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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8-03)

 

 

 


포장된 욕망, 노골적인 욕망

사사기 8장 22-35절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감추어진 마음을 볼 방법이 있습니다. 행동이나 말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입니다. 마음에 독이 있는 사람은 그의 말에 독이 가득합니다. 마음에 감사가 가득한 사람은 그 말에 감사가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매일 가득 채운 사람은 입술을 통해 말씀의 능력이 흘러갑니다.

 

  • 본문에는 미디안과 전쟁 후, 기드온이 왕처럼 권력을 누리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신 분,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왕, 그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망각하고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기드온은 요구를 거절했지만, 어리석게도 그들에게 받은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이스라엘을 배역의 길로 이끕니다.

 

왕의 권력을 누리는 기드온(22-27)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 외에 왕으로 삼을 만한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만이 유일한 왕이 되지 않고서는 어디에도 참된 희망이 없습니다. 성도들은 다른 그 누구, 그 무엇에도 하나님의 왕좌를 내주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왕이신 하나님만이 다스리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또 누구를 통해 다스리실지 결정하실 것입니다.

 

22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 23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24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 25무리가 대답하되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 하고 겉옷을 펴고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에 던지니 26기드온이 요청한 금 귀고리의 무게가 금 천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초승달 장식들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또 그 외에 그들의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27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22-27)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구원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전쟁을 하면서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기드온을 미디안을 물리친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에게 왕의 자리를 제안합니다. 사사기에서 왕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하지만, 왕이 되어달라는 백성의 요구에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23)라고 거절합니다.

기드온에게 요구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전체 백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기드온과 함께했던 300 용사이거나 므낫세 지파 사람들, 혹은 미디안 전쟁에 동참한 지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기드온과 후손들까지 왕으로 삼을 뜻을 내비칩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했으니 왕이 될 자격을 갖췄다고 여겼고, 그에게 기꺼이 충성을 바치려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에게서 구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계시는 왕이 아닙니까! 백성들의 요구에 기드온은 자기나 후손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가 다스릴 것이라고 단호히 말합니다(23).

그렇지만, 기드온의 이 대답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한 장본인임을 언급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또한, 여호와는 앞으로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자신들을 다스리고 계시는 분임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기드온과 백성 모두는 왕을 구하는 행동이 왕이신 하나님을 버린 행동(삼상 8:7-8) 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간 왕을 원하는 경우에라도, 전쟁에 능한 용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 그를 경외하고 순종할 자가 왕의 자격이 있음을 간과했습니다(신 17:15-20).

왕의 자리를 거절한 기드온은 백성들에게 그 대신 전리품으로 얻은 금귀고리를 요구합니다(24). 자신도 전리품을 많이 얻었을 터인데 남의 전리품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기드온은 미디안을 무찌른 공로가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왕의 자리까지 제안받았으니, 이 정도는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기드온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으니, 금품 요구를 못 들어줄 리 없습니다. 그들은 무려 17 00세겔(약 19kg)을 줍니다. 미디안인들이 교역하는 유목민들이라 매매를 위해 값진 물건을 소유했고, 금귀고리를 착용하는 관습이 있었으므로 이 일이 가능했습니다(24). 그는 왕이라는 ‘명예’ 대신 ‘부’라는 실제적인 이득을 취한 것입니다. 이 외에도 부적인 초승달 장식, 패물, 미디안 왕이 입었던 값진 자색 옷, 낙타 목에 둘렀던 장식줄까지 기드온에게 건넸습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물품들은 주로 왕들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왕의 의복이나 패물들을 기드온에게 줌으로써 계속 왕처럼 대접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은 말로는 왕이 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왕이 되고 싶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에 보면, 그는 실제로 왕처럼 살다가 죽습니다.

기드온은 백성에게 얻어낸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두었습니다. 이것은 그와 그의 집안과 공동체에게 신앙의 덫이 됩니다. 에봇은 금실과 은실로 만든 대제사장의 겉옷으로 레위인이 다룰 의복입니다(출 28장). 값지고 화려한 재료로 만든 에봇은 종종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사용되었습니다(출 28:30). 기드온이 사사로이 에봇을 만들고, 자기 거주지인 오브라에 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성막은 실로에 있었으므로 실로가 예배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오브라에 에봇이 있으므로 사람들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제사하는 일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드온을 포함한 온 이스라엘이 에봇을 따라 음행했습니다(27). 이는 에봇을 우상에게 입혀 섬겼는지 그 자체로 우상화하여 숭배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에봇은 종종 드라빔이나 우상과 함께 동급으로 언급되며, 이 에봇의 우상화는 사사기에서 미가와 단 지파에게서도 포착됩니다(17:5; 18:14,18).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오브라에 있던 자신의 아버지집에 바알의 제단을 부수고 시작한 사역은,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었는데(6:25-27), 이제는 자신의 집에 우상을 세우고 언약 공동체를 헐고 우상 공동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눈에 옳다고 여겨 행하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 죄임을 알려줍니다. 또한, 지도자의 안일한 태도와 언행이 공동체의 신앙을 무너뜨릴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는 자신과 타인의 사상과 언행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만이 기준이 되어야 함을 일깨웁니다.

 

기드온 가문의 번성과 그의 죽음(28-32)

하나님만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많습니다. 전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을 떠나 엉뚱한 것을 왕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작은 일이 그러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매일의 일상적인 삶에서 일관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역경의 시험을 잘 통과한 사람이라도 순탄함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28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 29요아스의 아들 여룹바알이 돌아가서 자기 집에 거주하였는데 30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 31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 32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가 많아 죽으매 아비에셀 사람의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되었더라(28-32)

 

이제부터 진행된 이야기는 기드온의 에필로그(맺음이야기)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그의 죽음과 장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사와 다르게 기드온은 그의 아들 이야기, 특히 아비멜렉에 대한 소개와 기드온이 죽은 후, 백성들의 배교를 언급함으로서 아비멜렉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자 평온이 찾아옵니다. 미디안은 7년간 이스라엘을 지배했으나(6:1), 이제 이스라엘에게 복종하는 속국의 신세가 되었습니다(28). 그들은 다시 세력을 회복하고 더 이상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기드온이 살아 있는 40년 동안 평화로운 세월을 누렸습니다. 기드온이 이룬 업적에 다른 나라들까지 이스라엘을 침공할 염두를 못했던 것입니다.

한편, 기드온은 전쟁 이후, 자기 고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사기 저자는 29절에서 기드온 대신 ‘여룹바알’이란 이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9장에 아비멜렉의 이야기를 준비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 이름은 기드온이 그의 고향 오브라에서 바알의 제단을 파괴한 사건에서 나왔습니다. 그때 고향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분개했고,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며 기드온이 어떻게 될 것인지 두고 보자고 했습니다(6:32).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이후로 기드온의 신상에는 아무 일도 없었으며,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주심으로써 기드온은 바알과 다투어서 이긴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또한 이 사건들을 통해 그가 참 신이심이 증명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부르는 사람이라고 함으로서 그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우상이 있었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것은 기드온의 상태가 사사로 부름받기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에게는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많은 아내를 두었고, 그들로부터 아들 70명을 얻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30)라고 부연 설명합니다. 이는 왕의 규방(harem) 규모입니다. 고대에 여러 아내를 둘 만한 신분이 왕과 고위계층임을 생각하면 기드온은 유사한 권세와 영화를 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은 여러 아내를 둘 여지가 없으며(창 2:24), 왕에게도 일부다처를 경고하셨습니다(신 17:17). 실제, 많은 아내와 자녀는 가족 간의 분란을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기드온은 이 두 가지 말들을 어기면서 실제적으로는 왕처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70명의 아들을 얻으려면 부인이 20-30명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솔로몬을 제외한 이스라엘의 어느 왕보다 많은 부인과 자녀의 수입니다. 자신은 왕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기드온의 말과 행동이 완전히 달랐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많은 아내 외에 첩도 두었습니다. 그 첩은 세겜 출신의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이 세겜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경계에 있는 도시입니다. 이로 보건데 기드온은 아마도 결혼을 통해 세겜과 동맹을 맺었던 것입니다. 이 또한 이방인과의 결혼 또한 율법으로 금한 규례이지만(신 7:3-4), 기드온은 이를 어겼습니다. 기드온은 첩이 낳은 아들 이름을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라)이라 지었습니다. 비록 서자이지만 기드온이 왕임으로 자부심을 가지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실제로 왕처럼 살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앞서 나온 맏아들 여델(8:20) 외에 나머지 아들에 대해서는 아무 소개도 없으나, 왕자 같은 이름을 얻은 첩의 아들은 특별한 주목을 받습니다. 앞으로 이 아들의 행보가 궁금해집니다.

 

기드온이 이런 부귀영화를 누린 것은 믿음의 전쟁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을 자신이 왕이 되는 전쟁으로 만들어버린 배신의 결과입니다. 32절에서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가 많아 죽으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면서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평안하고 오래 살다가 죽었고, 그는 이스라엘의 전통대로 평안이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배역(33-35)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온전히 들어내는 자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들어낼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자신의 공적을 들어내면 하나님 백성이 아닌 자신의 추정세력으로 만드는 것에서 그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이 죽자 너무 쉽게 하나님을 배교합니다.

 

33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서서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하였으며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34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35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아니하였더라(33-35)

 

기드온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은 다시 너무 쉽게 하나님을 배교합니다. 기드온이 죽은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로 여호와에게서 돌아섭니다. 이전과 같이 바알들을 음행하게 섬겼습니다. 이 모습은 기드온 집에 있던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것과 같은데, 이것은 기드온이 죽은 후, 이스라엘의 배교가 바로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기드온이 살아있는 동안 여호와 대신에 에봇을 음란하게 섬기는 본을 보였기 때문에, 기드온이 죽은 후, 바알의 음란하게 섬기는 길로 돌아가기가 매우 쉬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알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은 바알과 싸우는 자인 여룹바알(기드온)의 사역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습니다. 9장 4절에서 세겜에 ‘바알브릿’ 신전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신전을 만들고 이 신을 섬기는 제단과 형상을 만들었음을 보여줍니다.

‘바알브릿’은 ‘언약이 바알’ 또는 ‘언약의 주인’이란 뜻의 우상으로서 세겜 사람들이 숭배하던 신입니다. 우상을 ‘언약의 바알’이라 불렀다는 것은 그 우상과 언약을 맺었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그 우상을 그들의 신으로 삼은 행동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음을 함축합니다. 이스라엘이 ‘바알브릿’을 ‘엘브릿’(‘언약의 엘’, ‘언약의 하나님’)으로 부른 것(9:46)도 이 점을 시사합니다.

