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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9-01)


호렙 산에 나타나신 여호와

열왕기상 19장 1-21절


성공한 사람도 슬럼프를 경험합니다. 영적 승리 후에도 슬럼프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영적 침체를 이겨 내는 최선의 방책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 낙심하지 말고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번 영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경험했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던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순종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가뭄이 끝난 후에도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이번에는 이세벨에게서 생명을 위협받습니다. 그는 두려움 속에 북이스라엘을 떠나 남유다를 거쳐 시재 반도의 호렵 산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허탈감과 외로움과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그에게 천사를 보내 보살피셨습니다. 또한 직접 나타나셔서, 그가 감당할 사명을 주시며 그를 회복시키셨습니다.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1-18)

우리가 낙심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책망하는 대신에 위로하며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신실하게 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허락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낙심하고 있을 때 더욱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낙심이 찾아올 때에라도 주저앉지 말고 하나님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위로와 회복의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며 다시금 일어설 힘을 얻게 됩니다.

1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9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1-18)

아합은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행한 일을 이세벨에게 알립니다. 이세벨은 복수를 다짐하며 엘리야를 죽이겠다는 전갈을 보냅니다. 엘리야는 자신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이세벨을 피해 브엘세바로 도망합니다. 홀로 광야로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 앉은 엘리야는 더 이상 살 힘이 없다고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1) 이세벨에게서 도망한 엘리야(1-7)

이세벨은 아합을 통해 갈멜 산 대결의 전말을 전해 듣고 엘리야를 죽이려 작정합니다. 열렬한 바알 숭배자인 그녀는 그동안 이스라엘에 퍼진 바알 숭배가 엘리야 때문에 큰 타격을 받았고, 자기가 후원하는 선지자들(18:19)이 그의 칼에 죽었음을 알고 격노했습니다. 그녀는 엘리야에게 경고장을 보내 다음 날까지 그의 생명을 없애지 않으면 신들의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바로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을 보면 이세벨도 갈멜 산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과 엘리야의 위력에 맞서는 일을 주저한 것으로 유추됩니다. 이세벨의 위협에 엘리야는 목숨을 건지려 멀리 떠납니다. 가뭄을 예고한 후에는 아합의 수색망을 피해 도망해야 했습니다. 단지 목숨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주신 사명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린 후에조차 그는 도망자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사명을 다 완수하여 안전할 것이라 생각한 그때가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여인(17:20)이나 오바댜(18:9-14)처럼 죽음 앞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살기등등한 이세벨의 위협은 그를 공포로 몰아넣었고, 수년간의 하나님의 임재와 기적을 기억 저편에 묻게 만들었습니다.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약 5:17). 그는 줄곧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후 행동했으나, 이번에는 먼저 움직입니다. 그의 도망은 이처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구책, 회피책이었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이스르엘을 떠나, 남쪽 약 150킬로미터 떨어진 유다 남단의 브엘세바까지 갔습니다. 동행하던 사환을 그곳에 남겨두고, 혼자 남서쪽 광야로 하룻길을 더 들어갔습니다. 광야에서 작은 그늘이 돼주는 로뎀 나무를 찾은 그는 그 아래에 앉아 죽기만을 바랐습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을 거둬달라고 간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생명을 위해(3) 그 먼 곳까지 와서는, 이제 충분하니 여기서 죽겠다고 하는 것(4)은 모순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죽은 조상들을 부러워할만큼 심신이 바닥난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탈진한 엘리야는 나무 아래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호와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자고 있는 엘리야를 쓰다듬어 깨우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권유합니다(5). 그의 머리맡에는 놀랍게도 구운 빵과 물 한병이 있었습니다. 그는 먹고 마시고, 다시 잠들었습니다. 그 후 천사가 또 와서 같은 말과 행동을 반복하며 갈 길이 아직 멀다고 귀띔했습니다(7). 엘리야는 일어나 먹고 마십니다. 천사를 보내 그를 보살피신 하나님은 까마귀와 사르밧 여인을 통해 그를 보살피셨던 그 하나님이십니다(17장).

(2)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8-18)

이제 하나님은 직접 말씀으로 엘리야에게 임하십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가져다 준 음식으로 기운을 차린 엘리야는 40일에 걸쳐, 장장 300킬로미터 이상의 길을 주야로 걸어 시내 반도의 호렙 산(시내 산)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그곳 동굴에서 유숙할 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침묵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말을 건네십니다(9). 이 물음은 엘리야를 책망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스라엘을 떠난 이래 그를 고통 속에 두시면서도 그가 충분히 혼자의 시간을 보내고 먹고 쉴 수 있게 보살피셨습니다. 엘리야는 본인이 여호와께 열성을 다했으나 목숨이 위태한 채로 혼자 남았다면서 허탈감과 외로움과 두려운 심정을 토로합니다. 그가 부른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10,14)는 ‘온 군대의 하나님’으로서 바알을 꺾고 승리한 전사임을 암시합니다. 엘리야의 “열심”은 하나님만을 향한 충성과 신의에서 나온 질투였습니다. 열정을 불태우며 사명을 완수했기에, 그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자신은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그의 제단들을 헐었으며,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혼자 남겨진 자신은(실상은 100명의 선지자가 살아있다! [18:4]) 목숨마저 위태롭습니다. 그의 한탄은 인간의 눈으로 가뭄 전과 진배없는 현실을 바라볼 때 생기는 본능적인 반응입니다.

말씀으로 임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직접 나타나 엘리야를 다시 사역의 길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굴에서 나가, 그 앞에 서라고 명하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지 않기 위해(출 33:20)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갔습니다(13). 그 후 여호와가 지나가시자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 산이 갈라지고 바위들이 부서졌습니다. 바람 후에는 지진과 불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바람, 지진, 불 가운데 여호와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불 이후에 고요하고 가는 소리(“세미한 소리”, 12)가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강림의 장면은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소명을 주신 일(출 3:2-4), 모세 앞에 나타나신 일(출 33:18-23) 등을 연상시켜 그가 엘리야에게도 소명을 주고 세밀하게 인도하실 것을 기대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했던 질문(9)을 반복하셨고(13), 엘리야 또한 대답을 반복합니다(14).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에게 새 사명을 맡겨 선지자 직분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그의 임무는 하나님이 지목한 세 명에게 기름을 부어 왕과 선지자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의 하사엘을 아람의 왕으로, 님시의 손자(“아들”)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선지자로 임명하셨습니다(16). 이들은 나라와 직분이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는 데 쓰임 받을 자들입니다. 하사엘과 예후는 북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매개(“칼”)가 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을 피하는 자들은 엘리사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진멸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 바알을 섬기지 않는 자 7천 명을 남기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초점은 남겨진 ‘수’가 아니라 남긴 ‘주체’가 ‘하나님’이심에 있습니다. 7천이란 수는 상징적인 수로 남겨진 무리를 총칭합니다. 그들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거나 입맞춤을 하지 않은 신실한 자들입니다(호 13:2). 큰 심판의 때에 신실한 자를 따로 남기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는 크신 긍휼과 주권이 드러납니다(습 3:12-13; 롬 11:5). 앞서 갈멜 산에서 백성들의 신앙 고백이 그들의 마음을 미리 돌이키신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이루어진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18:36,39). 하나님의 약속은 홀로 남겨진 것 같아 외롭고 괴로워하는 엘리야를 향한 위로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선지자로 부름 받은 엘리사(19-21)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도 우울증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열심에 근거한 믿음은 영적 우월감에 젖어둘 우려가 있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만족스러운 결과가 없으면 깊은 영적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열심에 도취 되는 신앙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19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20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21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19-21)

하나님의 명령(16)에 따라 엘리야는 엘리사를 선지자로 부릅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중 아벨므홀라에 들릅니다. 그곳 밭에서 열두 쌍의 쟁기질하는 소를 앞에 거느리면서, 열두 번째 겨릿 소로 밭을 갈고 있는 엘리사를 발견합니다(“만나니”, 19). 많은 소가 있는 만큼 밭이 넓고 여럿이 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밭을 가로질러 가서 엘리사에게 그의 털 겉옷을 던졌습니다(왕하 1:8). 이는 선지자 직을 엘리사에게 위임한다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의미를 알아차린 엘리사는 소를 버리고 그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는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엘리야를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엘리야의 대답인 ‘돌아가라 내가 네게 무엇을 했느냐?’(20)는 꾸짖음일 수 있으나, 핵심은 그가 선지자로 부름 받았음을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돌아가 소 두 마리를 잡아 멍에와 쟁기를 태워(제사를 드리고) 고기를 삶아 친족과 이웃(“백성”, 21)을 대접했습니다. 이는 작별과 축복을 나누는 장면이며, 사역에 대한 엘리사의 헌신과 결단을 나타냅니다. 이제 모세에게 있어 여호수아처럼(수 1:1), 엘리사는 엘리야의 수종을 들며 선지자의 길로 들어섭니다.


자신의 기대와 열심이 하나님보다 크게 보일 때 낙심하게 됩니다. 열심과 열심정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겸손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신실한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분도, 그 사명을 이루도록 도와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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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8-03)


갈멜산에서 응답 받은 선지자 엘리야

열왕기상 18장 30-46절


우리는 가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큰 소리로 ‘왜 다른 사람만 들어 주신다’라고 오해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사정이 급하고 답답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칠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은 하나님께서 부르짖으라 명령하셨으니깐 부르짖을 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기도 응답은 우리의 목소리에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루종일 울부짖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피해서 엘리야는 아주 간단히 조용하게 기도함으로 불의 응답을 받습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맞선 엘리야는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제단 주변에는 도랑을 팠으며, 제물 위에 물을 열두 통을 쏟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즉각 불을 내려 제물과 모든 것을 다 태우셨습니다. 이를 목격한 온 백성은 여호와가 신임을 고백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죽임 당합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이어지며 폭우가 내립니다. 기도의 응답과 함께 비를 내리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됩니다.
 

