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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8-01)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재앙

이사야 28장 1-13절


 

사람들이 망하는 길로 갈 때, 어느 쯤엔가 자신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을 알까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망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망하는 길을 피할 방법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가는 망하는 길을 피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은 자가 될 비결은 무엇입니까?

 

  • 민족들의 신탁이 끝나고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가 선포의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28-39장에 수집된 말씀들은 대부분 히스기야 때 선포된 예언입니다. 아하스 시대처럼 그의 아들 히스기야 시대도 앗수르가 중심 주제가 됩니다. 차이가 있다면, 아하스는 앗수르에 의존하는 길을 선택했고, 히스기야는 애굽의 도움을 기대하고 앗수르에 적대적 길을 갖다는 점입니다.

 

사마리아의 몰락에 대한 경고(1-6)

믿는 자들에게 진정한 ‘면류관’과 ‘화관’과 ‘판결하는 신’과 ‘힘’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사마리아’ 곧 이 세상에 속한 영광을 자신의 면류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판의 날에 ‘헛 것’으로 판명되고 땅에 떨어져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면류관은 하나님뿐입니다.

 

1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2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4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5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6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1-6)

 

이 예언의 메시지는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기 직전의 시기에 선포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앗수르는 디글랏 벨레셀 3세(주전 745-727)가 죽고, 살만에셀 5세(주전 727-722)가 즉위하면서 더욱 야심만만하게 제국의 영토를 확장해 나가면서 특별히 지중해 쪽으로 뻗어나가는 서진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북왕국 사마리아는 언제 침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있었습니다.

 

(1) 술 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1-4)

 

북왕국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아하스 통치 말기 또는 히스기야 통치 초반에 선포한 예언이 됩니다.

이사야 1-12장에는 주로 아하스 시대의 예언이, 28-39장에는 히스기야 시대의 예언이 수집돼 있습니다(참조. 14:28). 사마리아의 몰락을 선포한 예언이 히스기야가 통치할 때 선포한 예루살렘과 유다의 심판 예언 첫머리에 놓입니다.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이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을 위협할 때(주전 734-732년), 유다 왕 아하스는 이사야를 통해 전달된 구원 예언(7-8장)을 거절하고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 의존하여 생존을 도모했고, 히스기야는 아버지가 씌워놓은 앗수르의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해 애굽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사야는 동일한 신학적 입장에서 히스기야의 반앗수르 정책도 비판했습니다. 다윗 왕조의 신학적 초석인 여호와를 버리고 강대국(애급)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히스기야는 강대국(앗수르)에 의존한 아버지 아하스와 차이가 없었습니다.

현재 문맥에서 1-4절은 사마리아의 몰락에서 배우기를 거절하고 유사한 길을 가는 예루살렘을 향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강대국에 의존한다면 유다의 운명은 에브라임의 운명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멸망 예언이 그대로 이뤄졌다면, 예루살렘의 멸망 예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의 보호자이신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언자는 기름진 골짜기의 높은 산지에 위치한 사마리아를 면류관에 비유해 그 교단과 술취함에 화를 선포합니다(1). 사마리아는 ‘기름진 골짜기’의 풍요로운 생산물을 독점하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습니다. 에브라임을 다스리는 자들은 ‘술에 빠진 자들’로, 권력과 부가 가져다주는 오만과 사치를 즐기기에만 열중하였고, 법과 질서와 백성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골짜기에 둘러싸인 사마리아가 외부의 침략에서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줄 것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주정뱅이의 눈에는 ‘영화로운 관’처럼 보이지만, 사마리아는 ‘쇠잔해가는 꽃’이었습니다. 화려함은 겉모습에 불과할 뿐 시들어 죽어가는 꽃이었습니다. 멸망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하고 힘 있는 자’를 불러 에브라임이 자랑하는 면류관을 땅바닥에 던져버리게 하실 것입니다(2).

앗수르가 사납게 퍼부어대는 우박처럼, 휘몰아치는 광풍처럼, 넘쳐흐르는 거대한 물처럼 북왕국을 덮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킵니다. 외적 화려함을 자랑하던 면류관(사마리아)이 침략자들의 발에 철저하게 유린당합니다(3). 정치가들의 자만과 무능력이 사마리아를 멸망에 떨어뜨립니다. 영화가 다해가는 사마리아를 비유하는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4)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먼저 시선을 끌 만한 사마리아의 매력을 시사합니다.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입안에 군침이 돌게 하는 수확 전에 익은 무화과처럼 사마리아는 누구나 욕심을 낼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이는 사마리아의 약함도 보여줍니다. 처음 익은 무화과가 흔들기만 해도 떨어지듯 사마리아의 멸망도 그러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침략군이기에 골짜기가 사마리아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2) 남은 자에게 주는 약속(5-6)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된 이사야의 메시는 재앙 중에서도 한편으로 축복이 선포되었고, 신판의 사이사이에 구워느이 약속이 있었으며, 징계당할 것이지만 회복될 것이며, 멸망 중에서도 반드시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을 말했습니다.

본문에 ‘영화로운 면류관’이 앞 단락과 연결해줍니다. 하나님 백성이 의지해야 할 영화로운 면류관은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여호와임을 가르쳐줍니다. 골짜기 꼭대기에 자리 잡아 난공불락처럼 보였지만,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은 땅에 떨어진 면류관 신세가 되었습니다. 서두의 ‘그 날에’는 사마리아의 멸망과 남은 자의 구원의 동시성보다 두 사건의 대조적 성격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앗수르를 사용해 사마리아를 멸망시키시는 여호와께서 미래에 당신 백성의 남은 지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들의 영화로운 면류관과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더는 권력과 풍요에 빠져 교만해지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 의지합니다.

여호와께서 재판하는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을, 성문에서 침략자와 맞서 싸우는 전사에게는 ‘힘’을 주십니다. 그분의 영이 불의한 재판과 전쟁의 위협에서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자기 백성의 남은 자’는 가까운 문맥에서는 에브라임의 남은 자를 가리키고, 넓은 문맥에서는 같은 운명에 떨어지는 유다의 남은 자도 포함합니다. ‘여호와의 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치는 그분의 적극적 영향력을 가리킵니다.

 

이사야를 조롱하는 자들(7-13)

가르치는 지도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을 귀를 갖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진리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은 오직 특권만을 향유하려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겸손과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다의 영적 지도자들은 방탕과 교만에 빠져 이사야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을 조롱하고 무시했습니다.

 

7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8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9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10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11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12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13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7-13)

 

선지자는 더욱 안타까워한 것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타락이 길을 걷고 있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문제점과 죄악 중에서도 특히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타협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향해 경고합니다.

 

(1) 제사장과 선지자에 대한 고발(7-8)

 

이사야가 시선을 돌려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예언자를 주정뱅이로 조롱하며 이들의 무능력과 태만을 고발합니다(7-8). 이들은 직분에는 관심이 없고 포도주와 독주를 즐기며 술독에 빠져 삽니다. 상마다 토한 것과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여 깨끗한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대변하는 자들이 술에 취해 환상을 보고 판결을 내립니다.

예언자는 잘못된 선포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고, 제사장은 잘못된 판결로 무죄한 자의 생명을 빼앗습니다. 원래 예언자는 신탁과 환상을 매개로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고, 제사장은 제의를 주관하고 율법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특별한 경우 사법적 결정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2) 이사야의 선포를 조롱하는 자들(9-10)

 

이사야에 의해 주정뱅이로 고발당한 예루살렘 제사장과 예언자가 반격합니다(9-10). ‘(하나님에게서 나온) 지식’을 가르치는 일은 제사장의, ‘도’(들은 것.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은 예언자의 고유한 임무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제사장과 선지자가 된 예루살렘의 종교 집단은 자신들을 가르치려는 이사야에게 분노합니다. 아마도 종교 문제의 전문가로 자처할 뿐만 아니라, 인정을 받았던 이들은 이사야의 선포와 태도에서 직업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이사야의 지식과 도를 패러디해 조롱합니다. “정말로 저자는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저에르 샴 저에르 샴’하고 떠들어대는구나.”

자칭 전문가들의 귀에 이사야의 선포는 어린아이에게 알파벳이나 가르치기에 적당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예언은 언제나 비슷비슷한 소리로, 때로는 이렇게 말하기도 때로는 저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사야가 고발과 심판의 말씀을 거듭 선포했고, 때로는 구원의 말씀도 선포했기에 저들의 조롱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반복적 선포는 듣는 자들의 완악함, 곧 하나님 심판의 정당성을 반증해주기도 합니다. 거절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포기하지 않고 거듭 하나님의 의지를 외쳤기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 결정을 몰랐다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3) 여호와의 심판 선포(11-13)

 

이사야는 자신의 말을 의미 없는 반복으로 조롱하는 자들에게 이방 민족에 의한 멸망을 선언합니다(11-13). 예언자의 선포를 웅얼거리는 소리로 듣는 유다 백성은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의 언어처럼 듣는 자들에게 진짜 이방의 언어를 듣는 심판이 선포됩니다.

심판이 제사장과 예언자 대신 ‘이 백성’에게 선포됩니다. 영적 지도자들의 부패와 무능력이 백성을 오염시켰습니다. 백성도 이사야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참된 안식과 상쾌함을 누리기를 바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으신 그분께서는(왕상 8:13) 제사장과 예언자에게 특히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라고 명령하셨지만, 누구보다도 그분 명령에 충실해야 할 자들이 명령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예언자를 젖을 뗀 아이에게나 가서 가르치라고 조롱하는 자들은 이제 그들이 말했던 것을 그대로 경험합니다. 이사야의 선포를 이방인의 언어처럼 듣는 자들은 정말로 이방인의 말을 듣게 됩니다. 모두 사로잡혀 수치와 두려움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떠드는 정복자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자랑해서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성공한 삶, 남보다 똑똑한 것, 자녀가 잘된 것 등을 자랑하는 마음에서 교만이 싹틉니다. 삶이 좋아져도 마음은 낮아져야 하고, 삶이 어렵다면 더 겸손히 주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교만하면 망합니다. 말씀을 가까이해서 교만을 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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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7-01)

 


아름다운 포도원의 노래

이사야 27장 2-13절


 

삶은 아픔을 수반합니다. 성공과 승리를 얻기 위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때 기억해야 할 것은 주의 백성에게는 최종적으로 승리가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종적 승리는 무엇이며 승리의 과정과 목적은 무엇입니까?

 

 

  • 여호와께서 땅의 죄악과 혼돈의 세력을 벌하시는 종말론적 심판(26:21-27:1)이 하나님 백성에게는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야곱을 지섰던 분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흩어진 자들을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으실 것입니다. 당신 포도원을 훼파하셨던 분께서 구원자로서 포도원을 밤낮으로 안전하게 보살펴주실 것입니다.

 

포도원의 새 노래(2-6)

하나님께서 교회와 믿는 자들의 포도원지기가 되어 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든든한 일이겠습니까? 사단의 세력이 믿는 자들을 실족시키지 못하고 교회를 이길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포도원지기가 되셔서 정성껏 돌보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최종적으로 번성하고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현재의 부족함과 결핍을 보고 안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2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3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 4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찔레와 가시가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5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와 화친할 것이니라 6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을 채우리로다(2-6)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포도원에 비유한 ‘포도원 노래’는 5:1-7 부분에서 이미 언급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포도원 노리와 본문의 노래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현격하게 다릅니다. 먼저 5장은 거대한 열매를 맺지 못한 포도원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말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는 포도원의 결실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1) 아름다운 포도원(2)

 

포도원의 비유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불의와 불법을 고발하고 심판을 선포했던(5:1-7) 이사야가 같은 비유로 구원 시대를 선포합니다. 현재 문맥에서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땅의 거민의 죄악’과 혼돈의 세력을 벌하시는 때(26:21-27:1)를 가리킵니다. 땅을 심판하시는 목적이 하나님 백성의 구원에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예언자의 심판선언이 공동체의 찬양으로 전환됩니다. 포도원을 한정하는 ‘아름다운’(참조, 32:12; 암5:11)은 내용상 5:1의 포도원이 마련된 ‘산’을 한정하는 ‘기름진’에 상응합니다. 아름다움은 포도원에 내재한 속성이나 특징을 보여주는 표현이 아닙니다. 여호와께 속했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포도원입니다.

 

(2) 포도원지기 여호와(3-5)

 

여호와께서 직접 포도원지기가 되어 포도나무에 물을 주시고 아무도 해하지 못하게 밤낮으로 지켜주십니다(3). 포도원에 원두막 대신 망대를 세우셨던(5:2) 여호와께서 밤낮으로 함께하시며 포도원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고 해가 되는 것부터 포도원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밤낮으로 간수 하여’는 내용상 4:5의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과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에 상합니다. 구름에 명하여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셨던 여호와께서 포도나무가 시들지 않게 그대그대 물을 주십니다. 기름진 산에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좋은 포도가 맺히기를 기다리다가 실망하셨던 여호와께서 포도나무가 잘 자라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도록 하나하나 직접 돌보십니다. 좋은 포도(정의와 공의)를 맺은 포도원에 진노하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성내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4). 진노의 시대가 끝나고 구원과 축복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찔레와 가시’가 발견되면 여호와께서 맞서 싸워 그것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리실 것입니다. 찔레와 가시가 5:6에서는 심판으로 황폐해진 포도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참조.7:23-24), 여기서는 여호와의 포도원을 해하려는 적의 표상으로 사용됩니다(참조. 9:18; 10:17).

