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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2-01)

 


작은 마음이 낳은 에브라임과 길르앗 전쟁

사사기 12장 1-15절


믿음을 지키는 것은 삶의 풍요로움이 아닙니다. 환경이 좋으면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는 여건이 됩니다. 그러나 꼭 풍요로운 삶과 좋은 여건이 하나님께 나가는 지름길은 아닙니다. 오히려 경건의 훈련과 믿음의 고백이 우리를 지켜주고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 변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자신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그런 귀한 믿음이 당신을 인도하시길 원합니다.

 

  • 암몬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 에브라임이 또다시 입다에게 시비를 걸었고, 길르앗은 에브라임과 전쟁을 합니다. 그 결과로 에브라임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도망합니다. 사사 입다 이야기는 끝까지 부정적으로 끝납니다. 그 뒤에 나오는 3명의 소사사는 모두 통치하는 사사로 점점 많은 자식을 두고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정략 결혼을 시키며 권력을 세습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입다와 에브라임의 논쟁(1-3)

작은 화가 큰 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시기하는 것이 ‘죄’로 자라고 ‘화’를 부릅니다. 이스라엘은 외부의 적이 사라지자 내부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혹시 우리도 누군가를 질투하고 시기함으로 그에게 공격적으로 대하고 있진 않은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1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2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1-3)

 

암몬 자손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 입다는 동족과의 갈등을 겪습니다. 에브라임 입다에게 암몬과의 전쟁 때 부르지 않은 것을 놓고 입다의 집을 반드시 불살라 응징하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건너간다’라는 것은 에브라임의 요단 서편에 있기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 요단 동편에 있는 길르앗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이런 에브라임의 말은 기드온 때보다 훨씬 더 강한데, 기드온 때는 왜 부르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섭섭함을 드러내는 정도였다면, 여기서는 “반드시 너와 내 집을 불사르겠다.”라는 말합니다. 이것은 입다의 건방진 행동을 힘으로 징벌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에브라임이 이렇게 입다를 공격하려는 이유는 1차적으로 전리품 때문입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서 전리품을 얻지 못하게 된 에브라임 지파는 입다가 받은 전리품을 탐내고, 이를 빼앗기 위해 시비를 걸어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에브라임 지파가 길르앗 부족을 우습게 보았음을 말해줍니다. 아마도 기드온 때의 일도 있고 해서 이렇게 협박을 하면 입다도 기드온처럼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입다의 반응은 기드온과 달랐습니다. 입다는 자신을 논쟁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상대방이 싸움을 걸어왔을 때, 이를 피하지 않고 맞서 싸운다라는 뜻으로 입다의 특징을 잘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는 길르앗의 장로들과 논쟁하고 암몬과 논쟁하여 이겼고, 지금은 에브라임과 논쟁하고 있습니다. 입단은 암몬과의 전쟁 때 에브라임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에브라임 지파가 도와주지 않았으며,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신의 손에 넘겨주어 이겼다라고 항변합니다. 전쟁의 승리에 에브라임 역할은 전혀 없었다고 반박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를 때는 오지 않더니 이제 와서 싸우려고 하는 태도를 강력하게 비난합니다.

 

입다와 에브라임의 전쟁(4-7)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공동체는 겸손과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공동체를 이끌어갈 사람들은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를 원하십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탁월하길 원하시지만, 교만하여 어리석은 지도자가 되기 원치 않으십니다. 차라리 부족하지만 겸손하고 지혜로운 성도가 되길 더 원하십니다.

 

4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5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6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7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4-7)

 

에브라임을 말로 비난한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을 모아 에브라임과 전쟁을 합니다. 여기서 ‘쳐서 무찌르다’라고 번역된 ‘낙하’라는 단어는 사사기 1장에서 가난한 성음을 칠 때 사용됐던 단어입니다. 적을 치던 전쟁이 이제는 동족을 치는 전쟁으로 성격이 바뀌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쟁까지 이르게 된 원인은 에브라임의 말에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들이며, 그래서 원래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도망자’라는 것은 주인의 허락도 없이 도망한 노예나 비천한 인물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단 서편에 있던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는 요단 동편의 길르앗을 정통성이 없는 집단으로 어신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 때 암시적으로 드러났던 동서 간의 갈등이 여기서 완전히 표면화되고 있습니다.

5-6절의 전쟁의 주체는 길르앗과 에브라임입니다. 이는 완전히 지파 간의 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쟁은 요단 나루를 먼저 점령한 길르앗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전쟁에 패한 에브라임 사람들은 이제 거꾸로 도망자가 되어 요단 나루를 건너려고 합니다. 이때 길르앗 사람들은 ‘쉽볼렛’과 ‘십볼렛’의 발음 차이로 에브라임 사람을 구별하여 그들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말을 통해 전쟁을 하는 것은 말의 사람인 입다의 특징과 잘 어울립니다. 요단 나루를 점령하는 전투는 전의 에훗의 이야기와 기드온의 이야기에서도 나왔는데, 그때는 적을 치기 위한 훌륭한 전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대상이 동적인 에브라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도 이스라엘이 점점 타락하고 있다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이렇게 암몬의 침입으로 시작된 전쟁은 비록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게 되었지만, 결국 동족 간의 전쟁으로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입다는 성공적으로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의 손에서 구원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후손을 하나도 없지 못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전체로는 지파 간의 내분으로 동족을 죽이는 비극으로 끝난 것입니다.

7절에서 입다의 죽음과 사사로서의 기관과 장사된 곳을 언급하는데 여기서부터는 평안의 기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입다가 다른 사사들에 비해 사사로 지낸 기간이 매우 짧기 때문입니다. 사사의 빠른 죽음은 이스라엘이 다시 지도자가 없는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점점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소사사 입산, 엘론, 압돈(8-15)

때로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것이나 직위가 자신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면이 소유나 자리에 걸맞은 사람으로 변하지 않으면, 그것은 헛된 안개와 같은 것뿐입니다. 자신의 소유나 지위를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해야됩니다. 그러니 지도자의 자리는 동경의 자리가 아니라 두려워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소유나 지위를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8그 뒤를 이어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9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 10입산이 죽으매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더라 11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12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13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14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 15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13-15)

 

8-15절은 3명의 소사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입다(8-10)

 

입다는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동족 안에서 결혼을 시키지 않고 딸들은 가나안 땅 밖으로 시집 보냈고 며느리들은 밖에서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자손은 기드온에서 시작된 왕 같은 사사의 모습이 점점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사사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왕처럼 외부와 결혼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해 전혀 주저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정치적으로는 좋은 수단이 될지 모르나 신앙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3장 6절의 부정적 모습과 동일합니다. 다스리는 기간도 7년으로 짧아집니다.

 

(2) 엘론(11-12)

 

이어서 나오는 사사 엘론입니다.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보고만 나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보고가 없는 것으로 보아 왕 같은 사사에 가까운 곳으로 생각됩니다.