엘리야의 기도와 불로 응답하신 하나님(30-40)

우리의 약한 데서 주의 능력이 더 드러납니다. 우리는 약함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더 오래도록 더 신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는 여백과 공간을 주께서 스스로 만드시고, 우리도 여지를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 공간에서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일하시고, 그 역사를 볼 때 참된 경외심에서 온 예배가 가능합니다.
30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31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35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36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37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40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30-40)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가 응답 없이 끝났으므로 이제 엘리야가 여호와께 제사하고 기도할 차례입니다. 그는 모든 백성 앞에서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했습니다. 당시 이세벨은 백성에게 바알 숭상을 강제하면서 여호와를 믿는 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우상 제단과 산당이 헐려야 했으나 대신 여호와의 제단이 헐렸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10:14). 갈멜 산의 제단도 이런 상황에서 무너졌으리라 짐작됩니다.
엘리야는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오라고 명합니다. 이들은 오늘 일어날 일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가까이 오자 엘리야는 제단을 만들 돌 열두 개를 취했습니다. 야곱의 아들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돌은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통합을 상징합니다. 저자는 야곱의 이름 “이스라엘”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상기시킵니다(31). 이는 이스라엘 조상 때부터 그들을 지키신 분이 하나님임을 부각하려는 의도입니다. 현재 그곳에 모인 자들은 북쪽 열 지파지만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을 포함한 열두 지파 전체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의 공동체임을 함축합니다.
엘리야는 이 여호와의 이름으로(“의지하여”, 32)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는 엘리야가 제사하는 대상이 ‘여호와’임을 확실히 밝히려는 목적입니다. 아브라함이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의 섬기는 신이 여호와임을 나타낸 것과 같습니다(창 12:8; 13:4). 그런데 오늘 제작된 제단에는 특기할 사항들이 있었습니다. 제단 주변에 곡식 두 세아(17.6리터)를 둘 수 있는 큰 도랑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따라(레 1:5-9), 또 바알 선지자들과의 약속에 따라(23), 제단 위에 나무가 놓였고, 그 위에 송아지 제물이 조각조각 놓였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통 넷에 물을 채워 번제물과 나무 위에 쏟으라고 명합니다. 가뭄에 물을 부으라는 명령은 뜻밖이고 아이러니합니다. 더구나 명령은 세 번 반복되어, 총 열두 통의 물이 부어졌습니다. 백성과 바알 선지자들의 상상을 깬 이런 행위는 엘리야의 즉흥적인 연출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 명령을 따른 결과였습니다(36). 3년 이상 가뭄이 들었으므로 좀 전까지는 나무도, 돌도, 바닥의 흙도, 도랑도 다 마른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단 위에 물이 흘러 넘쳤고, 제단 주변의 도랑까지 가득 찼습니다. 이제는 제물을 태우는 것은 고사하고, 나무에 불을 지피기도 불가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한편 엘리야가 열두 개 돌로 제단을 세운 일은 옛적에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와 요단을 건넌 후 강 한가운데서 돌 열두 개를 가져다가, 길갈에서 기념비로 세운 사건과 연결됩니다. 그때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돌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40년 전 홍해를 마르게 하셨듯이 요단의 물을 마르게 하여, 이스라엘로 마른 땅을 건너게 했음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단의 기적은 홍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후손들에게 상기시켜, 이들이 계속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수 4:19-24). 오늘 엘리야가 세운 제단도 바로 이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떠오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곧 베푸실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이 아닌 하나님을 예배하며 순종하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에 불로 응답하심으로써 그가 이스라엘의 참 신임을 증명하십니다. 엘리야는 제단에 다가가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이때가 “저녁 소제 드릴 때”(36)라는 것은 아침부터 그때까지 바알 선지자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29)을 확인시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부르며(36), 그가 이스라엘의 조상 때부터 하나님이시며, 그들과 언약을 맺은 분임을 상기시킵니다. 일곱 문장의 엘리야의 기도(37)는 중간에 “내게 응답하소서”가 두 번 나와, 응답을 촉구하는 구조입니다. 이 간구를 제외하면 기도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중에 참 신임을 백성이 알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칭호에서도 암시되었듯, 그가 이스라엘의 전능한 통치자임을 드러내시라는 기도입니다. 이스라엘이 숭배하는 바알과 아세라 등은 거짓 신이며 사람이 만든 형상임을 깨닫게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이미 하나님께로 돌이켰음을 깨닫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되돌이키다’(37)는 ‘변하게 하다’, ‘향하게 하다’, ‘돌아오게 하다’의 의미로, 백성이 하나님의 실체를 깨닫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임을 함축합니다. 또한 동사의 형태는 미래가 아닌 ‘완료형’으로 나와, 이미 하나님 편에서 그 일을 이루셨음을 드러냅니다. 둘째, 불로 응답하심으로써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임과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음을 증명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엘리야가 이 기도를 끝내자 여호와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불은 번제물, 나무들, 제단의 돌들, 땅바닥의 흙을 먹어 삼켰고, 도랑의 물을 다 핥아 없앴습니다. 물 열두 통을 쏟아 흥건했던 모든 곳에 물방울 하나 남기지 않은 강력한 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한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떨구어 경외심을 표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39)라며, 마침내 그가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임을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엘리야의 기도대로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이 백성의 마음을 이미 돌이켜 놓았기에 가능했습니다(37). 또 이 고백은 엘리야 자신에 대한 기도(36)도 응답되었음을 함축합니다.
이제 바알이 거짓 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그의 선지자들은 죽임 당합니다. 엘리야는 백성에게 바알 선지자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다 잡으라 명했습니다. 백성은 엘리야의 명에 순종하여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갈멜 산 아래 기존 시내로 데려가 그곳에서 처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닌 다른 신을 섬기도록 종용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마땅한 형벌이었습니다(신 13장). 이들의 죽음은 또한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살육한 데(4, 13)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입니다.
 

엘리야의 기도와 큰 비(41-46)

성도는 믿음으로 거짓된 생각들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면서 기도하고 인내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며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 시대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들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그 잘못된 생각들을 깨뜨릴 수 있습니까? 당시 백성들은 바알이 비를 주관하여 자신들을 풍요롭게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41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42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3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44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45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46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41-46)
바알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백성들의 고백을 들은 하나님께서는 큰 비를 내려 다시금 그가 건능한 여호와임을 세상에 알리십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비가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에게 올라가 먹고 마시라고 권합니다. 갈멜 산 사건 이후인지라 아합은 그의 말에 순순히 따릅니다(41-42). 엘리야의 ‘먹고 마시라’는 제안은 그가 3년 전 아합에게 경고했던 가뭄(17:1)이 종료되므로 이제 즐거워하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올라가라’는 말은 이스르엘에 있는 여름 별궁(21:1-2)으로의 이동을 뜻합니다.
한편 엘리야는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갑니다. 그는 땅에 꿇어 엎드려 머리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이 자세는 겸손과 굴복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약속하셨으므로(1) 비가 오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엘리야는 사환에게 지중해 쪽을 바라보고 비의 조짐이 있는지 확인시킵니다. 이는 일곱 차례 반복되었고, 일곱 번째가 되었을 때 사람 손만 한 구름이 바다에서 일어났습니다. 엘리야는 사환을 아합에게 보내어, 비가 길을 막기 전에 마차를 타고 떠나라고 전합니다. 얼마 안 있어 하늘이 구름과 바람으로 인해 캄캄해지며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3년 6개월 만에 내리는 비는 여호와의 말씀(1)의 성취로서 그의 전능함과 신실함을 입증합니다. 또한 엘리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며, 갈멜 산 대결과 마찬가지로 바알이 거짓 신임을 증명합니다. 아합은 엘리야의 말대로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갔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아합보다 앞서 이스르엘 입구까지 달려갔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엘리야의 순종 이후, 엘리야의 말에 백성(40), 왕(42), 사환(43), 왕(45)의 순서로 순종하는 모습이 계속 그려집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실체를 깨달은 데(39)에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이며 모든 일에 순종했음을 알게 된 것(36-37)도 포함됐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36-37)에 신실하게 응답하셨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관계는 아름다운 사역을 기억할 때 보존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기억하고, 자격 없는 우리에게 어떠한 구원을 베푸셨는지 기억하고, 실수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돌이키면 용서하시는 품을 기억하고, 끊을 수 없는 그 사람을 기억할 때 신앙은 아름답게 보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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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8-02)


바알 선지자와 영적 전쟁하는 엘리야

열왕기상 18장 16-29절


세상에는 거짓 우상과 타락한 가치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항상 영적 도전에 직면합니다. 우리는 헛된 풍요와 거짓 평안을 약속하는 영적 전투를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세상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 우상을 숭배하던 이스라엘 전체를 향해 엘리야는 당당히 영적 전쟁을 선포합니다.
 
아합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 신을 숭배한 것에 대한 징벌로 이스라엘에는 비가 오지 않아 심판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아합은 여기저기 물을 찾기 위해 돌아다닙니다. 이때 엘리야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오바댜 앞에 나타나 아합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라고 합니다. 엘리야와 아합이 만나면서 이제 본격적인 여호와와 바알 사이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전쟁은 말의 전쟁으로 시작하여 불의 전쟁으로 마칩니다.
 

엘리야의 아합의 논쟁(16-18)

영적 전투는 성도에게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매일 접하는 삶의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투하는 군사, 전투하는 믿음의 공동체라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만큼이나 세상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려는 노력을 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해야 하고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16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17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18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16-18)


엘리야의 명령을 받은 오바댜는 가서 아합을 만났고, 그에게 엘리야의 말을 전달해줍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러 갔습니다. 엘리야를 보자마자 이스라엘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엘리야의 선언 이후에 가뭄과 기근이 왔기 때문에 엘리야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 아합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일으켰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간 아합은 재앙의 원인을 엘리야에게 돌리고 백성들의 원망을 잠재우기 위해 엘리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 죄가 재앙의 원인임을 분명하게 밝혀준 것입니다. 이런 엘리야의 반박에 아합은 대답을 못하였고, 둘의 논쟁은 엘리야의 승리로 끝납니다.
 

자신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사이의 대결을 제안(19-20)

성도는 하나님을 거절하며 헛된 신을 섬기는 세상과의 영적 전투 가운데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해야 하고 노력을 하는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규칙적인 말씀 묵상과 일정한 기도 생활은 우리가 지녀야 할 필수적인 영적 무기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힘으로 세상의 타락한 문화와 거짓된 가치관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19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20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19-20)

이제 엘리야는 논쟁이 아니라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여호와의 선지자인 자신과의 실제적인 대결을 제안합니다. 아합에게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450,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모아달라고 요청합니다. 갈멜 산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 자신이 대결을 하여 누가 참 신인지 백성들 앞에서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란 표현은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후견인이라는 뜻입니다.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제거하고 많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로 대체하여 우상의 나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아합이 이방의 왕비 이세벨이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의 나라로 만든 이런 모습은 솔로몬 시대 수많은 이방 왕비들이 솔로몬에게 이방신들을 섬기게 한 것의 확장판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열왕기상 21장에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고 갈 때에 이세벨이 가지도록 돕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려 할 때, 포도원을 채소밭으로 만들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채소밭 또는 정원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를 포함해서 구약에 두 번 나옵니다. 신명기 1110-12절에 모세는 애굽과 약속의 땅을 비교하면서 애굽을 사람의 돌봄이 필요한 채소밭, 정원으로,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직접 돌보시는 땅을 묘사합니다. 정통적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포도원으로 비유됐습니다. 이 두 가지를 고려하면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개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땅이 아니라 이방 우상의 땅으로 만들려고 했고, 이것이 이세벨이 음모를 통해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즉 아합은 이방 여인을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와 하나님의 땅을 우상의 땅으로 망쳐버린 것입니다.

이런 아합은 엘리야를 바로 체포해서 처형하지 않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엘리야의 요구에 아합은 사람을 보내어 모든 이스라엘 자손과 선지자들을 갈멜 산에 모았습니다. 그가 엘리야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가뭄과 기근으로 인해 백성들과 나라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고비를 넘길 이벤트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이 일을 신속하게 처리해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도 갈멜 산에 모이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도 모였습니다. 

