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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6-01)


앗수르에게 포위당한 히스기야

이사야 36장 1-22절


 

건강이 최고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무리 많은 부귀영화 가운데 있다 해도 건강하지 않으면 그럼의 떡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건강을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몸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의 건강입니다. 그래서 몸을 살피듯 우리의 믿음을 날마다 살펴야 합니다.

 

  • 이사야가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주전 734-732년) 직전에 선포한 ‘흉용하고 청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이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는 심판 예언(8:7-8)이 그대로 현실이 됩니다.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과 그의 군대가 봉신 관계를 파기한 유다 왕 히스기야를 징벌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옵니다.

 

역사적 배경(1-3)

신앙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만을 믿는다고 의미입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신이니 그분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사람입니다.

 

1히스기야 왕 십사 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2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부터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 왕에게로 가게 하매 그가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 서매 3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에게 나아가니라(1-3)

 

히스기야 왕 십사 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남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붛왕 아하스는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달랐습니다. 앗수르 의지하기를 그만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1) 산헤립의 예루살렘 공격(1)

 

앗수르 왕 사르곤 2세(주전 722-705년)가 소아시아 지방의 전쟁터에서 갑자기 죽고 그의 아들 산헤립(주전 705-681년)이 왕위에 오르는 과도기에 앗수르의 지배 아래 있던 민족들이 봉기를 꾀했습니다. 아람 족속의 수장이었던 므로닥발라단(39:1)이 엘람(22:6)의 지원을 받아 바벨론을 점령해 왕위에 올랐고, 유다 왕 히스기야도 주변 나라들을 규합해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반앗수르 연합의 기세는 1년을 넘지 못했습니다. 산헤립은 므로닥발라단을 다시 쫓아내고 동쪽의 산악 지대까지 평정하고 시리아-팔레스티나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히스기야 왕 십사년’(주전 701년) 산헤립은 유다로 올라와서 모든 견고한 성읍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고립시켰습니다. 그는 ‘라기스에서부터’ 협상 대표로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했습니다(왕하 18:17).

 

(2) 산헤립이 파견한 랍사게(2)

 

라기스는 해안 평야로부터 진격해 들어오는 적들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랍사게의 임무는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것이었기에 ‘대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한 전투병보다는 과시를 위한 파견부대나 호위병을 가리킵니다. 랍사게가 위치한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은 이사야가 아들 스알야숩과 함께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를 만나 여호와의 신탁을 전달한 곳이기도 합니다(7:3). 연결해서 읽자면, 아하스가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서 이사야를 통해 전달된 여호와의 신탁을 거절하고 앗수르에 의지한 결과로 예루살렘이 앗수르 군대에 포위당하는 위기에 처합니다.

 

(3) 히스기야의 협상단(3)

 

히스기야가 파견한 유다의 협상단은 세 명의 고위 관료로 구성됩니다. 제일 먼저 언급된 엘리아김은 ‘왕궁 맡은 자’로 왕 다음의 최고위직에 속했습니다. 협상단의 두 번째는 ‘서기관 셉나’로, 22:15은 그를 ‘국고를 맡고 왕궁을 맡은 자’로 소개합니다. 그 사이에 셉나의 지위에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해줍나다. 세 번째 ‘사관 요아’는 여기에만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랍사게의 첫 번째 연설과 유다 사절의 반응(4-12)

예배는 하나님 백성의 산앙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우리를 만나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삶이 희미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희미해집니다.

 

4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히스기야에게 말하라 대왕 앗수르 왕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5내가 말하노니 네가 족히 싸울 계략과 용맹이 있노라 함은 입술에 붙은 말뿐이니라 네가 이제 누구를 믿고 나를 반역하느냐 6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에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7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노라 하리라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 8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내가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 9그런즉 네가 어찌 내 주의 종 가운데 극히 작은 총독 한 사람인들 물리칠 수 있으랴 어찌 애굽을 믿고 병거와 기병을 얻으려 하느냐 10내가 이제 올라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올라가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11이에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아오니 청하건대 그 방언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하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이 듣는 데에서 우리에게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마소서 하니 12랍사게가 이르되 내 주께서 이 일을 네 주와 네게만 말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기의 소변을 마실 성 위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냐 하더라 (4-12)

 

이제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믿음을 조롱합니다. 그는 히스기야의 개혁이 오히려 하나님께 가증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수많은 신당을 없애고 오직 예루살렘 성소의 제단에서만 제사 드리게 한 히스기야의 개혁을 폄하합니다. 그리고 유다의 무력함을 조롱합니다.

 

(1) 랍사게의 첫 번째 연설(4-10)

 

랍사게의 연설은 처음부터 중심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4)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신뢰하는 것이 허상임을 주장합니다. 전쟁은 입으로 하는 말장난이 아닙니다. ‘입술에 붙은 말’로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5). 계략과 용맹이 있어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9:6; 11:2). ‘반역하느냐’는 앗수르와 유다 사이에 어떤 정치적 협약이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왕하 18:7). 랍사게는 먼저 히스기야가 도움을 기대하는 애굽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애굽은 몸을 의지하는 자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히는 ‘상한(부러진) 갈대 지팡이’에 불과합니다(6; 겔 29:6-7). 랍사게의 주장은 애굽을 믿지 말라고 거듭 고발했던 이사야의 선포(19:117; 20:1-6; 30:1-7; 31:1-3)와 매우 유사합니다. 물론 이사야는 앗수르에 항복할 것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애굽이나 앗수르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여호와만 의존하도록 경고했습니다.

