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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7-01)


히스기야가 선택한 믿음의 길

이사야 37장 1-20절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십니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절망적인 순간에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가득 메운 하늘 위에 여전히 빛나는 태양처럼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응답하실 하나님을 믿고 아가시길 바랍니다.

 

  • 앗수르 왕 산헤립이 파견한 랍사게의 오만하고 위협적인 말을 전해 들은 유다 왕 히스기야는 신하들을 예언자 이사야에게 보내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자신은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갑니다. 히스기야는 오직 여호와만이 앗수르의 위협에서 예루살렘을 구해주실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당신을 능욕한 랍사게의 말을 들으신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히스기야의 반응(1-4)

절망은 우리의 눈을 가리고 포기하게 합니다. 사방이 가로막혀 도저히 길이 없는 곳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고 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절망적인 인생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도저히 싸워 이길 수 없는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히스기야는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2왕궁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굵은 베옷을 입으니라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3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4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가 그의 상전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로 말미암아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하니라(1-4)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성전으로 가면서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극심한 고통과 슬픔의 표시입니다. 히스기야는 또한 신하들을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1) 성전으로 가는 히스기야(1)

 

협상단의 보고를 받은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집으로 갑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구원이 오직 여호와의 개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신하들을 이사야에게 보내 여호와의 신탁을 부탁합니다. 사정을 잘 아는 엘리아김과 셉나뿐만 아니라 ‘제사장 중 어른들’(원로 제사장들)도 함께 보냅니다. 이는 이 사안의 긴박성과 중요성뿐 아니라, 이사야에 대한 왕의 인정과 신뢰를 보여줍니다. 히스기야의 반응은 아버지 아하스와 대조적입니다(7:1-17). 정치에서 여호와를 배제한 아하스와 달리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역사와 정치를 결정하시는 주체로 인정합니다(3-4). 그는 이사야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면서 먼저 참담한 처지를 고백합니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나고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절망적 상황을 언급한 것은 체념에서 나온 한탄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는 자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개입을 호소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주권을 존중하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소망을 드러냅니다. 그는 다윗 왕조나 예루살렘과 여호와의 특별한 관계를 교리적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한 랍사게의 위협에서 그분의 개입 가능성을 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 영예가 훼손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민족들의 신들과 달리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시기에 랍사게의 모독에 침묵하실 수 없습니다. ‘혹시’(암 5:15; 욜 2:14; 욘 3:9; 습 2:3)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관련한 표현이며, 예루살렘의 구원이 전적으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결정에 속함을 보여줍니다. 끝으로 히스기야는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이사야에게 부탁합니다. 이스라엘의 생존이 하나님의 개입에만 달려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사야를 통한 응답(5-7)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전쟁은 사람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사람에게 하찮아 보이는 곳에서 하나님의 열심은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바람 같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모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영혼은 그 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5그리하여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매 6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7보라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의 고국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5-7)

 

이사야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전쟁은 사람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를 물리치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영을 그의 속에 두겠다고 합니다.

 

(1) 이사야를 찾아온 왕의 신하들(5)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예루살렘의 구원에 관한 신탁을 주십니다.

 

(2) 격려의 말씀(6)

 

6절의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히스기야의 간구(4)가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줍니다. ‘나를 능욕한 말’은 구체적으로는 36:18-20에서 랍사게가 한 말을 가리킵니다. 신탁(7)은 내용뿐만 아니라 그 실천 방법까지 포함합니다. ‘보라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는 앗수르 군대의 철군과 산헤립의 죽음이 여호와의 직접적인 간섭에 의해 이뤄질 것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께서 특정 목적을 위해 ‘영’(루아흐)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다(사 19:14; 29:10). 신탁의 첫 번째 내용은 산헤립이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산헤립이 원정을 중단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게 하는 ‘소문’(무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36절에 의하면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쳐서 돌아가게 합니다.

 

(3) 구원 신탁(7)

 

신탁의 두 번째 내용은 산헤립 개인에 관한 것으로, 산헤립이 자기 나라에서 칼에 맞아 쓰러지게 하십니다. 산헤립은 주전 681년, 대략 이십 년이 지나 자기 자식들에게 살해당합니다(38).

 

산헤립의 두 번째 위협(8-13)

아무리 돌아봐도 길이 없는 절망의 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절망의 순간에 우리는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게 절망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소망입니다. 절망이라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8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떠났다 함을 듣고 랍사게가 돌아가다가 그 왕을 만나니 립나를 치고 있더라 9그 때에 앗수르 왕이 구스 왕 디르하가의 일에 대하여 들은즉 사람들이 이르기를 그가 나와서 왕과 싸우려 한다 하는지라 이 말을 듣고 사자들을 히스기야에게 보내며 이르되 10너희는 유다의 히스기야 왕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너는 네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11앗수르 왕들이 모든 나라에 어떤 일을 행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멸절시켰는지 네가 들었으리니 네가 구원을 받겠느냐 12나의 조상들이 멸하신 열방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및 들라살에 있는 에덴 자손을 그 나라들의 신들이 건졌더냐 13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 성의 왕과 헤나 왕과 이와 왕이 어디 있느냐 하라 하였더라(8-13)

 

앗수르 산헤립은 구스 왕 디르하가가 앗수르와 싸우려고 출정한다는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군대를 청수시킵니다. 구스 왕 디르하가는 애굽을 격파한 나일 강의 강자였습니다. 산헤립이 그에 대해 축각을 곤두세울 만했습니다.

