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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8-02)


성도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

이사야 8장 9-22절


 

자크 엘륄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에서,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세상 속에 있더라도 세상에 속하거나 의존하는 자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으며 그 주인에 의하여 세상 속으로 보내진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보여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 예루살렘이 아람과 에브라임의 위협을 받을 때, 이사야는 거듭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끝까지 자기 길을 갔습니다. 이사의 선포가 결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사야는 실망했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그분의 마지막 답변이 아닌 것을 알기에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얼굴을 가리신 분께서 다시 얼굴을 드러내실 때를 기다립니다.

 

민족들의 심판(9-10)

열방은 힘을 합쳐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백성을 대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적들의 위협이 외형적으로 두려움의 대상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어떤 나라의 힘도 하나님을 능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사탄과 세상 나라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끊임없이 공격하겠지만 이기지 못하고 끝내 패망할 것입니다.

 

9너희 민족들아 함성을 질러 보아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10너희는 함께 계획하라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해 보아라 끝내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9-10)

 

다윗 왕조를 위협하던 아람과 에브라임과 여호와께 의지하기를 거절한 유다에 심판을 선포한 예언자는, 이제 민족들에게도 멸망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민족들은 여호와께서 아람과 에브라임과 유다를 침략하도록 불러오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7)입니다. 심판의 도구가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를 사용하여 예루살렘을 치시지만, 아람과 에브라임처럼 앗수르도 심판에 떨어집니다.

이사야는 민족들, ‘먼 나라 백성들’에게 무장을 하고 전쟁에 나서라고 부추기면서, 이들이 전쟁에서 패할 것을 선포합니다. 이들이 계획을 꾸미고 전략을 세운다 해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임마누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 민족들의 침략에서 하나님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나 다윗 왕조 신학이 구원의 보루가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만이 예루살렘의 안전을 보장해주십니다. 예루살렘을 침략해서 아하스를 제거하려는 르신과 베가의 계획이 저들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기에 반드시 실패로 끝나듯이(7:6-9a), 민족들의 계획도 여호와의 결정에 속하지 않는 계획이기에 반드시 실패합니다.

 

진정한 두려움의 대상(11-15)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반석이 되실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들에게는 그가 걸림돌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만 의지하고 기다리고 바라야 합니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곧 닥칠 침공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11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려 주시며 이 백성의 길로 가지 말 것을 내게 깨우쳐 이르시되 12이 백성이 반역자가 있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반역자가 있다고 하지 말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13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14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15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11-15)

 

이 본문은 앞부분에 이스라엘 민족이나 이사야 선지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사야와 그의 제자들과 같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1)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경고(11)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계시를 나타내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강한 손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을 통해서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직접 인도하심을 강조하십니다.

‘너희’에게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이사야는 여호와의 경고가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관해 간략하게 언급합니다. 6장에서 환상 중에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를 본 이사야는 여기서는 그분의 손에 붙잡힙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이사야에게 ‘이 백성의 길’을 따르지 말도록 경고하십니다. 이사야는 다른 길을 선택한 다수에 굴복하지 않고 예언자의 길, 곧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길을 가야 합니다.

 

(2) 이사야가 ‘너희’에게 주는 경고(12-13)

 

12-13절은 이사야가 너희에게 주는 권면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백성’(11)과 구별되는 자들로, 이사야의 선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입니다. 반역의 내용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기에 역사적 상황을 통해 추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하스의 친앗수르 정책을 비판하였던 이사야는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왕의 결정에 반대하는 자가 됐습니다. 당파적 이해에 사로잡힌 자들의 눈에 이사야와 그를 동조하는 자들은 반앗수르 정파를 추종하는 자들로 보였습니다. 이사야와 그의 지지자에게 반역자라는 의심스러운 시선이 쏠렸습니다. 이사야는 한편으로는 자신과 함께 반역자로 의심받는 지지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입장을 잘못 이해하여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반앗수르 노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지지자들에게 분명히 선을 그으면서 그러한 정치적 음모에 가담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만 거룩하다 하고, 그분만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분으로 삼아야 합니다. ‘너희’에게 반역자라는 혐의를 씌우는 자들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정치적 위기와 혼란은 실체 없는 두려움에 불과합니다. 여호와의 거룩함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분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행위이며 그분께 대한 철저한 복종으로 나타납니다. ‘성소’는 ‘여호와를 거룩하다 하는 자’에게만 구원의 장소가 됩니다.

 

(3) 걸림돌이 되신 여호와(14-15)

 

이사야는 14-15절에서 예루살렘 성전신학에 속한 개념과 표상을 사용해 여호와를 거절한 자들에게 심판을 선포합니다. 성소가 되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두 집에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고,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됩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반석으로 믿는 여호와께 걸려서 넘어집니다. 함정과 올무에서 구해주시는 분으로 믿는 여호와께 걸려 함정에 빠지고 올무에 걸립니다. 여호와를 오직 구원자로만 아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믿음이 그분을 심판자로 만듭니다. 여호와의 구원의지가 백성의 마음을 더욱 무디게 하고, 그들의 귀를 더욱 어둡게 하고 눈을 더욱 들러붙게 해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합니다(6:10).

