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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7-02)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열왕기상 17장 8-24절


인생은 기쁨과 슬픔이라는 실로 얼기설기 짜인 융단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뻐할 때도 있고 예기치 못한 사고로 애통할 때도 있습니다. 인생에서 슬픔의 날을 만날 때, 그때에도 우리는 슬픔의 탄식을 믿음의 탄성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드리는 눈물과 비탄의 호소는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간절한 믿음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든 이방 땅에서든 그에게 순종하는 자들을 돌보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바알의 성읍인 시돈의 사르밧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엘리야를 공궤할 자로 지목한 자는 아주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말씀에 순종한 엘리야와 여인의 집에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그 후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죽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아이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8-24)

비록 우리가 다 헤아릴 수는 없을지라도 인생길에서 맞이하는 모든 상황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험난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을 때가 바로, 모든 상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바랄 때입니다. 인생의 불확실함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올려 드리는 기도입니다.

8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17○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8-24)

사르밧 과부는 자신의 아들이 않다가 죽게 되자 비탄에 잠깁니다. 엘리야는 아이의 시신을 다락으로 옮겨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살려주시고, 여인은 이 일을 통해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1) 엘리야와 과부 식구를 먹이신 하나님(8-16)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시작된 후에도 계속 엘리야를 돌봐주십니다. 2절에서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9). 하나님은 그를 시돈의 사르밧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비가 내리지 않아 그릿 시내가 말랐으므로, 엘리야를 다른 곳으로 보내 공급하시려는 의도입니다. 시돈은 가나안의 북동쪽이자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베니게 왕국의 도시입니다. 요단 동편의 그릿 시내에서 130킬로미터 이상인 먼 거리입니다. 게다가 그곳은 이세벨의 고향이며, 부친 엣바알의 통치 지역으로, 바알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16:31). 당시 이세벨은 바알 숭배를 강요하고 여호와의 선지자를 죽였으며, 아합은 엘리야를 찾아 수색전을 펼쳤습니다(18:4,10).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엘리야를 바알 숭배지로 보내는 일은 인간의 허를 찌르는 책략입니다. 그릿 시내에서 까마귀를 이용하여 엘리야를 먹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엘리야를 공궤할 대상으로 사르밧의 한 과부를 정하셨습니다. 까마귀에게 명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과부에게도 엘리야에게 음식을 주라고 명하셨습니다(20). 이번에도 하나님의 명령은 미래에 할 일(‘명령할 것이라’)이 아닌 이미 완료된 일(‘명령했다’)로 나와, 그의 능력을 부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엘리야를 이방 과부에게 보내셨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에게 지적하셨듯이, 당시 이스라엘에도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눅 4:25-26).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완악하여 하나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공급과 축복은 이방 여인과 가족에게 돌아갑니다. 바알의 풍요를 기대하는 자들은 기근 속에 허덕이나, 하나님의 매일 양식은 엘리야만 아니라 말씀에 순종한 이방 여인 가족에까지 확대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에 순종하여 사르밧으로 갔습니다. 수배령이 떨어진 상황에서 그가 먼 곳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호 덕이었습니다. 그런데 반전은 기근을 피해 도착한 바알 숭배지에도 가뭄과 기근이 심각했으며, 엘리야의 숙식을 맡게 될 과부는 풍족한 양식은커녕 자기 가족 먹을 것도 없는 처지였다는 점입니다. 엘리야가 성문에 도착했을 때 과부는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성문은 많은 사람이 출입하는 곳이라, 남들이 떨어뜨린 땔감을 주울 수 있는 장소입니다. 또한 성문은 엘리야처럼 나그네들이 성읍 주민들에게 초청받아 숙박할 기회를 얻는 장소였습니다(창 19:1-3; 삿 19:15). 엘리야는 그녀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인인지 알기 위해 그릇에 마실 물을 조금 갖다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장면은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갔을 때(창 24:13-14)를 상기시켜, 이 여인이 하나님께서 지목한 과부임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요청에 응하여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가자, 엘리야는 그녀를 다시 불러 빵 한 조각도 함께 청합니다. 요청에 당황한 여인은 자기에게 빵이 없으며, 식량이라고는 통에 곡식 가루 한 움큼, 병에 기름 조금 뿐임을 밝힙니다. 원래 그녀의 계획은 땔감 두어 개를 주워다가, 남은 재료로 마지막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이 말을 하면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12)을 언급하는데, 이는 엘리야가 자기 신분을 이미 밝혔음을 암시하며, 여인의 말이 진실함을 주장하는 의도입니다. 여인의 형편을 들은 엘리야는 두려워 말라며 그녀를 위로합니다. 그러더니 예상 밖에 자기를 위해 작은 빵 하나를 먼저 만들어 오고, 그 후에 그녀와 아들의 빵을 만들라고 명합니다. 이 명령은 앞서 10-11절의 “청하건대”를 수반한 ‘요청’이 아닌 ‘명령’입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하면, 여호와의 말씀에 가루 통이 바닥나지 않고 기름병이 줄지 않을 것이라 약속합니다. 처음 만난 이방인의 이런 말은 뻔뻔한 속임수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여인은 그가 시킨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야를 통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여러 날을 먹어도 가루와 기름이 계속 채워졌습니다. 마지막 식사를 하고 죽기를 기다리려 했던 여인은 순종을 통해 음식과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꼐서는 바알의 성읍에서 그의 권능을 나타내며 순종하는 자들을 돌보셨습니다.

