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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7-01)


우상숭배를 대한 미가와 레위 제사장

사사기 17장 1-13절


예수님의 제자인 마태는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까지 무엇을 했었습니까? 그는 “세리 마태”라고 소개합니다(마 10:3). 레위인은 제사장 지파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국노의 대표로 인식하고 있는 세리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로마에 바칠 세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또 다른 영적 타락한 시대를 보여줍니다.

 

  • 본문은 미가라는 한 청년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은을 훔치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어머니께서 훔쳤다가 돌려드린 은으로 우상을 만들고 에복과 드라빈까지 만들어 집에 신당을 차리게 됩니다. 그런데 때마침 떠돌던 레인이 미가의 집에 오게 되었고 미가는 이 레인을 자신의 집 제사장으로 삼게 됩니다. 미가가 이런 일을 한 이유는 복을 받기 위한 것이었지만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미가 집의 제사장(1-7)

하나님께서 부재한 심령에 남는 것은 탐욕에 물든 자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자신의 소견과 소욕을 따라 행하던 시대입니다. 그 끝은 방황과 방탕 혼동과 공허뿐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말하고 듣는 것을 불편해하고, 오로지 다른 관점으로 치부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참된 건의와 기준이 무엇인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내 야망을 이루는 욕망의 도구가 될 뿐입니다.

 

1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2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3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4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6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6)

 

사사기 17-21장은 마지막 에필로그에 해당합니다. 사사기 17-18장은 종교적인 타락을 다루고, 19-21장은 윤리적인 타락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타락의 배후는 하나님에 대한 타락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사기 마지막에 가면 죄악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 사람들이 얼마나 무심해지고 무감각해질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죄를 짓는지도 모르고, 죄를 짓고도 마음 아파할 줄 모르고, 오히려 당당하기까지 한 뻔뻔함이 사사기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신앙은 사라지고 껍데기뿐인 종교만 남은 것입니다.

 

본문에는 미가는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큰 에브라임 지파로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1). ‘미가’라는 이름은 본문에서 두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는 ‘미카 예후’인데 그 뜻은 ‘누가 여호와와 같게 있느냐?’입니다. 미가 선지자와 동명이인입니다. 1절에서 소개할 때 사용되고, 4절에서 미가의 집에서 이 이름이 사용되어 단락을 형성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 말 개역개정처럼 ‘미가’라고 번역하기보다는 ‘미가 예후’로 번역하는 것이 본문의 의도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 이름은 오직 여호아만이 신이라는 것을 고백할 때, 많이 사용되는 구문으로 이 이름 만을 보면, 미가의 어머니가 여호와를 믿는데 열심인 것처럼 보입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은 1100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녀는 이 돈을 가져간 사람을 저주합니다. 이 저주를 듣고 겁이나서 아들 미가는 두려워서 자신이 그 은을 가져갔다고 자백하고 은을 도로 내놓고 있습니다(2). 아들이 어머니의 돈을 도둑질하는 시대가 사사 시대입니다.

아들이 어머니의 돈을 도둑질하는 것은 십계명 중에 ‘내 부모를 공경하라’는 넷째 계명과,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여덟째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통 크게 어기면서도 어머니의 저주, 즉, 하나님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이중성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저주가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미가는 도덕적이지는 않지만, 종교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미가 어머니의 반응도 기대와는 다릅니다. 도둑질한 아들에게 화를 내거나 벌을 내리거나, 적어도 슬퍼할 일입니다. 오히려 도둑질한 아들에게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라고 하면서 복을 빕니다. 이는 자신의 저주가 아들에게 임할 것 같으니깐, 여호와의 축복으로 상쇄시키고 있습니다. 다른 절도범은 저주를 받아도 되고, 자기 아들은 절도범이라도 해도 저주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한 것입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돈을 훔친 자식을 전혀 훈계하거나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돈을 무사히 찾은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난발하고 있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미가에게 은을 돌려주면서 은을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릴 것이며 그것을 가지고 아들을 위해 신상들을 만들 것이라고 합니다(3). 신상을 만드는 것은 십계명의 제2계명을 정면으로 어긴 것입니다. 하지만 미가의 어머니는 그런 결정을 여호와를 위해 그리고 여호와께 복을 받기 위해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은 200을 가져다가 은 세공장에게 주어 신상을 만들었으며 그 신상은 이후 미가 예후의 집에 있게 됩니다(4). 미가의 어머니는 말끝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하고 그분을 위하는 것처럼 말하며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전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가 어머니의 모습은 당시 허울과 형식만 남고 말씀은 전혀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집 안에 신상을 둔 미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에봇과 드라비는 주로 하나님의 신탁을 받을 때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미가는 일반인이 가져서는 안 되는 에봇을 만들고 작은 우상도 만들었습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제사장은 오직 레위인만이 할 수 있는데 이 말씀도 어기고 자신의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고 맙니다(5). 결국, 미가의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제사장을 자신의 집에 두어 여호와를 섬길 곳을 마련하였지만, 그의 방식은 철저히 이방 신을 섬기는 방식이었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자행된 미가와 그의 어머니의 범죄들에 대해 사사기는 “그때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라고 평가합니다(6). 여기서 “왕이 없으므로”라는 표현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왕이신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레위인이 미가집의 제사장이 됨(7-13)

신앙이 우리 욕심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기복주의로 전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의존과 섬김의 대상입니다. 언제든지 자기 만족과 행복을 위해 부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우상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기 부정과 절대 순종을 요구하는 신앙이 우리 욕심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기복주의로 전락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7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8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9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10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11그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니 이는 그 청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12미가가 그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매 그 청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있었더라 13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7-13)

 

이제 7절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데, 유대 베들레헴에서 온 레위인 청년입니다. 여기서 레위인을 ‘나르’, 즉 청년으로 언급한 것은 공식적으로 제사장을 시작하는 나이가 30세가 아직 안 되었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7-9절에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유다 베들레헴 출신 거류민이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지역을 벗어나 떠돌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호수아 21장 4절에 하나님께서 레위인에게 주신 거주지가 있는데, 유다 베들레헴은 그 성읍 명단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신명기 18장 6-7절에 따르면, 레위인이 그가 받은 거주지를 떠나는 경우는 간절히 소원이 있을 때이고, 그 경우에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즉, 여호와의 성소가 있는 곳을 가야 됩니다.

레위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자신을 위해 선택한 사람들로 항상 예배에 봉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규정이 있는데도 이 레인은 유다 지파에 속한 레위인이 거주하는 지역에 살지 않고 이탈하여 성소도 없는 베들레헴의 거류민으로 살다가 다시 에브라임 산지까지 온 떠돌이였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의무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 인물임을 본문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장직을 수행하기에 나이도 어리고 사명도 없는 인물이 미가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미가는 거주지를 찾는다는 레위인의 말에 자신의 집에 고하며, 자신을 위한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일종의 존경의 표시로 제사장이 제사를 집행하고 신탁을 받아 조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미성숙하고 책임감이 없는 아이 거류민에게 미가는 책임이 막중한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레위인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하고 거기서 나온 것으로 생활해야지, 어느 개인에게 소속되어 그의 일을 해주어선 안 됩니다. 하지만, 이 레위인은 미가가 제시한 1년의 은 10과 옷과 음식에 만족하며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레인이 들어갔다”(10)라는 표현은 협상이 성립되었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11-12절은 미가의 집에서 생활하던 레위인의 상황을 정리한 것으로 11절은 레위인의 관점에서 그 생활이 만족스럽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레위인이 아들 중 하나 같이 되었다는 것은 미가의 식구들이 그를 한 가족처럼 잘 대어 주었다는 표현입니다. 즉, 이 협상은 서로에게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라 서로의 합의 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며, 본문은 이 어이없는 상황을 미가의 관점과 레위인의 관점에서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서로의 만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레위인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보다는 자신이 편하고 만족스러운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즉,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지만 철저히 사익을 쫓았으며 이를 위해 하나님의 규례를 어기고 율법을 어기는 일이라도 개의치 않는 인물입니다. 이 레위인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미가 같은 일반인뿐 아니라 레위인까지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무질서한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

 

13절은 전개의 결론으로, 미가는 레위인이 자신의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미가 이 말은 그의 신앙 형태를 잘 보여줍니다. 이제 재단과 우상과 레위인 제사장까지 완전한 형식을 갖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대로가 아니라 세속화되고 이방화된 종교 생활에 매달리고 있는 미가의 모습은 복음의 진수는 잃어버린 채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과 형식적인 예배, 기도와 헌금만이 기독교의 전부인 줄 알고 이것만 잘하면 복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시대의 성도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지기 않는 삶에는 도덕적 무질서와 해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관심보다는 종교적 의형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의로운 삶의 변화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나타나도록 힘써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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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6-03)


은혜로 마지막을 장식한 삼손

사사기 16장 23-31절


우리는 내일을 알 수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막연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고, 우리가 경험한 일들 조차 때로는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것이 합력에서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큰 용기와 힘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하신 재료는 선한 것들뿐만 아니라 악하고 나쁜 동기까지 주님은 사용하십니다. 그 모든 것이 은혜의 용광로에 녹아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선으로 빚어가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블레셋 사람들이 다곤 신에게 제사하며 즐거워하고 삼손에게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삼손은 집을 지지하는 기둥을 찾아 붙들고는 원수를 갚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삼손이 힘을 다해 몸을 굽히니 집이 무너져 모두 죽습니다. 그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죽을 때 죽인 자가 많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축제(23-2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힘만 주시지 않고 지혜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힘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없는 자들은 속임수를 사용하기도 하고,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세고 지혜가 출중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자신에게 유익을 주기보다 더 해로움을 줄 것입니다.