 

사사기 저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고 덧붙임으로써(34) 그들의 의지적인 거부와 무관심을 질책합니다. 주변의 모든 대적에게서 이스라엘을 건지신 분은 여호와이셨건만, 백성들은 참 하나님을 잊고 가짜 신을 하나님으로 삼는 배은망덕함과 어리석음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불성실함은 하나님께서 택한 지도자 기드온에 대한 불성실함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기드온이 그들에게 베푼 선(은혜), 즉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선봉에 서서 사사의 역할을 감당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35절에서 기드온을 다시 ‘여룹바알’이라 부르는 것은 바알의 단을 헐고 여호와의 단을 쌓은 그의 행적을 상기시킴으로써(6:25-32) 현재 바알과 언약을 맺고 여호와를 잊은 이스라엘의 행실을 대비하고 꾸짖으려는 의도입니다. 백성들은 기드온과 그 후손을 왕으로 삼으려 할 정도로 충성과 헌신을 보였으나(22), 이제는 그와 그 집을 후대하지 않았습니다. 후대(‘헤세드’)는 언약의 기본적인 의무를 내포한 단어이므로 이스라엘이 기드온에게 마땅한 본분을 다하지 않고 배신했음을 암시합니다. 이들은 기드온을 배반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렸던 자들입니다(6:8-10). 이들에게서 부적절한 대접을 받는 기드온 또한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함으로써(8:24-27, 30-31)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기드온의 죽음 이후 백성들은 공공연한 바알 숭배로 들어섭니다. 바알과의 싸움에서 지고 맙니다. 그만큼 탐심의 뿌리는 깊고 집요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완전한 승리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날에 이르기까지 앞서가신 주님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주신 십자가를 지고 가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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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8-02)

 


숙곳 사람들을 징벌한 기드온

사사기 8장 10-21절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도와주고 났더니, 오히려 어렵게 했다고 한 말을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실제로 그런 경우를 당한다면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미디안에서 구해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은 얼마나 황당하셨겠습니까?

 

  • 기드온이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아 오다가 숙곳에 이르러 성읍의 장로들을 들가시와 찔레로 징벌하고, 브누엘 망대를 헐고 사람들을 죽입니다. 한편 기드온의 맏아들 여델이 아직 어려서 세바와 살문나를 향해 칼을 빼지 못합니다. 기드온이 그들을 죽이고 닉타 목에 장식을 떼어서 가져갑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의 두 왕을 사로잡음(10-12)

‘미래의 성공에 대한 가장 큰 장애물은 과거의 성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을 경험한 사람들이 과거의 성공에 붙잡혀 초심을 잃고 교만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공로로 돌리려는 태도는 사람을 이처럼 심각하게 타락시킵니다. 안타깝게도 기드온에게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가 어떤 유혹에 이끌렸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0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따라와서 거기에 있더라 11적군이 안심하고 있는 중에 기드온이 노바와 욕브하 동쪽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길로 올라가서 그 적진을 치니 12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진영을 격파하니라(10-12)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는 갈골에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1만 5천 명가량의 동방 사람의 군사도 그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죽은 동방의 군사들은 12만 명이었습니다(10). 그들은 그곳에서 안심한 채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기드온은 노바와 욕브하 동쪽 장막에 거주하는 자들의 길로 올라갔고, 쉬고 있던 그들의 진을 공격했습니다(11). 갑작스러운 공격에 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자 기드온과 그의 용사들은 그들의 뒤를 추격했습니다.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는 곧 사로잡혔고, 그들을 따라온 군사들 역시 격파되었습니다(12).

 

숙곳 사람들을 징벌한 기드온(13-21)

세상에서는 기회주자가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자기 꾀에 죽게 됩니다. 영적인 부분에 기회주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과 하나님과의 중간에 있을 순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사역을 마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외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15)

 

13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헤레스 비탈 전장에서 돌아오다가 14숙곳 사람 중 한 소년을 잡아 그를 심문하매 그가 숙곳의 방백들과 장로들 칠십칠 명을 그에게 적어 준지라 15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너희가 전에 나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느냐 한 그 세바와 살문나를 보라 하고 16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17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니라 18이에 그가 세바와 살문나에게 말하되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하니라 19그가 이르되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20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 하였으나 그 소년이 그의 칼을 빼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직 어려서 두려워함이었더라 21세바와 살문나가 이르되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 하니 기드온이 일어나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그들의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들을 떼어서 가지니라(13-21)

 

기드온과 함께 미디안을 추격한 인원은 여전히 300명이었습니다. 미디안의 왕 세바와 살문나는 비록 전쟁에 대패하여 12만 명을 잃었지만, 갈골이라는 곳에 주둔한 그의 군대는 여전히 1만 5천 명 가령으로, 기드온의 군사보다 월등히 많았습니다. 하지만 미디안 미디안은 다시 한 번 대패하여 진영은 대파되고 두 왕은 사로잡힙니다.

 

(1) 숙곳 사람들의 징벌함(13-16)

 

요하스의 아들 기드온이 헤레스 비탈 전장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숙곳 사람 중에 한 소년을 잡아 그에게 숙곳에 관한 정보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기드온에게 숙곳의 방백과 장로 77명을 적어 주었습니다(14). 기드온은 숙곳 사람들에게 그들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습니다. “너희가 전에 나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느냐 한 그 세바와살문나를 보라”(15).

그리고 기드온은 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고, 들가시와 찔레를 취해 그것들로 숙 사람들을 징벌했습니다(16). 숙곳 사람들은 앞서 군사들에게 식량을 나눠 달라고 했던 기드온의 요청을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욕적인 말로 그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세바와 살문나의 목숨이 지금 너희 손에 있다는 것이냐’라며 기드온 군대의 기량을 얕보았습니다. 기드온은 이 일을 마음 깊이 새기고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동방 사람의 군대를 격파하자마자 숙곳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경고했던 대로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의 지도자들을 처단했습니다.

 

(2) 브누엘 사람들을 징벌(17)

 

기드온은 숙곳에 이어 브누엘까지 징벌했습니다. 그는 브누엘의 망대를 헐었고 그 성읍 사람들을 죽였습니다(17). 브누엘은 숙곳보다 더 심하게 징벌을 받았던 것같습니다. 기드온이 방어를 목적으로 세워진 망대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성읍의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학살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드온의 행동은 정당화되기 어렵습니다. 브누엘 성읍은 가나안의 성읍, 즉 이방인들의 거주지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요단 동편 성읍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의 성격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는 민족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말할 것도 없고 더 이상 예의 바른 언행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지도자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3) 기드온이 미디안 왕 세바와 살문나를 죽임(18-21)

 

기드온이 미디안 왕 세바와 살문나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18). 기드온이 국가적 위기를 다룬 후 이제 세바와 살문나 및 자신의 일을 결산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왕들이 다볼에서 죽였던 사람들에 대해 묻자, 그들은 자신들이 죽인 자들이 기드온처럼 왕자들 같았다고 답했습니다. 이들의 대답은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 왕권 모티브를 소개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세바와 살문나는 기드온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기드온과 자신들이 죽인 사람들에 대한 인상을 묘사함으로써 기드온에게 아첨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답을 들은 기드온 세바와 살문나가 죽인 이들이 자신의 형제들, 자기 어머니의 아들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19). 이것은 기드온의 형제들이 격렬한 전투 중에 죽은 것도 아니고, 익명으로 죽은 것도 아니며, 분명히 미디안 왕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미디안 왕 세바와 살문나에게 기드온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어 기드온은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며 자신의 복수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19b). 여기서 기드온의 형제에 대한 언급은 이야기에 새로운 주제를 도입합니다. 그의 가족의 불행이 여호와께서 기드온을 구원자로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지만, 그가 초기에 보여 주었던 망설임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기드온이 미디안 왕을 추격했던 동기가 여기서 새롭게 등장하여 그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과거 기드온이 신학적이고 민족적 동기로 행했다면, 이제는 단순히 개인의 복수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은 칼을 빼지 못했습니다. 아직 어려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20). 기드온이 자신의 맏아들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는 전쟁 중에 잡힌 중요한 미디안 왕들을 죽임으로 영광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소년이 전쟁에서 대적의 우두머리인 왕을 죽인다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행하기에는 그 소년이 아직 어리고 그들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기드온이 이 일을 맡았습니다. 한편 미디안 왕들의 입장에서는, 기드온 같은 용사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부끄럽지 않지만, 소년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미디안 왕들은 기드온에게 죽임 당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기드온이 일어나 세바와 살문나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을 취했습니다(21). 일종의 왕의 상징처럼 보이는 초승달 장식품을 기드온이 취함으로써 이스라엘과 미디안의 전쟁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원수에 대한 복수를 자체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원조는 에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도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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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8-01)

 


에브라임의 불만과 계속 추격하는 기드온

사사기 8장 1-12절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었을지라도 종종 복음을 잊거나 오해하며 살아갑니다. 복음에서 멀어질 때 나타나는 증상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었겠습니까? 육적이고 정욕적인 행동으로 모든 것을 결론짓습니다. 목적하고 있는 결과를 얻는 데는 반드시 참고 기다려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 기드온이 승리한 후, 에브라임 사람들이 왜 자신들을 처음부터 부르지 않았느냐고 따지자, 기드온은 그들이 미디안의 방백 오랩과 스엡을 죽였으니, 더 낫다며 화를 물어줍니다. 한편, 미디안의 왕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할 때,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이 협조하지 않자 기드온은 보복을 선언합니다.

 

에브라임의 불만(1-3)

우리 성도들은 모든 부분에서 철저하게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바울은 평생 온갖 수고를 다 하며 복음을 전하고도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에서 멀어질 때 어떤 모습이 나타나겠습니까? 사람들이 복음으로 멀어질 때, 영적인 부분은 사라지고 육신의 욕심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1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2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3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1-3)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의 발판을 마련하고 도망가는 무리를 뒤쫓는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내부에서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미디안과 전투 막바지에 참여해 도망치던 미디안을 요단강 나루에서 저지하고,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죽인 에브라임 지파가 기드온과 크게 다툽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자기들을 미디안과의 전쟁에 부르지 않았다며 시비를 건 것입니다(1).

 

이 장면은 사사기 내에서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갈등이 일어난 첫 장면입니다. 12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와 함께 가장 강력한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그들은 북쪽 지파들 중에 힘과 영향력이 가장 강한 지파입니다. 그런 자신을 무시한 것에 대해 강하게 항의한 것입니다.

기드온이 처음에는 에셀, 스블론, 납달리 지파만 불러서 전쟁을 하다가 병력이 부족하여지자, 나중에 에브라임 지파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왜 이렇게 강하게 항의하게 된 것입니까? 전쟁에서 승리한 후, 승전의 전과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리려는 이기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7년 동안 미디안에게 압제 당할 때는 잠잠히 있다가 이제야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매우 비겁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얻는 전리품을 챙기기 위한 욕심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기여도에 따라 전리품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늦게 참여하여 기여를 적게 한 에브라임은 전리품을 적게 가져가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부르지 않는 것에 대해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조금이라도 자신의 몫을 더 얻어내려는 속셈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런 에브라임 지파의 모습은 희생하지 아니라고 하면서도 성과에 대해서는 집착하고 욕심을 내는 얌체 신앙입니다.

 

기드온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합니까? 기드온은 흥분하지 않고 이렇게 대처합니다. 그는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3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2-3)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분노를 풀어줍니다. 이것은 에브라임 지파가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죽인 영광을 취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통해 기드온은 에브라임이 자신보다 아주 위대한 일을 했다고 치켜세우면서, 전리품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뜻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기드온에게는 힘센 상대와 갈등을 말로 잘 조율하고 해결하는 탁월한 수완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 참여를 거부한 브누엘과 숙곳(4-6)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이 완전함을 보여 줍니다.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않으셨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을 잊을 때, 우리는 자기 안전과 유익을 스스로 보장하기 위해 급급하게 됩니다.

