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데살로니가후서(03-02)


복음을 따라 사는 삶

데살로니가후서 3장 1-16절


종종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 형식적으로 부탁하고, 다른 사람이 기도를 부탁해올 때 기도해주겠다고 말도 형식적으로 말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인에 대한 믿음이고 기대감의 표현인데, 기도 부탁이라는 핑계로 하나님께서 아니라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울은 질서 있게 행하고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주야로 일했습니다. 성도들은 이를 본받고, 게으른 자는 조용히 일하며 자기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다 낙심치 말고, 불순종한 자를 형제같이 권면해야 합니다. 바울은 평강의 주님이 그들과 함께하시길 원하며 편지를 맺습니다.

 

기도(1-5)

기도는 믿음의 사람에 대한 정체성을 지키게 하는 척도입니다. 기도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개입을 촉구하는 행위이며, 우리 자신의 한계를 긍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안전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미쁘신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굳건하게 하사 악한 자들로부터 지키실 것입니다.

 

1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2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3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4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5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5)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자신과 일행을 위한 기도를 요청한바 있습니다(살전 5:25). 그때는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이제는 구체적인 두 가지 기도제목을 서술합니다. 먼저 사역과 관련해 자신과 일행이 전하는 “주의 말”이 달음질하듯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역을 자주 달음질에 비유하곤 했습니다(고전 9:24: 갈 2:2; 빌 2:16). 사실 그들의 달음질의 결과가 지금 데살로니가 성도들입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같은 또 다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여전히 말씀을 들고 달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기도를 통해 성도들이 그 일에 등장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이 부당하고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주시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자신들이 위탁받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 늘 치열한 전투를 겪었던 사실을 언급했습니다(살전 2:24). 두 번째 편지를 쓰는 지금도 그런 위협 가운데 있습니다(살전 2:18: 3:7). 복음을 전할 때 모두가 환영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절과 물리적 저항은 다반사였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최전선을 달리는 사역자들을 위해 공동체의 기도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힘이 됩니다. 바울은 나중에 다른 공동체에 똑같은 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롬 15:31; 고후 1:8-11).

그런데 복음을 방해하는 악한 자들은 최전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데살로니가에도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늘 전투 가운데 서 있습니다.

 

기도를 부탁했던 바울은 동일한 내용으로 성도들에게 복을 빕니다.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자”로부터 그들을 건져주실 것을 강하게 확신합니다. 더불어 그들이 앞서 부탁한 전통을 잘 따라 행할 것도 확신합니다. 교회가 비록 치열한 영적 전투 속에 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시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바울은 주께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로 그들을 이끄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기원합니다. 비록 현실은 녹록치 않지만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인내를 온전히 배우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복음에 따라 사는 삶(6-15)

선한 사업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선한 사업 자체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상대방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자기 생각대로 완고한 윤리적 요구는 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무위도식하는 형제들을 떠날 뿐 아니라 사귐을 중단하여 부끄럼을 느끼게 하라고 합니다.

 

6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3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14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6-15)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형제 사랑과 관련해 ‘조용히 자기 일을 할 것’과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쓸 것’을 명령했습니다(살전4:9-12).

공동체 내에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그의 명령이 기대만큼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까? 그때보다 문제가 더 심각해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따라야 할 삶의 규범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공동체에 있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먼저 삶 자체가 무질서했습니다. 무질서는 앞서 언급된 주님의 미쁘심과 반대되는 성품입니다. 더욱이 과거 바울 일행이 보여주었던 질서 있는 삶(7)과도 반대됩니다.

두 번째 특징은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앞서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성도들에게 가르쳐준 전통(2:15)과 명령들(3:4)을 잘 지킬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 내 일부 성도들이 그 전통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왜 그들이 신앙 윤리에 반하는 태도를 취했는지 구체적 이유를 단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앞선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결해 그들이 주의 날이 이미 왔다는 생각에 더 이상의 노동을 포기할 정도로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와 무관하게 그들이 그저 생계를 위해 사회적 시스템에 기대어 복음의 가치를 저버리면서까지 불필요한 일에 참여하며 신앙인의 본분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쪽만을 직접적 원인으로 고집하기는 어렵습니다. 종말에 대한 오해도 일부 원인이 되었겠지만, 그들의 문제를 소위 시한부 종말론자들과 같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재림만을 열렬히 기다리는 과격한 태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들의 진짜 문제는 바울이 가르친 전반적인 신앙 전통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는 복음이 요구하는 신앙 윤리에 걸맞지 않은 대단히 무질서한 삶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안 한것(not busy)이 아니라 무질서하게 모든 일에 참견하는 바쁜 삶(busybody)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공동체 다움을 훼손하고 복음의 가치를 허무는 행위입니다.

 

바울이 이 문제를 교정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 일행이 최초 보여주었던 질서 있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전서에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살전 2:9). 바울 일행은 늘 복음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도록 질서 있게 행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주야로 노동하며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여기 8절에 “수고하고 애써”라는 말을 어떤 영어번역본(JB)에서는 ‘노예처럼 중압감에 사로잡힌’으로 번역하며 바울 일행의 노동 강도를 실감케 해줍니다. 그렇게 지낸 까닭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 신생 공동체에 어떤 폐도 끼치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일행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역자가 어떤 환대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도들의 형편을 잘 알았기 때문에 폐가 되는 일을 스스로 삼갔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올바른 본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곧 복음을 품은 자의 신실함을 삶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사도로서 누릴 마땅한 특권과 권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셨듯이 그 본을 따라 신생 공동체 성도들을 진심으로 섬기려고 자기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성도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자리하고 있는 모범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성도들에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10)고 자신 있게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종말을 사는 성도의 신앙 윤리를 몸소 보여주며 질서 있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이후 비교적 최근에 그 가르침에서 벗어나 무질서에 빠진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라고 직설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들에게 바울은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명령한다. 전서에서 언급한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손으로 일하기를 힘”(살전 4:11) 쓰고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살전 4:12)라는 명령을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선명한 신앙 전통과 윤리를 제시하며 그것을 따라 살도록 독려합니다. 물론 그런 삶이 쉽지는 않습니다. 고단함만 생각하면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이기에 즐겁고 명예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낙심하지 말라고 또다시 격려합니다. 바울은 단호한 명령으로 본 단락과 편지 본론의 결론을 맺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편지에 묵직하게 새겨 넣은 내용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거든 그 사람을 특정하여 부끄럽게 하고 교제를 단절하라는 대단히 강력한 징계 수준의 명령을 내립니다. 앞서 6절에서도 그런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런 권징은 궁극적으로 대상자를 회복하고 명예로운 자리로 되돌리는 목적이 있습니다.

 

축복(16-18)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권태로운 현실이나 고난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생각과 마음을 지켜줄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도 처할 줄 안 믿음의 선배였습니다.

 

16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17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18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16-18)

 

신생 공동체가 견디기에 만만치 않은 안팎의 도전이 있었지만, 바울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큰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이 평강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바울 역시 성도들이 끝까지 복음 안에 거하며 순종의 삶을 성실히 살아내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려면 성도들이 그의 편지를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며 친필 인증을 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글자에까지 자신의 사도적 진심을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축복의 말로 맺습니다.


기도는 희망의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의 표현이요, 무에서의 창조, 죽음에서의 살림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이며, 주님의 초월적 개입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불합리한 현실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강력한 능력임을 확신한 자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구독과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