 

(3) 압돈(13-15)

 

다음 사사는 압돈입니다. 비라돈은 15절에 의하면 에브라임 지파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에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에브라임 지파 출신의 사사입니다. 여기서 에브라임 지역에 있는 아말렉 사람의 산지는 이스라엘이 가난을 정복할 당시 아말렉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압돈의 특징은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이 있고, 그들이 어린 나귀 70마리를 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사 야일과 비슷한 모습이지만 아들이 더 많고 손자까지 나귀를 타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왕적인 지위의 세습이 자식에게서 손자까지 3대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야일보다 더 왕 같은 사사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사사 건이 왕 건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3명의 사사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이 없이 오직 자기들의 지위와 부와 유익을 위해 움직이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해 기여한 것도 거의 없습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사사들도 점점 타락하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아직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때입니다. 이 땅의 부와 권력을 좇으며 시기하고 분열하고 다투는 삶에서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자신만을 위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힘써 일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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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1-03)

 


영적 무지한 사사 입다와 그 딸

사사기 11장 29-40절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영향력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그는 참 지혜와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본문은 인간이 말씀에서 떠나 세상의 영향을 받으면 얼마나 어리석게 행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방적 종교성이라는 영적 어둠이 초래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 입다가 전쟁에 임할 때, 하나님의 영이 입다와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입다를 사사로 인정하시고 그의 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암몬의 손에서 구원하십니다. 하지만 이 과정속에 입다는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인신 제사를 소원합니다. 그로 인해 결국 자신의 무남 동녀를 번제로 죽게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승리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됩니다.

 

입다의 출정과 서원(29-31)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은 비참한 결과를 맞이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모든 전쟁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가면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입다처럼 인간의 성급함과 하나님을 향한 무지함이 무모할 때,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9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3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29-33)

 

본문은 암몬과의 전투와입다의 서원을 기술합니다.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을 입다에게 임하게 하십니다. 이전에 웃니엘과 기드온도 영이 임하자 전쟁에 나가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이제 입다에게 임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1) 입다의 출정(29)

 

길르앗 지역 때문에 암몬과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전형적인 전쟁 장면처럼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고 용감하게 암몬에게로 나가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라는 표현은 3장 10절에서 웃니엘에게 임할 때와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입다를 사사로 인정해 주신다는 증표이며,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며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는 증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입다에게 그의 영을 보내신 것 자체가 놀랍고 감격스럽습니다. 이만큼 오기까지 방해가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배역과 회개를 반복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지 않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10:13).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고초에 안타까워하셨습니다(10:16). 그러다 암몬이 길르앗을 치려 하자 백성들은 하나님 의견은 아예 무시하고 스스로 나서서 구원자를 찾았고(10:18), 입다와 협의하여 그를 머리로 세웠습니다(11:5-11). 이 과정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입다에게 그의 영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얼마나 크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입다는 기드온처럼(6:34-35) 영을 힘입어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그는 길르앗 진영이 있는 미스바(미스베)로부터 길르앗 전역, 북부의 므낫세와 요단강 건너 므낫세(29), 에브라임까지 갔습니다(12:1-3). 그 후에 다시 미스바로 돌아와 암몬을 먼저 공격하기 위해 나갔습니다. 입다가 영을 힘입어 이들 지역을 종횡무진하는 장면을 역동적으로 그려냅니다.

 

(2) 입다의 서원(30-31)

 

여기까지만 보면, 이전의 전쟁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완벽한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함께 출정하는 입다의 모습에서 전쟁의 승리가 기대되는 때, 예상치 않게 입다의 서원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나가기 직전에 입다는 여호와께 서원합니다. 자신의 손에 암몬을 넘겨주시고(30), 자신이 평안히 집으로 돌아오면, 집에서 맨 처음으로 마중 나오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겠다고 합니다(31).

원래 이 대목은 일반적으로 여호와께서 승리를 확신을 주시는 위치인데, 입다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나선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려는 모습입니다.

 

이 입다의 서원을 볼 때, 비록 암몬에게는 하나님께서 입다를 이스라엘에게 주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판단을 맡긴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이 전쟁은 자신의 모든 것이 걸린 전쟁으로 길르앗의 머리가 될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길르앗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사람을 번제로 들이는 이교적 제의를 하나님께 서원한 것입니다.

입다가 하나님의 법을 잘 몰라서 그랬거나, 가나안 문화에 너무 져져서 이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잘 알고 있었지만, 체험적으론 잘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강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고 서원을 통해 마치 보험이라도 드는 듯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런 입다의 모습은 기드온보다 더 영적으로 타락한 모습입니다. 기드온은 일단 모든 하나님의 명령을 두려워하였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쟁할 때는 온전히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입다는 인신 제사라는 서원을 통해 여호와의 전쟁조차 그 의미를 퇴색시켰고 하나님을 조건에 좌지우지되는 분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원래 여호와께서 주인공이고 인간은 보조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입다는 서원을 통해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보조자로 만든 것입니다.

 

(3) 승리를 주신 하나님(32-33)

 

입다가 전쟁을 하는 장면은 매우 간략하게 표현됩니다. 입다 이야기에서 전쟁 장면이 중심 이야기가 아니라 다음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에 그치고 있는 것입니다. 전체 이스라엘 자손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승패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여기서는 너무나 당연한 듯 여호와께서 그들을 입다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말과 함께 입다가 차지한 성읍의 명단이 나오면서 전쟁 이야기가 정리됩니다.

입다는 모압과 이스라엘 경계 부분인 아로엘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암몬과 길르앗 경계가 되는 아벨 그라민과 도시들을 전부 정복하여 암몬 자손을 길르앗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매우 큰 승리를 한 것입니다(33). 여기서 암몬과의 전쟁 문제가 해결되어 이야기가 정리되는 듯하지만, 이 땅의 서원과 전쟁의 승리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됩니다.

 

서원 제물로 드려진 입다 딸(34-40)

하나님께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입니다. 하나님과 협상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터무니없는 소원을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끌어내려는 것이야말로 바로 우상숭배의 본질인 것입니다.

 

34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6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37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38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39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40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34-40)

 

입다가 대승을 거두고 미스바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돌아올 때, 경솔한 사원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의 집에서 입다의 딸이 가장 먼저 마중을 나왔습니다.

본문에 입다가 소원할 때 했던 말인 ‘나와서 영접하다’라는 말을 반복하여, 딸이 입다의 서원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입다의 딸이 무남독녀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34). 입다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딸이 영문도 모른 채 즐겁게 소고 치고 춤추며 아버지를 마중 나온 것입니다. 이 장면은 너무나 비극적인 장면으로 입다의 서원이 끔찍한 비극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입다는 자신의 딸이 마중 나온 것을 보고 옷을 찢으며 한탄합니다(35). ‘왜 하필 내가 나왔냐?’라고 원망합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딸을 책임으로 돌립니다.

