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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7-01)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47장 1-15절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바벨론은 오만해져 그들의 번영이 자신의 힘과 지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고통 위에서 사치와 부를 누리면서 자신의 나라가 영원할 것처럼 자고합니다. 하지만 그 영광이란 한낮의 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에 빠진 바벨론을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 민족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던 바벨론의 운명이 만군의 여호와에 의해 멸망으로 결정 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던 것처럼 바벨론도 멸망당하고 주민들이 사로 잡혀간다. ‘여러왕국의 여주인’이 보좌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앉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당신 백성을 위하여 바벨론에 보복하십니다.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1-4)

작은 나라에 사는 한 사람이 강대국의 멸망을 예언한다면 다들 코웃음을 칠 것입니다. 이처럼 아사야의 예언은 당시에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었지만, 그는 당당하게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국가나 도시의 이름은 여성명사로 취급되기 때문에 이사야는 바벨론을 여성에 비유하는데, 흥미롭게도 그 여성의 연령대를 조금씩 높이며 그 예언을 진행합니다.

 

1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임이라 2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 너울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3네 속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4우리의 구원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1-4)

 

바벨론은 무너졌습니다. 바벨론은 처녀 딸같이 곱고 아리따운 존재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흠모하고 존경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수욕과 치욕을 당할 것입니다. 보좌가 아닌 티끌과 땅에 앉게 될 것입니다.

 

(1) 땅바닥에 앉는 바벨론(1)

 

민족들을 짓밟으며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처녀 딸 바벨론”에 멸망과 사로잡힘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화려함을 자랑하던 여왕 바벨론은 보좌에서 내려와 티끌에 앉아야 합니다(1). ‘티끌에 앉다’는 자주 탄식과 관련돼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낮아짐을 상징합니다. ‘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던’(14:17) 바벨론이 그 위엄과 영화를 빼앗기고 땅바닥으로 떨어집니다. 곱고 아리따운 바벨론의 현재 모습이 곧 닥칠 비참한 모습과 대조됩니다.

 

(2) 수치를 당하는 바벨론(2-3a)

 

화려함과 사치를 즐기던 여왕 바벨론이 비천한 여종의 신세로 전락합니다(2). 부유한 집안에서 곡식 가루를 내기 위해 맷돌을 돌리는 일은 여종의 일에 속했습니다. “너울을 벗으며”도 바벨론의 쇠락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너울은 귀족 집안의 여자들이 얼굴을 가리는 데 쓰는 천입니다. 여종이 된 바벨론에게 너울은 맷돌질을 하는 데 방해만 되기에 벗어버립니다. ‘치마’는 바닥에 끌리는 긴 옷자락을 가리킵니다. 왕궁에서 사치와 품위를 자랑하며 입던 자락이 길게 끌리는 옷은 강을 건너는 데 짐만 될 뿐입니다. 사로잡히거나 도주하는 여왕 바벨론은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다리를 드러낸 채 강을 건넙니다. 속살(알몸)이 드러나고 치부까지 보이게 됩니다(3a).

 

(3) 여호와의 보복(3b)

 

바벨론의 멸망이 정치적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보복하시는 사건입니다(3b). 하나님의 보복은 원래 사법적 영역에 속한, 특히 ‘피의 복수’ 제도(참조. 창 4:15,24; 출 21:20)에서 나온 개념으로 훼손된 법질서의 회복을 목표로 합니다.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는 단호한 보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맞서는 자는 누구라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4) 우리의 구원자 만군의 여호와(4)

 

4절은 신뢰의 고백이 담긴 찬양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우리의 구원자’의 이름입니다. 구원자(고엘)는 씨족 구성원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권리를 찾아주는 가까운 친척을 가리킵니다. 그는 ‘피를 보복하는 자’로 살인자를 만나면 죽여야 합니다(민 35:19,21,24-27).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고엘 자격으로 바벨론에 보복하십니다.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는 ‘우리의 구속자’에 대한 찬양의 언어입니다.

