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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0-02)


비교할 수 없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사야 40장 12-31절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우상에 절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상을 섬기는 일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탐심이 곧 우상 숭배이기 때문입니다(골 3:5). 과거나 지금이나 우상에 기대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 창조와 역사가 여호와의 능력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됩니다. 여호와께서 홀로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홀로 역사를 지배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한다면, 그분이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시고 역사를 지배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면서 당신의 창조 능력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12-17)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은 그 누구도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계획을 스스로 정하시고 이루어 가십니다. 그 계획 속에는 당신의 백성을 향하신 뜻과 계획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뜻과 섭리는 인간이 이해하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오묘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완전합니다.

 

12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작은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13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15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16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17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12-17)

 

창조와 역사는 별개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이십니다. 무한한 지혜로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헤아릴 수 없는 지혜로 통치하십니다.

 

(1) 창조주 여호와의 무한 능력(12)

 

바다와 하늘과 땅과 산을 누가 창조하였습니까? 창조주의 능력과 지혜를 누가 헤아려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여호와께 창조를 명령했습니까? 누가 조력자가 되어 그분을 지도하고 가르쳤습니까? 여호와께서 누구와 의논하시고 누구로부터 깨달음을 받았습니까? 누가 그분의 계획에 영향을 미쳤습니까? 누가 그분 곁에서 바른길과 지식을 가르치고 슬기 있는 길을 가게 했단 말입니까? 홀로 결정하시고 명령하십니다. 홀로 계획을 세우시고 당신 백성에게 알려주십니다. ‘정의의 길과 지식과 통달의 도’는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이 창조주의 전능과 위대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분의 능력은 경이로움과 감탄의 대상이지 헤아림(이해)의 대상이 아닙니다.

 

(2) 홀로 지혜로우신 분(13-14)

 

‘여호와의 영’은 창조와 역사 가운데 활동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아마도 13절은 창조와 관련해 그분의 지혜를 말하고, 14절은 역사 경륜과 관련한 지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창조와 역사의 주이신 여호와 앞에 민족들은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과 같고, 저울 위의 티끌에 불과할 뿐입니다. 한 방울의 물과 티끌과 먼지에 불과한 민족들의 세력은 바닷물을 되시고 산과 언덕을 저울로 다신 창조주의 능력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3) 창조주와 민족들 사이의 무한 간격(15-17)

 

산림지대로 유명한 레바논 숲의 나무와 그 가운데 사는 짐승들은 그분의 땔감과 번제물로도 모자랍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바쳐도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에는 부족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위엄을 과시하는 민족들(바벨론)도 그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세계사의 중심에 속한다고 자랑하지만, 그분께는 “없는 것”(메에페스), 곧 ‘중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에 속한 것’에 불과합니다.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하지만, 그분께는 “빈 것”, 곧 ‘실체가 없는 헛것’일 뿐입니다.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려는 여호와의 계획은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현실에 절망하지 말고 무한능력의 창조주를 바라보며 그분의 구원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비교를 거부하시는 하나님(18-26)

자연이 우리를 압도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화에서 자연은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연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 자신은 아닙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지으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경배와 찬양과 신뢰와 의존은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만을 향해야 합니다.

 

18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19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21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22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같이 치셨고 23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24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25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26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18-26)

 

권력자들이 힘과 자원을 자랑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티끌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장인이 만든 우상이란 한낱 먼지만도 못합니다. 따라서 세상 나라와 우상을 의지하여 삶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1)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느냐(18-20)

 

고대적 사고에 따르면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은 바벨론 신에 의한 이스라엘 신의 패배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유배민 가운데는 여호와의 능력을 의심하고 바벨론 우상의 유혹에 흔들린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바벨론 제국의 위용 앞에서 흔들리는 유배민을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세웁니다(18-19). 하나님을 누구와 비교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너희가 바벨론에서 본 우상들과 비교하려했습니까? 우상은 장인의 작품에 불과합니다. 바벨론 신들은 장인들의 손에 의존해사는 헛것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장인을 고용해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우상을 마련하고, 가난한 사람은 썩지 않는 나무를 골라 우상을 만듭니다(20). 누구나 우상을 만들어 자기 것으로 소유합니다. 사람을 보호해야 할 신이 사람에게 의존합니다. 바벨론의 신들은 장인들이 만든 작품에 불과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바벨론 제국의 영화는 곧 끝장날 것입니다.

