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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2-01)


의의 종을 따르는 자세

이사야 42장 1-25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불신과 원망 가운데 우상을 기웃거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종을 새워 정의를 세우고 희년의 새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용사와 해산하는 여인처럼 구원을 위해 싸우시고 열심을 내실 것입니다.

 

  • 여호와께서 홀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홀로 역사를 결정하시고,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허망합니다(41:24,29). 그런데 이제 그 우상을 숭배하던 민족들이 여호와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5) 창조주 여호와께서 당신 종을 통해 민족들에게 정의를 베푸실 것입니다(42:1-9).

 

여호와의 종의 노래(1-9)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이신지를 알고자 합니다.

 

1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5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6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8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9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1-9)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앙망하는 데에는 확신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침묵하지 않으시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가 온다는 확신입니다.

 

(1) 여호와에 의한 종의 소개(1-4)

 

여호와께서 누군가를 자신의 사명을 중심으로 소개하십니다. “나의 종”은 종이 여호와께 속한 자이고 여호와의 의지를 집행하는 자임을 보여줍니다. ‘붙드는’은 ‘여호와의 지속적인 보호’를 약속하는 표현입니다. 좌절과 고난이 있겠지만 소임을 다할 수 있게 여호와께서 종을 계속 도와주실 것입니다.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는 종이 여호와의 은총을 받기에 합당한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사명을 기꺼이 수행하여 택하신 분께 기쁨을 드리는 자입니다. “내가 택한 사람”도 종과 여호와의 내밀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종은 여호와께서 특정한 의도와 목적에 따라 선택한 자입니다. 또 택함 받은 종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여호와께서 당신의 영을 주십니다(참조. 11:2; 삼상 16:13; 마 3:16,17). 종은 오직 여호와의 능력에 힘입어 일하는 자입니다.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는 사역의 범위가 이스라엘을 넘어 민족들로 확장될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종은 보내신 분의 구원 계획에 따라 세상에 정의를 베풉니다. ‘정의’(미슈파트)는 아마도 포괄적인 의미에서 구원 질서 또는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3a절에 따르면 여호와의 종은 기존 통치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활동합니다. 2절은 종이 베푸는 정의가 사람들이 기대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종은 세상 권력에 직접 맞서 싸우지 않고 세상에 정의를 베푸는 역할을 현명하게 성취해 나갈 것입니다. 반대자들에게 힘으로 맞서지 않고 연약한 자들을 돌보며 자신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세상이 볼 때 무용하고 심지어 해가 되는 사람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줍니다. 종은 연약하거나 병든 양 떼, 즉 사회적 물질적-종교적 약자를 버리지 않고 애정을 갖고 돌봅니다. 이를 통해 진실로 정의를 베풉니다.

세상 가치관에 반하여 활동하기에 종은 어려움에 직면하지만 좌절하지는 않습니다(4). ‘여호와의 영’으로 무장하였기에 ‘여호와의 종’ 의 지팡이는 꺾이지 않고, 그의 등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그는 정의가 세상에 굳건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 흔들림 없이 사명을 완수합니다. 섬들, 곧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 종의 교훈을 고대하게 됩니다. 종을 통해 민족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지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땅 끝까지 확장돼 나갑니다.

 

(2) 이방의 빛(5-9)

 

본 절은 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초점을 맞춥니다. 5절은 여호와를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땅에서 온갖 것들을 자라나게 하시고 그곳에 사는 자들에게 생명의 영을 주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6-9절은 청자에 따라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6-7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종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께서 앞에서 소개한 종의 사명을 다시 확정하십니다.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신” 분께서 종을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으로 세워 눈먼 자들을 보게 하시고 갇힌 자와 흑암에 앉아 있는 자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종을 통해 육체적-정치적으로 종속된 자들이 억압의 굴레에서 해방을 받고, 영적 무지와 죄의 감옥에 갇혀 사는 자들이 자유롭게 놓임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에 한정됐던 언약과 구원의 선물이 민족들에게도 아낌없이 주어집니다.

8-9절에서는 청자가 2인칭 복수 ‘너희’로 바뀝니다. 여호와께서는 복수의 청자에게 종의 선포 배후에 당신께서 계심을 분명히 하시면서 “전에 예언한 일”이 이루어진 것처럼 그를 통해 알려준 “새 일”도 꼭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의 사역의 목적은 오직 여호와께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전에 예언한 일(처음 것들)’과 ‘새 일(새로운 것들)’은 문맥에서 보면 각각 고레스에 관한 예언(41:2-4,25-26)과 여호와의 종의 등장(42:1-4,6-7)을 가리킵니다.

 

새 노래(10-13)

땅과 바다에 거하는 모든 아들에게 하나님을 향해 새 노래로 노래하자고 요청합니다. 주께서 용사 같이 나가 구원을 위해 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구원의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저앉아 있지 말고, 노래하며 힘을 내서 믿음의 싸움에 임해야 합니다.

 

10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11광야와 거기에 있는 성읍들과 게달 사람이 사는 마을들은 소리를 높이라 셀라의 주민들은 노래하며 산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12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전할지어다 13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10-13)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멸하시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원수들은 연기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원수들을 찾아도 찾지 못할 것이여,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은 허무한 것 같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1) 온 세상을 향한 찬양의 초대(10-12)

 

예언자는 바다와 광야, 곧 온 세상을 향해 구원의 기쁨에 참여하도록 초대합니다(10-11). 그는 모든 민족에게 여호와를 찬송하며 “새 노래”로 노래하도록 부릅니다. ‘새 노래’는 9절의 ‘새 일’과 연관된다. 이미 성취된 ‘전에 예언한 일’과 구별되는 새로운 구원 사건이 ‘땅 끝(서쪽)에서 땅 끝(동쪽)까지’ 불립니다. 땅의 모든 민족이 소리를 높여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종이 세상에 베푸는 여호와의 정의를 보기 때문입니다(42:1-4). 민족들이 혼돈의 세력에서 해방 시키시는 그분의 능력을 보며 찬송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12; 참조. 40:5).

 

(2) 찬양의 내용(13)

 

13절은 새 노래를 불러야 하는 이유이자 노래의 내용입니다. 옛 전통(출 15:3)에 따라 여호와가 전쟁을 이끄시는 용사로 묘사됩니다. 용사처럼 나가시고 전사처럼 사기를 돋우십니다. 그 외침에 대적은 공황에 빠집니다. ‘여호와의 분발’(질투)은 침해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발하신 그분의 진노입니다. 세상에 세우신 당신의 정의를 훼손한 자들에게 질투하셔서 여호와께서 대적을 크게 치십니다.

 

깨시는 여호와(14-17)

어려움에 있을 때 우리는 낙담과 절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멀리 계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에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때를 따라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시련 가운데 있을 때는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며 날마다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4내가 오랫동안 조용하며 잠잠하고 참았으나 내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15내가 산들과 언덕들을 황폐하게 하며 그 모든 초목들을 마르게 하며 강들이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것이며 16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17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14-17)

 

버러지는 이스라엘의 숨겨진 실체입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지면 탐욕스러운 실체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자 ‘버러지’가 되었습니다.

 

(1) 여호와의 개입과 능력(14-15)

 

백성의 탄식에 응답하지 않고 고난 가운데 내버려 두셨던 여호와께서(참조. 40:27) 오랜 침묵을 깨기로 하십니다. 유배 기간이 충분하였음을 인정하십니다. 그분께서 친히 해산을 목전에 둔 여인처럼 부르짖으시고 헐떡이며 숨을 내쉬십니다(14).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려는 계획은 이미 오래전에 확정됐지만, 그 집행은 때를 기다리셔야 했습니다. 때가 오면 한순간에 모든 저항을 물리치시고 구원 약속을 실행하실 것입니다. 침묵을 깨고 역사에 개입하시는 여호와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개입하시면 산과 언덕이 황폐해지고, 초목은 모두 메마르고, 강은 섬이 되고 못은 메마르게 됩니다(15).

 

(2) 유배민의 안전한 귀향(16)

 

침묵을 깨신 주께서 절대 권력을 자랑하며 폭력을 휘두르던 자들을 멸망시키시고, 유배민을 가나안 땅으로 직접 인도하실 것입니다(16). “맹인들”과 “그들이 알지 못하는”은 유배민이 불신앙에서도 해방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유배민의 귀환과 여호와께로 돌아감이 함께합니다. 유배의 심판과 영적 무지 가운데 살던 자들에게 빛을 비추어주시고, 자연적-정치적-영적으로 험난한 곳을 평지로 만들어 어려움 없이 지나가게 해주십니다.

 

(3) 우상숭배자들의 징벌(17)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불신하고 우상을 자기 신으로 받아들인 자들은 크게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17).

 

귀먹고 눈먼 종 이스라엘(18-25)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기다리시다가 마침내 백성의 고통에 응답하십니다. 대적은 징벌하시고, 자기 백성은 흑암에서 광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우상을 의지했던 자는 큰 수욕을 당할 것이나 참고 구원을 기다린 자는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인내하며 잠잠히 참고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18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19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 20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21여호와께서 그의 의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하게 하려 하셨으나 22이 백성이 도둑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되돌려 주라 말할 자가 없도다 23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뒤에 올 일을 삼가 듣겠느냐 24야곱이 탈취를 당하게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약탈자들에게 넘기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그들이 그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25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18-25)

 

하나님을 알수록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이라 할지라도 영적 눈이 없으면 ‘여호와의 손’을 볼 수가 없습니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를 운행하시며 주관하십니다.

 

(1) 귀먹고 눈먼 종(18-20)

 

여호와께서 귀먹고 눈먼 당신 백성의 영적 무지를 탄식하십니다(18-20). 이들은 보고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종, 내가 보내는 내 사자, 여호와의 종”으로 부르는 자들이 주인이신 여호와의 일에 관해 무지합니다. 현실만 볼 뿐 배후에서 활동하시는 그분의 손길은 보지 못합니다. 많은 것을 보면서도 파악하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구원 약속이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보고 들어야 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귀먹고 눈먼 자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2) 이스라엘의 이상과 현재의 대조(21-22)

 

예언자가 여호와의 말을 받아 유배민의 절망적 현실에 적용합니다(21-22). 여호와의 구원 의지와 이스라엘의 비참한 현실이 대비됩니다. 여호와의 교훈이 주어진 이스라엘이 모든 것을 약탈당하고 옥에 갇혔습니다. 아무도 구해주는 이 없는 절망적 상황에 떨어졌습니다.

 

(3) 불순종의 결과(23-25)

 

이스라엘은 여전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백성입니다(23-25). 멸망과 유배에 감춰진 여호와의 의지를 보지 못합니다. 죄로 인해 그분께 징계를 받았음에도 깨닫지 못합니다. 여호와의 구원 약속을 듣지 못하고 구원 능력을 보지 못하고 정치적-영적 옥에 갇힌 백성에게 미래가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노역의 때를 끝내고 위로를 주시려 하나 백성들은 여전히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습니다. 패망과 유배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고통스런 현실 앞에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탄식과 불만 대신 잘못을 성찰하고 겸손히 주를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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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1-02)


역사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

이사야 41장 21-29절


 

인간은 우상이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우상 찾기를 반복합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깊은 불안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의지하는 우상의 무능함과 허구성을 드러내어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뿐이심을 증명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백성에게 합당한 자세입니까?

 

  • 여호와께서 민족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범정에 불러 세우시고, 그들이 진짜로 신인지를 두고 소송을 벌이십니다. 민족들의 우상들도 신이라면 앉아서 제물만 받지 말고 자기 능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참 신이라면 땅의 역사를 결정할 수 있으니 민족들의 운명을 예견할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면 됩니다. 예전 일이든 앞으로 올 일이든 아무거나 알려서 입증하면 됩니다.

 

우상들을 고발하시는 여호와(21-24)

 

우리 사회에서 미래를 보장하는 가장 강력한 힘을 물질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학교를 나오고, 대기업에 취직하려는 이유도 돈과 관련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돈이 많다고 자동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가 돈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21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하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22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이 어떠한 것도 알게 하라 우리가 마음에 두고 그 결말을 알아보리라 혹 앞으로 올 일을 듣게 하며 23뒤에 올 일을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신들인 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재난을 내리든지 하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24보라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21-24)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만이 참 신이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나라들, 특히 바벨론이든 그 뒤에 이어 나오는 페르시아든지 다 하나님께서 뜻하시면 멸망시킬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들이 믿는 신들은 모두 거짓 우상입니까? 거짓 우상을 섬기는데도 그렇게 강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1) 확실한 증거를 보여라(21)

 

본문은 여호와께서 법정 다툼이 문학적 배경으로 사용됩니다. 여호와께서 고발인과 재판관이 되시고, 신분이 모호하게 처리된 청자 ‘너희’가 피고인이 됩니다(21). 여호와의 상대역을 맡는 ‘너희’는 23절에 가서야 우상들로 밝혀집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야곱의 왕’으로 소개하십니다(참조. 43:14-15; 44:6). 여기에만 한 번 등장하는 표현으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통치자와 보호자의 자격으로 재판에 참여하심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긴밀한 사적 관계, 특히 선택 신앙이 담긴 이름입니다.