 

23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24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23-24)

 

나실인의 고귀한 서약을 저버린 삼손은 이방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진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두 눈이 뽑히고, 놋줄에 매어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삼손 개인의 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농사를 망치고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사로잡고 승리의 감격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 다곤이 이렇게 넘겼다고 감격에 빠졌습니다. 큰 제사를 드리고 승리의 축제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열방 가운데 제사장 역할을 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스라엘로 인해 다른 민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사 시대에는 지속적으로 이스라엘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무시당하고 조롱받았습니다. 본문의 블레셋 사람들도 삼손을 사로잡고서 자신들의 우상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당신의 이름이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조롱당하는 삼손(25-27)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지하지 않았던 자만을 벗어 버리고,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동행하는 사람은 세상을 이길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기도 시간을 통해 그를 만나 주시고 참된 하늘의 능력으로 덧입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25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26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27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들도 거기에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25-27)

 

블레셋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삼손이 자신들의 수중애 잡히자 블레셋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삼손을 조롱하고 그에게 재주를 부리게 했습니다.

삼손은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같은 삼손의 모습은 마치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두 눈이 뽑힌 삼손은 앞을 볼 수 없었기에 자기를 안내하는 소년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그 집을 받치는 기둥에 자신이 기댈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삼손에게는 이제 소망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끝날 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인생은 끝났을지언정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도, 변경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물리쳐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삼손의 최후(28-31)

영원한 것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살아가도록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소생시키십니다.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살아가도록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회의 문이 닫히지 않았을 때 속히 사명의 길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28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1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28-31)

 

삼손은 절망의 순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습니나, 그것은 여호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던 그때에 죽음을 각오한 삼손은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나실인이자 사사로서의 모습을 전혀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일 때문에 분노하여 블레셋에게 복수하길 바랐습니다. 삼손은 자신을 강하게 하여 인수를 갚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이 같은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간구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외치면서 그 건물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을 붙들고 몸을 굽혔습니다. 그러자 건물이 무너져 내려 그곳에 있던 수많은 블레셋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죽인 수보다 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때 죽었습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업적의 기록이 아닙니다.

비장한 최후를 통해서라도 이스라엘을 구원코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엄중했는지를 보여 주는 비장한 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삼손은 시련 속에서 자기의 연약함을 발견했습니다. 지그까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은 결과, 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감당할 힘을 얻었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의지한다면 이러한 변화가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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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6-02)


비극적으로 몰락한 삼손

사사기 16장 15-22절


 

모든 일은 끝이 좋아야 그 일이 잘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작은 미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인생의 끝이 좋으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아무리 위대하게 시작해도 끝이 좋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평가받을 것입니다. 삼손의 인생이 그러했습니다.

 

  • 들릴라가 날마다 조르자 결국 삼손은 머리가 밀리면 힘이 없어진다고 자신의 비밀을 드러냅니다. 머리를 밀린 삼손은 모든 힘을 읽고 눈도 뽑힌 상태에서 블레셋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에게 엄청난 힘을 주셨는데, 삼손은 다원 신전에 몰려든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합니다.

자신의 비밀을 말하는 삼손(15-17)

대부분 인생에 닥칠 불행은 스스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죄의 유혹을 방치하면 처음에는 달콤해도 결과는 혹독하게 영혼이 파멸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평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갈 5:13).

 

15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15-17)

 

들릴라는 삼손에게 집요하게 힘의 근원과 그를 무력화시킬 방법을 물었습니다. 세 번이나 속은 들릴라는 단념하지 않고 순전히 돈에 대한 욕심과 자존심에 대한 오기로 삼손을 더욱더 괴롭혔습니다. 그녀는 삼손에게 여러 번 속자, 이제는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시작해 자신을 세 번이나 희롱했다며, 삼손을 매일 들볶았습니다(15-16).

처음에는 장난처럼 거짓말을 둘러댔던 삼손은, 이제 들릴라에 집요함에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고 표현할 만큼 괴로워하였습니다. 그 자신도 자신의 비밀을 알려주면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재촉하다’라는 말은 사사기 14장 17절에 ‘강요하다’와 같은 단어이며 들릴라가 딥나의 아내처럼 삼손을 압박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삼손은 들릴라가 이 정도로 시험했으면, 삼손도 들릴라는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들릴라에게 진실을 털어놓았습니다(17). 자신이 모태에서부터 나실인이 되었고, 머리털을 밀면 힘을 잃어 다른 사람들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그의 실제 삶과 매우 괴리되어 있습니다. 그가 자기 정체성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백과 삶은 일치해야 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비그리스도안들과 똑같이 사는 것은 삼손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붙잡힌 삼손(18-22)

하나님께서는 주신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의 정욕과 야만에만 이용하면 결국 인생이 몰락할 것입니다. 세상의 쾌락에 눈이 멀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고 주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최후에 하나님께 인정받습니다.

 

18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을 불러 이르되 삼손이 내게 진심을 알려 주었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하니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20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22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18-22)

 

삼손의 비밀을 알아낸 들릴라는 그를 자기 무릎에 뉘여 잠들게 한 후에 그의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이미 철수해 버린 블레셋 지도자들에게 연락하여 돈을 챙겨서 한 번만 더 와 달라고 합니다(18). 들릴라가 삼손을 깊이 재운 다음 그의 머리털을 자르자 결국 삼손의 힘이 사라졌습니다(19).

잠에서 깬 삼손은 이전처럼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거라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이미 여호와의 영이 떠나셨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든 능력을 잃은 삼손은 손쉽게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삼손은 두 눈이 꼽힌 채로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하루아침에 몰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전부터 그 조짐들은 있었습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하고, 기생을 찾으며, 사체를 수도 없이 만진 일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여호와의 영이 떠난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의 전락은 오랜 기간에 걸쳐 누적된 죄의 결과였습니다. 비록 그의 삶은 추락했으나,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나실인이 규정을 어기면 일곱째 날에 머리카락을 밀고, 새롭게 서약해야 했습니다(민 6:9-13). 삼손은 어쩌면 지금 새롭게 나실인 서약을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본문의 진술이 아직 일말의 희망이 남았음을 암시해 줍니다. 삼손은 한평생 나실인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그가 죽는 날까지 나실인임을 말입니다(13:7).

하나님의 계획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거룩함을 추구하며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는 살이 복된 인생입니다.


성도가 거룩함을 잃어버리면 세상이 조롱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부르셨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길에 버려져 많힐 뿐입니다.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내용은 일치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성령님께 붙들려 이 땅에서 사명을 다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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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6-01)


기생 들릴라에서 빠진 삼손

사사기 16장 1-14절


처음에는 작게 시작했던 불장난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켜집니다. 집도 물건도 그리고 산불까지 나서 모든 것을 태우기도 합니다. 그래서 몹시 위험한 행동을 비유해서 ‘불장난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하면 눈이 멀어진다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변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빠져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길 바랍니다. 본문을 통해 소중한 것을 바라보고 찾을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 삼손은 계속적으로 위험한 장난을 즐기고 있습니다. 몹시 위태해 보입니다. 삼손은 계속해서 이방인인 블레셋 여인에게 집착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불장난하는데 사용합니다. 삼손은 장난삼아 살아가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목숨을 놀리고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장난이 아닙니다. 당신의 생명을 노리고 접근합니다.

