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22-04)
유다 왕 여호사밧의 통치
열왕기상 22장 41-53절
세상에는 많은 길들이 있습니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다니는 ‘항로’, 바다에는 배가 다니는 ‘해로’, 그리고 육지에는 ‘고속도로’, ‘차량전용도로’, ‘국도’ 그리고 ‘지방도로’ 등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길이 놓여진 형세에 따라서 ‘고빗길’과 ‘평탄한 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처럼 이름을 붙여지게 됩니다. 이와 달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에 따라 ‘선한 길’과 ‘악한 길’,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등으로 길의 형색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합니다. 신앙적으로는 ‘믿음의 길’과 ‘불신의 길’ 그리고 ‘배교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아합이 아람과 전쟁할 때 함께 참여한 여호사밧은 아람 정예군과 맞닥뜨렸지만,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돌아옵니다. 하지만 아합은 누군가 쏜 화살에 맞아 죽음을 맞이 합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계속 보내 심판을 경고하셨지만, 여호와께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아사 왕과 그의 아들 여호사밧은 여호와를 신실하게 섬기는 왕으로 소개됩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통치(41-50)
단순하게 생각하면 믿음 생활이 자신만의 신앙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부모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살펴볼 때, 단순하게 믿음의 모습이 자신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선배들의 신앙적인 열정과 헌신 그리고 목표를 바라보며 자라고 있습니다. 그만큼 기존 세대들의 신앙 태도가 매우 무겁습니다.
41이스라엘의 아합 왕 제사년에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니 42여호사밧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 43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44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하니라 45여호사밧의 남은 사적과 그가 부린 권세와 그가 어떻게 전쟁하였는지는 다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46그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47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 왕이 있었더라 48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49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50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41-50)
본문에서는 유다 왕 중의 한사람이었던 아사 왕의 아들인 여호사밧의 통치에 대해 간략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1) 등극(41-42)
여호사밧은 앞에서 기술한 북이스라엘 아합 왕이 전사한 아람과의 전쟁에 잠시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아버지 아사 왕과 함께 여호와 앞에 선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 아합 왕 제 4년(B.C 872)에 등극하게 됩니다. 여호사밧이 등극한 나이는 35세이고, 25년 동안 남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유다의 왕이 된 아들의 이름을 ‘여호람’, 그 의미는 ‘여호와는 높으시다’는 뜻으로 지었습니다. 아마도 여호사밧이 스스로 여호와를 찬양할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이 여호와를 높게 받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래서 그 아들에게 이 여호람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동시대를 살았고,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와 여호람이 왕위에 오를 때가지 살았습니다. 여호사밧은 기원전 872년부터 869년까지 3년 동안 그의 부친 아사 왕의 섭정 하에 있었고, 기원전 853년부터 848년까지 5년 동안 그의 아들 여호람과 함께 통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버지 아사 왕은 그가 늙어서 발에 병이 생겨 통치가 어려워지자 함께 통치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의 실질적인 통치 기간은 33년 정도 됩니다. 여호사밧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었습니다.
(2) 여호사밧 왕에 대한 평가(43-44)
여호사밧은 아사 왕과 함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사가 단호하게 우상숭배를 배격한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아사는 조상들이 만든 모든 우상을 없애고 태후가 만든 아세라 우상도 파괴하였으며, 태후까지도 폐위시켰습니다. 하지만 아사도 산당을 없애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열왕기 기자는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열왕기상 15:14)고 평가합니다.
여호사밧은 올바르게 행동하였지만 산당 제의는 그대로 허용하였습니다. 아사의 경우는 다른 것은 다 완전한데 산당이 유일한 결함이었다면, 여호사밧은 일반적으로 올바르게 행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산당을 없애지 않은 것을 아사 때보다 문제를 삼습니다. 백성들이 여전히 산당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였기 때문입니다. 산당은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 아니라 이방신을 위한 제단이며, 산당을 중심으로 바알이나 각종 우상들을 섬기는 일이 생겼습니다.
