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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0-02)


오만과 착각으로 가득한 앗수르

이사야 10장 5-19절


 

앗수르는 오만해져 전쟁의 승리가 자신의 힘과 지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낱 도구에 불과한 자신들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를 탐합니다. 성공과 성취에 취하면 자칫 교만해져 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주권자 하나님 앞에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 앗수르는 여호와의 손에 들린 진노의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여호와께서는 앗수르를 불러 반역한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고 또 시온 산의 여호와를 찾지 않는 예루살렘과 유다를 징벌하십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여호와의 의도를 모른 채 자기 힘만 믿고 주변 나라들을 침략하고 파괴할 생각뿐입니다.

여호와의 진노의 막대기(5-14)

지나친 자신감은 자칫 자만과 교만과 오만함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고전 10:12)해야 합니다. 교만함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잘 나가고, 형통하고 만족스러울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세상의 뛰어난 지식과 능력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5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6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 7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8그가 이르기를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 9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10내 손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에 미쳤나니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들보다 뛰어났느니라 11내가 사마리아와 그의 우상들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의 우상들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하는도다 12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13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주한 자들을 낮추었으며 14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5-14)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나라들을 복속시키는 앗수르가 세상의 주권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심판하려고 세우신 몸통이요 막대기일 뿐입니다. 세상의 주권자와 경영자는 하나님뿐입니다.

 

(1) 앗수르에 대한 화 선언(5-7)

 

앗수르는 쉬지 않고 원정에 나서 민족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합니다. 이 앗수르에 여호와께서 직접 화를 선포하십니다. 앗수르는 자신의 한계와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절대 권력을 주장하며 신의 자리에 오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역사의 종속변수로, 홀로 땅의 역사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진노의 막대기’였고, 그 손의 몽둥이'는 그분의 ‘분노’였습니다(5).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통해 진노를 풀기로 하셨기에 앗수르가 휘두르는 몽둥이는 하나님의 분노의 구체적인 발현입니다. 막대기와 몽둥이는 통치자의 권력을 상징하는 홀을 가리키는데, 이 경우 앗수르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6:1) 여호와의 손에 들린 홀이 됩니다. 당신 백성의 불순종에 진노하신 여호와께서 앗수르를 심판의 집행자로 택하셔서 이들을 마음껏 약탈하고 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셨습니다(6).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와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은 일차적으로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키지만, 여호와를 배반하고 노엽게 했다는 점에서 유다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자신이 여호와의 도구로 선택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민족들을 멸망시켰습니다(7).

 

(2) 앗수르의 교만(8-14)

 

앗수르의 유일한 관심사는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약탈하는 것이었습니다. 앗수르는 자신을 역사의 주인으로 내세우고 민족들의 운명을 자의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이사야가 앗수르왕의 말을 직접 인용해 그의 교만과 방자함을 고발합니다(8-11).

압도적인 군사력과 잔혹함으로 주변 나라들을 두려움에 빠뜨렸기에 앗수르 왕의 주장은 허풍이 아니었습니다. 무섭게 진격하는 앗수르 군대 앞에 많은 나라가 성문을 열고 항복했습니다. 앗수르 왕은 항복한 왕들에게는 계속 왕의 지위를 허락했습니다. 이들은 앗수르 왕의 제후가 되어 이전의 영토를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끝까지 저항한 나라들은 참혹하게 보복하였고 앗수르의 한 지방으로 편입됐습니다. 시리아 북쪽 지역에 있던 갈로는 주전 738년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 정복됐고, 유브라데 강 중류에 위치한 헷 족속의 성읍이었던 갈그미스는 주전 717년에 함락되어 앗수르의 한 지방으로 편입됐습니다. 오론테스 강가에 위치한 하맛은 앗수르에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주전 720년 반기를 들었다가 정복당했습니다. 아르밧은 주전 720년 하맛이 주도한 봉기에 가담했다가 같은 운명에 떨어졌습니다. 반앗수르 연합의 주도 세력이었던 다메섹은 주전 732년 디글랏 빌레셀에 정복당하고 폐허가 됐습니다. 주전 733년 영토의 상당 부분을 빼앗겼던 에브라임은 주전 722년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한 사마리아의 함락으로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앗수르의 승리는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들이 섬기던 신들의 실체를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이사야는 앗수르왕의 교만한 입을 빌려 민족들의 신을 헛것으로 고발합니다. 민족들의 신들은 앗수르의 막강한 군대 앞에서 자신들의 무능력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숭배자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앗수르에 의한 민족들의 점령은 우상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교육적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우상을 숭배합니다. 멸망한 사마리아를 포함한 주변 나라들의 비극적 운명을 타산지석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의 멸망에서 우상숭배의 필연적 결과를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예루살렘은 사마리아의 길을 갔습니다. 교만한 앗수르 왕의 눈에는 예루살렘의 여호와도 우상들 가운데 하나로 보였습니다. ‘내가 사마리아와 그의 우상들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의 우상들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11). 앗수르의 교만이 여호와를 역사의 무대 안으로 불러들입니다. 여호와께서 갈림길에 놓이십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앗수르에 정복당한 우상들과 전혀 다른 존재임을 보여주기로 하십니다. 시온과 예루살렘의 징계가 끝나면, 제 역할을 부정하고 교만에 사로잡혀 절대 권력을 주장한 앗수르 왕을 여호와께서 징벌하실 것입니다(12). 앗수르의 심판이 여호와의 계획으로 확정됩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함 때문에 앗수르가 벌을 받습니다.