당신 포도원을 적에게 넘겨 먹힘을 당하게 하셨던 여호와께서 적의 침략에서 아름다운 포도원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포도원을 침략하려는 적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침략을 포기하고 여호와의 보호(‘힘’)에 매달려 그분과 화친하는 것뿐입니다(5).

‘내 힘을 의지하고’는 ‘내 보호에 매달리고’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여호와의 제단 뿔에 매달려 생명을 구하는 것처럼(왕상 2:28) 그분의 보호에 매달려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불꽃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는 찔레와 가시이지만, 여호와의 보호를 찾아 그분께 매달린다면 평화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3) 야곱의 소생(6)

 

‘그 날에’로 시작하는 포도원의 표상이 후일에는 으로 시작하는 6절에서는 나무의 표상으로 바뀝니다. 포도원의 비유가 여호와의 보호에 초점을 맞췄다면, 나무의 비유는 번성의 축복에 집중합니다.

야곱은 뿌리를 내리고, 이스라엘은 싹이 트고 꽃이 피어 세상을 열매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밑동이 잘려 죽은 것처럼 보였던 나무가 다시 싹이 트이고 자라는 것처럼 멸망한 이스라엘에 소망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흔들리지 않게 회복되고 크게 번성합니다. 야곱은 종말론적 회복에 북왕국의 이스라엘도 포함될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을 채우리로다’는 이스라엘에 임한 복이 온 땅에 함께할 것을 시사해줍니다. 종말에 있을 이스라엘의 구원과 축복은 세상에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세상도 이스라엘의 구원과 축복에 참여합니다. 여호와께서 족장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창 12:3)이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견책(7-11)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고 구원을 얻는 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죄악이 가볍기 때문이거나 혹은 합당한 회개를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인간의 내세울 만한 어떤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이 큼에도 불구하고 ‘적당하게’ 치셨고 쉽게 회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셨습니다.

 

7주께서 그의 백성을 치셨던들 그의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죽임을 당하였던들 백성을 죽인 자가 죽임을 당함과 같았겠느냐 8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 9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의 죄 없이함을 받을 결과는 이로 말미암나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을 부숴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이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 10대저 견고한 성읍은 적막하고 거처가 황무하며 버림 받아 광야와 같은즉 송아지가 거기에서 먹고 거기에 누우며 그 나무 가지를 먹어 없이하리라 11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7-11)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 백성의 원수들에게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도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심하게 견책하십니다. 그러나 그 징계는 자기 백성을 그들이 쓸모없이 되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견책은 ‘적당한’ 것과 다시 말해 자비로운 것입니다.

 

(1) 야곱의 용서(7-9)

 

선지자 이사야의 시선이 종말의 구원 시대에서 현재의 심판로 시대로 돌아옵니다. 교육적 성격을 갖는 수사적 질문으로 시작합니다(7). ‘그를 친 자들을 치신 것처럼 그분께서 그를 치시겠느냐? 그를 죽인 자들이 죽임을 당한 것처럼 그분께서 그를 죽이시겠느냐?’ 전에 여호와께서 지상의 어떤 세력을 도구로 사용하여 야곱을 거의 죽을 정도로 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심판은 혹독하기는 했지만, 무제한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친 자들에게 임한 심판과 비교해보면 분명해집니다. 그분께서는 이들을 다 죽이셨지만, 이스라엘은 죽음에 넘기지 않으시고 내쫓기만 하셨습니다(8).

야곱을 친 적의 신분에 관해서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종말론적 문맥에서는 독자의 시점에 따라 다양하게(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등) 읽을 수 있습니다. ‘적당하게 견책하사’는 정당한 절차에 따라 백성이 쫓겨났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야곱의 심판과 추방은 여호와의 일방적-임의적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불의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폭풍으로’는 문자적으로는 그의 강한 바람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람, 곧 민족들을 보내 야곱을 쳐서 멀리 내쫓으셨습니다. 동풍은 요단 동편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메마른 바람으로 식물은 물론 사람에게도 해가 됐습니다. 여호와께 거의 죽도록 맞고 내쫓긴 야곱이 죄사함을 받습니다. 불의의 용서는 조건적입니다. 용서받기 위해 야곱이 충족시켜야 할 조건은 우상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9).

야곱은 먼저 멸망으로 이끌었던 우상들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합니다. 부끄러운 과거와 단절함이 없이는 새로운 출발도 없습니다. 제단과 아세라와 분향제단은 산당에 속한 제의 도구들이었습니다.

 

(2) 견고한 성읍의 멸망(10-11)

 

용서함을 받는 야곱과 달리 견고한 성읍은 파괴되고 영원히 황량하게 버려져 사람은 살지 못하고 가축의 차지가 됩니다(10). 풀도 제대로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서 송아지가 나무줄기까지 벗겨 먹습니다. 현재 문맥에서 황량하게 버려진 성읍은 7절에서 이스라엘을 친 자들의 성읍으로 여호와께 적대적인 세력을 대표합니다(참조. 24:10; 25:2-3; 26:5).

11절은 다시금 성이 얼마나 철저하게 멸망할지를 보여줍니다. 줄기가 벗겨진 나무의 가지가 말라 꺾어지면 여자들이 와서 그것들을 모아 장작으로 사용합니다. 나무마저 사라진 황량한 곳이 됩니다. 폐허가 된 성읍에는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소망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성읍의 주민들이 지각없는 백성이기에 멸망당한 성읍에 여호와의 긍휼과 은혜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의 파괴에서 여호와의 (보편적) 의지를 읽고 그분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멸망에서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합니다. 이들의 지각없음이 그분 은총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그 날에’(12-1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상의 다른 주인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만을 자신의 참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12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 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과실을 떠는 것 같이 너희를 하나하나 모으시리라 13그 날에 큰 나팔을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멸망하는 자들과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리라(12-13)

 

24-27장의 최종 결론이라고 볼 수 있는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의 치종적인 회복과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불의에 대하여 분노하시고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견책하실 것이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들을 회복시켜 구원의 자리로 인도할 것입니다. 심판으로 파멸당하는 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드에게는 위대한 미래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1) 하나하나 모으시는 여호와(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이삭을 터십니다. 밭에 떨어진 이삭을 하나하나 줍듯이 여호와께서 이방인들과 뒤섞여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별하여 불러내십니다. ‘하수에서부터 애굽시내에까지’는 원래 다윗 왕국의 영토를, 후에는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국경선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다윗의 옛 영토에 사는 자들을 골라내어 모으실 뿐만 아니라, 앗수르 땅과 애굽 땅에 흩어진 자들도 고토로 불러 모으십니다.

 

(2) 흩어진 자들의 귀향(13)

 

이방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큰 나팔소리를 듣고 돌아와서 여호와께서 현존하시는 예루살렘 성산에서 그분께 경배를 드립니다. 멸망하는 자들은 유배당한 자들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동화될 위험에 처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주를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으로 멸망한 것입니다. 반면 주의 백성들은 제법 아픈 일을 겪겠지만 멸망하진 않을 것입니다. 주께서 고난과 아픔을 주시겠지만, 그건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쳐서 회복시키기 위한 견책입니다. 성도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는 예배의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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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6-01)


영원한 반석이신 여호와 하나님

이사야 26장 1절-27장 1절


 

세상은 날마다 불안함의 연속입니다. 눈만 뜨면 터져 나오는 사고들과 끔찍한사건들, 기아와 테러의 지구촌 소식들, 불경기와 가뭄과 같은 팍팍한 현실들, 그야말로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모르는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평안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사야가 말하는 심지가 견고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 예언자가 대표하는 ‘우리’ 공동체는 종말에 있을 여호와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성벽과 외벽을 쌓아 예루살렘을 보호해주십니다. 성읍을 에워싼 골짜기에 의지하다가 패망한 예루살렘이 앞으로는 여호와께서 지켜주시는 ‘견고한 성읍’이 됩니다. 회복된 공동체는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며 삽니다.

 

승리의 노래(1-6)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의를 지킨 의로운 사람들이 성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귀한 신분이나 권세를 가진 자가 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실하게 신의를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 선언하신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성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2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3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4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5높은 데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6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1-6)

 

여호와의 구원이 ‘성벽과 외벽’이 돼 예루살렘을 ‘견고한 성읍’으로 만들어줍니다(1). 전에는 골짜기와 성벽의 보호를 받던 예루살렘을 종말에는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며 직접 지켜주십니다. ‘외벽’은 성벽 앞에 둘러쳐진 작은 방어벽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성문을 지키는 자들을 ‘너희’로 부르며 이들에게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라고 외칩니다(2). ‘의로운 나라’는 여호와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을, ‘문들’은 예루살렘 성문을 가리킵니다. ‘의로운’은 나라(백성)의 속성보다 윤리적 요청에 해당합니다. 여호와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성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신의를 지키는’도 마찬가지로 ‘흔들림이 없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성벽과 보루가 되셔서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예루살렘 성에서 그분께 의존하고 그분 말씀에 따라 의로운 삶을 사는 자들에게는 ‘평강’이 주어집니다(3). 평강의 샬롬은 삶의 이상적 환경을 만들어내는 자연과 사회의 조화로운 일치를 가리킵니다.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분의 윤리적 가르침을 실천하며 사는 자들의 나라에는 정치적 불의와 사회적 억압이, 전쟁과 자연재해와 질병이 다시는 발붙이지 못합니다. 여호와의 구원과 구원받은 자들의 신뢰가 선순환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한 반석’이시기에 구원받은 자들은 ‘영원히’ 그분을 신뢰할 수 있고 또 신뢰해야 합니다(4). 여호와가 환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이 도움과 피난처를 찾을 수 있는 반석이십니다. 다음 두 절은 여호와를 지속적으로 신뢰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높은 곳에 높은 성을 건설하고 자신의 안전을 자랑하며 사는 자들을 여호와께서 징계하실 것입니다(5). 그분께서 허물어버리실 ‘솟은 성’은 그분 백성을 억압하는 세력을 가리킵니다. 종말에 여호와께서 보호하시는 ‘견고한 성읍’에 살게 될 ‘의로운 나라’가 ‘빈궁한 자’와 ‘곤핍한 자’로 표현됩니다(6). 현재 ‘우리’ 공동체가 ‘솟은 성’에 사는 자들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압제당하는 자들이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허물어버리신 성의 폐허를 발로 짓밟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의를 신뢰하는 의인(7-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편안한 길, 사건과 사고가 없는 삶은 아닙니다. 평강은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는 데 있습니다. 편안한 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닌, 높낮이가 고른 길을 걷는 것이 평탄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른 길을 걸을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평강과 평탄을 누릴 수 있습니다.

 

7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8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9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10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7-10)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그 말씀은 바르고 옳은 길입니다. 이사야는 ‘의인의 길은 정직하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1) 의인의 길(7)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7)는 하반절에 일치시켜 ‘의인을 위한 길은 올바르나이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준수하며 사는 자를 위해 길을 닦아주시고, 의인은 그분께서 올바르게 만들어주신 길을 갑니다. 경험적 현실에서는 의인의 길이 평탄치 않게 보일 때도 있지만, 이는 겉모습에 불과할 뿐입니다.

 

(2) 여호와의 심판을 기다리는 의인(8-9)

 

의로우신 분께서 의인을 위해 마련해주신 길은 곧 바르다는 신앙적 진술로부터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길의 올바름을 끌어냅니다(8). 심판의 정당성을 알기에 그 혹독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떠나지 않고 그분께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여호와의 ‘이름’과 ‘기억’은 여호와 자신을 의미합니다. 예배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멀리 계신 그분과 친교(교제)를 나눕니다. ‘영혼의 바람’(‘영혼이 사모하나이다’)은 고뇌에 찬 열심과 열정을 갖고 여호와께 매달림을 의미합니다.

화자가 ‘우리’에서 ‘나’로 바뀌면서, 예언자가 개인적으로 여호와께 대한 자신의 신뢰를 고백합니다(9). ‘나’는 ‘밤에’ 여호와를 간절히 찾습니다. 밤은 두려움과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지는 시간으로, 여호와를 전심으로 찾고 그분을 만날 때이기도 합니다(시 6:6; 77:6). ‘나’가 심판의 시대를 살면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이유는 그분의 심판을 통해 ‘세상의 거민’이 의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세상 주민들도 의를 알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3) 의를 배우지 않는 악인(10)

 

9b-10절의 ‘의’는 민족들도 인식할 수 있기에 ‘사회와 삶에 내재한 창조의 기본 질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창조주 여호와께서 땅에서 민족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질서를 세우시고 감독하시기에 의를 배우지 않고 곧은 것을 비뚤어지게 하는 악인은 결국 ‘여호와의 위엄’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루시는 분(11-19)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돌아보며 믿음과 인내를 북돋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이 은혜를 되새기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면, 악인이 득세하는 부조리한 현실에서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11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 12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13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4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15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 16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17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18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19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 놓으리로다(11-19)

 

하나님 나라는 의의 나라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요, 그 외에 의로움으로 화답하는 백성이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백성이요, 주를 사랑하고 갈망하며 주께 순종하기를 기뻐하는 백성의 나라입니다.