 

4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5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고 있노라 하니 6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4-6)

 

4절에 보면,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장소가 요단강 동편으로 옮겨집니다. 거기서 직면한 기드온과 그의 군사들의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넙니다. 군사들은 매우 피곤한 상태였지만, 추격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에서 멀지 않는 숙곳에 이르렀을 때, 기드온은 이곳 사람들에게 피곤하고 지친 자신들의 상황을 알리고 먹을 것을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그리고 좀 더 호의를 얻기 위해 자신의 지금 미디안의 왕인 ‘세바’와 ‘살무나’을 추격하는 중이라고 설득합니다. 적들을 치기 위해 수고하고 있다고 말을 하면, 호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숙곳의 방백들의 반응은 기드온의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기드온과 그의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기를 거절했습니다. 그 방백들은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6)라고 거절합니다.

‘숙곳’은 요단강 동편 갓 지파의 영역임으로 그 지역명의 뜻이 ‘쉼터’입니다. 그런데 쉼터에서 양식과 휴식을 구했지만, 거절당한 것입니다. 이들이 거절했다는 것은 기드온이 자신들이 ‘세바’와 ‘살무나’의 수중에서 건져 줄 진정한 지도자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단 서편에서 일어선 기드온의 지도력을 요단 동편의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 5장의 드보라 노래에서도 요단 동편 지파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요단 동편과 서편 사이에 갈등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갈등은 후에, 입다의 이야기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복수를 맹세하는 기드온(7-9)

복음은 하나님을 대적해 죄를 범한 우리를 그분의 오래 참으시고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도무지 이러한 사랑을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기독교만이 지닌 엄청난 요구의 근거가 됩니다.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오직 먼저 이 사랑을 받은 자만이 시도가 가능한 명령입니다.

 

7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8거기서 브누엘로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구한즉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 9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7-9)

 

기드온은 숙곳 사람들의 반응을 듣고서 다음과 같이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7)라고 복수를 맹세합니다. 즉 세바와 살무나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박대한 자들을 잔인하게 징벌하겠다는 뜻입니다.

기드온은 지금 자신이 이스라엘의 원수와 싸워 다시는 이스라엘의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피곤과 고생을 무릅쓰고 있는데, 정작 동족들이 불신앙으로 인해 자신의 돕지 않는 것에 대해 불같이 화가 나서 개인적으로 복수를 맹세한 것입니다.

 

그리고서 이곳을 떠나 좀 더 동쪽에 있는 ‘브누엘’로 갑니다. ‘브누엘’은 옛 ‘브니엘’이라고 부르는데,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실험한 곳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숙곳에 했던 요청과 동일한 요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 또한 속곳에서와 같이 불신앙적인 대답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또다시 자신이 평안이 돌아오게 되면, 브누엘 망대를 헐겠다고 복수를 맹세합니다.

 

이렇게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이 기드온을 돕는 것을 거절한 자신들이 지역적으로 미디안 군데가 진을 치고 있는 ‘갈골’과 멀리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만약 기드온이 전쟁에 지면, 기드온을 도운 자신들이 미디안 군대에게 큰 보복을 당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기드온은 물론이고 기드온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눈에는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보다 미디안 군대가 더 커 보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온전히 기드온과 하나님을 신뢰했다면, 자신들이 미디안에게 보복당할 염려를 할 필요가 없었고, 기드온과 갈등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기드온도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돕지 않은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맹세하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보라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지파에 대해 비난하며, 하나님 사자의 저주를 전달하였지만, 자신이 직접 원수를 갚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윗도 나발이 자신을 돕지 않고 무시하자 그를 죽이겠다고 군사를 이끌고 왔다가, 그의 손으로 원수를 갚지 말라는 아비가엘의 지혜로운 조언을 듣고 돌아간 일이 있습니다.

 

이처럼 원수갚는 일은 여호와의 손에 달린 것인데, 기드온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박대한 동족에게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이 맹세로 인해 여호와의 전쟁은 요단강을 건너면서, 기드온 개인의 원수 갚는 전쟁으로 변질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분명한 명령이 주어진 것을 기억합니까?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주목할 때 대적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떻게 달라져야 합니까? 자신을 대적하고 손해를 끼친 원수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는 절대로 개인의 너그러움, 아량, 인품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치르신 대가, 주님을 대적하는 자가 받게 될 분명한 심판을 온전히 알 때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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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7-02)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대승한 기드온

사사기 7장 15-25절


독일 축구선수이며 감독이었던 프란츠 베켄바워는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하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성경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는 사람만이 이기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승리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된 기드온은 300명과 함께 미디안을 공격합니다. 그들은 항아리와 나팔과 횃불로 적진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적군을 교란시켜 도망하게 하셨습니다. 다른 지파들도 소환되어 적군을 추격했습니다. 기드온과 함께하실 것을 약속한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미디안 적진에서의 전면전(15-22)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에서 영적 전쟁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경험하는 전쟁과 하나님의 백성이 감당하는 영적 전쟁은 여러 가지로 차이점이 많습니다. 영적 전투에는 이미 승리했기에 눈에 보이는 세상의 규모나 힘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본문은 그 차이를 보여 줍니다.

 

15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 16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17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18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19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백 명이 이경 초에 진영 근처에 이른즉 바로 파수꾼들을 교대한 때라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20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21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22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15-22)

 

적군의 꿈과 해몽(13-14)을 들은 기드온은 승리의 확신을 갖고 전쟁에 임합니다(15-18). 그는 이 사건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헌신을 다짐합니다. 감격으로 이스라엘 진영으로 되돌아온 기드온은 용사들에게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다’고 외칩니다. 이 선언은 기드온이 적진에 가기 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며(9), 적군을 통해 반복되었고(14), 이제 기드온의 입으로 고백되고 있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을 세 대로 나누어 출격 준비를 합니다. 그는 모든 백성의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려 줬습니다. 항아리 안에는 횃불이 들어 있습니다. 앞서 언급된(8) 양식을 넣었을 항아리와 나팔은 병기 용도였던 것입니다. 전투를 앞둔 군인이 칼과 창이 아니라 나팔과 항아리를 가졌다니 어떤 전투가 벌어질지 궁금증과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기드온은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그대로 하라’고 지시합니다(17). 특히 ‘내가 하는 대로 그대로 하라’는 말을 반복하여 작전 성공을 위해서는 완전한 신뢰와 복종이 절대적임을 암시합니다. 기드온과 그의 소대가 나팔을 불면, 나머지 소대도 모든 적진 주위에서 나팔을 불고,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치라고 합니다(18). 외침에서도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수장으로, 기드온은 사령관으로 나타납니다. 이 전략이 하나님의 명령인지는 언급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바락이나(4:6-7) 여호수아에게 주신 전략(수6:2-5)처럼 기드온의 전략 또한 인간의 눈에는 터무니없는 전략이지만, 이전처럼 이번에도 기적과 구원을 이루실 것을 기대하게 합니다. 전투가 시작되고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기드온과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십니다(19-22a). 기드온의 300명 군사는 그가 지시한 작전을 바탕으로 출동합니다.

19절부터 미디안과 요단 서편에서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8:3에서 마무리됩니다. 기드온은 군사 중 100명을 데리고 밤 10-11시쯤(이경 초) 미디안 초소 근방에 이릅니다. 밤에 빈 항아리와 횃불에다 나팔까지 들었으므로 조심스럽게 접근했을 것입니다. 그 시각 미디안 군대 파수꾼들은 교대를 막 마쳤습니다(참조. 대하 23:4-11). 이때 기드온과 군사들이 나팔을 불자 나머지 두 군데 군사들도 따라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 다음 손에 있는 항아리를 부수자 안에 들어 있던 횃불이 모습을 보이며 환하게 타올랐습니다. 이제 횃불을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으로는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쳤습니다(20). 이들 구호에 언급된 ‘칼’은 적군의 꿈 해석에서 언급된 ‘기드온의 칼’(14)을 연상시켜 하나님의 승리를 예고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손에는 정작 칼이 없었습니다. 300명이 동시에 부는 나팔소리,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 횃불이 뿜어내는 화염의 요란한 움직임, 군사의 함성과 구호 속에 들리는 여호와와 기드온의 이름은 오밤중에 적막을 깨고 골짜기 사방에서 울려 퍼졌고 이 소리는 잠자던 적군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기드온의 군대는 각기 자기 자리에서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며 진영을 에워싼 채로 있었습니다. 대조적으로 온 미디안 진영에서는 적군들이 뛰고 소리 지르며 도망했습니다. 모래처럼 많던 낙타와 짐승(12; 6:5)도 놀라 울면서 날뛰었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적진에서 적들은 서로를 적으로 오인하여 칼부림을 했습니다. 이 칼부림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의 결과였습니다(22).

하나님의 개입은 그가 바락 군대의 선봉에서 시스라 군대를 혼란에 빠지게 하신 일(4:15)과 폭우를 내려 대적을 휩쓸어버린 일(5:19–22)을 상기시킵니다. 바락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심과 승리의 약속을 신실히 지키셨듯이, 이번에도 약속하신 대로 동행과 능력을 증명하셨습니다. 22-25절의 전투와 함께 요단 서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135,000명 중 12만 명을 무찌르는 쾌거를 이룹니다(8:10).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6:16)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미디안 적진 밖에서의 추격전(23-2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승리를 받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약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강하시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기준으로 강함과 약함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며, 그분이 우리를 높이십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승리를 믿으며, 세상과는 전혀 다른 영광으로 우뚝 서야 합니다.

 

23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였더라 24○기드온이 사자들을 보내서 에브라임 온 산지로 두루 다니게 하여 이르기를 내려와서 미디안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라 하매 이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다 모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고 25또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미디안을 추격하였고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요단 강 건너편에서 기드온에게 가져왔더라(23-25)

 