 

결국, 그가 이 전쟁을 온전히 하나님의 전쟁으로 들이지 않았기에, 그의 승리도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자신의 딸을 죽이는 상처뿐인 승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입다의 말을 들은 딸은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받아 아버지가 말한 대로 행하라고 말합니다(36). 여기서 ‘아버지’와 ‘당신’이 다섯 번이나 나와 그녀는 이 상황의 책임이 아버지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주셨으니 아버지도 자신의 선원을 갚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36). 그녀는 약속을 지키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우리 인간도 자신의 말을 지키는 진실성을 보여야 한다고 신앙 고백한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고 신실하셨기에 인간도 하나님께 신실해야 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입다의 딸의 신앙 고백은 전혀 신실하지 않은 입다나 길르앗 사람이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명백히 다른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 고백, 또한,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무지함에서 비롯된 순진함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난 잘못된 서원은 이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행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우리가 보이는 신실함은 아닙니다. 그녀와 입다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입다의 서원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입다의 서원과는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여호와의 전쟁이었습니다.

 

딸은 두 달만 말미를 달라고 부탁합니다(37). 자신이 처녀로 죽는 것을 애곡하기 위해 친구들과 산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처녀라는 것은 ‘젊다’라는 뜻이며 ‘인생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다’라는 것을 강조한 편입니다. 그녀에게 후손이 없으며 입다에게도 후손이 전혀 없다는 의미도 됩니다. 입다는 이를 허락하였고 그녀는 정말 두 달 뒤에 돌아와 아버지의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하였습니다. 입다의 딸의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쓰는 것이 너무나 끔찍한지, 본문은 ‘그는 자신의 소원대로 딸에게 행하였다’라는 간접적인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39).

 

이런 입다의 딸을 기리기 위해 이스라엘 딸들이 1년에 한 번씩 나흘씩 애곡하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레위기 27장 2-8절에 따르면, 잘못된 소원은 돌이키거나 감소시킬 수 있으며, 서원을 행하는 것이, 오히려 죄가 되면 서원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입다와 그의 딸은 이것을 몰랐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딸의 희생에 눈을 감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입다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킴으로 자신이 원하는 길르앗의 머리 자리를 얻었습니다.

입다에 딸은 사사기 내에서 최초로 희생된 여성입니다. 이전까지 여성들은 축복받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용감한 여성들로 긍정적으로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입다에 딸은 본인은 신실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기에 어이없이 실행된 여성입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점점 타락할수록 여성들의 처지도 점점 열악해집니다. 1장에서 갈렙은 자신의 딸을 보호하고 풍성하게 해줄 샘을 주는 보호자로서의 아버지였지만, 입다는 자신의 딸을 죽이는 어리석은 아버지로 둘은 대조됩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가족 관계도 깨지며 보호자인 아버지가 자식을 희생시키게 됩니다.


입다의 딸은 죽음으로 신실함을 보이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입다의 딸을 대신할 숫양을 보내시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불신실함을 드러내고, 미신적이며 우상적인 행태에 철퇴를 가하시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신앙이 말씀에서 이탈할 때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들은 반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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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1-02)

 

 

 


암몬과의 외교전을 피는 입다

사사기 11장 12-28절


성도들은 세상을 향해 담대해야 합니다. 강한 자들의 부당한 주장과 요구 앞에 위축되지 않고 합리적으로 방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적으로, 영적으로 준비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하지만 정당한 논리라고 해서 악을 설득하거나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호소하며 신실하심을 의지해야 할 이유입니다.

 

  • 입다는 암몬 왕과 길르앗 소유권을 두고 분쟁을 벌립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를 근거로 암몬 왕의 주장이 터무니없음을 밝힙니다. 그 땅을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셨으므로, 암몬은 그 뜻을 거스르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합의가 실패로 돌아갔고, 이제 전쟁이 임박했습니다.

 

입다와 암몬의 왕의 분쟁(12-13)

역사를 바르게 기억하지 못한 민족은 불행은 계속 반복되어 집니다. 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깨어 있지 않을 때, 악한 세력들은 역사를 왜곡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고, 선한 사람들을 향해 부당한 요구가 반복되어 집니다. 입다는 무리한 암몬 왕의 주장에 대해 바른 역사관으로 대항합니다.

 

12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들을 보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하니 13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사자들에게 대답하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점령했기 때문이니 이제 그것을 평화롭게 돌려 달라 하니라(12-13)

 

입다는 길르앗 장로들에 의해 그들의 머리로 임명됩니다. 먼저 첫 임무로 암몬의 도발에 대해 투입됩니다. 입다와 길르앗 간의 권력 절충이 끝나고, 입다와 암몬 왕 사이의 길르앗 땅 소유권에 대한 논쟁이 기술됩니다. 이들의 대화에 대부분은 입다의 장황한 연설 내용입니다.

 

고대에는 전쟁하기 전에 서로 사자들을 보내어 말싸움을 먼저 합니다. 이는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상대방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입니다. 입다는 전쟁하기 전에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고 자극합니다(12).

이제 막 길르앗의 머리가 된 입다는 암몬 왕에게 사신을 보내는 모습은 왕처럼 행동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길르앗 땅을 ‘우리 땅’이나 ‘우리 민족의 땅’이라고 하지 않고 ‘내 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내 땅’이라는 표현은 왕이 자신의 왕국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는 먼저 사자를 보내어 암몬 왕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전쟁의 원인이 암몬에게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이에 암몬 왕은 길르앗, 즉,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는 원래 암몬 땅이었는데,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이후에 점령하였기 때문에 이제 평화롭게 돌려달라고 으름장을 놓습니다(13). 이곳이 원래 자기 땅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순순히 항복하고 길르앗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거절 시에는 전쟁을 각오하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암몬 왕이 길르앗 땅을 차지하기 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어떤 명분이나 순리에 의한 것이 아닌, 그저 힘의 논리로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해져 약해져 있을 때, 자신의 영토를 넓히고자 하는 야망뿐입니다.

 

역사 회고를 통한 입다의 변론(14-22)

우리가 어떤 상황 가운데 처하던 그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여 이성적 논리로 정립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과 역사에 대한 준비된 지식만이 잘못된 주장을 막을 수 있습니다. 바르게 세울 수 있습니다.