 

(1) 대적을 사르는 여호와의 불(11)

 

여호와의 심판이 원래 목적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분께서 손을 높이 들었지만, 세상의 거민은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11). 이들의 무지와 거절이 더 심한 심판을 초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역사에 개입하셔서 진노의 불로 이들을 삼켜버리실 것입니다. 예언자는 여호와께서 과거에 베풀어주신 구원행위들로부터 미래적 구원에 대한 확신을 끌어냅니다.

 

(2) 평간의 간구와 그 근거(12-15)

 

하나님께서 적을 멸망시키시고 이스라엘에 평강을 베푸실 것입니다(12). 원래 이스라엘이 해야 했을 일을 그분께서 대신 이루어 주셨습니다. 13-14절은 아마도 사사 시대를 회고하는 것 같습니다. 사사기의 신학적 틀에 따르면 여호와를 배신한 결과로 이방 통치자들의 지배 아래 떨어진 이스라엘이 고난 중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부르짖자, 여호와께서는 이들의 간구를 듣고 사사를 보내 ‘다른 주들’을 모두 벌하여 멸망시키셨습니다. 15절은 아마도 다윗 시대를 회고하는 것 같습니다. 다윗 시대는 이스라엘이 가장 번성하였던,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한 시대였습니다. 후손의 번성과 전쟁의 승리는 신적 축복에 속하기에 여호와께서 당신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 보이신 시대가 됩니다.

 

(3) 탄식과 간구(16-18)

 

16절은 소망을 담고 있는 회고적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은 거듭 고난에 떨어졌지만, 그때마다 새로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환난을 해산하는 여인의 곤경에 비유하는 17-18절에서 예언자의 시선은 현재로 돌아옵니다. 해산의 고통은 산모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지극히 위험스러운 상황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생산적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몸부림치며 해산했는데 태어난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과거와 달리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세계의 거민’은 아마도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4) 권면(19)

 

세상에 너무 적은 수의 이스라엘 사람이 남겨진 현실에 크게 실망하고 깊이 탄식하는 예언자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을, 다시 회복될 것을 약속하십니다(19).

 

백성의 구원과 땅의 심판(20-27:1)

의로운 공동체의 기도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깊은 신뢰와 소망이 있습니다. 심판 중에서도 이들이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모랗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이시며, 심판을 통해 그의 의와 영광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환난 중에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20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21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 27:1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20-27:1)

 

하나님의 초대를 악인들은 끝내 거절할 것입니다. 그분의 은총의 기회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심판과 자기 백성을 향한 열정을 확인할 날이 올 것입니다.

 

(1) ‘잠깐 숨을지어다’(20)

 

여호와께서 땅의 백성을 심판하시는 날은 이스라엘에 기쁜 날임과 동시에 위험스러운 날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분노에 휩쓸려들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악인들이 종말론적 심판에 넘겨질 때 이스라엘은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잠깐’ 숨어 있어야 합니다(20).

 

(2) 죄악의 징벌(21)

 

심판하려고 여호와께서 그분 거처에서 나오시면 땅은 그 피를 드러내고 살해당한 자들을 더 이상 덮지 않습니다(21). 부당하게 살해당한 자들의 피가 그분께 복수를 간구합니다. 그분의 인내로 지체됐던 그분의 의가 이제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3) 혼돈 세력의 정복(27:1)

 

1절은 신화적 표상을 사용하여 종말에 있을 마지막 전쟁을 기술합니다. 태초에 원시 괴물(chaos)을 정복하고 질서(cosmos)를 세우셨던 것처럼 여호와께서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혼돈의 세력을 벌하시고 다시 창조 질서를 바로 세우십니다. ‘날랜 뱀 리워야단,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 바다에 있는 용’은 세 종류의 원시 괴물보다는 강조를 위한 반복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 하려면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곳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수시로 변하는 세상과 환경, 우리의 형편 위에 마음을 올려놓고, 날마다 전전긍긍하는 것은 애초에 시작이 잘못된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을 누리려면 마음을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신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바다 물결같이 요동치는 곳에 마음을 두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의지하는 것은 무엇인지 점검해 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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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5-01)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펼쳐진 잔치

이사야 25장 1-12절


 

하나님께서는 모든 대적을 꺾으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며 왕좌에 앉으셨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살아가는 시기는 환난과 심판의 시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기쁨으로 찬양하게 하십니다.

 

  • 24장 21-23절은 여호와의 종말론적 잔치를 선포하는 25장 6-8절에 사건적으로 이어집니다. 하늘의 군대와 땅의 왕들을 멸하시고 시온 산에서 왕이 되신 여호와께서 친히 잔치를 배설하시고 민족들을 손님으로 초대하십니다. 민족들이 여호와의 왕권에 온전히 참여합니다. 문맥에 따르면, 땅의 심판이 역설적으로 민족들에게 여호와께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줍니다.

 

감사의 기도(1-5)

우리의 삶에는 가장 좋은 것이 선물로 주어져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산인 교회에서 그 잔치를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름진 것과 가장 좋은 포도주를 먹지 않고, 여전히 세상의 것만 찾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1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2주께서 성읍을 돌 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3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 4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5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 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 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1-5)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상한 얼굴을 보이시고, 어떤 이들에게는 분노의 얼굴을 보이십니다. 이사야는 모든 열방을 심판하시고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 찬양으로 부름(1)

 

시인(예언자)은 ‘여호와’를 부르며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가 사적으로 알고 있는 ‘나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 견고한 성읍의 멸망(2-3)

 

물론 2-5절의 내용이 보여주듯이 시인은 공동체를 대신하여 기도합니다. ‘기사’는 원래 전쟁이나 억압에서 해방과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한 여호와의 구원행위 또는 시인이 경험하는 구원사건을 가리킵니다. 현재의 종말론적인 문맥에서는 마지막 때의 환난에서 해방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참조. 14:24; 22:11; 37:26)는 여호와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땅의 역사를 이루어가심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임의로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 아니라, 미리 세우신 계획대로 신실한 자들에게 기사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성실함과 진실함’은 그분 구원행위의 확실성을 보여줍니다. 감사의 근거가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시인은 어떤 성의 멸망에 관해 여호와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호와께서 폐허로 만든 성이다시는 재건되지 못할 것입니다(2). 돌무더기가 된 성이 어떤 성을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합니다. 24:10에 언급된 ‘혼돈의 성’과 일치시키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멸망 당해 돌무더기가 된 성읍이 동시대 사람들에게 알려진 성읍이라서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불의한 성읍의 멸망은 시인에게 여호와의 계획 속에 확정된 포학한 민족들의 심판을 예고해주는 서막이었습니다. 성읍의 멸망은 그가 드리는 감사의 일부에 속했습니다. 그는 현재의 경험으로부터 미래에 있을 ‘여호와의 기사’의 확실성을 깨닫습니다. 그는 그분의 개입에 의한 가난한 자들의 구원과 포학한 자들의 멸망을 미리 내다보며 그분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3) 피난처 여호와(4-5)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강한 민족’은 이스라엘보다는 2절과 관련해 성읍이 파괴된 이방 백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좀 더 일치합니다.

4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포학한 자들에 시달리는 ‘빈궁한 자’와 ‘환난 당한 가난한 자’로, 강한 민족이 아닙니다. ‘경외하리니’는 ‘두려워하리니’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정복당한 ‘강한 민족’은 자신을 정복한 여호와를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주변의 다른 ‘포학한 나라들’은 그분을 두려워하기만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정의에 변함없는 신뢰를 내보이며 그분께 도움을 기대합니다(4-5). 그는 여호와께서 곤경에 빠진 자들의 요새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분만이 압도적인 폭력에서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생명을 보호해주실 수있습니다. 그분만이 폭우에는 피난처가, 폭염에는 그늘이 되어주십니다. 팔레스티나에서 갑작스럽게 쏟아져 내리는 폭우와 뜨겁게 달궈진 폭염은 생명에 적대적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시는 여호와는 포학한 자들을 억누르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방인의 소란’은 출정하는 병사들의 함성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자(이스라엘)를 짓밟으려는 포학한 자들에게 승리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의 종말론적 잔치(6-8)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만드신 포도주가 그렇듯이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것으로 내어놓으십니다. 최고의 음식은 정성의 결과요 상대방을 향한 애정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이 끝난 후 백성을 위로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6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7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8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6-8)

 

하나님의 잔치에는 사망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왕노릇하던 사망은 더 이상 사람들을 위협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끌던 사망이 오히려 영원히 멸망 당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잔치를 베푸십니다. 내놓은 음식은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했던 포도주입니다.

 

(1) 민족들을 위한 잔치(6)

 

왕의 대관식에 뒤이어 축하 잔치가 열리듯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연회를 준비하시고 ‘만민’을 초대하십니다(6). 연회를 베푸시는 분은 ‘만군의 여호와’로, 이 이름은 24-27장에서 오직 이곳과 24:23에서만 등장합니다. 연회가 벌어지는 장소는 ‘이 산’으로, 여호와께서 왕이 되신 시온 산을 가리킵니다. 연회에 초대받은 손님은 ‘만민’으로, 여호와의 종말론적 통치에 땅의 모든 민족이 참여합니다. 종말론적 전쟁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적대 세력을 물리치시고 시온 산에서 보좌에 오르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의 왕이 되십니다. 여호와께서 연회에 초대받은 민족들을 위해 최상의 음식과 포도주를 준비하십니다.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은 고기보다는 기름에 요리한 음식을 가리키고,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는 오래 저장하여 잘 숙성시킨 최고의 포도주로 잔치 자리의 기쁨을 더해줍니다. 시온 산에서 베풀어지는 연회는 단순한 축하연이 아닙니다. 연회에 참여한 모든 민족에게 여호와께서 놀라운 선물을 주십니다.

 

(2) 슬픔의 제거(7)

 

그분께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십니다(7). 민족들에게 씌워진 가리개와 덮개는 영적 무지(참조. 고후 3:13-18) 보다는 슬픔의 표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애도의 표시로 얼굴을 천으로 가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참조, 삼하 15:30; 19:5; 렘 14:3-4). 민족들은 죽은 자들, 특히 전쟁에서 쓰러진 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다시는 너울로 얼굴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3) 죽음의 폐지(8)

 

여호와의 종말론적 통치가 새로운 차원의 삶을 약속해줍니다. 그분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고’ 모든 민족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겨주실 것입니다(8). 죽음이 사라지기에 애도를 위해 얼굴을 가리거나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어집니다. 항구적인 기쁨과 구원이 주어집니다. 구약 성경적 이해에 따르면, ‘죽음의 영원히 멸망’은 종말에는 모든 민족이 여호와의 통치와 보호 아래 안전하게 살아가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께서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재앙에서 해방시켜 영원히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통치 아래 사는 자들에게는 전쟁도, 질병도, 기근도, 자연재해도, 사회적 불의나 불법도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땅에서 제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나 남은 자들의 구원 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들을 위해 여호와께서 시온 산에서 종말론적 연회를 준비하신다는 점에서 이 단락은 매우 독자적입니다. 시온을 찾는 민족들의 순례는 여러 곳에 등장하지만(2:2-4; 시 96:7-8; 슥 14:16 등), 이곳에서만 민족들은 여호와의 초대를 받아 시온 산으로 올라옵니다.

 

감사와 모압의 멸망(9-12)

성도들은 이 땅에서 겪는 고통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이 땅에서 겪는 고통 때문에 주님을 더 사랑하고, 천국잔치를 더욱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고통은 감사한 것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눈물이 있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더욱 감사한 것입니다.

 

9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10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의 초개가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11그가 헤엄치는 자가 헤엄치려고 손을 폄 같이 그 속에서 그의 손을 펼 것이나 여호와께서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그 손이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누르실 것이라 12네 성벽의 높은 요새를 헐어 땅에 내리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시리라(9-12)

 

세상에서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난과 더불어 일생을 살게 됩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고난은 영생을 누리면서 얻을 영광과 비교할수 없고, 이 땅에서 겪었던 고통의 크기도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면서 누리는 기쁨의 크기와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고통 때문에 낙망하지 말아야합니다.

 

(1) 이스라엘의 응답(9-10a)

 

여호와께서 시온 산에서 왕으로 통치하실 때(‘그 날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경험하고 이들의 적인 모압은 멸망을 당합니다. 아직은 수치 가운데 있지만, ‘우리’ 공동체는 임박한 구원을 기대하며 기뻐합니다. 곧 재앙의 시대가 지나고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소망을 두고 있는 ‘우리의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확신하고 미리 그분의 구원을 환호하며 즐거워합니다. 10a절의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는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여호와의 지속적이고도 완벽한 보호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2) 모압의 명망(10b-12)

 

시온 산에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보호를 받는 이스라엘과 대조적으로 모압은 ‘자기 처소에서’, 곧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짓밟힐 것입니다. 모압의 절망적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타작마당을 거름 구덩이로 옮겨 놓습니다. 지푸라기가 거름 구덩이에서 짓밟히듯이 그렇게 모압이 짓밟힐 것입니다(10b). 11절에서도 비유를 사용해 모압의 헛된 노력을 조롱합니다. 헤엄치는 자가 손을 뻗어 헤엄치듯이 모압도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헤엄을 치지만, 모압이 빠진 구덩이는 거름 구덩이이기에 그의 능숙한 손놀림에도 불구하고 깊이 빠져들어 갈 뿐입니다. 그의 교만(자부심)이 목숨을 구해주지 못합니다. 모압은 교만과 함께 거름 구덩이에 빠져 죽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압의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리고 낮추어 진토에 미치게 하실 것입니다(12). 자신의 높음(교만)을 자랑하던 모압이 완전히 허물어져 땅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낮아집니다. 모압은 회복이 불가능하게 완전히 멸망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 수치를 가하는 모압과 같은 나라는 여호와의 종말론적 연회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잔치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풍성함이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 땅에서의 모든 고통과 눈물을 하나님께서 제거하시고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하며 그 잔치를 사모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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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4-02)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이사야 24장 14-23절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미워하는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의 날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심판을 맞이하는 자세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자세로 심판의 날을 맞이하고 싶습니까? 그래서 어떤 운명을 맞이하고 싶습니까?