 

(2) 예언과 성위의 증거(22-23)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유배는 구속사와 선택의 끝이 아니며 여호와께서는 변함없이 야곱의 왕이십니다. 소송 안건은 피고인의 정체에 관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민족들이 숭배하는 신들에게 그들이 진짜 신임을 입증할 증거를 요구하십니다. 신은 신에게 속한 능력을 보여줄 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입증 자료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확실한 예견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 됩니다(22-23a). 특이하게도 우상들이 입증해 보일 상대로 ‘우리’가 등장합니다. 야곱의 왕뿐만 아니라 야곱도 재판에 참여해 우상들이 제출한 증거를 검토합니다. 우상 논쟁이 우상숭배의 위험에 처한 바벨론 유배민에게 주는 말씀임을 시사해줍니다. 우상들은 이전에 있었던 일을 말하면 됩니다. 그것이 힘들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해도 됩니다. 고대적 사고에 따르면 신들은 북쪽에 있는 산에서 모임을 갖고 민족들의 운명과 땅의 역사를 결정했습니다(참조. 14:13). 자신들이 결정한 것들 가운데 하나만 알려주면 되기에 어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있었던 과거의 것이든 앞으로 있을 미래의 것이든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우상들은 자신이 결정하고 선포한 대로 역사가 진행되었거나 혹은 진행되리라는 증거만 제출해주면 됩니다. 그러면 재판장이신 여호와께서 살피시고 결말을 알아보실 것입니다. 신의 입에서 나온 예언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따라서 그 예언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신이 될 수 없습니다. 미래의 예언은 성취를 기다리기에 당장 입증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상의 무능력에 대한 철저한 풍자입니다.

여호와의 고발은 풍자적 가엾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곤경에 빠진 우상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기회를 한 번 더 주십니다. 과거에 선포한 예언이 틀려서 증거로 제출할 수 없고 또 미래를 예견할 능력도 없다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아무거나 보여주면 됩니다(23b). 야곱의 왕과 유배민이 함께 겁먹고 두려워할 만한 무엇인가를 하면 됩니다. 이로써 여호와께서는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의 위선과 무능력을 조롱하십니다. 야곱의 왕 여호와께서 민족들(바벨론)의 우상들을 상대로 제기하신 논쟁은 실제로는 논쟁이 아닙니다.

 

(3) 아무것도 아닌 우상(24)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이들과 소송하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습니다(24). 우상들은 실재하지 않기에 소송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우상들에게 예견 능력을 요구하셨지만, 이 또한 실질적인 요구는 아닙니다.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이들의 행위나 업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벨론의 신들이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역사를 주관한다는 주장은 실체가 없는 빈말에 불과합니다. 만신전(萬神殿)의 상석을 차지한 바벨론의 신들이 헛것이듯이 바벨론의 권력도 겉보기에만 화려할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호와의 기운’이 불면(40:7) 바벨론도 그 신들도 곧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너희를 선택한 자는 가증하니라’는 일차적으로는 우상숭배자들의 파국적 종말을 보여주는 말이며, 또한 우상숭배의 유혹에 노출돼 살아가는 바벨론 유배민들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야곱의 왕을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우상을 섬긴다면 우상처럼 가증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뿐입니다.

 

‘누가 처음부터 이 일을 알게 하였는가?’(25-29)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우상을 찾고 그 대상을 숭배하려 합니다. 하지만 우상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능력이나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허구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짓된 것들을 좇아가는 사람들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만이 역사의 계획자요, 주관자이며 인도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만 좇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가 됩니다.

 

25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고관들을 석회 같이,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음 같이 하리니 26누가 처음부터 이 일을 알게 하여 우리가 알았느냐 누가 이전부터 알게 하여 우리가 옳다고 말하게 하였느냐 알게 하는 자도 없고 들려 주는 자도 없고 너희 말을 듣는 자도 없도다 27내가 비로소 시온에게 너희는 이제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 28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29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는 허무하며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뿐이니라(25-29)

 

이 단락은 1-4절의 주제를 다시 받아 앞의 우상 논쟁을 여호와 편에서 계속 이어갑니다. 민족들의 우상들이 역사를 예언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면, 같은 논리로 여호와께서도 신적 능력을 입증하셔야 합니다. 증거를 보일 수 없었던 우상들과 달리 여호와께서는 당신께서 역사를 결정하신다는 증거와 당신만이 신(하나님)이라는 증거를 제시하십니다.

 

(1) 북방에서 정복자를 부르신 여호와(25)

 

민족들과 이스라엘 유배민까지 두려움에 빠뜨린 바벨론 북쪽과 동쪽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격변은 여호와의 역사 의지에 따라 일어난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한 정복자를 일으켜 북방에서,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셨습니다(25; 41:2). 바벨론을 기준으로 방위를 보면 바사 왕 고레스는 대략 북쪽과 동쪽에서 왔습니다. 주전 559년 바벨론 동쪽에 위치한 바사의 왕이 된 고레스는 서쪽으로 원정을 떠나 주전 550년 바벨론 북쪽에 자리한 메대를, 주전 547년 리디아를 정복했습니다. 그는 남쪽을 제외하고 3면에서 바벨론을 에워싸고 압박했습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자”는 무슨 뜻인지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45:4-5에 따르면 여호와의 부름과 도움을 받지만 고레스는 여호와를 몰랐습니다. 때로는 고레스가 나중에 여호와를 알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본문은 처음부터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음을 전제합니다. 이 표현은 신학적 차원에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이방 민족 바사의 왕이지만, 여호와께서 그를 통해 당신 계획을 이뤄간다는 점에서 고레스는 신학적으로 여호와께 복종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간주된 것입니다. 고레스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여호와의 이름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가 토기장이가 점토를 밟아 짓이기듯이 고관들을 짓밟을 것입니다. 땅의 역사를 결정하신 여호와께서 보낸 고레스 앞에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할 것입니다.

 

(2) 일을 침묵했던 우상들(26)

 

우상들의 무능력을 고발하는 26절은 앞 단락의 주제를 반복합니다. 우상들이 신이라면 땅의 사건을 예견하고 이를 집행하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상들 가운데 누가 바사 왕 고레스의 등장을 미리 선포하고 그에게 승리를 약속해주었습니까? 바벨론의 신들 가운데 아무도 고레스의 승리를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신탁제사장과 예언자들이 있었지만,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로부터 이 일에 관해 신탁을 받은 자는 없었습니다. 우상들은 미래에 대하여 침묵하였습니다. 사건을 해석해주는 우상들은 많이 있지만(참조. 단 2:3-4; 4:47), 사건을 미리 예견하고 실제로 그대로 성취한 신은 여호와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3) 일을 시온에 알려주신 여호와(27)

 

여호와께서 처음으로 고레스의 등장과 승리를 예언하여 당신 백성에게 알려주셨습니다(27). 그분만이 시온에게 ‘보라, 그들이 여기에 있다’라고 말씀하셨고 기쁜 소식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시온으로 귀환하는 유배민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문맥은 고레스의 군대를 더 지지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할 자”는 예언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참조. 40:9). 여호와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고레스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고레스의 승리와 바벨론의 멸망을 거듭 선포하셨습니다. 지금 메소포타미아 북동쪽에서 전개되고 있는 일은 여호와께서 선포하셨던 예언의 성취입니다. 마지막 두 절은 주제에 있어 각각 26절과 24절의 반복입니다.

 

(4) 무능력한 우상들(28)

 

야곱의 왕께서 땅의 역사를 계획하실 때 참여한 자도 조언한 자도 없었습니다(28). 그분께서는 홀로 고레스의 승리와 바벨론의 멸망을 결정하셨습니다.

 

(5) 바람에 불과한 우상들(29)

 

우상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29). 그들의 형상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헛것)일 뿐입니다. 바람은 쓸모없음과 덧없음을, 공허한 것은 무질서와 혼돈을 함축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정의와 공의로 세상에 질서를 세우시고, 헛것인 우상은 세상을 무질서와 혼돈에 빠뜨립니다.


우상숭배의 근저에는 안정과 생존을 보장받고자 하는 불안이 있습니다. 욕망하는 것을 얻으려는 강렬한 욕구가 있습니다. 신앙은 이 불안과 싸워가는 것입니다. 인생과 역사의 참 주인을 인정하며 고백한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믿으며 두려움 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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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1-01)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

이사야 41장 1-20절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무심함과 억울함을 신원하시지 않고 침묵하시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지만, 선지자는 주께서 열방을 심판하실 것이니, 그 과정에서 겪게 될 정세의 혼돈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격변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취할 때는 무엇입니까?

 

  • 홀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처음부터 홀로 땅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여호와께서 유배 생활에 지쳐 불만을 토로하는 자들에게 구원이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유배민은 눈을 들어 바벨론 제국의 변경에서 일어나고 이는 일을 직시해야 합니다. 거침없이 내달리며 민족들을 정복하고 있는 자는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려고 동방에서 부른 자입니다.

 

동방에서 한 사람을 부르신 여호와(1-7)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힘이 역사와 개인의 삶에 개입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종종 기가 막힌 상황 앞에 서면 이렇게 자문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이 다른 힘에 의해 움직이도록 이 세상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우주의 질서를 세우시고, 우주를 질서대로 운행하십니다.

 

1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고 말하라 우리가 서로 재판 자리에 가까이 나아가자 2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서 공의로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냐 열국을 그의 앞에 넘겨주며 그가 왕들을 다스리게 하되 그들이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 같게 하매 3그가 그들을 쫓아가서 그의 발로 가 보지 못한 길을 안전히 지났나니 4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5섬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땅 끝이 무서워 떨며 함께 모여 와서 6각기 이웃을 도우며 그 형제에게 이르기를 너는 힘을 내라 하고 7목공은 금장색을 격려하며 망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메질꾼을 격려하며 이르되 땜질이 잘 된다 하니 그가 못을 단단히 박아 우상을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는도다(1-7)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다른 힘에 의해 움직이도록 이 세상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우주의 질서를 세우시고, 우주를 질서대로 운행하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신뢰할 때,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1) 민족들을 소환(1)

 

여호와께서 섬들과 민족들을 재판정으로 소환해 심문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시며 이들에게 누가 참된 신인지를, 누가 세상의 역사를 지배하는지를 따져보자고 요청하십니다(1). “내 앞에 잠잠하라”는 새 정복자의 등장에 당황하지 말고 귀 기울여 말씀을 들어보라는 말이며, “힘을 새롭게 하라”는 온 힘과 능력을 모아 답변하라는 말입니다.

 

(2) 역사를 경영하시는 여호와(2-4)

 

여호와께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 승리를 구가하는 한 인물을 소개하시며 소환한 민족들을 심문하십니다(2). 누가 이 인물을 동방에서 일으켜 민족들과 왕들을 발 앞에 굴복하게 하였습니까? 누가 허락했기에 그는 바람이 먼지와 지푸라기를 날려버리듯 민족들을 정복하였습니까? 여호와는 자신이 정복자를 세웠고, 그의 승리는 자신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하십니다. 지금 메소포타미아 주변 지역에서 벌어지는 정치 군사적 대격변이 당신의 결정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동방에서 부른 정복자는 그가 아직 가보지 못한 위험스러운 길을 안전하고도 신속하게 지나갑니다(3). 길이 험하고 멀지만, 그의 진격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미지의 원정길이지만 그는 주저함과 두려움 없이 적들을 추적하여 정복합니다. ‘이 일을 누가 이루고 행하였는가?’하고 질문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직접 답변하십니다. 창조의 처음부터 각 세대(世代)를 불러내신 주께서 이 일을 이루셨다고 선포하십니다(4). “만대”로 번역한 ‘세대들’은 특정한 시기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각 세대를 불러 시대사적 역할과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분 계획에서 벗어나 활동한 세대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습니다. 창조주 여호와가 역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십니다. 거침없이 진격하는 정복자의 출현에 섬들과 땅 끝이 무서워 떱니다.

