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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베스 길르앗을 진멸한 이스라엘

사사기 21장 1-12절


이 세상에서 쉽게 행동할 수 있겠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져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말(言語)입니다. 하긴 쉽지만, 그 결과는 대단히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좋은 의도로 하지만, 때로는 종종 오해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해서 해야 합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미스바에서 한 맹세 때문에, 그들은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두 가지 문제는, 하나는 달아난 600명(20:47)을 제외한 베냐민 지파의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써 베냐민 지파가 없어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스바에서 회의를 할 때 오지 않은 사람은 죽이기로 맹세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겠습니까?

 

벧엘로 올라간 이스라엘(1-5)

서양에는 ‘우유는 한 번 엎질러지면 담을 수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유만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말(言語)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은 뱉어내면 다시 담을 수 없는 것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맹세한 말이 나옵니다. 무슨 말이겠습니까?

 

1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2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성통곡하여 3가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하더니 4이튿날에 백성이 일찌기 일어나서 거기 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5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1-5)

 

사사시의 마지막 21장은 19-21장의 결말이자, 이스라엘과 베냐민 간 전쟁의 후속 이야기입니다. 내전 후 ‘베냐민 지파의 멸족’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언약 공동체가 붕괴 위기에 봉착했음을 인지합니다.

 

(1) 잘못된 맹세(1)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서 출전하면서 분노에 상응하는 맹세를 했습니다. 그들은 베냐민 사람에게 분노하면서, 그 감정에 상응하는 행동을 함께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들은 합당한 처벌과 복수의 기준을 생각하지 않고 감정에 따라 맹세했습니다. 그들의 감정과 맹세는 올무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와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베냐민 지파 중 남자 600명만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칼날을 피해 림몬 바위에서 넉 달째 거주하고 있었습니다(20:47).

그런데 문제는 미스바 총회(20:1)에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1)라고 맹세했던 것입니다. 이 맹세를 어기는 자에게는 저주가 선언되었습니다(18). 결과적으로 베냐민 지파의 멸족 위기와 딸을 줄 주 없는 상황이 상충하게 되었습니다.

 

(2) 벧엘에서 새로운 맹세(2-5)

 

예기치 못한 난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벧엘에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 목소리 높여 통곡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3)라고 울면서 기도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2-3). 그들이 울고 있는 것은 베냐민 지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도 이렇게 당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만 생기면 벧엘에 올라가 울곤 합니다. 베냐민과의 싸움에서 두 번 패배했을 때도 벧엘에 올라가 울었습니다(20:23.26). 그때와 마찬가지로 본문의 이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원망의 눈물이었습니다. 원래 베냐민 지파를 치는 계획은 그들이 자기 눈에 옳다고 여겨 세운 계획이었고, 하나님을 졸라 허락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베냐민 지파를 진멸하라고 명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베냐민을 치라고 허락은 하셨으나(20:18,23,28), 베냐민 지파를 진멸하라고 명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도 처음에는 기브아의 불량배들만 죽이려 했으나, 베냐민이 거절하자, 분노에 차 자신들의 감정대로 베냐민 지파를 멸절한 것입니다(20:13-14).

베냐민의 아내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과의 결혼을 금하셨지(신 7:3-4), 동족 간의 결혼을 금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솔한 맹세가 그들을 자가당착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처럼 베냐민과의 전쟁에서 전멸당해, 한 지파가 없어진 잘못을 자기들이 다 저질러놓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기도에 응답한 결과로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가 없어졌다며, 모든 화살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또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면서도,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자기들 식대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제사를 드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튿날 일찍 일어나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4). ‘번제’는 속죄, 헌신, 순종의 목적으로 드리며(레 1:1-17), ‘화목제’는 ‘화목’과 ‘천교’를 상징합니다(레 3장). 그러므로 이 두 제사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어그러진 관계를 바로잡고, 헌신을 다짐하는 제사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깨닫지 못한 채, 종교적 의식에 치중하고 맙니다.

어쩌면 곁으로는 이런 목적을 앞세웠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답 없는 하나님께 응답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알맹이는 없고 형식에만 익숙한 이들의 신앙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참고 6:28).

한편, 이스라엘의 기대와 달리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자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나서서 난관을 헤쳐나가려 합니다. 그러나 기왕에 베냐민 지파의 멸족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겼으니, 하나님께서 그 일을 처리하시도록 계속 간구하며 기다리는 게 지혜로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현듯 미스바 총회 때, 그들이 한 다른 맹세를 떠올립니다(5). 그 내용은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고,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않은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저주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맹세를 두 번째 해결책으로 삼을 작정이었습니다. 이번에 이스라엘 총회로 모인 것은 기브아의 악행이 출애굽 이후에 듣도 보도 못한 흉악한 범죄임을 인식하여, 그 악행을 함께 벌하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19:30). 그런데 이 목적을 알고도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 악행을 처벌하는 일에 무관심하거나 반대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큰 맹세’를 했다고 나오는데(5), 이는 언약 공동체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포기한 자들을 마땅히 죽음, 특히 ‘진멸’로 다스려야 한다고 결정한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런 자들이 있는지 물색하여, 그들을 처리함으로써 베냐민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회개와 화목을 앞세우지만, 제사 직후에는 거리낌 없이 다른 형제를 죽일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또한, 그들이 죽이려는 대상을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로 표현하여(5), 자기들 계획을 마치 하나님의 계획인 것처럼 선언합니다.