 

14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다시 사자들을 보내 15그에게 이르되 입다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이 모압 땅과 암몬 자손의 땅을 점령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6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광야로 행하여 홍해에 이르고 가데스에 이르러서는 17이스라엘이 사자들을 에돔 왕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청하건대 나를 네 땅 가운데로 지나게 하라 하였으나 에돔 왕이 이를 듣지 아니하였고 또 그와 같이 사람을 모압 왕에게도 보냈으나 그도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가데스에 머물렀더니 18그 후에 광야를 지나 에돔 땅과 모압 땅을 돌아서 모압 땅의 해 뜨는 쪽으로 들어가 아르논 저쪽에 진 쳤고 아르논은 모압의 경계이므로 모압 지역 안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으며 19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당신의 땅으로 지나 우리의 곳에 이르게 하라 하였으나 20시혼이 이스라엘을 믿지 아니하여 그의 지역으로 지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의 모든 백성을 모아 야하스에 진 치고 이스라엘을 치므로 21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시혼과 그의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시매 이스라엘이 그들을 쳐서 그 땅 주민 아모리 족속의 온 땅을 점령하되 22아르논에서부터 얍복까지와 광야에서부터 요단까지 아모리 족속의 온 지역을 점령하였느니라(14-22)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하는 암몬 왕의 주장에 대해 왜곡된 부분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전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암몬 왕에게 입다는 가급적이면 전쟁보다 평화를 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사자를 보내,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두 가지 이유로 길르앗 지역이 이스라엘의 소유이며, 그 요구가 부당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가 증거로 제시한 내용들은 출애굽부터 광야 여정 동안 이스라엘과 에돔, 모압, 아무로 족속 사이에 있었던 사건들입니다(민 20-24방; 신 2장).

 

첫 번째 이유로 14절에서 18절에서 입다는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은 암몬과 모압 땅을 점령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출애굽 여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자신들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홍해까지 왔고, 거기서 다시 가데스까지 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에돔과 모압 땅으로 지나가려고 사자를 보냈지만, 그들이 허락하지 않아 가데스 광야에 머물다가 모압 동편 경계인 아르논 진을 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정중하게 요청하지만 거절당한 것입니다.

여기서 입다는 아르론의 모압의 경계라는 것을 강조하며, 자신들은 모압 땅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사실 광야에서 길르앗으로 오는 가장 좋은 길은 애굽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남북으로 놓인 왕의 대로를 지나는 루트입니다. 그래서 에돔과 모압에게 사자를 보내어 길을 통과할 수 있게 허락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명기나 민수기에 암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 이 길은 에돔과 모압을 통과하지만, 암몬은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단 동편의 사건을 다루는 신명기 2장 37절에 따르면, 암몬 땅은 가까이 가지 않았다라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이 암몬뿐 아니라 에돔과 모압과도 싸운 일이 없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입다는 이어 두 번째 이유를 이스라엘이 차지한 길르앗은, 원래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다고 말합니다. 입다는 아모리 땅을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이나 에돔처럼 아모리에서도 사자를 보내 땅을 지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압과 에돔과 달리 지나가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군사를 모아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이렇게 아모리가 이스라엘과 전쟁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왕 시혼과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넘겨주셨고, 이스라엘이 그들을 이겨 아모리 사람들의 땅을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입다는 이 같은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 자손은 아르논에서 얍복까지와 광야에서 요단까지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아르논은 모압과의 경계에 흐르는 강으로 최남단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얍복강은 최북단 경계를 말합니다. 광야에서는 요단까지는 동편 경계와 서편 경계를 말합니다.

 

변론의 종결과 암몬의 거절(23-28)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시면,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해박한 지식이나 경험 그리고 달변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항상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입다는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며 암몬의 불법적 요구를 거절합니다. 용기 있는 선택을 합니다.

 

23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아모리 족속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거늘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옳으냐 24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한 것을 네가 차지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 25이제 네가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느냐 그가 이스라엘과 더불어 다툰 일이 있었느냐 싸운 일이 있었느냐 26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마을들과 아르논 강 가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주한 지 삼백 년이거늘 그 동안에 너희가 어찌하여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 27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였으나 28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가 사람을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23-28)

 

입다는 길르앗이 암몬 자손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구구절절하게 논증한 후, 이스라엘이 아모리 땅을 계속해서 점령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1)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신 땅

 

첫째,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아모리 족속을 쫓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고대 사람들은 신이 땅을 준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입각하여 자신들이 이 땅을 차지한 것은 이스라엘의 신은 여호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입다는 당시의 세계관과 신관을 가지고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2) 모압 왕 발락보다 더 잘났느냐고 질문함

 

둘째 논리는, 당신이 모압 왕 발락보다 더 잘 났냐고 묻고 있습니다. 입다가 말하는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아모리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그 땅을 차지하자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저주하기 위해, 당시에 매우 유명한 선지자로 알려진 위대한 사람 발람을 부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나타나셔서 저주 대신 축복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과 전쟁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이렇게 현재 암몬 왕보다 훌륭한 발락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전쟁도 못하였는데, 내가 감히 할 수 있겠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3) 이미 이 성읍에 거주한 지 300년이 지남

 

셋째, 이미 이 성읍에 거주한 지 300년이 지났다고 말합니다. 입다 시대를 대략적으로 주전 1100년경으로 보는데 가나안 정복 시기는 대략 주전 1400년 경이 됩니다.

26절에 언급된 ‘헤스본’는 아모리 왕 시혼이 살던 수도로 아르곤 강가 북쪽에 위치합니다. 아노엘은 아르론 강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합니다. 이렇게 이 땅들은 원래 아무리 땅이었음을 다시 암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한 걸음 양보에서 암몬 왕의 주장대로 이곳이 안 온 사람들의 땅이었다면, 왜 300년 동안 그 땅을 도로 차지하지 않았는지 묻습니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옛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길르앗 땅의 소유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한 입다는 마지막으로 이런 암몬 자손의 악행을 하나님께서 판결해 달라고 기원합니다. 이때는 여호와를 사사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호와만이 이스라엘과 세상의 사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다의 말해 보면, 그가 역사와 구원과 하나님께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지식만인지 아니면 신앙인지 의문이 듭니다. 뒤에 나오는 이때의 행동을 보면, 지식과 신앙이 분리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분명 바른 지식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바른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올바른 신앙인은 아닙니다.

 

이런 입다의 말을 들은 암몬 왕은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을 시작합니다. 아마도 처음부터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싸움에서 일단 입다가 승리하였습니다. 암몬 왕은 대구할 말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8절의 암몬 왕은 막무가내로 입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있다는 자기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어떤 단어들을 사용하고 말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화술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언제 자기가 입을 다물어야 될지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기에 다음 단락에서 아주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게 됩니다.


지도자로 세워진 입다는 암몬의 부당한 소유권 주장 앞에 합리적 논리로 반박합니다.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치밀한 논리로 부당성을 논박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는 변방에서 잡류와 어울려 살았지만, 역사적 신앙적 의식만을 또렷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에게 필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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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1-01)


입다를 사사로 선택한 이스라엘

사사기 11장 1-11절


세상에서는 외적인 조건을 보고 지도자를 선택합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사람의 배경을 그 사람의 능력보다 중요시하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기준이 다릅니다.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워지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신 이유를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 입다는 길르앗의 아내가 낳은 아들들에게 쫓겨나 돕 땅에 거주했는데, 잡류가 그와 함께합니다. 암몬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암몬과 싸워 달라고 청합니다. 입다는 자신이 그들의 머리가 된다는 확답을 받고 그들과 동행합니다.