 

유혹에 약한 사람(1-3)

하나님의 기적인 일들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삶에 변화가 없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자 하는 결단은 없다면,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서 돌이키질 못합니다. 죄가 이렇게 무섭게 지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은 기준도 목적도 없습니다. 항로를 잃어버린 배처럼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에 밀려 떠다니는 배처럼 눈에 보이는 기생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1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2가사 사람들에게 삼손이 왔다고 알려지매 그들이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3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1-3)

 

삼손은 이번에는 블레셋에서 가장 큰 가사로 내려갑니다. 이번에도 삼손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원수의 도시로 들어간 이유는 오직 정욕을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삼손은 가사에서 기생을 찾습니다. 기생을 보고 그 여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의 약점은 성적 욕망에서는 약했습니다. 그는 성욕을 채우기 위해 원수의 심장인 가사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나실인에게 합당하지 않게 이방 여인과의 첫 번째 결혼이 실패로 돌아간 후, 또 삼손이 택한 두 번째 길은 창기와의 동침함이었습니다. 죄악에 빠지게 되면 그곳에서 해치고 나오기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삼손은 블레셋에서 가장 주의할 인물입니다. 어떻게든 원수를 갚아야 할 대적 중의 대적입니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을 것인데, 삼손은 자기 힘에 취해 홀로 블레셋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실 것이라는 믿음과 다릅니다. 용기와 만용은 같지 않습니다. 무모함과 담대함은 아주 다릅니다. 삼손은 무모했고, 만용을 부렸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힘을 본래부터 자기 것인 양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사로서, 나실인으로서의 의무를 까맣게 잊고 생활합니다.

 

삼손을 보고 가사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밤새 그 집을 에워싸고 성문에서 매복해서 집에서 그가 나오면 급습하여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삼손을 죽이려고 성문에서 밤새 기다렸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계획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다 일어나, 새벽에 가사의 성문 문짝과 문기둥과 문빗장을 뽑아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 산꼭대기 60km가 넘은 곳까지 갔습니다. 이틀 넘게 가야 하는 거리기 때문에 헤브론으로 향하는 산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가 어떻게 이 매복을 뚫었는지는 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문은 힘과 안전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성문을 뽑아 들고 갔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블레셋이 얼마나 기겁했겠습니까!

 

성경이 삼손의 이 기이한 행적에 대한 이유를 정확히 밝히진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잡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기려 했던 유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종의 시위로 여겨집니다. 이 일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오산합니다. 그 생각은 점점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해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져 들고 있습니다.

 

들릴라를 사랑한 삼손(4-14)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지 않을 때, 자신의 기준이나 환경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은 항상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을 정신없이 돌아갑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것을 어떻게 따라갈 수 있습니까!

 

4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5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생기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능히 그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천백 개씩을 네게 주리라 하니 6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하건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7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8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을 여인에게로 가져오매 그가 그것으로 삼손을 결박하고 9이미 사람을 방 안에 매복시켰으므로 삼손에게 말하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그 줄들을 끊기를 불탄 삼실을 끊음 같이 하였고 그의 힘의 근원은 알아내지 못하니라 10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하건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 하니 11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쓰지 아니한 새 밧줄들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12들릴라가 새 밧줄들을 가져다가 그것들로 그를 결박하고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팔 위의 줄 끊기를 실을 끊음 같이 하였고 그 때에도 사람이 방 안에 매복하였더라 13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 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 하는지라 14들릴라가 바디로 그 머리털을 단단히 짜고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어 베틀의 바디와 날실을 다 빼내니라(4-14)

 

삼손은 또 다른 유혹에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삼손은 구별된 나실인으로 태어나고 자랐고, 얼마 전에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처럼 방황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삼손이 선택한 세 번째 블레셋 여인 들릴라가 등장합니다. 들릴라는 삼손의 여인 중에 유일하게 이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사용하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과가 그의 타락을 정당화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일을 이루시더라도 삼손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삼손이 가사에서 저지를 일로 인해서, 블레셋 방백들은 대책을 논의합니다. 이들은 블레셋의 5대 도시의 군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위기감을 느꼈고, 삼손을 잡아서 더 큰 화를 방지하자는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삼손을 이길 수 있습니까? 이전까지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보고 고민을, 이제 블레셋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수수께끼 사건처럼, 그가 사랑하는 여인 들릴라를 매수하여 삼손의 약점을 알아내는 것이었습니다(5).

 

(1) 첫 번째 시도(6-9)

 

들릴라는 블레셋의 방백들이 제시한 보상과 동포를 향한 충성심이 동기가 되어 그들과 함께 삼손을 잡으려 했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했습니다. “청하건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6)라고 질문합니다. 그에 대해 삼손은 새 활줄 일곱 개로 자신을 묶으면 자신이 평범한 다른 사람처럼 힘이 줄어들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7). 여기서 ‘활줄’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지만, 시편 11:2과 욥기 230:11에서 활, ‘활시위’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마르지 않은 새 활줄 일곱 개를 여인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녀가 그것으로 삼손을 결박했습니다(8). 그녀는 사람들을 방 안에 매복시켜 놓고 삼손에게 말했습니다.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9) 그러자 삼손이 그 줄들을 불탄 삼실을 끊는 것같이 손쉽게 끊어 버렸습니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그 힘의 근원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2) 두 번째 시도(10-12)

 

들릴라는 삼손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그의 힘의 비밀, 특히 어떻게 해야 그를 결박할 수 있는지 알려 달라고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하건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10) 이번에는 삼손이 들릴라에게 “만일 쓰지 아니한 새 밧줄들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11)라고 대답했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의 대답을 듣고서, 새 밧줄로 묶고 블레셋 사람들이 도착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삼손을 잡아서 죽이려는 블레셋 사람들이 방 안에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새 밧줄을 실 끊듯이 간단히 끊어 버렸습니다. 다시 한번, 삼손의 거짓말에 들릴라사 속은 것입니다. 하지만 들릴라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3) 세 번째 시도(13-14)

 

삼손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또 어떻게 하면 그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들릴라는 또 삼손을 채근했습니다. “당신이 이 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13)

그러나 삼손은 진실을 말할 수 없어 또 다른 거짓말을 둘러댔습니다.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13) 들릴라는 또 삼손이 알려 준 대로 실행했습니다. 바디로 그의 머리털을 단단히 짜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이 말에 삼손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는 베틀의 바디와 날실을 다 빼냈습니다(14). 이번에도 삼손은 쉽게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삼손이 자신의 힘의 비밀인 머리털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나실인의 규례대로 태어나서 한 번도 머리카락을 자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힘의 비밀을 둘러대기 위해 다른 방법들을 꾸며 냈던 그가, 이번만큼은 정답에 근접한 거짓말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기 직전입니다. 아슬아슬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만은 삶의 위기를 초래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깨뜨리는 치명적 죄악입니다. 자만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우심을 구해야 할 때 자기의 힘과 지혜를 믿다가 결국 낭패를 당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로 인해 자만해지지 않도록 더욱 우리 자신을 겸허히 성찰하고 회개하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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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5-02)

 


나귀 턱뼈를 사용해 승리한 삼손

사사기 15장 9-20절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모든 것이 변합니다. 우리 연약한 육신을 통해서도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우리 무지한 생각을 통해서 놀라운 지혜를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의 능력을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능력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게 됩니다. 본문에는 나귀 턱뼈와 같은 언약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져 행하는 아름다운 축복의 도구가 되길 바랍니다.

 

  •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나가며 소리 지를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해 삼손이 나귀 턱뼈로 1000명을 죽임입니다. 이후 삼손이 심히 목말라 부르짖자 하나님께서는 우묵한 곳을 터뜨려 물이 솟아 나오게 하십니다. 삼손이 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합니다.

 

삼손을 블레셋에 넘긴 유다 지파(9-13)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인해 빚어진 살육의 결과들조차 블레셋을 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보지만, 삼손이란 한 신앙인의 탈선이 가져다 주는 혼돈의 삶은 여전히 우리를 씁쓸하게 합니다. 그러나 삼손의 삶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의 보편적 사조였음을 본문을 통해 알게 됩니다.

