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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21-02)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결말

사사기 21장 13-25절


 

지난번 한 드라마의 내용이 주인공이 비극적으로 죽어가는 상황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청자들이 드라마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주인공을 죽어서는 안 된다고 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슬프게 끝나야 할 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끝난 경우를 보았습니다. 대부분 드라마의 결말은 행복하게 끝나길 원합니다. 모든 소설, 연극 그리고 영화들을 보면, 결말이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주인공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happy ending”과 비극적으로 끝납니다. 사사기의 결말은 비극적인 결실을 맺습니다. 우리의 삶이 행복한 결말로 맺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반복되는 우상숭배를 비롯해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사기는 막을 내립니다. 사사기에 기록된 크고 작은 사건들과 죄악들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결과입니다. 사사 시대의 문제는 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강에 보았던 베냐민 지파에 대한 아내를 구하는 것도 인위적인 방법으로 구합니다. 이제 사사기의 결말을 보겠습니다.

 

더렵혀진 결혼 제도(13-18)

성숙한 성도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스스로 해결하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해결하려 합니다. 미숙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일들은 어떤 좋은 결과가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고민은 고민을 낳고 문제는 문제를 낳으면서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남아있습니다.

 

13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14그 때에 베냐민이 돌아온지라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 여인 중에서 살려둔 여자를 그들에게 주었으나 오히려 부족하므로 15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궐이 나게 하셨음이더라 16회중 장로들이 가로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꼬 17또 가로되 베냐민의 도망하여 면한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 18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13-18)

 

모든 이스라엘이 베냐민 지파 기브아 사람들의 잘못한 것을 징벌하기 모였습니다.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베냐민 지파를 전멸시켜 버립니다. 남녀노소를 칼날로 다 죽이고 그 베냐민 성읍까지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들을 주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마음이 평정심을 찾아보니깐, 자신들의 행위가 지나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동족인 베냐민 지파들이 불쌍했던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온 회중과 베냐민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림몬 바위에 숨어 지내는 베냐민 자손 600명(20:47)에게 사람을 보내 평화를 선언합니다. 그 동안 베냐민 자손은 죽을까봐 두려워했겠지만, 이제 상황이 호전된 이상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기브아의 죄인을 내놓으라고 요구받았을 때는 이기적으로 거절했으나(20:13-14),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순순히 기회를 잡습니다. 이들의 이기심 때문에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마땅한 죗값을 받았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다 죽었을 수 있지만, 이 600명 속에 끼어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은 베냐민 자손에게 야베스 길르앗의 젊은 처녀 400명(12)을 화해의 선물처럼 주어서 아내로 삼게 합니다. 베냐민 자손들이야 고맙겠지만, 가족과 친척을 다 잃고 강제로 남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 야베스 길르앗의 여인들의 심정은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관심은 남은 200명의 베냐민 자손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데만 있었습니다. 15절은 6절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해 뉘우쳤다’로 시작하면서 18절까지 다시금 앞의 1-2, 6-7절의 내용을 소환합니다. 반복된 내용은 베냐민 지파의 멸족위기와 여자의 부족 문제입니다. 여기서 이를 반복하는 목적은 200명의 여자를 찾을 다른 방책(19-22)을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한편 15절의 이스라엘의 뉘우침은 6절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6절에서는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지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현했지만, 이번에는 여호와가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 ‘틈’을 만드셨다고 설명합니다. ‘틈’이란 ‘파열’, ‘터짐’을 뜻합니다. 이 설명은 6절과 같이 백성들의 생각인지, 저자의 해석인지 모호합니다. 저자의 해석이라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분열이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리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백성의 생각이라면 2절에서처럼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스라엘 중 한 지파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번에는 이스라엘 회중의 장로들이 개입합니다. 이미 베냐민 여자들이 전쟁에서 멸절했기 때문에(16), 야베스 길르앗의 여자들을 구해준 후에도 여전히 200명이 모자랍니다. 장로들 또한 자기들의 딸을 베냐민의 아내로 주지 못하는 실정에 개탄합니다. 그렇게 하는 자들에게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18). 또한, 그들은 600명의 베냐민 자손이 그들에게 할당된 기업을 제대로 돌볼 수 있을지도 신경을 씁니다. 장로들의 염려는 얼핏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백성을 향한 관심과 긍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베냐민 여자들이 전쟁에서 멸절되었다.’라고 함으로써 자신들이 멸절의 장본인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저주받을까 봐 딸을 못 준다고 하면서, 다른 백성의 딸을 빼앗아 주려는 심보는 얼마나 고약합니까? 남겨진 베냐민 자손을 ‘베냐민의 도망자’로 부르는 것은 그들을 업신여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참조. 12:4). 백성들이나 지도자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상대 지파에 대한 무시와 비하의 태도입니다. 사사 시대의 장로들 역할은 여호수아 사후 생존했던 장로들이 이스라엘로 여호와를 섬기는 데 한몫을 감당한 것(2:7)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입다 당시 길르앗 장로들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 용사를 물색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권력을 홍정하여 입다를 길르앗의 머리로 고용했습니다(11:5).