 

입다의 출생 배경(1-3)

세상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지 않고, 그 사람의 출신, 가문, 스펙이나 능력을 따라서 평가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한 인식보다는 그 사람의 환경이 얼마나 더 소중한가를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오늘날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이러한 차별을 당해본 적 있습니까? 차별은 큰 아픔으로 상처로 남을 가망성이 있습니다.

 

1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2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3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1-3)

 

영적인 지도자가 없는 암흑한 시기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본문은 느닷없이 입다 이야기가 나옵니다. 길리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로 소개되지만, 이는 기드온과 동일한 호칭으로 군사적으로 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사적으로 이스라엘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입다는 기생이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보다 더 출신이 좋지 않습니다. 여기서 기생은 몸을 파는 여인을 의미하므로 창세기의 율법에서 여호와께서 가증한 직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기생과 길르앗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자입니다. 그렇지만 그를 길르앗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생에게서 태어났어도 길르앗의 아들로 인정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길르앗의 부인의 아들들은 입다에게 기억을 주지 않겠다면서 입다를 내쫓아버립니다.

그래서 길르앗 사람들, 특히 이복형제들은 입다가 출신이 미천하다고 해서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든 자녀에게 유산을 나눠주는 이스라엘의 상속법을 깨뜨린 것이므로 유산을 나눠주기 싫어 형제를 쫓아 내버린 행동은 이스라엘 백성이 점점 악해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급기야는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 방황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타의에 의해 고향 길르앗을 등지게 된 입다는 길르앗에서 동북방으로 20여km 떨어진 돕으로 도망해서 살았습니다. 그는 고향을 떠나서 살았는데, 그에게 지도자 자질이 있었던지 여러 잡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점차 많은 떠돌이가 입다에게로 몰려들어 그를 추종했습니다. 만약 입다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은 채 살았다면, 자신의 추종 세력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되돌아와 형제 부모에게 보복하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난동을 부리는 불량배로 전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배경이나 스펙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그 사람의 신실함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을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차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이유로 차별하고 있는 사람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입다(4-11)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은 바른 신앙입니다. 자신이 먼저 결정해 놓고 도움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주인이 아닌 도우미나 종으로 전락시키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암울한 사사 같은 시대를 살지 않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4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5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6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 7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 8그러므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매 9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 10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 11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4-11)

 

이 본문은 10장 18절과 연결됩니다. 정치적 약자를 이용하다 쓸모없으면 폐기 처분하려던 무정한 이들의 의도는 사사 시대에 어두운 단면이자 비정한 이 세상의 민낯입니다. 인격이 아니라 효용성에 따라 속보다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값을 매기는 세상을 성도인 우리는 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1) 입다는 찾은 장로들(4-6)

 

암몬의 침입으로 이스라엘은 전쟁이 임박했습니다(4).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길르앗 장로들은 형제들에게서 쫓겨난 입다를 데리러 돕 땅까지 갔습니다(5).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에게 자신들의 장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6). 이 단어는 주로 군사적 지휘관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장로들보다 낮은 지위로 그들의 명령 아래 길라 군대 장관이 되어 달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서 싸워줄 용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2) 장로들의 제안을 수락한 입다(7-9)

 

입다는 길르앗 장로들의 부탁에 대해 먼저 부정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는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라는 말합니다. 이것을 통해, 입다가 그들에게 감정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을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라고 따집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쫓아낼 때는 언제이고 이제 힘들다고 자신을 부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화를 내는 것이며 그 말 속에는 조롱도 포함돼 있습니다. 사실 형제들이 입다에게 유산을 주지 않고 쫓아내기 위해서는 길르앗 장로들의 법적 승인이 있어야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장로들도 입다의 형제들과 한통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입다는 이들에게 당당하게 따지며 조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입다는 장로들의 잘못된 행동을 간접적으로 지적하면서 협상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합니다. 입다에 강한 저항과 조롱의 길라 장로들은 결국 한발 물러서며 입다에게 머리를 숙입니다. 그들은 입다가 가서 암몬과 전쟁을 해준다면 길라 주민의 머리로 삼겠다고 제안합니다(9). 여기서 ‘머리’는 군사적 정치적 우두머리를 의미하며,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의 마음을 얻기 위해 1개 군대 장관이 아닌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전쟁만 하면 머리로 삼겠다는 장로들의 제안에 입다는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입다가 장로들의 파격적인 제안, 즉, 전쟁만 해도 머리로 삼겠다는 제안에서 한 발 물러선 것으로 전쟁에서 이기면 머리가 되겠다라는 뜻입니다. 입다는 이 사람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져 어떤 조건이라도 들어주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전쟁에 지면 책임을 물어 자신을 다시 쫓아낼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는 자신이 확고부동하게 길르앗의 머리가 될 조건을 내세운 것입니다. 만약 전쟁에 이기면 아무도 입다가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그를 내게 넘겨주시면’이라는 표현은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라고 말한 것인데 보통은 매우 신앙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과연 입다가 정말로 전쟁의 주인은 여호와이시며 여호와께서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는 조금 더 확실하게 전쟁의 승리를 얻고 싶은 욕망으로 어리석은 소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는 말로는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있다’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사실을 온전히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전쟁에서 승리했을 경우 입다의 입지를 매우 강력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하면, 이것은 여호와께서 입다에게 주신 승리가 되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경우에 입다는 여호와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 되기에 아무도 그의 지도자 자격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게 됩니다. 입다의 발언은 순수한 신앙의 발로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자신의 입지를 공고하기 위한 방책일 뿐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모여서 지도자를 세우는 모습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며, 다시 한 번 암시적으로 왕의 모티브가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여호와 앞에 나간 입다(10-11)

 

입다의 제안에 길르앗 장로들은 여호와를 증인으로 삼아 자신들이 입다의 말대로 전부 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10). 장로들 생각에 일단 입다가 전쟁에 나오면 전혀 손해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입다와 길르앗 장로들은 모두 여호와를 입에 올리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진위는 모두 의심스럽습니다.

이런 거래를 통해 길르앗 사람들은 전쟁을 하기도 전에 입다를 자신들의 머리와 장관으로 삼았고, 입다는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자신의 말을 다 아뢰는 절차를 밟아 이스라엘의 사사가 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길르앗 장로들과 입다가 언약을 세우시는 모습입니다.

