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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5-03)


숨어계신 하나님을 아는 지혜

이사야 45장 18-25절


 

유배 상황을 살다 보면 세상의 신은 커 보이고 하나님은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행하시는 일이 이해되지 않아 감추어진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증언합니다. 세상 앞에서 초라해질 때,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

 

 

  •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여호와께서는 땅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드셨습니다. 창조주께서 세우신 질서의 범위에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도 포함됩니다. 창조질서의 유지가 여호와의 의지이기에 땅을 혼돈에 빠뜨리는 세력은 그분의 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땅을 황무지로 만든 바벨론을 멸망시키시고, 땅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개입하십니다.

 

유일하신 여호와(18-19)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유다 백성들은 이미 형식적인 종교에 빠져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안만큼 섬기고 예배하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19나는 감추어진 곳과 캄캄한 땅에서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혼돈 중에서 찾으라고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한 것을 알리느니라(18-19)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창조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이 범죄 때문에 무가치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의 하나님, 그 한 분만이 참 신이시고 역사를 뜻대로 이끌어 가실 수 있는 분이라고 선지자는 소개합니다. 말씀 선포에 앞서 여호와를 하늘과 땅의 창조주로, 특히 땅의 창조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합니다. 창조에 관한 단순한 신학적 진술이 아닙니다. 논쟁을 배경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1) 창조 질서를 정하신 분(18)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창조하신 분’, 곧 우주적 질서를 세우시고 빛과 어둠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7).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별은 그분께서 만드신 것들에 불과합니다. 점성술사들은 천체의 운행을 관찰해 신들의 의지를 읽어내지만(47:13), 하늘과 별은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낼 뿐입니다(시 19:1). 땅의 운명은 하늘을 지으신 분께서 결정하십니다. 하늘과 별을 창조하신 분께서 땅을 견고하게 빚어 만드셨기에 땅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땅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빚으셨습니다. 땅의 견고함과 질서의 유지가 창조주의 의지에 속하기에 사람들이 땅 위에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새로운 정복자 고레스의 등장과 승리가 땅을 혼돈에 빠뜨려 결국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로 만들 뿐이라는 이스라엘과 민족들의 비판(9-13)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무서워 떠는(41:5) 바사 왕 고레스는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고 땅의 질서를 보장해주시는 분께서 혼돈에 빠진 땅의 질서를 다시 바로잡기 위해 역사 무대에 등장시킨 인물입니다. 바벨론이 땅의 질서를 파괴하였기에 창조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께서 고레스를 불러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질서와 공의를 다시 세우십니다(8).

 

(2) ‘정직한 것’을 알리시는 분(19)

 

본 절은 하나님의 언어 행위(계시의 전달)의 고유성과 특징에 초점을 맞춥니다. 세 개의 동사(말하다, 이르다, 알리다)가 사용됐는데, 부정문의 완료(‘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이르지 아니하였노라’)로 시작해서 무시간적인 현재분사(말하고, 알리느니라)로 끝납니다. 처음 두 번의 완료는 말씀의 양태에 관한 언급이고, 나중 두 번의 현재분사는 말씀의 확실성에 관한 언급입니다. 그분은 “감추어진 곳과 캄캄한 땅에서” 말하지 않으셨고, 야곱 자손에게 “혼돈 중에서” 찾으라고 이르지도 않으셨습니다. ‘감추어진 곳’의 ‘바세테르’는 '은밀하게’, ‘숨어서’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비밀히(바세테르) 말하지’ 아니하셨습니다(48:16). 그분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으로(15) 그분의 활동은 신비스럽고도 놀랍지만, 언제나 당신 계획을 분명한 말씀으로 알려주셨습니다. 우상숭배는 은밀히 이뤄지지만 그분은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 의지를 공개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캄캄한 땅”은 음부보다는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역사의 가장자리에 속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역사의 중심부에서 활동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땅을 “혼돈하게” 창조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드셨기에, 그분은 야곱 자손에게 “혼돈 중에서” 당신을 찾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약속은 혼돈이 아니라 질서의 회복을 의미하고, 혼란과 멸망이 아니라 생명과 구원으로 이끕니다. 그분께서 처음 세우신 창조질서는 역사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유지됩니다. 그분은 “의”를 말씀하시고 “정직한 것”을 알리십니다. ‘의’(체데크)는 ‘공의’, ‘구원’, ‘승리’, ‘진리’의 폭넓은 영역에서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8절의 경우처럼 구원을 의미합니다. ‘정직한 것’(메샤림)은 창조주께서 약속하신 구원 사건의 확실성과 그 결과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온 약속은 옳은 것이기에 반드시 성취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20-21)

세계적인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대작 ‘역사의 연구’에서 바벨론에 의해 망한 유다의 신 여호와의 이름은 20세기의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만, 정작 그들을 정복한 바벨론의 신 마르독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는 사실을 주목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20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0-21)

 

하나님만이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 어떤 신도 구원을 베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공의’와 맞물려 있습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따른 생명의 법칙입니다.

