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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2-01)


공의와 정의로 통치할 의로운 왕

이사야 32장 1-20절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표현하는 말 가운데 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편지라는 의미는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런 편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향기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아름다운 예수님의 향기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로 그리스도의 향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나눈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여호와의 계획은 앗수르의 위협에서 예루살렘을 구해주는 것 이상입니다. 구원 시대가 계속될 수 있도록 의로운 통치자들도 예비해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왕과 방백들을 세워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게 하실 것입니다. 광야와 아름다운 밭에 정의와 공의가 자리를 잡고, 평화와 평안과 안전을 노리며 살게 됩니다.

 

의로운 왕(1-8)

 

참된 왕은 백성을 사랑합니다. 진리와 공의로 가르치길 원합니다. 공의가 법적으로 형평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정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세워지는 올바름입니다. 공의가 원리 혹은 방향이라면, 정의는 인간사의 사소한 삶의 맥락과 같은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는 모든 면에 있어서 공평하고 바르다는 것입니다.

 

1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2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3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 4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5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겠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 6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8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1-8)

 

하나님께서 세우신 의로운 왕은 사람들의 피난처가 됩니다. 그가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을 향해 가난한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통치를 기뻐할 것입니다.

 

(1) 정의와 공의의 통치(1-5)

 

여호와께서 예비하신 심판 이후의 구원 시대에는 왕이 공의로 통치하고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립니다(1). 방백은 왕의 고위 관료로, 왕과 그의 신하들이 정의와 공의에 따라 백성을 인도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후손들에게 기대하셨던 의로운 통치가 이뤄집니다. 왕과 방백들이 모두 광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났을 때 사람들의 목숨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피신처가, 메마른 땅에서도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시냇물이, 작열하는 태양을 피할 수 없는 사막에서도 편히 쉴 수 있게 해주는 시원한 큰 바위 그늘이 됩니다(2). 백성을 피곤하게 만들고 위험한 곳으로 이끌던 이전의 무능력한 지도자들과 달리, 의로운 통치자들은 신실한 목자로 양 떼를 안전하게 보살핍니다. 공의와 정의에 따라 통치하기에 어떤 악한 세력도 백성의 안전과 평안을 위협하지 못합니다.

구원 시대에는 심판을 초래한 한계와 불순종이 극복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던 자들이 보게 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던 자들이 듣게 됩니다(3; 6:10; 29:9-10,18). 하나님께서 들러붙은 눈을 떼어주시고 막힌 귀를 뚫어주셔서 그분의 역사를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왕과 방백들은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고, 백성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여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때는 ‘조급한 자의 마음’이 깨달음을 얻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고 분명하게 말합니다(4). 조급한 자들은 생각 없이 처신하는 자들이며, 그 마음은 통찰력을 얻을 수 없고, 깨달음이 없기에 저들의 결정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눌한 자(더듬거리는 자)는 말에 솔직함과 명료함과 진실함이 결여된 자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조급한 자의 마음이 깨닫는 ‘지식’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필요한 지식도 포함됩니다. 구원시대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3:4-5) 다시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고귀한 이로, 우둔한 자가 존귀한 이로 불리는 경우가 없을 것입니다(5).

 

(2) 어리석은 자와 존귀한 자(6-8)

 

어리석은 자와 존귀한 자를 대조시키는 6-8절은 현재의 문맥에서 5절의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윤리, 종교적으로도 타락한 자를 가리킵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고, 마음으로 죄악을 지어내고 불경한 짓을 저지르고 여호와를 거슬러 패역한 말을 하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지 않습니다.

권력과 힘을 남용해 제 욕심만 채우고, 공동체의 어려움에는 눈을 감음으로써 여호와께 반역을 일삼는 자입니다.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는 공동체를 여호와에게서 벗어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굶주린 이와 목마른 이를 돕지 않고 내치는 자는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곧 사회와 개인의 안녕과 번영을 방해하는 자에 속합니다(58:1-12; 잠 25:21; 마 25:31-46). ‘악한 자’는 그 무기(‘그릇’)가 악하여 악한 일만 계획하고, 또 힘이 있기에 이를 실천에 옮겨 사회적 약자를 착취합니다(7). 가난한 자가 바른말을 해도 거짓말로 이들을 파멸시킵니다. 법정에서 술책과 거짓으로 힘없는 자의 권리를 짓밟습니다. 어리석은 자처럼 악한 자도 공동체의 삶에는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욕심 채우기에만 열심입니다.

‘가련한 자’와 ‘가난한 자’는 사회적으로 힘이 없고 경제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빈곤한 자를 가리킵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고 존귀한 일을 위해 일어섭니다(8). 그는 어리석은 자와 악한 자의 폭력에 노출된 빈곤한 자를 돕고 공동체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헌신합니다. 그는 존경받는 사회적 신분에 속한 자로 자신의 사회 윤리적 책임을 다합니다.