 

당시, 여호와께 대한 제사와 예배와 신탁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재구성하기 어렵습니다. 추측건대, 여호와께 제사 지내는 제단 앞에서 길르앗 장로들과 입다는 언약 의식을 했을 것입니다. ‘사사가 되었다’는 말은 없지만 12장 7절에 비추어 보면, 사사로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사사는 하나님께서 세우셨지만, 입다는 사람들에 의해 선택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절차를 거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줄지 고민하고 계신 사이에 사람들이 먼저 사사를 선택하여 하나님 앞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큰 자비하심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입다를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입다에게 소중한 기회를 주셨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풍성한 삶을 누릴 기회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사람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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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0-02)

 


책망을 듣고 회개하는 이스라엘

사사기 10장 10-18절


어떤 사람이 길을 걷다가 웅덩이에 빠져 죽을 뻔했습니다. 그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또 나중에 그 길을 가다가 다시 웅덩이를 지나다가, 다시 빠져서 죽을 고생 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향해 ‘바보’라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이런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위기만 모면하다가 환경이 좋아지면 범죄하는 행동이 반복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 아비멜렉 후에 일어난 사사 돌라와 야일이 통치하던 시대는 45년 동안 사회가 안전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평화의 시기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보다는 점점 타락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평화가 타락을 부르는 기회가 됩니다.

 

구원의 요구를 거절하신 하나님(10-14)

많은 크리스천 중에 신앙이 성장하지 않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무안 반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환경이 좋아지면 하나님을 떠났다가 나빠지면 다시 돌아오는 삶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무한 반복적으로 배반하고 형식적인 회개하는 사람들을 향해 긍휼을 베풀지 않습니다.

 

10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11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12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13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14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10-14)

 

이스라엘은 특별한 사람들이었지만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특별한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었고, 특별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다른 민족들과 같이 악을 행하였습니다. 블레셋과 암몬에 의해 18년 동안 압제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긴 죄를 범했다고 고백하며, 전에 없던 회개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자신 하나님을 버리고 발을 섬기며 범죄하였다라고 고백합니다 ‘범죄하였다’라는 이 원어의 의미는 길을 잘못 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여행하며 장거리 운전을 할 때 목적지로 가는 올바른 길로 가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하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길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이탈하면 영원한 생명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늦게라도 회개했으니 다행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그리 쉽게 풀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반응은 이스라엘에 대해 냉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건져 주시기 전에, 지금까지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동안 어떻게 구원하셔 주셨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모두 일곱 민족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을 언급합니다. 애굽에서부터 시작해 근래의 마온(미디안)까지 하나님께서는 일곱 민족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11-12). 숫자 ‘7’는 완벽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일곱 민족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벽하게 구원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완벽하게 구원하여 주셨지만,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그때마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13)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들이 섬겼던 신들에게 구원을 요청하라고 하셨습니다(14). 하나님의 이런 반응은 당연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매일 돌아보아야 합니다. 매일 삶의 길을 점검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삶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말씀에 비추어 봐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회개의 길을 막으시기 전에 그 길에서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회개에 약하신 하나님(15-16)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귀를 막고, 마음을 닫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때려서라도 막힌 귀와 마음을 열게 하십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있음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해보면,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던 평안이 얼마나 큰 축복 가운데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5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16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15-16)

 

하나님의 단호한 말씀 앞에서 이스라엘은 다시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처분을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간구를 거절하셨지만, 이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구해 주실 분이 오직 여호와 한 분이심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서 이번에는 진심 어린 회개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회개가 말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자신의 죄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까지 보입니다(15). 이스라엘은 징벌은 달게 받을 것이니 제발 자신들을 구해 달라고 구합니다. 스스로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하나님만 섬기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때문에 마음 아파하십니다(16).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이스라엘의 곤고함(고통)’(16)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매 맞는 자식을 보며 아파하는 아버지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이스라엘을 보시고 마음을 돌이켜 긍휼을 베푸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움직이십니다.

 

진정한 회개는 말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회개는 삶의 온전한 변화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행동으로 옮깁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반드시 죄의 뿌리가 뽑힐 것입니다. 오늘 죄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기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근심(17-18)

하나님의 사랑을 쉽게 여기는 것은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은혜를 받은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다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그렇게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외칠 때는 마음과 귀를 닫고 교만하게 굴던 자들이 이제야 겸비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17그 때에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을 치고 18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17-1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곤고로 인해 근심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위해 사사 입다를 세우심으로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의 불성실함을 압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했습니다(고후 7:10). 세상 근심은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며 말씀이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합니다(마 13:22). 그래서 모든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리시는 평강으로 극복해야합니다(빌 4:6-7).

 

반면에 자신의 죄로 인한 성도의 거룩한 근심은 회개의 열매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근심은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은혜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회개보다 앞서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눅 15:11-32).


삶에도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자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고자 악한 영적 세력의 우리를 가두고자 싸움을 걸어옵니다. 전쟁은 생명이 걸린 싸움터입니다. 말씀과 기도 믿음으로 영적 싸움을 진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영적 무기는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면, 우리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싸우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회개로 죄의 뿌리를 뽑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누리시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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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0-01)

 

 

 


이스라엘을 위한 소 사사 둘라와 야일

사사기 10장 1-9절


미국에서 대학 농구를 10회나 우승한 ‘죤 우든’이라는 전설적인 감독이 있습니다. 한 기자가 우승의 비결을 물어보면서 선수들에게 무엇을 강조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특별한 훈련 방법이나 기술에 대해서 말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 감독이 지극히 평범한 것들을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수들에게 평범한 것을 소홀히 여기면, 중요한 순간에 큰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처럼 평범한 일상이 매우 중요합니다.

 

  • 아비멜렉 뒤를 이어서 둘라와 야일이 사사가 됩니다. 그 후 이스라엘은 또 악을 행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깁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며 이스라엘을 블레셋과 암몬의 손에 파십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고 암몬이 요단을 건너와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사사 둘라(1-2)

대부분 사람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이름을 남기는 삶에 집중하다가 욕심에 이끌리는 죄의 삶을 살기도 하고, 평범한 삶을 하찮은 삶으로 취급하는 잘못된 태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삶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중한 삶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한 영웅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1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면서 2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이십삼 년 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더라(1-2)

 

사사기 10장에서 대 사사 기드온과 삼손 사이에 두 사사가 소개됩니다. 이 소 사사들은 이전 사사들의 성격을 이어받습니다. 사사는 기본적으로 군사적으로 구원자의 역할을 담당하지만, 기드온부터는 왕처럼 백성을 다스리는 다스리는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10장에 등장한 소 사사 역시, 구원자 역할을 하는 사사와 다스리는 역할을 하는 사사로 나뉘게 됩니다.

