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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9-01)


전수하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

이사야 39장 1-8절


 

놀이동산에서 인기 있는 놀이기구 가운데 하나가 롤러코스터입니다. 빠른 속도로 운행하면서 아찔한 높이에서 급강하하기도 하고 갑자기 솟구치기도 하는 스릴 만점의 놀이기구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이렇게 롤러코스터를 탄 듯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굴곡진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어려움이 지속된 것입니다. 히스기야도 그랬습니다. 그의 롤러코스터 인생을 살펴봅시다.

 

  • 정치적으로는 앗수르의 위협에서 예루살렘이 기적적으로 구출 받는 개인적으로는 죽을병에서 극적으로 치유함을 받는 여호와의 놀라운 구원 능력을 경험했지만, 히스기야의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의 인정에 고무된 히스기야가 다시금 여호와를 떠나 동맹 정치의 길을 선택합니다. 여호와의 은총에 의한 구원 경험이 과거사가 돼버립니다.

 

도입부: 역사적 배경(1-2)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을 높이십니다. 기도는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기도할 때가 가장 겸손한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사람을 항상 높이십니다. 고난 가운데 드린 간절한 기도가 히스기야를 높입니다. 그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생각할 수도 없는 은혜를 기도를 통해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1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2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1-2)

 

하나님의 말씀대로 히스기야는 죽을병에서 회복되어 생명을 연장받았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간절히 부르짖은 결과,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1) 므로닥발라단의 사신 파견(1)

 

39장은 이중적으로 38장에 연결됩니다. 도입부의 ‘그때에’(18:7; 20:2)는 뒤따르는 사건을 앞의 사건에 시간상으로 이어주고,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는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 배경을 보여줍니다. 이웃 나라의 왕이 병들었다가 회복됐을 때 사신을 보내 축하하는 일은 그 자체로 특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신을 바벨론 왕이 보냈다는 점입니다. 주전 8세기 후반 국력이 매우 약화하기는 했지만, 바벨론은 앗수르도 인정해주는 명망 있는 나라였습니다. 유다는 변방에 속한 나라로 바벨론의 관심 밖에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이 유다 왕의 회복을 축하하려고 사절을 보내는 일은 이스라엘 역사에 없었습니다. 바벨론 사신이 단지 축하의 말을 전하기 위해 그 먼 길을 온 것이 아님은 히스기야의 도를 넘는 처신과 그에 따른 이사야의 고발을 통해 분명해집니다. 히스기야는 사신을 반가이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보물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줍니다. 특히 무기고도 보여주었음은 사절의 방문 목적이 전쟁 준비와 관련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산헤립의 통치 초반 므로닥발라단뿐만 아니라 히스기야도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앗수르는 바벨론과 유다의 공동의 적이었습니다.

 

(2) 히스기야의 환대(2)

 

엘람과 연합하여 주전 704년 봉기를 일으키고, 바벨론 왕이 된 므로닥발라단이 반 앗수르 전선을 확장하려고 사절을 보내자, 앗수르의 굴레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리던 히스기야가 기꺼이 손을 잡습니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왕으로 닥발라단이 예물을 보내면서 자신을 동맹의 한 축으로 인정해준 것에 크게 고무돼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보여주면서 바벨론과 함께할 만한 충분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음을 과시합니다. 세속적으로 사용될 때 ‘예물’(민하)은 주로 존경심과 충성심과 감사를 표현하는 선물을 가리킵니다. ‘글’(서라핌)은 ‘서신들’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 ‘서신들’이 두 번 나오는데, 모두 이방 왕이 히스기야에게 보냅니다. 37:14에서는 산헤립이 여호와를 모독하는 서신을 보내자 그것을 가지고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가고, 여기서는 므로닥발라단이 보낸 서신에 흥분해서 그의 사절에게 유다의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이방 왕의 서신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히스기야를 찾아온 이사야(3-4)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한 후에 오히려 맡겨진 일상의 사명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히려 일상을 규모 있게 꾸려 가야 할 터인데, 흥분하고 들뜬 마음으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경우는 없는지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히스기야는 바벨론이 유대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아직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기 힘을 과시하며 이를 통해 양국 간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싶었던 것입니다.

 

3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이르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하니라 4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 하니라(3-4)

 

잔뜩 고무된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신들에게 오아궁 보물창고와 무기고를 다 공개해 보여주었습니다. 자만심에 빠져 유다의 힘과 부를 자랑하고자 최소한이 경계마저 풀어 버린 것입니다.

 

(1) 이사야의 질문과 히스기야의 답변(3)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됐을 때처럼(38:1) 예언자 이사야가 왕에게 나아옵니다. 이번에는 신탁을 전달하기에 앞서 먼저 왕에게 묻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에서 왕에게 왔나이까?’ 왕은 첫번째 질문에 관해서는 답하지 않고 두 번째 질문에 관해서만 간단하게 이들이 먼 나라, 곧 바벨론에서 왔다고 알려줍니다. 왕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먼 나라에서 왔다고만 말합니다. 이사야가 다시 왕에게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하고 묻자, 왕은 그들이 궁중의 창고에 있는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사야가 몰라서 왕에게 물어본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곧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음(5-7)은 그가 이미 다 알고 왕을 찾아왔음을 전제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이사야의 질문은 고발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사야는 사정을 다 알고 왕에게 질문하는데, 왕은 몰라서 물어보는 사람에게 답변하듯이 이사야에게 ‘객관적으로’ 답합니다. 특히 세 번째 질문에 대한 왕의 답변은 의미하는 바가 남다릅니다.

