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열왕기상(18-01)


선지자 오바댜와 엘리야의 만남

열왕기상 18장 1-15절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과거 죄를 심판하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과 역경을 주시는 것은 과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장래에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기를 소망하기 위한 교훈으로 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역경과 시련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를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아합의 눈을 피해 그릿 시내로 가서 숨어 지내다 다시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여호와의 권능으로 살려내어 바알의 본거지에서 여호와의 이름과 능력을 알렸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여호와께서는 다시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며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과 일전을 준비하십니다.

 

다시 아합에게 가는 엘리야(1-2)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상황을 고려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극복하고 사명을 이루는 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1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2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1-2)

가뭄을 선언한 지 3년이 지난 후 다시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 아합에게 가서 보이라는 명령과 이제 비를 내리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아합과 이스라엘에게 내린 징벌의 시간이 끝나고, 아합과 결전을 벌이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둘 중 하나가 제거되거나 항복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10절의 오바댜의 말에 따르면, 아합은 그동안 엘리야를 죽이기 위해 온 세상을 다 찾아다녔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서 아합에게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사마리아로 돌아갑니다. 당시 사마리아는 기근이 심각했습니다. 이것은 가뭄을 극복하지 못하여 농사와 목축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섬기던 바알은 여호와께서 내리신 가뭄을 극복하지 못한 무능한 신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심각한 기근은 시돈의 사르밧에서 여호와의 도움으로 어려움 없이 산 엘리야와 과부 가족의 삶과 대조를 이룹니다. 결국 여호와만이 참 신인 것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를 구한 오바댜(3-6)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위협을 받을 때 사명을 망각하지도, 사명이란 명분으로 세상을 등지지도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세상에서 지닌 위치와 능력은 생명을 살리는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3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4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5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6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3-6)

여기서 오바댜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아합 궁의 왕궁 맡은 관료로 상당히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입니다. 이세벨이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의 공식 종교로 만들면서 이에 방해가 되거나 반대하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제거할 때 오바댜는 백 명의 여호와 선지자를 숨기고, 그들에게 먹을 양식과 물을 공급하였습니다. 4절에서도 ‘양식을 공급하다’라는 뜻의 동사 ‘킬칼’을 17:4,9과 동일하게 사용했는데, 엘리야가 그럿 시내에서 까마귀의 공급을 받거나 사르밧 과부의 집에 숨어 지내며 양식을 공급받은 것과 비슷합니다. 오바댜는 백 명의 여호와의 선지자들에게 까마귀나 사르밧 과부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선지자가 죽임을 당하고 기근으로 고생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기 사람들을 지키시고 먹을 것을 공급해주십니다. 아합은 이런 상황을 모르고 오바댜에게 물을 찾으러 나서자고 말합니다.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시내’라는 표현은 현재 이스라엘 땅에 모든 물이 말라버리고 가축들을 먹일 풀마저 사라져굶어 죽게 된 상황을 보여줍니다.

5절에서 ‘다 잃다’로 번역된 ‘나크리트’는 4절의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멸할 때’에서 ‘멸하다’로 번역된 단어와 같습니다. 이것은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제거하는 것과 이스라엘 땅에서 가축들이 제거되는 것이 관련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과 오바댜가 이스라엘 땅을 나누어 한쪽은 아합이 가고 다른 쪽은 오바댜가 가기로 정하는데, 오바댜는 지위가 높은 인물이며 아합이 그를 매우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알 숭배자 아합 밑에 있는 여호와의 종이 신뢰받는 고위 관료라는 것 자체가 여호와의 섭리입니다. 아합과 오바댜는 물을 찾기 위해 흩어져서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오바댜와 엘리야의 만남(7-15)

우리가 받은 사명은 획일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 다른 사명을 주시고 우리가 그 사명에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서로의 사명을 비교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사명을 무시하거나 질투하는 것은 사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러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받은 다양한 사명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이해하며, 다른 성도를 하나님 나라를 함께 함께 세워 가는 동역자로 여겨야 합니다.

