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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5-02)


유다의 아사 왕

열왕기상 15장 9-24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메시지를 주실 때, 대충 정당하게 전하지는 않습니다. 강한 메시지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특히 죄악 가운데 있을 때는 메시지가 강하고 무겁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항상 선명하기 때문에, 죄악에 대해서 분명하게 죄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는 ‘정당히’라는 표현으로, 세상에 죄악에 순종하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흰색과 검정색이 합해진 ‘회색지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아사는 다윗처럼 여호와의 눈에 정직하게 행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통치 전반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앙 개혁운동을 벌이는 등,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통치 후반에 이스라엘의 침략을 받자 아람의 원조를 구하는 죄를 짓고 맙니다. 아사의 삶은 서 있다고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며(고전 10:12), 넘어졌더라도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살도록 교훈합니다.

 

유다 왕 아사(9-24)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거나 좋은 것에 있는 작은 흠을 일컬어 ‘옥의 티’라고 합니다. 흠과 티가 없을수록 그 보석은 더 귀하고 가치 있는 보석이 됩니다. 신앙에서도 하나님께서 원하는 성도는 흠이 없는 아름다운 성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힘든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인내하시길 바랍니다.

9○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 제이십년에 아사가 유다 왕이 되어 10예루살렘에서 사십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11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12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13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14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 15그가 그의 아버지가 성별한 것과 자기가 성별한 것을 여호와의 성전에 받들어 드렸으니 곧 은과 금과 그릇들이더라 16○아사와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으니라 17이스라엘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와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 18아사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모두 가져다가 그 신하의 손에 넘겨 다메섹에 거주하고 있는 아람의 왕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19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가 있고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내가 당신에게 은금 예물을 보냈으니 와서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20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의 군대 지휘관들을 보내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벧마아가와 긴네렛 온 땅과 납달리 온 땅을 쳤더니 21바아사가 듣고 라마를 건축하는 일을 중단하고 디르사에 거주하니라 22이에 아사 왕이 온 유다에 명령을 내려 한 사람도 모면하지 못하게 하여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으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23○아사의 남은 사적과 모든 권세와 그가 행한 모든 일과 성읍을 건축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그는 늘그막에 발에 병이 들었더라 24아사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그의 조상 다윗의 성읍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9-24)

아사의 선동으로 아람의 벤하닷이 북구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바아사는 단과 이욘과 아벨마임을 포함한 중요한 교역회랑 지대를 일게 됩니다. 그 지역들은 모두 수리아와 페니키아 연안 성읍인 두로, 시돈, 막고 사이를 연결하는 선상에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의지한 아사(9-15)

아사(주전 910-869년)는 여로보암 제20년에 유다의 셋 번째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다스렸습니다. 통치 기간은 41년으로, 므낫세(55년)와 웃시야(52년)에 이어 세 번째로 깁니다. 그의 어머니로 소개된 마아가는 실제로는 압살롬의 손녀로서 아사의 할머니입니다(15:18의 참고). 부친 아비얌이 등극 3년 만에 죽었고, 아사의 통치 기간이 41년인 점을 생각하면 어릴 때 왕이 되어 조모 마아가가 섭정했을 것입니다. 마아가는 이후에 폐위되는 등 아사의 통치와 깊게 관여된 인물이므로, 모친 대신 소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사는 ‘다윗처럼 하나님께 순종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런 평가를 받은 유다 왕 8명 중 처음입니다.

12-13절은 재위 제15년의 신앙 개혁 운동(대하 15:10)을 소개함으로 그 평가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동시에, 우상숭배 근절과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여호와의 눈에 정직한 일’(11)임을 알립니다. 신앙 개혁이 있기까지 하나님의 큰 섭리가 있었습니다(대하 14-15장). 개혁은 전쟁에서의 승리,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격려, 북쪽 백성의 유입 등 군사, 신앙, 사회면에서 고무된 상황 속에서, 아사와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면서 일어났습니다. 첫째, 아사는 남색하는 자를 유다 땅에서 쫓아냈습니다. “남색하는 자”는 가나안 족속이 섬기는 우상 신전에서 예배 의식을 따라 매음하던 자들입니다. 아마도 다산 숭배와 관련하여 나타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이런 신전 창기들이 르호보암 당시 유다에도 존재했습니다(14:24). 약 300년 후 요시야 때는 이들이 여호와의 성전에도 있었던 만큼(23:7), 아사가 이들을 쫓아낸 것은 큰 성과였습니다. 둘째, 아사는 그의 선조들이 만든 우상을 모두 없앴습니다. 솔로몬은 이방 아내들이 섬기는 온갖 우상을 위해 산당을 만들고 분향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역에 우상숭배를 퍼뜨렸습니다(11:3-8). 르호보암 때도 유다 곳곳에 산당과 우상들이 즐비했습니다(14:23). 아사의 조모 마아가도 아세라 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13). 그러나 아사는 선왕들과 달리 우상이 예배의 대상이 아님을 각인시키고,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했습니다(대하 14:4). 셋째, 아사는 아세라를 숭배한 태후를 폐위했습니다. 친조모를 처벌할 만큼 아사의 신앙개혁 의지가 단호했습니다. 당시 아사가 장성했으므로 태후의 정치, 종교적 세력을 꺾으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사는 태후가 만든 우상을 잘라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태웠습니다. 한편 14절의 아사가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설명은 긴장을 자아냅니다. 그런데 실상 산당을 제거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대하 14:3,5). 이런 상충된 내용을 정리하면 14절은 아사가 산당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음을 뜻합니다. 열왕기 저자는 산당이 남아 있어, 아사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가 유다에 지속될 것을 전조로 알립니다. 또한 우상숭배로 인해 유다도 결국 멸망했음을 독자에게 상기시켜 경각심을 주는 의도라 볼 수 있습니다. 산당 문제는 남았으나, 아사의 마음은 평생 여호와와 온전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아비양은 부친의 전철을 따라 죄를 지었으나(3), 아사는 부친 아비암의 죄를 좇지 않았습니다. 아비암은 도리어 부친과 자신이 성별한 전쟁 전리품인 은, 금, 기명들을 여호와의 성전에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이 일은 이후에 소개되는 사건의 복선이기도 합니다.