 

내가 영영한 여주인이 되리라(5-7)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짓밟고 혹사시켜 취한 번영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부가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처우 위에서 누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까닭은 무자비함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고 노인들에게조차 무거운 멍에를 지웠습니다.

 

5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네가 다시는 여러 왕국의 여주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리라 6전에 내가 내 백성에게 노하여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7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도다(5-7)

 

바벨론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잠깐 쓰임 받은 종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만했고, 지나치게 포악하게 이스라엘을 대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이스라엘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또한 모든 열국의 여주인처럼 행세하며 포악함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 흑암으로 돌아가야 하는 바벨론(5)

 

앗수르처럼 바벨론도 교만에 사로잡혀 멸망의 길을 갑니다. 갈대아는 보좌에서 내려와 티끌에 잠잠히 앉아 있다가 흑암으로 들어가야 합니다(5). 흑암은 멸망과 심판을 상징합니다. “여러 왕국의 여주인”은 바벨론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을 지칭하는 ‘여주인’은 2절에 묘사된 여종과 대조됩니다. ‘왕국들의 여주인’이라 불리는 바벨론이 맷돌을 돌리는 여종이 됩니다.

 

(2) 여호와의 백성을 학대한 바벨론(6)

 

바벨론의 운명이 이스라엘의 심판에 연계됩니다(6). 여호와께서는 당신 백성의 배반에 분노하셔서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동정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억압했습니다. 존경과 배려의 대상인 노인에게도 멍에를 무겁게 짊어지웠습니다. 유배민에 대한 바벨론의 잔혹하고도 비인간적인 처우를 고발하십니다.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점령과 유배는 하나님의 결정이기에 책망의 대상이 아닙니다. 바벨론의 역할은 전체적으로 10:5-19에 나오는 앗수르의 역할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가 교만으로 심판에 떨어진 것처럼 바벨론도 같은 운명에 넘겨집니다.

 

(3) 장래 일을 생각하지 않은 바벨론(7)

 

영원한 통치권 주장이 교만의 구체적 내용으로 제시됩니다(7).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현재 문맥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영원한 지배권을 주장했다는 뜻입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자기 기업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이 일[들]”은 6절에 언급된 바벨론의 무자비한 통치 아래 억압당하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종말”은 ‘여호와의 백성을 학대한 결과로 초래될 일’을 가리킵니다.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8-11)

멸망받을 바벨론이 악은 교만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만이 가득합니다. 과부가 되지도 않으며, 자녀를 잃지도 않으리라고 큰소리칩니다. 불행과 아무 상관없이 살 수 없다고 믿습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고 믿습니다.

 

8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9한 날에 갑자기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을 빌릴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 10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8-11)

 

멸망 받을 바벨론의 악은 교만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만이 가득합니다. 과부가 되지도 않으며, 자녀를 잃지도 않으리라고 큰소리칩니다. 불행과 아무 상관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숨겨져 있어서 어떤 존재도 자신의 악을 보지 못하며 심판하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1)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는 바벨론(8-9)

 

풍족하고 안락한 삶이 바벨론을 교만하게 합니다(8). 사치와 평안은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업적에 쉽게 도취돼 자기 능력을 절대화합니다.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는 교만의 정체와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 주장과 문자적으로 거의 동일합니다(43:11; 44:6; 45:5,6,14; 46:9 등). 바벨론이 신적 지위를 주장한 것입니다(참조. 14:13-14).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은 주민의 상실을 의미하고 ‘과부가 됨’은 ‘버려짐’, ‘수치’, ‘보호를 박탈당한 절망적 삶’을 상징합니다. 과부로 나앉지도 않고 자녀들을 잃는 일도 없으리라는 바벨론의 주장은 자녀를 잃고 과부처럼 절망하는 예루살렘의 운명(49:14-21)과 대조됩니다. 그러나 자신은 겪지 않으리라고 확신한 두 가지 일이 “한 날에 갑자기” 바벨론에 들이닥칠 것입니다(9).