다른 지파들도 합세하여 미디안 군대를 추격합니다. 하나님께서 300명을 뽑기 전에 전쟁에 참여하러 온 납달리, 아셀, 므낫세 지파(3-5; 6:35)가 다시 합류합니다(22b-23). 그 시각 미디안 진영을 간신히 탈출한 적군들은 요단을 건너 도망가기 위해 요단강 기슭에 위치한 스레라(사르단)의 벧 싯다와 벧산 남부로 추정되는 아벨므홀라의 경계까지 퇴각gkqsl다. 기드온 부대에 합류한 지파 사람들은 이들 뒤를 추격했습니다. 바락이 시스라 군대를 쫓을 때와 유사한(4:16) 이 장면은 이스라엘의 완승을 내다보게 합니다. 여기서, 기드온이 지파들을 부른 행동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함을 나타내기 위해 300명으로 축소한 인원을 다시 늘린 점만 보면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바락 때는 지파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했지만(5:14-15,18), 이번에는 기드온이 지파들을 직접 소환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드온이 300명과 함께 미디안 적진을 감당하고 있는 동안 그곳을 빠져나간 적군들이 있었기 때문에, 당장 쫓아갈 형편이 되지 않아, 퇴각로 근처의 지파들에게 급히 협력을 요청했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참작하면, 적진 내에서는 300명을 통한 전면전으로 대부분의 군사를 무찔렀고, 적진 밖에서는 지파들의 협력과 추격전을 통해 도망자들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에브라임 지파도 소환되어, 공을 세웁니다(24-25). 북부 지파를 소집했던 기드온은 에브라임 온산지에도 전령들을 보내, 미디안과 싸우러 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기드온은 그들에게 도망자들을 앞질러 가서 벧 바라와 요단강으로 통하는 수로들을 점령하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벧 바라는 갈릴리 호수 남쪽 20킬로미터, 요단 서편에 있는 나루터로 유추됩니다. 위 지파들의 추적을 따돌리고 요단강을 건너려는 적군들을 나루터에서 막는 작전입니다. 에훗 때 모압 족속도 요단을 건너 도망하려 했고, 이때 에훗이 요단 서편 나루를 장악하여 도망하지 못하게 한 것과 같습니다(3:28-29). 에브라임 각 사람 모두가 소집되었고, 주어진 임무대로 요단의 나루터를 점령했습니다(24). 에브라임 지파는 기드온의 전략을 따름으로써 신의를 보였고,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힘을 증명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미디안의 두 방백인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들은 미디안의 지도자나 군대 우두머리로 추정됩니다. 당시 미디안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가 출정했으나, 싸움에 대패하자 남은 병사 약 15,000명을 이끌고 이미 요단을 건넌 상태였습니다(8:10). 시편 저자는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목장인 이스라엘을 자기들 소유로 취하려 한 자들이었다고 비난합니다(시 83:12). 방백의 이름인 ‘오렙’은 ‘까마귀’란 뜻이며, ‘스엡’은 ‘늑대’란 뜻으로, 옷니엘 시대에 적군의 왕을 ‘두 배나 사악한 구산’(구산 리사다임)이라고 부른 것처럼, 멸시하여 붙인 별칭으로 보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오렙을 바위에서, 스엡은 포도주 틀에서 죽였습니다. 이 장소는 그들의 이름을 따서 오렙 바위와 스텝 포도주 틀로 불렸습니다. 포도주 틀과 바위는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로부터 표징을 얻었던 장소를 상기시킵니다(6:11,20). 같은 장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디안의 방백들이 이 특정 장소에서 죽임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실 때 약속한 이스라엘의 승리(6:16)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훗날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실 것을 증명하는 일환으로 이 방백 사건을 회고하면서, 그들을 처치한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알려줍니다(사 10:26). 시편 저자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언급합니다(시 83:11). 방백들을 처단한 후 에브라임은 계속 미디안을 추격했습니다. 그리고 요단을 건너 기드온(8:4)에게로 가서,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전달합니다. 지파들이 시간을 벌어준 사이에, 기드온은 적진을 소탕하고 요단을 건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을 찾아간 에브라임 사람들에게는 다른 꿍꿍이도 있었습니다.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조건은 믿음인데, 이 믿음 또한 사람의 의지로 가질 수거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은혜의 선물로 주셔야만 합니다. 성도는 승리의 조건인 믿음도 주시고 사탄과 직접 싸워 승리를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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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7-01)

 


300용사로 구원한 기드온

사사기 7장 1-14절


힘과 숫자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 시대입니다. 교회도 성도수와 재정으로 성공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힘의 논리로 변질될 때 믿음의 본질로부터 이탈할 수 있습니다. 참된 승리의 요건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의 싸움을 통해 궁극적으로 드러내야 할 바는 무엇입니까?

 

  • 기드온의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연합군에 맞설 이스라엘 군사로 300명만 뽑으십니다. 이들로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두려워하는 기드온에게는 적군의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이용하여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확인시키십니다.

 

전쟁을 위해 인원을 줄이시는 하나님(1-8)

망각과 자만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삶을 살게 합니다. 사람들은 풍요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듯이, 전쟁에서 승리 때문에 자만하여 하나님을 잊을까 걱정하십니다. 실패보다는 성공 이후에 더 큰 시험이 찾아옵니다. 망각과 자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필수 단계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순간, 자신을 지키고 지탱해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1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2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3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4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5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6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7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8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1-8)

 

이스라엘이 출정하려는 순간(6:33-35) 불현듯 기드온의 표징 사건(6:36-40)이 등장했고, 본문 7:1-14에도 예상치 못한 두 사건이 이어져 출정과 승리가 미뤄집니다.

본문 1-8절은 하나님께서 미디안과 싸울 300명을 선택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6:33-35의 내용과 직접 연결됩니다. 현재 미디안과 동맹군인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은 요단 동편에서 강을 건너와 모레 산(이스르엘 골짜기의 북동쪽) 앞 골짜기에 진을 친 상태입니다(1; 6:33). 미디안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까지 왔다는 것은 남쪽 지역인 가사 지역부터 점점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마침내 북쪽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드온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적진의 남쪽 ‘하롯 샘’(‘떨림의 샘’) 곁에 진을 쳤습니다. 하롯 샘은 이스르엘 골짜기의 남동쪽에 위치한 길보아산 기슭에 위치했습니다.

이때 ‘기드온’을 ‘여룹바알’로 소개하는데, 이 이름은 바알에 대항한 승리를 상징하며 이는 곧 벌어질 전쟁의 승리를 암시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순종하면서도 두려움과 불확신 가운데 있는 그의 내면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전쟁 준비를 한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적을 너희 손에 주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2). 그 이유는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2)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6장 36절에서 기드온이 하나님께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이라는 말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과 그의 백성이 자신의 힘으로 승리했더라고 여기고,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에게 돌릴까 봐 이렇게 시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드온과 함께한 백성은 그의 소속 므낫세 지파와 므낫세 북부에 거주하는 아셀, 스불론, 납달리 지파 사람들로(6:35), 총 32,000명에 이르렀습니다(3). 드보라 때는 약간 더 많은 지파에서 40,000명이 운집했습니다(5:8). 그러나 미디안 연합군의 135,000명(8:10)에 비하면 1/4에도 못 미칩니다. 현재 상태만으로도 하나님께서 같이 같이 싸워 주시지 않으면 힘든 전쟁인데,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군사가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백성이 많아 그들로 미디안을 이기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지 않고 그를 믿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 인원으로 미디안을 무찌르면, 이스라엘이 교만해져서 구원의 공로를 자신들에게 돌릴 위험이 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숫자를 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 전쟁만 아니라 사사들의 모든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신 분이 하나님이며, 그가 모든 영광을 받아야 함을 분명히 일깨웁니다.

 

하나님께서는 군사를 주리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사용하십니다.

첫째로, 군사를 축소하는 방법은 지금 두려워 떠는 사람은 길르앗 산에서 떠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합니다(3).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러준 가나안 전쟁의 수칙이었습니다(신 20:8). 즉,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신앙과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겁쟁이들이 남으면 사상자만 늘고, 다른 백성까지 겁먹게 하여 싸움에 방해가 됩니다. 이에 32,000명 중 무려 22,000명이 돌아가 10000명만이 남았습니다. 이처럼 많은 숫자가 돌아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기드온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는가를 보여줍니다. 많은 백성이 두렵고 떨면서 돌아갔기에, 이곳 샘의 이름이 ‘하롯’(하로드: ‘떨림’)이 됐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때 기드온의 심정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표징을 구한 끝에(6:36-40) 간신히 마음을 추슬러 전투를 하려는데, 병력이 1/3로 줄었습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여전히 10000명의 군사를 보고 이들도 많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기드온의 눈에는 이만큼 남은 것도 적다고 생각하고 더욱 두려워졌을 것인데, 하나님의 눈에는 이들도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수가 많고 적음이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전쟁은 어차피 이스라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군사들을 또 시험하라고 하십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믿지 못해 시험을 시작되었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시험하고, 또한 이스라엘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10000명을 물가로 데리고 내려가라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사람을 지목할지 미리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곳에서 같이 가라고 지명한 사람들만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모호하게 말씀하십니다(4). 이것은 물가에서 상황을 보고 결정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물 마시는 모습에 따라 한 무리를 선택하려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물가로 가서 물을 마시게 합니다. 이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1) 무릎을 세우거나 선 채로, 손에 한 움큼 뜬 물을 핥는 자와 (2) 무릎을 꿇고 얼굴을 물에 가까이 데고 마시는 자를 따로 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결과로는 수를 세어보니 (1)번 무리는 300명이었고, 나머지 9,700명은 (2)번에 해당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을 손으로 떠서 마신 300명만을 선택하셨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돌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시험하신 것은 물 마실 때의 경계와 방어 태세였을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마시면 적을 경계하거나 공격에 재빨리 방어할 수 없지만, 무릎을 세우거나 서서 마시면 그럴 가능성이 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차적 목적은 인원 감축이므로 어떤 자세였든 소수를 택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300명만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기드온을 통해 미디안을 무찌르게 하실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이 적은 수로 미디안을 이긴 후에 이스라엘은 이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적군이나 이 소식을 듣는 자들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백성에게 각자 처소로 돌아가라고 명하십니다. 이에 ‘백성’은 양식과 나팔을 챙겼습니다. 이 내용은 흐름상 느닷없지만, ‘백성’은 선택된 300명을 가리킵니다. 돌아갈 백성들은 양식과 나팔이 필요 없으므로 이들에게 줬을 것입니다. 양식은 자루나 항아리에 담으므로 양식과 나팔에 대한 언급은 항아리와 나팔이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전략적인 병기(16-20)가 될 것을 예고합니다.

 

기드온은 군말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9,700명을 각 장막으로 돌려보냈고,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순종하여 돌아갔습니다. 기드온은 나머지 300명을 붙들어 두었습니다. 이제 미디안 군대의 수는 이스라엘의 450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골짜기에서 대치 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이렇게 하신 뜻은, 전쟁은 사람의 수에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승리의 확신을 주시는 하나님(9-14)

우리의 신앙에서 항상 하나님의 크심과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두려움의 사람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작은 용사에서 큰 용사로 되길 바라십니다. 힘겨운 시련 중에 우리가 바랄 것은 상황의 반전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크심과 자신의 작음을 알아갈 때, 자신의 믿음도 그만큼 자랄 것입니다.

 

9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10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11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간즉 12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13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14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9-14)

 

여기서는 300명을 이끌고 대군에 맞서야 하는 기드온에게 놀라운 방법으로 승리의 확신을 주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두려워 떨던 백성은 다 떠났지만(3),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 기드온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군사의 수를 줄인 이유는 바로 기드온이 하나님보다 사람의 숫자를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일어나라! 미디안 진영에 대항하여 내려가라!’고 전쟁을 명령하십니다(9),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진영을 기드온의 손에 넘겨주었다고 하십니다. ‘넘겨주었다’(9)는 완료형으로 예(1:2;4:14)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를 주셨음을 부각합니다.

군사가 100배로 줄어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았을 것인데, 갑작스런 출정 명령이 떨어지자 기드온은 더 겁이 났을 것입니다. 이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적군을 통한 표징을 준비하여 선수를 치십니다. “네가 두렵거든 부하 부라와 함께 적진으로 내려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11)라고 하십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두려워하던 기드온이 적들의 말을 들으면, 기드온이 용기가 생길 것이고 그러면 미디안을 공격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기드온은 부하를 데리고 적진의 전초 기지 경계로 내려갑니다. 9-11절까지는 ‘내려가다’가 네 번 반복되어 미디안을 향한 공격이 다가옴을 알립니다. ‘내려가다’의 문자적 의미는 적진이 골짜기(평원)에 있어 지형학적으로 내려간다는 뜻이며, 실제 미디안 진영은 이스라엘 진영의 북쪽에 있었습니다(1).