(2) 벤하닷을 의지한 아사(16-22)

하나님을 의지했던 아사는 군사적 위기를 맞자 아람(시리아)의 벤하닷을 의지하는 죄를 짓습니다. 분열 왕국 이래 르호보암과 아비얌 그리고 여로보암 사이에 전쟁이 있었듯(14:30; 15:7) 아사와 바아사 간에도 충돌이 계속됐습니다(16). 솔로몬의 죄로 빚어진 왕국의 분열은 지파, 영토, 신앙의 분열만 아니라 이처럼 군사적 충돌과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아사의 통치 초기에는 전쟁 없이 평안했습니다(대하 14:1; 15:19). 그러나 제16년에 바아사(주전 908-886년)가 유다를 공격하여 라마(예루살렘의 북쪽 8km)까지 남하했습니다. 그곳을 요새화하고 국경으로 만들어, 백성의 유출을 차단하고 예루살렘을 공략하려는 전략입니다. 여로보암이 종교 제도를 변형한 것과 방식만 다를 뿐 백성과 나라를 잃을까 두려운 마음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12:26-27 대하 15:9). 아사의 41년 통치 동안 북이스라엘은 여섯 차례 바뀌고(나달, 바아사, 엘라, 시므리, 디브니/오므리, 다합), 왕조가 네 번 바뀌며 불안정한 정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와 같았습니다(14:15).

한편 예루살렘 코앞까지 밀어닥친 바아사의 침략으로 아사는 큰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세라와의 전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했으나(대하 14장), 이번에는 하나님을 갖는 대신 다메섹의 아람 왕 벤하닷 1세(주전 약 896-874년)를 찾는 어리석음을 보입니다. 다윗의 속국이었던 아람은(삼하 8:5-6) 솔로몬 대에 르손이 다메섹의 독립을 이루며 성장했습니다(11:24). 이미 아비암과 바아사가 아랍과 조약을 맺었고, 이제 아사까지 조약을 맺은 것을 보면(19), 솔로몬 이후 2~3대 만에 이스라엘과 아람의 판도가 역전됐음을 알려줍니다. 솔로몬의 배역의 후폭풍은 이처럼 이스라엘의 신앙과 정치적 평안에 치명적이었습니다. 독자들은 죄의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 지를 기억하며, 회개와 순종의 길로 가야 합니다. 아사는 예루살렘을 사수하기 위해 르호보암처럼(14:26) 성전과 왕궁합니다. 보물을 다 꺼내어 벤하닷에게 보냅니다.

부친과 자신이 하나님께 바친 모든 성물도 포함되었습니다(15). 아사는 벤하닷에게 부친과의 동맹을 상기시키며, 바아사와의 조약을 깨고 그를 치라고 요구합니다. 이처럼 왕들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택한 성읍이며 그의 임재가 함께함을 망각하고, 인간적인 힘으로 도성을 지키려 합니다. 벤하닷은 패권을 쥐고 양국 왕들을 저울질하며 자신의 유익에 따라 조약을 맺고 깨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아사의 요구대로 바아사와의 동맹을 깨고 군대를 보내 이스라엘 성읍을 쳤습니다. 아사가 보낸 예물도 많았겠지만,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이득이 컸기 때문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벤하닷 군대 장관들은 북서쪽에서 남하하면서 이스라엘 북부의 이욘, 단, 아벨벧마아가, 긴네렛 호수 주변 땅과 납달리의 온 지역을 쳤습니다. 이로써 다메섹에서 두로와 지중해로의 무역로를 뚫을 수 있었습니다. 벤하닷의 공격 소식에 바아사는 라마 건축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인 디르사로 돌아가 국정을 살폈습니다. 반면 아사는 온 유다에 강제 명령을 내려, 바아사가 라마의 건축 현장에 남긴 돌과 나무를 가져와, 예루살렘 북쪽 각각 16, 12킬로미터에 있는 게바와 미스바를 요새화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침입을 대비해 방비 성을 마련한 것입니다. 열왕기는 이 사건을 여기서 종결하나, 역대기는 이 일로 하나님께서 하나니 선지자를 보내 아사를 책망한 일을 후기로 기록합니다(대하 16:7-10). 하나니는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유다에 전쟁이 있을 것을 예고합니다. 그러나 아사는 하나님의 책망에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선지자를 옥에 가두고 백성을 학대함으로써 분풀이를 하며 죄를 더했습니다. 아사의 변질된 신앙은 순종의 삶에서 긴장을 늦추지 말고 겸손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3) 아사의 통치 종결부(23-24)

아사는 노년에 발에 병이 들어 죽었고, 여호사밧이 왕위에 오릅니다. 열왕기는 아사의 병만 언급했으나, 역대기에 따르면 그가 병들었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원들을 찾았음을 지적합니다(대하16:12). 아사의 삶은 이처럼 아쉽게도 순종에서 불순종으로 끝납니다. 이는 열왕기 청중과 현대 독자에게 각자를 돌아보게 하며 겸손히 하나님만 찾는 삶을 권유합니다.


우리 시대와 교회의 현실은 올바른 것을 꾸준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을 살피면서 일평생 하늘 하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이루어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처리하는 단호하게 결단할 수 있는 힘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변함없이 한결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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