 

갈멜 산에 대결을 준비함(21-24)

세상 사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숭배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광과 하나님 영광을 함께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영광도 얻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도 얻으려는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자는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고 변화되어 가정과 공동체도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길 수 있도록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21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22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20-24)

엘리야는 갈멜 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인지 바알인지 결단을 촉구합니다. 언제까지 절뚝거리며 걷는 것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하며 양쪽 신을 섬길 것이냐고 질타합니다.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왔다갔다 갈피를 못 잡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질책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와 바알 중에 참신이라고 생각하는 쪽을 따르라고 요구합니다.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을 내 앞에 두지 말라고 하셨고 여호와만이 온 세상의 참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셨기에 여호와와 바알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말에 백성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누가 참 신인지가 아니라 그들에게 풍요와 번영을 가져다 주는 신이, 지금 당장 비를 내릴 수 있는 신이 참 신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엘리야의 주장은 이세벨이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에 들여오기 전에는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분열된 것도 우상숭배 때문이고, 북이스라엘에 반역이 끊이지 않는 것도 왕들이 여로보암의 우상숭배 죄를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선지자의 입을 통해 지적받고 경고를 들어왔기에 엘리야가 한 신만 선택하라고 요구할 때 아무 말도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여기까지였고, 여전히 둘 사이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엘리야는 이제부터 누가 참 신인지 알아보는 제사를 드리자고 제안합니다.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 450명이 각기 송아지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않은 상태로 둔 후, 각 선지자가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른 후 불을 내려 응답하는 신을 참 신으로 인정하자고 제안합니다. 살아있는 참 신이라면 자기 선지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불을 내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엘리야의 제안에 백성들은 모두 좋다고 찬성합니다. 그들도 참 하나님의 권능과 기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알 제사장들의 실패(25-29)

성도는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당당함은 자신의 됨도미이나 재산이나 실력이나 인격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확신만으로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자랑하며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세속주의와 혼합주의가 팽배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5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26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25-29)

엘리야는 갈멜 산 사건을 매우 주도적으로 이끌고 갑니다. 아합과 바알 선지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한 모습은 2년 전 피신할 때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엘리야는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그쪽이 인원수가 많으니 송아지를 택한 다음 먼저 제사 준비를 하고 그들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절대 불은 붙이지 말라고 합니다. 엘리야의 말을 따라 바알 선지자들은 송아지를 가져다 잡고, 아침부터 한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바알은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바알의 선지자들은 제단 주위를 절뚝거리며 뛰기 시작합니다. ‘뛰놀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절뚝거리다’, ‘다리를 절다라는 뜻으로, 21절의 머뭇거리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백성들이 둘 사이에서 절뚝거리는 모습이 바알 선지자의 모습을 닮은 것임을 보여줍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제단 주위를 돌면서 소리 지르고 춤을 추고 격렬한 행동을 하는데, 이는 자기 신의 관심을 일으키기 위한 행동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춤을 추며 부르는데도 정오가 될 때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더 큰소리로 신을 부르라고 조롱합니다. 엘리야는 아무 응답이 없는 것에 대해 신이 묵상하고 있든지, 아니면 잠깐 신전에서 외출을 했든지, 다른 곳을 다니고 있는 중이라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혹 잠이 들었으면 깨워야 한다고 조롱합니다. 외출이나 여행 중이라 듣지 못한다는 것은 바알 신은 공간적으로 제약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며,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과 대조됩니다. 잠들었으니 깨워야 한다는 것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과 대조됩니다. 이런 엘리야의 조롱은 바알 신이 장소적 제약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귀가 어두워 깊은 생각에 빠지면 백성들의 소리를 못 듣고, 신체적으로 연약하여 잠을 자야 하는 제한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바알 신화에 따르면 바알은 삶과 죽음을 반복합니다. 봄에는 살아나서 세상을 풍요롭게 하지만, 죽음의 신 모트의 공격을 받아 죽음을 맞이하면 지하 세계에서 일정 기간을 보내야 하는데, 이때가 겨울입니다. 그러다 다시 살아나서 세상으로 오면, 다시 봄이 시작되는 순환적 신이기 때문에, 바알은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무 응답을 못하는 바알이 참 신이 아님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조롱에 자극을 받은 바알의 선지자들은 더 큰소리로 바알을 부르며 규례를 따라 피를 흘리기 위해 몸에 상처를 내었습니다. 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는 의식은 고대 근동 종교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며, 신에 대한 헌신과 희생을 표현합니다. 이렇게 소리 지르고 춤추고 몸에서 피까지 내면서 저녁 소제 드리는 시간이 될 때까지 미친 듯이 떠들었지만, 바알 신은 아무 응답도 없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신의 이름을 불렀고, 모든 수단을 간구하며 광란의 시간을 보냈지만, 바알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그토록 애타게 부른 바알은 응답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신은 가짜 신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아침부터 지켜본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바알이 가짜 신이라는 것을 목도하였습니다.

참 하나님인지 거짓 우상인지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의 음성에 응답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작은 소리에도 응답하시고 부르짖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알과 같은 우상과 달리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따라가는 우상과 거짓 신은 이렇게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못합니다. 참 하나님인지 거짓 우상인지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의 음성에 응답하는지를 보면 아는 것입니다. 바알과 같은 우상과 달리 우리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저버리고 세상 사람들이 따르는 헛된 우상 앞에 쩔뚝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지 하나님을 따를 것인지 머뭇머뭇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에 앞에 머뭇거리지 말고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를 결단하고 주님께 은헤의 단비를 달라고 간구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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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8-02)


바알 선지자와 영적 전쟁하는 엘리야

열왕기상 18장 16-29절


세상에는 거짓 우상과 타락한 가치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항상 영적 도전에 직면합니다. 우리는 헛된 풍요와 거짓 평안을 약속하는 영적 전투를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세상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 우상을 숭배하던 이스라엘 전체를 향해 엘리야는 당당히 영적 전쟁을 선포합니다.

 

아합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 신을 숭배한 것에 대한 징벌로 이스라엘에는 비가 오지 않아 심판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아합은 여기저기 물을 찾기 위해 돌아다닙니다. 이때 엘리야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오바댜 앞에 나타나 아합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라고 합니다. 엘리야와 아합이 만나면서 이제 본격적인 여호와와 바알 사이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전쟁은 말의 전쟁으로 시작하여 불의 전쟁으로 마칩니다.

 

엘리야의 아합의 논쟁(16-18)

영적 전투는 성도에게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매일 접하는 삶의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투하는 군사, 전투하는 믿음의 공동체라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만큼이나 세상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려는 노력을 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해야 하고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16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17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18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16-18)

엘리야의 명령을 받은 오바댜는 가서 아합을 만났고, 그에게 엘리야의 말을 전달해줍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자마자 ‘이스라엘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라고 부릅니다.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엘리야의 선언 이후에 가뭄과 기근이 왔기 때문에 엘리야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 아합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간 아합은 재앙의 원인을 엘리야에게 돌리고 백성들의 원망을 잠재우기 위해 엘리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 죄가 재앙의 원인임을 분명하게 밝혀준 것입니다. 이런 엘리야의 반박에 아합은 대답을 못하였고, 둘의 논쟁은 엘리야의 승리로 끝납니다.

 

자신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사이의 대결을 제안(19-20)

성도는 하나님을 거절하며 헛된 신을 섬기는 세상과의 영적 전투 가운데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해야 하고 노력을 하는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규칙적인 말씀 묵상과 일정한 기도 생활은 우리가 지녀야 할 필수적인 영적 무기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힘으로 세상의 타락한 문화와 거짓된 가치관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19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20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19-20)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여호와의 선지자인 자신의 대결을 제안합니다. 아합에게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모아달라고 요청합니다. 갈멜 산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 자신이 대결을 하여 누가 참 신인지 백성들 앞에서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란 표현은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후견인이라는 뜻입니다.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제거하고 많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로 대체하여 우상의 나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방의 왕비 이세벨이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의 나라로 만든 이런 모습은 솔로몬 시대 수많은 이방 왕비들이 솔로몬에게 이방신들을 섬기게 한 것의 확장판입니다. 엘리야의 요구에 아합은 사람을 보내어 모든 이스라엘 자손과 선지자들을 갈멜 산에 모았습니다.

 

갈멜 산에 대결을 준비함(21-24)

세상 사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숭배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광과 하나님 영광을 함께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영광도 얻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도 얻으려는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자는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고 변화되어 가정과 공동체도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길 수 있도록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21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22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20-24)

엘리야는 갈멜 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언제까지 절뚝거리며 걷는 것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하며 양쪽 신을 섬길 것이냐고 질타합니다.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왔다갔다 갈피를 못 잡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질책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와 바알 중에 참신이라고 생각하는 쪽을 따르라고 요구합니다.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을 내 앞에 두지 말라고 하셨고 여호와만이 온 세상의 참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셨기에 여호와와 바알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말에 백성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엘리야의 주장은 이세벨이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에 들여오기 전에는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분열된 것도 우상숭배 때문이고, 북이스라엘에 반역이 끊이지 않는 것도 왕들이 여로보암의 우상숭배 죄를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선지자의 입을 통해 지적받고 경고를 들어왔기에 엘리야가 한 신만 선택하라고 요구할 때 아무 말도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반응은 여기까지였고, 여전히 둘 사이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엘리야는 이제부터 누가 참 신인지 알아보는 제사를 드리자고 제안합니다.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 450명이 각기 송아지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않은 상태로 둔 후, 각 선지자가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른 후 불을 내려 응답하는 신을 참 신으로 인정하자고 제안합니다. 살아있는 참 신이라면 자기 선지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불을 내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엘리야의 제안에 백성들은 모두 좋다고 찬성합니다. 그들도 참 하나님의 권능과 기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알 제사장들의 실패(25-29)

성도는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당당함은 자신의 됨도미이나 재산이나 실력이나 인격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확신만으로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자랑하며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세속주의와 혼합주의가 팽배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5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26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25-29)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그쪽이 인원수가 많으니 송아지를 택한 다음 먼저 제사 준비를 하고 그들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절대 불은 붙이지 말라고 합니다. 엘리야의 말을 따라 바알 선지자들은 송아지를 가져다 잡고, 아침부터 한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바알은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바알의 선지자들은 제단 주위를 절뚝거리며 뛰기 시작합니다. ‘뛰놀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절뚝거리다’, ‘다리를 절다’라는 뜻으로, 21절의 ‘머뭇거리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백성들이 둘 사이에서 절뚝거리는 모습이 바알 선지자의 모습을 닮은 것임을 보여줍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제단 주위를 돌면서 소리 지르고 춤을 추고 격렬한 행동을 하는데, 이는 자기 신의 관심을 일으키기 위한 행동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춤을 추며 부르는데도 정오가 될 때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더 큰소리로 신을 부르라고 조롱합니다. 엘리야는 아무 응답이 없는 것에 대해 신이 묵상하고 있든지, 아니면 잠깐 신전에서 외출을 했든지, 다른 곳을 다니고 있는 중이라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혹 잠이 들었으면 깨워야 한다고 조롱합니다. 외출이나 여행 중이라 듣지 못한다는 것은 바알 신은 공간적으로 제약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며,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과 대조됩니다. 잠들었으니 깨워야 한다는 것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과 대조됩니다.