 

(2) 창조주의 역사 지배 능력(21-24)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역사에 개입하시고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의지를 거듭 알려주셨습니다(21). 유배민은 자기 시대의 역사 안에 감춰진 하나님의 의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상이 비교될 수 없는 것처럼, 그분 앞 땅 위의 인간도 마찬가지로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그분께서 ‘땅의 둘레 위에’ 좌정하셨습니다(22). 땅 위에 사는 자들은 모두 메뚜기에 불과한 존재로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아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땅의 기초를 놓고 하늘을 펴서 사람들이 땅 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늘 천막 아래 땅 위에서 사는 자들이 모두 그분의 보호와 통치 아래 있기에 땅의 역사도 그분의 결정에 종속됩니다. 정복자들의 통치권이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기간은 짧게 정해져 있습니다(23-24).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동풍에 식물이 시들어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입김’에 제국의 통치자들은 바싹 말라 지푸라기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온 땅을 정복했던 앗수르의 권세가 덧없이 종말을 고한 것처럼 바벨론의 통치도 곧 끝장이 날 것입니다.

 

(3) 권세와 능력이 크신 분(25-26)

 

25-26절은 18-20절과 유사하게 여호와와 신들을 대비시켜 여호와의 유일성을 주장합니다. 땅의 우상들이 사람의 작품인 것처럼, 바벨론 사람들이 신으로 숭배하는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은 여호와의 작품입니다. 하늘의 별은 특히 바벨론의 점성술에서 중요했습니다. 이들은 신들로 숭배하는 별들의 위치와 진행이 인간과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예언자는 천체중배로 유명한 바벨론 한가운데서 별은 피조물로,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객체에 불과하다고 선포하면서 바벨론이 자랑하는 점성술의 거짓을 고발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 신뢰(27-31)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로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주십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창조주요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27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27-31)

 

곤비한 상황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불평이 나옵니다. 하지만 한시도 자기 백성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돌이켜 도우심을 청할 때 언제든 달려와 새 힘을 주십니다. 붙들어 일으켜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앙망합시다.

 

(1) 헤아릴 수 없는 창조주의 길(27-28)

 

이스라엘이 불평을 털어놓는 말을 들어보시길 바랍니다(2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지에 관심이 없으시답니다. 이스라엘의 삶(길)을 지켜보지도, 고난 당하는 이스라엘의 권리에 주목하지도 않으신답니다. 이방 땅에 사는 억울함과 어려움을 호소해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실 뿐이랍니다. 이렇듯 유배민은 하나님의 침묵 앞에 실망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불평에 예언자는 21a절의 수사적 질문을 다시 받아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성’ 으로 대답합니다(28). 창조주께서는 인간의 지혜와 이해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중단 없이 역사를 이끌어오셨습니다. 그분의 ‘명철’을 메뚜기 같은 사람이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통찰력은 사람의 경험과 이해를 초월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일에 대한 지적 이해가 아니라 그분에 대한 신뢰입니다. 유배민은 그분의 ‘생각과 길’에 관해 사변하기보다는 그분의 능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 새 힘을 주시는 여호와(29-31)

 

창조와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분입니다(29). 하나님께 의지해 그 능력과 힘을 받아 유배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30-31절은 ‘어떻게’ 좌절과 절망의 시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아이와 젊은이는 힘과 강건함을 자랑하지만, 이들도 언젠가는 지쳐서 비틀거리다가 넘어집니다. 자기 능력을 의존하는 자는 곧 한계를 깨닫고 좌절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는 힘을 새롭게 하면서 지치지 않고 나아갑니다.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갑니다. ‘여호와를 앙망함’은 힘을 주시는 그분께 온전히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창조주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기에”, 그분을 의지하는 자는 피곤함과 곤비함을 모르고 명철하게 유배기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31b절은 30절과 28ab절을 다시 받아 단락을 마감합니다. 지치고 피곤함을 느끼는 자들에게 여호와를 바라보며 극복할 것을 호소합니다. 젊은이도 뛰다 보면 지치지만 힘의 근원 되시는 여호와께 의지하는 자는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습니다. “달음 박질하여도” 다음에 잘 어울리지 않게 나온 “걸어가도”는 아마도 27절의 “내 길”과 관련하여 사용된 것 같습니다. 유배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길을 보지 않으신다고 불평하고, 하나님께서는 유배민이 피곤하지 않게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길을 보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그 길을 피곤하지 않게 걸어갈 수 있게 하는 그 힘을 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참된 형통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헛된 우상들을 만들어 복을 구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우리를 참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더욱 멀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시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참된 소망이시며 복된 삶의 원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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