이스라엘과 유다는 반석이신 여호와께 걸려 ‘비틀거리고 넘어져서 깨어지고 걸려들어 사로잡힌다.’ 15절에 사용된 다섯 개의 동사는 완전한 멸망보다는 파국의 심각성과 철저성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이스라엘의 심판자가 되셨기에 어디에서도 도움을 찾지 못합니다.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16-18)

성도들에게는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양 갈래 길 앞에서는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두 길을 동시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돈, 하나님과 사람,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 사이에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16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17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18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16-18)

 

이사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다도 결국 심판을 받습니다. 유다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그들의 실패는 곧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을 입증합니다.

 

(1) 봉합된 말씀(16)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증거의 말씀’을 묶고 ‘율법’(가르침)을 봉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증거(증언)와 율법(가르침)은 아람과 에브라임이 예루살렘을 위협할 때 선포된 예언들이며, 7-8장에 수집된 말씀들을 가리킵니다. 여호와를 무시하고 앗수르를 정치적 구원자로 선택한 아하스에게 말씀을 더 선포한다는 것이 무의미해졌습니다. 아하스와 그의 백성에 의해 거절당한 여호와의 말씀이 미래를 위해 보존됩니다. 다윗 집은 자기 능력을 과신하고 여호와의 약속과 경고를 무시했지만, 역사는 이들의 어리석음과 이사야가 선포한 말씀의 진정성을 입증해줄 것입니다.

 

(2) 여호와를 기다리는 이사야(17)

 

실망스러운 결과이기는 하지만 이사야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기다리기로 합니다. 여호와께서 심판을 집행하시는 것을 기다리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얼굴을 가리신 여호와’는 관계의 단절, 곧 심판을 의미하지만, 사용된 동사 ‘기다. 리다’와 ‘바라보다’는 구원을 기다린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풀어쓰자면, 이사야는 지금 얼굴을 가리신 여호와께서 다시 나타나시길 기다립니다. 그는 여호와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심판 이후에 있을 그분의 구원사적 개입을 내다봅니다.

 

(3) 징조가 된 이사야와 그의 아들(18)

 

이사야는 대담하게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그의 아들들이 징조와 예표로 등장하는 경우는 7:3(스알야숩)과 8:3-4(마헬살랄하스바스)에 나오고, 이사야의 경우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아들 스알야숩과 함께 아하스를 만나러 가는 7:3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름이 구원의 징조라면, 그의 아들들의 이름은 심판의 징조가 됩니다. 이사야는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여호와께서 다시 이사야의 여호와로 나타나시길 기다립니다. 야곱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다른 신탁을 구하는 자들(19-22)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황폐한 현실 속에서도 절망이 아닌 희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속삭임을 듣지 말고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르라 하시며, 말씀으로 세상을 분별하라 하십니다. 말씀에 굶주린 빈약한 자 되지 말고 말씀 안에서 강건할 것입니다.

 

19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20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21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22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16-22)

 

믿음을 상실하면 이성과 논리가 아닌 또 다른 믿음의 형태인 강신술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강신술은 거짓 신과 어둠의 영에 굴복하는 행위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초월적 존재에 기대려는 인간의 심성을 이용해 점집이 유행합니다.

 

(1) 거짓 신탁(19)

 

이스라엘은 당연히 하나님께 물어야 했는데, 혼합주의에 물든 자들은 가나안의 영향을 받아 죽은 자의 영에 의탁하여 점을 쳤습니다. 이들은 죽은 귀신(조상신)을 통해 얻어낸 구원신탁을 선포하면서 이사야를 따르는 자들을 압박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자신과 함께하는 자들에게 이들의 허황된 주장에 흔들리지 말도록 권면하고 경고합니다. 조상신이나 어떤 귀신에게서 도움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2) 이사야의 예언(20)

 

이사야를 통해 선포된 ‘율법과 증거’(가르침과 증언)만이 이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의 선포와 다른 말을 전하는 자들에게는 어둠과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3) 절망적 상황(21-22)

 

고난과 환난이 더해갈수록 이들의 악함도 더 심해집니다. 이들은 굶주릴 때 분노하며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합니다. 환난과 흑암과 고통이 이들의 배교에서 기인했음에도 이들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신다고 원망하고 그분을 저주합니다. 악해져만 가는 자들에게 구원의 빛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들의 완악한 마음이 멸망을 피할 수 없게 합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도, 땅을 내려다보아도 오직 고난과 무서운 어둠뿐입니다.


굶주린 사자 같은 세상에서 어린 양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가혹한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앞서가신 주님은 십자가로 악한 세상을 이기셨고 기쁘고 담대하게 주어진 길을 가셨습니다. 주님처럼,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의 영광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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