적군의 진영에는 미디안, 아말렉, 동방 사람들의 장막이 쭉 펼쳐져 있었고, 그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은 미디안을 주축으로 이스라엘을 약탈하던 유목민 무리들입니다(6:3-5). 이들에 대한 묘사(12)는 6:5과 유사합니다. 메뚜기 떼로 비유된 적군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보냈음을 상기시켜(욜 1:4; 2:25), 적군의 침략이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죄 때문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께서 이제 이 메뚜기 떼를 다 쓸어버리실 것입니다. 적군이 끌고 온 낙타도 해변의 모래처럼 많았습니다. 전쟁에서 낙타의 존재는 그 크기와 생김새로 이스라엘에게 위압감을 주고, 말과 철병거처럼 전쟁의 기동력을 대신하며, 노획물을 많이 실어갈 것을 암시합니다.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적진은 기드온을 더 두렵게 했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예고하신 대로(11) 기드온이 적들이 하는 말을 듣게 하시고, 이를 통해 두려움을 없애주십니다(13-14). 적들의 말은 꿈 얘기와 그 해몽이었습니다.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왔고’, 그것이 한 장막까지 ‘와서’, 그것을 ‘치고’, ‘무너뜨리고’, ‘뒤집어버렸으며’, ‘그 결과로 장막이 쓰러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보리떡이 장막을 쓰러뜨리는 장면이 자세하고 느리게 전개되는데, 이는 대적 시스라가 야엘의 기습 공격으로 죽는 장면과 유사하며(5:27), 장막의 파괴를 부각합니다.

꿈 풀이는 적군의 친구를 통해 들려옵니다. 보리떡 한 덩이는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을 뜻합니다. 장막이 부서진 것은 ‘하나님이 미디안 모든 군대를 기드온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뜻입니다.

 

여기 마지막 문장은 하나님이 기드온을 이곳에 보내면서 상기시키신 ‘완료형’의 승리의 약속과 같습니다(9). 하나님의 약속과 더불어 적군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의 승리를 듣게 된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사용하심과 그가 이스라엘에게 승리 주심을 확신 합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지만, 이는 기드온의 연약한 믿음을 드러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차례 표징을 주셨고, 승리를 확인시키셨으나, 기드온은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무척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적군의 꿈과 해몽은 단숨에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적 전쟁의 승리는 숫자와 힘에 있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묘수를 짜내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를 구하는 것이고, 기뻐하실 만한 큰 용사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승리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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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6-03)


기드온을 사사로 준비시키신 하나님

사사기 6장 25-40절


요즘 주위에 성도라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행동으로 품격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모습을 벗어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의 변화는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환경이나 여건에 큰 변화가 있어서 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유익인 것입니다.

 

  • 두려워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징표를 보여주시며, 기드온이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인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확증을 받은 기드온은 드디어 하나님께 첫 번째 임무를 받고 이를 수행하게 됩니다.

 

바알 제단을 없애는 기드온(25-32)

세상은 강력하고 흉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순종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기드온의 소심하게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분께 받은 사명을 용기 내어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25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26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27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28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29서로 물어 이르되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이르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30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31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32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25-32)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제일 먼저 주신 명령은 기드온의 아버지 집에 있는 우상을 없애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우상숭배가 만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의 시작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임을 보여준다.

 

(1) 바알의 제단을 없애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실행(25-27)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아버지의 7년 된 둘째 수소를 가져다가,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 신상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 제단과 아세라 상을 찍고”라는 명령을 통해서 이스라엘 안에 우상숭배가 만연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를 안 섬긴 것이 아니라 혼합주의적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기드온의 아버지 집은 이방 신의 제단을 차려놓을 만큼 부유하고 권세 있는 집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세라 상으로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은 아세라 신상은 신이 아니며 장작밖에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 44:15의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라는 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7년된 둘째 수소는 가장 좋은 소를 말한다. 집에서 가장 좋은 소로 제사를 지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산성 꼭대기는 아마도 기드온이 살고 있는 오브라 성읍의 높은 곳을 뜻하며, 여기서 제사하게 한 것은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사실을 모든 성읍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건을 시작하시기 전에 이스라엘에 만연한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기드온은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였기에 밤에 몰래 실행합니다. 여기서 또다시 두려움의 모티프가 등장합니다. 밤은 은밀함을 상징하는 시간으로 사람들의 는 을 피해 몰래 일을 하기에 적당한 시간입니다. 그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만 아직 사람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2) 이스라엘 자손들의 반응(28-32)

 

성읍 사람들은 아침에 기드온이 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자는 성읍 사람들의 눈을 통해 기드온이 한 일들을 다시 언급합니다. 그들은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지 알기 위해 열심히 추적하였고 마침내 기드온을 찾아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상을 없앤 기드온을 죽이려고 하는데, 이런 모습은 암시적으로 백성들이 이방 신들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6:10에서 아모리 사람의 신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과 반대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을 없앤 기드온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명령으로 우상을 없앤 기드온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 그들은 요아스에게 네 아들을 끌어내 죽이겠다고 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요구에 31절에서 요아스는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할 것이냐 그가 다투는 것을 돕는 자는 아침까지 죽을 것이다라고 항변합니다. 바알이 참 신이라면 신 스스로가 심판할 것이니 공연히 신의 싸움에 끼어들면 오히려 해를 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과 바알에 대한 조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신인 바알을 위해 싸우려고 하는 것도 웃기고 인간이 신을 위해 싸우는 것도 웃깁니다. 지금 요아스는 통렬하게 이스라엘 백성을 비웃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바알이 신인지 아닌지에 대해 시험하는 것입니다. 요아스의 말은 매우 논리적이지만 신앙적이진 않은데, 요아스가 참 신앙인라면 우상을 집에 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신들을 섬기는 기회주의자일 뿐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통해서 바알과 싸우는 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사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후에 전쟁을 위해 나팔을 불었을 때 백성들이 그에게 나아온 것입니다.

 

미디안과의 전쟁 준비(33-40)

영적인 권위와 영적인 리더십은 사람들은 실력이나 도덕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영향력과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게 됩니다(행 1:8).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받으려면 마음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33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34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35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 36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33-40)

 

소심하게 사사의 사명을 시작한 기드온에게 적들이 몰려옵니다. 하나님의 영은 바로 기드온을 통해 일을 시작하셨지만, 기드온은 그 역할이 두렵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미디안과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위협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전쟁을 준비하게 하시며 승리의 약속을 주십니다.

 

(1) 전쟁을 위해 백성들을 모음(33-35)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평야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에게 내렸습니다. 사사기에서 ‘여호와의 영’은 어떤 특별한 직무를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사사들에게는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 영적 권위를 부어주십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영적 권위를 가집니다. 그는 마음의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중심에 모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의 전쟁을 알리는 나팔로 사람들을 불렀고, 이에 아비에셀, 므낫세, 아셀, 스불론, 납달리 5지파 사람들이 그를 영적인 지도자 사사로 인정하고 그에게 모였습니다. 그가 영적으로 지도자 역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기드온의 양털 시험(36-40)

 

이 단락에서 기드온은 양털로 하나님의 확증을 요청합니다. 여기서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면’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기드온은 이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이란 사실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나서야 전쟁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구원자, 즉 사사로 사용하시려면 좀 더 확증을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전쟁에 나서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런 두려움과 확증에 대한 요구는 드보라 이야기에서 드보라의 동행을 요구한 바락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기드온은 두 번의 양털 시험을 하는데, 먼저 양털을 타작마당에 놓으면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기드온의 요청대로 양털에만 이슬이 가득하게 해주셨는데, 그 양도 그릇을 가득 채워서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많은 이슬을 품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기드온은 이것만으로는 믿지 못했습니다. 원래 양털은 습기를 잘 흡수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양털이 물을 많이 품은 것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다시 하나님께 매우 조심스럽게 요청합니다. 그의 화법을 보면 ‘이번만’이란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자신의 요청이 무례하거나 하나님을 화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도 그가 하나님을 계속해서 시험한 것을 보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보다 적에 대한 두려움이 더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기드온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은 무한히 참으시고 기드온의 무례한 요청을 다 들어주십니다. 이에 대한 기드온의 반응이 본문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기드온이 이제는 확실하게 믿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연약한 자신의 일꾼들에 대해 참아주시며 그가 믿음으로서 나갈 수 있을 때까지 인도하시는 인자가 많으시며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 기드온은 연약하고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 들어 당신의 일꾼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갖도록 도우셔서 결국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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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6-02)

 

 


연약한 기드온을 부르심

사사기 6장 11-24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면서 그 특색에 따라 이름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 이레, 여호와 샤파, 엘샤다이 등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본문에는 샬롬이라는 단어는 평화라는 뜻으로서 ‘여호와 샬롬’은 평화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 본문에는 이스라엘은 여사사인 드보라를 통해 구원 받은 후 40년 동안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안정 속에서 또다시 악을 행하였습니다. 미디안을 통해 이스라엘을 징계를 받고, 힘들어할 때, 한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기드온의 모습은 연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연약한 기드온을 통해 이끌어 가십니까?

 

부르심을 받은 기드온(11-14)

오늘날 교회나 나라가 어려움을 당할 때, 이런저런 불평하며 비판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가 어두울 때 사람들은 두 가지 점에서 절망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고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다는 절망감입니다. 둘째는 자신을 자격과 능력이 없어서 시대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는 무능력한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그 문제를 기드온처럼 ‘네가 그 문제를 해결하라. 그래서 내가 너를 거기 보낸 것이 아니냐?’라고 하실 것입니다.

 

11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13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14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11-14)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질책하셨지만(8-10), 그들의 부르짖음(6-7)을 지나치지 않고, 미디안의 수탈에 이스라엘 자손은 또 다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11-24).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고향 오브라로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머뭅니다. 11절은 오브라를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로 길게 설명하는데, 본 사건의 마지막에 이곳에 여호와의 제단이 세워집니다(24절). 그 시각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3-5) 포도즙 짜는 곳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바람이 날리는 넓은 장소에서 타작을 하지만 포도즙 짜는 돌 구덩이에서 하면 발각될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을 ‘힘의 용사’(“큰 용사”)라 부르며 여호와가 그와 함께하심을 전합니다(12). 숨어서 타작하는 자를 ‘큰 용사’로 부르는 것은 어울리지 않지만, 하나님의 함께하시면 가능할 것을 예고합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불러 사명을 주거나 힘을 북돋을 때 언급됩니다(창28:15; 출 3:12; 수 1:5). 이는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셨고 그에게 미디안을 무찌를 힘과 능력 주실 것을 뜻합니다(16). 기드온은 갑자기 낯선 사람이 나타나 타작하는 것을 들킨 것에 놀랐고 그의 말에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신다는 말에 안심했겠지만 그의 정체를 알아채지는 못했습니다. 사자를 “나의 주”(아도니)라고 부르는데 상대를 높여 부르는 표현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 메시지가 특별히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미디안의 압제 속에 있는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니요?”라며 냉소적으로 응수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지배 아래에 있고 출애굽 때 베푼 구원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부재의 증거로 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고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다며 탓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고 이방의 손에 넘기신 것은 우상숭배 때문임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고 사사들을 일으켜 이방의 압제에서 구하셨는데, 기드온은 이 모든 기적을 묵과한 것입니다. 기드온의 말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를 엿보게 합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상호 신의를 다해야 하는 언약 관계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영적, 도덕적 상태를 점검하지 않고, 눈앞의 현실과 이기적인 사고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나 선지자를 보내 지적한 것도 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8-10; 2:11-13). 기드온의 이런 냉소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즉각 “가서 이 네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는 임무를 주십니다(14). 기드온이 입다(11:1)처럼 실제로 큰 용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힘’이란 단어의 반복(12,14)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14)란 수사적 질문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기드온에게 임할 것을 확신시킵니다. 좀전까지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원계획을 세워 두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기적(13)은 믿음이 적고 의심은 많은 기드온을 통해 나타날 것입니다.