 

한 성읍의 멸망(9-14)

안일한 일상은 하나님을 망각하게 합니다. 그들은 작년처럼 올해도 많은 열매를 수확했기에 내년에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 믿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연속은 일상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축소시킵니다. 계속된 성공 역시 자신의 악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9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0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 일 년 남짓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리니 포도 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일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라 11너희 안일한 여자들아 떨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자들아 당황할지어다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 12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13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14대저 궁전이 폐한 바 되며 인구 많던 성읍이 적막하며 오벨과 망대가 영원히 굴혈이 되며 들나귀가 즐기는 곳과 양 떼의 초장이 되려니와(9-14)

 

날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시는 날에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일상의 은혜와 계속된 성공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거룩하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1) ‘들을지어다’(9)

 

예언자의 시선이 미래에서 다시 현재로 돌아옵니다. 그는 안일하고 염려 없이 사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애곡하라고 명합니다. 애곡은 죽을 자를 위하여 부르는 노래로, 예루살렘의 멸망이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확정됐음을 시사해줍니다. 이제 남은 일은 죽음을 위해 애도하는 것뿐입니다. 주로 여자들이 애가를 불렀기에(렘 9:16-19) 예루살렘 주민 전체를 대표하여 ‘여인들’이 청자로 등장한 것 같습니다.

 

(2) 재앙의 선포(10)

 

태평스럽게 사는 자들은 파국적 재앙이 바로 문 앞에 다가왔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일 년 남짓 지나면’ 이들은 현실화한 재앙 앞에서 당황할 것입니다. 포도와 곡식을 수확할 때가 돌아와도 포도원과 밭에는 거둬들일 포도와 곡식이 없습니다. 흉작이 한 해에 그치지 않고 계속되기에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3) 애곡(11-14)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가 제의적 행위를 반영하는 표현인지는 불분명합니다.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는 베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평상시에 입던 옷을 벗으라는 말로 보입니다.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행위도 죽은 자를 위한 애도 의식에 속합니다. 가장 비옥한 곳에 땀 흘려 만든 포도원의 파괴는 농부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경작지에는 가시와 찔레가 자라고, 흥겨운 성읍에서는 흥겨움이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는 집에서는 기쁨이 사라집니다. 생존의 토대가 모두 파괴됩니다. 궁궐도 버려지고 성읍에는 인적이 끊깁니다. 예루살렘이 영원한 황무지가 되어 들나귀와 가축의 차지가 됩니다. 여호와께 반역한 예루살렘이 그분께서 보낸 전쟁의 참화로 황무지가 됩니다. 오벨은 예루살렘 성전의 남쪽과 다윗 성 사이에 있는 언덕을 가리킵니다.

 

구원 약속(15-20)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를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계명에 순종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엄밀하게 살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하나님 백성의 땅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가시와 찔레가 납니다. 불순종한 나라의 궁전은 폐허가 되고, 많은 인구가 거하던 성읍도 적막해질 것입니다.

 

15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16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17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18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19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20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15-20)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광야로 전략한 유다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날 ‘아름다운 밭’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1) 위에서부터 주어지는 영(15)

 

경작지와 집과 성읍이 파괴되지만 영원히 폐허로 남지는 않습니다. 심판하신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의 처참한 운명에 다시 개입하실 것입니다. ‘위에서부터 부어 주시는 영’에 의해 광야가 아름다운 밤이 되고, 아름다운 밭이 숲으로 여겨집니다(15). 기름진 과수원에서나 볼 수 있는 과실수들이 광야에서 자라고, 과수원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울창한 숲이 됩니다. 사람의 능력과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여호와께서 영을 부어 주셔서 심판의 폐허를 말끔히 극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2) 정의와 공의의 회복(16)

 

그분의 영은 황폐해진 땅을 비옥한 땅으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정의와 공의가 지배하는 의로운 사회로 만듭니다(16). 통치자들에 의해 유린당했던 정의와 공의가 광야와 과수원에 항구적으로 자리 잡습니다.

 

(3) 정의와 공의의 열매(17-18)

 

정의와 공의가 확립되었기에 사회는 평화와 평안과 안정을 즐기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외부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 안전한 곳에서 평화롭게 살게 됩니다. 참된 평화와 안전은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이 생각하듯이 군사력이나 동맹정치가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가능하게 해준 자연의 풍요와 사회정의가 그 열매로 맺는 것이 평화와 안전입니다. 찔레와 가시로 뒤덮인 땅이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이 됩니다(18). 하나님 백성이 광야심판)의 긴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쉬는 곳’(머누하)에 들어가 참된 안식을 찾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세력에게는 심판이 됩니다.

 

(4) 성읍의 파괴(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숲에 우박을 내려 쓰러뜨리시고 성읍을 파괴하십니다(19).

 

(5)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20)

 

하나님 백성이 다시는 외부의 적들로부터 위협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구원 약속이 축복의 말로 끝을 맺습니다.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놓아 기르는 너희에게 복이 있으리라’(20). 정의와 공의가 충만한 자연과 사회의 복이 넘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위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에게는 심판이, 의인들에게는 회복과 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쉼과 열매를 가져다준 숲이 우박에 상하고 죄인들의 성읍은 파괴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자들은 결국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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