 

아비멜렉의 잘못된 통치와 그의 종말이 있고 난 후, 잇사갈 지파의 도도의 아들, 부아의 아들인 돌라가 새로운 사사로 등장합니다. 그에 대한 성경에서 소개는 매우 짧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였고, 사사로 23년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표현은 웃니엘과 소 사사인 삼갈에게 사용된 표현입니다. 이것은 돌라가 군사적 사사로 이스라엘을 적의 손에서 구원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전 사사들을 통치기간이 40년 혹은 80년인 것에 비해, 통치 기간이 23년밖에 안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타락으로 평화의 점점 짧아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거의 50년 가까이 평화를 누립니다. 하지만 평범한 삶 속에 조용히 비극의 씨앗들은 뿌려지고 있었고, 결정적 전환이 이뤄지자마자 이스라엘은 악을 향해 질주했습니다. 겉으로는 별 문제 없었던 상황에서 엄청난 일들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아비멜렉 바로 뒤에 사사 돌라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삶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했고, 23년 동안 사사로 있다가 죽었습니다(1-2). 돌라의 삶에는 아비멜렉과 같은 극적 드라마(혹은 코미디)가 없습니다. 돌라가 이스라엘을 구원했고, 아무 문제 없이 이스라엘에 23년이라는 긴 평화의 시기를 가져왔다는 내용만 전해집니다. 어찌보면 그는 특별한 문제 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사로 볼 수 있습니다.

 

사사 야일(3-5)

우리의 겉모습은 변함없이 괜찮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물질과 이기심에 타협한다면 아마도 다른 문제의 싹이 우리 안에서 계속 자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는 계속되었지만, 그 과정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이 조금씩 더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4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5야일이 죽으매 가몬에 장사되었더라(3-5)

 

돌라의 뒤를 이어 소 사사 야일이 사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길르앗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에 22년간 평화가 이어집니다. 길르앗은 요단 동편을 통칭해서 부르는 명칭으로 지파에 이름은 아닙니다. 요단 동편은 므낫세 반 지파와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입다도 길르앗 사람으로 나옵니다.

 

야일도 돌라와 비슷하게 22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습니다. 야일의 특이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구원하였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야일이 군사적 구원하지 않고 다만 다스리는 역할을 한 사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그는 아들 30명이 있고, 어린 나귀 30마리를 타고, 성읍도 30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30명이나 되는 것은, 아들이 70명이나 되는 기드온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 나귀는 값비싼 이동수단이었던 것을 볼 때, 이들이 부와 지위를 누리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성읍이 30개라는 것은 이들이 각각 성주로서 다스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볼 때, 야일은 왕처럼 살았을 뿐 아니라 자식들에게까지 부와 지위를 물려준 왕정국가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삶을 산 것을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기드온 이후 왕과 같은 사사의 모습이 이스라엘에서 점점 많아졌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악행하는 이스라엘(6-9)

종종 죄와 욕망을 쫓아가다가 그것에 잡아먹힌 사람들을 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죄를 선택하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죄악은 마약처럼 결국 사람을 지배하게 됩니다. 마음과 영혼을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우리가 소유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욕망과 탐욕은 우리보다 우월한 힘을 가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6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7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8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9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6-9)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것을 사사기에서는 이방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섬기지 아니했다’라는 세 가지 동사로 묘사했습니다. 동사의 종류로는 ‘섬기다’와 ‘버리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의 이야기와 비교할 때 매우 특이한 점은 이들이 일곱이나 되는 신들(바알들, 아스다롯,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 자손의 신들,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각 민족이 섬기던 하나님의 ‘신’이 아니라 여러 ‘신들’을 섬겼다고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섬긴 신은 일곱 종류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야말로 가나안 만신전에 있는 모든 신을 섬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배교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이스라엘의 악에 진노하셔서 이방 민족의 손에 그들을 넘기셨습니다. 그들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 또한 가중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이방 민족의 압제 아래 놓이게 하셨지만, 이번에는 블레셋 사람들과 암몬 자손, 두 이방 민족에게 이스라엘을 넘기셨습니다. 이후에 입다는 암몬 자손,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과 관련된 문제를 다르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암몬과 블레셋에게 넘기신 그해에 그들이 요단 동편 길르앗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치고 억압합니다. 단순한 정서적 압박이 아니라 누르는 힘에 의해 파괴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은 암몬과 블레셋에 의해 부서지고, 눌리고, 깨어졌습니다. 길르앗은 입다 이야기의 지리적 배경이 됩니다.

 

이방 민족들에 의해 이스라엘은 심각한 고통을 받았습니다(9절). 그 고통은 블레셋과 암몬과 아모리 족속 때문이라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진노하사'라고 알려 줍니다. 우리가 범하는 가장 치명적 실수는 하나님과 세상을 분리하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계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시간, 장소, 행동 혹은 감정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한다면, 하나님은 곧 우리에게 진노하실 것입니다.

 

결국, 야일이 죽은 후에 문제가 터집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고 온갖 이방의 신들을 섬겼습니다(6). 어찌 보면 순식간에 천지개벽이 이뤄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사의 존재 때문에 대놓고 나타나지 않았지, 조금씩 이방의 문화와 가치관이 이스라엘을 잠식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볼수 없는,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조금씩 하나님 아닌 것에 자리를 내어 준다면, 우리에게 세속적 즐거움을 주던 것들이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우리를 지배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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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9-04)

 

 


아비멜렉의 최후

사사기 9장 42-57절


올림픽은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세계의 축제입니다. 운동선수들은 올림픽을 기다리며 그 동안 땀과 노력의 씨앗을 뿌립니다. 운동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고 메달을 획득한 후 인터뷰한 것을 보면, 모두 동일하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올림픽을 준비하며 흘린 땀방울이 헛되지 않는 것 같아 기쁘다’라는 인터뷰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선한 것을 심으면 선한 열매가 열립니다. 마찬가지로 악을 심으면 저주와 심판이 찾아옵니다.

 

  • 본문은 죄의 씨앗을 심었던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심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보루에 불을 놓아 세겜 망대 안 사람들을 다 죽입니다. 그가 데베스의 망대를 공격할 때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그의 머리 위로 내려던집니다. 아비멜렉은 여자에게 죽임당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무기든 청년에게 죽여 달라고 합니다. 이는 그의 악행을 하나님께서 갚으신 것입니다.

 

파괴를 일삼은 삶(42-49)

지금 시대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포기하고 방해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가 삶의 가장 우선순위를 둡니다. 항상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마음 가짐을 새롭게 하며 살아갑니다.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의 삶이 아니라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42이튿날 백성이 밭으로 나오매 사람들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알리니라 43아비멜렉이 자기 백성을 세 무리로 나누어 밭에 매복시켰더니 백성이 성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그들을 치되 44아비멜렉과 그 떼는 돌격하여 성문 입구에 서고 두 무리는 밭에 있는 자들에게 돌격하여 그들을 죽이니 45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마침내는 점령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46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들어갔더니 47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지매 48아비멜렉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살몬 산에 오르고 아비멜렉이 손에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를 찍어 그것을 들어올려 자기 어깨에 메고 그와 함께 있는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가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하니 49모든 백성들도 각각 나뭇가지를 찍어서 아비멜렉을 따라 보루 위에 놓고 그것들이 얹혀 있는 보루에 불을 놓으매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으니 남녀가 약 천 명이었더라(42-49)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과 서로 연합하여 아비멜렉의 왕국을 만드는 일에 협력하였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지원했고, 그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연합한 사이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서로 배신하며 이제는 가장 미워하고 보복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에 대한 아비멜렉의 보복은 가알과 합세하여 자신을 배반한 세겜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이 일에 연루되지 않은 무고한 세셈 사람들까지 죽였고 성을 헐었습니다(42-45). 그의 보복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겜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세겜 망대에 살던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서 엘브릿 신전의 보루(堡壘)로 들어갔습니다(46). 보루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튼튼하게 쌓은 성의 시설물로, 주로 소규모 성곽을 일컫습니다.

