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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1-03)

 


영적 무지한 사사 입다와 그 딸

사사기 11장 29-40절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영향력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그는 참 지혜와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본문은 인간이 말씀에서 떠나 세상의 영향을 받으면 얼마나 어리석게 행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방적 종교성이라는 영적 어둠이 초래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 입다가 전쟁에 임할 때, 하나님의 영이 입다와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입다를 사사로 인정하시고 그의 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암몬의 손에서 구원하십니다. 하지만 이 과정속에 입다는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인신 제사를 소원합니다. 그로 인해 결국 자신의 무남 동녀를 번제로 죽게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승리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됩니다.

 

입다의 출정과 서원(29-31)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은 비참한 결과를 맞이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모든 전쟁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가면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입다처럼 인간의 성급함과 하나님을 향한 무지함이 무모할 때,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9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3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29-33)

 

본문은 암몬과의 전투와입다의 서원을 기술합니다.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을 입다에게 임하게 하십니다. 이전에 웃니엘과 기드온도 영이 임하자 전쟁에 나가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이제 입다에게 임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1) 입다의 출정(29)

 

길르앗 지역 때문에 암몬과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전형적인 전쟁 장면처럼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고 용감하게 암몬에게로 나가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라는 표현은 3장 10절에서 웃니엘에게 임할 때와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입다를 사사로 인정해 주신다는 증표이며,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며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는 증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입다에게 그의 영을 보내신 것 자체가 놀랍고 감격스럽습니다. 이만큼 오기까지 방해가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배역과 회개를 반복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지 않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10:13).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고초에 안타까워하셨습니다(10:16). 그러다 암몬이 길르앗을 치려 하자 백성들은 하나님 의견은 아예 무시하고 스스로 나서서 구원자를 찾았고(10:18), 입다와 협의하여 그를 머리로 세웠습니다(11:5-11). 이 과정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입다에게 그의 영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얼마나 크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입다는 기드온처럼(6:34-35) 영을 힘입어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그는 길르앗 진영이 있는 미스바(미스베)로부터 길르앗 전역, 북부의 므낫세와 요단강 건너 므낫세(29), 에브라임까지 갔습니다(12:1-3). 그 후에 다시 미스바로 돌아와 암몬을 먼저 공격하기 위해 나갔습니다. 입다가 영을 힘입어 이들 지역을 종횡무진하는 장면을 역동적으로 그려냅니다.

 

(2) 입다의 서원(30-31)

 

여기까지만 보면, 이전의 전쟁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완벽한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함께 출정하는 입다의 모습에서 전쟁의 승리가 기대되는 때, 예상치 않게 입다의 서원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나가기 직전에 입다는 여호와께 서원합니다. 자신의 손에 암몬을 넘겨주시고(30), 자신이 평안히 집으로 돌아오면, 집에서 맨 처음으로 마중 나오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겠다고 합니다(31).

원래 이 대목은 일반적으로 여호와께서 승리를 확신을 주시는 위치인데, 입다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나선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려는 모습입니다.

 

이 입다의 서원을 볼 때, 비록 암몬에게는 하나님께서 입다를 이스라엘에게 주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판단을 맡긴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이 전쟁은 자신의 모든 것이 걸린 전쟁으로 길르앗의 머리가 될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길르앗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사람을 번제로 들이는 이교적 제의를 하나님께 서원한 것입니다.

입다가 하나님의 법을 잘 몰라서 그랬거나, 가나안 문화에 너무 져져서 이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잘 알고 있었지만, 체험적으론 잘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강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고 서원을 통해 마치 보험이라도 드는 듯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런 입다의 모습은 기드온보다 더 영적으로 타락한 모습입니다. 기드온은 일단 모든 하나님의 명령을 두려워하였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쟁할 때는 온전히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입다는 인신 제사라는 서원을 통해 여호와의 전쟁조차 그 의미를 퇴색시켰고 하나님을 조건에 좌지우지되는 분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원래 여호와께서 주인공이고 인간은 보조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입다는 서원을 통해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보조자로 만든 것입니다.

 

(3) 승리를 주신 하나님(32-33)

 

입다가 전쟁을 하는 장면은 매우 간략하게 표현됩니다. 입다 이야기에서 전쟁 장면이 중심 이야기가 아니라 다음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에 그치고 있는 것입니다. 전체 이스라엘 자손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승패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여기서는 너무나 당연한 듯 여호와께서 그들을 입다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말과 함께 입다가 차지한 성읍의 명단이 나오면서 전쟁 이야기가 정리됩니다.

