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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04-02)


사랑이 이루는 담대함

요한일서 4 11-21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말에, 언제까지나 공기는 눈에 안 보이지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안 보이시지만 존재한다.’는 식상한 답변만 되풀이 될 것입니까! 성도는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볼 뿐 아니라, 그 세계를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하나님과 상호내주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11-15)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원수끼리 화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교회 안에 이루어질 때 세상은 그 안에 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목도합니다.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교회는 언제쯤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11-15)

예수님을 세상의 주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자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이며,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들의 주장은 세상의 핍박과 오해를 피할 수 있는 묘책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인간 예수처럼 죽음의 순종으로 아버지와 사람을 사랑한 사람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쳐서 윤리적 가현주의를 조장하는 하책입니다.

 사랑을 통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11-13)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은 요한복음 3:16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문맥에서는 아들을 속죄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같이 나타났은즉,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 않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11).

물론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암시되어 있지만, 본문의 초점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마땅하도다(11)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의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구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나타나지만, 또한 그 사람들을 통해 그들이 서로 사랑하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12).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형제 사랑을 통해 온전히 성취된다는 말입니다(2:5). 또한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형제 사랑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12).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요한복음 1:14,18). 이러한 사상은 요한일서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1:1; 2:1-2; 3:8, 16:42, 9-10,14). 그러나 또 다른 한 모습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현현이 그리스도의 공동체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고 합니다(4:12; 요한복음 17:21-23).

그러므로 형제 사랑은 하나님 임재의 표시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며, 우리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십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14-15)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셨습니다(14).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얻게 하려고 구주를 보내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 구원은 무지로부터의 해방이라보기보다,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17, 2:2; 4:2,10; 5:6). 구주 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면,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상호거주가 일어납니다(15).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진정 그 사람과 함께하십니다. 2:22에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했다면, 이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심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요한일서의 대표적인 대적자인 가현설주의자들(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반대로 예수님의 인성을 지나치게 신봉하여, 그의 신성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의 신성을 온전히 믿을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요한일서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하나님과 신자의 상호거주(reciprocal indwelling) 개념입니다.

요한일서는 상호거주 개념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과 함께하시는 아버지가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친밀한 언약적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에스겔 11:20, 37:23,27; 예레미야 31:33, 스가랴 8:8; 고린도후서 6:16; 히브리서 8:10).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한 사귐 가운데 있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는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3:24; 4:13,16), 요한일서는 상호거주 개념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과 함께하시는 아버지가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친밀한 언약적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에스겔 11:20, 37:23,27; 예레미야 31:33; 스가랴 8:8; 고린도후서 6:16; 히브리서 8:10).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한 사귐 가운데 있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는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는 삶(16-21)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다른 두 계명이 아니라 한 계명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눈에 안 보이는 존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16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16-21)

우리가 사랑해야할 이유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먼저 자격 없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받았기에 마땅히 우리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의 하나님이 내주해주시니 우리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담대한 삶(16-18)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신자의 삶은 또 다른 말로 사랑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16). 사랑 안에 거할 때,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사랑 안에 거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랑은 하나님의 자다들 안에서 완성됩니다(17). 하나님과 신자의 상호거주를 통해 사랑이 그 절정에 이르러, 그 충만한 완성의 상태가 계속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호거주를 통해, 또한 사랑의 완성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는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습니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가지시는 그 친밀한 관계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도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함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계심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기 때문입니다(18).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사랑, 그리고 자녀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다같이 포함합니다. 이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는 최후 심판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과 사랑 가운데 있는 자는 미래에 최후 심판이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헌재에 어떤 두려움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사랑하는 삶(19-21)

우리가 사랑함은(19)이라는 말은 하나님 자녀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 자녀들의 사랑을 가능케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사랑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경험한 그 경험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아들을 회복제물 로 보낸 데에서 철정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영생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녀들은 이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위의 형제자매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한 두 가지 사랑(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함께 나타납니다(20).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를 지닌 사람입니다. 이는 아마도 요한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암시하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거짓된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옆에 있는 형제자매를 돌보지 않는 자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 고백을 믿지 못하겠다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데서 찾겠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주의 계명입니다(21). 주의 계명은 헬라어 원문에는 그로부터의 계명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가리킵니다. 예수님도 또한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3:34; 15:12,17). 또한 신명기 6:45과 레위기 19:18을 연결하여, 사랑의 큰 계명을 주셨습니다(마가복음 12:30-31).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계명과 그리스도의 계명을 분리하는 것이 무의미할 뿐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따지자면 여기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가리키며, 그 사랑의 계명이 예수님에 의해 또한 반복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이 계명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21). 그러나 하나님 사랑과 형제자매 사랑은 두 개의 따로 존재하는 계명이 아니고 하나의 단일한 계명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 없는 형제 사랑은 있을 수 없고, 형제 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도 불가능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보고 다니는 곳이지 사람 보고 다니는 곳이 아니다.’라는 말이 서글프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한복음 14:9).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그분의 몸인 교회는 왜 말하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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