7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난지라 그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8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9이르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10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11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나 12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13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백 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14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그가 나를 죽이리이다 15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7-15)

오바댜가 길을 가는 중에 엘리야가 우연히 그를 만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사르밧 성문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로 둘이 만난 것입니다. 엘리야를 만난 오바댜는 그를 알아보고 놀라서 땅에 엎드려 절하며 정말 엘리야인지 확인합니다.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엘리야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한 것으로,오바댜가 여호와를 신실하게 섬긴다는 또 하나의 징표입니다. 오바댜의 질문에 엘리야는 자신이 진짜 엘리야라는 사실을 알리면서, 너의 주인에게 가서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라고 대답해줍니다. 놀란 오바댜는 엘리야에게 자신을 아합의 손에 죽게 하려고 이런 명령을 하였다고 항의합니다. 그리고 10-14절에서 자신이 아합에게 엘리야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오바댜는 엘리야의 말을 듣는 순간 딜레마를 느꼈습니다. 아합은 모든 민족과 모든 왕국에 사람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았고, 만일 그곳에 없다고 하면 정말로 엘리야를 보지 못했다고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맹세는 만일 거짓말을 하면 아합의 보복을 받겠다고 신 앞에서 맹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찾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적의 소굴인 시돈에서 안전하게 거하게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바댜의 말을 통해 아합과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했고 엘리야는 도망 다녀야 할 상황인 것이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자신이 엘리야의 말대로 엘리야 있는 곳을 아합에게 보고했는데 여호와께서 그 후에 엘리야를 자신이 모르는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면, 자신은 아합에게 죽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바댜는 두 가지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합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엘리야를 숨긴다거나 엘리야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전하면 죽였습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찾기 위해 백성들을 위협하고 함부로 죽인 것입니다. 둘째, 엘리야에 대한 불신과 염려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지금 엘리야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엘리야의 개인적 만용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엘리야의 말이 개인적 생각이라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구하기 위해 엘리야를 이전처럼 숨기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바댜는 그동안 아합이 오바댜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여호와의 영이 그를 이끌어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아합을 이길 수 없기에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숨기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걱정을 말한 후에 자신을 살려달라고 요청하고 자신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실한 자라고 주장합니다.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했고, 특히 4절에서 화자가 말한 것처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 백 명의 여호와의 선지자를 굴에 숨기고, 물과 양식을 공급해왔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자신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있다는 증거를 내민 것입니다. 14절에서 다시 한 번 엘리야의 명령대로 행하면 자신이 아합의 손에 죽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말을 맺습니다. 오바댜는 아합 곁에서 아합과 이세벨의 무서움을 보고 겪었기에, 엘리야의 말에 대한 신뢰보다 아합의 응징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것입니다. 그는 언제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끝내실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고, 홀로 나타난 엘리야를 보면서 그의 능력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오바댜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에서 행한 기적들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에게 자신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구한 이야기를 못 들었냐고 물었지만, 정작 자신이 여호와의 놀라운 기적을 듣지 못하였고, 이제 어려운 상황을 간신히 이어가며 여호와의 힘과 기적에 대한 기억을 잊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어려움은 여호와를 배신한 것에 대한 여호와의 징벌이지만, 오바댜를 포함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며 부르짖던 사람들은, 혹시 여호와께서 바알을 못 이기시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돌보실 것이라는 믿음이 점점 약해져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오바댜의 말에 엘리야는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라고 선언하면서, 자신은 오늘 반드시 아합 앞에 나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엘리야가 여호와께 ‘만군’, 즉 ‘군대’, ‘용사’라는 별명을 붙인 이유는 오바댜의 연약한 믿음에 힘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오바댜에게 여호와는 군대와 같은 힘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아합이나 이세벨은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은 여호와께서 바알에게 졌기 때문이 아니며, 이제는 여호와께서 일어나 이 상황을 정리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오바댜의 고생을 귀하게 보시고 그에게 가장 먼저 여호와의 일어나심을 알려주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던 오바댜에게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해 위로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숨어 다니던 엘리야는 드디어 본격적인 전쟁을 위해 아합을 만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사명은 주님의 역사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사명의 크기, 사명자의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사명을 주셔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충성입니다. 각자 삶의 자리가 다르듯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서로 다릅니다. 각자 삶의 현장에서 자기 사명에 온전한 헌신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