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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6-01)


비교할 수 없으신 하나님

이사야 46장 1-13절


 

때때로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어진 고귀한 존재이면서 생명 없고 하찮은 미물에 머리 조아리는 모습을 보면,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인간은 그토록 우상적 대상에 집착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모습은 어떤 차별성을 가져야 합니까?

 

  • 앞에서 우상들을 포괄적으로 고발한(40:19-20; 41:7; 44:9-20) 예언자는 이제 시선을 바벨론의 우상들, 특히 미르둑과 느보에게로 돌려 이들의 무능력을 조롱합니다. 세상을 정복하고 민족들을 떨게 한 바벨론의 국가신 마르둑과 그의 아들 느보의 실체가 바벨론이 열망할 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숭배자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짐승이 끄는 수레에 실려 안전한 곳으로 도피합니다. 피곤한 짐승의 짐만 됩니다.

 

바벨론 신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1-4)

 

우상 숭배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잘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손으로 만든 물건을 자기 아래가 아니라 위에 두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합니다. 현대인들의 대표적인 우상은 돈, 졸업장, 직함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사람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들은 이것들에 지배를 받곤 합니다.

 

1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2그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들도 잡혀 갔느니라 3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4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1-4)

 

드디어 바벨론이 무너졌습니다. 이사야는 말씀을 통해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신인 벨과 느보는 버려질 것입니다. 글쓰기와 지혜의 신으로 알려진 느보는 바벨론의 지혜를 상징합니다.

 

(1) 무거운 짐이 된 신들(1)

 

예언자는 바벨론 신들의 무능력을 풍자적으로 고발합니다(1). 벨(마르둑)이 엎드러졌고 느보가 고꾸라졌습니다. 침략하는 적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신상을 수레에 싣고 안전한 곳으로 옮깁니다. 축제 때 메고 다니던 화려하고 거대한 신상들이 이제 피곤한 짐승에게 무거운 짐으로 지워집니다.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우상들입니다. 우상들은 숭배자들에 의지해서 움직이는 생명 없는 물건입니다.

 

(2) 잡혀가는 신들(2)

 

신상들뿐 아니라 옮기던 자들도 엎드러져 적에게 사로잡힙니다(2). 바벨론의 신들은 자기 형상도, 숭배자도, 신상을 옮기던 짐승도 지켜주지 못하는 헛것입니다.

 

(3) 이스라엘을 업으신 여호와(3-4)

 

짐만 되는 바벨론의 신들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업고 안아서 키우셨습니다(3).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는 유다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도 포함합니다. 여호와께서 1인칭 독립인칭대명사 ‘아니’를 다섯 번이나 사용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독점적-책임적 관심을 강하게 보여주십니다(4). 바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책임지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헌신과 열정은 늘 변함이 없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백발이 되기까지 업고 가십니다. 노년과 백발은 3절의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와 함께 이스라엘의 전(全) 역사와 실존을 가리킵니다. 바벨론 유배가 그분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의 중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헌신과 사랑은 한결 같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이 지은 이스라엘을 품에 안고 등에 업어 구해내실 것입니다.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5-7)

우상숭배는 고대사회에만 존재했던 현상이 아닙니다. 현대에도 사람들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우상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만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생명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5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6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7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5-7)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이방 민족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그의 가문은 애굽의 고난 속에서 한 민족으로 잉태되고, 마침내 한 나라가 되어 가나안에 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안았고, 업었습니다.

 

(1) 비교할 수 없는 여호와(5)

 

40:18,25의 경우처럼 5절은 수사적 질문을 통해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성을 주장합니다.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견줄 만한 자가 있습니까? 신들의 위대함이 숭배자들의 크기와 권력에 비례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근원과 존재에 있어 민족들의 신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시기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2) 우상의 실체(6-7)

 

6-7절은 우상을 만들어 봉헌하는 과정을 기술해가면서 그 실체를 풍자적으로 고발합니다. 우상을 필요로 하는 자들은 ‘신을 만들기 위해’ 금전적 지출을 아끼지 않습니다. 장인이 금속이나 나무로 형상을 만드는 작업은 생략되고 마무리 작업만 언급합니다. 도금장이가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마무리한 신상이 주문자에게 넘겨지면 사람들이 어깨에 올려 메고 자리에 갖다 놓고 흔들리지 않게 고정합니다. 생명이 없는 물건이기에 움직이지 못하고 사람들이 소리 질러도 듣지 못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생명이 있어 움직이는 사람이 생명이 없어 움직이지 못하는 우상에게 도와달라고 부르짖습니다(참조. 시 137:15-17).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우상을 어떻게 하늘과 땅을 당신 보좌와 발판으로 삼으시는 분(사 66:1)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숭배자들의 부르짖음을 듣지도 못하는 우상을 어떻게 당신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출 2:23-25; 삼상 7:9)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희화적으로 기술된 우상의 무능력은 이스라엘의 구원자 여호와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시는 분(8-13)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성경과 믿음의 선배들의 간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죄인이기에 깨어 있지 못하면 이 귀한 증거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의심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께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이후의 삶도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실해야 할 것입니다.