 

  • 현재 문맥에서 보자면, 땅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최종적이며 완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주적 재앙은 그분 왕권의 수립에서 정점에 도달합니다. 마지막 전쟁에서 패한 하늘의 군대와 땅의 왕들은 옥에 갇혔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심판을 받고, 여호와께서 시온 산에서 왕으로서 (민족들을) 통치하십니다.

 

찬양 받으시는 하나님(14-16a)

우리는 끝이 안 보이는 드넓은 바다나 높이 치솟은 산과 같은 거대한 자연 앞에 숙연해지고 겸손해집니다. 그래서 인류에게는 역사적으로 자연숭배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자연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노년에 접어든 자신을 압도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4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 15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16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14-16a)

 

이사야는 남은 자들이 서쪽 바다와 땅끝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큰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동방과 모든 섬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현실로 돌아와 이 땅의 죄와 심판 때문에 애통해합니다.

 

(1) 바다에서(14)

 

신분이 모호한 ‘그들’이, 아마도 눈앞에 전개되는 역사적 격변에서 여호와의 구원사적 개입을 보면서, 그분의 위엄에 환호하고 기쁨의 환성을 터뜨립니다(14). 개역개정이 ‘무리’로 옮긴 ‘그들(헴마)’은 땅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세상 주민도 가능하지만, 현재 문맥에서는 세상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기쁨의 감격이 세 개의 동사 ‘(소리를) 높이다(나사), 부르다/환호하다(라난), 크게 외치다(차할)’를 통해 격정적으로 표출됩니다. 뒤의 두 동사는 12:6에서는 시온의 주민에게 적용됐습니다. 기쁨의 동기이자 내용은 ‘여호와의 위엄’입니다. ‘위엄’의 ‘가온’은 ‘높다’를 의미하는 동사 ‘가아’에서 파생한 명사로, 여호와만이 높으시고 또 높임을 받으실 분임을 보여줍니다(2:10,19,21). 그분의 위엄은 그분 능력 가운데 나타납니다(출 15:1,7; 미 5:4). 바다에서부터 울려나가는 환호가 사방으로 퍼져나갑니다.

 

(2) 동방에서(15)

 

바다에서부터 환성을 지르는 자들이 ‘동방’과 ‘바다 모든 섬’에 사는 자들에게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라고 명합니다(15). 제의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여호와를 대신하는 표현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행위와 업적, 명성과 명예를 내포하는 역동적 단위로, 여호와 이름의 위엄은 그분의 능력과 영광이 계시된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 나타납니다.

 

(3) 땅끝에서(16a)

 

온 땅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예루살렘에까지 들립니다. 예언자를 포함하는 ‘우리’ 공동체는 ‘땅 끝에서부터’ 들려오는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라는 찬양의 노랫소리를 듣습니다(16). 땅 끝에 사는 자들이 세상을 심판하신 분, 곧 적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을 찬양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호와를 지칭하는 ‘의로우신 이’(차디크)는 구원자 또는 승리자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 단락에서는 방위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바다’는 일반적으로 지중해를 의미하고 방위로는 서쪽을 가리킵니다. ‘동방의 우림’은 그 어원이 불분명하지만, 보통 ‘빛’과 관련지어 ‘빛이 밝아오는 지역’, 곧 동쪽으로 이해합니다. ‘바다 모든 섬’(‘바다의 섬들’)은 시리아 해변이나 소아시아 해변 또는 키프로스 해변을 의미하기에 방위로는 북쪽을 가리킵니다. ‘땅끝’의 ‘커나프 하아레츠’은 문자적으로는 ‘땅의 날개’로, 원래는 특정 방위를 가리키지 않지만, 현재의 문맥에서는 남쪽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여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복수의 ‘땅의 날개들’로 나오고, 땅의 사방을 가리킵니다. 서쪽에서 시작한 환호성이 동쪽과 북쪽을 거쳐 남쪽으로 해서 ‘우리’가 있는 예루살렘까지 도달합니다. 이사야를 제외하고 온 땅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여호와의 위엄과 영광과 승리를 찬양합니다.

 

예언자의 소리(16b-20)

하나님께서는 최후 심판을 통해 인간들의 죄악으로 오염된 이 땅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변화 받은 성도들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에게 최후의 심판은 두려움으로 피할 것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바라고 기다릴 것입니다. 세상의 죄악이 모두 사라진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16…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 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17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18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16b-20)

 

죄인들은 심판을 피해 도망가지만, 아무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도망가는 그곳에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리고 있고, 함정에서 빠져 나와도 또 다른 올무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처럼 하늘 문이 열려 폭우가 쏟아지고 홍수가 날 것이며, 강도 높은 지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될 것입니다.

 

(1) 예언자의 절망적 반응(16b)

 

온 땅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열정적 반응이 이사야를 심각한 불안에 빠뜨립니다. 땅의 심판이 이스라엘의 즉각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본 환상에 전율하고 자신에게 화를 선언합니다(16b).

 

(2) 피할 수 없는 심판(17-18)

 

구원 시대가 동텄다고 환호하는 자들과 달리 그에게 이스라엘의 구원은 아직 감춰진 하나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점점 더 짙게 땅을 뒤덮는 무시무시한 재앙만 보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급하고도 일방적인 환호에 제동을 겁니다. 땅의 심판은 곧 임할 우주적 파국적 사건으로, 땅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위험한 시간입니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민족들 간의 배신(21:2), 이스라엘이 의존하는 이방세력의 배신, 또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일부의 배신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현재 문맥에서는 마지막 때의 혼란과 무질서를 특징짓는 표현으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본 것은 구원 시대가 아니라 악이 횡행하는 파렴치한 시대였습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 위로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덮쳐옵니다(17).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길을 찾아 도망해보지만, 함정에 떨어져 사로잡힐 뿐입니다. 애써 함정에서 빠져나와도 기다리는 것은 올무뿐입니다.(18a; 암 5:19). 누구도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재앙의 범위가 우주로 확대됩니다.

18b절의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는 하늘의 창문을 열고 비를 내려 범죄한 인류를 진멸한 노아의 대홍수를 생각나게 해주고(창 7:11; 8:2),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와 19절은 지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3) 흔들리는 땅(20)

 

태초에 하나님께서 흔들리지 않게 견고히 놓은 땅의 기초가 그분 심판 앞에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술에 취한 자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듯이, 임시로 만든 원두막이 비바람에 흔들리듯이 땅이 흔들립니다(20a).

땅이 그처럼 무서운 심판에 넘겨질 때는 물론 이유가 있었습니다. 죄악이 땅을 멸망으로 이끕니다. 땅의 죄악이 땅을 무겁게 짓눌러 땅이 쓰러지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합니다(20b). 술꾼과 원두막에 비유된 땅이 무거운 짐에 눌려 엎어진 짐꾼에 비유됩니다. ‘떨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가 아모스 5:2의 인용이라면,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관한 예언이 이미 성취된 것처럼 땅의 멸망에 관한 예언도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승리와 통치(21-23)

공중의 악한 세력들과 죄인들은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있어 그 날은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승리의 날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는 그 날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확신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최후 심판의 최종적인 결론을 보여줍니다.

 

21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22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 같이 모이게 되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니라 23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21-23)

 

하나님을 반역한 타락한 천사들과 이 땅의 왕권을 쥔 자들도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옥에 갇히고, 여러 날 후에 최후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땅을 다스릴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해와 달을 대신하여 온 세상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1) 군대와 왕들을 벌하시는 여호와(21)

 

‘그 날에’ 악한 세력과 결정적인 마지막 싸움이 하늘과 땅에서 벌어집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는 하늘의군대를 땅에서는 땅의 왕들을 벌하십니다(21). 종말론적 전쟁은 하늘과 땅의 모든 세력이 참여하는 우주적 싸움입니다.

18절의 ‘위에 있는’과 ‘높은 데’의 ‘마롬’은 ‘하늘’을 의미하고, ‘높은 군대’는 민족들의 수호천사들이나 신적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다니엘에서 이스라엘의 수호천사인 미가엘은 페르시아 왕국의 수호천사와 그리고 헬라의 수호천사와 싸웁니다(단 10:13, 20-21). 여기서는 다니엘과 달리 여호와께서 직접 적대적인 하늘의 군대는 물론 지상의 왕들도 모두 벌하십니다.

 

(2) 감옥에 갇혔다가 벌 받는 자들(22)

 

마지막 전쟁에서 패한 하늘의 군대와 땅의 왕들은 ‘깊은 옥’에 한데 갇혀 그곳에서 지내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습니다(22;계 20:1-3). ‘깊은 옥’의 ‘보르’는 때로는 지하세계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감옥으로 이용되는 구덩이를(참조. 창 37:20, 22; 40:15; 41:14; 렘 38:6), ‘벌하다’의 ‘파카드’는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묻다’를 의미합니다.

 

(3) 시온산에서 왕이 되시는 여호와(23)

 

종말론적 싸움의 최종 목표는 지상에 여호와의 왕권을 세우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십니다(23). ‘여호와의 왕 되심’은 물론 ‘새로이 보좌에 올라가심’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영원까지 변함없는 왕이시고, 그분 왕권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통치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그분의 왕권이 마지막 때에는 누구나 볼 수 있게 완전하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장로들 앞에서’는 출애굽기 24:9-11을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울 때 모세와 아론과 그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칠십인 장로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서 여호와를 뵙고 먹고 마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먹고 살아가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하나님 없이 높아지고 커지고 유명해지고 부유해지는 삶은 심판의 날에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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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4-01)


온 땅을 황폐케 할 하나님의 심판

이사야 24장 1-13절


 

이스라엘이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며 쾌락을 추구하면서 율법을 범하고 율례를 어기고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와 공평과 정의를 버려도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주의 백성에게는 어떻게 적용됩니까?

 

  • 온 땅이 여호와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분께서 세상을 황폐시키시고 주민들을 흩으십니다. 그분의 심판으로 땅의 모든 기존 질서가 파괴되고, 혼돈과 무질서가 땅을 지배하게 됩니다. 본문은 여호와에 의한 땅의 심판에 집중하고, 그분께서 어떤 방식으로 심판하시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땅의 심판(1-3)

하나님의 심판에서 아무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날에 종교도, 사회 경제적 신분에도 상관없이 모두 심판에 떨어질 것입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은 마치 태초의 ‘혼돈과 공허’의 상태로, 무질서의 상태로, 광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이 새 창조의 모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몇몇 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심판하십니다.