 

(2) 모든 지혜에 걸려 넘어지는 바벨론(10-11)

 

정한 때가 되면 바벨론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은 바벨론의 운명을 예루살렘의 운명(51:19)과 연결해줍니다. 주술과 주문은 특히 재앙이나 불행을 막는 데 쓰는 제의적 기술이며, 바벨론의 주술과 주문은 고대 근동에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재앙을 선포하시는 분이 여호와이시기에 바벨론의 수많은 주술과 주문이 쓸모없게 됩니다. 하지만 교만에 취한 바벨론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가졌다고 자기 미래를 자신합니다(10). 바벨론이 의지하는 ‘악’은 앞 절에 나오는 주술과 주문을 가리킵니다. 악의 열매가 재앙이기에 악에 의존하는 자에게 재앙은 운명이 됩니다. “나를 보는 자가 없다”는 은밀한 공간에서 행하는 해로운 마술이나 주술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바벨론은 제의적-주술적 기술을 통해 신의 영역을 넘나들었습니다. 바벨론이 대담하게 말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 지혜와 지식을 확신했습니다. 지혜와 지식은 주술과 주문에 관한 제의적 지식과 기술을 가리킵니다(44:25). 바벨론은 이 지혜와 지식으로 재앙을 예측하고 막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이 의지하는 주술과 주문은 ‘악’(라아)이기에 ‘재앙’(라아)이 들이닥칩니다(11). 여호와가 내리는 재앙이기에 바벨론의 요술로는 피하지 못하고, 바벨론은 순식간에 멸망에 떨어질 것입니다.

 

주문과 많은 주술을 가지고 맞서 보라(12-15)

바벨론에게 하신 경고는 결국 우리에게 보내시는 하나님의 엘로카드입니다. 우리는 형통할 때 그 번영에 취해 하나님의 사인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장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벨론은 우리의 반면교사입니다. 섰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주의해야 될 때임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12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주문과 많은 주술을 가지고 맞서보라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놀라게 할 수 있을는지, 13네가 많은 계략으로 말미암아 피곤하게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초하룻날에 예고하는 자들에게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하게 하여 보라 14보라 그들은 초개 같아서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 이 불은 덥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 15네가 같이 힘쓰던 자들이 네게 이같이 되리니 어려서부터 너와 함께 장사하던 자들이 각기 제 길로 흩어지고 너를 구원할 자가 없으리라(12-15)

 

바벨론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자 바벨론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립니다. 바벨론이 자랑하하던 주문과 많은 주술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앞에 주술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어둠의 세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1) 바벨론 학문의 무능력(12-13)

 

바벨론이 자랑하는 제의적 수단의 무능력을 조롱합니다(12). 젊어서부터 애써 익혀온 주문과 주술로 어쩌면 재앙을 위협하여 쫓아낼 수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주술사들과 마법사들이 바벨론을 재앙에서 구할 수 있는 다양한 방책을 제시하지만 도움은커녕 피곤하게만 할 뿐입니다. 이들의 많은 조언이 바벨론을 절망에 빠뜨리기에 이번에는 점성술의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구해보라고 제안합니다(13). 하지만 점성술도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2) 지푸라기처럼 불에 살라지는 자들(14)

 

점성술사들은 불에 타버리는 지푸라기와 같이 멸망할 것입니다(14). 이들을 태우는 불은 그 앞에 앉아 열기를 쬐거나 몸을 덥힐 숯불이 아닙니다(44:14-15). 점성술사들(천체숭배자들)과 우상을 만드는 자들(우상숭배자들)이 동일한 운명에 떨어질 것을 시사합니다.

 

(3) 구해줄 자 하나도 없는 바벨론(15)

 

바벨론을 돕겠다고 나섰던 자들이 제 목숨도 구하지 못합니다(15). 바벨론이 자랑하는 종교뿐 아니라 바벨론에 쌓인 엄청난 부도 재앙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바벨론에 경제적 부를 가져다주었던 대상들이 살길을 찾아 제각기 흩어져 도망할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없이 번영을 추구합니다. 타인의 아픔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와 부를 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의 영혼을 그 밤에 도로 찾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 없이 이룩한 번영은 독이 되어 치명적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경외심이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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