 

(3) 우상에게 도움을 구하는 민족들(5-7)

 

이들은 서로 격려하며 침략군에 맞섭니다(5-6). 여호와께서 부르신 정복자에 맞서 모든 민족이 힘을 합칩니다. 이들은 자기 신들이 지켜주리라 기대하며 우상을 만듭니다. 장인은 금장색(도금장이)을 격려하고, 망치로 쇠를 고르게 하는 자는 땜질이 잘 됐다고 메질꾼을 격려하고 우상이 흔들리지 않게 못으로 고정합니다(7). “못을 단단히 박아 우상을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는도다”에서 우상과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예언자의 신랄한 조롱을 읽을 수 있습니다. 침략군이 땅을 뒤흔들며 무섭게 진격할 때 우상이 흔들려 넘어지지 않도록 장인은 못으로 고정해놓아야 합니다. 우상이 위기에서 사람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우상을 흔들리지 않게 보호해줍니다. 혼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우상이 어찌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동방에서 부른 정복자에 의해 누가 세상 역사를 주관하는지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택한 야곱(8-13)

하나님게서는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실 뿐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따뜻하고 자상한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구체적으로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기도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때,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8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9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10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11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12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허무한 것 같이 되리니 13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8-13)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친히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나의 종’, ‘나의 벗’이라 부르십니다. 비록 그들을 징계하셨으나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그들을 먼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1) 너를 버리지 안니하였다(8-9)

 

여호와께서 일으키신 정복자의 등장이 우상에 의존하는 민족들을 두려움에 빠뜨리고, 이스라엘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나의 종, 내가 택한 야곱,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8)은 구속사에 뿌리를 둔 표현들입니다. 주전 587년의 파국적 재앙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십니다. 특이하게도 아브라함의 부름과 선택(창 11:31)이 미래 구원의 모델로 제시됩니다(9). 여호와께서 아브라함 안에서 이스라엘을 땅 끝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조상 아브라함에게처럼 후손들에게도 당신의 능력과 선하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멸망과 유배로 이스라엘의 선택이 폐기된 것이 아닙니다. 불순종을 심판하셨지만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유배민은 그분께서 택한 그분의 종이며 여전히 그분의 명령과 보호 아래 있습니다.

 

(2)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10)

 

새로운 정복자가 등장하고 기존 정치 질서가 요동치는 혼란의 시대지만, 여호와께서 유배민의 하나님으로 함께하시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10). “나의 의로운 오른손”은 구원하시는 능력의 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 새로운 정복자를 통하여 당신 백성을 해방시켜 주십니다.

 

(3) 데적의 완전한 멸망(11-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편에 서실 때 대적은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11-12).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조롱하던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또한 “허무한 것” 같이 된다. 어디서도 대적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4) 내가 너를 도우리라(13)

 

하나님께서 그 오른손을 붙잡아 주시기에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떨지 않게 됩니다(13). 그분께서 민족들에 괴롭힘을 당하는 유배민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시고 걸어가거나 달리더라도 피곤하지 않게 힘을 주십니다(40:31).

 

여호와의 구원 약속(14-16)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 나오며 하나님 은혜의 결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웃 열강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 땅에 펼치기 원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역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용하고자 구원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4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15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 같이 만들 것이라 16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들을 날리겠고 회오리바람이 그들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14-16)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이스라엘은 절대 작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타작기로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로 만들 뿐 아니라 적들을 겨처럼 흩어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를 통해 영원한 것과 같던 바벨론과 야굽을 무너뜨렸습니다.

 

(1) 이스라엘의 구속자 여호와(14)

 

야곱을 수식하는 “버러지”는 이스라엘이 보잘 것 없는 민족으로 퇴락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처량한 신세가 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도움을 약속하며 위로해 주십니다(14). 그분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고 구속자이십니다. 그분의 거룩함은 역동적 힘으로 심판과 구원의 역사 가운데 드러납니다. 구속자(고엘)는 지파시대의 유산에 속하는 개념으로 언약 관계 안에서 당신 백성을 위해 개입하시는 구원 행위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2) 새 타작기의 비유(15)

 

농부가 타작마당에서 타작기로 곡식을 갈듯이 여호와께서 버러지 같이 짓밟히는 이스라엘을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만들어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부수고 작은 산들을 지푸라기처럼 만드실 것입니다(15). 타작의 대상인 산들과 작은 산들이 바벨론을 가리키는지 여호와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영적 윤리적 장애물을 상징하는지는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3) 키질의 비유(16)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이 이사야서 후반부의 핵심 주제이기에 첫 번째 해석이 좀 더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이어서 표상이 타작에서 키질로 바뀝니다. 이스라엘이 그것들을 까부르면 바람이 쓸어가고 폭풍이 흩날려버립니다(16). 키질이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해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내적 영적 정화를 가리킬 수 있지만, 본문이 바람에 날려가는 지푸라기에 초점을 맞추기에 타작기의 표상처럼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적의 멸망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버러지처럼 절망적 삶을 살던 자들에게 기쁨이 돌아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구속자로 경험한 유배민은 그분 안에서 기뻐 뛰놀며 자랑합니다. 이들은 구속자의 능력을 확신하고 기쁨 가운데 그분에 관해 이야기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그분을 찬양합니다.

 

여호와의 축복 약속(17-20)

우리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순종하며 일할 때 하나님께서는 공곱하시는 은혜도 경험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확장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17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18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19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 나무와 화석류와 들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20무리가 보고 여호와의 손이 지으신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이것을 창조하신 바인 줄 알며 함께 헤아리며 깨달으리라(17-20)

 

하나님의 응답은 상상을 넘는 풍요합니다. 광야의 ‘백향목’과 싯딤나무와 화석류와 들감람나무‘와 사막의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은 최고의 복입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1) 여호와의 응답(17-18)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해방해주시고 땅의 축복도 약속하십니다. 갈증으로 혀가 타들어 가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응답하십니다(17). 심판과 저주의 시대가 끝나고 구원과 축복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나무 하나 없이 헐벗은 산과 황무지가 숲이 우거진 산으로 변하고, 사람이 풍요롭게 사는 비옥한 땅으로 변합니다(18). 백향목과 싯딤 나무와 화석류와 들감람나무와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19)은 숲에서 자라는 나무들입니다. 레바논 산림에서 자라는 큰 나무들이 광야와 사막에 심어집니다. 생명이 없었던 광야와 사막이 울창한 숲으로 변합니다.

 

(2) 새 창조의 목적(20)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여호와의 능력(손)이 폐허가 된 가나안 땅을 생명이 넘치는 옥토로 만듭니다(20).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역사에서도 거듭 당신의 창조 능력을 과시하십니다. 가련하고 가난한 자들이 모두 자연의 갱신과 이스라엘의 회복 가운데 나타난 그분의 전능하심과 무한한 지혜와 선하심을 보고 깨닫게 됩니다.


불확신성의 시대입니다. 불안한 미래가 현대인들을 두렵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역사를 주관하시며 택하신 백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약속하신 말씀을 되뇌며 불안의 그림자를 떨쳐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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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0-02)


비교할 수 없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사야 40장 12-31절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우상에 절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상을 섬기는 일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탐심이 곧 우상 숭배이기 때문입니다(골 3:5). 과거나 지금이나 우상에 기대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 창조와 역사가 여호와의 능력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됩니다. 여호와께서 홀로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홀로 역사를 지배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한다면, 그분이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시고 역사를 지배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면서 당신의 창조 능력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12-17)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은 그 누구도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계획을 스스로 정하시고 이루어 가십니다. 그 계획 속에는 당신의 백성을 향하신 뜻과 계획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뜻과 섭리는 인간이 이해하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오묘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완전합니다.

 

12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작은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13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15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16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17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12-17)

 

창조와 역사는 별개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이십니다. 무한한 지혜로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헤아릴 수 없는 지혜로 통치하십니다.

 

(1) 창조주 여호와의 무한 능력(12)

 

바다와 하늘과 땅과 산을 누가 창조하였습니까? 창조주의 능력과 지혜를 누가 헤아려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여호와께 창조를 명령했습니까? 누가 조력자가 되어 그분을 지도하고 가르쳤습니까? 여호와께서 누구와 의논하시고 누구로부터 깨달음을 받았습니까? 누가 그분의 계획에 영향을 미쳤습니까? 누가 그분 곁에서 바른길과 지식을 가르치고 슬기 있는 길을 가게 했단 말입니까? 홀로 결정하시고 명령하십니다. 홀로 계획을 세우시고 당신 백성에게 알려주십니다. ‘정의의 길과 지식과 통달의 도’는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이 창조주의 전능과 위대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분의 능력은 경이로움과 감탄의 대상이지 헤아림(이해)의 대상이 아닙니다.

 

(2) 홀로 지혜로우신 분(13-14)

 

‘여호와의 영’은 창조와 역사 가운데 활동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아마도 13절은 창조와 관련해 그분의 지혜를 말하고, 14절은 역사 경륜과 관련한 지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창조와 역사의 주이신 여호와 앞에 민족들은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과 같고, 저울 위의 티끌에 불과할 뿐입니다. 한 방울의 물과 티끌과 먼지에 불과한 민족들의 세력은 바닷물을 되시고 산과 언덕을 저울로 다신 창조주의 능력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3) 창조주와 민족들 사이의 무한 간격(15-17)

 

산림지대로 유명한 레바논 숲의 나무와 그 가운데 사는 짐승들은 그분의 땔감과 번제물로도 모자랍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바쳐도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에는 부족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위엄을 과시하는 민족들(바벨론)도 그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세계사의 중심에 속한다고 자랑하지만, 그분께는 “없는 것”(메에페스), 곧 ‘중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에 속한 것’에 불과합니다.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하지만, 그분께는 “빈 것”, 곧 ‘실체가 없는 헛것’일 뿐입니다.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려는 여호와의 계획은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현실에 절망하지 말고 무한능력의 창조주를 바라보며 그분의 구원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비교를 거부하시는 하나님(18-26)

자연이 우리를 압도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화에서 자연은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연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 자신은 아닙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지으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경배와 찬양과 신뢰와 의존은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만을 향해야 합니다.

 

18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19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21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22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같이 치셨고 23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24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25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26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18-26)

 

권력자들이 힘과 자원을 자랑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티끌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장인이 만든 우상이란 한낱 먼지만도 못합니다. 따라서 세상 나라와 우상을 의지하여 삶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1)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느냐(18-20)

 

고대적 사고에 따르면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은 바벨론 신에 의한 이스라엘 신의 패배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유배민 가운데는 여호와의 능력을 의심하고 바벨론 우상의 유혹에 흔들린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바벨론 제국의 위용 앞에서 흔들리는 유배민을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세웁니다(18-19). 하나님을 누구와 비교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너희가 바벨론에서 본 우상들과 비교하려했습니까? 우상은 장인의 작품에 불과합니다. 바벨론 신들은 장인들의 손에 의존해사는 헛것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장인을 고용해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우상을 마련하고, 가난한 사람은 썩지 않는 나무를 골라 우상을 만듭니다(20). 누구나 우상을 만들어 자기 것으로 소유합니다. 사람을 보호해야 할 신이 사람에게 의존합니다. 바벨론의 신들은 장인들이 만든 작품에 불과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바벨론 제국의 영화는 곧 끝장날 것입니다.

 

(2) 창조주의 역사 지배 능력(21-24)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역사에 개입하시고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의지를 거듭 알려주셨습니다(21). 유배민은 자기 시대의 역사 안에 감춰진 하나님의 의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상이 비교될 수 없는 것처럼, 그분 앞 땅 위의 인간도 마찬가지로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그분께서 ‘땅의 둘레 위에’ 좌정하셨습니다(22). 땅 위에 사는 자들은 모두 메뚜기에 불과한 존재로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아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땅의 기초를 놓고 하늘을 펴서 사람들이 땅 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늘 천막 아래 땅 위에서 사는 자들이 모두 그분의 보호와 통치 아래 있기에 땅의 역사도 그분의 결정에 종속됩니다. 정복자들의 통치권이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기간은 짧게 정해져 있습니다(23-24).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동풍에 식물이 시들어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입김’에 제국의 통치자들은 바싹 말라 지푸라기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온 땅을 정복했던 앗수르의 권세가 덧없이 종말을 고한 것처럼 바벨론의 통치도 곧 끝장이 날 것입니다.