이런 엘리야의 조롱은 바알 신이 장소적 제약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귀가 어두워 깊은 생각에 빠지면 백성들의 소리를 못 듣고, 신체적으로 연약하여 잠을 자야 하는 제한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바알 신화에 따르면 바알은 삶과 죽음을 반복합니다. 봄에는 살아나서 세상을 풍요롭게 하지만, 모트의 공격을 받아 죽음을 맞이하면 지하 세계에서 일정 기간을 보내야 하는데, 이때가 겨울입니다. 그러다 다시 살아나서 세상으로 오면, 다시 봄이 시작되는 순환적 신이기 때문에, 바알은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무 응답을 못하는 바알이 참 신이 아님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조롱에 자극을 받은 바알의 선지자들은 더 큰소리로 바알을 부르며 규례를 따라 피를 흘리기 위해 몸에 상처를 내었습니다. 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는 의식은 고대 근동 종교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며, 신에 대한 헌신과 희생을 표현합니다. 이렇게 소리 지르고 춤추고 몸에서 피까지 내면서 저녁 소제 드리는 시간이 될 때까지 미친 듯이 떠들었지만, 바알 신은 아무 응답도 없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신의 이름을 불렀고, 모든 수단을 간구하며 광란의 시간을 보냈지만, 바알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그토록 애타게 부른 바알은 응답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신은 가짜 신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아침부터 지켜본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바알이 가짜 신이라는 것을 목도하였습니다.

참 하나님인지 거짓 우상인지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의 음성에 응답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작은 소리에도 응답하시고 부르짖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알과 같은 우상과 달리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나 자신이 바라는 무언가를 예배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예배 대상이 누구인지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는 세상에서의 영적 전쟁 중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헛된 유혹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당당히 세상과 맞서는 믿음의 기개를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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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8-01)


선지자 오바댜와 엘리야의 만남

열왕기상 18장 1-15절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과거 죄를 심판하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과 역경을 주시는 것은 과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장래에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기를 소망하기 위한 교훈으로 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역경과 시련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를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아합의 눈을 피해 그릿 시내로 가서 숨어 지내다 다시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여호와의 권능으로 살려내어 바알의 본거지에서 여호와의 이름과 능력을 알렸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여호와께서는 다시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며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과 일전을 준비하십니다.

 

다시 아합에게 가는 엘리야(1-2)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상황을 고려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극복하고 사명을 이루는 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1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2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1-2)

가뭄을 선언한 지 3년이 지난 후 다시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 아합에게 가서 보이라는 명령과 이제 비를 내리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아합과 이스라엘에게 내린 징벌의 시간이 끝나고, 아합과 결전을 벌이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둘 중 하나가 제거되거나 항복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10절의 오바댜의 말에 따르면, 아합은 그동안 엘리야를 죽이기 위해 온 세상을 다 찾아다녔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서 아합에게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사마리아로 돌아갑니다. 당시 사마리아는 기근이 심각했습니다. 이것은 가뭄을 극복하지 못하여 농사와 목축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섬기던 바알은 여호와께서 내리신 가뭄을 극복하지 못한 무능한 신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심각한 기근은 시돈의 사르밧에서 여호와의 도움으로 어려움 없이 산 엘리야와 과부 가족의 삶과 대조를 이룹니다. 결국 여호와만이 참 신인 것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를 구한 오바댜(3-6)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위협을 받을 때 사명을 망각하지도, 사명이란 명분으로 세상을 등지지도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세상에서 지닌 위치와 능력은 생명을 살리는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3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4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5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6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3-6)

여기서 오바댜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아합 궁의 왕궁 맡은 관료로 상당히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입니다. 이세벨이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의 공식 종교로 만들면서 이에 방해가 되거나 반대하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제거할 때 오바댜는 백 명의 여호와 선지자를 숨기고, 그들에게 먹을 양식과 물을 공급하였습니다. 4절에서도 ‘양식을 공급하다’라는 뜻의 동사 ‘킬칼’을 17:4,9과 동일하게 사용했는데, 엘리야가 그럿 시내에서 까마귀의 공급을 받거나 사르밧 과부의 집에 숨어 지내며 양식을 공급받은 것과 비슷합니다. 오바댜는 백 명의 여호와의 선지자들에게 까마귀나 사르밧 과부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선지자가 죽임을 당하고 기근으로 고생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기 사람들을 지키시고 먹을 것을 공급해주십니다. 아합은 이런 상황을 모르고 오바댜에게 물을 찾으러 나서자고 말합니다.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시내’라는 표현은 현재 이스라엘 땅에 모든 물이 말라버리고 가축들을 먹일 풀마저 사라져굶어 죽게 된 상황을 보여줍니다.

5절에서 ‘다 잃다’로 번역된 ‘나크리트’는 4절의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멸할 때’에서 ‘멸하다’로 번역된 단어와 같습니다. 이것은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제거하는 것과 이스라엘 땅에서 가축들이 제거되는 것이 관련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과 오바댜가 이스라엘 땅을 나누어 한쪽은 아합이 가고 다른 쪽은 오바댜가 가기로 정하는데, 오바댜는 지위가 높은 인물이며 아합이 그를 매우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알 숭배자 아합 밑에 있는 여호와의 종이 신뢰받는 고위 관료라는 것 자체가 여호와의 섭리입니다. 아합과 오바댜는 물을 찾기 위해 흩어져서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오바댜와 엘리야의 만남(7-15)

우리가 받은 사명은 획일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 다른 사명을 주시고 우리가 그 사명에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서로의 사명을 비교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사명을 무시하거나 질투하는 것은 사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러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받은 다양한 사명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이해하며, 다른 성도를 하나님 나라를 함께 함께 세워 가는 동역자로 여겨야 합니다.

7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난지라 그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8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9이르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10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11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나 12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13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백 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14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그가 나를 죽이리이다 15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7-15)

오바댜가 길을 가는 중에 엘리야가 우연히 그를 만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사르밧 성문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로 둘이 만난 것입니다. 엘리야를 만난 오바댜는 그를 알아보고 놀라서 땅에 엎드려 절하며 정말 엘리야인지 확인합니다.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엘리야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한 것으로,오바댜가 여호와를 신실하게 섬긴다는 또 하나의 징표입니다. 오바댜의 질문에 엘리야는 자신이 진짜 엘리야라는 사실을 알리면서, 너의 주인에게 가서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라고 대답해줍니다. 놀란 오바댜는 엘리야에게 자신을 아합의 손에 죽게 하려고 이런 명령을 하였다고 항의합니다. 그리고 10-14절에서 자신이 아합에게 엘리야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오바댜는 엘리야의 말을 듣는 순간 딜레마를 느꼈습니다. 아합은 모든 민족과 모든 왕국에 사람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았고, 만일 그곳에 없다고 하면 정말로 엘리야를 보지 못했다고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맹세는 만일 거짓말을 하면 아합의 보복을 받겠다고 신 앞에서 맹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찾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적의 소굴인 시돈에서 안전하게 거하게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바댜의 말을 통해 아합과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했고 엘리야는 도망 다녀야 할 상황인 것이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자신이 엘리야의 말대로 엘리야 있는 곳을 아합에게 보고했는데 여호와께서 그 후에 엘리야를 자신이 모르는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면, 자신은 아합에게 죽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바댜는 두 가지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합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엘리야를 숨긴다거나 엘리야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전하면 죽였습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찾기 위해 백성들을 위협하고 함부로 죽인 것입니다. 둘째, 엘리야에 대한 불신과 염려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지금 엘리야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엘리야의 개인적 만용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엘리야의 말이 개인적 생각이라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구하기 위해 엘리야를 이전처럼 숨기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바댜는 그동안 아합이 오바댜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여호와의 영이 그를 이끌어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아합을 이길 수 없기에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숨기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걱정을 말한 후에 자신을 살려달라고 요청하고 자신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실한 자라고 주장합니다.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했고, 특히 4절에서 화자가 말한 것처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 백 명의 여호와의 선지자를 굴에 숨기고, 물과 양식을 공급해왔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자신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있다는 증거를 내민 것입니다. 14절에서 다시 한 번 엘리야의 명령대로 행하면 자신이 아합의 손에 죽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말을 맺습니다. 오바댜는 아합 곁에서 아합과 이세벨의 무서움을 보고 겪었기에, 엘리야의 말에 대한 신뢰보다 아합의 응징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것입니다. 그는 언제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끝내실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고, 홀로 나타난 엘리야를 보면서 그의 능력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오바댜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에서 행한 기적들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에게 자신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구한 이야기를 못 들었냐고 물었지만, 정작 자신이 여호와의 놀라운 기적을 듣지 못하였고, 이제 어려운 상황을 간신히 이어가며 여호와의 힘과 기적에 대한 기억을 잊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어려움은 여호와를 배신한 것에 대한 여호와의 징벌이지만, 오바댜를 포함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며 부르짖던 사람들은, 혹시 여호와께서 바알을 못 이기시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돌보실 것이라는 믿음이 점점 약해져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오바댜의 말에 엘리야는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라고 선언하면서, 자신은 오늘 반드시 아합 앞에 나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엘리야가 여호와께 ‘만군’, 즉 ‘군대’, ‘용사’라는 별명을 붙인 이유는 오바댜의 연약한 믿음에 힘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오바댜에게 여호와는 군대와 같은 힘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아합이나 이세벨은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은 여호와께서 바알에게 졌기 때문이 아니며, 이제는 여호와께서 일어나 이 상황을 정리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오바댜의 고생을 귀하게 보시고 그에게 가장 먼저 여호와의 일어나심을 알려주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던 오바댜에게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해 위로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숨어 다니던 엘리야는 드디어 본격적인 전쟁을 위해 아합을 만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사명은 주님의 역사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사명의 크기, 사명자의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사명을 주셔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충성입니다. 각자 삶의 자리가 다르듯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서로 다릅니다. 각자 삶의 현장에서 자기 사명에 온전한 헌신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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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7-02)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열왕기상 17장 8-24절


인생은 기쁨과 슬픔이라는 실로 얼기설기 짜인 융단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뻐할 때도 있고 예기치 못한 사고로 애통할 때도 있습니다. 인생에서 슬픔의 날을 만날 때, 그때에도 우리는 슬픔의 탄식을 믿음의 탄성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드리는 눈물과 비탄의 호소는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간절한 믿음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든 이방 땅에서든 그에게 순종하는 자들을 돌보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바알의 성읍인 시돈의 사르밧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엘리야를 공궤할 자로 지목한 자는 아주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말씀에 순종한 엘리야와 여인의 집에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그 후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죽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아이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8-24)

비록 우리가 다 헤아릴 수는 없을지라도 인생길에서 맞이하는 모든 상황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험난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을 때가 바로, 모든 상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바랄 때입니다. 인생의 불확실함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올려 드리는 기도입니다.