본문의 장로들 또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 눈에 옳은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인간적인 머리를 짜내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방법을 찾아냅니다. 두 예를 통해 본 장로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이나 그들의 행위는 영적 지도자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우선순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참한 유괴사건(19-24)

왕이 없는 사람들의 행동은 자기 편할 때로 생각하고 행동함으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또 다른 비극을 낳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지도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도 되지도 않는 이상한 제안을 합니다. 본문에는 여호와의 절기에 이루어진 비참한 유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또 가로되 보라 벧엘 북편, 르보나 남편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길 동편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있도다 하고 20베냐민 자손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21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그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22만일 그 아비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쟁론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찌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23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 중에서 자기들의 수효대로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니라 24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곳을 떠나 각각 그 지파, 그 가족에게로 돌아가되 곧 각각 그곳에서 나와서 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더라(19-24)

 

이에 이스라엘 장로들은 부족한 200명의 여자를 얻어 줄 방법을 생각해 베냐민에게 가르쳐 줍니다. 베냐민 사람들의 범죄 함이 크니깐, 그들에게 화를 내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맹세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좋은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들의 방법은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잘못된 맹세를 했다면, 그 자리에서 고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한 지나친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장로들이 생각해낸 방법은 실로의 여자를 납치하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야베스 길르앗 해결책(7-11)보다 더 추악하여, 악행과 망령된 일의 표본을 만들어냅니다. 장로들은 실로의 명절을 여자 납치의 절호의 기회라 여겼습니다. 그들은 실로가 뻗엘의 북쪽, 르보나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가는 큰 길 동쪽이라며, 구체적인 지리를 알려줍니다.

이 실로에서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었습니다(19).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이나, 본문에서는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에서 절기 행사를 하는 것을 보면 장막절이거나 일반적인 포도 수확기의 축제(9:27)로 유추됩니다. 명절은 하나님의 구원을 묵상하고, 수확의 은혜에 감사하며, 서로 기쁨을 나누는 때입니다. 그런데 이런 절기를 노려 여자를 납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처사입니다.

장로들은 베냐민 자손에게 행할 일을 명령합니다(20). 먼저 실로에 가서 포도원에 숨어, 여자들이 춤을 추러나오면, 포도원에서 나와 각각 한 여자를 붙듭니다. ‘붙들다’의 의미는 사자가 몰래 숨어 있다가 먹잇감을 움켜쥐는 것과 같은 의미로서(시 10:9), 폭력과 강압성이 암시됩니다. 그 후 여자를 데리고 베냐민 땅으로 갑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장로들이 생각했던 것은 당시 이방인의 방법이었습니다. 그 주변에 이방인들은 자신들에게 여인들이 부족하면 ‘처녀 사냥’을 통하는 방법으로 여인들을 보충시키려 했습니다.