 

1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 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2백성과 제사장이 같을 것이며 종과 상전이 같을 것이며 여종과 여주인이 같을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같을 것이며 빌려주는 자와 빌리는 자가 같을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같을 것이라 3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1-3)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은 온 땅은 완전히 황폐케 될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심판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날에 땅의 일부분이 아니라 ‘온 땅’이 심판으로 황폐케 되는 이유는 온 땅의 거민이 ‘율법’을 어기고 ‘더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 땅을 파괴하시는 여호와(1)

 

온 땅이 여호와의 심판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1절의 현재분사가 뒤따르는 ‘보라 여호와께서’는 심판의 문맥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3:1; 8:7; 10:33; 19:1; 22:17; 24:1; 26:21), 그 확실성과 임박함을 강조합니다. 아직 현재에 속하지는 않지만, 여호와께서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 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십니다. 땅을 파괴하여 황무지로 만드실 뿐만 아니라, 키로 까불러 겨나 지푸라기를 바람에 날려버리듯이(41:16) 땅에 사는 자들을 사방으로 흩어버리십니다. 상반절은 파괴의 심판을, 하반절은 흩어짐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심판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표현들이 우주적 심판에 전용됩니다. 땅의 심판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2) 예외 없는 그분의 심판(2)

 

신분과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집니다(2). 첫 번째 대조는 종교적 신분과, 나머지 다섯 개의 대조는 사회적 신분과 관련됩니다. 물론 기존권위의 붕괴(3:1-5)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는 종교적 특권이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나 낮은 지위에 있는 자나, 가진 것이 많은 자나 가진 것이 없는 자나 모두 그분의 심판에 떨어집니다. 특이하게도 백성이 왕과 같은 통치자가 아니라 제사장에 비교돼 첫머리에 등장하고, 나머지는 모두사회 경제적 영역에 속한 계급에 관해 언급합니다.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것인지 또는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3) 온통 파괴되는 땅(3)

 

3절 전반은 주제와 표현에서 1절 전반의 대체적 반복입니다. 단지 문장이 수동태로 기술되면서 파괴의 주체(행위자)보다 파괴되는 대상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온전히’로 옮긴 절대부정사가 첨가돼 파괴와 약탈이 전면적이고 철저하게 이뤄질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는 1-3절을 마감하는 언급으로, 땅을 황폐하게 하고 지면을 뒤집어엎는 심판 예언의 신적 기원을 다시금 강조합니다. 지금 예언자가 선포하는 온 세상의 심판은 여호와의 결정으로 때가 되면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저주받은 땅(4-13)

하나님께서는 죄로 물든 이 세상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뿐입니다. 이미 믿고 있는 성도라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깨닫고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며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심판의 땅에는 흉작이 찾아오고, 이에 사람을 사이에는 축제의 즐거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4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며 세상 백성 중에 높은 자가 쇠약하며 5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6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 중에 사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 7새 포도즙이 슬퍼하고 포도나무가 쇠잔하며 마음이 즐겁던 자가 다 탄식하며 8소고 치는 기쁨이 그치고 즐거워하는 자의 소리가 끊어지고 수금 타는 기쁨이 그쳤으며 9노래하면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고 독주는 그 마시는 자에게 쓰게 될 것이라 10약탈을 당한 성읍이 허물어 지고 집마다 닫혀서 들어가는 자가 없으며 11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 12성읍이 황무하고 성문이 파괴되었느니라 13세계 민족 중에 이러한 일이 있으리니 곧 감람나무를 흔듦 같고 포도를 거둔 후에 그 남은 것을 주움 같을 것이니라(4-13)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는 것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 때문에 사는 땅도 더러워졌고 쇠약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땅에 임하여 초목이 불타 버리고, 더는 소출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던 술과 음악과 잔치가 사라질 것입니다.

 

(1) 심판의 원인(4-6)

 

땅이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진 이유를 보여주기에 앞서 다시 한 번 땅의 멸망을 기술합니다. 땅은 말라 시들고 세계는 쇠하여 시들고, 땅의 백성 가운데 가장 높은 자(땅과 함께 하늘?)도 쇠합니다(4). ‘세계’은 ‘사람이 사는’, ‘개간된 땅’을 가리킵니다.

‘세상 백성 중에 높은 자’는 땅의 심판이 특히 땅의 멸망에 1차적 책임이 있는 통치자들에게 집중될 것을 보여 줍니다. 24장의 문맥에서는 여호와에 의해 징벌을 당하는 ‘땅의 왕들’(21)에 연결됩니다. ‘마르다(슬퍼하다)’, ‘시들다’, ‘쇠하다’는 가나안의 농부들에게 익숙한 가뭄을 표현하는 단어들입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포괄적으로 언급됩니다. 그 주민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려 땅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5).

이스라엘을 고발할 때 사용하던 신학적 개념과 논리가 땅의 모든 주민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의 언약을 통해) 율법과 율례를 아는 것처럼 민족들도 율법과 율례를 알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자신의 행위에 책임적인 것처럼 민족들도 그분 앞에서 자기네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시내산의 계시는 이스라엘에 독점적으로 주어지지만, 땅의 주민들에게도 기본 질서에 대한 인식은 주어졌습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영원한 언약’으로는 노아의 언약(창 9:16)과 다윗 언약(삼하 23:5; 사 55:3)을 들 수 있습니다. 노아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처럼(창 17:7,13,19; 시 105:10) 여호와의 은총에 의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언약이기에 언약의 상대인 사람들에 의해 깨질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다’는 고발은 형식상 모순이 됩니다. ‘영원한 언약’이 법규의 준수를 포함하는 언약임을 전제합니다. 노아의 영원한 언약에 시내산의 조건적 언약이 결합된 모습입니다.

요약하자면, 이스라엘을 고발할 때 사용하던 ‘시내산 언약의 파기’가 민족들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민족들의 심판이 겉보기와는 달리 임의적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 언약을 파기해서 징벌을 받듯이 민족들도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분명한 근거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6절도 다르지 않습니다. 시내산 언약의 파기가 땅을 더럽혀서 이스라엘에 저주를 가져온 것처럼(민 35:33; 시 106:38; 렘 11:3,8; 23:10; 슥 5:3; 단 9:11), 마찬가지로 민족들에 의한 영원한 언약의 파기로 땅이 저주에 넘겨집니다. 여호와께 순종을 거절한 이스라엘을 칼이 삼키는 것처럼(사 1:20) 저주가 땅을 집어삼킵니다. 삶의 공간인 땅이 저주를 받기에 생존이 불가능해집니다. 사람들은 자기네 악행으로 더럽혀진 땅에서 죗값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범한 땅의 주민들은 죄의 파멸적 세력에 사로잡혀 멸망에 떨어지고 극히 일부만 살아남습니다.

 

(2) 사라진 축제와 기쁨(7-9)

 

여호와의 심판이 초래하는 재앙을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표현을 사용하여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6-9). 4절에 나온 동사 ‘슬퍼하다’(마르다)와 ‘쇠하다’를 다시 받아 포도농사의 흉작을 언급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지고 포도나무는 생명력을 잃고 다시는 포도를 맺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즐거움을 상실하고 모두 한숨만 짓습니다. 결실이 없기에 사람들이 손북과 수금을 치며 기뻐 흥겹게 떠들어대는 일이 없어집니다. 포도주가 끊기고 음악이 멎고 축제의 기쁨도 사라집니다. 삶의 즐거움을 상실한 자들에게 술은 쓰기만 합니다. 축제의 흥을 더해주던 술을 이제는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기 위해 마십니다.

 

(3) 혼돈이 성읍(10-12)

 

심판과 관련해 새로운 모티브가 등장합니다. ‘혼돈의 성읍’(‘약탈당한 성읍’)은 파괴되고 집들은 모두 달혀 들어가는 자가 없습니다(10). 여호와의 심판으로 허물어지는 ‘혼돈의 성읍’이 어떤 성읍을 가리키는지는 달리 언급이 없기에 모호하게 남습니다. 25:2-3; 26:5; 27:10에도 여호와의 심판으로 파괴되는 성읍이 나오는데, 같은 성읍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여호와께 적대적인 땅의 세력이라는 점이고, 이런 배경에서 혼돈의 성읍으로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대제국의 수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토후’는 여호와의 창조 사역을 통해 정복된 원시의 혼돈으로(창 1:2;렘 4:23), ‘혼돈의 성읍’은 마치 태초의 혼돈이 밀려들어 온 그러한 성읍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으로 창조 세계(cosmos)가 다시 혼돈이 지배하는 무질서의 세계(chaos)로 되돌아갑니다. ‘집마다 닫혀서 들어가는 자가 없으며’는 성읍이 완전히 폐허가 되어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막혔음을 의미합니다.

11절은 주제와 표현에서 7-9절의 반복입니다. 포도주의 상실이 더 극적으로 표현됩니다. 거리에는 슬퍼하며 포도주를 찾아 외치는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포도주의 떨어짐은 ‘모든 즐거움’과 ‘땅의 기쁨’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파괴된 성읍에는 비탄에 떨어진 자들의 울부짖음뿐, 즐거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허물어진 ‘혼돈의 성읍’에 남은 것은 허뿐입니다(12). ‘성문의 파괴’는 성문 주변에서 치열하게 공방전이 전개되기에 특별히 언급된 것 같습니다. 침략군의 공격으로 성문은 부서지고 허물어져 황량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에 자주 사용되는 추수의 표상(참조, 17:6)이 다시금 민족들에게 적용됩니다. 감람나무를 떨고 났을 대처걸, 포도 수확이 끝나고 일부 남은 것을 거두는 것처럼 극히 일부만 심판에서 살아남습니다(13; 6). 민족들 가운데 있을 여호와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뤄질지를 보여줍니다(참조, 13:12).


공의를 거부하고 정의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법을 팽개치고 살아가는 삶의 결과는 심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평을 버리면 하향평준화의 공평이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고 선물이니 주의 긍휼을 구하며 겸손히 공평의 삶을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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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3-01)


두로와 시돈의 몰락과 회복

이사야 23장 1-18절


 

‘돈’처럼 매력적인 것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습니다. ‘돈’만큼 위력적인 것도,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한평생 쌓는 것이지만 한순간에 잃는 것도 돈입니다. 힘의 상징이던 바벨론 멸망에 이어 부의 상징인 두로의 멸망은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고, 하고 싶고 갖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재조정하도록 도전합니다.

 

  • 민족들의 신탁(13-23장)의 마지막 장인 23장은 페니키아의 유명한 도시국가 두로와 시돈을 대상으로 주어진 말입니다. 이사야는 애가의 양식을 활용해 두로와 시돈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지중해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엄청난 영화 누리던 두로와 시돈이 갑자기 적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이들이 자랑하던 원양선단도 멸망에서 구해내지 못합니다.

 

두로의 패망에 관한 예언(1-14)

의존도가 높을수록 희망도 높겠지만, 반대로 절망도 짙을 것입니다. 그것이 국가적이든 개인적이든 간에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고, 믿고 그 누구도 자신을 책임져줄 수 없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은 여호와께서 만든 상황이 아니라도 그분이 허락하신 상황이요 통제하시는 상황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라 2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주민들아 잠잠하라 3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 되었도다 4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5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 6너희는 다시스로 건너갈지어다 해변 주민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8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9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11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여호와께서 가나안에 대하여 명령을 내려 그의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게 하시고 12이르시되 너 학대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13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그 백성이 없어졌나니 곧 앗수르 사람이 그 곳을 들짐승이 사는 곳이 되게 하였으되 그들이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헐어 황무하게 하였느니라 14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으라 너희의 견고한 성이 파괴되었느니라(1-14)

 

13-23장에 언급된 열방들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 중에서 두로에 관한 경고의 메시지가 끝부분에 나오고 있음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아마도 이는 세계적인 활동 범위 때문에 당시에 두로가 국제 정세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나 역할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1) 다시스의 배들(1)

 

이사야는 다시스의 배들에게 슬피 부르짖으라고 외칩니다(1). 두로가 황폐해져 집도 없고 들어갈 곳도 없게 됐습니다. 많은 물건을 싣고 깃딤 땅에서 돌아오는 길에 두로가 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목적지인 두로가 파괴됐기에 다시스의 배들은 돌아갈 곳이 없어졌습니다.

‘다시스 배들’은 지중해를 항해하면서 무역을 하는 원양선단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두로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준 자랑거리였습니다. 다시스는 스페인 남서해안의 항구로 지중해 해상무역에서 서쪽 끝을 의미합니다. ‘깃딤 땅’은 지중해 중심에 있는 키프로스를 가리킵니다.

 

(2) 해변 주민들(2-3)

 

이사야의 시선이 바다의 배들에서 해변으로 옮겨집니다. 그는 이번에는 해변 주민들에게 잠잠하라고 외칩니다(2). 바닷가 주민들은 바다를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 때문에 부요하게 살 수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됐습니다.

‘해변 주민들’은 페니키아 사람들을 ‘시돈 상인들’은 시돈을 포함해서 페니키아 지방의 중개무역 상인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잠잠하다’는 1절의 ‘슬피 부르짖다’와 내용상 동일합니다. 페니키아 지방은 원양선단을 이끌고 지중해를 항해하며 중개무역을 하는 두로와 시돈 상인들 덕분에 많은 부를 축적했습니다.

3절은 중개무역의 한 예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지중해를 통해 가져와 민족들에게 되팔아 많은 이익을 남겼습니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토지가 비옥했던 애굽은 근동의 곡식 창고였습니다. 시돈과 두로는 중개무역의 중심지로 민족들의 특산품이 그리로 모였다가 사방으로 수출됐습니다.

 

(3) 바다(4-5)

 

이사야는 전적으로 바다 덕분에 살아가는 시돈과 두로에게 바다의 입을 통해 파국적 재앙을 선포하게 합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는 것처럼 이들의 해상무역이 아무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입니다(4).

‘바다의 요새’는 해안에서 600-700미터 떨어진 두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들과 오래전부터 거래를 해왔던 애굽은 두로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5). 애굽은 많은 부를 가져다준 중개무역의 파트너를 잃어버립니다.

 

(4) 해변 주민들(6-9)

 

이사야는 해변 주민들에게 통곡하며 다시스로 건너가라고 권면합니다(6). 그의 권고는 풍자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시스는 페니키아 사람들이 멸망을 피해 이주해가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다음과 같이 풀어볼 있습니다. ‘원양선단을 자랑하는 자들아, 세상 끝에 있는 다시스는 안전할지 모르니 능력이 있으면 거기로 가서 피난처를 찾아보아라.’

