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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7-02)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이사야 37장 21-38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룻강아지는 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기에 겁도 없이 덤벼듭니다. 결과는 허망한 죽음입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 앞에 하룻강아지와 같이 무지합니다. 무지한 앗수르는 결국 하나님 앞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 산헤립의 편지를 받아 보고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한 히스기야에게 여호와께서 다시금 이사야를 통해 구원 신탁을 주십니다. 전체적 내용은 첫 번째 답변(6-7)과 유사하지만, 매우 구체적입니다. 예루살렘의 구원과 앗수르 군대의 궤멸적 철군을 통해 앗수르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 땅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응답(21-35)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이룬 성공을 자신이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이보다 무지한 것은 없습니다. 교만한 앗수르를 멸하신 하나님꼐서는 오늘도 교만한 자를 멸하십니다. 우리 안에 교만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라고 하였습니다.

 

21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사람을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하시고 22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23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에게니라 24네가 네 종을 통해서 주를 훼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 산들의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의 깊은 곳에 이르렀으니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향나무를 베고 또 그 제일 높은 곳에 들어가 살진 땅의 수풀에 이를 것이며 25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으니 내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말리리라 하였도다 26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미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27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28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29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30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올해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둘째 해에는 또 거기에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셋째 해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31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32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33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화살 하나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34그가 오던 길 곧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35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21-35)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에 대해 어리석다고 책망하십니다. 앗수르는 레바논의 모든 땅을 밟은 것과 애굽을 이기고 정복한 일을 두고 이스라엘 앞에서 자랑했지만,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이었습니다.

 

(1) 산헤립에 대한 예언(21-29)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사야를 통해 응답하십니다(21). 여호와를 모독하고 예루살렘을 위협했던 산헤립이 시온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할 것입니다(22; 22:1). 머리를 흔드는 행위는 경멸의 표시입니다(시 22:7; 109:25; 욥 16:4; 애 2:15). 23절의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는 17절의 히스기야 기도를 거의 그대로 받습니다. 산헤립은 히스기야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향하여 소리를 높이고 눈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산헤립은 여호와를 모독함으로써 그분의 ‘거룩하심’을 훼손하였습니다. 불의하고 교만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파괴와 멸망을 의미합니다. 24-25절의 인용문은 산헤립의 오만을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앗수르의 침략에서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높은 곳이나 깊숙한 곳에 숨을지라도 목숨을 구할 수 없습니다.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향나무’로 울창한 산림지대도 앗수르의 진군을 막을 수 없습니다. 물이 없는 지역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우물을 파서 마시면 됩니다. 심지어 애굽도 예외가 아닙니다. 침략하여 나일강의 모든 하천을 말려 애굽의 생명줄을 끊어버릴 것입니다. 26-29절은 한계를 넘은 산헤립의 교만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입니다. 여호와께서 1인칭으로 직접 산헤립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26-27절은 산헤립을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 소개합니다. 산헤립의 성공적인 침략 전쟁은 여호와께서 오래전에 결정하신 일에 불과합니다. 여호와께서 옛적에 정하고 계획하신 것을 그분의 ‘진노의 막대기’(10:5) 산헤립이 실행한 것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계획을 집행하셨기에 산헤립은 요새로 된 성읍들을 돌무더기로 만들 수 있었고, 그곳 주민들은 기운이 다하여 놀라고 수치를 당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산헤립을 뜨거운 동풍처럼 사용하셨기에 민족들은 그 앞에서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됐습니다. 즉, 산헤립의 승리는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계획과 실행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28-29절은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산헤립에 대한 고발과 심판선언입니다.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는’(10:15) 것처럼, 산헤립은 그의 거처와 출입을 아시는 여호와를 거슬러 분노했습니다. 승리에 도취한 산헤립은 자신을 절대화해 승리를 허락하신 분께 도전했습니다. 29절의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너의 소란이 내 귀에 올라왔으니’)는 24절의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 산들의 꼭대기에 올라가며’에 이어집니다. 산헤립이 절대권력을 과시하며 저지르는 소란이 여호와의 귀에 올라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제 당신 권위에 도전하는 땅의 권력에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산헤립의 코에 ‘갈고리’를 꿰고 입술에 ‘재갈’을 물려 강제로 원래 왔던 곳으로 끌고 가십니다. 자기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신의 자리를 탐하는 자의 말로가 사로잡혀 수치를 당하는 포로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산헤립에게 승리를 주셨던 분께서 이번에는 참패를 안기시고 그를 강제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2) 히스기야에게 주는 징조(30-32)

 