 

9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한지라 10유다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 11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12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려고 내려왔노라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하매 13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 줄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9-13)

 

블레셋 사람들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배해 왔습니다. 삼손에게 이렇게 당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분노한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을 하려고 유다 지파 지역을 향해 진을 쳤습니다. 그 수가 레위 지역에 가득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들은 도망친 삼손을 따라 유다로 올라와 레히에 진을 쳤습니다(9). 전쟁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가장 큰 유다 족속 앞에 진을 치자, 놀란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면서 내용을 파악하게 됩니다. 이라한 유다 지파의 모습을 1장에서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과 싸울 것인가를 묻던 적극적인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온전히 찾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만족한 채 블레셋과 정당히 타협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유다 사람들에게 “우리가 올라오기는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10b)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손을 결박해서 자신들에게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다 사람들을 동요시켜 삼손을 자신들의 손에 넘기게 할 참입니다(10). 이에 유다 사람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그곳으로 몰려가 삼손을 블레셋에게 넘기려고 했습니다.

이에 유다 자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말을 듣고 삼손을 잡아 블레셋에게 환심을 사려 합니다. 그들은 3000명이 에담 바위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질책합니다.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11a)라고 삼손을 잡으려고 의도합니다. 그들은 블레셋이 자신들을 통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오히려 삼손이 블레셋과 싸운 것에 대해 책망한 것입니다. 삼손의 행동으로 블레셋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고 전쟁 위험이 고조된 것에 대해 질책합니다.

삼손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자신은 다만, 그는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당한 대로 갚았을 뿐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과 함께 블레셋을 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삼손을 묶어서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려고 합니다. 삼손은 유대 사람들과 역시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반응을 보이기 전에,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했어야 합니다. 그들의 반응은 단순하게 ‘너 같은 놈만 없으면 아무 문제없는데, 미꾸라지 같은 녀석이 우리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너만 사라져!’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무 문제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40년 동안 블레셋에 지배를 받았습니다. 어떻게든지 블레셋으로부터 진정한 자유인 되려고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잠잠하면 된다는 단순한 모습입니다.

자기보다 강한 적군을 잠잠하게 하고 평안을 얻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키며 타협하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은 평안하겠지만, 그들은 가만히 두지 않고, 항상 괴롭힐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을 얻은 방법은 그들과 싸워 승리하는 방법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심(14-17)

우리는 어려운 상황과 열악한 조건에서도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성도들이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충만한 은혜를 받고 능력을 행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결박된 것 같고 주어진 것이 나귀 턱뼈와 같이 미비할지라도 성령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14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15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16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17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14-17)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둡니다. 사사 시대의 삼손과 유다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그렇습니다. 삼손은 사사의 일에 전혀 사명감이 없고, 유다 사람들 역시 두려움에 빠져 비겁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백성을 어떻게 대하셨겠습니까?

 

(1) 나귀의 턱뼈로 공격한 삼손(14-15)

 

유다 사람들에 의해 결박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진 치고 있는 레히에 도착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군대처럼 승리를 확신하고서 크게 소리치며 그에게로 다가왔습니다(14). 바로 그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셨습니다. 마치 블레셋 사람들의 외침을 신호로 여호와께서 개입하신 듯한 순간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여 그를 묶은 밧줄이 마치 불탄 삼 오라기처럼 손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 일은 결코 삼손의 능력으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블레셋을 치시기 위해 기이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권능을 주셔서 대적 블레셋이 더 이상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삼손은 근처에서 나귀의 새 턱뼈를 찾았습니다. 그는 그 단순한 무기로 무려 1000명을 쳐서 죽였습니다(15). 턱뼈가 싱싱했다는 것은 짐승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뼈가 단단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삼손이 짐승의 사체에 손을 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유래 없는 초인적 힘을 주신 것입니다. 삼손의 힘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풀어 주는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삼손이 공격에 나서면서 이 문제가 하나님의 일로 바뀌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성취한 후 우리는 자부심이 아닌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2) 승리를 선언한 삼손(16-17)

 

삼손은 1천 명의 대적을 죽인 후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라고 승전가를 불렀습니다(16). 나귀 턱뼈 하나로 적을 시체 무더기로 만들어 버렸다는 자랑입니다.

삼손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의 지명을 ‘라맛 레히’ 곧 '턱뼈의 언덕'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17). 이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사실은 이 노래에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다고 자만하거나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알고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교만한 나귀 턱뼈(18-20)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경건하고 거룩한 교제로 연합을 이루길 원하십니다. 그 교제 안에서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죄로부터 보호받습니다. 또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사람들과 교제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본받고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른 지체들과 나누는 교제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본받고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18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19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20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18-20)

 

삼손은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대승을 거둔 것처럼 방자히 굴었으나 그러한 자랑은 공허한 것임이 곧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을 자화자찬했던 삼손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매우 목이 마른 데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18).

삼손은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제야 자신이 할례 받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내세워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에게 샘을 주셨습니다. 샘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 삼손은 그 샘을 ‘엔학고레’ 곧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고 불렀습니다(19).

 

삼손은 사사로서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지만,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쳤다거나 그 땅이 평온했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니라 단지 개인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 은총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삼손의 결혼 이야기는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그가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냈다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20). 삼손은 이방인의 지배가 당연히 여겨지던 때에 사사로 활동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 압제자들을 상대로 싸울 의지가 없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삼손은 사사로서 평안을 안겨 주지 못했습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하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나실인으로 부르신 것도,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을 통해 블레셋 사람을 치신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의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한 인물이었지만, 그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고 은혜로운 분이었기에 구원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도 구원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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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5-01)

 


감정적으로 복수에 집착한 삼손

사사기 15장 1-8절


미움은 미움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습니다. 사랑과 용서만이 미움과 복수를 끊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분노는 사람을 자유케 하도록 얽맵니다. 분노 때문에 끊임없는 방황하게 하고 갈등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일어나는 이런 죄악 된 생각은 마음을 편안하게 못 합니다. 편안하지 못한 마음 가운데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길 원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가장 진리인 것을 확인하는 축복의 날이 되길 축원합니다.

 

  • 삼손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사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잘못 사용한 삼손은 삶이 꼬입니다. 문제를 해결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조절되지 못한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러한 삼손을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사용하시고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다시 아내를 찾은 삼손(1-2)

우리는 희박한 윤리의식에 비해 개인의 욕망을 극대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 섹스, 권력을 추구하지만, 이에 따른 윤리적 책임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을 추구하는 만큼 나누는 미덕을 찾기 어렵고,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되 결혼 관계의 신실함을 유지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추구하되 만큼 비전도 없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찾기 힘든 시대입니다.

 

1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찾아 가서 이르되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하니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2이르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 하니(1-2)

 

하나님께서 삼손을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불임에 대해 창조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보내신 사람 나실인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보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잘 대변해야 하고,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실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눈에 옳은 것만 선택하며 살던 사람들이라도 사사인 삼손을 보면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도록 깨닫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의 그 기대를 무너뜨립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삼손의 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데, 사용하고 계십니다. 삼손은 마음대로 블레셋 여인 가운데 신붓감을 골랐습니다.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결혼까지 강행합니다. 사자의 시채를 마음대로 만졌습니다.

수수께끼를 낸 것은 좋았지만, 이것이 발단되어 악화하였고, 결혼도 마무리되지 못하고 떠나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삼손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셔서 삼손은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이고 앙갚음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블레셋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사건이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보복의 악순환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결혼식장에서 흥을 돋우기 수수께끼를 냈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결혼 생활이 시작하기도 전에 큰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성경에서는 ‘얼마 후’라고 말합니다. 이 ‘얼마 후’로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은 구약성경에 3번(수 23:1; 삿 11:4; 15:1) 사용되었습니다. 삼손이 다시 아내를 찾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을 수 있습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삼손은 끓어올랐던 분노와 서운함이 진정될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을 것입니다.

밀을 수확하는 시기인 5월도 사건의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삼손은 아내와 화해하고 싶어 딤나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삼손은 아내의 행동에 화가 나서 딤나를 잠시 떠났지만, 혼인 관계는 완전히 정리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삼손은 다시 아내를 찾아오기 위해서 블레셋으로 갑니다. 그는 선물인 ‘염소 새끼’를 가지고 아내에게 찾아갔습니다. 이는 나름 화해의 제스처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장인이 다른 블레셋 사람에게 아내를 주었다는 것을 압니다. 장인으로서 얼마든지 삼손이 자기 딸에게서 마음이 떠났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인은 삼손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사람인지는 몰랐습니다. 삼손은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1)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장인은 방문의 목적을 거절합니다(1).