이사야는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켜 믿기지 않는 두로의 멸망을 언급합니다(7). 그처럼 기쁨이 넘치던 두로가 몰락하여 통곡의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지중해 연안에 많은 식민지를 개척하였던 두로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일찍부터 스페인의 다시스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등지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자신들의 교역권과 해상권을 보호하였습니다.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개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두로의 영화는 영원할 것 같았지만, 여호와의 결정으로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습니다(8-9). 만군의 여호와께서 두로의 운명을 멸망으로 정하셨기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영화를 누리던 자들을 욕되게 하시고 교만하던 자들을 멸시받게 하실 것입니다. 민족들의 운명은 경제력이나 군사력 또는 강대국의 욕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서 민족들이 서로 경쟁하고 싸우지만, 마지막 결정은 언제나 여호와의 몫입니다. 면류관을 씌우던 자는 식민지의 제후들이나 왕들이 두로에 정치적 경계적으로 의존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지중해 주변의 많은 도시와 나라들은 두로의 중개무역 덕분에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에 두로의 영향력을 인정해주었습니다.

 

(5) 딸 다시스(10-13)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는 나라의 고위직이 상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두로의 상인들이 교역지에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도 이들이 정치적으로 비중 있는 인물로 명성을 누렸음을 시사해줍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나일의 범람으로 애굽에 수확물이 풍부하듯이 두로의 멸망으로 그 굴레에서 벗어난 다시스에는 부가 넘치게 됩니다.

11절의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는 바다를 무대로 부와 명성을 획득한 두로와 시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열방을 흔드시어’는 두로의 멸망에 직면한 민족들의 반응입니다. ‘가나안의 견고한 성읍들’을 파괴하시는 그분의 심판이 페니키아를 넘어 이들과 거래한 왕국들에도 영향을 미쳐 두려움에 떨게 만듭니다. ‘가나안’은 여기서는 페니키아 지방을 가리킵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페니키아 사람들은 특히 언어와 종교에서 매우 가까웠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진 시돈에게는 앞으로 기뻐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11). 깃딤으로 피신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거기에서도 편안을 얻지 못합니다. 한때 지중해를 지배하였던 시돈이 어디에서도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시돈의 멸망은 바벨론의 멸망과 유사하게 이뤄질 것입니다. 앗수르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초토화시켜 들짐승들의 서식처로 만들어 버렸던 것처럼 시돈도 완전히 허물어져 폐허가 될 것입니다(13). 바벨론의 므로닥발라단은 주전 722-710년과 704-703년에 두 번 앗수르로부터 독립을 시도하다가 다 실패하고 쫓겨났습니다.

 

(6) 다시스의 배들(14)

 

14절은 다시 1절로 돌아갑니다. ‘다시스의 배들은 파괴된 견고한 성’ (두로)을 위해 슬피 부르짖어야 합니다.

 

두로의 장래에 관한 예언(15-18)

어려운 중에서 노력함으로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영화의 회복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양식과 의복을 위하여 주께서 자유자재로 쓰실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서는 모습입니다. 오늘 자신의 삶의 터전에 소유권 이전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그곳이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15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16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17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 18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15-18)

 

이사야가 선포한 메시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먼저 엄중한 심판의 예언을 선포하고 마지막에 가서 회복에 대한 소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로에 관해서도 그러한데, 선지자는 두로가 패망한 지 70년이 지나면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1) 칠십 년의 징계(15-16)

 

두로가 멸망의 심판에 떨어지지만, 멸망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심판에 넘겨진 두로는 ‘한 왕의 연한같이 칠십 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힙니다(15). 왕의 재위 기간으로 ‘칠십 년’은 사실적 수보다는 완전수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의한 유다와 민족들의 칠십 년 지배를 선포했습니다(렘 25:11; 29:10; 단 9:2; 슥 1:12; 대하 36:21). 아마도 하나님의 심판이 온전하게 이뤄지는, 심판을 당한 세대가 회복에 참여하지 못하는 기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부와 지혜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두로는 늙은 창녀가 잊히듯이 일정 기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창녀의 노래는 한편으로는 두로의 참담한 몰락을 조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기억되기 위해서 두로가 얼마나 처절하게 노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16). 사람들이 더는 찾지 않는 늙은 창녀가 사람을 찾아 노래를 부르며, 항구를 돌아다니듯이 두로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직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버텨내야 합니다. 정한 기간이 다한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실 것입니다. 두로를 창기에 비교해 회복을 기술합니다.

 

(2) 여호와의 돌봄을 받는 두로(17)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는 두로가 다시 번영하여 민족들과 상거래를 재개할 것을 보여줍니다(17). 두로의 권리가 회복되어 이전의 무대로 복귀하게 됩니다. 두로의 상업 활동이 창녀 짓에 비교됩니다. 상거래 행위를 죄로 정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윤추구를 유일한 목표로 삼는, 돈벌이가 된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상인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3) 여호와께 봉헌되는 두로의 수익(18)

 

마지막 18절은 두로에 대한 신탁뿐만 아니라 13장부터 시작된 민족들에 대한 신탁의 맺는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종말론적 시선으로 심판 이후를 내다봅니다.

두로와 시돈의 상인들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왕국에게 몸을 팔아 얻은 소득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 곧 제사장들의 양식과 의복을 마련하는 데 사용됩니다. 두로와 민족들의 부가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와 그분 백성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세상에서 잃어버린 것을 세상 살 동안 기어코 되찾겠다고 생각하며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변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부와 영화는 한때뿐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바치고 목표로 삼을 만큼 가치 있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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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2-02)


부패 관리 셉나를 대신 할 엘리아김

이사야 22장 15-25절


 

한 사람의 인생 속에서 한 나라의 운명을 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지도자의 자리는 그만큼 무겁고 무섭습니다. 본문은 두 지도자를 소개합니다. 셉나는 심판 받을 유다의 운명을, 엘리아김은 회복될 유다의 미래를 상징합니다. 지도자들의 한계 속에 유다의 진정한 미래, 참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합니다.

 

  • 주전 701년 전후의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 왕궁의 최고위직에 있었던 셉나와 엘리아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둘은 히스기야의 취측근으로, 그를 도와 앗수르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한 핵심 인물들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흔들리는 다윗 왕조를 바로 세우기 위해 거듭 예루살렘의 정치에 개입하시지만, 왕궁 정치가들의 무책임과 무능력으로 인해 의도하셨던 결과를 내지 못하십니다.

 

월권한 셉나의 심판(15-19)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망만 추구한 사람들은 그 백성이 심판을 받을 때, 운명을 같이할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세상의 방법으로 동행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셉나는 위기에 처한 나라보다 자기 명성에만 천착했습니다.

 

15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왕궁을 맡은 자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16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 내었도다 17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결박하고 장사 같이 세게 던지되 18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 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 19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리니(15-19)

 

예루살렘 백성들의 세속적인 삶과 불신앙의 죄를 지적했던 이사야 선지자는, 이제 메시지의 초점을 한 정치인에게 집중합니다. 그는 히스기야 왕의 궁내대신 ‘셉나(Shebna)’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각 나라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였는데, 이곳에서는 개인의 죄를 향해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죄를 무르실 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선택과 죄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습니다.

 

(1) 셉나에게 보내진 이사야(15)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셉나’를 찾아가서 그에게 신탁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15). ‘셉나’는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로 소개됩니다. ‘국고를 맡은 자’로 번역한 ‘소켄’은 아마도 ‘시종장’, ‘관리장’을, ‘왕궁 맡은 자’는 왕궁의 일을 책임진 자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최고위직에 속하는 두 개의 지위가 셉나에게 맡겨졌다는 것은 그가 히스기야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그를 대신하여 전권을 행사했음을 시사합니다.

본문에 예루살렘의 위기가 나타나지 않기에 앗수르가 유다로 원정을 떠나기 전에 주어진 말씀처럼 보입니다. 앗수르의 왕좌가 사르곤에서 산헤립에게로 넘어가는 과도기(주전 705-701년)에 히스기야가 적극적으로 반앗수르 노선을 추구했는데, 이때 셉나는 왕의 최측근으로 왕궁의 정치를 주도했습니다.

셉나는 한 번 더 등장하는데,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으로 랍사게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을 때 히스기야가 유다의 협상단으로 파견한 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왕하 18:18,26,37; 사 36:3,11,22). 당시 그는 서기관의 직책을 갖고 협상단 대표인 엘리아김을 수행했습니다. 양자를 함께 읽으면, 전권을 갖고 히스기야의 반앗수르 정책을 추진하던 셉나가 예루살렘이 함락의 위험에 처했을 때 최고위직에서 서기관의 지위로 내려왔습니다.

 

(2) 고발(16)

 

이러한 셉나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는데, 19절의 ‘네 지위에서 낮추리니’의 예언이 성취됐음을 볼 수 있습니다. 셉나를 찾아간 이사야가 그의 비리를 고발합니다. 고발의 내용은 얼마간 뜻밖입니다.

이사야는 셉나가 자신의 묘실을 만들기 위한 현장으로 찾아가서, 그 분수에 맞지 않는 묘실을 만든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를 탄핵한 것입니다(16). 세 번이나 사용된 ‘여기에’는 셉나가 그에게 허락되지 않는 곳에다가 석실 고분을 만들었음을 알려줍니다. 고대 세계에서 무덤은 죽은 사람의 ‘처소’(거주지)로 간주하였기에 무덤을 화려하게 만드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셉나에게 문제 된 것은 그가 자기 무덤을 마련한 장소였습니다. 처음 두 질문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에 묘지를 마련했느냐? 도대체 네 조상 가운데 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는 다음과 같이 풀어 옮길 수 있다. 네게 무슨 권한이나 자격이 있기에 여기 있기에 네가 여기에 묻힐 수 있단 말인가?’ 이사야는 셉나가 자격도 없으면서 왕의 최고위 관료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귀족이나 존귀한 자들만 묻힐 수 있는 곳에 자기 무덤을 마련했다고 고발합니다.

 

(3) 심판선언(17-19)

 

현대와 달리 고대 세계에서 신분 질서는 신이 정한 질서였고 이에 따라 매장지도 구분됐습니다. 셉나의 행위는 하나님의 질서에 속하는 신분 질서를 무시한 악행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이용해 전통적인 사회질서를 파괴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의 높은 곳에 있는 반석에 화려한 묘실을 만들어 영원토록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던 ‘셉냐’에게 선지자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운명을 선포했습니다.

셉나는 낮은 집안 출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엘리아김의 경우(20)와 달리 셉나를 소개할 때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도 이를 보여줍니다. 36:3에서 3인의 협상 대표단을 소개할 때도 엘리아김과 요아는 아버지 이름과 직분을 함께 말하고, 셉나는 직분만 언급합니다. 평민 출신이었다면 셉나는 기드론 계곡에 있는 서민의 묘지에 묻혀야 했습니다.

공권력을 남용한 ‘셉나’에게 심판이 선고됩니다. 여호와께서 ‘셉나’를 단단히 결박하여 내던지실 것입니다(17). 그는 공같이 넓은 곳에 던짐을 받고 거기서 죽을 것입니다(18). 광막한 곳은 아마도 넓은 평야 지대에 자리한 앗수르를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암벽을 파내서 자신의 묘실을 만들었지만, 그는 앗수르로 끌려가 들판에 묻히게 될 것입니다.

‘네 영광의 수레’는 왕 다음가는 지위에 오른 셉나가 자신의 권위를 자랑하며 예루살렘 거리를 타고 다니던 마차를 가리킵니다. 그는 자기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친 자로 수치스러운 죽음에 넘겨집니다. 히스기야 왕이 인정하고 총애하는 관료였지만, 그는 왕에게 봉사하지 않고 자신을 위하여 권력을 남용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에게 끼친 수치는 허락되지 않은 곳에 묘실을 판 것만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파국적 재앙을 가져온 히스기야 왕의 대외 정책에 셉나가 중추적 역할을 했으리라는 추측은 그의 직책으로 보아 충분히 가능합니다. 셉나는 예루살렘 왕궁에서, 아마도 애굽의 지원을 기대하면서, 반앗수르 노선을 주도한 인물이었습니다. 앗수르 위기를 오로지 정치적 시각에서 파악하는 예루살렘 왕궁에는 다윗 왕조의 보존을 약속해주신 여호와를 위한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를 배제한 예루살렘 정치의 세속화(불신앙)에 맞서 일관하여 역사를 경영하시는 분께 의지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셉나가 포로로 잡혀 앗수르에서 죽게 될 것을 말하는 17-18절과 달리 19절은 그가 관직에서 쫓겨나고 그의 지위가 낮아질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 36:3(왕하 18:18)은 셉나를 ‘서기관’으로 소개합니다.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위협하는 사이에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셉나가 서기관으로 강등됐음을 보여줍니다. 사건적 순서로 보면, 19절의 심판이 17-18절의 심판에 선행합니다. 셉나는 최고위직에서 쫓겨나 낮은 자리로 밀려났다가 사로잡혀 앗수르로 끌려가게 됩니다.