비록 아사는 산당을 남겼지만, 자신을 왕으로 세운 태후를 폐하면서까지 강력한 종교개혁을 시행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높이 평가하십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단행된 유다를 물려받은 여호사밧이 아버지의 개혁을 발판으로 더 앞으로 나아가 산당까지 없애 종교개혁을 완성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저자는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한 것을 언급하는데, 이것 역시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보기 어려운 결정입니다. 이전의 왕들과 달리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낸 것은 좋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왕들인 아합과 아하시야와 정략결혼을 통해 결혼동맹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은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와 자신의 아들 여호람을 결혼시켰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아람과의 전쟁에 참여해달라는 아합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아합을 도운 행동에 대해 역대하에서는 선지자 예후는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19:2)라고 비난합니다. 이후에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자신의 아들 아하시야가 죽은 후 다윗 자손을 모두 멸절시키고, 스스로 여왕이 되어, 6년 동안 유다를 다스리며 바알 신앙을 퍼뜨렸습니다. 악한 아합 가문의 영향력이 유다 가문까지 위태롭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결과를 통해 볼 때 결혼동맹으로 얻은 평화는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어렸습니다.
(3) 여호사밧의 업적(45-49)
이 부분은 기본적으로 죽음 공식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45절과 50절에서는 전향적인 죽음 공식에 해당하는 구문입니다. 여호사밧에 대한 왕의 업적이 다른 왕들보다 길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45절에서 언급된 다른 왕들과 다른 점은 그가 싸움을 잘하는 힘 있는 장수였다는 것과 전쟁을 했다는 것인데, 열왕기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역대하 20장에 따르면, 여호사밧은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여호와의 도움으로 크게 승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상에서는 이 부분은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46절에서 그는 아버지 아사 시대에 남은 이방 신전의 남창 제도를 없애버리고, 그곳에 일하던 남창들을 모두 근절시키고 있습니다.
에돔에 왕이 없고 총독이 왕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에돔을 유다에 부속시켜서 유다에서 총독을 보내어 다스렸다는 의미로 유다의 국력이 강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여호사밧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유다를 강성하게 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여호사밧은 다시스에서 선박을 제조하여 무역업을 하려고 시도합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하던 일이며, 솔로몬은 무역선으로 많은 금은을 실어 날랐습니다. 하지만 여호사박의 경우에는 이런 시도가 에시온게벨에서 배가 파선되어 실패합니다. 그러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자신과 합작으로 다시 배를 만들어 무역업을 하자는 제안한 히람과 유사합니다. 이것은 같이 무역을 하여 금전적 이익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열왕기에는 거절한 이유가 언급되지 않는데, 여호사밧과 아하시야는 결혼으로 동맹을 맺은 상태지만 경제적인 이익을 나눌 정도로 친밀한 관계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역대하 20장에서 이 사건에 대해 여호와께서 여호사밧이 악한 왕 아하시야와 교류하는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20:35-37).
역대기는 오므리 왕종조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는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과 교류하는 것까지 문제 삼지는 않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관계를 설명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4) 죽음 공식(50)
여호사밧에 대한 죽음은 전형적인 죽음 공식의 장례 부분입니다. 그가 죽어서 그의 조상 다윗 성에 안장되었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이어서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완성하고 유지한 인물이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북이스라엘과 달리 유다는 두 세대 동안 평화의 시대를 느렸습니다.
그가 남 유다의 왕위에 오른 것은 아합이 왕위에 오른 지 4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의 통치는 한마디로'여호와보시기에 정직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여호사밧의 통치는 그의 부친 아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사의 종교 개혁 정책을 기억합니다(15:9). 그는 그 땅에서 남색하는 모든 자들을 내어쫓고 우상들을 몰아내는 일을 하였었습니다. 여호사밧 역시 아버지의 그 같은 정책을 이어받아 아버지가 다 내어쫓지 못한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추방하였습니다(46절). 그러나 그 역시 부친과 마찬가지로 산당을 폐하지 아니하고 그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여러 산당에서 분향하게 함으로써 불완전한 종교 개혁을 하였습니다.
