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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8-01)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증조

이사야 8장 1-8절


 

여러 가지 일을 만날 때, 사건을 사건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또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일이 무엇인지 ...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도 사건을 자신의 시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복된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 7장처럼 아람과 에브라임이 연합하여 유다를 침략하려 했을 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큰 서판에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고 하시며, 그의 아들 이름도 그렇게 지으라 하십니다. 이는 다메섹과 사마리아가 앗수르왕에게 노략당할 것임을 뜻합니다. 유다 백성이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의지하니,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위력이 그들을 뒤덮게 하실 것입니다.

 

마헬살랄하스바스(1-4)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것, 귀한 믿음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바로 볼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길 원하고 계십니다.

 

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가지고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2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3내가 내 아내를 가까이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4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1-4)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약속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백성들은 날마다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따르고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표적행위(1-2)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큰 서판’을 취하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그 위에다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쓰라고 명령하시고, 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고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표적행위에 관한 명령만 나오고 실행 보고는 없습니다. 이사야가 여호와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판의 기록 목적은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성전이나 성문 주변의 공개적 장소에 세워놓으려고 큰 서판에 기록한 것 같습니다. 서판에 기록된 ‘마헬살랄하스바스’는 문자적으로 ‘신속히 약탈물-재빨리 – 노획물’입니다. 약탈과 노략을 당하는 대상을 모르기에 여호와께서 해석해주시기 전까지는 그 의미가 모호합니다. ‘통용 문자’로 번역한 단어는 문자적으로 ‘사람의 석필’입니다. 전통적으로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글자체로 이해하지만, 서판에 글자를 기록할 때 사용하는 도구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의 증인은 이스라엘의 사법 전통에 일치합니다(신명기 17:6; 19:15). 예루살렘 왕궁과 성전의 최고위층에 속한 자들이 증인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열왕기하 16:10-16에 의하면 제사장 우리야는 아하스가 통치할 때 예루살렘 성전의 최고 제사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아하스의 지침과 명령에 따라 다메섹의 제단을 모방해서 새 제단을 만들고 이전의 놋제단은 새 제단 북쪽에 옮겨놓았습니다.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가 열왕기하 18:2의 스가리야와 동일 인물이라면 그는 아하스의 장인이 됩니다.

‘진실한 증인’은 이들에 대한 여호와의 평가를 담은 표현이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인물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문맥에 더 가깝습니다. 표적행위와 관련해 증인이 세워지는 경우는 여기가 유일합니다. 일반적으로 표적행위는 공적 장소에서 행해지기에 증인이 필요 없습니다. 표적행위의 실행과 그 해석 사이의 시간적 간격 때문에 진실한 증인이 요청됩니다. 3-4절에 의하면 적어도 10개월이 지나서야 표적행위에 대한 해석이 주어집니다. 서판이 기록된 시점을 확실하게 증언해줄 수 있는 믿을 만한 증인이 필요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남아있을 때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멸망을 선포하시고, 그 말씀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도록 증인을 세우시고 있습니다.

 

(2) 아이의 출생과 이름(3)

 

새로운 사건을 보고해주는 3-4절은 아이의 이름에 의해 앞 단락에 연결되며, 표적행위를 해석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사야의 사적(私的) 사건이 여호와에 의해 공적(公的) 메시지가 됩니다.

이사야가 아내(여선지자)에게서 아들을 낳자 여호와께서 아이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지어주시고 그 의미도 해석해주십니다. 10개월 이상 모호하게 남았던 서판에 기록된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의미가 여호와의 계시로 밝혀집니다. 다메섹과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의해 ‘신속히 약탈물-재빨리 노획물’이 됩니다.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멸망이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전’(7:16)에서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으로 임박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갓 태어난 아이는 보통 1년이 되기 전에 ‘엄마, 아빠’를 부르게 됩니다. 임마누엘의 징조가 2-3년의 기간을 내다본다면, 이사야의 아들 ‘마헬살랄하스바스’에 따르면 1년도 안 돼 유다를 위협하는 아람과 에브라임이 멸망합니다.

‘앗수르 왕 앞에’는 승리의 행진을 전제합니다.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앗수르의 용사들이 다메섹과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약탈한 재물을 가지고 앗수르 왕 앞으로 자랑스럽게 행진할 것입니다.

 

유다까지 뒤덮는 대홍수 예언(5-8)

재난 영화를 보면 다가오는 재앙의 전조를 무시하다가 순식간에 위기에 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전에 경고하시고 전조를 주십니다. 안일에 빠진 이들이 그 사인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만이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5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7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8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5-8)

 

아람과 에브라임의 위기 때 선포된 네 번째 말씀입니다. 1-4절의 심판은 다메섹(아람)과 사마리아(북이스라엘)에 한정됐는데, 여기서는 심판의 범위가 에브라임을 넘어 유다로 확대됩니다.