 

(3) 권세와 능력이 크신 분(25-26)

 

25-26절은 18-20절과 유사하게 여호와와 신들을 대비시켜 여호와의 유일성을 주장합니다. 땅의 우상들이 사람의 작품인 것처럼, 바벨론 사람들이 신으로 숭배하는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은 여호와의 작품입니다. 하늘의 별은 특히 바벨론의 점성술에서 중요했습니다. 이들은 신들로 숭배하는 별들의 위치와 진행이 인간과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예언자는 천체중배로 유명한 바벨론 한가운데서 별은 피조물로,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객체에 불과하다고 선포하면서 바벨론이 자랑하는 점성술의 거짓을 고발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 신뢰(27-31)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로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주십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창조주요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27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27-31)

 

곤비한 상황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불평이 나옵니다. 하지만 한시도 자기 백성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돌이켜 도우심을 청할 때 언제든 달려와 새 힘을 주십니다. 붙들어 일으켜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앙망합시다.

 

(1) 헤아릴 수 없는 창조주의 길(27-28)

 

이스라엘이 불평을 털어놓는 말을 들어보시길 바랍니다(2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지에 관심이 없으시답니다. 이스라엘의 삶(길)을 지켜보지도, 고난 당하는 이스라엘의 권리에 주목하지도 않으신답니다. 이방 땅에 사는 억울함과 어려움을 호소해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실 뿐이랍니다. 이렇듯 유배민은 하나님의 침묵 앞에 실망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불평에 예언자는 21a절의 수사적 질문을 다시 받아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성’ 으로 대답합니다(28). 창조주께서는 인간의 지혜와 이해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중단 없이 역사를 이끌어오셨습니다. 그분의 ‘명철’을 메뚜기 같은 사람이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통찰력은 사람의 경험과 이해를 초월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일에 대한 지적 이해가 아니라 그분에 대한 신뢰입니다. 유배민은 그분의 ‘생각과 길’에 관해 사변하기보다는 그분의 능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 새 힘을 주시는 여호와(29-31)

 

창조와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분입니다(29). 하나님께 의지해 그 능력과 힘을 받아 유배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30-31절은 ‘어떻게’ 좌절과 절망의 시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아이와 젊은이는 힘과 강건함을 자랑하지만, 이들도 언젠가는 지쳐서 비틀거리다가 넘어집니다. 자기 능력을 의존하는 자는 곧 한계를 깨닫고 좌절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는 힘을 새롭게 하면서 지치지 않고 나아갑니다.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갑니다. ‘여호와를 앙망함’은 힘을 주시는 그분께 온전히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창조주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기에”, 그분을 의지하는 자는 피곤함과 곤비함을 모르고 명철하게 유배기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31b절은 30절과 28ab절을 다시 받아 단락을 마감합니다. 지치고 피곤함을 느끼는 자들에게 여호와를 바라보며 극복할 것을 호소합니다. 젊은이도 뛰다 보면 지치지만 힘의 근원 되시는 여호와께 의지하는 자는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습니다. “달음 박질하여도” 다음에 잘 어울리지 않게 나온 “걸어가도”는 아마도 27절의 “내 길”과 관련하여 사용된 것 같습니다. 유배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길을 보지 않으신다고 불평하고, 하나님께서는 유배민이 피곤하지 않게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길을 보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그 길을 피곤하지 않게 걸어갈 수 있게 하는 그 힘을 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참된 형통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헛된 우상들을 만들어 복을 구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우리를 참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더욱 멀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시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참된 소망이시며 복된 삶의 원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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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0-01)


너희는 하나님을 보라

이사야 40장 1-11절


 

사람들은 약속을 하고 잘 지키지 못합니다.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지킬 능력이 없거나 변심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바꾸시거나 변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영원히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위로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본문은 이사야서 후반후(40-66장)의 서언 역할을 담당합니다. 완악한 불순종이 초래한 심판의 시대가 끝나고 구원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의 운명을 되돌리기로 결정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떠나셨던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와 왕으로 통치하십니다.

 

위로의 선포(1-2)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불성실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영원히 신실하신 분입니다. 자기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1너희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1-2)

 

누군가가 여호와를 대신하여 복수의 청자에게 여호와의 백성을 위로하라고 명령합니다. 선포의 메시지에 초점이 맞춰지고 화자와 청자의 신분은 모호하게 남습니다.

 

(1) 하나님 백성의 위로(1)

 

“내 백성”이란 표현은 이제 하나님과의 파괴된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명령의 반복은 행위의 긴급성뿐 아니라 그 성취를 강조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시대가 끝나고 위로를 받는 새 시대가 시작됩니다. 반역한 백성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 징벌하시고 얼굴을 감추셨던 하나님께서 위로자의 모습으로 드러내십니다.

 

(2) 끝난 심판(2)

 

주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당한 이후 위로받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살던 하나님 백성에게 마침내 기쁜 소식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을 가엾이 여기시어(49:13) 진노를 거두고 관계를 회복하기로 하십니다. 위로의 구체적 내용은 먼저 과거의 극복과 관련됩니다. 이스라엘에 임한 강제 노역의 때, 곧 심판의 기간이 이제 끝이 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로부터 자신들의 죄악에 상응하는 벌을 다 받았습니다. 죄의 대가를 다 치렀습니다.

 

여호와를 위한 광야의 길(3-5)

우리가 하나님께 죄 사함의 은혜를 받으면, 그 다음 경험하는 가장 결정적인 변화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해결되지 못한 죄가 남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으면 즉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됩니다.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3-5)

 

노역의 때가 끝나고 죄사함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이스라엘을 긍휼 가운데 위로하십니다. 죄를 소홀히 여기지도 않으시지만, 긍휼의 사랑 또한 잊지 않으십니다.

 

(1) 여호와의 길(3)

 

심판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셨던 ‘여호와의 귀환과 그의 통치’가 위로의 핵심 내용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가 청자들에게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곧게 내라고 명령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대로”는 원문에 따르면 ‘우리 하나님을 위한/우리 하나님께 속한 대로’이며, 광야에 큰길을 닦는 목적이 여호와께서 지나가시기 위함임을 보여 줍니다. 당신 백성을 심판하고 떠나셨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실 것이니 광야에 평탄한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광야의 대로’는 군사적 원정이나 상업적 교역에 주로 이용되는 고대근동의 ‘왕도’(king's high-way)를 배경으로 합니다. 따라서 3절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시는 왕 여호와를 위해 길을 보수하고 확장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이 돌아오시는 길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을 것입니다.

 

(2) 평지가 되는 골짜기와 산(4)

 

인간의 능력으로는 골짜기를 메우고 산을 허물어 곧게 길을 만들 수 없지만, 길을 지나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자연의 격변으로 광야에 이상적인 길이 생깁니다. 그분 앞에 골짜기는 스스로 높아지고 산과 언덕은 스스로 낮아겨서 울퉁불퉁한 곳이 곧게 되고 굽은 곳은 평지가 됩니다. 왕 여호와의 귀환길을 위해 자연이 변형되어 그분의 행진 길에 방해하는 모든 요소가 스스로 제거됩니다. 강제 노역을 시켜서 대로를 닦았던 정복자들과 달리 여호와 앞에서는 산과 골짜기가 복종합니다.

 

(3) 여호와의 영광을 보는 모든 육체(5)

 

여호와께서 광야의 대로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는 사건은 “모든 육체”가 목도 하는 공개적 사건이 될 것입니다. 왕 여호와의 귀환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세계사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민족이 구원에 참여하는 것는 아니고, 이들은 국가나 주인으로 관여할 뿐입니다. “육체”라는 표현은 인간의 사별성과 한계를 보여 주는 개념이며, 여기 문맥에서는 다음 절을 예비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6-8)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는 우리 영혼을 만지고 치유하는 구심력으로만 작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돌아보게 하는 원심력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위로받았다면, 그 위로의 경험은 반드시 세상을 향한 섬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6-8)

 

고통받는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광야를 지나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은 사막의 대로를 예배하고 오시는 하나님을 맞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 말씀을 따라 주의 길을 예비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 왕으로 오셨습니다.

 

(1) 물과 꽃에 불과한 모든 육체(6)

 

‘외치라’고 명령을 받은 자가 “내가 무엇이라 위치리이까” 하면서 외쳐야 할 내용에 관해 묻습니다. 그러자 “말하는 자의 소리”가 외칠 내용을 알려줍니다.

 

(2) 여호와의 기운(7)

 

6b-7a절은 풀과 꽃의 비유를 사용해 인생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말합니다(참조. 시 37:2; 90:5-6; 102:12; 103:15-16; 욥 8:12; 14:1-2). ‘아름다움’으로 옮긴 ‘헤세드’는 여기서는 능력이나 업적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주목할 점은 심판 시대의 종결과 여호와의 귀환을 선포하는 위로의 말씀(1-5) 다음에 인생의 덧없음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문맥에 따르면, 바벨론과 바사와 같은 대제국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다 풀과 같은 존재입니다. 정복자들이 자랑하는 정치적-군사적 힘도 들의 꽃과 같을 뿐입니다. 물론 자연과 인간의 덧없음과 허무함은 피조물에 내재한 운명인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풀처럼 허무하게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덧없음의 원인자가 되십니다.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포함해 모든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시고 땅의 역사를 지배하십니다.

풀과 꽃의 덧없음이 하나님 말씀의 확실성과 변함없음과 대조됩니다. 지속적으로 남아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사람의 능력이나 업적이나 영화가 아닙니다. 작은 자나 큰 자 혹은 온 땅을 정복했다고 자랑하는 제국들도 때가 되면 사라져 흔적도 남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성취되어 역사적 실체로 남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8)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뒤따르는 구원과 회복에 관한 모든 위로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분 말씀은 결과 없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다윗 왕조의 몰락과 예루살렘의 함락을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무능력으로 간주하려는 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그분 말씀의 확실성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 말씀에는 창조적이고 실천적인 능력이 내재해 있어서 한번 그분 입에서 나간 말씀은 반드시 그 목적을 이룹니다(55:10-11).

 

시온의 왕 여호와(9-11)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믿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적잖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머리로는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자기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입니다. 그런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전해야 합니다.

 

9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9-11)

 

모든 육체는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처럼 소멸해갑니다. 세상 나라 또한 얼마 못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고 그분의 말씀은 영영히 설 것입니다.

 

(1)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9)

 

앞 장에서 귀환하는 왕의 도착에 앞서 왕도로 전령이 파견되는 것처럼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할 자가 시온/예루살렘으로 파송을 받습니다. ‘시온/예루살렘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두려워하지 말고 목소리를 한껏 높여 기쁜 소식을 외쳐야 합니다. “높은 산”은 모든 사람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기쁜 소식’은 예루살렘은 물론 황폐하여 주민들과 가옥들이 거의 다 없어진 유다의 성읍들(6:11)에도 전해져야 합니다. 멸망 이후 어둠 속에 살던 예루살렘과 유다에 새로운 구원의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2) 여호와의 통치(10)

 

당신 백성을 심판하고 떠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곧 예루살렘에 도착하십니다. ‘보라, 너희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강한 힘으로 세상 권력을 정복하고 돌아오셔서 왕으로서 당신 백성을 통치하실 것이다.’ 여호와의 팔은 그분의 활동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펴신 팔로 천지를 창조하시고(렘 27:5; 32:17) 혼돈의 괴물들을 물리치셨으며(51:9), 민족들을 심판하시고(51:5) 당신 백성을 구원하십니다(33:2; 52:10; 62:8). 그분께 있는 ‘상급과 보응’은 대적을 물리치고 빼앗은 전리품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3) 목자 여호와(11)

 

물론 사로잡혀 이방 나라로 끌려갔다가 구출된 유배민도 포함됩니다. 싸움에서 승리한 전사로 기술된 여호와가 11절에서는 목자로 묘사됩니다. 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자주 왕의 표상으로 사용됐습니다. 모든 육체가 보는 가운데 광야의 대로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신 여호와께서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이 흩어졌던 백성을 성심으로 보살펴주실 것입니다.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고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실 것입니다(참조. 요 10:11). 이스라엘은 그분의 세심한 보호와 인도 아래 안전과 풍요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다시는 길을 잃고 산을 헤매다가 사나운 짐승들에게 잡아먹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위로를 받지 못하고 어둠과 절망 가운데 버려졌던 자들이 목자의 손에서 정성 가득한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알리는 자들입니다. 지금 상황이 절망스러울지도 하나님의 복된 통치가 가져올 희망을 전해야 합니다. 장차 강한 자로 임하셔서 세상을 구하시고 공의로 다스리실 메시아의 나라를 이야기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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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9-01)


전수하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

이사야 39장 1-8절


 

놀이동산에서 인기 있는 놀이기구 가운데 하나가 롤러코스터입니다. 빠른 속도로 운행하면서 아찔한 높이에서 급강하하기도 하고 갑자기 솟구치기도 하는 스릴 만점의 놀이기구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이렇게 롤러코스터를 탄 듯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굴곡진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어려움이 지속된 것입니다. 히스기야도 그랬습니다. 그의 롤러코스터 인생을 살펴봅시다.