이미 삼손에게 보복이나 하듯이, 이미 장인은 자신의 딸을 결혼 잔치에 참석했던 삼손의 친구에게 주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삼손의 장인은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2)라고 말합니다. 장인은 성급하게 다른 남자에게 준 것입니다. ‘심히 미워한다’는 표현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장인이 삼손과 결혼했던 딸을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은 일면 합리적입니다. 결혼식에서 삼손의 반응을 참작할 때, 장인은 삼손이 그녀를 버렸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장인이 삼손 대신 선택한 사람은 결혼식에 동행했던 블레셋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것은 물릴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대, 책임을 느낀 장인은 삼손에게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2) 고 청하며 타협을 제안한 것입니다.

 

삼손의 복수(3-5)

하나님께 받은 지혜, 능력, 은사를 자기 자신만을 위햐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전을 발견하고 자신의 은사를 계발하고 열정을 다해 달려 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 사명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거기에 삶의 방향을 맞추고 에너지를 기울여야 합니다.

 

3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 4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가지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5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사른지라(3-5)

 

삼손은 자기 뜻대로 되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른데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 핑계만 됩니다. 그는 장인의 말을 듣고서 분노합니다. 사실 장인과 삼손 둘 다 성급하고 쉽게 행동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장인은 더 젊고 예쁜 동생으로 대신하려 했지만, 삼손은 자신의 눈에 좋은 대로 행동한 인물이기 때문에 설득이 통하지 않습니다.

 

삼손은 분노하면서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고 말합니다(3).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삼손은 자신의 블레셋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의 분노가 정당함을 밝힌 후에 블레셋 사람들을 향한 보복을 시작합니다. 삼손의 말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허물’로 번역된 ‘ה󰘝󰙜,라아’는 원래 ‘악’이라는 뜻으로 ‘도덕적 악’ 또는 단순히 ‘재난’, ‘해로움’을 의미합니다. 장인의 처신에 대해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지 복수를 감행하여 블레셋 사람들이 큰 피해를 보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삼손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여우를 300마리를 붙잡아서 재빨리 뛸 수 없게 두 마리씩 꼬리를 묵습니다. 그리고 그 꼬리에 횃불을 달아 놓습니다. 그 여우들이 추수 직전에 블레셋의 밀밭과 과수원으로 보냅니다. 두 꼬리 사이에 나무 막대 하나를 매달고(4) 거기에 불을 붙여 여우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밀밭으로 몰았습니다.

그 피해는 막대했습니다. 마침 밀 수확 철이기 때문에, 한 해 농사 밀을 모두 태웠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포도원과 감람나무들까지 불탔습니다(5). 수년간의 과일 농사까지 완전히 망쳐 놓았습니다. 이 세 가지는 고대 팔레스타인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습니다. 삼손의 이러한 행동은 블레셋 지역 경제의 핵심을 공격한 셈이었습니다.

 

아내를 죽인 것에 대한 삼손의 복수(6-8)

세상에서는 죄의 악순환이 일어나고 점점 더 심각한 범죄가 양산되고 있습니다. 서로 속이고 속는 일뿐만 아니라 관용하지 않고 적개심을 키우며 자기 자신의 성공을 위해 약자를 밟고 일어서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방관하시지 않고 개입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로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6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하니 사람들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준 까닭이라 하였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사르니라 7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하고 8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머물렀더라(6-8)

 

밀밭과 포도원 감람나무까지 불태우는 기가 막힐 일을 당한 블레셋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누가 이런 일을 했는지 수소문했습니다. 사람들은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 벌인 일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판단을 삼손의 장인이 딸을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주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절반만 사실입니다. 그들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책임자를 정하여 책임을 물었습니다. 삼손을 ‘딤나 사람의 사위’라고 부르며 삼손이 그 딸의 남편이라는 지위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삼손의 잘못이 아니라 삼손의 장인의 책임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3절에서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라고 한 말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삼손의 엄청난 파괴력을 본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더 이상 건드리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딤나 여자와 그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삼손의 화를 달래려고 했을 것입니다. 삼손의 아내와 아버지는 재앙을 피하려고 수수께기 답을 알아냈지만, 수수께끼 답을 알아냈기에 오히려 재앙을 당하는 아이러니가 생겨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올라가서 삼손의 아내와 그의 아버지를 불살라 죽임입니다(6). 삼손의 파괴력을 보면서 삼손에게 물을 수 없으니, 삼손의 장인에게 씌운 것입니다. 밀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이 불타 버린 것에 대한 책임을 삼손이 아닌 그의 장인과 딸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희생양이 필요했던 그들에게는 삼손보다 딤나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이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삼손이나 블레셋 사람들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재미로 시작한 수수께끼가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삼손의 아내와 아버지는 재앙을 피하려고 수수께끼 답을 알아냈지만, 수수께끼 답을 알아냈기에 오히려 재앙을 당하는 아이러니가 생겨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것을 본 삼손은 다른 분노를 자극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복수를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이 일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삼손은 화가 나서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 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은 후에야 말리라.”(7)라고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에게 복수하려 삼손의 장인과 아내를 죽었지만, 또 사실을 알게 된 삼손은 아내와 장인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섭니다. 그는 ‘다시 원수를 갚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복수를 낳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원수, 민족의 원수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하더니, 자기 개인적인 원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응징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였습니다(8a). 이번에도 블레셋에 결정에 분노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삼손의 이런 모습을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며 폭력적입니다. 재미로 시작한 수수께끼 때문에 삼손과 블레셋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고, 결국 극복할 수 없는 골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다 지역에 있는 에담의 바위틈에 도망쳐 숨었습니다(8b). 에담의 위치는 불확실한데, 지리적 위치보다 상징적 의미가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끝없는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입니다. 그리고 미움은 또 다른 미움을 낳을 뿐입니다. 연속되는 복수만 있을 뿐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종노릇하면서도 그 상황에 안주하여 영적 전쟁을 피하려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타협하는 선택을 반복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깨워 주시기를, 그래서 오직 주님만을 섬기는 성도가 되기를 힘써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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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4-02)


이방 여인과의 결혼하는 사사 삼손

사사기 14장 10-20절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삶은 완전하고 소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떠나며 자신에게 주신 삶을 포기할 때, 어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리고 삶 속에 고난이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만, 진정한 행복의 길이 보이며 행복이 시작됩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 본문은 삼손의 부모와 하나님은 삼손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구원자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엄청난 능력과 함께 동시에, 그것을 잃을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사자같이 강하였지만, 달콤한 유혹에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잔치에서 수수께끼를 냄(10-14)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연약한 자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끝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숙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만을 바라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한다면 그 약속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10삼손의 아버지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베풀었으니 청년들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11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와서 친구를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지라 12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내리니 잔치하는 이레 동안에 너희가 그것을 풀어 내게 말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13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말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지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네가 수수께끼를 내면 우리가 그것을 들으리라 하매 14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사흘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10-14)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신부를 데리러 블레셋 딤나로 내려갑니다(10). 그들은 블레셋 풍습에 따라 7일 동안 결혼 잔치를 배설하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 30명을 친구로 삼고 결혼식 들러리로 세웁니다(11). 블레셋 사람을 들러리로 삼은 것은 블레셋 사람과 친밀하게 지내며, 그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 같이 거의 동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친구로 삼아 즐거운 결혼 잔치를 벌이던 삼손은 흥이 나자 겉옷 30벌과 베옷 30벌을 걸고 수수께끼 내기를 걸었습니다. 그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달콤한 것이 나온다.’(14)라는 수수께끼를 냅니다.

이 수수께끼는 삼손의 행적을 알고 있는 청중에게는 매우 쉬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삼손의 행적을 모르는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일방적인 상황이 아닌, 개인적인 경험을 수수께끼 문제로 냈기 때문입니다. 예상대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 문제를 풀지 못하였습니다. 재미있으라고 시작한 수수께끼가 큰 참변의 시작이었습니다.

 

협박으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냄(15-17)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용하실 때, 유능한 자들만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미숙한 자들도 사용하심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전능하신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한 사람만 찾지 않으시고 우리처럼 연약한 자들과 함께하심을 감사하며, 항상 그분의 자비를 찬양하며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5일곱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려 달라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빼앗고자 하여 우리를 청한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아니하냐 하니 16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이르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알려 주지 아니하도다 하는지라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알려 주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알게 하리요 하였으나 17칠 일 동안 그들이 잔치할 때 그의 아내가 그 앞에서 울며 그에게 강요함으로 일곱째 날에는 그가 그의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알려 주매 그의 아내가 그것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더라(15-17)

 

삼손은 나실인이며 사사로서 구별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가져야 할 영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거룩을 추구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한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지만, 정작 작은 유혹 앞에서도 쓰러지는 약함을 보여 줄 뿐이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게 되면서 잔치에 흥을 돕기 위해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잔치에 참여한 블레셋 사람들에게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14)고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가 너무나 어려워서 아무도 풀지 못합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향락에 빠진 삼손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떠나는 나실인의 삶에 포기 되어지는 그런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는 나실인으로서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했지만, 사자를 죽이고 그 시체를 만지고, 그곳에서 나오는 꿀을 먹는 삼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실인으로서 시체를 말라는 조항을 어긴 범죄 행위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자숙하고 회개하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퀴즈를 낼 정도로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실인으로 모든 것을 포기한 세속적인 삶이었습니다.