8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17○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8-24)

사르밧 과부는 자신의 아들이 않다가 죽게 되자 비탄에 잠깁니다. 엘리야는 아이의 시신을 다락으로 옮겨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살려주시고, 여인은 이 일을 통해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1) 엘리야와 과부 식구를 먹이신 하나님(8-16)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시작된 후에도 계속 엘리야를 돌봐주십니다. 2절에서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9). 하나님은 그를 시돈의 사르밧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비가 내리지 않아 그릿 시내가 말랐으므로, 엘리야를 다른 곳으로 보내 공급하시려는 의도입니다. 시돈은 가나안의 북동쪽이자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베니게 왕국의 도시입니다. 요단 동편의 그릿 시내에서 130킬로미터 이상인 먼 거리입니다. 게다가 그곳은 이세벨의 고향이며, 부친 엣바알의 통치 지역으로, 바알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16:31). 당시 이세벨은 바알 숭배를 강요하고 여호와의 선지자를 죽였으며, 아합은 엘리야를 찾아 수색전을 펼쳤습니다(18:4,10).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엘리야를 바알 숭배지로 보내는 일은 인간의 허를 찌르는 책략입니다. 그릿 시내에서 까마귀를 이용하여 엘리야를 먹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엘리야를 공궤할 대상으로 사르밧의 한 과부를 정하셨습니다. 까마귀에게 명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과부에게도 엘리야에게 음식을 주라고 명하셨습니다(20). 이번에도 하나님의 명령은 미래에 할 일(‘명령할 것이라’)이 아닌 이미 완료된 일(‘명령했다’)로 나와, 그의 능력을 부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엘리야를 이방 과부에게 보내셨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에게 지적하셨듯이, 당시 이스라엘에도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눅 4:25-26).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완악하여 하나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공급과 축복은 이방 여인과 가족에게 돌아갑니다. 바알의 풍요를 기대하는 자들은 기근 속에 허덕이나, 하나님의 매일 양식은 엘리야만 아니라 말씀에 순종한 이방 여인 가족에까지 확대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에 순종하여 사르밧으로 갔습니다. 수배령이 떨어진 상황에서 그가 먼 곳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호 덕이었습니다. 그런데 반전은 기근을 피해 도착한 바알 숭배지에도 가뭄과 기근이 심각했으며, 엘리야의 숙식을 맡게 될 과부는 풍족한 양식은커녕 자기 가족 먹을 것도 없는 처지였다는 점입니다. 엘리야가 성문에 도착했을 때 과부는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성문은 많은 사람이 출입하는 곳이라, 남들이 떨어뜨린 땔감을 주울 수 있는 장소입니다. 또한 성문은 엘리야처럼 나그네들이 성읍 주민들에게 초청받아 숙박할 기회를 얻는 장소였습니다(창 19:1-3; 삿 19:15). 엘리야는 그녀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인인지 알기 위해 그릇에 마실 물을 조금 갖다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장면은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갔을 때(창 24:13-14)를 상기시켜, 이 여인이 하나님께서 지목한 과부임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요청에 응하여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가자, 엘리야는 그녀를 다시 불러 빵 한 조각도 함께 청합니다. 요청에 당황한 여인은 자기에게 빵이 없으며, 식량이라고는 통에 곡식 가루 한 움큼, 병에 기름 조금 뿐임을 밝힙니다. 원래 그녀의 계획은 땔감 두어 개를 주워다가, 남은 재료로 마지막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이 말을 하면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12)을 언급하는데, 이는 엘리야가 자기 신분을 이미 밝혔음을 암시하며, 여인의 말이 진실함을 주장하는 의도입니다. 여인의 형편을 들은 엘리야는 두려워 말라며 그녀를 위로합니다. 그러더니 예상 밖에 자기를 위해 작은 빵 하나를 먼저 만들어 오고, 그 후에 그녀와 아들의 빵을 만들라고 명합니다. 이 명령은 앞서 10-11절의 “청하건대”를 수반한 ‘요청’이 아닌 ‘명령’입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하면, 여호와의 말씀에 가루 통이 바닥나지 않고 기름병이 줄지 않을 것이라 약속합니다. 처음 만난 이방인의 이런 말은 뻔뻔한 속임수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여인은 그가 시킨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야를 통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여러 날을 먹어도 가루와 기름이 계속 채워졌습니다. 마지막 식사를 하고 죽기를 기다리려 했던 여인은 순종을 통해 음식과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꼐서는 바알의 성읍에서 그의 권능을 나타내며 순종하는 자들을 돌보셨습니다.

(2)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하나님(17-24)

하나님께서는 양식 문제를 뛰어넘어, 이방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리심으로써 그가 생명의 주관자임을 드러내십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있어 엘리야의 체류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기적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만 일어나는 법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곡식 가루와 기름을 계속 공급받고 있던 중여인의 아들이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품에 안을 수 있을 정도(19)의 어린 나이로 짐작됩니다. 아들의 병세는 심히 악화되었고, 결국 숨이 끊어졌습니다. ‘숨이 남지 않았다’(17)는 표현은 아이의 죽음이 확실함을 나타냅니다. 여인은 이방 선지자 엘리야를 집으로 들인 것이 아이의 병과 죽음의 화근이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시돈인인 그녀는 바알을 숭배했을 터이므로 여호와의 선지자의 체류 자체가 바알의 노여움을 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과 아들이 양식을 공급받아 여태 생명을 부지해온 것은 헤아리지 못합니다. 여인은 엘리야 선지자의 존재로 자신의 다른 죄악들도 드러나고, 자기 죄 때문에 신의 징벌이 내렸나 싶어 괴로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녀는 급기야 엘리야가 그곳에 온 이유가 그녀의 죄를 기억나게 하고 아들을 죽게 하려 한 것이었냐고 따지며, 괴로움과 원망을 다 쏟습니다. 물론 여인이 이 일을 엘리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눈에 아들의 죽음은 사람의 힘으로 손쓸 수 없는 일이고, 남편을 잃은 과부로서 아이가 더 소중했을 터이므로, 이런 반응은 자연적이고 당연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녀가 아들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죄를 살핀 태도 자체는 병든 아들을 보고도 자신의 죄과를 기억하지 않은 여로보암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14:1-18). 실상 과부 아들의 죽음은, 나중에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게 된 자에게 설명하시듯(요 9:3), 아들의 죄나 여인의 죄때문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매개였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경우 아들 아비야의 질병은 여로보암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들이 위중했을 때 자신의 죄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선지자를 속여 아들의 생사를 알아내려고 술수를 쓰며 죄만 더해갔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기도할 특권이 있었으나 아들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아들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한편 엘리야는 여인에게서 죽은 아들을 건네받아, 자기가 거하는 윗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아이를 침대에 누이고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여인이 아들의 죽음을 엘리야 탓으로 돌렸듯, 엘리야도 처음에는 하나님께 자신이 체류하는 집의 과부에게조차(“또”로 번역됨, 20) 재앙을 내리셨냐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아이 위에 자신의 몸을 세 차례 뻗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마술이나 소생술의 연출이 아닌 자기희생과 간구의 한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엘리야는 또한 아이의 영혼을 되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은 하나님은 죽은 아이의 생명을 되돌려주셨습니다. 엘리야는 여인에게 ‘(눈으로) 보아라. 네 아들이 살아났다’(23)라며, 아이가 생명을 되찾았음을 확인시킵니다. 여인은 이제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함을 분명히 알았노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아이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은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이방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확증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또 이 사건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의 능력과 함께 시돈의 우상신 바알이 아닌 여호와가 생명의 주인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인생의 연약함과 불확실함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인생에서 슬픔으로 인해 탄식할 때가 있겠지만, 마침내 슬픔의 비탄을 기쁨의 탄성으로 바꾸어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올려 드린 우리의 눈물의 호소와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영광의 찬양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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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7-01)


엘리야를 보호하고 공급하시는 하나님

열왕기상 17장 1-7절


세상은 우리에게 융통성이라는 이름으로 혼탁한 세상 가치관에 순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를 고집하며,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신 참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영적으로 혼탁해지는 세상에 맞서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믿음을 실천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주관자이며 공급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을 아합에게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은 바알이 비를 내린다고 생각하는 바알 숭배자들을 도발하는 소식입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찾아 죽이려 하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겨 보호하십니다. 말씀대로 전혀 내리지 않고, 급기야 그릿 시대도 마릅니다.

 

엘리야를 보호하고 공급하시는 하나님(1-7)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혼탁한 가치관이 난무하는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는 믿음과 진리의 말씀으로 세상에 맞서며 시대를 바꾸어 갈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길들여지는 연약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신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이 시대에 도전하는 생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에 맞서며 살아가야 합니다.

1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5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1-7)

이스라엘을 바알 숭배로 이끌어 가장 악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은 아합(16:30,33)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보여주십니다. 분열왕국 왕들의 기록 중 아합 단락(16:29-22:40)은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의 악행을 두드러지게 묘사합니다. 또한 단락 안에는 엘리야의 사역이 아합만큼이나 비중 있게 나옵니다(17:1-19:21; 21:17-29).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사용하여 신앙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에게 그의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행사하심으로써 그가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임을 나타내십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길르앗 땅의 디셉 출신 또는 거류자로서, 아합(주전 874-853년)과 아하시야(주전 853-852년) 대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습니다. 아합의 통치 기록에는 엘리야 외에도 엘리사(19:19-21), 이름 없는 선지자(20:13-14, 22-25, 28), 또 다른 선지자(20:35-42), 미가야(22:828), 오바댜가 숨긴 100명의 선지자(18:4) 등이 등장합니다. 이는 악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를 보내 그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푸셨음을 나타냅니다(미 6:4). 하나님의 말씀에는 심판의 경고도 있고 승전의 약속도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선포된 여호와의 말씀은 그 말씀 그대로 실현되어 갑니다. 그럼에도 아합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갈 기회를 버리고, 바알을 좇는 완고함과 어리석음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합당한 심판에 점점 더 다가갑니다. 한편 엘리야 단락인 17-19장과 21:17-29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종과 응답, 탈진, 그리고 재기 과정을 묘사합니다. 이 과정의 한편에는 엘리야의 단호함, 용기, 열정, 헌신, 간절함 등이, 또 한편에는 외로움, 상실감, 좌절, 우울함 등이 기술됩니다. 하나님꼐서는 굴곡 있는 삶의 여정 속에 엘리야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끊임없이 신실하게 공급하고, 보호하고,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부터 19장까지는 3년 6개월의 가뭄을 배경으로 하나님이 엘리야와 그의 백성들을 어떻게 보살피셨는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1) 가뭄 예고(1)

선지자 엘리야는 땅에 가뭄이 시작될 것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통보함으로써 아합의 바알 숭배에 정면으로 맞섭니다. 비뿐 아니라 이슬조차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이 예고되었습니다. 바알은 천둥과 폭풍의 신으로서 땅의 풍요와 가축의 번성을 제공하는 신으로 알려졌습니다. 가나안 주민들은 바알이 땅에 비를 내린다고 믿었으므로, 바알은 농경생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숭배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도 아합과 이세벨과 더불어 바알을 이스라엘의 신으로 섬겼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신은 자기가 섬기는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임을 밝힙니다. 1절의 “내 (엘리야) 말이 없으면”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 말씀하시지 않으면’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엘리야의 가뭄 선포는 여호와와 바알 간의 대결이며, 바알과 그의 숭배자들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18장의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18:20-40) 이전에, 그들이 각각 섬기는 ‘신들의 대결’이 먼저 시작됐음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바알과 대결을 벌인다 해서 바알이 실제로 존재한다든가 하나님과 바알이 대등하게 견줄 수 있는 대상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당시 아합을 비롯하여 백성이 바알을 신격화하여 섬겼으므로, 그들의 신이 생명과 능력이 없는 형상에 불과함을 증명하기 위한 한 방법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출 3:14). 한편 가뭄 예고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심판임을 함축합니다. 이슬이나 늦은비, 이른비 등의 비는 하나님의 은혜이나(욜 2:23), 가뭄과 기근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우상숭배에 대한 형벌임을 암시합니다(레 26:18-20; 신 28:23-24).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징계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솔로몬의 기도에 언급되었듯(8:35-36) 그들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암 5:6-12; 히 12:5-11).