한편, 우리가 앞에서도 잠시 살펴보았지만. 그는 아버지 아사와는 달리 북 이스라엘과 평화하는 정책을 취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부친 아사와 북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일평생 전쟁이 있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15:16). 그때 유다는 아람과 손을 잡고 북 이스라엘을 견제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정책을 바꾸어 북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아람을 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47절에서 언급하는 에돔에 왕이 없었고 섭정왕이 있었다는 말은, 그 나라가 남 유다의 속국이었으며 그곳을 다스리는 왕의 임명을 유다가 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야곱과 에서에 관한 예언(창 25:23)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사밧의 또 다른 정책은 배로 무역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상선들을 건조하고 그것들을 오빌로 보내어 황금과 교환하여 오도록 하는 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시스의 선척은 장기간 큰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큰 배를 의미합니다. 이런 큰 배들이 지중해의 한쪽 끝인 이스라엘 지역에서 지중해의 다른 쪽 끝인 스페인의 다시스까지 운행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큰 상선들을 다시스의 선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여호사밧의 정책은 솔찍이 솔로몬이 실행했던 계획이었습니다(9:26) 이러한 정책은 여호사밧이 나라의 부를 극대화하려는 경제 정책을 썼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에시온게벨에서 그 배가 파선됨으로 인하여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역대하 20장 35절 이하는 이 사건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곧 여호사밧이 아합 뿐 아니라 그의 아들 아하시야와 연합 정책을 취하는데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아하시야의 통치(51-53)
믿음의 사람들은 경제적인 실익도 계산해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상태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며 교훈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다시 따라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51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52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53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51-53)
본 성경에는 열왕기가 두 권으로 나눠지지 않았습니다. 헬라어 번역서인 70인역에서는 두 권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마지막 부분에 소개되는 아하시야 왕의 이야기는 열왕기하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열왕기상에서는 그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가 나오고, 열왕기하에서는 구체적인 사건들이 언급됩니다.
(1) 등극의 공식(51)
남 유다 왕인 여호사밧이 유다를 지혜롭게 통치하던 17년, 북 이스라엘은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2년 동안 다스립니다. 여호사밧이 참여했던 아람과의 전쟁에서 아합이 죽은 후 바로 아하시야가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당히 짧은 기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병들어 일찍 죽습니다. 아합의 아들이 왕좌에 등극한 것은, 아하시야의 자신의 의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부친 아합이, 잠시 동안, 여호와 보시기에 겸비한 자세를 취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2) 아하시야의 업적(52-53)
아하시야는 미가야의 진실한 예언을 따라 그 부친의 비참한 죽음을 목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패역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 길을 아버지의 길과 어머니의 길이며, 또한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어머니 이세벨의 길을 따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아하시야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북이스라엘의 중심 종교로 바알 숭배를 하고 예배하였습니다. 그이 아버지가 했던 온갖 못된 행동을 그도 따라했다고 합니다.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파멸을 맞이하였던 것처럼, 그 역시 그 길을 걸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격동시키며 파멸을 재촉하였습니다. 유다의 여호사밧이 아버지 아사의 길을 따라가며 여호와의 축복을 받은 것과는 대조가 됩니다.
열왕기상을 통해서 서로 다른 두 왕국을 통해서 전혀 다른 두 행보를 지켜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남북 시대의 역사는 두 길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 길은 ‘다윗의 길’과 ‘여로보암의 길’, ‘신앙의 길’과 ‘불신앙의 길’에 대한 것입니다. 그 끝에서 번영과 쇠퇴의 결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앞에도 여전히 두 길이 있습니다. 당신의 선택과 당신이 아끼는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길은 어떤 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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