 

문제를 풀지 못한 블레셋 사람들은 “제 칠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15)라고 행복해야 될 신부가 되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에게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라고 위협하고 협박도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결혼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즐거워해야 예식입니다. 하지만 삼손의 결혼은 즐겁기보다는 잔치의 시간이 스트레스가 되고 고민이 되고 갈등이 되어진 일을 만들게 되어 집니다.

 

그러나 삼손은 결국 패하게 됩니다. “칠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 칠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이르매 그 아내가 그것을 그 민족에게 고하였더라”(17) 결혼 잔치는 즐거움의 시간이며, 행복한 시간이어야 합니다. 삼손이 냈던 수수께끼로 말미암아 즐거움의 자리가 괴로움의 자리로 변했습니다. 그 아내가 결혼 자리에서 계속 울고 조르고 있는 비참한 모습으러 변합니다. 7일 동안의 잔치가 도히려 고통이 되고 계속해서 강박감에 못 이겨서, 결국 삼손은 그 답을 가르쳐 주게 됩니다. 그는 강한 사람이었지만, 여자에게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전능하신 하나님께 약한 사람이 되어야지, 이 세상의 문화나 가치관에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이방 여인에 대한 흠모로 가득 찬 나실인의 정신세계는 그 자체가 긴장이었습니다.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와의 대립, 나실인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모인 블레셋 사람들, 결혼식장을 긴장으로 채운 수수께끼와 그로 인해 동족으로부터 위협받는 아내의 처지 등은 모두가 죄로부터 출발된 긴장 거리였습니다. 답을 알아내려는 아내와 결국 실토하는 삼손, 그리고 그것을 전해 듣는 블레셋 사람들. 이처럼 나실인의 삶과는 전혀 거리가 먼 긴장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에는 파랑새가 있을 것처럼 보여 집니다. 당신의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좋을 것 같지만, 그곳에는 진정한 행복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저버리는 삶에는 진정한 기쁨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할 때만이 진정한 행복이 있고,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의 발을 돌이키실 바랍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말씀에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아내를 잃어버린 삼손(18-20)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처한 어려운 시련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까에 대해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한 열악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시며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시련 앞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일어서야 합니다.

 

18일곱째 날 해 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19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갔고 20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였던 그의 친구에게 준 바 되었더라(18-20)

 

이 단락은 삼손의 결혼식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14장의 전체 줄거리 중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흔들어 블레셋을 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를 통해 수수께끼 답을 알아냈습니다. 그들은 기고만장하게 삼손의 질문에 대해 당당하게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18)라고 반문하며 대답합니다. 수수께끼 놀이의 승자는 블레셋 사람들로 밝혀집니다.

 

삼손은 그때 상황을 파악합니다. 자신이 이용당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울면서 답을 요구했고, 그 답을 가르쳐 줌으로, 아내가 답을 그 동족에 가르쳐 준 것을 파악하게 됩니다. 장난으로 시작한 것이 삼손과 아내의 관계가 심각하게 어긋납니다. 분노한 삼손의 모습을 봅니다. 블레셋과 삼손의 관계는 이제 더 이상 화목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수수께끼를 내든 관계와 완전히 멀어졌습니다. 게임에 져서 엄청난 배상을 해야 했습니다.

이 때 삼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19). 삼손은 그 힘으로 블레셋의 다른 도시인 아스글론에서 가서 30명을 죽이고, 그들의 옷을 빼앗아 자신의 약속을 지킵니다. 이 살육이 믿음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라 아내에 대한 배신감과 블레셋 사람들의 야비함에 대한 개인적 분노의 결과입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임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일하심의 방식을 주목하게 합니다.

 

삼손은 아내의 배신행위에 대해 매우 분노하여 아내를 버려두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즐거워 라고 시작한 수수께끼 때문에 아내와도 헤어지고, 블레셋과도 매우 불편한 관계가 되어졌습니다. 그리고 삼손의 아내는 다른 이와 결혼하게 됩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과 결혼하고자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과 원수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감정과 행동을 통해 블레셋을 치셨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이 사건 어디에도 기도했다는 내용이나 하나님께 물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동기가 어찌 되었든지 간에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심판하십니다. 삼손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만 해낸 것만 계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결정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곳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연약한 자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끝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숙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만을 바라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신다면 그분의 약속을 신뢰한다면 그 약속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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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4-01)

 


영적으로 미숙한 삼손의 첫 사역

사사기 14장 1-9절


사람은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점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지만, 사단은 약점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많은 일을 모두 실패로 만들어 버리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의 약점은 대부분 감정 조절을 대제로 못해 나오는 말로 실수하는 경우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고 그 약점을 성령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약점을 보완하여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 삼손이 사사로서 첫 사역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딥나의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사사가 처음부터 자신의 본분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삼손이 결혼식에 낸 수수께기 때문에 결혼식 내내 아내와 갈등하다가 마침내 아내의 배신으로 내기에 지고 맙니다. 삼손은 사사로서, 그리고 나실인으로서 합당하지 않는 행동을 연달아 벌리고 있습니다.

 

블레셋 여자와 결혼을 요청한 삼손(1-3)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가 있다면, 하나님께 영광으로 되돌려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성도의 기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성도의 마땅한 본문입니다. 그런 은사와 은혜가 당신과 함께하길 원합니다.

 

1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2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3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4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1-4)

 

삼손의 부모인 마노아의 가정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 가정에 여호와의 사자의 고지를 통해 삼손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불임의 어머니에게 낳은 아들 삼손은 영적 불임의 시대, 블레셋에 꼼짝도 못한 채 약 20년 동안 종살이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랄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에게 그를 나실인으로 구별된 받쳐진 존재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삼손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능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기 눈에 보인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았습니다.

 

(1) 삼손이 불레셋 여인을 아내로 취하려 함(1-2)

 

삼손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여 이스라엘을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그는 기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20년 동안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 지역에 쉽게 내려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삼손, 또한,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는 딤나(Timnath)로 내려갔습니다. 이곳은 원래 단 지파에 할당된 것이지만, 이 시대는 블레셋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딤나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게 구원하려고 내려간 것이 아니라, 한 블레셋 여인을 보고 반하여 내려갑니다(1). 삼손은 독립적인 청년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이교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잠재적으로 그들과 타협할 수 있는 상황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집으로 올라와서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2)라고 부모에게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도록 요청합니다. 그는 매우 강압적이고 무례한 말로 블레셋 여인과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강요합니다. 이 소식은 그의 부모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사자가 요청했던 것처럼, 나실인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포도주나 독주를 입에 대지 않도록(삿 13:5), 그의 부모님은 말씀을 따라 양육했을 것입니다. 부모들이 먼저 부정한 것이 포도주를 멀리해야 했습니다. 삼손 역시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그는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선민(選民)이 되면 무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리면 다 사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붙들린 사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시대의 사명자로 사용하십니다.

 

(2) 부모의 반응(3)

 

삼손은 블레셋 이방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부모에게 말씀드렸습니다. 황당한 그의 부모는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3)라고 그 결혼을 반대합니다. 원문에 의미를 보면, 그 부모는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점잖게 타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말투를 볼 때, 삼손의 부모는 이미 이길 수 알았다는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반대했지만, 삼손은 막무가내입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3) 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는 사사기 17장에 나오는 사사 시기의 특징은 사람들이 자기의 소견에 좋은 대로 표현과 동일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나 이방 풍습을 쫓는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삼손은 사사로 부름을 받았으면서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일반 백성들과의 수준이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지도자가 그를 따르는 자들보다 리더십이나 영성에서 뛰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그만그만한 사람들 가운데서, 아무나 서로나 서서 지도자가 되려는 세태가 영적인 하향 평준하로 타락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따라 순종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모든 삶의 결정이 자신이 좋은 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삼손의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영적인 부분을 인식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잘 섬길 것인가가 아니라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것인가에 대한 것만 생각하는 삼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삼손의 모습은 나실인의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기준으로 자신의 감정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세상의 모습, 하나님을 등진 타락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구별된 삶을 주셨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과 은사를 주셨지만,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스라엘의 모습과 동일한 모습이며,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죄를 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과 같이 성도들에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별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세상의 방법과 구별된 삶이 성도의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유혹으로 눈에 보인 좋은 것들을 쫓아서 살면, 하나님의 거룩함과 능력을 상실되어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사람들의 비극의 시작인 것입니다.