 

8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마음에 두라 9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10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11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12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내게 들으라 13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9-13)

 

 

바벨론은 무너졌습니다. 이제 공주에서 천한 종이 될 것입니다. 맷돌을 돌리고, 치마를 걷을 것입니다. 옷은 신분과 권력을 상징합니다. 이제 노동에 적합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더 이상 그녀를 보호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1) 옛적 일을 기억하라(8-9)

 

드는 사람의 호칭이 긍정적 함의를 갖는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3)에서 책망과 고발의 어조가 담긴 “너희 패역한 자들”(8)과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12)로 바뀝니다.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불순종을 전제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거듭 위로와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달하셨는데도 이스라엘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참조. 42:18-25;43:8,22-28). 유배민은 짐만 되는 바벨론의 신들에 현혹되지 말고 구원과 보호가 오직 여호와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 일”은 1-4절 또는 5-7절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유배민은 하나님께서 먼 옛날부터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셨던 ‘옛적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9). 그분의 이전 일들을 살펴본다면 그분께서 어떤 분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홀로 결정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으로 누구와도 권력과 영광을 나누지 않으십니다.

 

(2) 역사를 경영하시는 분(10-11)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종말”과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알려주셨습니다(10). ‘종말’은 결과로서의 ‘장래 일’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앞선 선포와 뒤에 나타날 결과의 일치를 보여줍니다. 아직 이뤄지지 않은 일이 임의적 사건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지금 그 모습을 드러내는, 또는 앞으로 드러낼 장래 일은 그분께서 처음부터 선포하신 말씀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분은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말씀하십니다. 옛적부터 역사를 경영해 오신 분께서 알려주셨기에 그분의 계획과 뜻은 모두 반드시 성취됩니다. 유배민의 해방을 위해 세우신 계획도 옛적부터 해오시던 방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먼 나라에서 당신 계획을 이룰 자를 부르십니다(11). 바벨론을 기준으로 고레스의 바사는 동쪽에 위치합니다(41:1). 하나님께서 먼 나라에서 한 민족을 불러오신다는 언급은 그분의 우주적 통치권의 표현으로 심판 선포에 자주 등장합니다(참조. 사 5:26; 렘 4:16; 5:15; 합 1:8). ‘사나운 날짐승’은 행동의 신속함과 갑작스러움을 상징합니다. 빠른 속도로 먹이를 덮치는 맹금처럼 고레스는 신속하게 내달리며 민족들을 공격하고 정복합니다. 메대-바사 왕 고레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계획을 실행하는 자, 곧 그분의 도구로 부름 받습니다. 바벨론을 불러 예루살렘과 유다를 멸망시키신 하나님께서 이제 메대-바사를 불러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십니다. 그분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시는 분입니다. 예견 능력만으로는 신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참된 하나님입니다. 유배민은 예언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계획이 눈앞에서 구체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까운 구원을 회의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며 당신께서 결정하신 구원의 때가 임박했음을 선포하십니다.

 

(3) 가까이 온 구원(12-13)

 

12절의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는 고레스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에 회의적이거나 거절한 자들입니다. ‘공의(처다카)는 구원 또는 승리를 의미합니다. 마음이 완악한 자들은 구원 약속을 신뢰하지 않음으로써 값없이 주신 구원에서 멀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뢰를 거절한 자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다시 가까이 온 구원을 바라보도록 초대하십니다. 옛적부터 당신 계획을 미리 알려주시고 그대로 이루신 분께서 그분의 공의와 구원(도움)이 가까이 왔음을 거듭 말씀하십니다(13).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생각하듯이 그분의 구원은 먼 미래에 속하지 않습니다(참조. 5:19; 겔 12:21-28). 그분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까이 가져오셨기에 지체하지 않고 이뤄질 것입니다. 현재 바벨론 제국의 북동쪽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격변 가운데 이미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구원이 가까이 왔음을 깨닫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공의를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불신앙 때문에 그분의 구원 약속이 지체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참조. 56:1). 이스라엘이 약속을 붙잡으면 구원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해 시온에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분께서 시온의 구원을 통해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영화를 통해 당신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제국의 현실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끝까지 하나님만 신뢰하며 버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상 신 앞에 거짓 경배하며 복종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대상을 붙들며 운명을 내맡길 수도 없습니다. 안고 입어 오늘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힘을 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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