 

엘리야김의 임명과 실패(20-25)

권세를 가진 자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는 엘리아김의 경우와 같이 일가친척들로 인한 폐단입니다. 이는 권세자는 자신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주의깊게 관리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이를 위해서 세상의 모든 권세자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권세를 부여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자신이 그분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0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21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22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23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24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의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모든 항아리까지니라 25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의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20-25)

 

이사야의 예언이 열방에서 개인으로 이동합니다. 아비의 마음으로 정치하지 못한 셉나의 죄를 묻고, 엘리아김은 강등된 셉나의 자리를 대신하여 그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이사야의 탄핵 이후 지위는 낮추어졌는데, 이것은 그의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1) 셉나를 대신하는 엘리아김(20-21a)

 

엘리아김에 관한 신탁도 다윗 왕조의 보존과 관련한 말씀입니다. 왕궁의 권력을 장악한 셉나가 다윗 왕조를 멸망의 수렁으로 빠뜨리자 여호와께서 다시 개입하십니다. 그분께서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불러 셉나를 대신하게 하십니다(20). 산헤립이 파견한 랍사게와 항복 조건을 협상할 때 엘리아김은 ‘왕궁을 맡은 자’로 협상단의 대표로 활동합니다(36:3). 엘리아김에게는 여호와의 기대가 담긴 명예로운 호칭도 주어집니다. 엘리아김이 모세(민 12:7; 수 1:2; 왕하 21:8)와 다윗(삼하 3:18; 7:5; 왕상 11:13)처럼 ‘내 종’으로 불립니다. 여호와와 엘리아김의 관계가 주인과 종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엘리아김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그 분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이름의 의미(‘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시다’)에 걸맞게 엘리아김은 다윗 왕조를 다시 세우시려는 여호와의 계획을 실행하는 자로 부름 받습니다. 왕이 그에게 권력을 위임했다는 징표로 엘리아김에게 관복이 입혀지고 띠가 매어집니다(21).

 

(2) 엘리아김에게 주는 약속(21b-23)

 

그는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집의 아버지’가 됩니다. 원래 왕과 백성의 관계를 보여주는 표현이 엘리아김에게 적용됩니다. 왕이 백성의 아버지인 것처럼 그를 임명한 왕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립니다. 또 그의 어깨에 다윗 집의 열쇠가 놓입니다(22). 옛날에는 왕궁과 성전의 문을 잠그는 열쇠가 무척 커서 어깨에 멜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여기서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엘리아김이 히스기야 왕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아 다윗 왕조를 굳게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습니다. 그의 어깨에 다윗 왕조의 미래가 달립니다. 그에게 앗수르 문제로 인해 흔들리는 다윗 왕조의 초석을 다시 굳건하게 할 임무가 맡겨집니다.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는 엘리아김의 절대 권위를 보여줍니다. 그의 결정은 최종적인 결정이 되고 누구도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아김에게 지속적인 번영과 성공을 약속해주십니다. 천막을 안전하게 고정하기 위해 단단한 땅바닥에 박는 못(말뚝)처럼 그를 박으실 것입니다(23). 못의 비유는 그의 지속적 성공과 다윗 왕조(천막)의 안전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3) 엘리아김의 실패(24-25)

 

여호와께서 엘리아김을 도와 다윗 왕조에 주신 약속을 이행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적극적 지원과 약속에도 불구하고 엘리아김은 실패합니다. 최고위직에 오른 엘리아김으로 인해 가문이 영광을 누리지만, 그의 권세와 성공이 족벌주의의 함정에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의존하여 출세하려는 집안사람들이 그를 실족하게 만들었습니다(24). 23절과 달리 여기서는 못이 땅바닥이 아니라 벽에 박힌 것을 전제합니다. 걸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못이 부러져 떨어지듯이, 엘리아김도 집안사람들의 불의의 무게에 눌려 파멸합니다(25).


지도자를 통해 하나님과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지도 합니다. 떠나고 싶은 지도자가 있고, 따르고 싶은 지도자가 있습니다. 시대의 위안이 되는 지도자가 있고, 시대의 위기를 더하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지도자의 문제만이겠습니까!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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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2-01)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

이사야 22장 1-14절


 

하나님의 자녀들은 달라야 합니다. 세상과는 우상의 나라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지대로 일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분깃으로 간직한 나라이기에 달라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난 언약 백성도 이방 나라처럼 간주하실 것이고, 배역한 예루살렘을 적군을 상대하듯 심판하실 것입니다.

 

  • 멸망을 눈앞에 두었던 예루살렘 주민들이 갑작스러운 국면 전환에 환호합니다. 다들 구원과 해방의 기쁨에 들떠 소란하게 떠듭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앗수르 군대가 왜 갑자기 철군하게 됐는지를 파악해보려 하지 않고 눈앞의 승리만 즐깁니다. 이들의 영적 무지와 무책임을 보며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필연임을 예감하고 탄식합니다.

 

예루살렘의 환호와 예언자의 탄식(1-4)

왜 성도들이 대적들에게 쫓기고 굴욕을 당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순종하길 원하셨지만, 그 백성들이 순종히 아니함으로 대적들에게 패배를 당한 것입니다. 순종치 않으면 분명히 패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대비하고 교만했지만,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1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 2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 3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4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1-4)

 

이사야는 환상의 골짜기, 즉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합니다. 예루살렘성 사람들은 외부 침략에 대비하여 무기를 만들고 저수지도 만들고 성도 수축하였습니다. 이제 스스로 자신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교만해진 예루살렘을 심판하십니다.

 

(1) 환호하는 성(1-2a)

 

예루살렘 거민들은 앗수르의 2차 공격 때 하나님의 간섭으로 인해 앗수르 군대가 철수한 것을 보고 즐거워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예루살렘을 향해 경고하도록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거민들을 넓고 평편한 지붕으로 올라가서 서로 즐겁게 전쟁에서 승리함에 대해 노래하였습니다. 적의 포위 공격 앞에 몸을 숨겼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평편한 지붕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의 해방과 생존을 기뻐하며 환호합니다. 그곳에서 전쟁에 살육당한 앗수르 군사의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던 것입니다.

 

(2) 부패한 지도자들(2b-3)

 

이사야는 환호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탄식합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지휘관들이 용감하고 유능해서 적들이 퇴했습니까? 이들은 수치스럽게 자기 살려는 궁리만 했습니다. 적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포위된 성을 빠져나갈 기회만 엿봤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싸우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도망치다가 죽었습니다. 도망치다가 적을 만나면 항복하거나 앗수르의 추격을 따돌리지 못하고 다 붙잡혔습니다.

위기관리를 책임진 자들의 도덕적 붕괴는 예루살렘의 총체적 무지와 무능력을 그대로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왕조 18:13).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이사야는 함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통곡할 뿐입니다. 그의 탄식은 멸망할 동포에 대한 연민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내적 부패와 영적 무지 때문에 예루살렘이 멸망을 꾀할 수 없음을 알고 슬피 운 것입니다.

 

(3) 절망하는 예언자(4)

 

이사야는 하나님의 간섭으로 비록 앗수르 군대가 패했지만, 지금은 절대로 즐거워 할 때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고 말합니다. 해방을 환호하는 자들 가운데서 임박한 멸망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 이사야의 통곡은,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를 향한 풍자이기도 합니다.

기뻐할 때가 아니라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슬퍼해야 할 때임을 모르는 예루살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앞으로 눈물을 흘릴 것임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의 무지와 깨달음 없음(불신앙)을 알기에 그는 이들에게서 위로받기를 거절합니다.

 

여호와의 날(5-8a)

전쟁을 하면서 완벽하게 준비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한 가지가 빠진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빠짐없이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어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전쟁에서는 가장 결정적인 한 가지는 하나님 없는 대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것들이 준비되었다고 기뻐하지만, 마지막 하나님과 함께 하는 준비가 없었습니다.

 

5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쳐 부르짖는 소리로다 6엘람 사람은 화살통을 메었고 병거 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드러냈으니 7병거는 네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되었도다 8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5-8a)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도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외세 침략에 의한 정복을 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미신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안전을 결정합니다.

 

(1) 혼란의 날(5)

 

이사야는 환상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그의 시선이 현재에서 앗수르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위기의 때로 되돌아갑니다. 여호와의 심판 날은 앗수르가 심판 받는 날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심판하는 날이었습니다. ‘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쳐 부르짖는 소리로다’라고 예언합니다. 이 ‘소란과 밟힘과 혼란’에 떨어졌던 날입니다. 이 세 단어는 비슷한 발음들로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공격하셨던 날, 안전을 보장해주던 성벽이 무너졌던 날입니다(29:2-3). 성이 함락당할 위기에 빠지자 예루살렘 주민들은 시온 산을 향해 도움을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알았기에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공격하시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여호와의 도구는 먼 곳에서 온 민족들입니다.

 

(2) 포위당한 예루살렘(6-7)

 

예루살렘을 공격할 앗수르 군사들의 위용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습니다. 활과 방패로 무장한 보병뿐 아니라 기마병과 병거까지도 철저하게 준비해서 예루살렘 공격에 모두 동원됐습니다.

‘엘람(Elam)’과 ‘기르(Kir)’의 병사들이 병거대와 기마대와 함께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선봉에 섰습니다. ‘엘람’은 바벨론 동복쪽 자그로스 산맥과 타그리스 강의 하류에 이르는 고원 사는 부족인데, 예로부터 활을 잘 다루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들은 통에서 화살을 꺼냈고 있었습니다(참조. 렘 49:34-39). 그리고 ‘기르’는 메대 근처에 있는 앗수르의 한 지방인데, 그 군사들은 전쟁 준비를 완전히 준비해서 방패집에서 방패를 꺼내 공격할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침략군이 예루살렘 주변의 모든 골짜기에 진을 치고 공격 부대를 성문 앞에 전진 배치했습니다.

 

(3) 벗겨진 유다의 덮개(8a)

 

여호와께서도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상태를 올바로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자께서 유다를 더 이상 지켜주지 않으시고 적의 공격에 넘겨주기로 하셨기에, 예루살렘의 함락은 이제 시간문제입니다.

 

군사적 대비(8b-11)

믿는 사람들은 위기를 만날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다움과 같은 것들을 먼저 생각하고 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곤경에 빠져들게 됩니다.

 

8…그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 9너희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너희가 아랫못의 물도 모으며 10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 11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8b-1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번에 승리가 영원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앗수르의 재침략은 이스라엘에게 패닉 상태에 빠지게 했습니다. 엘람의 기병과 마병대 앞에서 예루살렘은 위태로웠고,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 유다를 보호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1) 병기를 바라보는 자들(8b-9)

 

이 단락의 시점은 얼마간 불분명합니다. ① 먼저 예루살렘 포위공격(5-8a) 이전 단계, 곧 앗수르의 군대가 유다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묘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략하려고 원정에 나섰을 때, 예루살렘 사람들은 군사시설을 점검하고 보강하면서 포위공격에 대비하였습니다.

② 다른 시각은 앞 단락의 연속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성을 포위한 적의 총공격에 대비하여 성벽을 점검하며 방어선을 보강하였습니다. 적의 계속된 공격으로 큰 피해를 본 예루살렘은 끝까지 저항하기 위해 파손된 방어 시설을 긴급하게 보완하거나 보충합니다. 두 시점 모두 가능하지만, 여기서는 두 번째 입장을 따라 읽습니다.

 

(2) 방어 시설 점검(10-11a)

 

원정에 나선 앗수르 군대는 유다의 모든 요새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예루살렘은 새장에 갇힌 새의 신세가 됐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앗수르의 총공격에 대비하여 가능한 모든 무장을 갖추고 방어 시설을 정비하고 보강했습니다. 이들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습니다. 레바논 나무 궁으로 불리는 ‘수풀 곳간’은 길이가 백 규빗, 너비가 오십 규빗, 높이가 삼십 규빗(왕상 7:2) 되는 건물로, 솔로몬은 여기에 큰 방패 이백 개와 작은 방패 삼백 개를 두었습니다(왕상 10:16-17; 14:25-28).

‘수풀 곳간’이 병기고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유다의 군사력을 상징하는 역할은 담당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다윗 성에 균열이 많음을 보고 성벽도 보강했습니다. 역대하 32:5과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는 히스기야 시대에 성벽의 보강과 확대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물 확보는 성안에 지하 샘이 없었던 예루살렘 방어의 관건이었기에(7:3) ‘아랫못’에 물도 모아두었습니다. 또 예루살렘 주변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전시 비축물을 보관할 장소를 마련하고, 무엇보다도 일부 거주 지역을 군사시설로 활용하기 위해 가옥의 수를 세었습니다.

 

(3) 환호하는 성(11b)

 

다음 조치로 병력의 신속한 이동이나 공성에 방해가 되는 성벽 주변의 가옥을 허물었고, 또 다른 긴급조치로 두 성벽 사이에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웅덩이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는 것 자체는 결코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옛 못’은 아마도 ‘윗못’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옛 못(윗못)과 아랫못은 기드론 계곡 아래 끝에 서로 인접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앗수르의 총공세에 대비해 예루살렘 사람들도 방어 태세를 갖췄습니다. 그러나 예언가 보기에 이들의 대비는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위기의 본질을 알아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앗수르에 의한 예루살렘 포위 공격이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임을, 그분의 계획에 속한 일임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눈앞의 위기를 오직 정치적-군사적 시각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예언자는 ‘보다’, ‘바라보다’를 의미하는 동사 ‘나바트’와 ‘라아’를 사용해 예루살렘의 불순종과 어리석음을 인상적으로 고발합니다. 예루살렘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아니하고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 이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고,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을 ‘보았습니다.’

 

절망을 확정 짓는 완악함(12-14)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사역에서 승리하도록 인도해주섰다면 하나님께서 영광과 찬송을 돌린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높이지 않고 자신들이 해낸 일인 듯 자축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노여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만함에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12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13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 14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2-14)

 

여호와를 앙망하지도 공경하지 않은 예루살렘을 앗수르의 마수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잘해서가 아니라, 자경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시 한 번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건지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통곡하고 애곡해야 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잔치를 벌였던 것입니다.