 

(3)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일(4)

 

삼손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4)라고 소개합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당시에, 여호와께서는 삼손을 통해 블레셋 사람들을 치려고 계획하셨습니다. 여기서 삼손 부모의 무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삼손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에 무감각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독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상기시킵니다. 삼손의 무모한 행동마저 선하게 이용하시는 여호와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결혼은 블레셋 사람과 평화롭게 공존하려는 삼손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여호와께서는 그 상황을 깨뜨리기 위해 삼손을 사용하셨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을 화나게 하도록 선택된 도구이며, 블레셋 여인은 그 일이 일어날 기회를 제공한 도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사람을 상대 행동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행동하게 하실 것입니다.

 

삼손의 부모는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삼손의 생각을 어쩔 수 없이 따르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었습니다. 삼손의 잘못된 생각을 통해 블레셋을 칠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아야할 사명자(5-9)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순종의 삶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등지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이 두 방법에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른 결정을 해나가야 합니다.

 

5삼손이 그의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젊은 사자가 그를 보고 소리 지르는지라 6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7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니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 8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맞이하려고 다시 가다가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 9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아니하였더라(5-9)

 

삼손은 부모의 충고를 무시한 채, 자기가 좋아하는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고집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블레셋에 억압받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지만, 삼손의 관심은 할례 받지 않는 민족인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눈에 들도록 살기에 노력하는 대신에, 자기 눈에 좋은 것만을 취하려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게 되면, 그에 관한 모든 계획을 철회하실 분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이 잘못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채, 자기의 잘못된 결정을 따라 그의 부모들도 딤나로 내려가게 됩니다.

 

(1) 사자를 죽인 삼손(5-6)

 

삼손은 부모님에게 딤나 여인과 자신의 결혼식을 주선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식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블레셋 딤나로 향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딤나에 내려가다가 포도원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길에서 갑자기 배고파서 울부짖는 사자를 만납니다(5).

 

그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기 하나 없는 상태에서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라고 사자를 찢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일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6). 그가 침묵한 이유는 분명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체를 만짐으로써 부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음으로써 책망을 피하려 한 것 같습니다.

 

(2) 결혼에 대한 대화(7)

 

7절은, 다시, 삼손과 블레셋 여인의 결혼이라는 줄거리를 다시 이어 갑니다. 삼손은 결혼할 여자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삼손과 블레셋 여인만 보이고 삼손의 부모는 배제되었습니다. 이렇게 삼손은 점점 부모의 훈육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삼손은 자기 눈에 좋은 대로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3) 삼손이 사자의 사체에 손을 댐(8-9)

 

얼마 후, 아마도 삼손의 부모가 신부의 부모와 상의를 마쳤을 때, 삼손은 아내를 얻기 위해 다시 블레셋 딤나로 찾아갔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죽인 사자의 사체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사체에 벌 떼와 꿀이 있었습니다.

삼손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나실인으로서 정결을 지켜야 되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오직, 맛있는 꿀로 자기와 부모의 입을 즐겁게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어쩌면 블레셋 여인도 달콤한 꿀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세 가지 이유로 중요합니다. 첫째, 이 광경은 하나님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꿀벌은 일반적으로 사체에 서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자의 사체는 벌이 생활하고 꿀을 생산할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둘째, 이 이미지는 명백히 아이러니합니다. 부패와 분해의 과정이 진행되어야 할 사체에서 삼손은 꿀을 생산하는 꿀벌의 공동체를 발견했습니다. ‘에다’는 타락한 세상에서 부름 받은 신앙공동체로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리를 지칭합니다.

셋째, 이 광경은 삼손의 성격을 테스트합니다. 여호와의 영을 힘입어 삼손은 신체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감각에 의존하는 삼손은 영적 기질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손으로 사체에서 꿀을 긁어(‘그라다’) 무심코 먹었습니다. 이는 삼중적 죄입니다. ① 시체와 접촉하는 모든 물건은 부정해집니다(레 11:24-25, 39). ② 특히 나실인을 부정하게 만듭니다(민 6:6). ③ 이 일을 말하지 않고 부모에게도 꿀을 제공하여 그들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실인은 시체를 만지면 안 됩니다. 그러나 삼손은 꿀에 현혹되어 나실인의 규례를 어깁니다. 그것을 취함으로써 주검을 만지지 말아야 하는 나실인의 서약을 어겼습니다(민 6:6).

사자보다 강한 능력이 있었지만, 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자신의 마음에 내키는 대로 행했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나실인으로서 범죄의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아버지와 모든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의 비밀이 많아져 가는 것입니다. 자신만 범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비에게도 드리고(9), 심지어는 이러한 행동을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면서 즐기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삼손이 죽은 사자의 몸에서 꿀을 취합니다. 나실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삼손은 이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점점 이방 여인과 이방 문화의 달콤함에 빠져들어감을 보여줍니다. 겉모습만 나실인이었지, 속사람은 세속인과 다름없습니다. 혹시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속은 세속인과 다름없습니까!


삼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초인적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행동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죄인이 실패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데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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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3-02)


나중에 기묘한 일을 깨달은 마노아

사사기 13장 15-2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고통과 시련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무한한 사람과 은혜로 개입하셔서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한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자들이 먼저 갖추어야 마땅한 올바른 태도가 있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의 말을 듣고 아내 말을 믿게 된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를 대접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야 된다고 말합니다. 마노아는 하나님을 보았으니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하였지만, 지혜로운 아내의 말처럼 그들은 죽지 않았고 약속대로 삼손이라는 아들을 얻게 됩니다.

 

깨닫지 못하는 마노아(15-20)

교회를 봉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 영광을 취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점점 교만해져 버립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많은 사람이 실족합니다. 봉사자라고 한다면, 항상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시면서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가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15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 16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17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하니 18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19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20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21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22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23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15-23)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를 찾아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축복의 말을 전했습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 준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마치 나그네를 환대하는 태도였습니다.

 

(1) 여호와의 사자를 대접하는 마노아(15-18)

 

마노아는 모든 말씀을 들은 후 여호와의 사자에게 대접하기 원합니다. 고대에는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는 풍습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에게 마노아는 꼭 대접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15)라고, 여호와의 사자에게 염소 새끼를 준비할 것이니 머물러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합니다.

이런 마노아의 요청에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16)라고 말합니다. 즉 여호와의 사자는 식사 대접 대신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본문 이렇게 마노아와 여호와의 사자 간의 말이 서로 어긋나는 것은, 마노아가 상대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17절에서도 마노아는 계속해서 여호와의 사자를 선지자로 생각하여 이름을 묻고 예언이 이루어지면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려 명성을 높여주겠다는 것입니다. 마노아는 예언이 이루어지면 이를 이루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의 이름을 높이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질문에 여호와의 사자는 자신의 ‘기묘자’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기묘’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이라는 뜻으로, 주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자신은 ‘너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로 자신이 ‘여호와’이심을 암시적으로 나타냅니다.

하지만 마노아는 여전히 자기 앞에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아마도 당시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약화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늘 자신의 백성을 보고 계시며, 우리가 기대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오셔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2) 재물을 드리는 마노아(19-20)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의 말을 따라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바위에 올려놓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곳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꽃이 일어나 하늘로 올라가고 사자도 불에 휩싸여 올라가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기묘자’ 즉 ‘놀라운 자’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가 이적 즉 논란 일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는 사자를 통해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놀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반신반의하던 마노아에게 놀라운 이적을 보여주시므로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마노아에게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징표를 주신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자신의 말을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징표를 보여주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보고 놀란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는데, 이것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자세입니다. 그들은 이제야 자신에게 말했던 존재가 선지자가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3) 여호와의 정체를 알게 마노아(21-23)

 

여호와의 사자가 완전히 하늘로 올라가서 다시 나타나지 않자, 드디어 요와의 사자의 정체를 알게 된 마노아는 여호와를 보았으니,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21-22).