 

  • 정치적으로는 앗수르의 위협에서 예루살렘이 기적적으로 구출 받는 개인적으로는 죽을병에서 극적으로 치유함을 받는 여호와의 놀라운 구원 능력을 경험했지만, 히스기야의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의 인정에 고무된 히스기야가 다시금 여호와를 떠나 동맹 정치의 길을 선택합니다. 여호와의 은총에 의한 구원 경험이 과거사가 돼버립니다.

 

도입부: 역사적 배경(1-2)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을 높이십니다. 기도는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기도할 때가 가장 겸손한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사람을 항상 높이십니다. 고난 가운데 드린 간절한 기도가 히스기야를 높입니다. 그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생각할 수도 없는 은혜를 기도를 통해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1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2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1-2)

 

하나님의 말씀대로 히스기야는 죽을병에서 회복되어 생명을 연장받았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간절히 부르짖은 결과,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1) 므로닥발라단의 사신 파견(1)

 

39장은 이중적으로 38장에 연결됩니다. 도입부의 ‘그때에’(18:7; 20:2)는 뒤따르는 사건을 앞의 사건에 시간상으로 이어주고,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는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 배경을 보여줍니다. 이웃 나라의 왕이 병들었다가 회복됐을 때 사신을 보내 축하하는 일은 그 자체로 특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신을 바벨론 왕이 보냈다는 점입니다. 주전 8세기 후반 국력이 매우 약화하기는 했지만, 바벨론은 앗수르도 인정해주는 명망 있는 나라였습니다. 유다는 변방에 속한 나라로 바벨론의 관심 밖에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이 유다 왕의 회복을 축하하려고 사절을 보내는 일은 이스라엘 역사에 없었습니다. 바벨론 사신이 단지 축하의 말을 전하기 위해 그 먼 길을 온 것이 아님은 히스기야의 도를 넘는 처신과 그에 따른 이사야의 고발을 통해 분명해집니다. 히스기야는 사신을 반가이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보물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줍니다. 특히 무기고도 보여주었음은 사절의 방문 목적이 전쟁 준비와 관련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산헤립의 통치 초반 므로닥발라단뿐만 아니라 히스기야도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앗수르는 바벨론과 유다의 공동의 적이었습니다.

 

(2) 히스기야의 환대(2)

 

엘람과 연합하여 주전 704년 봉기를 일으키고, 바벨론 왕이 된 므로닥발라단이 반 앗수르 전선을 확장하려고 사절을 보내자, 앗수르의 굴레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리던 히스기야가 기꺼이 손을 잡습니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왕으로 닥발라단이 예물을 보내면서 자신을 동맹의 한 축으로 인정해준 것에 크게 고무돼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보여주면서 바벨론과 함께할 만한 충분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음을 과시합니다. 세속적으로 사용될 때 ‘예물’(민하)은 주로 존경심과 충성심과 감사를 표현하는 선물을 가리킵니다. ‘글’(서라핌)은 ‘서신들’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 ‘서신들’이 두 번 나오는데, 모두 이방 왕이 히스기야에게 보냅니다. 37:14에서는 산헤립이 여호와를 모독하는 서신을 보내자 그것을 가지고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가고, 여기서는 므로닥발라단이 보낸 서신에 흥분해서 그의 사절에게 유다의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이방 왕의 서신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히스기야를 찾아온 이사야(3-4)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한 후에 오히려 맡겨진 일상의 사명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히려 일상을 규모 있게 꾸려 가야 할 터인데, 흥분하고 들뜬 마음으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경우는 없는지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히스기야는 바벨론이 유대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아직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기 힘을 과시하며 이를 통해 양국 간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싶었던 것입니다.

 

3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이르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하니라 4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 하니라(3-4)

 

잔뜩 고무된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신들에게 오아궁 보물창고와 무기고를 다 공개해 보여주었습니다. 자만심에 빠져 유다의 힘과 부를 자랑하고자 최소한이 경계마저 풀어 버린 것입니다.

 

(1) 이사야의 질문과 히스기야의 답변(3)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됐을 때처럼(38:1) 예언자 이사야가 왕에게 나아옵니다. 이번에는 신탁을 전달하기에 앞서 먼저 왕에게 묻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에서 왕에게 왔나이까?’ 왕은 첫번째 질문에 관해서는 답하지 않고 두 번째 질문에 관해서만 간단하게 이들이 먼 나라, 곧 바벨론에서 왔다고 알려줍니다. 왕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먼 나라에서 왔다고만 말합니다. 이사야가 다시 왕에게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하고 묻자, 왕은 그들이 궁중의 창고에 있는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사야가 몰라서 왕에게 물어본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곧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음(5-7)은 그가 이미 다 알고 왕을 찾아왔음을 전제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이사야의 질문은 고발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사야는 사정을 다 알고 왕에게 질문하는데, 왕은 몰라서 물어보는 사람에게 답변하듯이 이사야에게 ‘객관적으로’ 답합니다. 특히 세 번째 질문에 대한 왕의 답변은 의미하는 바가 남다릅니다.

 

(2) 이사야의 질문과 히스기야의 답변(4)

 

4절의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는 문맥에 따른 인칭 변화를 제외하면 2절의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은지라’와 문자적으로 일치합니다. 바벨론 왕이 보낸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한’ 히스기야의 태도에 전혀 변화가 없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이사야는 질문을 통해 자기 처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지만, 바벨론 왕의 인정에 고무된 히스기야는 이를 잡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심판선포와 히스기야의 반응(5-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 단지 개인의 형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세상의 복으로 부름 받은 이후로(창 12:2),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흘려보내는 자로서 부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능력을 체험하기까지 했던 히스기야도 신앙을 전수하는 데 실패했던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전수하고 전파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5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6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7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8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5-8)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교만과 불신앙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시는데, 히스기야의 행위에 상응하는 형태의 심판입니다. 즉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 줄 것들이 모두 바벨론에게 넘어가게 돤다는 것입니다.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 선포(5)

 

히스기야의 건조한 답변을 듣는 즉시 이사야는 왕에게 심판의 신탁을 선포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5)은 전하는 신탁이 예언자 이사야의 생각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임을 강조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에 왕으로 임재하시는 여호와께서 당신께 의존하지 않고 이방 세력과 연합하려는 왕에게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보라 날들이 이르리라’는 현재분사 구문으로,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을 보여줍니다. 히스기야의 정치적 불순종이 초래한 심판으로 유다는 물적 인적으로 치명적 피해를 입습니다.

 

(2) 재물의 약탈(6)

 

히스기야와 그의 조상들이 지금까지 모아놓았던 재물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집니다(6). 히스기야가 자랑스럽게 바벨론 사절에게 보여주었던 것들이 모두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약탈당합니다.

 

(3) 일부 왕족의 사로잡힌(7)

 

또 히스기야에게서 태어날 아들들 가운데 몇몇은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됩니다(7). 여호와 대신 바벨론 왕을 선택한 결과로 예루살렘에서 통치해야 할 다윗의 후손이 포로로 끌려가 바벨론 왕을 섬기게 됩니다. 히스기야가 의지한 바벨론에 의해 그의 나라가 약탈을 당하고 그의 후손이 수치를 당합니다. 대략 한 세기 조금 넘어 발생하는 유다의 비극적 종말이 히스기야의 과오로 돌려집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강대국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히스기야는 그의 아버지 아하스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의 문맥에서 6-7절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배를 역사적 현실로 전제하는 40장 이하를 내다봅니다.

 

(4) 히스기야의 반응(8)

 

심판선언에 대한 히스기야의 답변(8)은 이중적입니다. 히스기야는 먼저 이사야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에 긍정적으로 동의합니다.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죽을병이 들었을 때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신탁을 전달받지만, 이를 수용하지 않고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해달라며(38:3) 하나님께 매달려 목숨을 구했던 히스기야가 여기서는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고 자손의 일부가 유배를 당하리라는 엄중한 심판의 말씀을 ‘좋소이다’하고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좋소이다’는 ‘톱’의 번역으로, 38:3의 ‘선하게’(문자적으로, ‘선한 것’)와 같습니다. 선하게 살아온 삶을 인정해달라고 간구한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심판선포를 선하신 결정으로 수용합니다. 잘못을 인정합니다. ‘선함’은 히스기야의 불순종에 심판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결정의 선함(정당성)을 의미합니다. 하반절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는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부정의문문으로 된 열왕기하 20:19의 병행본문(이사야 본문에 따라 번역하면,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은 히스기야의 부정적 태도를 시사해주지만, 긍정문으로 서술된 이사야 본문도 그러한지는 불분명합니다. 때로는 히스기야의 이기주의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를, 때로는 심판에 노출된 자의 모범적인 경건을 보기도 합니다. 둘 다 가능하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36-38장의 여호와 중심적 히스기야와 39장의 자기중심적 히스기야 사이의 단절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문맥은 후자의 해석을 지지합니다. 자신의 불순종이 초래한 심판 결정이기에 히스기야는 이를 되돌릴 수 없음을 알고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의 수용은 체념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심판의 표지 아래 살아가는 자의 신앙적 결단입니다. 산헤립의 위협에 직면해서는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간구하고, 죽을병에 걸려서는 여호와께 매달려 구원을 경험한 히스기야는 미래 자신을 맡기고 그분의 심판을 결정하신 여호와께께서 허락하신 ‘평안과 견고함’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에 히스기야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없는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선하다고 수긍하는듯한 자세를 보이면서 자신의 생전에 평안하고 견고하다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서 흥분한 나머지 교만해진 히스기야가 분별력을 잃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은혜를 체험한 이후의 삶입니다.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서 더 큰 은혜의 삶을 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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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8-01)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

이사야 38장 1-22절


때로 어려움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옵니다. 유다를 향한 앗수르의 위협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와중에,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금의 가능성도 열어 두지 않으시고 유언을 남기라는 매몰찬 말씀만을 남기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때에 믿음의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 병들어 죽게 된 히스기야가 이사야를 통해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신탁을 받지만, 포기하지 않고 여호와께 매달립니다. 병으로 부정해져서 성전으로 올라갈 수 없게 된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하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이사야를 보내 15년의 수명 연장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의 구원도 약속해 주십니다.

 

히스기야의 발병과 회복의 약속(1-8)

 

믿음의 길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상황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때로 성도는 최악의 상황에 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온실 속 화초로 키우지 않으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도 언제나 고난과 역경에 직면합니다. 다만 믿음으로 극복한 뿐입니다.

 

1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2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3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4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6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7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너를 위한 징조이니 곧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이루신다는 증거이니라 8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1-8)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에게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죽음을 선고받았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달랐습니다.

 

(1) 히스기야의 발병과 사망 통지(1)

 

히스기야의 발병과 회복의 약속히스기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이사야가 그에게 와서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신탁을 전달합니다(1). 생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죽음을 결정하셨기에 병을 앓다가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죽을병에 걸린 히스기야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후계자를 세워 통치권을 물려주는 것뿐입니다.

 

(2) 히스기야의 반응(2-3)

 

절망적 상황에서 히스기야는 체념하지 않고 죽음의 운명을 결정하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2; 삼하12:14-16). 그는 삶과 죽음이 모두 하나님의 의지에 속함을 알기에 그분께 매달립니다.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는 공적 활동의 중단을 의미합니다(왕상 21:4). 그는 자신이 여호와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걸어왔고, 여호와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인정해주시길 간구합니다(3; 왕하 18:5-6). 그는 자신의 불행한 운명에서 선한 삶을 살아온 자신이 여호와에게서 잊혔음을 보고 다시 기억해주시길 호소합니다.