여호와의 간섭으로 앗수르 군대가 철군하지만, 그것으로 유다의 위기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앗수르 군대는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점령하고(36:1) 예루살렘만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앗수르의 침략으로 유다 땅은 완전히 폐허가 됐습니다. 성과 가옥은 파괴되고 경작지는 황폐해졌습니다. 많은 주민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가축과 식량은 약탈당했습니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준 징조는 앗수르의 철군 이후를 내다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징조를 통해 앗수르의 침략으로 황무지가 된 유다 땅이 짧은 시간 안에 회복될 것을 약속해주십니다. 징조는 3년의 기간을 전망합니다. 앗수르가 침략한 올해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거기에서 난 것’을 먹고, 후년에는 씨를 뿌려서 곡식을 거두고 ‘포도원에 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습니다(30). ‘스스로 난 것’은 씨를 뿌리지 않은 밭에서 저절로 자라난 곡식을 가리킵니다(레 25:5,11-12). ‘거기에서 난 것’으로 옮긴 샤히스(on)는 여기에만 나오는 단어로 그 의미가 불분명합니다. 아마도 전자처럼 야생 식물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첫째 해와 둘째 해는 농사를 짓지 못하고 폐허가 된 농경지나 들판이나 산에서 자연적으로 자란 것을 먹고, 셋째 해에는 씨를 뿌려 수확하고 포도나무를 심어 그 열매를 먹습니다. 폐허가 된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어서 한 해 또는 3년 만에 포도를 수확한다는 것은 물론 사실적 표현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삼 년’은 자주 새로운 사건을 기다리는 기간으로 사용됩니다(삼하 13:38; 왕상 22:1; 왕하 17:5; 18:10; 사 20:3). 전쟁의 후유증으로 얼마 동안 기근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여호와의 간섭으로 곧 극복됩니다. 산헤립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앗수르 침략군이 황무지로 만들어놓은 경작지도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분께서 복을 내려 땅이 다시 풍성한 결실을 맺고 주민들은 정상적인 삶을 되찾습니다. 포도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하기에 31절은 나무와 관련된 비유를 사용해 유다의 회복을 언급합니다. 포도원에 포도나무가 심기고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앗수르의 침략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앗수르를 진노의 막대기로 사용해 유다를 징벌하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유다와 함께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고, 예루살렘과 시온 산이 다시금 구원의 보루가 됩니다(32; 14:32). 유다는 자력으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극적 개입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구원과 회복이 전적으로 그분의 은총에 속함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열심/질투’는 원래 우상숭배를 금하시고 사랑(언약)의 독점적 관계를 요구하는 속성을 담은 표현인데(출 20:5; 34:14; 수 24:19), 여기서는 사랑의 보호자로서 열심을 내십니다.

 

(3) 예루살렘의 보호 약속(33-35)

 

예루살렘 성의 보호를 약속하는 33-35절은 내용상 22-29절의 연속입니다. 산헤립의 교만을 징벌하시기로 한(29) 여호와께서 이를 실행에 옮기십니다. 예루살렘을 구원의 보루로 택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앗수르 침략군이 예루살렘에 접근도 못하도록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이들을 빈손으로 되돌아가게 하십니다(29:1-8). 35절의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는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준 약속(삼하 7:16)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산헤립의 원정 결말(36-38)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했을 때 우리가 살길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기도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자를 보내 하룻밤에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을 죽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룻밤에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죽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출 12:29-30). 산헤립은 비참한 패배를 맛보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칼에 죽었습니다.

 

36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37이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8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36-38)

 

앗수르 군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화살 한 번 쏘지 못한 채 몰살당합니다. 그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간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앗수르 왕이 아들에게 죽임을 당할 줄 몰랐습니다. 교만에 취한 앗수르 왕은 자신의 무능을 너무 몰랐습니다.

 

(1) 산헤립의 패배와 철군(36)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을 쳐서 ‘십팔만 오천인’을 죽입니다(36). 산헤립이 ‘사자들’을 보내(9) 모독하자, 여호와께서 ‘사자’를 보내 앗수르 군대를 치십니다. 여호와를 모독한 산헤립의 패배로 히스기야가 기도했던 것처럼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20) 됩니다. 전통적으로 역병을 생각하지만, 산헤립의 군대가 어떻게 궤멸했는지는 사변의 영역에 속합니다.

 

(2) 니느웨로 돌아간 산헤립(37-38)

 

여호와를 모독하였던 산헤립은 돌아가서 대략 이십 년이 지나 칼에 맞아 죽습니다(37-38). 주전 681년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산헤립은 그의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도움을 간구한 히스기야는 구원을 받고, 산헤립은 자신이 섬기는 신 니스록의 전에서 경배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살해범들은 앗수르의 적국인 아라랏(우라르투)으로 도망하고, 산헤립의 아들 에살핫돈(주전680-669년)이 왕위에 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리 강해도 약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초라하고 보잘것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도 무지합니다. 이 사실은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무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만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교만하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의 무지를 버리고 여호와르 경외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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