 

야베스 길르앗을 진멸한 이스라엘(6-12)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가운데 종교적 열심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 마음대로 행한 악행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런 파괴적이고 불법적인 행위가 없도록 늘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6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가로되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쳤도다 7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8또 가로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고 본즉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진에 이르러 총회에 참예치 아니하였으니 9백성을 계수할 때에 야베스 길르앗 거민이 하나도 거기 없음을 보았음이라 10회중이 큰 용사 일만 이천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거민과 및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11너희의 행할 일은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할 것이니라 하였더니 12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거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인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자지 아니하여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이 실로 진으로 끌어 오니라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6-12)

 

이스라엘 백성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이전의 맹세를 점검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림몬 바위에 숨어 있는 600명의 베냐민 사람들이 베냐민 지파를 부활시킬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음을 인식합니다.

 

(1)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 야베스 길르앗(6-9)

 

이스라엘 백성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이전의 맹세를 점검하기 시작합니다. 6절은 “이스라엘이 베냐민 자손에 대해 뉘우쳤다”로 시작하면서, 7절까지 앞의 1,3,5절의 내용을 반복합니다. 이런 반복은 내용상 매끄럽지 않지만, 이스라엘이 베냐민의 멸족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사안을 해결하는 데 절박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때 이스라엘의 뉘우침은 후회는 하지만 회개와는 다릅니다. 그들은 생존한 베냐민 자손이 대를 잇지 못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베냐민 지파가 끊어지게 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뉘우침 전에 베냐민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무자비하게 여자와 아이와 가축까지 쓸어버린 행동에 대한 뉘우침이 먼저 우선해야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남은 베냐민 남자들인 림몬 바위에 숨어 있는 600명의 베냐민 사람들이 베냐민 지파를 부활시킬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음을 인식합니다. 이 남은 사람들에게 아내를 제공한다면, 그 지파는 부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아내를 얻어줄 방법만 고심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딸을 베냐민의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여호와께 맹세했기 때문입니다(1,7). 자신들의 경솔한 맹세에 발목이 잡힌 것입니다. 사사 입다가 조급하게 서원하여 자신의 딸을 희생하게 된 사건을 상기시킵니다(11:30,34-39).

두 경우 모두 감정에 치우쳐 이 서원이 무슨 의미이며 어떤 여파를 가져올지 생각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입나다 이스라엘은 모두 경솔한 서원이나 맹세를 했으므로 이를 되돌리는 방도를 율법에서 찾거나 하나님께 여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늘 자기들이 방법을 강구하고 자기들이 결정합니다.

 

(2) 야베스 길르앗을 진멸한 이스라엘(10-12)

 

이때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가지 방책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미스바 총회에 모일 때 여호와 앞에 참석하지 않은 자들을 죽일 것이라 맹세하지 않았습니까?(5).

이제 그런 자들이 있는 지를 조사해서 나오기만 한다면 베냐민의 아내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그들을 죽인다고 맹세했으니, 그들을 죽이고 여자만을 남겨 베냐민에게 아내로 줄 계책인 것이다. 조사해보니 마침 야베스 길르앗에서 아무도 총회에 오지 않았음이 발견되었다. 야베스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있는 길르앗 산지의 북부로 추정된다. 총회에서 출석을 점검했을 때, 그들이 하나도 참석하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이에 이스라엘 회중은 큰 용사 12,000명을 야베스 길르앗으로 보냅니다. 그들에게 그곳 주민과 부녀와 어린아이를 다 칼로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지난 번 베냐민 사건 때는 베냐민 지파 모두에게 그런 악행이 일어나게 된 경위를 설명할 기회를 주었습니다(20:12-13).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이 왜 참석하지 않았는지 말할 기회도 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야베스 길르앗의 모든 남자, 남자와 동침한 여자를 ‘진멸하여 바칠 것’을 명했습니다(11). 그렇게 되면 남자와 동침하지 않은 처녀를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특수한 진멸 방식은 이전에 광야 바알브올에서 음행 사건이 있었을 때 실행되었던 방식입니다(민 31:17-18). 그때는 미디안 사람들을 진멸했으나, 이번에는 동족을 진멸합니다. 더구나 이번에는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기브아의 죄에 무관심하고 거부를 표명한 데에 대한 처벌이 아니기 때문에, 맹세의 원래 취지에서 벗어납니다. 단지 자기들의 조급했던 맹세로 파생된 다른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대체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도 베냐민 지파를 진멸하려 했던 자들이었으나(20:48), 이제는 베냐민이 멸족하는 것을 막으려고 다른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 같지만, 실제 방식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야베스 길르앗에서 젊은 처녀 400명을 얻는 데 성공합니다. 젊은 처녀들은 실로의 진영으로 끌려옵니다.

이때 성막이 있는 실로를 ‘가나안 땅’이라고 부른 것은 아마도 요단 동편(야베스 길르앗)에 대한 상대어로 요단 서편을 지칭하거나, 가나안 땅에 물든 이스라엘을 꼬집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딸을 베냐민 지파에 주지 않겠다고 한 서원을 어기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여인을 공급할 궁리를 합니다. 길르앗 야베스에서 한 사람도 미스바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만이천 명의 군인을 보내 맹세한 대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전멸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젊은 처녀 4백 명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이렇게까지 베냐민 지파의 멸망을 염려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나누어 주신 기업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언약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모든 족속도 그런 결과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예고하기 때문입니다. 분노의 현장에서 이루어진 성급한 맹세의 아픈 결과를 보며, 하나님 앞에 늘 진지한 자세로 살아가야 함을 되새겨 봅니다. 바른 결단을 위한 인내와 지혜로운 마음을 갖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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