 

(2) 이사야의 질문과 히스기야의 답변(4)

 

4절의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는 문맥에 따른 인칭 변화를 제외하면 2절의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은지라’와 문자적으로 일치합니다. 바벨론 왕이 보낸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한’ 히스기야의 태도에 전혀 변화가 없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이사야는 질문을 통해 자기 처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지만, 바벨론 왕의 인정에 고무된 히스기야는 이를 잡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심판선포와 히스기야의 반응(5-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 단지 개인의 형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세상의 복으로 부름 받은 이후로(창 12:2),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흘려보내는 자로서 부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능력을 체험하기까지 했던 히스기야도 신앙을 전수하는 데 실패했던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전수하고 전파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5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6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7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8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5-8)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교만과 불신앙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시는데, 히스기야의 행위에 상응하는 형태의 심판입니다. 즉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 줄 것들이 모두 바벨론에게 넘어가게 돤다는 것입니다.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 선포(5)

 

히스기야의 건조한 답변을 듣는 즉시 이사야는 왕에게 심판의 신탁을 선포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5)은 전하는 신탁이 예언자 이사야의 생각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임을 강조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에 왕으로 임재하시는 여호와께서 당신께 의존하지 않고 이방 세력과 연합하려는 왕에게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보라 날들이 이르리라’는 현재분사 구문으로,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을 보여줍니다. 히스기야의 정치적 불순종이 초래한 심판으로 유다는 물적 인적으로 치명적 피해를 입습니다.

 

(2) 재물의 약탈(6)

 

히스기야와 그의 조상들이 지금까지 모아놓았던 재물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집니다(6). 히스기야가 자랑스럽게 바벨론 사절에게 보여주었던 것들이 모두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약탈당합니다.

 

(3) 일부 왕족의 사로잡힌(7)

 

또 히스기야에게서 태어날 아들들 가운데 몇몇은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됩니다(7). 여호와 대신 바벨론 왕을 선택한 결과로 예루살렘에서 통치해야 할 다윗의 후손이 포로로 끌려가 바벨론 왕을 섬기게 됩니다. 히스기야가 의지한 바벨론에 의해 그의 나라가 약탈을 당하고 그의 후손이 수치를 당합니다. 대략 한 세기 조금 넘어 발생하는 유다의 비극적 종말이 히스기야의 과오로 돌려집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강대국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히스기야는 그의 아버지 아하스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의 문맥에서 6-7절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배를 역사적 현실로 전제하는 40장 이하를 내다봅니다.

 

(4) 히스기야의 반응(8)

 

심판선언에 대한 히스기야의 답변(8)은 이중적입니다. 히스기야는 먼저 이사야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에 긍정적으로 동의합니다.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죽을병이 들었을 때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신탁을 전달받지만, 이를 수용하지 않고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해달라며(38:3) 하나님께 매달려 목숨을 구했던 히스기야가 여기서는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고 자손의 일부가 유배를 당하리라는 엄중한 심판의 말씀을 ‘좋소이다’하고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좋소이다’는 ‘톱’의 번역으로, 38:3의 ‘선하게’(문자적으로, ‘선한 것’)와 같습니다. 선하게 살아온 삶을 인정해달라고 간구한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심판선포를 선하신 결정으로 수용합니다. 잘못을 인정합니다. ‘선함’은 히스기야의 불순종에 심판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결정의 선함(정당성)을 의미합니다. 하반절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는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부정의문문으로 된 열왕기하 20:19의 병행본문(이사야 본문에 따라 번역하면,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은 히스기야의 부정적 태도를 시사해주지만, 긍정문으로 서술된 이사야 본문도 그러한지는 불분명합니다. 때로는 히스기야의 이기주의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를, 때로는 심판에 노출된 자의 모범적인 경건을 보기도 합니다. 둘 다 가능하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36-38장의 여호와 중심적 히스기야와 39장의 자기중심적 히스기야 사이의 단절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문맥은 후자의 해석을 지지합니다. 자신의 불순종이 초래한 심판 결정이기에 히스기야는 이를 되돌릴 수 없음을 알고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의 수용은 체념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심판의 표지 아래 살아가는 자의 신앙적 결단입니다. 산헤립의 위협에 직면해서는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간구하고, 죽을병에 걸려서는 여호와께 매달려 구원을 경험한 히스기야는 미래 자신을 맡기고 그분의 심판을 결정하신 여호와께께서 허락하신 ‘평안과 견고함’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에 히스기야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없는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선하다고 수긍하는듯한 자세를 보이면서 자신의 생전에 평안하고 견고하다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서 흥분한 나머지 교만해진 히스기야가 분별력을 잃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은혜를 체험한 이후의 삶입니다.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서 더 큰 은혜의 삶을 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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