다음으로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종교 정책을 비판적으로 언급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노라’고 말하지만, 히스기야는 지방의 ‘산당과 제단’을 제하여 버리고 제의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한한 왕입니다(7;왕하 18:4).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의지에 반하는 정책으로 정죄합니다. 아마도 랍사게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적 개혁에 반감을 품고 있던 세력을 히스기야로부터 분리시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지방의 산당을 폐지해버린 히스기야의 조치는 그곳에서 종사하던 제사장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을 것이고, 또 개혁에 반대한 자들은 앗수르의 침략에서 히스기야를 징벌하는 여호와의 의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무능력도 조롱합니다. 말을 수 있는 자들을 마련할 수 있다면 말 이천 마리를 주겠다고 내기를 청합니다(8). 한때 유다는 군마로 가득했지만(2:7), 이제는 병력을 거의 다 상실하고 예루살렘은 고립무원의 신세가 됐습니다. 말을 준다 해도 말을 탈 병사를 구할 수 없는 참담한 처지가 됐습니다. 히스기야는 애굽의 병거와 기병의 도움만 바라볼 뿐, 그의 군대로는 앗수르 왕에게 속한 가장 낮은 계급의 지휘관 한 명도 물리칠 수 없습니다(9). ‘주의 종’은 여기서는 군 지휘관을 가리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랍사게는 산헤립의 예루살렘 원정이 여호와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침략의 신학적 정당성을 유세(遊說)합니다(10). 겉보기에는 이사야의 선포(사 5:26-30; 7:18-25; 10:5-14)와 다르지 않은,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공격을 허락하셨다는 랍사게의 주장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허황한 소리로 만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2) 랍사게와 유다 사절의 대화(11-12)

 

도발적인 연설에 사람들이 동요할 것을 두려워한 유다 협상단은 성벽 위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없게 유다 말 대신에 아람 말로 말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랍사게는 이를 극히 모욕적이고 위협적인 언사로 거절합니다(11-12).

 

랍사게의 두 번째 연설과 유다 사절의 반응(13-22)

믿음에는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사탄은 우리 믿음을 흔들려고 달콤하고 헛된 것들에 눈을 돌리게 합니다. 사탄은 다양한 유혹으로 우리의 믿음을 뒤흔듭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물질의 유혹입니다. 세상을 따르면 당장 복을 받게 될 것처럼 유혹합니다. 달콤합니다. 사탄은 주로 그 약점을 공격합니다.

 

13이에 랍사게가 일어서서 유다 방언으로 크게 외쳐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14왕의 말씀에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그가 능히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니라 15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을 따르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할지라도 16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 각각 자기의 우물 물을 마실 것이요 17내가 와서 너희를 너희 본토와 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에 옮기기까지 하리라 18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지라도 속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자기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19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스발와임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20이 열방의 신들 중에 어떤 신이 자기의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냈기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하니라 21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 22그 때에 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자기의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그에게 전하니라(13-22)

 

랍사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합니다. 열국의 신들 가운데 어떤 신도 앗수르 왕에게서 그 나라를 구하지 못했기에, 하나님도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큰소리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열국의 우상들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1) 랍사게의 두 번째 연설(13-20)

 

랍사게는 유다 말로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해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14-16a). 히스기야가 여호와께서 구해주실 것을 기대하지만, 그것은 헛된 기대일 뿐이라고 합니다. 목숨을 구하려면 그의 헛된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고 놀립니다. 15절에서 랍사게가 인용한 히스기야의 말은 전형적인 구원 신탁으로(사 31:5; 렘 15:21; 39:17; 겔 34:12,16), 산헤립과 히스기야의 대결이 점차 산헤립과 여호와의 대결로 바뀌어 갑니다.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을 분리시킨 랍사게는 이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항복을 권유합니다. 저항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에서 나와 앗수르 왕에게 복종하면 풍요롭고도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16b).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는 자유 시민의 이상적 삶을 보여주는 비유적 표현입니다(왕상 4:25;미 4:4).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나안 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는 산헤립은 이방 땅에서 잘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도 합니다(17). 산헤립이 여호와의 상대역으로 등장합니다. 산헤립이 축복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대신해서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주고,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던 여호와처럼 이들을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으로 데려갑니다.

18-20절은 주제에 있어 15-16a절에 직접 연결됩니다. 산헤립은 여호와를 많은 신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며 예루살렘의 마지막 소망을 짓밟습니다. 어떤 신도 ‘앗수르 왕의 손에서’ 제 나라를 구해낼 수 없었습니다(10:10–11).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에, 하맛과 아르밧은 주전 720년에 앗수르에 봉기했다가 멸망했습니다(10:9). 스발와임은 여기에만 나오는 도시 이름으로 그 위치도 불분명합니다. 반복 사용된 '내 손에서'는 산헤립의 절대 교만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이 이방신들과 싸워 이겼다고 말하면서 신적 능력을 주장합니다. 그는 직접 여호와를 공격합니다.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산헤립의 상대가 히스기야에서 여호와로 완전히 전환됩니다.

 

(2) 히스기야 사절의 침묵(21-22)

 

히스기야가 신뢰하는 여호와께서 산헤립의 주장을 인정하고 민족들의 신들 가운데 하나로 남으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께서는 그들과는 다른 존재임을 보여주셔야 하는 갈림길에 놓이십니다. 예루살렘의 운명에 따라 땅의 역사를 결정하고 경영하는 주체가 누구인지가 판가름 납니다. 왕의 명령을 미리 받았던 협상단은 랍사게의 도발적 연사에 응수하지 않습니다. 산헤립이 여호와의 권위에 도전했기에 이제 응답은 여호와에게 나와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마다 믿음을 흔드는 수 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유혹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혹을 이기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더욱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십시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끝까지 그 하나님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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