 

기드온의 거절과 표징의 요구(15-18)

성경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인물들은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해 때로 의심하고 실수하고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 구언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오늘 기드온 역시 그렇습니다.

 

15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16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17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18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너 돌아올 때까지 머무르리라 하니라(15-18)

 

기드온은 예기치 못한 부르심과 임무를 거절합니다. 그는 ‘어떻게 제가 이스라엘을 구하겠습니까?’라며 자신에게는 힘도 없고 자격도 없다고 합니다. 자신의 가문이 므낫세 지파 중 가장 약하고, 자신은 집안에서 가장 작다고 말합니다. 가문의 약함(달)은 가난하고 낮은 신분을, 작음(짜이르)은 어리고 보잘 것 없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실상 그의 아버지의 집에는 열 명 이상의 종들과 수소나 염소 등 가축이 있었고, 많은 돈을 들여 제작해야 할 우상들과 제단도 있었습니다(25, 27;17:4). 기드온과 형제들은 미디안 왕들의 눈에 다 왕의 아들들처럼 보였습니다(8:18). 즉 그의 집안이 상당한 부와 권세를 가졌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사회적 신분과 개인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던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분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할 수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14).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임을 믿지 못했습니다. 기드온이 이렇게 주저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기드온과 반드시 함께하실 것을 재확증 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16).

12절과 마찬가지로 기드온에게 그분의 임재와 능력이 임할 것을 약속합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을 마치 한 사람 치듯 쉽게 무찌를 것이고 이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기드온은 아직 확신이 없어 자기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는 분이 정말로 하나님이신지 표징을 보여달라고 청합니다. 그는 아직 여호와의 사자의 정체를 인지하지 못했기에, 낯선 자가 하나님을 운운하며 자신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추긴다고 여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하며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의 모습은 모세(출 4:1-8)나 예레미야(렘 1:4-9)에게서도 나타났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데는 그분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반드시 필요함을 보여줍니다(사 6:8).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표징을 보이기 전까지 그곳에 머물러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사이에 그는 가서 예물을 갖고 와서 여호와의 사자 앞에 차려놓겠다고 설명합니다. “예물”(민하)은 ‘소제’의 의미도 있으나 여기서는 ‘선물’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방문한 천사들을 접대한 것(창 18:3-8)처럼 기드온도 사자에게 음식을 대접하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수락합니다.

 

기드온에게 표징을 보여주신 하나님(19-24)

지극히 평범하고 약한 자를 들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감당케 하십니다. 스스로 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불가능한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사하면서 영광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셨을 때, 지체하지 않고 순종해야 합니다.

 

19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20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하니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라 21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22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4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19-24)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표징을 보여주시자 기드온은 부르심에 응합니다.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대접할 음식으로 염소 새끼 한 마리와 무교병을 준비합니다. 염소는 희생제 사용이 아니므로 굽거나 삶아 고기를 준비했고, 남은 것으로 국을 끓였습니다. 가루 한 에바(22리터)로는 무교병을 준비했습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누룩을 넣지 않은 전병을 만든 것입니다. 기드온이 준비한 새끼 염소와 엄청난 양의 가루는 당시 이스라엘의 궁핍한 상황을 고려할 때(3-6) 상대에 대한 아낌없는 호의와 헌신이었습니다. 그는 준비한 것을 상수리나무 아래 있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대신 기드온에게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 위에 올리고 국을 그 위에 부으라고 명했습니다. 기드온이 순종하자 여호와의 사자는 지팡이를 뻗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었습니다. 그랬더니 바위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태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표징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여호와의 사자는 사라졌습니다. 기드온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당황했지만, 그제야 그동안 자기의 대화 상대가 여호와의 사자였음을 깨닫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의 요청대로(17) 하나님께서 표징을 보여주셨는데도 감격할 겨를도 없이 자신이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했으니 죽을까 겁에 질립니다. 여전히 그가 믿음이 적고 두려움이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기드온에게 여호와는 ‘안심하라(샬롬), 두려워 말라, 네가 죽지 않을 것이라’며 거듭 진정시키고 안심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안심시키는 말씀에 기드온은 마음의 평안을 되찾습니다. 그는 자신이 요구한 표징을 하나님이 친히 보여주셨음을 깨닫고 이에 하나님의 부름에 응합니다. 그는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고 ‘여호와 샬롬(평안)’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 제단을 쌓는 일은 그 일을 기념하며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는 의미입니다(창 12:7; 13:18). 저자는 이 제단이 아비에셀 가문의 오브라 성읍에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덧붙임으로써 본 사건의 진정성과 역사성을 부각합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해도, 때로 무지하고 의심을 품고 있어도 우리를 큰 용사가 되도록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안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명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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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6-01)

 


미디안을 통한 징계

사사기 6장 1-10절


사람이 살아가면서 한두 번은 실수할 수 있습니다. 처음 몇 번은 다음에는 조심해야지 라고 되새깁니다. 실수를 통해 치명적인 손해를 보면 자신의 삶을 고치게 됩니다. 그러나 실수에 대한 아무런 대가가 지불되지 않거나 생각보단 미약하게 지불되면 실수에 대한 회개 없게 되어집니다. 똑같은 실수를 또 하게 되어집니다. 하지만 몇 번의 실수를 하다보면 조심성이 없어집니다. 실수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일상생활이 됩니다. 자신의 영혼을 망치는 지름길이 되어지고 맙니다.

 

 

  • 하나님을 다시 배역한 이스라엘은 이번에는 미디안의 압제를 받게 됩니다. 압제에 시달린 백성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난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임을 지적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깨닫고 회하기를 원하는 이유에서입니다.

 

이스라엘의 배역과 하나님의 심판(1-5)

사람의 눈에 보이는 좋은 것과 높은 지위와 뛰어난 실력 등이 우리를 지켜 주고 성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그것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세운 우상들은 삶을 풍요롭게 하기는커녕 평안함을 빼앗아 갈 뿐입니다.

 

1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2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3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치러 올라와서 4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5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1-5)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배역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사사기 6-9장은 대사사 사이클 네 번째로 사사 기드온(6-8장)과 그의 아들 아비멜렉(9장)에 대한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드보라와 바락의 활약으로 야빈의 압제에게 벗어난 40년간 태평성대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평안 중에 하나님을 잘 섬기기보다는 점점 하나님께 다시 반복해서 범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사기 6:1-9은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신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눈에 죄를 짓는 이스라엘의 행태는 옷니엘부터 시작하여 에훗과 드보라 시대에 이어 이번에도 반복됩니다(3:7,12; 4:1).

한 사사의 서사가 끝나고 이스라엘의 배역이 매번 재등장하는 것은 영적 타락이 심화 됨을 암시합니다(2:19). 하나님을 배역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경고하신 대로 숭배하던 우상들이 그들의 삶에 올무가 된 것입니다(2:3). 이는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행하는 분이며 심판자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스라엘은 7년 동안 미디안의 속박을 당합니다. 미디안의 핍박은 앞에 기록된 사사 이야기(3-5장)에 나온 다른 이방의 압제보다 훨씬 상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디안족속’은 아브라함과 후처 그두라 사이의 아들 미디안(창 25:1-2)의 자손들입니다. 이들은 요단 동편의 남부에 거주했으며, 시내 반도부터 요단 동편의 북부까지 오가며 생활한 반유목민이자 대상입니다. 모세가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와 우호적인 관계를 이뤘으나, 광야 여정에서 이스라엘과 미디안은 적대 관계에 놓였습니다. 미디안은 모압과 결탁하여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했고(민 22:4), 싯딤에서 이스라엘을 음행과 우상숭배에 끌어들였습니다(민 25장).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미디안 왕들과 백성을 죽이고 마을을 노략하고 불태우게 하셨습니다(민 31장).

그런 상황이 역전되어 지금은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이겼습니다. ‘이겼다’란 동사는 사사기에서 두 번 나왔는데, 옷니엘이 대적 구산 리사다임을 이겼다는 내용(3:10)에 한 번 더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배역과 사사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을 대조한 것입니다.

미디안은 다른 유목민들인 아말렉 족속과 동방 사람들을 끌어들여 이스라엘을 약탈하곤 했습니다. 아말렉족속은 요단 남서쪽의 네게브, 요단 동편, 시내 반도을 순회하며 살았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 간의 적관계는 출애굽 때부터 포로기 이후까지 줄곧 등장합니다. 사사시대에는 아말렉이 에훗 당시 모압 왕과 동맹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3:13). “동방 사람들”은 어떤 민족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미디안과 아말렉에 합류한 것을 보면, 두 민족 근처에 있는 대상 유목민들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들이 약탈하자 산에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만들어 대비하였습니다. “웅덩이”는 ‘바위틈이나 산골짜기’인 듯하며, 곡식을 저장하거나 몸을 숨기는 용도였을 것입니다. 미디안 연합군은 이스라엘의 파종 후부터 추수기 사이에 침입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건기 후 이른 비가 내리는 10,11월에 파종을 하고, 우기를 지나 3,4월부터 겨울 보리를 시작으로 한 해의 첫 수확을 시작합니다. 약탈자들이 싹이 나고 곡식이 자랄 때 침입했다면, 짐승들로 밭을 휩쓸어 먹게 하고, 자신들은 이스라엘 가정의 저장고를 털었을 것입니다. 침입자들은 유목민이자 대상들이므로 짐승들과 장막들을 소유했는데, 이것들을 다 끌고 올라왔습니다. 이 점은 그들이 이스라엘 영토에 오래 머물면서 약탈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또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메뚜기 떼와 같았습니다. 대적의 군대를 메뚜기 떼로 비유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매개임을 상기시킵니다(골 2:25). 그들의 가축 때 속에는 낙타도 무수히 많았습니다. 짐과 사람을 나르던 낙타는 이번에 말과 철 병거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노획물을 싣는 데 사용될 것입니다.

한편 이들은 요단 동편에 운집하여 요단강을 건너왔을 것입니다(33). 그들은 진을 치고 노략질을 시작하여 지중해 연안 남단의 가사 지역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토지 소산을 휩쓸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양식은 남기지 않았고, 생계유지에 필요한 양과 소나귀까지 다 끌고 갔습니다. 메뚜기 떼처럼 몰려와 산물과 재산을 싹 쓸어가는 모습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임했음을 암시합니다(골 1:47; 신 28:31,33). 이스라엘은 지배자인 미디안 왕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기에(3:14-15), 살림이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한 해의 수확까지 빼앗기고 땅이 황폐해졌으니 끼니 걱정까지 했을 것입니다. 그나마 약탈자들이 몰려올 때 굴이나 산성에 숨어 위험한 순간을 모면한 채 비밀 저장소에 둔 곡식으로 연명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하나님의 응답(6-10)

오늘날 성도들이 물질을 위해 노력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닌 방법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줄 알면서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지속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수고하지만, 결산을 해보면 항상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만 시키고 자신은 빈손으로 돌아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쉽게 결단을 못하고 ‘이번 한번만’ 하면서 그러한 일이 지속되고 있다면, 빨리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육신도 만신창이가 되어 병들고, 영혼도 망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6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7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8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6-10)

 

이스라엘은 마침내 다시 하나님을 찾습니다. 미디안의 지배와 약탈이 7년 동안 계속되었으므로 그들은 궁핍함이 심했습니다. 여기서 ‘궁핍하다’(달랄)는 ‘낮아지다’, ‘보잘것없게 되다’의 뜻도 있어, 단순히 곡식이 없어 육체적으로 굶주리고 경제적으로 시달린 것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피폐하게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되자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이들이 미디안으로 인해 여호와께 부르짖었음은 6-7절에 두 번 반복되었습니다. 그만큼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어 절박한 상황임을 드러냅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사사 이야기에서처럼 이들의 부르짖음에는 회개했다는지 악행에서 돌이켰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제 이스라엘이 부르짖었으므로, 앞의 사사들 시대처럼 하나님께서 곧 사사를 부르실 것이 기대됩니다(3:9,15;4:4).