 

(3) 간구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4-8)

 

히스기야의 의로움이 인정을 받습니다. 그의 눈물 어린 기도에 긍정적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5b-6)은 두 부분으로 이뤄집니다. 먼저 히스기야의 수명을 15년 연장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열왕기하 18:2에 따르면 히스기야는 29년을 통치하기에, 그는 통치 기간 전반부를 끝으로 죽어야만 했습니다. 이제 히스기야에게 지금까지 통치한 기간만큼 앞으로 더 통치할 것을 허락하십니다. 두 번째는 히스기야의 간구와 직접 관련이 없는 뜻밖의 약속입니다. 히스기야에게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앗수르의 위협이 아직 구체화하지 않았을 때, 히스기야가 간구하지 않은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의 구원 약속이 주어집니다. 죽을병에 걸린 히스기야의 개인적 구원과 예루살렘의 정치적 구원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히스기야의 사적 경험 안에 이스라엘의 구속사가 편입되면서 그의 발병과 치유 사건이 예루살렘의 위기와 해방의 예표가 됩니다. 죽을 운명의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매달려 생명을 얻은 것처럼, 예루살렘의 구원도 그분의 약속이 기계적으로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약속을 주신 분께 전적으로 의존할 때 이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약속해주실 뿐만 아니라, 징조를 통해 약속의 확실성도 보장해주십니다(7-8).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아하스의 계단’(‘아하스의 해시계’)을 내려간 태양의 그림자가 열 칸 뒤로 물러납니다. 여호와께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징조로 주시고 이를 그대로 실행하십니다. ‘징조’는 여호와의 사명이나 약속을 받은 자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삿 6:17,36-40; 삼상 10:2-9; 왕상 13:3; 사 7:11; 37:30). 사명이나 약속을 받은 자는 징조의 현재적 성취를 통해 미래적 약속의 확실성을 신뢰하게 됩니다.

 

히스기야의 글(감사기도)(9-20)

좋은 기도는 하나님께서는 들으시는 기도입니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사용하고 유창하게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면 그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히스기야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기도했고, 응답받은 후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 드렸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묵상하며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9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그의 병이 나은 때에 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 10내가 말하기를 나의 중년에 스올의 문에 들어가고 나의 여생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 11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12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 같이 나를 떠나 옮겨졌고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 같이 내가 내 생명을 말았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13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사오나 주께서 사자 같이 나의 모든 뼈를 꺾으시오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14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15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사오니 내가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내 영혼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신토록 방황하리이다 16주여 사람의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있사오니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 17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18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19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20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9-20)

 

죽을병이 치유되는 기도 응답을 받아 수명이 15명 연장된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 찬양시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자가 누리는 큰 기쁨과 감사를 엿볼 수 있습니다.

 

(1) 머리글(9)

 

감사기도를 통해 히스기야는 자신의 발병과 치유 경험을 공유하도록 백성을 초대합니다.

 

(2) 탄식(10-13)

 

그는 먼저 때 이른 죽음을 탄식합니다(10). 그는 ‘중년에’ 삶을 끝내고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들어가고’와 3절의 ‘행하며’는 ‘가다’를 의미하는 동사 ‘할라크’의 번역입니다.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살아왔지만, 한창때에 스올의 문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는 ‘여생’을 스올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스올의 문’은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어느 인생도 피할 수 없는 최후의 목적지를 가리킵니다. 그의 탄식은 죽음의 현실에서 죽음이 가져올 종교적-사회적 단절로 옮겨갑니다. 그는 여호와를 뵙지 못하고 이웃 사람들도 보지 못하게 될 것을 슬퍼했습니다(11). ‘여호와를 보다’는 제의적 경험을 가리킵니다. 일상적인 삶이나 역사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전 제의에 참석해서 그분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산 자의 땅’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제의적으로 더러운 스올에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죽음은 혈연적-사회적 공동체로부터 떠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는 세상 주민 가운데서 ‘사람’(아담)을 보지 못하게 될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습니다. 그는 종교적-사회적 삶이 없는 죽음의 땅으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미 산 자들의 세계에서 잘렸다고 느꼈습니다(12). 자신의 ‘거처’를 ‘목자의 천막’에 비유합니다. 목자가 다른 초지로 이동하기 위해 말뚝을 뽑고 천막을 둘둘 마는 것처럼, 그의 거처도 이 세상에서 스올로 옮겨지기 위해 깨끗하게 치워졌습니다.

두번째 비유는 직조공이 틀로 피륙을 짜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짠 천을 나무로 된 굴대에 감아 베틀에서 잘라내듯이 그의 생명이 감겨 잘렸습니다. 그의 수명은 마지막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매일 ‘낮부터 밤까지’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아침이 밝아오기까지 거듭 하나님께 구해달라고 부르짖었지만, 더욱 절망적 상황에 떨어질 뿐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사자 같이’ 그의 뼈를 부수어 꺾으셨습니다(13).

 

(3) 간구(14-17a)

 

약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는 파괴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자신의 절망적 형편을 제비와 비둘기에 비유합니다(14).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을 말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신음할 뿐이었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오는 도움을 고대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의 눈은 위를 쳐다보느라 지쳤습니다. 눈으로 간절히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은 그분만 하실 수 있기에 그분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거듭 고통과 어려움을 호소하며, 그분께서 자신의 보증인이 되시길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몸으로 매달린 왕이 종국에는 체념합니다(15). 하나님께서 정하신 운명이기에 절망적 형편을 받아들입니다. 질병을 짊어지고 슬픔 가운데 살다가 죽어야 할 운명임을 인정합니다. 놀랍게도 인간 실존에 관한 참담한 경험과 인식이 그를 체념에서 벗어나 여호와께로 나아가게 만듭니다(16). 그는 모든 인생의 삶이 오직 여호와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깨닫고 인생의 실존적 한계를 정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서 그 극복을 시도합니다.

 

(4) 구원(17b-20)

 

탄식과 간구를 들어주셨다고 확신한 왕은 구원의 주체가 여호와이심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17). 그는 질병의 치유를 죄의 용서로 표현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영혼의 고통’(15)을 통해 ‘주의 신실함’을 재발견합니다(18). 자신의 구원 경험에서 신실하신 여호와를 만납니다. 고침을 받은 왕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공동체와 공유하면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19-20). 스올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이 그의 거주지가 됩니다.

 

히스기야의 치유(21-22)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도하기보다는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 동분서주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며,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교만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것도 죽음의 목적에서 구원받은 것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21이사야가 이르기를 한 뭉치 무화과를 가져다가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 하였고 22히스기야도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냐 하였더라(21-22)

 

이사야를 통해 수명이 연장되었다는 말씀을 들은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통이 실은 평안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그가 죽을병에 걸렸던 것은 죄 때문이었음을 인정하며,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전지시고 자기 죄를 용서해 주셨다며 감사를 표현합니다.

 

(1) 처방전을 주는 이사야(21)

 

사건의 전개에 있어 1-8절의 연속입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시종들에게 처방을 가르쳐줍니다. 고대 세계에서 무화과는 드물지 않게 치료 수단으로 사용됐습니다. 히스기야의 치유 이야기는 무화과 처방의 효과에 관한 징조를 구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그 결말은 열린 상태로 남겨집니다. 이 열린 결말은 의도적인 것으로, 이를 통해 히스기야의 구원 경험이 독자(이스라엘)에게 주는 가르침이 됩니다.

 

(2) 징조를 구하는 히스기야(22)

 

이사야의 문맥에서 히스기야의 징조 요청(하나님 중심적 믿음의 상징)은 아하스의 징조 거절(자기중심적 거짓 믿음의 상징)과 대조적 짝을 이룹니다(7:11-12). 치유 약속에 의존하여 징조를 구한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의 구원 약속(6)에 매달려 그분께 징조를 구한다면, 이스라엘은 질병(심판)에서 치유함을 받고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사람들에게서 이미 상을 받아 버린 기도는 하나님께 응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 하나님께 엎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멀리 던져 버리시고, 우리가 처해 있는 궁덩이에서 우리를 건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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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7-02)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이사야 37장 21-38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룻강아지는 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기에 겁도 없이 덤벼듭니다. 결과는 허망한 죽음입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 앞에 하룻강아지와 같이 무지합니다. 무지한 앗수르는 결국 하나님 앞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 산헤립의 편지를 받아 보고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한 히스기야에게 여호와께서 다시금 이사야를 통해 구원 신탁을 주십니다. 전체적 내용은 첫 번째 답변(6-7)과 유사하지만, 매우 구체적입니다. 예루살렘의 구원과 앗수르 군대의 궤멸적 철군을 통해 앗수르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 땅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응답(21-35)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이룬 성공을 자신이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이보다 무지한 것은 없습니다. 교만한 앗수르를 멸하신 하나님꼐서는 오늘도 교만한 자를 멸하십니다. 우리 안에 교만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라고 하였습니다.

 

21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사람을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하시고 22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23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에게니라 24네가 네 종을 통해서 주를 훼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 산들의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의 깊은 곳에 이르렀으니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향나무를 베고 또 그 제일 높은 곳에 들어가 살진 땅의 수풀에 이를 것이며 25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으니 내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말리리라 하였도다 26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미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27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28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29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30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올해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둘째 해에는 또 거기에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셋째 해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31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32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33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화살 하나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34그가 오던 길 곧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35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21-35)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에 대해 어리석다고 책망하십니다. 앗수르는 레바논의 모든 땅을 밟은 것과 애굽을 이기고 정복한 일을 두고 이스라엘 앞에서 자랑했지만,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이었습니다.

 

(1) 산헤립에 대한 예언(21-29)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사야를 통해 응답하십니다(21). 여호와를 모독하고 예루살렘을 위협했던 산헤립이 시온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할 것입니다(22; 22:1). 머리를 흔드는 행위는 경멸의 표시입니다(시 22:7; 109:25; 욥 16:4; 애 2:15). 23절의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는 17절의 히스기야 기도를 거의 그대로 받습니다. 산헤립은 히스기야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향하여 소리를 높이고 눈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산헤립은 여호와를 모독함으로써 그분의 ‘거룩하심’을 훼손하였습니다. 불의하고 교만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파괴와 멸망을 의미합니다. 24-25절의 인용문은 산헤립의 오만을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앗수르의 침략에서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높은 곳이나 깊숙한 곳에 숨을지라도 목숨을 구할 수 없습니다.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향나무’로 울창한 산림지대도 앗수르의 진군을 막을 수 없습니다. 물이 없는 지역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우물을 파서 마시면 됩니다. 심지어 애굽도 예외가 아닙니다. 침략하여 나일강의 모든 하천을 말려 애굽의 생명줄을 끊어버릴 것입니다. 26-29절은 한계를 넘은 산헤립의 교만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입니다. 여호와께서 1인칭으로 직접 산헤립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26-27절은 산헤립을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 소개합니다. 산헤립의 성공적인 침략 전쟁은 여호와께서 오래전에 결정하신 일에 불과합니다. 여호와께서 옛적에 정하고 계획하신 것을 그분의 ‘진노의 막대기’(10:5) 산헤립이 실행한 것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계획을 집행하셨기에 산헤립은 요새로 된 성읍들을 돌무더기로 만들 수 있었고, 그곳 주민들은 기운이 다하여 놀라고 수치를 당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산헤립을 뜨거운 동풍처럼 사용하셨기에 민족들은 그 앞에서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됐습니다. 즉, 산헤립의 승리는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계획과 실행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28-29절은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산헤립에 대한 고발과 심판선언입니다.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는’(10:15) 것처럼, 산헤립은 그의 거처와 출입을 아시는 여호와를 거슬러 분노했습니다. 승리에 도취한 산헤립은 자신을 절대화해 승리를 허락하신 분께 도전했습니다. 29절의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너의 소란이 내 귀에 올라왔으니’)는 24절의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 산들의 꼭대기에 올라가며’에 이어집니다. 산헤립이 절대권력을 과시하며 저지르는 소란이 여호와의 귀에 올라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제 당신 권위에 도전하는 땅의 권력에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산헤립의 코에 ‘갈고리’를 꿰고 입술에 ‘재갈’을 물려 강제로 원래 왔던 곳으로 끌고 가십니다. 자기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신의 자리를 탐하는 자의 말로가 사로잡혀 수치를 당하는 포로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산헤립에게 승리를 주셨던 분께서 이번에는 참패를 안기시고 그를 강제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2) 히스기야에게 주는 징조(30-32)

 

