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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9-01)

 


예루살렘을 향한 슬픔의 노래

이사야 29장 1-14절


간혹 음주 단속에 걸린 사람들이 길을 걷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길 위에 그어진 선 위를 걷는데, 흔들흔들하고 삐뚤삐뜰 걷습니다. 그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시고 운전대를 잡은 사람들입니다. 술을 많이 마신 사람들은 똑바로 걷지 못합니다. 술이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지배해서 비틀거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신앙에도 이런 비틀거림이 있습니다.

 

 

  • 사망과 맺은 언약이 예루살렘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 스올과 맺은 협약이 예루살렘을 스올로 내려가게 합니다. 사망과 스올에 사로잡혔기에, 이미 스올의 문을 디뎠기에 예루살렘이 빠져나올 길은 없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다윗과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스올로 내려가는 예루살렘을 건져내십니다.

예루살렘의 곤궁과 구원(1-8)

자만하며 교만했던 이들이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당황하며 슬픔을 이기지 못해 애곡할 것입니다. 선민사상에 경도되어 방종한 삶을 살았던 예루살렘 거민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인생들에게 예상을 빗나가는 징계를 내리십니다.

 

1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친 성읍이여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2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3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너를 에워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4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히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이리라 5그럴지라도 네 대적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의 무리는 날려 가는 겨 같으리니 그 일이 순식간에 갑자기 일어날 것이라 6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레와 지진과 큰 소리와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 7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요새를 쳐서 그를 곤고하게 하는 모든 자는 꿈 같이, 밤의 환상 같이 되리니 8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1-8)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인생들에게 예상을 빗나가는 징계를 내리십니다.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할 때 주신 말씀입니다(22:1-11). 선지자는 아리엘에 대한 슬픔을 표출하며 시작합니다.

 

(1) 예루살렘의 심판(1-4)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아리엘’과 ‘다윗이 진을 친(쳤던) 성읍’으로 부르며 화를 선포합니다(1). 구약성경은 여기서만 예루살렘을 아리엘로 부릅니다. 아리엘이 여호와의 성전과 관련된 이름이라면,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성전 주인 여호와에 의해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성전의 존재가 예루살렘의 구원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의 남다른 지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이름입니다. 다윗이 진을 쳤던 성이 여호와의 공격을 받아 함락 위기에 처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주신 영원한 통치권의 약속(삼하 7장)이 예루살렘을 무조건 지켜주지 않습니다. 유다가 자랑하는 구원사의 두 중심축인 성전과 다윗 왕조의 의미가 상대화됩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에 화를 선포하면서 걱정하지 말고 계속 축제나 즐기라고 신랄하게 풍자합니다. 눈앞에 위기가 닥쳤음에도 예루살렘 주민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제의적 축제에만 열심을 냅니다. 이들의 어리석음으로 생명의 축제가 죽음을 예비하는 축제가 됩니다.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는 축제의 때는 끝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슬픔과 애곡으로 가득 찰 때까지 아리엘(예루살렘)을 괴롭게 하시기에 아리엘(예루살렘)이 그분께 아리엘(제단) 같이 됩니다(2). 여호와의 성전과 다윗 왕조가 있는 예루살렘을 여호와께서 직접 압박하시고 곤경에 처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번제물을 사르는 성전의 제단처럼 됩니다. 번제단의 화덕에 올리는 희생제물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2) 예루살렘의 구원(5-8)

 

1-4절에 따르면 여호와의 공격 대상인 예루살렘이, 5-8절에 따르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민족들이 번제단의 희생제물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두어 기초로 삼은 돌’(28:16)을 신뢰하지 않은 예루살렘과 공격하는 민족들이 모두 여호와께 희생제물로 드려집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예루살렘을 당신의 번제단에 올리십니다. 여호와께서 성 둘레에 진을 치시고 성벽을 뚫기 위해 누벽과 공성 보루를 쌓으십니다(3). 고대 세계에서 성을 공략할 때의 전형적 모습입니다(겔 4:2). 여호와의 공격 앞에 예루살렘은 절망적 상태에 빠집니다. 축제의 즐거움에 빠져 있던 자들이 죽은 자처럼 땅바닥에 쓰러져 신음합니다(4). ‘땅에서’와 ‘티끌에서’는 사망과 스올을 연상시키는 표현입니다. 스올의 손에 넘겨지지는 않았지만, 거의 죽은 자와 같은 신세가 됩니다. 축제의 즐거움과 기쁨으로 소란스럽던 예루살렘에 스올에 사는 자들이 웅얼거림 같은 희미한 신음만 들립니다. ‘신접한 자’는 ‘죽은 자의 영’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적 사고에 따르면 죽은 자는 최소한의 생명력만 남겨진 자이기에 말할 때 분명하게 발음하지 못하고 웅얼거립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 아리엘의 운명이 극적으로 반전됩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대적의 무리가 바람에 날려가는 티끌이나 겨처럼 한순간에 홀연히 사라져버립니다(5). 이미 스올의 문턱을 넘은 예루살렘이 구원을 받고, 성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던 적은 무엇엔가 홀린 듯 갑자기 포위를 풀고 도주합니다. ‘순식간에 갑자기’는 이러한 반전이 예루살렘의 능력이나(22:2-3) 대적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초자연적 힘에 의해 일어날 것을 시사해줍니다. 침략군 편에서 예루살렘을 치시던 여호와께서 갑자기 진영을 바꿔 예루살렘 편에서 침략군을 치십니다(6).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던 분께서 예루살렘의 구원자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셔서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자들과 싸우십니다. 그분의 개입에 의한 반전이 너무도 갑작스럽고 극적이기에 사람들은 미처 현실로 깨닫지 못합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눈앞에 보이던 그 많은 적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을 보고 꿈을 꾸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7).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추호도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기에 눈앞의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마치 꿈속에서 푸짐한 잔칫상에 앉아 배불리 먹고 마시지만 깨어나면 허기지고 목마른 것처럼, 예루살렘의 침략이 허망하게 끝납니다(8). 37:36-37에 따르면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군대를 쳐서 산헤립이 포위를 풀고 제 나라로 돌아가게 합니다.