 

그런데 이번에는 이 예상을 깨고, 다른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사(기드온)를 부르기에 앞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선지자의 메시지는 이전에 여호와의 사자가 전달한 내용(2:12)과 유사하며, 하나님의 책망을 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먼저, 그가 전하는 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임을 확실히 합니다(8).

메시지는 두 부분이며, 첫 부분(8-9)은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지난 일들을 다섯 문장으로 진술합니다. 그 내용은 첫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종들의 집이었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나오게 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만 아니라 광야와 가나안 땅에서도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이방 민족들에게서 그들을 건지셨습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광야와 가나안 땅에서 이방 족속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습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 쫓아낸 자들의 땅을 그가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셨고 그가 은혜를 베푸셨음을 증명합니다.

둘째 부분(10)은 이 같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도 불구하고, 그와 맺은 언약에 충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임을 언급하십니다. 이 어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다시금 일깨우는 말입니다. 하나님꼐서는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모리 사람”은 가나안의 특정한 족속이 아닌 ‘가나안 족속’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아모리사람의 땅”은 ‘가나안 땅’을 뜻합니다. ‘두려워하다’는 ‘경외하다’의 뜻도 있으며, 이 명령에 그 의미도 내포되었습니다. 우상들은 참 신이 아니므로 두려워할 필요도 없으며, 그것들을 경외하고 섬겨서도 안 됩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만이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임을 일깨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나온 그들의 조상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어떻게 섬기나 관심 두지 말고, 그들의 우상숭배를 따라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신 12:30). 또 이를 지키지 않으면 대적의 침략 등 숱한 재앙이 있을 것과 최후에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레 26:14-39; 신 28:15-68). 동시에,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선과 의를 행하면 그들과 후손에게 복을 영원히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신 12:28; 28:114). 이 경고와 약속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세대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눈에 합당한 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사람과 그들의 우상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방 우상들에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방의 압제와 착취에 시달리며 고통 당해야 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셔서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회복으로 이끄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때 속히 깨닫고 그분의 은혜를 향해 나아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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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5-02)

 


드보라의 승전가(2)

사사기 5장 19-31절


 

 

회사나 직장에서 쓰임을 받기 때문에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커다란 공적으로 많은 수익을 낼 수 있겠지만, 때로는 실수로 인해 큰 손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도움을 준 것과 잘못을 범한 것에는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는 공과 과를 언급하며 적절한 대가도 기원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기손 강 전투에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왕들의 군대를 크게 물찌르셨습니다.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돕지 않은 메로스 주민들은 저주를, 도운 야엘은 축복의 전갈을 받습니다. 죽은 아들의 금의환향을 기다리는 적장 시스라의 어머니는 애처롭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을 누립니다.

 

 

드보라의 찬양(19-30)

 

믿음은 인생에서 분명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참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평안의 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적하는 자는 죄의 횡포에 눌려 고통과 신음 속에 결국 패망할 것입니다. 드보라의 노래는 이렇게 엇갈린 인생의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19왕들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20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21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22그 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 소리가 땅을 울리도다 23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24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25시스라가 물을 구하매 우유를 주되 곧 엉긴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고 26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일꾼들의 방망이를 들고 시스라를 쳐서 그의 머리를 뚫되 곧 그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도다 27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 28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하매 29그의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30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 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19-31)

 

드보라는 승리의 노래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백성에게는 축복이, 대적들에게는 저주가 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개입과 적군의 패배(19-22)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계속됩니다. 이 단락은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기존 강에서 적군을 물리치신 사건(4:15)을 시적으로 묘사합니다. 19절과 22절은 적군의 패배를 기록하고, 중간인 20-21절에 하나님의 개입을 기술함으로써 중간 부분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19절에는 적군으로서 시스라가 아닌 “왕들”과 “가나안 왕들”이 먼저 등장합니다. 하솔왕 야빈의 이름은 5장에서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4장에서는 바락과 시스라 간의 전투에 집중하고, 시스라와 군대가 전멸됨을 보여줌으로써 압제자 야빈 왕의 패배를 부각했다면, 5장에서는 이 전쟁을 이스라엘 전체와 가나안 사이의 전쟁으로 확대하여 참여한 모든 이방 왕의 패배를 부각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여기서 가나안 왕들은 시스라 군대의 동맹군입니다. 여호수아 때 하솔 왕도 이스라엘을 칠 때가나안 북부의 여러 왕들을 소집했습니다(수 11:1-5). 군사가 해변의 모래와 같았고 말과 병거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번 전쟁도 유사했을 것입니다. 가나안 왕들은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 싸움을 벌였습니다. 므깃도와 다아낙은 기존 강 남부의 성읍이며, 므깃도 물가는 결국 기손강을 뜻합니다. 바락이 오른 다볼 산(4:12)은 기손강의 동북부에 있으므로 두 군대는 중간 지점인 기손강 골짜기에서 교전합니다. 가나안 왕들은 적은 병력으로 모여든 이스라엘을 보고, 쉽게 이겨 많은 전리품을 취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날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별들을 동원하여 땅의 군대와 싸우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별들은 비를 몰고 오는 원천을 뜻합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라, 얕은 시내와 같던 기손 강은 급격히 쏟아진 폭우로 금세 물이 불어났고, 주변은 진창이 되었습니다. 급류로 시스라 군대와 병거는 뒤집혔고, 물에 쓸려갔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교란 작전이 있었으므로(4:15), 폭우 외에도 천둥과 번개 등이 동반되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은 하나님의 강림(4-5)을 암시합니다. 유사한 현상을 동반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나 다윗의 싸움에서도 목격됩니다(출 14장; 삼하 22장).

21절 끝에 나온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는 적군을 무찌르는 장면의 시적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의 강림과 기습 공격으로 적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패전 군의 줄행랑치는 장면은 적군의 말들이 말발굽을 박차며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 이 구원 사건은 후대에도 그분을 찬양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시 83:5).

 

(2) 메로스를 향한 저주와 야엘을 향한 축복(23-27)

 

다음은 메로스의 주민들(23)과 야엘(24-27)이 각각 저주와 축복의 선언을 받는 장면입니다. 대조적인 두 내용은 전투에 참여한 지파와 불참한 지파가 각각 칭찬과 책망을 받은 것(14-18)과 같은 맥락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먼저 메로스의 주민들에게 저주가 선포됩니다. 메로스는 이곳 주민들이 이스라엘의 전투를 돕지 않아 저주의 대상이 된 것을 보면, 전쟁이 일어난 기존 강 주변 마을로 추정됩니다. 이들을 향한 저주의 선언은 그 강도가 셉니다. ‘거듭거듭 저주하라’(23)는 ‘사정없이/철저히 저주하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불참한 지파들은 꾸지람만 받았고 저주의 선언은 받지 않았습니다(15c-17). 이런 점에서 봤을 때, 메로스 주민들이 심한 저주를 선고받은 것은 그들의 죄가 중하고, 이 저주가 번복될 수 없는 판결임을 암시합니다. 드보라는 이스라엘을 돕지 않았던 이들의 죄를 여호와에 대한 반역으로 여깁니다. ‘대적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을 도우러 오는 행동’은 ‘여호와를 도우러 오는 행동’과 동일한 까닭입니다(23). 이들의 죄목인 여호와를 돕지 않았음이 두 번 반복되어 그들 죄의 무거움과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에게 합당함을 부각합니다. 반면, 헤벨의 아내 야엘은 여느 유목민 여인보다 더 축복받는 여인이 됩니다. 그녀가 시스라를 처단한 것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꾀한 것이므로 영광과 축복을 받을 일(4:9; 5:24)로 평가되었습니다. 더구나 이방인에다 여인으로서 이런 공을 세웠으므로, 동족의 전투를 방관한 자들을 더 부끄럽게 만듭니다. 야엘의 영웅담은 25절에서 ‘시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물을 그가 구했다’로 시작합니다. 이 문장에서 ‘물’이 강조되었는데, 이 물은 바로 직전에 시스라 군대를 멸한 근원이지 않았습니까! 야엘은 물 대신 엉긴 우유(요구르트, 크림)를 귀한 그릇에 담아 줍니다(비교. 4:19). 음료와 그릇 정보는 물을 요구한 자가 귀한 신분이며, 이에 야엘이 정중하게 대접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렇기에 야엘이 이 남자를 죽이는 모습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야엘이 그를 죽이는 장면(26)은 상세히 묘사되어 그녀의 영웅적인 행동과 적장을 죽인 쾌거를 극대화합니다. 야엘의 왼손은 장막 말뚝으로, 오른손은 일꾼들의 나무망치로 뻗쳤습니다. 야엘은 ‘시스라’를 망치질했습니다(이제야 이 남자의 정체가 밝혀진다). 특히, 그의 머리를 부쉈습니다. 정확히는 그의 관자놀이를 찔러 꿰뚫었습니다. 연이어 시스라가 죽는 장면(27)도 상세히 묘사되어 청중에게 통쾌함을 선사합니다. 4장에서는 그가 기절해 죽었다고만 나왔으나(4:21), 여기서는 그가 죽어가는 순간을 한 컷 한 컷 보여주고, 또 반복합니다. 시스라의 몸은 야엘의 기습 공격으로 그녀의 발 사이에 구부러졌습니다. 그는 그곳에 쓰러졌고 누웠습니다. 시스라가 구부러지고 쓰러지는 동작은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마치 TV에서 같은 장면을 되풀이하여 재미와 극적 효과를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시스라는 그의 몸이 구부러진 곳, 바로 야엘의 발 사이에서 죽어 엎어졌습니다. 이때 “죽었도다”는 ‘큰 타격을 받다’, ‘멸망하다’의 뜻으로, 시스라의 확실한 죽음을 알리고, 그의 지위와 명성이 다 무너졌음을 함축합니다.