(2)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하나님(17-24)

하나님께서는 양식 문제를 뛰어넘어, 이방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리심으로써 그가 생명의 주관자임을 드러내십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있어 엘리야의 체류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기적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만 일어나는 법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곡식 가루와 기름을 계속 공급받고 있던 중여인의 아들이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품에 안을 수 있을 정도(19)의 어린 나이로 짐작됩니다. 아들의 병세는 심히 악화되었고, 결국 숨이 끊어졌습니다. ‘숨이 남지 않았다’(17)는 표현은 아이의 죽음이 확실함을 나타냅니다. 여인은 이방 선지자 엘리야를 집으로 들인 것이 아이의 병과 죽음의 화근이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시돈인인 그녀는 바알을 숭배했을 터이므로 여호와의 선지자의 체류 자체가 바알의 노여움을 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과 아들이 양식을 공급받아 여태 생명을 부지해온 것은 헤아리지 못합니다. 여인은 엘리야 선지자의 존재로 자신의 다른 죄악들도 드러나고, 자기 죄 때문에 신의 징벌이 내렸나 싶어 괴로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녀는 급기야 엘리야가 그곳에 온 이유가 그녀의 죄를 기억나게 하고 아들을 죽게 하려 한 것이었냐고 따지며, 괴로움과 원망을 다 쏟습니다. 물론 여인이 이 일을 엘리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눈에 아들의 죽음은 사람의 힘으로 손쓸 수 없는 일이고, 남편을 잃은 과부로서 아이가 더 소중했을 터이므로, 이런 반응은 자연적이고 당연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녀가 아들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죄를 살핀 태도 자체는 병든 아들을 보고도 자신의 죄과를 기억하지 않은 여로보암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14:1-18). 실상 과부 아들의 죽음은, 나중에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게 된 자에게 설명하시듯(요 9:3), 아들의 죄나 여인의 죄때문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매개였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경우 아들 아비야의 질병은 여로보암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들이 위중했을 때 자신의 죄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선지자를 속여 아들의 생사를 알아내려고 술수를 쓰며 죄만 더해갔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기도할 특권이 있었으나 아들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아들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한편 엘리야는 여인에게서 죽은 아들을 건네받아, 자기가 거하는 윗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아이를 침대에 누이고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여인이 아들의 죽음을 엘리야 탓으로 돌렸듯, 엘리야도 처음에는 하나님께 자신이 체류하는 집의 과부에게조차(“또”로 번역됨, 20) 재앙을 내리셨냐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아이 위에 자신의 몸을 세 차례 뻗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마술이나 소생술의 연출이 아닌 자기희생과 간구의 한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엘리야는 또한 아이의 영혼을 되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은 하나님은 죽은 아이의 생명을 되돌려주셨습니다. 엘리야는 여인에게 ‘(눈으로) 보아라. 네 아들이 살아났다’(23)라며, 아이가 생명을 되찾았음을 확인시킵니다. 여인은 이제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함을 분명히 알았노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아이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은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이방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확증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또 이 사건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의 능력과 함께 시돈의 우상신 바알이 아닌 여호와가 생명의 주인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인생의 연약함과 불확실함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인생에서 슬픔으로 인해 탄식할 때가 있겠지만, 마침내 슬픔의 비탄을 기쁨의 탄성으로 바꾸어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올려 드린 우리의 눈물의 호소와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영광의 찬양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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