결국 베냐민의 강간죄를 벌하려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에게 다른 여인들을 납치하고, 강간하라고 명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이들의 행위는 자신의 딸과 레위인의 첩을 불량배에게 스스럼없이 내주려 했던 노인의 행동(19:24)과 똑같이 존중의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인은 기브아의 행위를 ‘망령된 일’(20:6,10)과 ‘악행’(20:12,13)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죄가 중하여, 죽여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20:13). 그러나 지금은 악행을 지시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딸들 가족이 일으킬 만한 시비에 대한 강구책까지 미리 마련해놓았습니다. 딸의 아버지나 형제가 이의를 제기하면, 장로들은 그들에게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는 맹세(18)를 이용하여 그들의 이의를 묵살할 계획입니다. 전쟁할 때, 그들이 베냐민에게 아내를 얻어주지 못했기에, 실로의 가족들은 딸을 보내는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 계획을 수용하면, 자진해서 딸을 베냐민에게 준 것이 아니므로 가족은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따르지 않으면 딸을 베냐민에게 자진해서 준 것으로 여겨 그들에게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실로의 가족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장로들의 이기적인 계획에 연루되어,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베냐민 자손은 장로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릅니다. 죄인을 넘겨주어 악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어겼듯이(20:13-14) 죄악을 저지르는 데는 기꺼이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23절의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아”는 원문에서 보면 세 동사가 나와 이들이 여자를 아내로 삼은 과정을 보여준다. 먼저 그들은 자신들의 숫자에 맞게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여자를 강제로 붙들었습니다. ‘붙들다’(가잘)는 ‘(강제로) 찢다, 뜯어내다.’의 뜻으로서 21절의 ‘붙들다’와 마찬가지로 강제성과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베냐민 자손은 강제로 붙잡은 각 여자를 들어 올렸습니다. ‘붙들다’와 ‘들어올리다’는 그들이 여자들을 납치하고 강간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후 자기들 기업으로 돌아와,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정착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온전히 유지하게 되었으므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각각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 돌아갑니다.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이스라엘이 각자 자기 처소로 떠난 것을 상기시킵니다(2:6).

 

사사기의 결론(25)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눈에 옳은 대로만 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도 자신이 좋은 대로만 주장하고 진행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죄악만 확대 재생산하고 죄질을 심화시킬 뿐이었습니다. 사사기의 기록된 내용은 실패라는 결론을 냅니다. 그러나 그 실패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씀입니다.

 

25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25)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은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다시금 상기시키며 마무리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의 부재는 왕정 시대를 내다보고 있긴 하지만, 왕정 시대를 환영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두지 않으면 그 자리에 내가 들어섭니다. 내 눈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은 ‘여호와의 눈에 악’입니다. 사사기가 주는 교훈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사기 기간 내내 되풀이 되는 타락상의 원인은 왕이 없었다고 합니다. 왕이 없었던 사사시대의 특징을 다시 한 번 밝히며 끝맺습니다. 그 왕은 지도자를 말하지만, 눈에 보이는 왕보다는 전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사니깐, 삶 자체가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이 사사 시대를 영화로 만든다면 “happy ending”이 아닌 비극적인 결말을 맺습니다.

 

사사기는 이러한 패역한 일이 일어난 이유를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로 정리합니다. 왕이 없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길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을 갖기도 하지만,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은 이런 적극적인 자유를 방종과 타락으로 바꾸어 살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제나 말씀의 법 없이 사는 생애의 비참함이 사사기가 주는 교훈입니다.


 

사사기를 마치면서 성도들에게 숙제를 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자서전(自敍傳)’을 써 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애를 지금까지만이 아닌 죽음까지 아니 하나님 앞에 서는 장면까지 기록해 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결말은 어떻게 마감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비극적인 결말이 아닌 해피엔딩으로 마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간 이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순종함으로 행복한 인생을 맞이하길 바랍니다. -사사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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