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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9-02)


회복되는 이스라엘

이사야 29장 15-24절


 

말씀을 잃어버린 채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기이한 일은 소망이며 탈출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기이한 일을 펼쳐 가십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이 펼쳐질 때 어떤 변화들이 나타날지 선포합니다.

 

  • 정치지도자들은 유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이들의 교만은 민족의 생존에 치명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지혜와 결정에 의거해서 역사를 결정할 수 있다고 과신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정치 무대에서 은퇴시키고 주인공으로 처신했습니다. 이들의 교만과 어리석음이 하나님 백성을 불순종과 멸망의 길로 내몹니다.

 

여호와를 무시하는 정치(15-16)

인간의 가장 큰 착각은 은밀한 계획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자신이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 인간은 교만한 일, 오만한 일을 도모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고 정직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15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16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15-16)

 

토기장이 진흙의 비유만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잘 설명한 비유도 없습니다. 이 비유가 가장 적실하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자주 불평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임을 잊고 사는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깊이 살펴야 합니다.

 

(1) 자기 계획을 숨기는 자(15)

 

예언자는 여호와 모르게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꾸미는 자들에게 화를 선포합니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주변 나라 은밀하게 정치적 거래를 도모하는 정치가들을 가리킵니다(28:14-15). 이들은 왕의 자문관으로 활동하면서 실질적으로 유다의 정치를 결정하고 집행했습니다. 지혜자들로 인정받는 왕궁정치가들이 앗수르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같은 처지에 있던 나라들과 연합을 추진했습니다. 이들은 앗수르의 감시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은밀하게 일을 꾸몄습니다. 이사야가 문제로 삼은 것은 이들의 비밀스러운 태도나 동맹정치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여호와 몰래 추진한 불신앙이었습니다. 시온산에 계시는, 다윗 왕조의 영원한 통치를 약속하신 여호와를 안중에 두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에 여호와는 철저히 국외자였습니다.

 

(2) 스스로 결정권자가 되려는 자(16)

 

‘어두운 데’(어둠)의 ‘마흐샤크’는 구약성경에서 죽음의 자리로(시 74:20; 88:6,18; 143:3; 애 3:6), 자기 지혜와 판단에 의존한 이들의 계획이 멸망으로 끝날 것을 시사합니다.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는 시편에서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시 64:5-6; 94:7), 예루살렘 정치가라는 자들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악자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전도시키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보다 사람의 지혜를 우선시하고 창조주의 능력보다 피조물의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뛰어난 지혜와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하나님께 묻거나 의지해야 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이사야는 이들의 오만을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로 고발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과 같을 수 있습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자기를 만든 사람에게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빚어진 것이 자기를 빚은 자를 두고 ‘그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치가들의 행태는 피조물이 창조주의 능력을 부정하고, 대신 자신을 창조주의 자리에 놓는 것과 같았습니다. 어리석음을 지혜로 자랑하고 교만을 능력으로 주장하는 자들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은 ‘어둠’ 속에서 ‘어둠’을 잉태한 계획이기에 파국적 결말은 필연입니다.

 

여호와의 응답(17-21)

모든 변화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표면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깊은 중심부터 변화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변화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17오래지 아니하여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않겠으며 기름진 밭이 숲으로 여겨지지 아니하겠느냐 18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19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20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21그들은 송사로 사람에게 죄를 씌우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하게 하느니라(17-21)

 

인간의 은밀한 계략과 비밀스런 계획은 모두 실패하고 교만이 드러납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패역과 불순종을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도록 만드십니다. 이 변화는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바뀌고 다시 기름진 밭이 숲으로 바뀌는 것처럼 엄청나고 놀랍습니다.

 

(1) 구원 시대의 변혁(17-18)

 

예루살렘 정치가들의 어리석은 지혜가 전도시켜놓은 것을 여호와께서 바로잡으십니다. 유다의 안전과 번영은 오만한 정치가들의 손에 달려있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대전환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분께서 창조주의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고 기름진 밭은 숲으로 여겨질 것입니다(17; 32:15).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울창한 숲처럼 산림 지대가 과수원으로 뒤덮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땅이 생존에 필요한 것을 풍족하게 공급합니다. 자연의 변혁은 그분께서 열어주실 구원 시대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영적 무지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못 듣는 사람이 듣고 맹인이 보게 된다(18). 막혔던 귀가 뚫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고, 들러붙은 눈이 열려 그분의 놀라운 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죽음과 저주의 영역에서 생명과 축복의 영역으로 옮겨집니다. ‘책의 말’은 이사야의 선포가 문서로 기록되었음을 전제합니다. 예언자의 선포가 청자들에 의해 거절되었지만, 일부 지지자들에 의해 문서로 기록되어 그 성취를 기다립니다. 앞으로는 사람들이 이사야의 예언이 기록된 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현재 문맥에서 ‘책의 말’은 11-12절에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봉한 책의 말’처럼 되어버려 읽을 수 없었던 심판 시대가 끝나고 봉인이 풀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구원 시대가 열립니다.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는 장애의 극복 이상을 의미합니다. 눈이 열릴 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 배후를 꿰뚫어 볼 수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치가들이 어두운 데에서 꾸미는 계획도 다 볼 수 있어 다시는 어둠 속에서도 실족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에 의한 자연의 변혁과 영적 갱신이 삶의 공간에서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도 창조질서가 회복됩니다.