입다는 모압과 이스라엘 경계 부분인 아로엘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암몬과 길르앗 경계가 되는 아벨 그라민과 도시들을 전부 정복하여 암몬 자손을 길르앗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매우 큰 승리를 한 것입니다(33). 여기서 암몬과의 전쟁 문제가 해결되어 이야기가 정리되는 듯하지만, 이 땅의 서원과 전쟁의 승리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됩니다.

 

서원 제물로 드려진 입다 딸(34-40)

하나님께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입니다. 하나님과 협상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터무니없는 소원을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끌어내려는 것이야말로 바로 우상숭배의 본질인 것입니다.

 

34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6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37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38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39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40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34-40)

 

입다가 대승을 거두고 미스바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돌아올 때, 경솔한 사원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의 집에서 입다의 딸이 가장 먼저 마중을 나왔습니다.

본문에 입다가 소원할 때 했던 말인 ‘나와서 영접하다’라는 말을 반복하여, 딸이 입다의 서원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입다의 딸이 무남독녀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34). 입다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딸이 영문도 모른 채 즐겁게 소고 치고 춤추며 아버지를 마중 나온 것입니다. 이 장면은 너무나 비극적인 장면으로 입다의 서원이 끔찍한 비극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입다는 자신의 딸이 마중 나온 것을 보고 옷을 찢으며 한탄합니다(35). ‘왜 하필 내가 나왔냐?’라고 원망합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딸을 책임으로 돌립니다.

 

결국, 그가 이 전쟁을 온전히 하나님의 전쟁으로 들이지 않았기에, 그의 승리도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자신의 딸을 죽이는 상처뿐인 승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입다의 말을 들은 딸은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받아 아버지가 말한 대로 행하라고 말합니다(36). 여기서 ‘아버지’와 ‘당신’이 다섯 번이나 나와 그녀는 이 상황의 책임이 아버지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주셨으니 아버지도 자신의 선원을 갚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36). 그녀는 약속을 지키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우리 인간도 자신의 말을 지키는 진실성을 보여야 한다고 신앙 고백한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고 신실하셨기에 인간도 하나님께 신실해야 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입다의 딸의 신앙 고백은 전혀 신실하지 않은 입다나 길르앗 사람이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명백히 다른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 고백, 또한,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무지함에서 비롯된 순진함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난 잘못된 서원은 이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행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우리가 보이는 신실함은 아닙니다. 그녀와 입다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입다의 서원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입다의 서원과는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여호와의 전쟁이었습니다.

 

딸은 두 달만 말미를 달라고 부탁합니다(37). 자신이 처녀로 죽는 것을 애곡하기 위해 친구들과 산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처녀라는 것은 ‘젊다’라는 뜻이며 ‘인생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다’라는 것을 강조한 편입니다. 그녀에게 후손이 없으며 입다에게도 후손이 전혀 없다는 의미도 됩니다. 입다는 이를 허락하였고 그녀는 정말 두 달 뒤에 돌아와 아버지의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하였습니다. 입다의 딸의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쓰는 것이 너무나 끔찍한지, 본문은 ‘그는 자신의 소원대로 딸에게 행하였다’라는 간접적인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39).

 

이런 입다의 딸을 기리기 위해 이스라엘 딸들이 1년에 한 번씩 나흘씩 애곡하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레위기 27장 2-8절에 따르면, 잘못된 소원은 돌이키거나 감소시킬 수 있으며, 서원을 행하는 것이, 오히려 죄가 되면 서원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입다와 그의 딸은 이것을 몰랐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딸의 희생에 눈을 감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입다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킴으로 자신이 원하는 길르앗의 머리 자리를 얻었습니다.

입다에 딸은 사사기 내에서 최초로 희생된 여성입니다. 이전까지 여성들은 축복받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용감한 여성들로 긍정적으로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입다에 딸은 본인은 신실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기에 어이없이 실행된 여성입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점점 타락할수록 여성들의 처지도 점점 열악해집니다. 1장에서 갈렙은 자신의 딸을 보호하고 풍성하게 해줄 샘을 주는 보호자로서의 아버지였지만, 입다는 자신의 딸을 죽이는 어리석은 아버지로 둘은 대조됩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가족 관계도 깨지며 보호자인 아버지가 자식을 희생시키게 됩니다.


입다의 딸은 죽음으로 신실함을 보이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입다의 딸을 대신할 숫양을 보내시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불신실함을 드러내고, 미신적이며 우상적인 행태에 철퇴를 가하시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신앙이 말씀에서 이탈할 때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들은 반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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