 

(3) 시스라의 어머니의 헛된 기대(28-30)

 

시스라는 이미 여인의 손에 죽었건만, 이를 알 리 없는 어머니는 개선장군이 되어 올 아들을 헛되이 기다립니다. 야엘의 장막에 집중되었던 이야기는 이제 이방나라로 옮겨져,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한 여인에게서 멈춥니다(28). 이 여인은 시스라의 어머니로서, 창살 틈으로 ‘아들의 병거가 왜 이리 늦어지느냐?’며 노심초사합니다. 아들의 귀환이 늦어지므로 창가를 떠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이에 지혜로운 시녀들은 ‘노획물을 왜 나누지 못했겠어요? 다들 한두 처녀쯤 얻었겠죠. 시스라 장군님은 수놓은 채색 옷을 휘감고 오실 거예요’라고 응수합니다(30). 이들의 말은 시스라 군대가 대승을 거둬 노획물을 나누느라고 귀환이 늦춰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두 처녀”는 포로로 잡은 여자를 노예나 첩으로 삼는 일로서 승전한 군대의 흔한 모습입니다. 시스라의 노획물 중에서 “채색 옷”이 세 번 반복되었고, 특히 수놓은 물건임이 강조되었습니다. 금의환향에 걸맞게 화려한 옷을 두르고 돌아올 시스라를 모두 기대하고 있습니다. 시녀들의 말은 그동안 시스라가 많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용사였음을 알려줍니다. 어머니도 시녀들의 말을 스스로 되뇌며 위안을 받고, 들뜬 마음으로 아들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채색 옷을 휘감은 시스라가 아니라, 피범벅이 된 처참한 시신이 그들을 기다립니다. 여인을 전리품으로 얻기는커녕 시스라는 한 여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수치스러운 결말을 맞았습니다(9:54). 어머니의 기대나 시녀들의 지혜로움은 실제로는 허망함과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찬양의 마무리와 땅의 평안(31)

 

많은 봉사의 자리가 충성스러운 일꾼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무 바빠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사역과 봉사의 부르심을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용기를 내었던 야엘이 받은 승리와 복을 헌신의 자리에서 날마다 경험하기를 축복합니다.

 

31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31)

 

찬양의 끝은 하나님의 원수들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저주와 축복의 기원입니다. 마침내 이방인의 압제가 끝나고, 땅에 평온함이 찾아듭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하나님의 평안을 누립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함께 부르는 승전의 노래에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승리와 그 승리에 동참한 이스라엘의 영광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승리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세상 길에 있지 않고 십자가의 길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해가 힘 있게 돋는 것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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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5-01)

 


승리 후 찬양을 드리는 드보라

사사기 5장 1-18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승리하게 하실 때, 그 은혜와 승리를 찬양하고, 또 예배를 드리는 것은 너무 귀중한 일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심을 기억하고, 베풀어주신 은혜를 찬송할 수 있다면, 비록 우리의 현실과 상황에서 낙심되는 많은 일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용기와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원망과 불평 속에 길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감사하고 찬송할 때, 우리가 쉼을 회복할 수 있고,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 본문은 드보라와 바락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가나안 시스라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드보라는 찬양을 통해 전쟁의 진정한 영웅이신 여호와를 찬양하고, 여호와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한 자들에 대한 축복과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저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찬양에 초대(1-3)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떠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지나 온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찬양과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께 행하신 일을 기억할 때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1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2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3너희 왕들아 들으라 통치자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4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1-4)

 

사사기 4장과 5장 모두 같은 사건인 시스라와의 전투를 배경으로 다루지만, 4장은 서사로, 5장은 시로 기술하여, 각각의 문학적 특징을 살립니다. 특히, 5장의 시는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바치는 찬양이며 4장에서 수수께끼 같았던 하나님의 강림과 초자연적인 개입(4:15)을 시적으로 묘사합니다. 언급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헌신을 부각하는 등 4장을 보완해줍니다.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찬양이 울려 퍼집니다. 드보라가 찬양을 이끌며, 바락과 백성을 불러 찬양에 동참하도록 권합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계기는 이번 전투에 이스라엘 백성의 깊은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보라와 바락(4:6-9)을 중심으로 스불론, 납달리 등 여러 지파가 참여했고(14-15), 이들의 헌신이 승전의 한몫을 감당했습니다. 이들의 ‘즐겁게 헌신함’(2,9)은 ‘자원제’처럼 자발적 참여를 함축합니다. 하나님 찬양에 동참해야 할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만 아니라 열방 왕들, 특히 전투에 패한 가나안 왕들도 포함됩니다. 이 모두의 찬양의 대상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십니다(3).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전쟁 전의 이스라엘(4-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처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친히 개입하셔서 구원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역사를 경험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책임을 주습니다.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의 선행과 이웃을 향한 섬김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전해져야 합니다.

 

5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6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7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8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으나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5-8)

 

4-5절은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당시 하나님의 강림 사건들을 회고하며, 이번 전투에 강림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출현은 에돔과 시내산 두 장소와 관련하여 회상됩니다(신 33:2; 시 68:7-8). 여호와가 에돔(‘세일과 에돔 들’, 4)에서 출정하신 장면은 하나님께서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이스라엘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시며, 열방으로부터 보호하셨음을 함축합니다(민 10:33-36; 20장). 시내산에서의 강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상기시킵니다(출 19장).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면 온 천지가 그들의 창조주를 알아보고 반응합니다. 땅에서는 지진이 나고, 하늘에서는 비, 우박, 천둥, 번개가 쏟아지며, 화산이 터지고 산이 진동합니다(시 18:12-13).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그의 언약 백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으니, 백성과 열방이 하나님께 찬송으로 화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6-8절은 이스라엘의 암울했던 시기를 묘사하여 하나님의 강림과 개입이 절실했음을 보여줍니다. 드보라는 이 시기를 블레셋과 하솔의 지배기로 부르지 않고 각각 삼갈과 야엘의 날로 칭하여 이들의 헌신을 높입니다. 이 둘은 하찮은 도구를 이용해 적을 무찌른 용맹한 자이며 이방인입니다(3:31; 4:17-22). 이 시기에는 적군이 대로를 장악하고 행인들을 괴롭혀 무역상이나 행인들이 그 길 대신 좁고, 험하고, 인적이 드문 길로 우회해야 했습니다. 시골 마을들은 이방인의 공격에 사람이 줄고,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드보라는 이런 날이 자신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고 애통해합니다. 드보라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칭하며, 자신의 소명이 어머니가 자식을 보호하고 양육하듯 이스라엘을 위하는 역할임을 밝힙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야빈 왕의 혹독한 지배를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을 배역하고 우상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4:1).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자(4:3), 하나님께서는 바락으로 시스라 군대에 맞서게 하셨습니다. 지파들의 참여(14-15)로 4만 명 이상이 이 전투에 가담했습니다(8). 그런데 그들에게는 방패나 창 등 싸움에 나갈 무기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바락이 하나님의 부름에 주저했던 이유들이었을 것입니다(4:8). 그렇지만 이런 상황이기에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이 더 놀랍고 감격스럽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을 찬양(9-13)

승리의 찬양 속에 함께 헌신한 이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또한 함께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책망 섞인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함께 기뻐하며 슬퍼하는 공동체가 되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함께 누리며 찬양해야 합니다.

 

9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10흰 나귀를 탄 자들, 양탄자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전파할지어다 11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이스라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12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13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9-13)

 

드보라는 전쟁에 헌신한 자들을 칭찬하며 하나님 찬양에 적극 초대합니다. 드보라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이끌었고, 그들이 전쟁에서 헌신한 점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또한 그들의 헌신이 자화자찬으로 끝나지 않게, 하나님에 대해 감사하고 그분의 놀라운 일을 전파하도록 명합니다. 앞서 열방이 하나님 찬양 명령을 받았고(3), 이제는 이스라엘에서 흰 나귀를 타고, 값진 양탄자에 앉은 자들, 즉 높은 지위와 부를 가진 지도자나 방백 또는 무역상들, 그리고 일반 행인들도 하나님의 공의를 전파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드보라의 ‘전파하라’는 명령(9-11)에는 하나님의 구원에 담긴 ‘공의’가 강조되었습니다. 덧붙여, ‘전파하다’(씨아흐)는 ‘곰곰이 생각하다’의 뜻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제대로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백성 모두 이방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대로를 활보할 수 있으니(비교. 6), 하나님의 공의를 전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의 활 쏘는 자들도 모여 찬양하며, 고통 속에 있던 마을 사람들(6)도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공의를 전해야 합니다.

11b-13절은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난 전쟁에 대한 회고입니다. 그때 백성들은 적군과 싸우러 성문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으로 불려 하나님께 헌신한 언약 백성임이 부각됩니다. 드보라와 바락은 백성의 대표로서 각자의 역할을 다짐받습니다. 12절의 외침은 드보라가 자신과 바락의 역할을 일깨우려는 시적 표현이거나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해됩니다. ‘행동을 개시하라’는 의미의 ‘깰지어다’(12)란 명령이 네 번 반복되면서 드보라에게 찬양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찬양의 임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선지자와 사사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역할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락에게는 용사로서 일어나 적군을 사로잡아 끌고 오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남은 백성도 전쟁에 동참합니다. 이에 여호와가 강림하여 선두에 나서십니다. 세일과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여호와(4-5)가 이제 이스라엘을 구하러 강림하셨습니다. 이때 “여호와”는 ‘여호와의 백성’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13).

 

전쟁에 참여한 지파와 참여하지 않은 지파(14-18)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구원 역사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해 일꾼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이 부르심에 응답해 사역에 최선을 다해 애쓰고 수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 그들의 수고에 대해 하나님께 칭찬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맡기신 사명에 한마음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14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은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이요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 15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6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7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18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14-18)

 

이 단락은 전쟁에 참여한 지파를 칭찬하고(14-15b,18), 불참한 지파를 꾸짖는(15-17)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불론과 납달리에서 만 명을 소집하셨으나(4:6), 실제 전쟁에서는 에브라임, 베냐민, 잇사갈, 므낫세 반 지파도 동참해, 약 4만 명의 군대를 조성했습니다(8). 이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에 합당합니다. 드보라의 출신지인 에브라임에서는 아말렉이 거주했던 지역(12:15)의 사람들이 동참했습니다. 그들에 이어 베냐민 지파가 싸움터로 내려왔습니다. 에브라임의 북쪽 므낫세 반 지파(“마길”)의 용감한 장수들도 출정했습니다. 므낫세의 북쪽 경계인 스불론, 잇사갈 지파도 대장군과 방백들을 보냈습니다. 잇사갈 지파와 바락이 드보라와 합류했으며, 잇사갈은 특히 바락의 뒤를 바짝 쫓아 골짜기로 돌진했습니다. 반면, 단, 아셀 지파 및 요단 동편 지파(므낫세, 갓, 르우벤)는 주저했고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므로 질책을 받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가나안 입성 전에 기업을 분배받는 조건으로 요단 서편 지파들의 전투에 참여할 것을 약속했습니다(민 32장).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을 어겼습니다. 물과 목초지가 풍부한 땅을 얻은 르우벤 지파는 시냇가(또는 친족들)에 모여 전쟁에 참가할 지 고심했으나 출정하지 않았습니다. 길르앗, 단, 아셀지파는 고민하는 수고조차 없이 그저 일상생활에 충실했습니다. 므낫세 반 지파와 갓 지파(길르앗)는 거주지에 머물렀고, 단은 배 타고 무역을 했으며, 아셀은 거주지인 지중해 연안에서 생업에 종사했습니다.

18절은 다시 참여 지파로 돌아가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를 크게 칭찬합니다. 하나님과 지도자의 명에 순종하여 출정한 그들(4:9,14)은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헌신과 희생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죄에 빠져 죽음의 덫에 놓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시고 영생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막에 꽃이 핀 것과 같이 황폐한 인생을 새롭게 바꾸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의로운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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