제의적 차원을 넘어 윤리적 성격을 갖습니다. 그분의 거룩함은 불의한 자들에게 심판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에 그분의 백성도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곧 그분이 기대하시는 정의와 공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강한 군대에 의한 심판(25-30)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죽으나 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 준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이면 순종하는 바로 그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습관적으로 불순종하던 지난날을 회개하고 말씀을 몸소 행하시기 바랍니다.

 

25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들 위에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에 분토 같이 되었도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 26또 그가 기치를 세우시고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자기에게로 오게 하실 것이라 보라 그들이 빨리 달려올 것이로되 27그 중에 곤핍하여 넘어지는 자도 없을 것이며 조는 자나 자는 자도 없을 것이며 그들의 허리띠는 풀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들메끈은 끊어지지 아니하며 28그들의 화살은 날카롭고 모든 활은 당겨졌으며 그들의 말굽은 부싯돌 같고 병거 바퀴는 회오리바람 같을 것이며 29그들의 부르짖음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 그들의 소리지름은 어린 사자들과 같을 것이라 그들이 부르짖으며 먹이를 움켜 가져가 버려도 건질 자가 없으리로다 30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 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려서 어두우리라(25-30)

 

하나님께서는 부패한 백성을 불태워 버리기로 결정하십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 가운데 손을 들어 백성을 치시면 그들은 차목한 죽음과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1) 펼쳐진 여호와의 손(25)

 

25절은 연결구에 해당합니다.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분노를 쏟으실 때 산들이 흔들리고, 매장하지 못한 시체가 거리를 뒤덮습니다. 그분의 심판이 전면적이고 파국적으로 그분의 백성 위에 임합니다. ‘강한 손과 편팔’(신명기 4:34; 5:15; 7:19; 11:2)로 이스라엘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해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하여 팔을 뻗으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역사에 개입하셨던 분이 이스라엘의 심판자로 그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강하고 무서운 군대를 땅 끝에서 불러오신다. 그분의 명령에 따라 달려오는 군대는 먼 거리의 원정임에도 지치거나 졸거나 대오에서 이탈하는 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화살촉은 날카롭게 갈렸고 활시위는 팽팽하게 당겨졌고, 기병대와 병거는 거침없이 내달립니다. 사자가 포효하듯 함성을 내지르며 공격하는 이들의 손아귀에서 누구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먼 곳에서 불러오신 군대가 노호하는 바다처럼 ‘백성’을 덮칩니다. 빛마저 구름에 가려 어두워지고, 땅에는 오직 ‘흑암’과 고난을 뿐입니다. 침략군의 공격을 피해 몸을 숨길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2) 멀리서 오는 강한 군대(26-30)

 

26-30절은 땅 끝에서 불러오는 군대의 압도적 위용만 묘사할 뿐, 고도로 훈련받고 뛰어난 무기로 무장한 군대가 어느 나라 군대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원정을 떠나는 군대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싸움의 상대가 누구인지도, 군대를 불러오는 주체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호성은 초점을 심판의 철저함에 맞추려는 선포자의 의도에서 기인합니다. 누구도 먼 곳에서 올라오는 중무장한 군대의 공격에서 목숨을 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모호성은 다음 장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해결됩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군대를 불러 들포도를 맺은 당신의 포도원을 짓밟게 하십니다.


교회가 말씀을 소홀히 할 때, 영적 집중력을 잃고 무분별하게 됩니다. 위기의 단초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멈추는 데 있습니다. 말씀을 왜곡하거나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데 있습니다. 기뻐하실 열매를 바란다면 말씀을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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