마노아도 기드온처럼 당시 민간에 퍼져 있는 속도를 더 믿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해보면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 방문을 받고 부름을 받았던 상황과 동일합니다. 기드온도 여호와의 사자를 선지자로 알았고 자신에게 임무를 주며 여호와의 신탁을 전한 그에게 대접하기 원했으며, 염소 새끼 한 마리와 소재로 사용되는 무교병을 가지고 와서 바위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가 블로 제물을 태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그 후의 자신도 사라졌습니다(삿 6:11-18). 또 여호와의 사자가 사라진 후에 둘 다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죽을까 봐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이야기와 마오나의 이야기는 이런 부분에서 상당히 비슷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데, 기드온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나타나서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말을 해줍니다(23). 그런데 여기서는 마노아의 아내가 여호와의 사자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침착하고 논리적으로 남편을 설득합니다. 만일 죽이실 것이라면 권제와 소재도 받지 않으셨을 것이고 이 모든 일도 보이지 않으셨을 것이며 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하나님을 약속을 지키는 분이며 자신의 일에 논리적 일관성이 있는 신뢰한 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이 오직 당시에 퍼져 있던 잘못된 이야기만 믿고 하나님의 일관성이 없고 즉흥적이며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분으로 생각한 마노아나 기드온과 대조를 이룹니다.

전체적으로 마노아보다 마노아의 아내가 더 신뢰감 있고 지혜롭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혜로운 마노아의 아내의 모습은 후에 사무엘를 임신한 한나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삼상 2:18-21). 마노아와 그의 아내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을 때,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평안이 올 수 있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신앙은 늘 불안하고 두렵고 흔들릴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삼손의 출생(24-2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은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더욱 높여 드리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 가며 그분을 신뢰하는 태도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24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25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24-25)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집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그 아이의 이름을 ‘삼손’이라고 지었습니다. 삼손은 ‘작은 태양’이라는 의미입니다. 태양을 섬기는 이방 종교가 반영된 이름이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또 ‘들릴라’(밤'이라는 의미)의 이름과 삼손이 눈을 잃게 되는 사건과 연관하여 매우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나실인으로 부르셨고 사사로 세우시기 위하여 그에게 복을 주셨으나, 어리석은 죄인의 삶은 온전치 못했습니다.


사사시대는 회개도 없고 구원에 대한 간절함도 없는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삼손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영을 부으셔서 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절망스러운 시기에도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인간의 능력과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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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3-01)

 


하나님을 만난 마노아

사사기 13장 1-14절


자녀는 예나 지금이나 부모의 소망입니다. 고통스러운 출산이지만 여성이라면 누구나 자녀를 출산하기 원합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마노아의 아내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 자녀가 없어 소망이 없던 마노아 부부나 이스라엘이나 소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노아의 아내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 하심으로써 그 부부에게 소망을 주셨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큰 소망을 주었습니다.

 

삼손이 태어날 것이 예언됨(1-7)

생명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정체성은 이곳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허락하셔서 이 세상에 사명을 가지고 보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1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2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3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4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5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6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의 남편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오셨는데 그의 모습이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7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하니라(1-7)

 

본 장부터 16장까지 4장에 걸쳐 진행됩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12번째 마지막 사사인 ‘삼손’에 관한 기록입니다. 점점 심해지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암울한 시대 상황은 삼손의 때에 이르러 사사조차 소망을 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구원의 손길을 펼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의 범죄와 블레셋의 압제(1)

 

사사기 공식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였더라”라고 합니다. 그동안 악행들보다 악을 더 행함에 담대해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행(惡行)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땅을 더럽힌 것’(민 35:34)이며, 같은 동족끼리 이웃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모독으로 보십니다. 다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우상숭배’하는 것입니다. 우상의 특징은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만 집중하여 자기 욕만을 채우기 위한 역할을 합니다. 악한 세력들은 인류가 탐욕 속에 헤매며 살아가고 지치도록 만들어버립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괴롭힌 것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후손이 현대 ‘팔레스타인’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도 이미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출 13:17). 당시로는 수준 높은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항상 이스라엘 곁에서 괴롭히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블레셋에 의한 40년은 사사기에 기록된 징계 기간 중 가장 긴 세월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만큼 큰 범죄에 빠졌습니다.

 

긴 고난 속에서도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지배받으면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무력감 속에 이방의 통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한 세력과 싸우는 영적 전쟁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망각하는 순간, 무기력해져서 악한 사탄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생활이 계속되다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조차 잊어버립니다.

 

(2) 마노아 부부에게 수태고지(2-5)

 

이스라엘 백성이 간구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구원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단 지파 사람 마노아의 아내는 아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처럼 불임 상태에 있는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3). 하나님꼐서는 구원 사역을 위해 그 아이를 도구로 사용하시겠다고 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3).

 

하나님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두 가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첫째, 그녀가 특별한 아이를 잉태할 것이니 포도주와 독한 술을 마셔서는 안 되며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4), 이것은 가나안 이방 문화인 바알 신의 문화로부터 구별되어야 합니다. 둘째, 태어날 아이의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가나안의 단발 문화에 대한 반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 문화와 구별된 삶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모태에서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5). 민수기에 나오는 나실인에 대한 규정은(민 6:1-8), 첫째, 포도나무 소산을 먹지 말라, 둘째, 머리카락을 깎지 말라 마지막으로 세치와 접촉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머리카락에 경우에 어떤 사람이 나실인으로 지내는 기간에는 머리를 깎을 수 없었습니다(민 6:5),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태어날 아이는 평생 나실인으로 세상 문화와 구별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머리를 깎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실인을 통해 구원 역사를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을 위해 세상과 구별된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이 구별된 아이를 통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를 일으키길 원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길 원합니다. 성도는 구별된 백성입니다. 사용하실 때는 세상의 타락한 문화와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시길 원하십니다.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힘들다고 세상적인 방법을 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인내하고 거룩함을 유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3) 마노아의 아내가 남편에게 알림(6-7)

 

마노아의 아내는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식하여 깜짝 놀라서 그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에게 말한 내용을 남편에게 알렸습니다(6). 그녀가 전달한 말은 하나님의 사자가 말한 것과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의 불임에 대해 언급한 것과 태어날 아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으로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언급을 생략했습니다(7).

 

우리는 고난에서 벗어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고난을 벗어나는 것보다 그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마노아(8-14)

부모는 자녀가 성공하기 위해 자기 생각을 주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자기 생각으로 가르치기 전에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내신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갈 것인지, 다음으로 자녀가 장자 어떤 사명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물어야만 합니다. 성도들이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중요한 제목입니다.

 

8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사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 9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였으나 그의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10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의 남편에게 알리어 이르되 보소서 전일에 내게 오셨던 그 사람이 내게 나타났나이다 하매 11마노아가 일어나 아내를 따라가서 그 사람에게 이르러 그에게 묻되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그 사람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내가 그로다 하니라 12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13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14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하니라(8-14)

 

철저하게 패역한 이스라엘은 이제 구원을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손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찾거나 부르짖지도 않는 이스라엘을 위해 구원의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사사 삼손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를 보내기 전에 부모들부터 교육하고 계십니다.

 

(1) 마노아의 간구와 응답(8-10)

 

수태고지를 아내에게서 전해 들은 마노아는 아내의 말에 의문을 가집니다. 자신에게 지금까지 자녀가 없었는데, 당대에 자녀를 출산하지 못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자녀를 출산한다는 소식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하나님께 ‘하나님의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아내를 통해 소식을 들은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완전히 믿을 수 없어 좀 더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둘째 이유로 8절에서 ‘우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한 것을 보면, 그는 아내가 보고 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기를 원하며, 자신도 하나님께서 주신 아이의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난다는 소식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리라는 소식은 그에게 너무도 기쁜 소식이었기에 그는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에 우리도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모함과 간절함으로 말씀 앞에 나아가면 주님은 기쁘게 받아 주실 것입니다.

 

(2) 마노아와 하나님의 사자의 대화(11-14)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밭에서 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는 다시 나타났습니다(9). 그리고 그의 아내는 남편 마노아를 불러 함께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마노아는 아내에게 나타난 대상이 하나님의 사자임을 확신하고, 그에게 장차 태어날 아이를 어떤 규례와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12). 하나님의 사자는 다시 한번 잉태될 아이가 구별된 삶, 즉 거룩한 삶을 살라고 명령했습니다(13-14).


하나님은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조차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특별히 구별하여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간절히 아이를 기다리는 가정에 아이를 태어나게 하심으로 적어도 그 아이만은 나실인으로 거룩하게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을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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