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28-01)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재앙
이사야 28장 1-13절
사람들이 망하는 길로 갈 때, 어느 쯤엔가 자신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을 알까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망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망하는 길을 피할 방법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가는 망하는 길을 피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은 자가 될 비결은 무엇입니까?
- 민족들의 신탁이 끝나고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가 선포의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28-39장에 수집된 말씀들은 대부분 히스기야 때 선포된 예언입니다. 아하스 시대처럼 그의 아들 히스기야 시대도 앗수르가 중심 주제가 됩니다. 차이가 있다면, 아하스는 앗수르에 의존하는 길을 선택했고, 히스기야는 애굽의 도움을 기대하고 앗수르에 적대적 길을 갖다는 점입니다.
사마리아의 몰락에 대한 경고(1-6)
믿는 자들에게 진정한 ‘면류관’과 ‘화관’과 ‘판결하는 신’과 ‘힘’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사마리아’ 곧 이 세상에 속한 영광을 자신의 면류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판의 날에 ‘헛 것’으로 판명되고 땅에 떨어져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면류관은 하나님뿐입니다.
1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2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4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5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6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1-6)
이 예언의 메시지는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기 직전의 시기에 선포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앗수르는 디글랏 벨레셀 3세(주전 745-727)가 죽고, 살만에셀 5세(주전 727-722)가 즉위하면서 더욱 야심만만하게 제국의 영토를 확장해 나가면서 특별히 지중해 쪽으로 뻗어나가는 서진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북왕국 사마리아는 언제 침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있었습니다.
(1) 술 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1-4)
북왕국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아하스 통치 말기 또는 히스기야 통치 초반에 선포한 예언이 됩니다.
이사야 1-12장에는 주로 아하스 시대의 예언이, 28-39장에는 히스기야 시대의 예언이 수집돼 있습니다(참조. 14:28). 사마리아의 몰락을 선포한 예언이 히스기야가 통치할 때 선포한 예루살렘과 유다의 심판 예언 첫머리에 놓입니다.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이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을 위협할 때(주전 734-732년), 유다 왕 아하스는 이사야를 통해 전달된 구원 예언(7-8장)을 거절하고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 의존하여 생존을 도모했고, 히스기야는 아버지가 씌워놓은 앗수르의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해 애굽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사야는 동일한 신학적 입장에서 히스기야의 반앗수르 정책도 비판했습니다. 다윗 왕조의 신학적 초석인 여호와를 버리고 강대국(애급)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히스기야는 강대국(앗수르)에 의존한 아버지 아하스와 차이가 없었습니다.
현재 문맥에서 1-4절은 사마리아의 몰락에서 배우기를 거절하고 유사한 길을 가는 예루살렘을 향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강대국에 의존한다면 유다의 운명은 에브라임의 운명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멸망 예언이 그대로 이뤄졌다면, 예루살렘의 멸망 예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의 보호자이신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언자는 기름진 골짜기의 높은 산지에 위치한 사마리아를 면류관에 비유해 그 교단과 술취함에 화를 선포합니다(1). 사마리아는 ‘기름진 골짜기’의 풍요로운 생산물을 독점하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습니다. 에브라임을 다스리는 자들은 ‘술에 빠진 자들’로, 권력과 부가 가져다주는 오만과 사치를 즐기기에만 열중하였고, 법과 질서와 백성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골짜기에 둘러싸인 사마리아가 외부의 침략에서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줄 것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주정뱅이의 눈에는 ‘영화로운 관’처럼 보이지만, 사마리아는 ‘쇠잔해가는 꽃’이었습니다. 화려함은 겉모습에 불과할 뿐 시들어 죽어가는 꽃이었습니다. 멸망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하고 힘 있는 자’를 불러 에브라임이 자랑하는 면류관을 땅바닥에 던져버리게 하실 것입니다(2).
앗수르가 사납게 퍼부어대는 우박처럼, 휘몰아치는 광풍처럼, 넘쳐흐르는 거대한 물처럼 북왕국을 덮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킵니다. 외적 화려함을 자랑하던 면류관(사마리아)이 침략자들의 발에 철저하게 유린당합니다(3). 정치가들의 자만과 무능력이 사마리아를 멸망에 떨어뜨립니다. 영화가 다해가는 사마리아를 비유하는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4)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먼저 시선을 끌 만한 사마리아의 매력을 시사합니다.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입안에 군침이 돌게 하는 수확 전에 익은 무화과처럼 사마리아는 누구나 욕심을 낼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이는 사마리아의 약함도 보여줍니다. 처음 익은 무화과가 흔들기만 해도 떨어지듯 사마리아의 멸망도 그러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침략군이기에 골짜기가 사마리아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2) 남은 자에게 주는 약속(5-6)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된 이사야의 메시는 재앙 중에서도 한편으로 축복이 선포되었고, 신판의 사이사이에 구워느이 약속이 있었으며, 징계당할 것이지만 회복될 것이며, 멸망 중에서도 반드시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을 말했습니다.