 

분별력 없는 백성(9-14)

많은 성도들에게 성경은 이미 봉해진 책과 같습니다. 교회에 와서 짧은 설교를 들을 때 외에는 성경을 항상 덮어 둡니다. 설교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희귀해집니다. 또한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사람의 말로 듣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러면 말씀대로 똑바로 걸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말씀을 귀하게 여길 때 말씀을 따라똑바로 걸을 수 있습니다.

 

9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10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11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12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13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14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9-14)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에 형식적으로 반응하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신 것입니다. 가장 우선적인 심판은 유기입니다. 어두운 마음이 계속 어두워지도록 하십니다.

 

(1) 스스로 장님이 되는 자들(9-10)

 

첫째 단락(9-10)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거절하고 오직 멸망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이해할 수 없는 완악함을 다룹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말씀을 전할수록 이스라엘은 더 등을 돌리고 완고하게 제 길을 갑니다. 이들은 맹인이 아닌데도 눈먼 자처럼 더듬고,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술 취한 자처럼 비틀거립니다. 눈앞에 전개되는 사건에 놀라 당황해할 뿐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에서 하나님의 심판 의지를 읽어냅니다. 하나님께서 의식이 완전히 차단되는 깊은 잠에 빠뜨리셨기에, 이스라엘이 영적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하나님 구원 능력의 한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심판의 확정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스스로 택한 불순종의 완악함에 넘겨주시고, 이러한 불순종의 굴레가 이들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압니다(6:9-10). ‘깊은 잠’은 의식이 완전히 차단되는 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여 그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창 2:21), 아브라함을 깊이 잠들게 해 언약을 세우십니다(창 15:12; 삼상 26:12).

 

(2) 거절된 예언자의 선포(11-12)

 

완악함의 사슬에 매인 자들에게 예언자의 선포는 ‘봉한 책의 말’이었습니다(11-12). 글을 아는 자는 뜯어볼 수 없도록 봉인되었기에 읽을 수 없고, 글을 모르는 자는 봉인과 상관없이 해독 능력이 없기에 읽지를 못합니다. 읽을 수 없다는 점에서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나 한가지입니다(렘 5:1-5). 누구도 하나님의 의지를 알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부으신 ‘깊이 잠들게 하는 영’(깊은 잠의 영)으로 모든 사람의 귀가 막혀서 예언자의 선포가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교통이 완전히 차단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9-12절은 기적적인 구원 경험(1-8)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극적 간섭에 의한 예루살렘의 구원이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심화시켜 완전한 멸망으로 내몹니다(22:12-14).

 

(3) 피상적 신앙에 대한 경고(13-14)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경건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찾는 위선적-형식적 경건이었습니다(13-14).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를 드리고 찬양과 감사 또는 탄식의 노래를 부르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있습니다. 제의적 경건 때문에 성전을 찾지만, 삶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 경외는 제의적 가르침(교리)을 통해 습득한 지식에 과했습니다. ‘사람의 계명’은 제의와 관련한 규정입니다. 제의 규정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제의적 경건이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버렸습니다. 제의 준수의 열정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가 됐습니다. 제의 규정 준수에만 열정적인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기이한 일’은 원래 하나님께서 당신 능력을 과시하는,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출애굽과 같은 신적 사건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징벌을 가리키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지혜자들의 지혜가 사라지고 슬기로운 자들의 슬기가 감추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은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 사이의 연관성을 전제하는데, 이 양자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그분의 기이한 일을 깨달아야 하는데,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의 지혜는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지혜자들의 지혜의 어리석음을 폭로합니다(고전 1:18-31).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징계를 내리실지라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없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징계와 심판의 양면이 있습니다. 양상은 다르지만 모두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백성을 때로 징계하시고 심판하시지만 결국은 마지막 순간에라도 극적으로 구원하시며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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