 

(2) 겸손하고 가난한 자의 기쁨(19)

 

사회적으로 억눌린 ‘겸손한 자’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즐거워합니다(19). ‘겸손한 자’와 ‘가난한 자’는 1차적으로는 사회적 범주에 속한 개념이지만, 특히 예언자들의 선포에서는 종교적 의미도 갖습니다. 이들은 여호와 앞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자들, 곧 여호와 외에는 다른 곳에서 도움을 찾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강자에게 억눌리고 빈곤하게 살지만, 여호와 신앙에 신실한 자들입니다. 구원 시대에 이들의 성실함이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시온 산에서 하나님 현존의 놀라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3) 강포한 자의 종말(20-21)

 

반면에 여호와께 경건한 약자를 억압하던 ‘강포한 자’와 ‘오만한 자’(비웃는 자)는 심판을 받아 제거될 것입니다(20). 이들은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 곧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죄짓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파렴치한 행태는 송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가진 힘과 능력으로 법을 조작해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게 합니다(21). 소송에서 임의로 판결하고 죄 없는 사람의 권리를 짓밟는 것도 부족해서 약자의 권리를 위해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무를 놓아 침묵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법과 정의를 무시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임박한 구원 시대에 참여하지 못하고 모두 멸망 당합니다.

 

요약하자면, 구원 시대에는 여호와께서 이루실 변혁에 의해 종교와 사회와 자연의 선순환 구조가 마련됩니다.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기에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여호와의 말씀을 알기에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며 살고, 정의와 공의가 충만하기에 자연이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야곱의 구원(22-24)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그릇은 깨어질 것이고, 겸손한 그릇은 귀하고 요긴하게 쓰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은 것이 사람의 지혜로움보다 더 지혜로운 법입니다(고전 1:25). 감히 하나님의 지혜를 폄하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겸손이 피조물의 지혜 중 최고입니다.

 

22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야곱이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겠고 그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해지지 아니할 것이며 23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24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들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22-24)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레바논을 기름진 밭으로, 기름진 밭은 숲으로 바꾸시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듣게 되는 것,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맹인의 눈이 보게 되는 것, 가난한 자가 즐거워하고, 오만한 자가 소멸되는 것은 하나님께 손바닥을 뒤집듯이 쉬운 일입니다.

 

(1) 동터오는 구원 시대(22)

 

‘그러므로’로 이어지지만, 앞 단락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구원이 주제로 등장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야곱 족속의 구원과 회복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야곱 족속’은 하나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이 한 조상 야곱에게서 나왔다는 혈연적 동질감과 일치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앞으로 있을 회복에 유다뿐만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도 포함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23)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도 주목할 만한 표현입니다. 이사야 전반부에서 아브라함에 관한 언급은 여기에만 등장합니다(41:8; 51:2; 63:16; 렘 33:26; 겔 33:24; 미 7:20). 또 ‘아브라함의 구속’은 구약성경에서 여기가 유일합니다. 아마도 창세기 12:10-20과 20장과 관련해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애굽 왕 바로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서 구속받은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질 구속의 예표가 됩니다. 두 번 반복되는 ‘이제’란 표현은 구원 시대가 임박했음을 보여줍니다. 야곱 자손은 여호와의 손이 행하실 제2의 출애굽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것입니다.

 

(3) 불순종의 극복(24)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다’는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여호와께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민 20:12; 27:14). 이스라엘은 그분의 구속 행위를 보고 그분을 경외함으로 순종합니다. 출애굽 세대가 마음이 혼미해져 여호와께 불평하다가 광야의 심판을 받았던 것처럼 그의 후손들도 불순종 때문에 심판을 받지만, 구원 시대에는 ‘마음이 혼미하던 자들’이 총명을 알게 되고 ‘원망하던 자들’이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듣고 맹인이 어둠과 흑암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이 총명을 되찾고 교훈을 받아들이기에, 다시는 미혹에 빠져 불평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의 밥그릇이 커 보이는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는 실수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생각이 커지면 불평이 생기고, 원망이 생기고, 마침내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방자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실수하는 법은 없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과 상황이 사실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입니다. 지혜, 외모, 형편 등 모든 것에 감사하며 겸손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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