본문에 ‘영화로운 면류관’이 앞 단락과 연결해줍니다. 하나님 백성이 의지해야 할 영화로운 면류관은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여호와임을 가르쳐줍니다. 골짜기 꼭대기에 자리 잡아 난공불락처럼 보였지만,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은 땅에 떨어진 면류관 신세가 되었습니다. 서두의 ‘그 날에’는 사마리아의 멸망과 남은 자의 구원의 동시성보다 두 사건의 대조적 성격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앗수르를 사용해 사마리아를 멸망시키시는 여호와께서 미래에 당신 백성의 남은 지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들의 영화로운 면류관과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더는 권력과 풍요에 빠져 교만해지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 의지합니다.
여호와께서 재판하는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을, 성문에서 침략자와 맞서 싸우는 전사에게는 ‘힘’을 주십니다. 그분의 영이 불의한 재판과 전쟁의 위협에서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자기 백성의 남은 자’는 가까운 문맥에서는 에브라임의 남은 자를 가리키고, 넓은 문맥에서는 같은 운명에 떨어지는 유다의 남은 자도 포함합니다. ‘여호와의 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치는 그분의 적극적 영향력을 가리킵니다.
이사야를 조롱하는 자들(7-13)
가르치는 지도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을 귀를 갖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진리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은 오직 특권만을 향유하려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겸손과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다의 영적 지도자들은 방탕과 교만에 빠져 이사야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을 조롱하고 무시했습니다.
7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8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9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10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11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12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13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7-13)
선지자는 더욱 안타까워한 것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타락이 길을 걷고 있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문제점과 죄악 중에서도 특히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타협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향해 경고합니다.
(1) 제사장과 선지자에 대한 고발(7-8)
이사야가 시선을 돌려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예언자를 주정뱅이로 조롱하며 이들의 무능력과 태만을 고발합니다(7-8). 이들은 직분에는 관심이 없고 포도주와 독주를 즐기며 술독에 빠져 삽니다. 상마다 토한 것과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여 깨끗한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대변하는 자들이 술에 취해 환상을 보고 판결을 내립니다.
예언자는 잘못된 선포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고, 제사장은 잘못된 판결로 무죄한 자의 생명을 빼앗습니다. 원래 예언자는 신탁과 환상을 매개로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고, 제사장은 제의를 주관하고 율법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특별한 경우 사법적 결정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2) 이사야의 선포를 조롱하는 자들(9-10)
이사야에 의해 주정뱅이로 고발당한 예루살렘 제사장과 예언자가 반격합니다(9-10). ‘(하나님에게서 나온) 지식’을 가르치는 일은 제사장의, ‘도’(들은 것.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은 예언자의 고유한 임무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제사장과 선지자가 된 예루살렘의 종교 집단은 자신들을 가르치려는 이사야에게 분노합니다. 아마도 종교 문제의 전문가로 자처할 뿐만 아니라, 인정을 받았던 이들은 이사야의 선포와 태도에서 직업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이사야의 지식과 도를 패러디해 조롱합니다. “정말로 저자는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저에르 샴 저에르 샴’하고 떠들어대는구나.”
자칭 전문가들의 귀에 이사야의 선포는 어린아이에게 알파벳이나 가르치기에 적당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예언은 언제나 비슷비슷한 소리로, 때로는 이렇게 말하기도 때로는 저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사야가 고발과 심판의 말씀을 거듭 선포했고, 때로는 구원의 말씀도 선포했기에 저들의 조롱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반복적 선포는 듣는 자들의 완악함, 곧 하나님 심판의 정당성을 반증해주기도 합니다. 거절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포기하지 않고 거듭 하나님의 의지를 외쳤기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 결정을 몰랐다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3) 여호와의 심판 선포(11-13)
이사야는 자신의 말을 의미 없는 반복으로 조롱하는 자들에게 이방 민족에 의한 멸망을 선언합니다(11-13). 예언자의 선포를 웅얼거리는 소리로 듣는 유다 백성은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의 언어처럼 듣는 자들에게 진짜 이방의 언어를 듣는 심판이 선포됩니다.
심판이 제사장과 예언자 대신 ‘이 백성’에게 선포됩니다. 영적 지도자들의 부패와 무능력이 백성을 오염시켰습니다. 백성도 이사야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참된 안식과 상쾌함을 누리기를 바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으신 그분께서는(왕상 8:13) 제사장과 예언자에게 특히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라고 명령하셨지만, 누구보다도 그분 명령에 충실해야 할 자들이 명령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예언자를 젖을 뗀 아이에게나 가서 가르치라고 조롱하는 자들은 이제 그들이 말했던 것을 그대로 경험합니다. 이사야의 선포를 이방인의 언어처럼 듣는 자들은 정말로 이방인의 말을 듣게 됩니다. 모두 사로잡혀 수치와 두려움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떠드는 정복자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자랑해서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성공한 삶, 남보다 똑똑한 것, 자녀가 잘된 것 등을 자랑하는 마음에서 교만이 싹틉니다. 삶이 좋아져도 마음은 낮아져야 하고, 삶이 어렵다면 더 겸손히 주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교만하면 망합니다. 말씀을 가까이해서 교만을 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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