(2) 엘리야를 보호하고 공급하시는 하나님(2-6)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 엘리야에게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의 그릿 시내가에 숨으라’(3)고 명하셨습니다. “여기”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성읍으로 유추됩니다. 1절에서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뭄을 선언한 장소가 아합의 궁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이후에도 아합을 만나러 사마리아로 간 점(18:2)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하나님의 ‘숨으라’는 명령은 배경 설명이 없어 갑작스러우나, 엘리야의 가뭄 예언 이후에 나온 것을 봤을 때, 그의 발언 때문에 어려움이 닥쳤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정황은 17장의 앞뒤 내용에서 보충됩니다.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가 극에 달한 계기는 오므리가 추진한 아합과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의 정략결혼이었습니다. 시돈은 바알을 위시해 아세라와 아스다롯의 숭배지였습니다. 아세라는 모든 신의 어머니로, 아스다롯은 풍요와 다산의 신의로 알려졌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출애굽 당시 이미 가나안의 신들로 소개됐고(출 34:13), 사사 시대에 아스다롯과 함께 이스라엘의 숭배신으로 증명되었습니다(삿 3:7; 6:28; 삼상 7:3-4). 솔로몬 대에도 아스다롯 등 이방신 숭배가 만연했습니다(11:1,5). 아사의 할머니이며 태후였던 마아가도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15:13). 현재 아합의 아내 시돈 공주 이세벨은 열성적인 바알 신자였습니다. 시돈과 같은 나라(베니게)에 속한 두로의 히람 왕은 성전 건축에 힘을 보탰지만(5장), 시돈의 이세벨은 아합을 부추겨 바알 신봉자로 만들고,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바알 사이로 몰아넣었습니다(18:21). 이스라엘에는 바알 신전과 제단, 아세라 상이 즐비했습니다(16:31-33). 또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 있어, 이세벨이 공급하는 양식을 먹으며 호사를 누렸습니다(18:19), 이처럼 아합과 이세벨의 주도하에 바알이 흥왕하고 있을 때 엘리야가 나타나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알리며 가뭄을 예언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의 예언을 그들의 신과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그 후 비가 내리지 않자 모든 원인을 엘리야에게 돌려, 그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로 생각했습니다(18:17). 아합은 이스라엘 안팎으로 엘리야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18:9-12),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찾아 죽였습니다(18:4;19:10). 나중에 가뭄이 끝날 즈음 엘리야가 아합에게 비가 내릴 것임을 선언한 일(18:41) 또한 엘리야에 대한 아합의 핍박이 가뭄과 관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보호의 약속과 더불어 그릿 시냇가를 통해 물을, 까마귀들을 통해 음식을 엘리야에게 공급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엘리야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릿 시내로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말씀대로 까마귀들이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날라다 주었습니다. 그는 음식과 함께 그럿 시내의 물을 마셨고, 그곳에서 안전히 숨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을 광야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신 것처럼 말입니다(출 16-17장; 민 11, 20장).

(3) 가뭄의 시작(7)

엘리야의 가뭄 예고(1)로 시작한 이 단락은 가뭄이 실제로 시작되었음(7)을 알리며 끝납니다. 이런 전환은 시간적, 물리적, 환경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선언된 엘리야의 가뭄 예고가 현실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가뭄은 비를 관장하는 폭풍의 신 바알이 여호와의 능력에 압도당했음을 의미합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그릿 시내도 말라, 곧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이제 그곳도 엘리야의 식수원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또 어떤 방법을 통해 엘리야를 먹이고 돌보실지 기대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부분까지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영적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럴 때가 우리를 더욱 강인한 영적 용사로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시는 시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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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6-02)


이스라엘 왕 시므리, 오므리 그리고 아합

열왕기상 16장 15-34절


신앙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믿는 일입니다. 그분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믿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과 상관없이 누리는 번성은 그분의 존재감을 지우고 망각하게 만드니 재앙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왕들이 북이스라엘에 계속 일어남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점점 가까워집니다. 분열왕국 이해 60년이 채 안 되어 이스라엘에는 시므리와 오므리를 통해 각각 왕조가 바뀝니다. 제4왕조를 시작한 오므리와 그 아들 아합은 그들 전의 어떤 왕들보다 악을 더 행했습니다. 아합은 이내 이세벨의 영향으로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고, 그들의 제단과 우상들을 만들었습니다. 우상숭배를 이스라엘 전역에 퍼뜨려 여호와의 노를 부추겼습니다.

 

이스라엘 왕 시므리(15-20)

우리가 자격도 되지 않는데 인간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해 비성경적이고 비인륜적인 행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고립됩니다. 욕심은 죄입니다. 욕심에 빠져 사악한 행동을 계속할 때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게 됩니다.

15유다의 아사 왕 제이십칠년에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칠 일 동안 왕이 되니라 그 때에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더니 16진 중 백성들이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지라 그 날에 이스라엘의 무리가 진에서 군대 지휘관 오므리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매 17오므리가 이에 이스라엘의 무리를 거느리고 깁브돈에서부터 올라와서 디르사를 에워 쌌더라 18시므리가 성읍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요새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가운데에서 죽었으니 19이는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이니라 그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20시므리의 남은 행위와 그가 반역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15-20)

이스라엘의 다섯 번째 왕 시므리(주전 885년)는 7일간의 짧은 통치와 악한 왕이라는 평가를 역사에 남깁니다. 그가 바아사의 아들 엘라를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 때는 유다의 아사 왕 제27년이었습니다. 시므리의 반역으로 엘라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은 깁브돈(디르사의 남서쪽 80km)에 진 치고 있던 군대 지휘관 오므리와 온 이스라엘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반으로 왕좌에 오른 시므리를 합법적인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의 지휘관인 오므리를 왕으로 삼아 시므리에 대항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이들의 행보는 오므리가 시므리보다 군사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모반자 시므리를 처단하기 위해 깁브돈에서 행군해 올라와 디르사를 에워쌌습니다. 오므리를 따른 군대는 ‘온 이스라엘’(“이스라엘의 무리”)로 나와 그가 군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지도자임과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암시합니다. 마침내 오므리 군대는 디르사를 함락했습니다. 결국 시므리의 반역은 이스라엘에게서 깁브돈을 함락할 기회를 빼앗고(15:27; 16:17), 애꿎게도 자국의 수도가 함락되게 만들었습니다. 시므리는 디르사가 오므리의 손에 점령당하자 좌절하여 왕궁 요새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왕궁에 불을 질러 자신도 그 속에서 재가 되었습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시므리는 왕의 자질이 부족했으며, 그의 반역은 무모했습니다. 그는 경쟁 상대를 예상치 못했고, 강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바아사 가문에 대한 숙청은 빈틈없었으나 정작 자신의 모반에 대한 공격과 저지 세력에 대한 준비는 미약했습니다. 왕이 된 지 7일 만에 방화와 자살을 함으로써 자신이 세운 왕조와 지지자들과 스스로를 버린 행동 또한 무분별함과 무책임함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의 몰락이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한 죄’의 ‘심판’임을 단호하게 지적합니다(19). 그의 죄는 다른 왕들과 같이 개인이 지은 죄(‘여로보암의 길로 걸은 죄’)와 백성을 악으로 이끈 죄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짓게 만든 죄)입니다. 짧은 통치로 생을 마감한 시므리에게 여로보암의 죄를 묻는 것은 그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자임을 뜻합니다. 그가 저지른 암살과 숙청 자체가 자기 욕심을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규례에 어긋난 죄이며, 나라의 분열과 갈등을 가중시키는 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오므리(21-28)

우리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업적을 자신의 영적 현주소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이룬 위대한 성공과 업적으로 우리를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로보암의 길’로 언급되는 죄, 즉 자신의 목적을 절대화하거나 하나님을 수단화하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1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둘로 나뉘어 그 절반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따라 그를 왕으로 삼으려 하고 그 절반은 오므리를 따랐더니 22오므리를 따른 백성이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따른 백성을 이긴지라 디브니가 죽으매 오므리가 왕이 되니라 23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일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십이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육 년 동안 다스리니라 24그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읍 이름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25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26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27오므리가 행한 그 남은 사적과 그가 부린 권세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8오므리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합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21-28)

시므리의 자결 후 이스라엘의 여섯 번째 왕이 된 오므리(주전 885-874년)는 강력한 왕조의 군주였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왕정은 여로보암 이래 암살과 숙청이 난무하던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약 25년 전 깁브돈에서 나답과 함께했던 온 이스라엘은 그를 암살에서 지켜주지 않았으나(15:27), 오므리와 함께한 “온 이스라엘”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든든한 지지 세력이 되어주었습니다. 시므리가 이미 왕 엘라를 죽이고 바아사 가문을 다 숙청했고, 시므리 자신마저 자살함으로써 오므리는 앞선 왕조에 대해 손을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의 등극 당시는 유다 아사 왕 제27년으로(15), 분열왕국 이래 47년이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유다는 다윗 왕조가 지속되고 아사가 세 번째 왕으로서 장기 통치 중인 반면, 이스라엘은 반세기 동안 왕조가 네 번 바뀌고, 왕도 여섯 번째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첫 정권을 잡은 여로보암 왕조는 말년에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끝났고(대하 13:20), 그의 아들 나답이 암살당하여 더 위태해졌습니다(15:27). 새로이 권력을 잡은 바아사가 20년 이상의 긴 통치를 이루었으나(15:17), 유다의 아사 왕 때 벤하닷의 침략으로 영토를 많이 잃어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런 요소들로 인해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엘라는 1년 새에 시므리에게 암살당합니다(16:10). 그러나 시므리는 7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북왕국 내에 내분이 생깁니다. 백성의 반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주전 885-880년)를 왕으로 삼고, 반은 군대 지휘관 오므리를 왕으로 삼았습니다. 시므리의 등극 시기가 아사 제27년이며(15), 디브니가 제거되고 오므리가 왕이 된 때가 제31년(23)인 것을 계산하면, 분열 기간은 약 4년 정도입니다. 오므리 왕조는 4대에 걸쳐 44년간(주전 885-841년) 지속됨으로써 북이스라엘 9왕조 중 예후 왕조(5대, 89년) 다음으로 장기 집권하면서 가장 강력한 왕조를 이뤘습니다.