 

(1) 립나의 산헤립에게 돌아간 랍사게(8-9)

 

산헤립이 라기스를 떠나 립나(리브나)를 공격하고 있었기에 랍사게는 립나로 돌아갑니다. 산헤립이 라기스를 떠난 이유는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그가 라기스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기 위해 립나를 공격하는 것이라면 예루살렘의 위기가 더 심각해졌음을 보여주고, 구스 왕 디르하가와 싸우기 위해 라기스의 포위를 풀고 떠났다면 산헤립이 점차 전쟁의 주도권을 상실해가고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앗수르의 기록에 의하면 산헤립은 엘드게(Eltheke)에서 애굽 군대와 싸워 이겼습니다.

 

(2) 산헤립의 편지 내용(10-13)

 

디르하가의 출정 소식을 들은 산헤립이 이번에는 사신을 보내 편지로 항복을 재촉합니다(10-13). 산헤립은 히스기야가 의지하는 여호와를 직접 모독합니다. 그는 히스기야에게 여호와께 속지 말라고, 곧 예루살렘의 구원 신탁에 의존하여 쓸데없이 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는 자기 업적뿐만 아니라 선왕들의 행적까지 들먹이며 히스기야의 저항이 파국으로 끝날 것이라고 합니다. 반역한 모든 나라가 앗수르 왕들에게 멸망했는데, 히스기야만 예외가 될 수 있겠습니까? 고산은 유브라데 우편에 있는 비트 바히아니(bit bahiani) 지역의 수도로 주전 8세기에는 이미 앗수르의 지방이 됐던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가 함락당한 후에 북왕국 주민들이 유배를 당한 지역들 가운데 하나입니다(왕하 17:6;18:11). 이와는 앗수르에 멸망 당한 북왕국 사람들의 유배지 가운데 하나로 언급된 아와(왕하 17:24)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의 반응(14-20)

환난과 고통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그것이 바로 절망입니다. 절망은 사건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 절망이 아니라 믿음을 만들어 내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문제는 믿음으로 바라볼 때 은혜로 바뀝니다.

 

14히스기야가 그 사자들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 놓고 15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16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17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람을 보내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18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과연 열국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고 19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그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일 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20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니라(14-20)

 

아수르 산헤립은 구스 왕 디르하기가가 앗수르와 싸우려고 출정한다는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군대를 철수시킵니다. 구스 왕 디르하가는 애굽을 격파한 나일 강자였습니다. 산헤립이 그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울 만했습니다.

 

(1)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하는 히스기야(14-15)

 

랍사게의 유세를 보고받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던(1) 히스기야가 이번에도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갑니다. 기도하기 전에 산헤립의 서신을 여호와 앞에 펼쳐 놓습니다. 이것은 아마 여호와께 서신을 읽어드렸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당신 영예를 위해 개입하시기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2) 히스기야의 기도(16-20)

 

히스기야는 3중의 칭호로 하나님을 부릅니다(16). ‘만군의 여호와’는 예루살렘 제의에서 사용하는 공식적 호칭이고,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은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은 온 땅이 여호와의 주권 아래 있음을 주장하는 표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지만, 그분의 통치 영역은 이스라엘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로 땅의 모든 나라를 통치하십니다. 나라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세상의 왕을 주장하는 산헤립에 맞서 히스기야는 여호와께서 창조주로서 천하만국을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왕임을 고백합니다. 히스기야는 처음부터 예루살렘을 구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산헤립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조롱했다고 고발하면서 그를 여호와께 맞대면시킵니다(17). 먼저 앗수르 왕들이 모든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민족들의 신들을 불에 던져버렸다는 산헤립의 주장을 인정하고, 이로부터 전혀 다른 결론을 끌어냅니다(18-19). 앗수르가 정복한 민족들의 신들을 불에 던져 없애버린 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산헤립은 자기가 민족들의 신들을 이겼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승리는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의 정체를 폭로해주었을 뿐입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민족들의 신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산헤립에 맞서 사람이 나무나 돌을 재료로 해서 손으로 만든 우상하고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시길 간구합니다(20). 히스기야의 논리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구원은 여호와께서 참된 하나님이심을 민족들 가운데 과시하시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다른 신들은 산헤립의 손에서 자기 나라를 구하지 못했기에 우상(헛것)으로 판명 났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절대권력을 주장하는 산헤립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신다면, ‘천하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20).


히스기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루살렘 백성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명령하고, 선지자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믿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믿음에 화답하셔서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구원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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