 

다시금 직접 인용을 통해 앗수르의 교만을 고발합니다(13-14). 8-9절에서 정복 전쟁의 승리를 떠벌린 앗수르 왕은 제 능력을 노골적으로 과시합니다. 그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민족들을 정복했다고 자랑합니다. 열국의 경계를 걷어치웠고는 앗수르의 강제이주 정책과 관련한 언급입니다. 앗수르는 정복한 민족들을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그곳에 다른 피정복 민족들을 옮겨 정착시켰습니다. 민족들이 서로 뒤섞여 살면서 고유성과 정체성을 상실했습니다. 앗수르는 정복한 민족의 약탈과 경제적 착취로도 유명했습니다. 앗수르는 새 둥지에서 알을 거두어들이는 자처럼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마치 버려진 알을 줍듯이 온 세상의 나라들을 정복하고 성읍들을 마음껏 약탈했습니다. 힘이 압도적이고 잔혹해서 감히 누구도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놀란 새가 날개를 치지도, 주둥이를 벌려 지저귀지도 못하듯이, 앗수르의 침략 앞에 모든 나라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망연자실할 뿐이었습니다.

 

앗수르의 심판(15-19)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높일 때, 그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반항이고, 하나님에 대해 대적하는 행위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이 다른 이에게 돌아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교만과 오만에 대해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 내가 이때까지 자랑했던 나의 힘과 영광은 모두 소멸 되어질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15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16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진 자를 파리하게 하시며 그의 영화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17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는 불꽃이 되실 것이니라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18그의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자가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19그의 숲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수할 수 있으리라(15-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실 것입니다. 누가 진정한 주권자인지 드러내실 것입니다. 도끼가 도끼 쥔 자를, 톱이 톱 쥔 자를 향하여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 소리를 해왔는지 알게 될 만큼 철저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1) 앗수르의 오만(15)

 

이사야는 잘 알려진 격언 또는 비유를 사용해 앗수르 왕의 한계를 훨씬 넘은 오만함을 고발합니다. 그의 교만과 자랑은 마치 도끼가 그 도끼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톱이 그 톱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뽐내며 으스대는 것과 같습니다(15). 도끼와 톱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의 의지에 종속된 도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앗수르의 행태는 사람의 손에 들린 도구에 불과한 막대기나 몽둥이가 이를 사용하는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습니다. 도구가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의 의지를 거슬러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권력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도구로, 그분께서 맡긴 역할을 담당할 뿐입니다. 그분께서 자족할 줄 모르고 절대 권력에 도취해 신의 자리에 오르려는 앗수르의 교만에 종지부를 찍으십니다.

 

(2) 심판 선포(16-19)

 

여호와께서 기름진 것에 병을 보내어 파리하게 만드시고, 자랑스러운 영화를 맹렬한 불로 태워 없애실 것입니다(16). ‘살진 자’(기름진 것)는 멸망한 민족들의 재물로 기름진 삶을 사는 앗수르 사람들을, ‘영화’는 앗수르의 군사적 승리가 가져다준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번영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심판의 불을 보내실 뿐 아니라 당신께서 직접 불이 되셔서 앗수르를 한순간에 태워버리십니다(17). ‘이스라엘의 빛’은 여기에만 나오지만, 유사한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됩니다(이사야 2:5; 60:1; 미가 7:8; 시편 27:1).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자 보호자이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진멸하는 불이 되십니다. 병행하는 그의 거룩하신 이도 유사하게 이중적 의미를 갖습니다. 거룩하신 분이 당신 백성을 위해 역사에 개입하실 때 적들에게는 파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분의 심판이 앗수르를 하루 사이에 멸망시킵니다. 모든 나라를 발아래 굴복시키고 무한 권력을 휘두르던 앗수르가 갑자기 잿더미가 됩니다. ‘그의 가시와 찔레’는 의도적으로 선택된 표현 같습니다. 가시와 찔레는 무용한 식물로 불쏘시개로나 사용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의 역할을 거절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존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시와 찔레에 불과합니다. 그분의 의지에 반하여 자신을 주장하는 자는 잘려 불에 던져질 뿐입니다. ‘숲과 기름진 밭’의 비유도 유사합니다(18). 숲과 과수원에 불이 나면 다 타고 꺼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앗수르도 남김없이 멸망에 넘겨집니다. ‘전부’는 문자적으로는 ‘영혼에서 육체까지’로 앗수르는 회복이 불가능하게 파괴된다. 숲이 불타고 나면 듬성듬성 몇 그루의 나무만 운 좋게 살아남는 것처럼 앗수르의 운명도 그러할 것입니다(19). 아직 셈할 줄 모르는 아이도 어렵지 않게 남은 나무를 셀 수 있을 정도로 극히 일부가 심판에서 살아남습니다. 앗수르는 최소한의 흔적만 남고 철저하게 멸망합니다.


앗수르는 무자비한 파괴와 약탈로 몸집을 불렀고, 찔레와 가시의 통치로 그 영화를 재로 만드실 것입니다. 공의를 저버린 권력은 결국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됩니다. 주권자 하나님을 믿고, 세상의 번영보다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시선을 두고, 세상의 번영보다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시선을 두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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