오므리는 수도를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옮겼습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북쪽 약 67킬로미터, 세겜에서 약 20킬로미터의 거리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원래 소유자는 세멜이며, 그의 이름을 따 ‘사마리아’라 이름 지었습니다(24). 은 2달란트(68kg)에 구입한 이곳은 해발 약 400미터에 위치하여 접근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므리가 땅을 매입한 행위는 레위기 25:23의 ‘땅 매매 금지’ 규례를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유업으로 주신 것은 각 가정과 후손에게 삶의 터전을 확보해주시는 의미였습니다. 땅의 소유자는 하나님이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영원히 팔거나 양도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오므리가 이를 가볍게 여기고 땅을 산 데에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오므리는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더구나 여로보암처럼(14:9) 이전 모든 자들보다 더 악을 행했다는 내용이 부가되었습니다. 선왕들처럼 여로보암의 길을 따름으로써 자신도 죄를 짓고 백성들이 우상숭배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열왕기는 오므리에 대해 여덟 절을 할애했으나, 실상 그와 그의 왕조는 성경 밖에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메샤 비문(Mesha Inscription)에는 오므리가 모압을 정복한 내용이 적혔고,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열왕기는 악한 왕의 정치 군사적 업적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왕의 악행을 고발하고 죄에 합당한 심판이 있음을 알림으로써 독자들에게 죄와 심판에 대해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29-34)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의 총체적 삶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신앙을 양보하는 것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길로 접어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긴가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과 세상을 겸해 섬기는 이분법적인 태도나 혼합주의적인 모습은 없는지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29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30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31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32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33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34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29-34)

오므리에 이어 다섯 번째 왕이 된 아합(주전 874-853년)은 이스라엘의 가장 약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유다 아사 왕 제38년에 왕좌에 올라 22년(실제 21년)간 통치했습니다.

30-33절에 빼곡히 기록된 죄목은 그의 죄가 질적, 양적으로 무거움을 알립니다. 그는 부친 오므리처럼 이전 모든 자보다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했습니다. 특히 오므리가 주선한 정략결혼을 통해 아내로 맞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인해 죄가 가중되었습니다. 아합은 그녀가 섬긴 바알을 함께 숭배했고, 그녀를 위해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과 제단 및 아세라 상을 만들었습니다. 유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진 데 반해,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에는 이방신 바알의 신전이 자리 잡았습니다. 아합의 배역 행위는 솔로몬이 이방 아내들을 위해 산당과 제단을 지어, 자신과 백성을 이방 신 숭배로 이끌어, 하나님의 큰 책망을 받은 일을 상기시킵니다(11:1-13). 솔로몬의 이런 배역으로 이스라엘이 분단되지 않았습니까! 아합의 악행이 크므로 여호와의 진노도 증대되었습니다.

한편 당시 일어났던 여리고 재건축도 이스라엘의 악행과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난 한 사례입니다. 과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성읍의 재건을 금하고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수 6:26-27). 그러나 아합 때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재건했습니다. 이 건축은 왕의 명령으로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성을 재건한 결과, 히엘이 성읍 터를 쌓을 때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성읍 완공 후 성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 스굽을 잃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의 선포된 말씀은 정하신 때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왕과 백성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점점 패망으로 가까이 갑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아합은 이세벨과 결혼하여 바알 종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솔로몬도 이방 여인들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 어떤 배우자를 만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좋은 만남을 위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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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6-01)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엘라

열왕기상 15장 25절-16장 14절


자녀를 양육하다보면 자녀에게 경고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가 성장하면서 좋아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 중에 사탕과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무조건적으로 많이 공급해 주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너무 많이 먹으면 치아가 상하기 때문에 많이 줄 수 없습니다. 자녀가 계속 요구할 때, ‘사탕과 초콜릿을 너무 많이 먹으면 치아가 상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자녀가 부모의 경고를 받아들면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한다면 언젠가를 혹독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제2대 왕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이 걸었던 죄악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심판의 말씀이 바아사와 그 가문에도 전달되었습니다. 후에 아들 엘라가 왕위에 오르나, 병거 지휘관인 시므리에게 암살당합니다. 시므리가 바아사와 관련된 모든 이를 진멸함으로써 바아사 왕조는 막을 내립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이처럼 계속 성취됩니다.

 

이스라엘 왕 바아사(15:33-16:7)

 

 

33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디르사에서 모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십사 년 동안 다스리니라 34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7:1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임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이르시되 2내가 너를 티끌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죄로 나를 노엽게 하였은즉 3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4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그에게 속한 자가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더라 5○바아사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권세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6바아사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디르사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엘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7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에게도 임하사 바아사와 그의 집을 꾸짖으심은 그가 여로보암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며 그의 손의 행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음이며 또 그의 집을 쳤음이더라(15:33-16:7)

새로운 왕조를 열어 북 이스라엘을 다스린 바아사는 여로보암과 나답의 최후를 보고 교훈을 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아사도 여로보암의 길을 따르는 어리석은 왕에 불과했습니다.

(1) 이스라엘 왕 바아사(15:33-16:7)

유다 왕 아사 제3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바아사(주전 908-886년)도 이전 왕들처럼 악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잇사갈 족속인 그는 북이스라엘의 강력한 에브라임 지파의 여로보암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았습니다(15:27-28). 당시 남유다는 하나님으로부터 견고함을 보장받은 다윗 왕조와 유다 중심의 두 지파로 형성되었으나, 북이스라엘은 열 지파에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지파가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사시대처럼 지파 간의 경쟁과 갈등이 여전했습니다. 그렇다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두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북이스라엘도 모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며(14:7; 16:2), 왕들도 다 그의 보살핌 아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부암을 첫 왕으로 세우며, 다윗처럼 순종하면 다윗에게 지어준 견고한 왕국을 그에게도 줄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11:38). 따라서 여로보암이 순종했다면 북왕국도 견고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수차례의 경고에도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왕조는 파멸했고(15:29-30), 약속된 견고한 나라는 현실화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바아사를 왕으로 삼아 그와 그의 지파와 나머지 백성에게 다시 순종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아사를 특히 티끌에서 높여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습니다. “티끌”(16:2)은 ‘흙’, ‘먼저’의 뜻으로, 미천한 신분이나 가문을 가리킵니다. “주권자”는 앞서 사울, 다윗, 여로부암에게 적용된 칭호로(삼상 9:16; 삼하 7:8; 왕상 14:7), 바아사의 승격된 지위와 하나님의 호의를 부각합니다. 왕이 된 바아사는 다르사에서 24년(실제는 23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디르사가 왕의 통치 성읍과 매잘지로 소개된 것(15:33;16:6)은 수도가 세겜에서 디르사로 공식 이전됐음을 뜻합니다. 여로보암 가문을 전멸시키고 새 왕조를 시작한 바아사는 여로보암처럼 장기간 통치하는 특혜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로보암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신도 여로보암의 죄의 길을 따랐고, 백성을 우상숭배로 이끌어 죄를 더했습니다. 아람의 벤하닷과 동맹을 맺은 일(15:19) 또한 열방을 신뢰한 그의 죄를 고발합니다. 이로써 바아사의 이름은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한 왕’의 명단에 올랐습니다. 결국 바아사의 죄에 진노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그에게 선언되었습니다. 아히야를 통해 여로보암과 가문에 대한 심판을 전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를 보내셨습니다. 바아사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왕이 됐지만, 여로보암을 따라 자신과 백성을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죄의 고발은 심판의 정당성을 확인시켜줍니다. 그에게 임할 심판(16:3-4)은 여로보암에게 선포되고 성취된 징벌(14:10-11)과 동일합니다. 이는 또한 바아사가 여로보암 집에 저지른 행악이기도 합니다(15:29). 바아사에게 속한 모든 남자가 죽임당하고, 그들의 시신은 오물 같이 성읍과 들에 버려져 개와 새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 대의단절과 시신의 유기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심판임을 암시합니다(신 28:26). 바아사의 남은 행적과 권세는 역대지략에 따로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와 그에게 임할 심판은 한 번 더 기록됩니다(16:7). 이는 그에게 임할 심판이 정당하며, 그 심판이 확실히 임할 것을 재확증합니다. 그의 죄는 첫째, 여호와의 눈에 행한 모든 죄입니다. 원문은 이 악행을 ‘손의 행실로 하나님을 노엽게 한 일’과 ‘여로보암 집 같이 된 일’과 연결시킵니다. 이는 바아사 개인이 여로보암이 세운 잘못된 예배를 따르고 우상을 숭배했으며, 백성까지 같은 죄로 인도한 점을 가리킵니다. 둘째, 그가 여로보암의 집안을 몰살한 죄입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을 암살하고, 여로보암과 관련된 모든 생명을 다 제거한 일(15:27-29)은 그가 책임져야 할 죄입니다.

(2) 이스라엘 왕 엘라(16:8-14)

엘라(주전 886-885년)로 이어진 바아사 왕조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여로보암 왕조와 똑같은 종국을 맞습니다. 실제 두 왕조의 파국은 유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엘라는 유다의 아사 왕 제26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디르사에서 2년(실제는 1년)을 다스렸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은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과도 같습니다. 엘라의 통치 내력으로는 그가 시므리에게 암살당한 사건만 나옵니다. 그날 엘라는 왕궁 책임자인 아르사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습니다. 왕이 신하와 술자리를 갖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술자리를 빌미로 정국을 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에 3:1-4). 그러나 엘라가 수도 디르사에 남아 유흥에 취했을 때, 군대지휘관 오므리와 백성들은 목숨을 걸고 깁브돈에서 진 치고 있었습니다(15). 깁브돈 공격 시 나답이 암살당한 것처럼(15:27-28) 엘라의 죽음도 깁브돈과 연결성을 지닙니다. 군대가 출정해 있는 동안 왕이 수도에 머무는 데는 왕 개인과 나라의 안전을 꾀하거나, 군사 전략을 계획하고 조정하는 등 군사, 정치, 행정적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엘라가 남아서 과음하고 취한 상태라는 것은 왕으로서 불성실하고 부적절한 행동임을 폭로합니다. 마치 요압과 온 군대가 암몬과 전쟁 중이었을 때 다윗 왕이 저녁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일과 이후 밧세바와 간음한 일(삼하 11:1-2), 에스더 당시 유다인 진멸 조서가 발행된 날 아하수에로 왕이 하만과 연회를 벌인 일에 3:15)과 유사합니다. 엘라가 술에 취했다는 것은 그가 무방비 상태임도 귀띔합니다. 따라서 시므리가 그를 쉽사리 진압하고 암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므리는 엘라의 신하로서 병거 절반을 맡은 지휘관이었습니다. 오므리와 군대가 전장에 나갔으므로, 시므리와 병거 부대는 왕궁을 수비했을 것입니다. 시므리는 직임 외에 혈통이 소개되지 않아, 바아사보다 더 미천한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로보암(11:29-39)이나 바아사(16:1-2)와 달리 선지자를 통한 여호와의 승인도 기록에 없습니다. 왕가의 세습이 아닌, 왕의 신하가 왕좌를 차지한 것은 솔로몬의 노역 감독관 여로보암(11:26)이나 나답의 군인이었던 바아사(15:27)와 같습니다. 특히 암살과 숙청을 자행한 바아사의 등극 행태와 유사합니다. 또한 같은 때에 오므리(16:16)와 디브니(16:21)도 백성의 지지로 왕이 됩니다(16:21). 이처럼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정은 몹시 불안정하고 위태했습니다. 한편 시므리는 엘라만 아니라 바아사 가문 전체를 몰살했습니다. 바아사가 여로보암 집안에 행한 대로 시므리도 바사아에게 속한 남자(‘벽에 오줌을 누는 자’)를 다 없앴습니다. 친구까지 죽임으로써 후환을 없애는 데 바아사(15:29)보다 더 치밀했습니다. 예후의 예언처럼 바아사와 관련된 자들의 시신은 여로보암 가문 사람들처럼 매장되지 못하고 성읍의 개나 들의 새의 먹이가 되었을 것입니다(16:3-4). 이로써 예후를 통해 바아사에게 선언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바아사 왕조의 파국은 여로보암 왕조처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바아사의 모든 죄”, “엘라의 죄”, “그들이 범죄하고”(16:13) 같은 어구가 이를 부각합니다. 이들 죄에 대한 언급은 바아사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합당했음을 함축합니다. 특히 이들이 이스라엘을 “헛된 것들”로 이끈 일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사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헛된 것들”(하발림)은 ‘우상들’을 가리킵니다. 원래 ‘입김’, ‘수증기’ 등의 뜻으로 공허함, 허무함, 일시적임, 무가치함을 비유적으로 함축한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 32:21에서 “허무한 것”으로 번역되어, 우상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이 숭배했던 신들이 ‘가증한 것’, ‘귀신’,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 ‘새로운 신’, ‘그들의 선조들이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임을 상기시키셨습니다(신 32:16-18). 하나님의 백성이 헛된 것들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 즉 지각없는 열방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를 격발하여 자기 백성을 멸하겠다고 하셨습니다(신 32:21-22).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에 계속되는 한 이스라엘은 점점 더 멸망에 가까워질 뿐입니다.


