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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4-01)

 


홀로 유리하신 하나님

이사야 44장 1-20절


 

세속적 학자들을 중심으로 신을 인간 욕망의 투영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짓 신과는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신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독특성은 무엇입니까?

 

  • 유다의 멸망과 유배는 이스라엘의 반역에 따른 여호와의 심판이었습니다. 허물을 씻어주시는 분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기억하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으로, 이스라엘의 왕과 구원자로 이들의 절망적 처지에 개인하시기에 이스라엘은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축복(1-5)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선택에는 반드시 조건이 따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에는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 중에서 야곱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선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야곱 안에서는 선택의 주권적인 의지가 작용한 결과입니다.

 

1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3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5한 사람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또 한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그의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1-5)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참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의 근원이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들으라’고 하십니다.

 

(1) 두려워하지 말라(1-2)

 

심판과 저주의 시대가 끝나고 구원과 축복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들으라”는 구원 시대가 들음에서 시작됨을 시사해줍니다. 귀먹고 눈먼 이스라엘은 예언자가 선포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거절했습니다(참조. 42:18-25;43:8-13, 22-28). 이스라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명철(40:28)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놀라운 약속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귀를 기울이도록 권면한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말씀하고 계신 여호와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모태에서부터 지으시고 도와주시는 분입니다(2). 이스라엘을 ‘만드신 분’과 ‘지으신 분’은 동의어로 이스라엘의 실존이 여호와께 달려있음을 보여줍니다. “모태에서부터”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이기에 이스라엘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지으신 분과 지음을 받은 자의 관계가 중단됨이 없이 지속되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영과 복의 약속(3-4)

 

3-4절은 들어야 할 위로와 격려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41:17-20의 경우처럼 유배민의 귀환보다 광야의 기적적 변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호와께서 메마른 땅에 넘치는 물을 약속해주십니다. 물이 없어 식물이 자랄 수 없었던 곳이 변하여 생명의 땅이 됩니다. 비가 내려 촉촉이 적셔진 땅에서 씨가 싹을 트이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당신의 영과 복을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부어주어 무성히 자라나게 해주십니다. 현 세대가 아니라 이후 세대가 축복의 대상이 됩니다. 멸망 이후 이스라엘의 인구가 현격히 줄어들었기에 땅의 축복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후손의 번성 없이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영과 복을 부어주어 초라해진 백성을 다시 번성하게 해주십니다. 여호와의 영은 생명의 원리이며 피조물에게 주어진 ‘호흡’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42:5). 그분의 ‘복’은 물질적 영역을 넘어 윤리적 영적 차원에서도 활동하며 주님의 구원을 이뤄나가는 능력을 말합니다.

 

(3) 여호와를 고백하는 자들(5)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자들이 마침내 보고 듣게 된다. 여호와께로 돌아와 신앙을 고백합니다(5). 어떤 사람은 자신이 여호와께 속했다고 말하며 여호와의 소유임을 인정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자기 이름을 ‘야곱’으로,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부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처럼 명예로운 호칭으로 사용됩니다. 또 남들이 볼 수 있게 자기 손에다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이라고 쓰고 그분께 대한 헌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과 축복이 영적 각성을 불러일으켜 사람들이 온전하게 그분께로 돌아오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6-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구원자이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만 다스리는 왕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의 모든 나라와 민족의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6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7내가 영원한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나에게 설명할 자가 누구냐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그들에게 알릴지어다 8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6-8)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는 존재의 근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세우기도 하시고, 무너뜨리기도 하십니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처음이요 마지막’이십니다.

 

(1)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6)

 

여호와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과 구원자로 소개하십니다(6). 겉보기에는 바벨론 왕의 지배 아래 있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변함없이 여호와이십니다(41:21; 43:15).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께서 바벨론으로 끌려와 종살이하는 당신 백성을 구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당신 백성을 위해 스스로 짊어진 그분의 연대감과 책임감을 보여줍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에는 그분의 절대 능력과 주권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당신 백성을 구속하십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는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역사를 지배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참조. 요 8:28; 계 1:17; 2:8; 21:6; 22:13). 이러한 여호와의 주장은 물론 입증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그분께서는 시대사적 사건의 예견과 그 성취를 통해 역사를 지배해 오셨습니다. 그분만이 역사 가운데 신적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2) 나와 같은 자 누구냐(7)

 

민족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진짜 신이라면 여호와처럼 “장차 올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를 펼쳐 보이면 됩니다(7). 역사를 결정하고 지배하는 능력을 보여준다면 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무도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와만이 처음부터 역사를 예견하고 이뤄오셨습니다. 바벨론에 의한 멸망과 유배의 초라한 모습이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의 패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바벨론에 일시적으로 승리를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3)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8)

 

이스라엘은 이들의 번성과 폭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여호와에게서 반석을 찾고, 능력으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8).