 

(1) 여전히 무지한 자들(20)

 

여호와의 시선이 야곱 자손에서 민족들에게로 향합니다.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은 이스라엘의 유배민보다는 바벨론이 멸망할 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이방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십니다. 이들이 소송을 당하는 이유는 여전히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바벨론이 멸망할 때 우상들이 자신들을 구해주었다고 믿으며 ‘나무’에게 기도합니다. 바벨론의 멸망 가운데 드러난 여호와의 ‘의와 정직한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 “무지한 자들”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십니다. 땅의 역사와 민족들의 운명을 우상들이 결정했다는 증거를 찾아 함께 의논해보도록 권하십니다. 여호와를 제외하고 아무도 고레스의 등장과 승리를 ‘옛적부터’ 들려주고 ‘이전부터’ 알려준 신이 없었습니다. 민족들을 재판정에 불러 무지를 고발하지만, 심판을 위한 소송은 아닙니다.

 

(2) 역사를 경영하시는 분(21)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스라엘에 한정됐던 공의와 구원이 민족들에게로 확장됩니다. 여호와께서 홀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이 땅에서 살 수 있게 해주셨기에, 그분은 민족들에게도 의로우신 하나님과 구원자가 되십니다.

 

민족들의 하나님 여호와(22-25)

부끄러운 삶과 자랑스러운 삶의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아무리 이름을 크게 떨쳤어도,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없으면 부끄러운 삶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2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23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 24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25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22-25)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때 먼저 말씀을 보내십니다. 선지자의 입을 통해 선포된 말씀은 능력이 되어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존재이고 행동이며, 능력입니다.

 

(1) 돌이킴의 권면(22)

 

여호와께서 민족들에게 구원의 초대장을 보내십니다. 당신 종을 통해 민족들에게 정의를 베풀기로 하신(42:1-4) 여호와께서 이들에게도 돌아와서 구원을 받도록 권면하십니다(22). “땅의 모든 끝”은 그분께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창조한 땅(18)으로 세상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2) 공의로운 말의 성취(23)

 

23절의 “내가 나를 두고 명세하기를”은 민족들을 구하시려는 확고한 의지를 표현합니다.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는 땅 위에 공의와 창조질서를 회복시키시려는 계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보여줍니다(참조, 55:11), 민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여호와의 맹세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께 순종하게 만듭니다.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여호와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께 무릎을 꿇고 입으로 맹세해야 합니다.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이 우상이 헛것임을 깨닫고 여호와께로 돌아와 그분 외에 다른 이가 없음을 고백하고 경배합니다. ‘무릎을 꿇다’가 여호와를 구원자로 인정하는 행위라면, “혀의 맹세”는 그분의 공의와 구원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3) ‘공의와 힘’의 하나님(24)

 

일부가 여호와의 1인칭으로(내게 대한) 나오지만, 24절에서는 화자가 예언자로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반절의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는 신학적 진술이자 고백입니다. 복수의 ‘공의’(처다코트)는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구원 행위들을(참조. 삿 5:11; 삼상 12:7; 미 6:5; 시 103:6), ‘힘’(오즈)은 그 구원 행위를 실제화 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께서는 구원 약속의 성취를 당신의 의무로 삼으십니다. 후반절은 경고와 위협의 말입니다. 여호와의 초대에 모든 사람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초대를 거절하고 그분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 선언됩니다. 여호와의 공의와 힘을 신뢰하는 자들과 달리 그분의 통치를 거절하고 대적하는 자들은 그분께 와서 재판을 받고 수치를 당합니다(참조. 45:16;66:24).

 

(4) ‘의롭다 함’을 얻는 이스라엘(25)

 

25절은 ‘야곱 자손’에게 주어진 18-19절의 경우처럼 ‘이스라엘 자손’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우상숭배를 떠나지 않는 자들과 대조적으로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 안에서 의로움을 인정받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17). 현재 수치를 당하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만 있는 공의와 힘’으로 수치에서 벗어나 영화를 얻습니다.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에 나타난 여호와의 공의와 권능을 보고 그분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 됨은 크고 위대한 성취에 있지 않습니다. 힘과 화려함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창조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고 묵묵히 의로운 길을 걷는 데 있습니다. 눈을 떠서 의롭고 정직하여 권능으로 권을 베푸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너머의 크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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