성경과 역사에서 보고 베운 교훈을 잊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겠습니다. 교만한 왕 나답과 엘라의 집은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진토에 묻히지 못할 만큼 비참한 자리로 떨어집니다. 오늘 귀하게 쓰임 받는 내가 내일도 그 충성된 자리에 가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추억하며 살지 말고 오늘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찬미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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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5-03)


이스라엘의 나답 왕

열왕기상 15장 25-32절


개혁은 옷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본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말씀의 권위가 회복되게 하는 일입니다. 편하고 익숙한 것이 때로 본질을 왜곡하는 가장 위험한 장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존의 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 뿌리내린 고질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회자와 성도가 함과 지혜를 모아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여로보암과 그의 왕조에 선포된 여호와의 말씀이 나답 대에 성취됨으로써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다시 증명됩니다. 여호보암의 아들 나답은 부친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도 부친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습니다. 나답 자신도 죄를 지었고 백성을 죄로 이끌었습니다. 결국 그는 잇사갈 족속의 바아사에게 암살당하고 맙니다. 바아사가 나답만 아니라 여로보암과 관련된 모두를 죽임으로써 여로보암에게 예고된 여호와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집니다.

 

이스라엘 왕 나답(25-32)

공동체에 뿌리내린 악은 쉽게 하라지지 않고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우리 삶에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우리 각 개인, 가정, 학교, 사회에서 교묘하게 이루어지는 우상숭배는 빨리 해결해야 할 생각한 문제입니다. 우상숭배를 조장한 선대의 정책을 조금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심판에서 조금도 배운 바가 없습니다.

25유다의 아사 왕 둘째 해에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26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 27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그를 모반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그를 죽였으니 이는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이더라 28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 29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실로 사람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30이는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로 말미암음이며 또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엽게 한 일 때문이었더라 31나답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2아사와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으니라(25-32)

여로보암의 아들 나다이 대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그의 통치는 불과 2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치세 기간 동안에도 그는 아버지의 실수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경고를 새겨듣지 않고 자기도 범죄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도 범죄하게 하는 길을 따랐습니다.

(1) 나답의 통치와 평가(25-26)

유다의 아사 제2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나답(주전 909-908년)은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한 자’로 평가됩니다. 그의 통치 기간 2년은 실상 1년 이내입니다(15:18). ‘여호와의 눈에 악’은 ‘여호와의 눈에 정직함’(11:33; 15:11)과 반대되는 행동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 사는 것을 뜻합니다. 특히 나답의 악은 부친 여로보암의 죄를 따른 데서 더 부각됩니다. 그는 여로보암의 길로 걸었고,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그 죄 중에 행했습니다. 유다 왕들에게 ‘다윗’이 선한 왕의 기준이 되었듯, 이스라엘 왕들에게는 ‘여로보암’이 악한 왕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도 다윗의 모범을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여로보암에게 왕권을 약속하시며, 이스라엘의 분열 원인으로 솔로몬이 다윗의 길로 걷지 않았기 때문임을 하나님은 확실히 언급하셨습니다(11:33). 덧붙여 그에게 다윗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길로 걷고, 하나님의 눈에 정직한 일을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11:38). 그가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세운 것 같은 견고한 왕조를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11:38). 그러나 여로보암은 다윗의 길을 버렸고, 도리어 이전 모든 이보다 악을 더 행했습니다(14:8-9). 그렇다면 나답이 따른 ‘여로보암의 길’,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죄’(26)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여로보암은 그동안 이스라엘 역사에 계속되던 하나님을 향한 예배, 이와 관련된 규례들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마음대로 바꾸고 변질시켰습니다(12:25-33; 13:33). 북이스라엘 백성이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도록 여로보암은 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께서는 소의 형상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금송아지들이 ‘이스라엘 조상을 애굽에서 올라오게 한 신들’이라며 그것들을 마치 하나님의 형상인 것처럼 포장하여, 백성들을 유혹했습니다(12:28). 이는 아론이 출애굽 백성의 소요를 막기 위해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그들을 혼란에 빠뜨린 것과 유사합니다(출 32:1-6).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지적하셨듯이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는 자기들을 위해 부어 만든 소 형상이며, 만든 행위는 하나님의 길에서 떠난 부패한 행동이었습니다(출 32:7-8). 여로보암이 만든 두 금송아지의 실체 또한 ‘다른 신’이며 ‘부어 만든 우상’이었습니다(14:9). 이 두 사건은 소 형상을 만든 동기와 논리가 결코 용납되지 못하며, 금송아지가 결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확실히 정리해줍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들을 벧엘과 단에 놓아 예배의 장소로 지정했고, 여러 산당을 지었습니다. 이 장소들로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과 성전을 대체했습니다. 또한 레위 지파의 아론 자손에게 주어진 제사장 직분을 아무 백성에게나 줌으로써 하나님의 규례를 변질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절기와 날짜를 마음대로 바꿔 자신의 신을 섬기는 날로 제정했습니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변경한 이 모든 것을 본인이 나서서 지켜 행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까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서 떠나 우상숭배와 죄악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여로보암의 죄를 언급할 때마다 그의 죄만 아니라 백성을 죄짓게 한 죄를 덧붙입니다(26,30; 16:19,26). 그가 악영향을 끼친 대상에는 자신의 아들들도 포함되었습니다. 나답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죄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악영향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선을 품은 아비야가 있었습니다(14:13). 이는 누구든 자신의 악행을 부모나 지도자의 죄 탓으로 돌릴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여호와의 눈에 선과 악의 길을 가는 것은 각자 본인의 선택이며, 이에 대한 책임이 뒤따릅니다.

(2) 바아사에게 암살된 나답(27-30)

나답은 바아사에게 암살당함으로써 죄에 대한 심판을 받습니다. 당시 나답은 자신의 군사들과 함께 블레셋에 속한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원래 단 지파의 땅으로, 레위 지파의 그핫 자손에게 분배된 성읍이었습니다(수 19:44; 21:20-23). 그러나 당시 블레셋 수중에 있었으므로 나답이 이곳을 도로 뺏고자 했습니다. 깁브돈은 디르사에서 남서쪽 80킬로미터 정도로 추정되며, 예루살렘 서쪽으로 32킬로미터, 제셀에서 서쪽 5킬로미터에 위치했습니다. 게셀은 솔로몬이 이집트인 아내에게서 결혼 예물로 받은 곳을 요새화한 성읍입니다(9:16-17). 이곳은 블레셋 및 애굽, 아람 등의 침입로였습니다. 깁브돈이 이 게셀에 가까이 위치했고 약 25년 후 엘라 왕 때도 깁브돈을 재탈환하려 한 점을 참작하면, 이곳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국경을 경계하고 감시할 수 있는 요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깁브돈에서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나답을 암살했습니다. 그는 깁브돈을 포위했던 “온 이스라엘”(27), 즉 나답의 군사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부친 아히야는 에브라임 실로 출신의 아히야 선지자(29: 11:29; 14:2)와 동명이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아사를 ‘티끌에서 높인 자’로 부른 점(16:2), 시므리(16:9)나 오므리(16:16)와 달리 군사적 직임이 소개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출신이 낮은 자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잇사갈 족속에는 사사 돌라가 있었으며(삿 10:1-2), 그 외에는 크게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 없었습니다. 바아사는 나답 왕이 군사들과 함께 있을 때 반역을 일으켰고, 다른 경쟁 세력이나 군대의 반격 없이 왕좌에 오릅니다. 그는 유다 아사 왕 제3년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24년 동안 다스렸습니다(15:33). 아사와 종종 전쟁을 벌여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습니다(15:16-21). 이런 점들을 종합해보면, 바아사는 군사력과 지도력을 소유한 인물로 유추됩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승인을 얻은 자였으므로(16:2) 백성의 지지를 얻었을 것입니다.

왕좌에 오른 바아사가 여로보암 가문을 진멸함으로써 하나님의 종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여로보암에게 선언된 심판의 말씀(14:10-11)이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 수 차례 경고를 통해 죄의 심판이 있을 것을 알려, 그가 회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죄를 지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짓도록 이끌었습니다. 결국 그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의 심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바아사가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쳤고, 모든 생명을 진멸했다는 기록(29)은 여로보암 가문의 남자가 성읍이나 들에서 다 거름처럼 쓸어버림을 당하여 개와 새의 먹이가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병으로 죽은 아비야가 백성의 애도 속에, 적정하게 장사된 것은 하나님께 품은 그의 선함과 하나님이 베푼 호의 덕분이었음이 마침내 증명됩니다(14:13). 한편 왕이 암살되고 새 왕조가 들어서는 상황은 바아사 이래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되풀이됩니다. 345년의 역사를 가진 유다에는 다윗 가문의 한 왕조만 존재했습니다. 반면 약 210년의 짧은 역사를 지닌 이스라엘에는 서로 다른 9왕조가 생겨났고, 19명(디브니 제외)의 왕 중 7명이 반역으로 암살당하며 왕좌를 잃게 됩니다. 이런 결과는 유다의 왕 19명 중 8명이 선한 왕으로 평가받은 반면 이스라엘의 19명은 모두 악한 왕으로 평가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선한 왕으로 인정받은 유다의 왕들도 모두 죄나 실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정직과 선이 왕조의 존속을 이루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유다에도 반역과 음모가 있었고 앞으로도 있으나, 그럼에도 다윗 왕조가 존속되는 것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인함입니다.

(3) 나답의 통치 종결부(31-32)

나답의 통치 종결부는 공식처럼 소개되며, 각각 유다와 이스라엘 제3대 왕인 아사와 바아사 사이에 전쟁이 지속되었음이 부가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15:16-21; 대하 16:1-6).


나답, 그는 선대로부터도 배우지 못했고, 하나님 말씀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머뭇거림을 온 가문과 나라는 회개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심판의 말씀은 결국 성취되었고, 말씀의 권능을 입증해 보였던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의 집에 단 한 명의 생명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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