 

제 손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9-20)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소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의지와 순종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는 그분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얻으시고, 인간은 만족을 누립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를 거질할 때 우상이 탄생합니다.

 

9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10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냐 11보라 그와 같은 무리들이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대장장이들은 사람일 뿐이라 그들이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12철공은 철로 연장을 만들고 숯불로 일하며 망치를 가지고 그것을 만들며 그의 힘센 팔로 그 일을 하나 배가 고프면 기운이 없고 물을 마시지 아니하면 피로하니라 13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곡선자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집에 두게 하며 14그는 자기를 위하여 백향목을 베며 디르사 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정하며 나무를 심고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 15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16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17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18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19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그것의 절반을 불사르고 또한 그 숯불 위에서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그 나무 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 20그는 재를 먹고 허탄한 마음에 미혹되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9-20)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우상처럼 모순적이며 무의미한 것이 없습니다. 우상 숭배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려는 헛된 몸짓이며,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탄의 검은 유혹입니다. 사람들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십니다.

 

(1) 수치를 당하는 우상숭배자들(9-11)

 

우상이 헛것인 것처럼 우상을 만드는 자들(우상숭배자들)도 모두 헛것으로 수치를 당할 뿐입니다(9-11).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값비싼 귀금속으로 치장한 우상들을 가리킵니다. 숭배자들의 눈에는 귀하고 값져 보이지만 아무 유익 없는 헛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의 증인들”은 우상숭배자들로서 우상이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처럼 우상숭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선포하신 일을 보고 알며 신실한 증인이 되지만(8), 우상숭배자는 우상이 알려준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사람인 장인들의 손에서 만들어집니다. 대장장이의 손에서 나온 것이니 신이 될 수 없습니다. 무익한 헛것을 만들어 신봉하는 자들은 수치에 떨어질 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지으시고 수치에서 구해주시는 여호와와 대조됩니다.

 

(2) 우상의 제작 과정(12-13)

 

우상은 금속이나 나무 또는 나무에 얇게 편 금속을 덧입혀 만드는데, 12절과 13절은 각각 금속과 나무로 우상을 만드는 과정을 사실적이고도 풍자적으로 기술합니다. 우상은 철공이 쇠를 뜨겁게 달구어놓고 하는 작업이기에,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허기를 이겨가며 만든 것이며 목공이 풍채 좋은 사람을 모델로 해서 만든 작품일 뿐입니다.

 

(3) 같은 나무에서 나온 땔감과 우상(14-17)

 

14-17절은 나무 우상의 재료에 주목해 우상을 조롱합니다. 목공이 “자기를 위하여” 베거나 숲에서 잘 자라도록 돌보거나 직접 심은 나무가 자라 우상이 됩니다. 어린 시절 목공의 돌봄을 받고 자란 것이 우상입니다. 나무를 재료로 했다는 점에서 우상이나 땔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나무로는 불을 피워 몸을 덥히거나 떡을 굽기도 하고 또 어떤 나무로는 우상을 만들어 엎드려 경배합니다. 여러 나무의 쓰임새에서 한 나무의 다양한 용도로 옮겨지면서 풍자가 더 신랄해집니다. 나무를 반으로 나누어 반 토막은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 먹고 나머지 반 토막은 우상을 만듭니다. 작업하다가 지치면 우상을 만드는 데 사용한 나무의 일부로 피운 불에 고기를 구워 배불리 먹고 몸을 덥히며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기운이 나면 나머지 나무로 우상을 만듭니다. 우상의 유익이 전혀 없지는 않다. 우상은 땔감으로는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어리석게도 땔감으로 쓰고 남은 “그 나머지”로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자기의 우상”은 우상이 만든 자의 소유임을 보여줍니다. 신을 만든 자가 자기가 만든 신에게 구원을 간구합니다.

 

(4) 우상숭배자들의 무지(18-20)

 

18-20절은 우상을 만든 자들의 무지를 고발합니다. 우상을 자기가 만든 것임을 알면서도 그 앞에 엎드리니 말입니다. 우상과 땔감이 그 본질에 있어서 같기에, 우상의 마지막이 땔감의 마지막과 다를 수 없습니다. 불에 타면 재만 남는 나무를 섬기는 자들은 결국은 재처럼 멸망할 뿐입니다. “오른손”은 연장을 사용하는 손이며, 우상은 장인이 “힘센 팔”(12)로 만든 물건에 불과합니다. “거짓 것”은 우상의 본질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9절의 “무익한 것”과 일치합니다. 우상에게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고(17) 기도하지만, 우상은 본질상 재가 될 수밖에 없기에 그 숭배자들은 재(멸망)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우상처럼 차조 사랑하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특정한 사람입니까? 특정한 사람입니까? 제도나 과학입니까? 어떤 것도 우리에게 참 자유와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사랑할수록 오히려 끌려다닙니다. 부와 힘의 우상 사회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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