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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8-02)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하나님의 섭리

이사야 48장 12-22절


 

포로된 바벨론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니 어느덧 꿈을 잃고 있습니다. 구원하시겠다는 말씀도 들리지 않고,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집니다. 세상에 동화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끌려올 때보다 더 큰 위기의 순간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분께서 말씀하셨기에 그분의 구원 계획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그분께서는 능력의 말씀으로 역사를 결정하시는 ‘처음’이시고, 선포된 당신 의지를 관철시키시는 ‘마지막’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말씀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여호와에게서 나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새 일을 실행하시는 여호와(12-16)

사람들은 이전에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새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여길 수 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하나님의 섭리를 잘 살펴보면 그 원리는 하나로 모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에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이전에 없었던 일을 행하시더라도 그 원리는 동일하게 유지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12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13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14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들을 알게하였느냐 15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 16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것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에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12-16)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부르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라고 부르시며 당신이 창조주이심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를 세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바벨론이 행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1)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분(12-13)

 

여호와께서 독립인칭대명사 ‘나’를 세 번 사용하시면서 야곱 이스라엘에게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십니다(12). “나는 그니”는 공존을 거절하시는 여호와의 유일성과 절대 능력을 보여줍니다. 민족들의 신들이 아니라 처음이요 마지막이십니다(41:4; 44:6). 홀로 창조하신 그분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홀로 통치하십니다. 한순간도 피조 세계의 통치권을 넘겨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로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분의 구원 사역을 신뢰하고 전해야 합니다. ‘부름 받음’은 이스라엘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택하신 분의 의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징계를 받고 유배에 처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그분과 관계있는 백성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기에(13; 42:5; 45:12) 그것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십니다.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정하셨기에 땅은 흔들리거나 혼돈 상태에 빠지지 않으며, 하늘을 보호막처럼 펼치셨기에 피조물이 안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질서를 정하셨기에 이를 흔들어 파괴하려는 세력은 보복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그분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창조와 관련하여 그분의 오른손이 사용된 경우는 여기가 유일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그분의 손은 역사 안에서 거듭 구원과 심판을 집행하는 능력의 손으로 등장합니다. 13절의 “그들”과 “그것들”은 하늘의 별들보다는 바로 앞에 나온 하늘과 땅을 가리킵니다. ‘부르다’와 ‘서다’(아마드)는 각각 ‘불러 생기게 한다’와 ‘출현한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명령하시자 하늘과 땅이 출현하였습니다(창 1:6-10).

 

(2) 고레스를 부르신 분(14-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너희는 다’)에게 모여 들어보라고 요청하십니다(14).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바사 왕 고레스를 가리킵니다(45:1). 여호와를 알지 못하지만(45:4-5), 그분의 구원 사역을 집행한다는 의미에서 고레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나의 기뻐하는 뜻”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그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고레스를 통해 당신께서 기뻐하는 뜻을 이루시고(46:10), 고레스는 그분의 목자로 그분의 모든 기쁨을 성취합니다(44:28). “그의 팔”은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와 동격입니다. 고레스는 여호와의 능력의 팔로 그분의 뜻을 실행합니다. 어느 우상도 고레스의 승리나 그에 의한 바벨론 제국의 멸망을 선포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만 고레스를 역사 무대로 불러 나오게 하셨고, 그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15). 민족들을 놀라게 한 고레스의 형통은 여호와께서 주신 것입니다.

 

(3) 비밀히 말하지 않으시는 분(16)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당신께로 가까이 오도록 부르십니다(16). “이것”은 14-15절에 언급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로 나아와 그분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 합니다. 현재 문맥에서 “처음부터”는 ‘고레스가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부터’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결정을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의 선포만 살펴봐도 이스라엘은 역사의 결정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있을 때부터”는 예언의 성취와 관련된 말로 ‘이 일이 생길 때부터’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내가 거기에 있었노라’는 여호와께서 성취의 주체이심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여호와에 의한 것이며, 고레스는 그분의 도구일 뿐입니다.

 

(4) ‘나와 그의 영’(16)

 

여호와의 인칭이 16b절에서 갑자기 다른 누구의 1인칭으로 바뀝니다.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은 ‘나’는 아마도 여호와의 종을 가리키는 것 같고, “이제는”은 새로운 구원 시대의 시작을 시사합니다(43:1; 44:1; 49:5). 여호와께서 당신 영으로 무장시킨 종을 보내 “처음 일들”과는 구별되는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탄식하시는 여호와(17-19)

지금도 말씀의 생수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안에는 쉽게 밑줄이 그어지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복을 약속하는 말씀만이 아니라 경고도 있습니다.