여호와의 간섭으로 앗수르 군대가 철군하지만, 그것으로 유다의 위기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앗수르 군대는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점령하고(36:1) 예루살렘만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앗수르의 침략으로 유다 땅은 완전히 폐허가 됐습니다. 성과 가옥은 파괴되고 경작지는 황폐해졌습니다. 많은 주민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가축과 식량은 약탈당했습니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준 징조는 앗수르의 철군 이후를 내다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징조를 통해 앗수르의 침략으로 황무지가 된 유다 땅이 짧은 시간 안에 회복될 것을 약속해주십니다. 징조는 3년의 기간을 전망합니다. 앗수르가 침략한 올해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거기에서 난 것’을 먹고, 후년에는 씨를 뿌려서 곡식을 거두고 ‘포도원에 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습니다(30). ‘스스로 난 것’은 씨를 뿌리지 않은 밭에서 저절로 자라난 곡식을 가리킵니다(레 25:5,11-12). ‘거기에서 난 것’으로 옮긴 샤히스(on)는 여기에만 나오는 단어로 그 의미가 불분명합니다. 아마도 전자처럼 야생 식물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첫째 해와 둘째 해는 농사를 짓지 못하고 폐허가 된 농경지나 들판이나 산에서 자연적으로 자란 것을 먹고, 셋째 해에는 씨를 뿌려 수확하고 포도나무를 심어 그 열매를 먹습니다. 폐허가 된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어서 한 해 또는 3년 만에 포도를 수확한다는 것은 물론 사실적 표현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삼 년’은 자주 새로운 사건을 기다리는 기간으로 사용됩니다(삼하 13:38; 왕상 22:1; 왕하 17:5; 18:10; 사 20:3). 전쟁의 후유증으로 얼마 동안 기근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여호와의 간섭으로 곧 극복됩니다. 산헤립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앗수르 침략군이 황무지로 만들어놓은 경작지도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분께서 복을 내려 땅이 다시 풍성한 결실을 맺고 주민들은 정상적인 삶을 되찾습니다. 포도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하기에 31절은 나무와 관련된 비유를 사용해 유다의 회복을 언급합니다. 포도원에 포도나무가 심기고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앗수르의 침략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앗수르를 진노의 막대기로 사용해 유다를 징벌하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유다와 함께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고, 예루살렘과 시온 산이 다시금 구원의 보루가 됩니다(32; 14:32). 유다는 자력으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극적 개입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구원과 회복이 전적으로 그분의 은총에 속함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열심/질투’는 원래 우상숭배를 금하시고 사랑(언약)의 독점적 관계를 요구하는 속성을 담은 표현인데(출 20:5; 34:14; 수 24:19), 여기서는 사랑의 보호자로서 열심을 내십니다.

 

(3) 예루살렘의 보호 약속(33-35)

 

예루살렘 성의 보호를 약속하는 33-35절은 내용상 22-29절의 연속입니다. 산헤립의 교만을 징벌하시기로 한(29) 여호와께서 이를 실행에 옮기십니다. 예루살렘을 구원의 보루로 택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앗수르 침략군이 예루살렘에 접근도 못하도록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이들을 빈손으로 되돌아가게 하십니다(29:1-8). 35절의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는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준 약속(삼하 7:16)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산헤립의 원정 결말(36-38)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했을 때 우리가 살길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기도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자를 보내 하룻밤에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을 죽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룻밤에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죽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출 12:29-30). 산헤립은 비참한 패배를 맛보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칼에 죽었습니다.

 

36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37이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8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36-38)

 

앗수르 군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화살 한 번 쏘지 못한 채 몰살당합니다. 그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간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앗수르 왕이 아들에게 죽임을 당할 줄 몰랐습니다. 교만에 취한 앗수르 왕은 자신의 무능을 너무 몰랐습니다.

 

(1) 산헤립의 패배와 철군(36)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을 쳐서 ‘십팔만 오천인’을 죽입니다(36). 산헤립이 ‘사자들’을 보내(9) 모독하자, 여호와께서 ‘사자’를 보내 앗수르 군대를 치십니다. 여호와를 모독한 산헤립의 패배로 히스기야가 기도했던 것처럼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20) 됩니다. 전통적으로 역병을 생각하지만, 산헤립의 군대가 어떻게 궤멸했는지는 사변의 영역에 속합니다.

 

(2) 니느웨로 돌아간 산헤립(37-38)

 

여호와를 모독하였던 산헤립은 돌아가서 대략 이십 년이 지나 칼에 맞아 죽습니다(37-38). 주전 681년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산헤립은 그의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도움을 간구한 히스기야는 구원을 받고, 산헤립은 자신이 섬기는 신 니스록의 전에서 경배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살해범들은 앗수르의 적국인 아라랏(우라르투)으로 도망하고, 산헤립의 아들 에살핫돈(주전680-669년)이 왕위에 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리 강해도 약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초라하고 보잘것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도 무지합니다. 이 사실은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무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만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교만하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의 무지를 버리고 여호와르 경외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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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7-01)


히스기야가 선택한 믿음의 길

이사야 37장 1-20절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십니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절망적인 순간에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가득 메운 하늘 위에 여전히 빛나는 태양처럼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응답하실 하나님을 믿고 아가시길 바랍니다.

 

  • 앗수르 왕 산헤립이 파견한 랍사게의 오만하고 위협적인 말을 전해 들은 유다 왕 히스기야는 신하들을 예언자 이사야에게 보내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자신은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갑니다. 히스기야는 오직 여호와만이 앗수르의 위협에서 예루살렘을 구해주실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당신을 능욕한 랍사게의 말을 들으신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히스기야의 반응(1-4)

절망은 우리의 눈을 가리고 포기하게 합니다. 사방이 가로막혀 도저히 길이 없는 곳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고 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절망적인 인생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도저히 싸워 이길 수 없는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히스기야는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2왕궁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굵은 베옷을 입으니라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3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4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가 그의 상전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로 말미암아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하니라(1-4)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성전으로 가면서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극심한 고통과 슬픔의 표시입니다. 히스기야는 또한 신하들을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1) 성전으로 가는 히스기야(1)

 

협상단의 보고를 받은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집으로 갑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구원이 오직 여호와의 개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신하들을 이사야에게 보내 여호와의 신탁을 부탁합니다. 사정을 잘 아는 엘리아김과 셉나뿐만 아니라 ‘제사장 중 어른들’(원로 제사장들)도 함께 보냅니다. 이는 이 사안의 긴박성과 중요성뿐 아니라, 이사야에 대한 왕의 인정과 신뢰를 보여줍니다. 히스기야의 반응은 아버지 아하스와 대조적입니다(7:1-17). 정치에서 여호와를 배제한 아하스와 달리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역사와 정치를 결정하시는 주체로 인정합니다(3-4). 그는 이사야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면서 먼저 참담한 처지를 고백합니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나고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절망적 상황을 언급한 것은 체념에서 나온 한탄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는 자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개입을 호소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주권을 존중하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소망을 드러냅니다. 그는 다윗 왕조나 예루살렘과 여호와의 특별한 관계를 교리적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한 랍사게의 위협에서 그분의 개입 가능성을 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 영예가 훼손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민족들의 신들과 달리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시기에 랍사게의 모독에 침묵하실 수 없습니다. ‘혹시’(암 5:15; 욜 2:14; 욘 3:9; 습 2:3)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관련한 표현이며, 예루살렘의 구원이 전적으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결정에 속함을 보여줍니다. 끝으로 히스기야는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이사야에게 부탁합니다. 이스라엘의 생존이 하나님의 개입에만 달려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사야를 통한 응답(5-7)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전쟁은 사람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사람에게 하찮아 보이는 곳에서 하나님의 열심은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바람 같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모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영혼은 그 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5그리하여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매 6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7보라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의 고국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5-7)

 

이사야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전쟁은 사람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를 물리치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영을 그의 속에 두겠다고 합니다.

 

(1) 이사야를 찾아온 왕의 신하들(5)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예루살렘의 구원에 관한 신탁을 주십니다.

 

(2) 격려의 말씀(6)

 

6절의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히스기야의 간구(4)가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줍니다. ‘나를 능욕한 말’은 구체적으로는 36:18-20에서 랍사게가 한 말을 가리킵니다. 신탁(7)은 내용뿐만 아니라 그 실천 방법까지 포함합니다. ‘보라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는 앗수르 군대의 철군과 산헤립의 죽음이 여호와의 직접적인 간섭에 의해 이뤄질 것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께서 특정 목적을 위해 ‘영’(루아흐)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다(사 19:14; 29:10). 신탁의 첫 번째 내용은 산헤립이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산헤립이 원정을 중단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게 하는 ‘소문’(무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36절에 의하면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쳐서 돌아가게 합니다.

 

(3) 구원 신탁(7)

 

신탁의 두 번째 내용은 산헤립 개인에 관한 것으로, 산헤립이 자기 나라에서 칼에 맞아 쓰러지게 하십니다. 산헤립은 주전 681년, 대략 이십 년이 지나 자기 자식들에게 살해당합니다(38).

 

산헤립의 두 번째 위협(8-13)

아무리 돌아봐도 길이 없는 절망의 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절망의 순간에 우리는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게 절망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소망입니다. 절망이라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8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떠났다 함을 듣고 랍사게가 돌아가다가 그 왕을 만나니 립나를 치고 있더라 9그 때에 앗수르 왕이 구스 왕 디르하가의 일에 대하여 들은즉 사람들이 이르기를 그가 나와서 왕과 싸우려 한다 하는지라 이 말을 듣고 사자들을 히스기야에게 보내며 이르되 10너희는 유다의 히스기야 왕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너는 네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11앗수르 왕들이 모든 나라에 어떤 일을 행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멸절시켰는지 네가 들었으리니 네가 구원을 받겠느냐 12나의 조상들이 멸하신 열방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및 들라살에 있는 에덴 자손을 그 나라들의 신들이 건졌더냐 13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 성의 왕과 헤나 왕과 이와 왕이 어디 있느냐 하라 하였더라(8-13)

 

앗수르 산헤립은 구스 왕 디르하가가 앗수르와 싸우려고 출정한다는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군대를 청수시킵니다. 구스 왕 디르하가는 애굽을 격파한 나일 강의 강자였습니다. 산헤립이 그에 대해 축각을 곤두세울 만했습니다.

 

(1) 립나의 산헤립에게 돌아간 랍사게(8-9)

 

산헤립이 라기스를 떠나 립나(리브나)를 공격하고 있었기에 랍사게는 립나로 돌아갑니다. 산헤립이 라기스를 떠난 이유는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그가 라기스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기 위해 립나를 공격하는 것이라면 예루살렘의 위기가 더 심각해졌음을 보여주고, 구스 왕 디르하가와 싸우기 위해 라기스의 포위를 풀고 떠났다면 산헤립이 점차 전쟁의 주도권을 상실해가고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앗수르의 기록에 의하면 산헤립은 엘드게(Eltheke)에서 애굽 군대와 싸워 이겼습니다.

 

(2) 산헤립의 편지 내용(10-13)

 

디르하가의 출정 소식을 들은 산헤립이 이번에는 사신을 보내 편지로 항복을 재촉합니다(10-13). 산헤립은 히스기야가 의지하는 여호와를 직접 모독합니다. 그는 히스기야에게 여호와께 속지 말라고, 곧 예루살렘의 구원 신탁에 의존하여 쓸데없이 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는 자기 업적뿐만 아니라 선왕들의 행적까지 들먹이며 히스기야의 저항이 파국으로 끝날 것이라고 합니다. 반역한 모든 나라가 앗수르 왕들에게 멸망했는데, 히스기야만 예외가 될 수 있겠습니까? 고산은 유브라데 우편에 있는 비트 바히아니(bit bahiani) 지역의 수도로 주전 8세기에는 이미 앗수르의 지방이 됐던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가 함락당한 후에 북왕국 주민들이 유배를 당한 지역들 가운데 하나입니다(왕하 17:6;18:11). 이와는 앗수르에 멸망 당한 북왕국 사람들의 유배지 가운데 하나로 언급된 아와(왕하 17:24)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의 반응(14-20)

환난과 고통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그것이 바로 절망입니다. 절망은 사건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 절망이 아니라 믿음을 만들어 내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문제는 믿음으로 바라볼 때 은혜로 바뀝니다.

 

14히스기야가 그 사자들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 놓고 15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16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17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람을 보내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18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과연 열국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고 19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그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일 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20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니라(14-20)

 

아수르 산헤립은 구스 왕 디르하기가가 앗수르와 싸우려고 출정한다는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군대를 철수시킵니다. 구스 왕 디르하가는 애굽을 격파한 나일 강자였습니다. 산헤립이 그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울 만했습니다.