 

(1) 고발(5-6)

 

6절의 이해는 ‘이 백성’과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달려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이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한다고 고발하십니다. 이미 이백 몇 십 년 전에 남북이 분열됐기에 이스라엘이 자기 왕을 기뻐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백성’이 유다 백성일 때만 고발은 남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백성’은 르신과 베가가 추진하는 반 앗수르 연합에 동조하는 자들입니다. 유다는 전통적으로 친애굽적이었기에 아하스의 친앗수르 정책에 반발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르신과 베가와 함께 앗수르에 맞설 것을 주장했습니다.

유다 백성이 버린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은 여호와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두 가지 근거에서 다윗 왕조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첫째, ‘실로아 물’과 ‘르신과 르말리아의 아들’이 비교의 대상이기에 둘은 같은 또는 대등한 범주에 속해야 합니다. 후자가 왕이라면 전자도 왕이어야 합니다. 둘째,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이 7절에서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에 대비되고, 8절에 따르면 후자에 의해 전자가 압도당합니다. 후자가 다윗 왕조일 때만 가능합니다. 세차게 넘쳐흐르는 큰 강과 잔잔히 흐르는 실로아 물은 각각 앗수르와 유다의 국력을 반영한 표현입니다.

 

(2) 심판언선(7-8a)

 

정리하자면,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일부가 다윗 왕조에 등을 돌리고 르신과 베가가 추진하던 반 앗수르 연합에 동조했습니다. 물론 친앗수르 노선을 따르는 자들이나 반앗수르 노선을 주장하는 자들이나 모두 여호와께 의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은 물론 유다도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과 그의 군대를 불러 먼저 다윗 왕조를 위협한 아람과 에브라임을 심판하십니다. 앗수르의 침략이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홍수에 비교됩니다(이사야 17:12-14; 예레미야 46:7; 51:42).

여호와께서 르신(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에브라임) 위로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티그리스 또는 유브라데)가 넘쳐흐르게 하십니다. 홍수가 땅을 뒤덮듯이 앗수르 군대가 아람과 에브라임을 뒤덮습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을 덮친 홍수가 계속 유다로 밀려들고 넘쳐흘러 범람하고 목에까지 차게 됩니다. 홍수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 아람과 에브라임과 달리 유다는 죽음 직전까지 내몰리지만, 그래도 목숨은 구합니다.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으로 함락의 위기에 처했던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극적인 간섭으로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습니다(29:1-8;37:36). 여호와께서는 아람과 에브라임을 주고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7:20)을 통해 유다의 불신앙을 혹독하게 징벌하십니다. 아하스의 불신앙 때문에 임마누엘의 징조가 구원(7:16)에서 심판(7:17)으로 옮겨지는 것처럼, 앗수르의 역할도 유다에 이중적입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를 불러 유다를 위협한 아람과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시고(8:4,7), 또 당신께 등을 돌리고 앗수르에 의존한 유다를 징계하십니다. 다윗 왕조와 그의 백성이 굳게 믿지 않기에 굳게 서지 못하고(7:9) 강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위기에 빠집니다.

 

(3) 펼친 날개(8b)

 

8절의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의 해석은 그의 이해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가 앗수르 왕을 가리킨다면, 넘쳐흐르는 홍수의 표상과 온 땅을 뒤덮는 펼쳐진 날개의 표상은 상호보완적입니다. 앗수르의 군대가 한 번은 유다 땅을 밑에서부터 뒤덮는 홍수로, 한 번은 하늘 위에서 먹이를 노리며 덮치는 거대한 새로 묘사됩니다. 날개를 활짝 펼치고 먹이를 노리는 새처럼 앗수르가 먹이를 찾아 유다를 침략합니다. ‘그’가 여호와를 가리킨다면, 유다의 심판이 유다의 구원으로 전환되는 반전을 볼 수 있습니다(29:5). 어미 새가 날개를 펴서 새끼 새들을 보호하듯이 여호와께서 날개를 펼쳐 당신 백성을 지켜주십니다(시편 17:8; 36:7; 57:1; 61:4; 91:4; 룻기 2:12).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에’(임마누엘) 앗수르의 침략은 위협적이지만 제한적입니다.


온 세상을 삼킬 듯 흉용하게 넘실거리며 흐르는 창수도 하나님 나라를 덮칠 수는 없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통제하시고 ‘잔잔하라’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그의 은혜의 날개 아래 거할 때만, 잔잔히 흐르는 맑고 깨끗한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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