 

17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18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19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17-19)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더 분명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우리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약이나 규제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완악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지 잘 모릅니다.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1) 유익하도록 가르치시는 분(17)

 

말씀 전달에 앞서 여호와가 다시금 이스라엘의 구속자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구속자”(고엘)는 집안의 일원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부당한 죽음을 당했을 때, 도와주거나 ‘피의 복수’를 해주는 가까운 친척을 가리킵니다. “거룩하신 이”도 이사야서 후반부에서는 거의 구원의 문맥에서만 등장합니다.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언약관계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언약관계에 따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끄시고 이스라엘은 그분께 순종하며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가르침을 주시고 생명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은 문자적으로 가나안으로 가는 귀향길을, 비유적으로는 그분께로 돌아가는 영적 갱신의 길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영적-내적으로도 여호와께서 가르쳐주신 길을 가야 합니다.

 

(2) 순종하지 않은 결과(18-19)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스라엘은 유익함을 가져다주는 그분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의 의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주의한다’는 ‘의지적으로 귀를 기울여 듣다’ 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신 것은 실천적 완전보다는 당신의 명령에 대한 진지한 응답이었습니다. “평강”(샬롬)은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이 구현된 상태를 가리키는 포괄적 개념이고, “공의”도 구원과 승리와 정의를 내포하는 다의적 개념입니다. “강”과 “바다 물결”은 생명의 풍요로움과 넘침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여 언약관계를 유지하였다면 이스라엘은 샬롬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모래처럼 많은 자손’(19)은 유배민의 처량한 모습을 족장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창 22:17; 32:12)과 대비시켜 줍니다. ‘이름의 끊어짐’은 자식의 없음이나 후손의 멸절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위대한 약속을 받았으면서도 참담한 존재로 전락한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불순종으로 멸망 당한 이스라엘에게 다시 미래가 없습니까?

 

유배민을 구원하시는 여호와(20-22)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소홀히 여길 거슨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이 시대는 말씀의 홍수의 시대입니다. 말씀이 많이, 그리고 자주 들리는 시대이기에 자칫 잘못하면 귀만 커지고,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는 기형적인 신앙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한다면 우리는 유다 백성보다 더욱 복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20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알게 하여 들려주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 21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 하셨느니라 22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하셨느니라(20-22)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구원과 과거의 구원을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구원을 땅 끝까지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바위를 쪼개 물이 솟아나게도 하셨습니다.

 

(1) 바벨론 탈출(20)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시기에 구원이 가능합니다.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이 제2의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급히 애굽을 떠난 것처럼(출 12:11; 신 16:3) 후손들도 도망치듯 바벨론을 떠나야 합니다(20). “피하고”의 ‘바라흐’는 원래 ‘도망합니다’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구속자 여호와께 의존하여 바벨론을 떠나야 하고, 출바벨론의 구원 경험을 땅 끝까지 선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환호하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고 땅 끝까지 알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바벨론에서 해방시킨 여호와의 능력을 온 세상에게 전하는 증인 역할이 맡겨집니다.

 

(2) 광야 길을 함께하시는 여호와(21)

 

첫 번째 출애굽과 두 번째 출애굽(출바벨론)이 하나로 연결되어 선포됩니다(21; 43:19). 처음처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막으로 인도하시지만 목마르지 않게 해주십니다. 그때처럼 바위를 쪼개서 물이 쏟아져 나오게 하십니다(참조, 출 17:1-7; 민 20:2-11; 시 78:15,16; 105:41; 114:8). 출애굽의 광야 기적이 출바벨론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출애굽 때 불모의 광야 길을 함께하셨던 여호와께서 바벨론 유배민이 돌아오는 험난한 길에도 함께하시며 이들의 귀향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3)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22)

 

문맥에 돌출적으로 보이는 22절은 17-19절을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악인’은 여전히 여호와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들, 곧 예언자와 종을 통해 선포된 “새 일”을 거절하고 자기 길을 가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유익하도록 가르치시고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는 여호와를 떠난 자들에게는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아끼십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새로운 삶은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자신을 맡길 때 시작됩니다. 세상이 주는 달콤함에 취해 떠나길 주저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평강과 공의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출 바벨론의 여정에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민하지 말고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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