 

(1)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하는 히스기야(14-15)

 

랍사게의 유세를 보고받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던(1) 히스기야가 이번에도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갑니다. 기도하기 전에 산헤립의 서신을 여호와 앞에 펼쳐 놓습니다. 이것은 아마 여호와께 서신을 읽어드렸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당신 영예를 위해 개입하시기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2) 히스기야의 기도(16-20)

 

히스기야는 3중의 칭호로 하나님을 부릅니다(16). ‘만군의 여호와’는 예루살렘 제의에서 사용하는 공식적 호칭이고,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은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은 온 땅이 여호와의 주권 아래 있음을 주장하는 표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지만, 그분의 통치 영역은 이스라엘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로 땅의 모든 나라를 통치하십니다. 나라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세상의 왕을 주장하는 산헤립에 맞서 히스기야는 여호와께서 창조주로서 천하만국을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왕임을 고백합니다. 히스기야는 처음부터 예루살렘을 구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산헤립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조롱했다고 고발하면서 그를 여호와께 맞대면시킵니다(17). 먼저 앗수르 왕들이 모든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민족들의 신들을 불에 던져버렸다는 산헤립의 주장을 인정하고, 이로부터 전혀 다른 결론을 끌어냅니다(18-19). 앗수르가 정복한 민족들의 신들을 불에 던져 없애버린 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산헤립은 자기가 민족들의 신들을 이겼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승리는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의 정체를 폭로해주었을 뿐입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민족들의 신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산헤립에 맞서 사람이 나무나 돌을 재료로 해서 손으로 만든 우상하고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시길 간구합니다(20). 히스기야의 논리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구원은 여호와께서 참된 하나님이심을 민족들 가운데 과시하시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다른 신들은 산헤립의 손에서 자기 나라를 구하지 못했기에 우상(헛것)으로 판명 났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절대권력을 주장하는 산헤립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신다면, ‘천하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20).


히스기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루살렘 백성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명령하고, 선지자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믿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믿음에 화답하셔서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구원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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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6-01)


앗수르에게 포위당한 히스기야

이사야 36장 1-22절


 

건강이 최고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무리 많은 부귀영화 가운데 있다 해도 건강하지 않으면 그럼의 떡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건강을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몸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의 건강입니다. 그래서 몸을 살피듯 우리의 믿음을 날마다 살펴야 합니다.

 

  • 이사야가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주전 734-732년) 직전에 선포한 ‘흉용하고 청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이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는 심판 예언(8:7-8)이 그대로 현실이 됩니다.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과 그의 군대가 봉신 관계를 파기한 유다 왕 히스기야를 징벌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옵니다.

 

역사적 배경(1-3)

신앙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만을 믿는다고 의미입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신이니 그분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사람입니다.

 

1히스기야 왕 십사 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2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부터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 왕에게로 가게 하매 그가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 서매 3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에게 나아가니라(1-3)

 

히스기야 왕 십사 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남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붛왕 아하스는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달랐습니다. 앗수르 의지하기를 그만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1) 산헤립의 예루살렘 공격(1)

 

앗수르 왕 사르곤 2세(주전 722-705년)가 소아시아 지방의 전쟁터에서 갑자기 죽고 그의 아들 산헤립(주전 705-681년)이 왕위에 오르는 과도기에 앗수르의 지배 아래 있던 민족들이 봉기를 꾀했습니다. 아람 족속의 수장이었던 므로닥발라단(39:1)이 엘람(22:6)의 지원을 받아 바벨론을 점령해 왕위에 올랐고, 유다 왕 히스기야도 주변 나라들을 규합해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반앗수르 연합의 기세는 1년을 넘지 못했습니다. 산헤립은 므로닥발라단을 다시 쫓아내고 동쪽의 산악 지대까지 평정하고 시리아-팔레스티나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히스기야 왕 십사년’(주전 701년) 산헤립은 유다로 올라와서 모든 견고한 성읍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고립시켰습니다. 그는 ‘라기스에서부터’ 협상 대표로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했습니다(왕하 18:17).

 

(2) 산헤립이 파견한 랍사게(2)

 

라기스는 해안 평야로부터 진격해 들어오는 적들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랍사게의 임무는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것이었기에 ‘대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한 전투병보다는 과시를 위한 파견부대나 호위병을 가리킵니다. 랍사게가 위치한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은 이사야가 아들 스알야숩과 함께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를 만나 여호와의 신탁을 전달한 곳이기도 합니다(7:3). 연결해서 읽자면, 아하스가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서 이사야를 통해 전달된 여호와의 신탁을 거절하고 앗수르에 의지한 결과로 예루살렘이 앗수르 군대에 포위당하는 위기에 처합니다.

 

(3) 히스기야의 협상단(3)

 

히스기야가 파견한 유다의 협상단은 세 명의 고위 관료로 구성됩니다. 제일 먼저 언급된 엘리아김은 ‘왕궁 맡은 자’로 왕 다음의 최고위직에 속했습니다. 협상단의 두 번째는 ‘서기관 셉나’로, 22:15은 그를 ‘국고를 맡고 왕궁을 맡은 자’로 소개합니다. 그 사이에 셉나의 지위에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해줍나다. 세 번째 ‘사관 요아’는 여기에만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랍사게의 첫 번째 연설과 유다 사절의 반응(4-12)

예배는 하나님 백성의 산앙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우리를 만나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삶이 희미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희미해집니다.

 

4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히스기야에게 말하라 대왕 앗수르 왕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5내가 말하노니 네가 족히 싸울 계략과 용맹이 있노라 함은 입술에 붙은 말뿐이니라 네가 이제 누구를 믿고 나를 반역하느냐 6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에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7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노라 하리라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 8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내가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 9그런즉 네가 어찌 내 주의 종 가운데 극히 작은 총독 한 사람인들 물리칠 수 있으랴 어찌 애굽을 믿고 병거와 기병을 얻으려 하느냐 10내가 이제 올라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올라가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11이에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아오니 청하건대 그 방언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하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이 듣는 데에서 우리에게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마소서 하니 12랍사게가 이르되 내 주께서 이 일을 네 주와 네게만 말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기의 소변을 마실 성 위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냐 하더라 (4-12)

 

이제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믿음을 조롱합니다. 그는 히스기야의 개혁이 오히려 하나님께 가증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수많은 신당을 없애고 오직 예루살렘 성소의 제단에서만 제사 드리게 한 히스기야의 개혁을 폄하합니다. 그리고 유다의 무력함을 조롱합니다.

 

(1) 랍사게의 첫 번째 연설(4-10)

 

랍사게의 연설은 처음부터 중심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4)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신뢰하는 것이 허상임을 주장합니다. 전쟁은 입으로 하는 말장난이 아닙니다. ‘입술에 붙은 말’로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5). 계략과 용맹이 있어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9:6; 11:2). ‘반역하느냐’는 앗수르와 유다 사이에 어떤 정치적 협약이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왕하 18:7). 랍사게는 먼저 히스기야가 도움을 기대하는 애굽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애굽은 몸을 의지하는 자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히는 ‘상한(부러진) 갈대 지팡이’에 불과합니다(6; 겔 29:6-7). 랍사게의 주장은 애굽을 믿지 말라고 거듭 고발했던 이사야의 선포(19:117; 20:1-6; 30:1-7; 31:1-3)와 매우 유사합니다. 물론 이사야는 앗수르에 항복할 것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애굽이나 앗수르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여호와만 의존하도록 경고했습니다.

다음으로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종교 정책을 비판적으로 언급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노라’고 말하지만, 히스기야는 지방의 ‘산당과 제단’을 제하여 버리고 제의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한한 왕입니다(7;왕하 18:4).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의지에 반하는 정책으로 정죄합니다. 아마도 랍사게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적 개혁에 반감을 품고 있던 세력을 히스기야로부터 분리시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지방의 산당을 폐지해버린 히스기야의 조치는 그곳에서 종사하던 제사장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을 것이고, 또 개혁에 반대한 자들은 앗수르의 침략에서 히스기야를 징벌하는 여호와의 의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무능력도 조롱합니다. 말을 수 있는 자들을 마련할 수 있다면 말 이천 마리를 주겠다고 내기를 청합니다(8). 한때 유다는 군마로 가득했지만(2:7), 이제는 병력을 거의 다 상실하고 예루살렘은 고립무원의 신세가 됐습니다. 말을 준다 해도 말을 탈 병사를 구할 수 없는 참담한 처지가 됐습니다. 히스기야는 애굽의 병거와 기병의 도움만 바라볼 뿐, 그의 군대로는 앗수르 왕에게 속한 가장 낮은 계급의 지휘관 한 명도 물리칠 수 없습니다(9). ‘주의 종’은 여기서는 군 지휘관을 가리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랍사게는 산헤립의 예루살렘 원정이 여호와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침략의 신학적 정당성을 유세(遊說)합니다(10). 겉보기에는 이사야의 선포(사 5:26-30; 7:18-25; 10:5-14)와 다르지 않은,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공격을 허락하셨다는 랍사게의 주장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허황한 소리로 만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2) 랍사게와 유다 사절의 대화(11-12)

 

도발적인 연설에 사람들이 동요할 것을 두려워한 유다 협상단은 성벽 위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없게 유다 말 대신에 아람 말로 말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랍사게는 이를 극히 모욕적이고 위협적인 언사로 거절합니다(11-12).

 

랍사게의 두 번째 연설과 유다 사절의 반응(13-22)

믿음에는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사탄은 우리 믿음을 흔들려고 달콤하고 헛된 것들에 눈을 돌리게 합니다. 사탄은 다양한 유혹으로 우리의 믿음을 뒤흔듭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물질의 유혹입니다. 세상을 따르면 당장 복을 받게 될 것처럼 유혹합니다. 달콤합니다. 사탄은 주로 그 약점을 공격합니다.

 

13이에 랍사게가 일어서서 유다 방언으로 크게 외쳐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14왕의 말씀에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그가 능히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니라 15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을 따르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할지라도 16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 각각 자기의 우물 물을 마실 것이요 17내가 와서 너희를 너희 본토와 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에 옮기기까지 하리라 18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지라도 속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자기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19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스발와임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20이 열방의 신들 중에 어떤 신이 자기의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냈기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하니라 21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 22그 때에 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자기의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그에게 전하니라(13-22)

 

랍사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합니다. 열국의 신들 가운데 어떤 신도 앗수르 왕에게서 그 나라를 구하지 못했기에, 하나님도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큰소리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열국의 우상들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1) 랍사게의 두 번째 연설(13-20)

 

랍사게는 유다 말로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해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14-16a). 히스기야가 여호와께서 구해주실 것을 기대하지만, 그것은 헛된 기대일 뿐이라고 합니다. 목숨을 구하려면 그의 헛된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고 놀립니다. 15절에서 랍사게가 인용한 히스기야의 말은 전형적인 구원 신탁으로(사 31:5; 렘 15:21; 39:17; 겔 34:12,16), 산헤립과 히스기야의 대결이 점차 산헤립과 여호와의 대결로 바뀌어 갑니다.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을 분리시킨 랍사게는 이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항복을 권유합니다. 저항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에서 나와 앗수르 왕에게 복종하면 풍요롭고도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16b).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는 자유 시민의 이상적 삶을 보여주는 비유적 표현입니다(왕상 4:25;미 4:4).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나안 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는 산헤립은 이방 땅에서 잘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도 합니다(17). 산헤립이 여호와의 상대역으로 등장합니다. 산헤립이 축복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대신해서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주고,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던 여호와처럼 이들을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으로 데려갑니다.

18-20절은 주제에 있어 15-16a절에 직접 연결됩니다. 산헤립은 여호와를 많은 신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며 예루살렘의 마지막 소망을 짓밟습니다. 어떤 신도 ‘앗수르 왕의 손에서’ 제 나라를 구해낼 수 없었습니다(10:10–11).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에, 하맛과 아르밧은 주전 720년에 앗수르에 봉기했다가 멸망했습니다(10:9). 스발와임은 여기에만 나오는 도시 이름으로 그 위치도 불분명합니다. 반복 사용된 '내 손에서'는 산헤립의 절대 교만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이 이방신들과 싸워 이겼다고 말하면서 신적 능력을 주장합니다. 그는 직접 여호와를 공격합니다.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산헤립의 상대가 히스기야에서 여호와로 완전히 전환됩니다.

 

(2) 히스기야 사절의 침묵(21-22)

 

히스기야가 신뢰하는 여호와께서 산헤립의 주장을 인정하고 민족들의 신들 가운데 하나로 남으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께서는 그들과는 다른 존재임을 보여주셔야 하는 갈림길에 놓이십니다. 예루살렘의 운명에 따라 땅의 역사를 결정하고 경영하는 주체가 누구인지가 판가름 납니다. 왕의 명령을 미리 받았던 협상단은 랍사게의 도발적 연사에 응수하지 않습니다. 산헤립이 여호와의 권위에 도전했기에 이제 응답은 여호와에게 나와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마다 믿음을 흔드는 수 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유혹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혹을 이기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더욱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십시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끝까지 그 하나님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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