 

(1)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12-13)

 

예언자는 국가적 재앙과 극적 구원을 경험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앗수르의 철군은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지금은 굵은 베옷을 입고 머리털을 깎고 통곡하며 애곡할 때입니다.

환호도 좋지만, 예루살렘은 먼저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고 죄악을 참회해야 합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의 외침은 예루살렘 주민들의 냉소적 반응만 불러옵니다. 이들은 내일이면 죽을 몸이니 먹고 마시기나 하자고 떠들며, 앗수르의 철군으로 위험에서 벗어난 오늘을 즐깁니다. 아무도 예루살렘의 위기와 구원에서 여호와의 의지를 읽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신학에 빠진 자들에게 여호와에 의한 예루살렘의 심판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앗수르의 위기와 해방은 철저하게 정치적 사건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돌아오기를 거절하는 예루살렘의 완악함에 여호와께서 단호하게 마지막 판결을 내리십니다.

 

(2) 멸망을 피할 수 없게 하는 죄악(14)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내일이면 죽을 몸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죽음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앗수르에 의한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은 이사야가 거듭 비판한 반 앗수르 정치의 필연적 결과였지만, 유다와 예루살렘은 여전히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를 거절했습니다.


세상에 포위되어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습니까? 그것이 혹시 내 죄와 영적인 방만함과 나태함이 불러온 결과는 아닙니까, 그렇다면 상황을 바꿔달라고 구하기 전에 내가 변하기를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손 놓으시는 상황이 되기 전에 자기 민족의 잔치를 치우고 어서 돌이켜야 합니다.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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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1-01)


파수꾼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이사야 21장 1-17절


 

영원한 제국은 없습니다. 역사 속 제국들은 부와 힘이 강자(권력자)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의 이름’을 차용해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그들이 만든 그 ‘불변의 헤게모니’가 결국 제국이 몰락한 이유라고 일갈합니다.

 

  • 21장은 해변 광야(바벨론)의 두마와 아라비아의 드단과 게달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들 민족들이 심판에 떨어지는 이유는 달리 제시되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경우만 2절과 9절의 폭력과 우상숭배에 관한 언급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집니다. 또 엘람과 메대의 공격으로 멸망당하는 바벨론을 제외하면 두마와 드단과 게달을 위협하는 적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1-10)

하나님 나라에 적대적인 세상 나라는 아무리 강대할지라도 결국 비참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두어야 함을 교훈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강대한 바벨론 제국도 순식간에 멸망시키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불러일으킵니다.

 

1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적병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네겝 회오리바람같이 몰려왔도다 2혹독한 묵시가 내게 보였도다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대여 에워싸라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노라 하시도다 3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해산이 임박한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나를 엄습하였으므로 내가 괴로워서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 4내 마음이 어지럽고 두려움이 나를 놀라게 하며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 5그들이 식탁을 베풀고 파수꾼을 세우고 먹고 마시도다 너희 고관들아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바를지어다 6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가 보는 것을 보고하게 하되 7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과 나귀 떼와 낙타 떼를 보거든 귀 기울여 자세히 들으라 하셨더니 8파수꾼이 사자같이 부르짖기를 주여 내가 낮에 늘 망대에 서 있었고 밤이 새도록 파수하는 곳에 있었더니 9보소서 마병대가 쌍쌍이 오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여 이르시되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도다 하시도다 10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전하였노라(1-10)

 

본문에서는 바벨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먹고 마시며 즐기던 ‘해변 광야’ 곧 바벨론도 자신에게 급작스럽게 닥칠 재앙을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이사야는 바벨론의 참혹한 멸망에 관한 묵시를 보고 심히 괴로워합니다. 바벨론은 다른 나라들을 속이고 약탈을 일삼음으로 부와 권력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약탈을 당하고 다른 나라들에 행한 그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1) 묵시와 그에 대한 반응(1-4)

 

해변 광야에 있던 네겁을 휩쓸고 지나가는 뜨거운 회오리바람처럼 재앙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몰려옵니다(1). 사납고 무서운 적이 ‘해변 광야’(바벨론)로 질풍처럼 들이닥칩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본 묵시를 ‘혹독한 묵시’로 소개합니다(2).

묵시의 내용과 관련된 표현으로,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무섭게 심판하실 것을 시사해줍니다. 심판의 도구로는 엘람과 메대가 사용됩니다. 여호와께서 엘람과 메대에게 올라가서 바벨론을 포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들은 한때 바벨론과 동맹을 맺었던 민족들이었습니다. 속이고 약탈하였던 바벨론이 이제속임을 당하고 약탈을 당합니다. 여호와께서 엘람과 메대를 보내 ‘모든 탄식’을 그치게 하십니다. 누가 탄식하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지만, 10절에 따르면 바벨론에 짓밟힌 이스라엘이 됩니다.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혹독한 묵시에 이사야가 격렬하게 반응합니다(3-4). 모압의 경우처럼(15:5; 16:9, 11) 바벨론의 멸망에 연민을 느꼈기 때문은 아닙니다. 엄중한 묵시가 초래한 심리적 충격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반응으로, 바벨론의 심판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집행될지를 시사해주기도 합니다. 그의 고통은 해산하는 여자의 진통과도 같은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묵시의 충격에 그의 몸은 떨리며 그의 마음은 혼란스러워집니다. 잠을 자며 안식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밤이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욥 7:13-14).

 

(2) 갑작스러운 적의 침략(5)

 

5절부터 이사야의 시선이 바벨론의 지배 계층을 향합니다. 고관들이 상을 차리고 자리를 펴고 먹고 마시며 즐기다가 갑자기 적의 공격을 받고 당황해 건투에 임합니다.

태평성대를 즐기던 바벨론에 멸망이 갑자기 찾아옵니다. 연회의 즐거움과 안일함에 빠져 살던 고관들은 뒤늦게 성을 방어하려고 전투에 임합니다. 방패에 기름을 바르는 행위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나무와 가죽으로 방패를 만들었고 때로는 장식이나 보강을 위해 금속을 덧대기도 했습니다. 화살이나 창에 방패가 망가지지 않도록 전투에 임하기 직전 무기고에 있던 방패를 꺼내 기름을 발랐던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제의적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신에 대한 의무를 지고 거룩한 전쟁에 나서는 봉헌 행위를 함축합니다.

 

(3) 파수꾼의 보고(6-9)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파수꾼을 세우고 그에게 소상한 지침을 주어 전투 전개 상황을 보고하게 하십니다(6-7). 예언자가 세우는 파수꾼은 실질적으로는 예언자 자신일 수 있습니다. 하박국(2:1)과 에스겔(3:16-21)의 경우처럼 이스라엘의 예언자는 파수꾼으로 불리기도 한다. 망루에 세워진 파수꾼은 원래 적의 침략과 같은 위험한 상황을 경고하여 재난에 대비할 수 있게 해줍니다. 본문의 파수꾼은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채 메대와 엘람의 침략군과 바벨론의 방어군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관찰해 보고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파수꾼에게 준 지침은 침략군의 병력 이동에 관한 세심한 관찰입니다. 밤낮 쉬지 않고 망루에 서서성 밖을 감시하던 파수꾼이 다급하게 전황을 보고합니다(8-9). 이 다급함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침략군의 병거 부대와 기마 부대가 진격해오자마자 성이 함락됩니다. 위용을 자랑하던 성이 적의 공격에 한순간 점령되고, 거대하고 화려한 바벨론의 신상들도 부서져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집니다. 바벨론 함락과 함께 신들도 종말을 맞습니다. 신상 파괴는 바벨론의 신들이 헛 것임을 보여줍니다.

 

(4) 여호와께 들은 것(10)

 

10절의 ‘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의 원문은 직역하면 ‘나의 짓밟힌/타작된 것아, 나의 타작마당의 아들아’입니다. 1인칭 ‘나’가 하나님이라면 상대는 바벨론 또는 이스라엘이 될 수 있고, 이때는 이사야의 1인칭으로 기술된 하반절에서 독립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이해에 따르면 10절은 하나의 문장으로 상반절의 ‘나’도 이사야입니다. 이 경우 10절은 이사야가 바벨론에 짓밟히고 억압당하는 자기 백성에게 주는 말씀이 됩니다. 그는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신탁을 통해 제국주의적 세력에 짓밟힌 이스라엘을 위로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멸망을 확정하셨기에 짓밟힌 이스라엘은 인내를 갖고 기다리면 됩니다(14:1-2). 짓밟음/타작은 대개 심판을 의미하지만, ‘타작마당의 아들’은 타작의 수확물을 가리킬 수도 있기에 심판 이후 회복이 담긴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두마에 관한 경고(11-12)

성도들은 때를 잘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항상 깨어 근신하여 흠 없는 모습으로 심판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채지를 해야 합니다. 두마처럼 정적과 침묵의 상태에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최후 심판과 세상 끝 날은 반드시 도래할 것입니다.

 

11두마에 관한 경고라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12파수꾼이 이르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하더라(11-12)

 

파수꾼 예언자가 1인칭 화자로 등장합니다. ‘세일에서’ 누군가가 파수꾼에게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하고 거듭 외칩니다. ‘밤이 얼마나 남았느냐?’는 재앙의 기간이 언제 끝날지를 묻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묻는 자의 신분은 감춰져 있는데, 아라비아에서 피난 온 자나 그 지역의 긴박한 정세를 관찰하도록 임무를 맡은 자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아라비아 사막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또는 군사적 사건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를 파수꾼 예언자에게 다급하게 묻습니다. 완료시제가 사용된 파수꾼의 답변은 거의 오리무중입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현재의 밤(재앙)은 하룻밤에 끝나지 않고 반복적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밤이 언제 끝날지를 알고 싶으면 나중에 다시 물어야 합니다. 두마의 재앙은 당분간 지속될 것입니다. 아침과 밤의 비유는 재앙의 기간이 제한적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너희는 돌아올지니라’는 파수꾼과 세일에서 외치는 자가 물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졌음을 보여주고, 앞으로의 새로운 질문에는 어떤 결단이 수반돼야 함을 시사합니다.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13-17)

잠시 찾아온 아침은 희망이 아닌 더 큰 절망만 안겨다 줄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한, 인생의 밤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짧은 인생동안 행하는 일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같이 드단의 대상들처럼 갑작스럽게 심판을 맞지 아니라고 그 심판의 날에 영광과 복을 얻는 참 비결이 될 것입니다.

 

13아라비아에 관한 경고라 드단 대상들이여 너희가 아라비아 수풀에서 유숙하리라 14데마 땅의 주민들아 물을 가져다가 목마른 자에게 주고 떡을 가지고 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 15그들이 칼날을 피하며 뺀 칼과 당긴 활과 전쟁의 어려움에서 도망하였음이니라 16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17게달 자손 중 활 가진 용사의 남은 수가 적으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3-17)

 

에돕에 대한 예언에이어서 이방 국가 10개국 중 아홉 번째인 아라비아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아라비아에 대한 예언에 있어서도 앞 단락의 에돔에 대한 예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멸망이 시기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1) 드단에 관한 말씀(13-14)

 

드단은 메디나와 데마를 잇는 ‘유향의 길’에 있는 오아시스로, 방어하기 좋게 붉은 사암으로 된 바위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드단의 대상들은 광야의 덤불(‘아라비아의 수풀’) 속에서 밤을 지내야 합니다.

대상들이 전쟁과 같은 위험한 환경을 피하여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상품과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편안한 통상로를 벗어나 험난한 길로 조심스럽게 움직입니다. 통상로를 벗어나면 약탈과 피습의 위험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부족한 물과 양식을 보충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칼과 화살 대신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의 부족이 이들의 생명을 위협합니다.

예언자는 굶주림과 목마름의 위험에 노출된 드단 대상들에게 물과 양식을 공급해주라고 ‘데마 땅의 주민들’에게 권면합니다. 데마는 직선거리로 드단에서 남동쪽으로 대략 130km 떨어진 곳에 있는 오아시스로, 풍부한 지하수에서 솟아나오는 분수로 유명했습니다. 드단의 대상들이 보호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이들이 전란을 피하여 도망하는 피난민들이었기 때문입니다(15:5-8; 16:1-5).

 

(2) 게달에 관한 말씀(16-17)

 

시리아-아라비아 사막에 사는 유목민 게달족에게 멸망이 선포됩니다.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하여 궁수들이 얼마 남지 않을 것입니다. 궁수가 게달 족의 핵심 전투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광야에서 기습할 때 활은 매우 효과적인 무기였습니다.

본문은 게달족의 극적 쇠퇴에 관심을 집중하고 심판의 방법과 원인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두마와 드단에 관한 신탁과 달리 게달의 멸망을 선포하는 신탁은 서두의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와 결미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를 통해 이 신탁이 여호와에 의해 주어졌음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게달과 이스라엘 사이의 대립적 관계를 암시해줍니다. 시편 120:5-6에 의하면 게달은 메섹과 더불어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제국이 공들여 만든 신화에 속지 말고 참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더 신뢰할 세력은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영광보다 하나님 없는 오늘의 영광에 기대어 살고 있는 건 아닙니까? 그러고도 아침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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