이 ‘엘브릿 신전’은 9장 4절에 나왔던 ‘바알브릿 신전’과 같은 곳으로 추정됩니다. 바알 우상을 섬기는 곳입니다. 결국 세겜 망대 사람들이 위기를 피하고자 들어간 곳이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신전으로 피난처를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이 사실을 알고는 부하들을 이끌고 살몬 산으로 올라가서 나무를 찍어와서, 그 보루 아래에 나무를 놓고 불을 질러서 그곳에 있던 세겜 사람들 약 천명을 모두 죽였습니다(49). 자신을 왕으로 섬긴 백성들을 너무 잔인하게 죽인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은 보호를 받으러 들어간 신전 안에서 자신들이 세웠던 왕에게 불타 죽는 비극을 맞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섬긴 신과 왕은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가짜 신과 왕으로 들어났습니다. 정말 요담의 저주에 등장한 ‘가시나무’처럼 아비멜렉은 백성들을 불로 태워버렸습니다.

 

이렇게 아비멜렉을 협력해서 여룹바알(기드온)의 아들들 70명을 죽인 세겜 사람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요담의 관점에서 보면 인과응보이고,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9장 24절에서 분명히 그들을 향해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에게 저지른 포학한 일을 갚되 그들을 죽여 피 흘린 죄를 그들의 형제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 그의 형제들을 죽이게 한 세겜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9:24)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피난처에 숨은 사람들을 죽이는 모습은 아비멜렉을 매우 비겁한 전사로 보게 합니다. 아비멜렉은 나무를 찍어 어깨에 매면서 곁에 있던 부하들에게 자신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행하라고 명령합니다(48). 이것은 7장 17절에서 기드온이 그의 부하들에게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라고 했던 말과 같습니다. 아비멜렉이 세겜의 망대를 허무는 것은, 기드온이 브니엘 망대를 허무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이렇게 아비멜렉과 기드온의 말과 행동에 유사성을 통해서 아비멜렉의 사건이, 기드온의 폭력적인 유산이란 것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죽음과 평가(50-59)

미움의 감정으로 일어난 분노가 멈추지 않을 때 큰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 피해는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큰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미움으로 일어난 분노를 키우지 않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크게 키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문제에 대해서만 바라봐야 합니다. 자기 통제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선하고 올바른 말과 행동으로 대응하는 것을 노력해야 합니다.

 

50아비멜렉이 데베스에 가서 데베스에 맞서 진 치고 그것을 점령하였더니 51성읍 중에 견고한 망대가 있으므로 그 성읍 백성의 남녀가 모두 그리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간지라 52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공격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더니 53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54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 55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각각 자기 처소로 떠나갔더라 56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57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50-59)

 

아비멜렉은 언제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가져다주었던 방식이기에 그는 학살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던 살육의 현장에서 자신이 살육당하는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악은 결국 돌고 돌아 그의 머리 위에 떨어졌습니다.

 

(1) 아비멜렉의 죽음(50-55)

 

아비멜렉의 보복은 그가 죽기 전에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뚜렷한 이유 없이 전쟁을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관차처럼 아비멜렉의 분노가 계속 폭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겜 성읍을 초토화 시키고,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까지 찾아가서 불을 질러 1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아비멜렉은 세겜에서 끝나지 않고, 데베스라는 지역까지 진격합니다. 이 지역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세겜에서 북동쪽 약 18km에 떨어져 있는 위성도시으로 추측합니다. 아비멜렉은 세겜만이 아니라 위성도시인 데베스까지 점령하여 세력을 넓히려고 시도합니다. 만약, 데베스 사람들이 세겜 사람들과 함께 아비멜렉에게 맞셨다 하더라도, 아비멜렉의 이렇게 베데스를 공격한 행동은 지나치게 잔인하고 폭력적입니다. 그는 이미 성을 점령했고, 그 성 사람들이 견고한 망대로 도망한 상황에서(51) 무차별 살육을 자행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은 이전처럼 평화적인 방법이 아니라 폭력적인 방법으로 데베스를 점령하였고, 데베스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피하려고 성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가 숨었습니다(51-52). 이에 아비멜렉은 망대로 도망한 사람들과 담판을 지으려 하지도 않고, 세겜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망대를 불태워 모두 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습니다. 아비멜렉이 데베스 망대를 불사르기 위해 망대에 다가가는 순간, 데베스의 한 여인이 맷돌 한 위짝을 아비멜렉에게 던져 그의 머리를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사용하던 맷돌은 보통 현무함으로 된 두 개의 돌로 되어 있습니다. 맷돌 아래짝은 무겁고 납작하거나 약간 굽은 돌로 그 위에 곡식을 넣고 조금 더 가벼운 돌로 위짝을 만들어 곡식을 갈아서 가루를 만들었습니다. 맷돌 위짝의 무게는 약 2-3kg 되었기 때문에, 여인이 집어 던지기에 크게 무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깨뜨리다’라고 번역한 단어는 다른 곳에서 쓰임은 잔인한 압제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것으로, 압제자 아비멜렉에 부족한 사람의 죽음에 매우 어울리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한 여인의 용감한 행동이 아비멜렉을 저지하였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한 바위에 자신의 형제 70명을 죽인 아비멜렉은 결국 한 여인이 던져 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름도 남편의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아비멜렉의 죽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이름도 없는 한 여인에게 왕이라고 자처하는 자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죽어가는 아비멜렉의 말 속에 여인의 손에 죽는 것이 얼마나 치욕적으로 여겼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그는 한 청년에게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54)라고 고백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죽음을 비참하고 치욕적인 고백한 것입니다. 한 청년이 아비멜렉이 죽기 직전에 그를 찔러서 죽게 하였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무리 이 사실을 감추려고 했어도 결국 그는 여인이 던져 맷돌에 맞아 죽은 왕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이 여인은 드보라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야일과 마찬가지로 여인의 가재도구를 이용하여 적장을 죽인 영웅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일과 달리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사시대는 뒤로 갈수록 여성의 인권이 유린되는데, 영웅적인 여성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것은이런 분위기에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아비멜렉에 대한 평가(56-59)

 

아비멜렉에 대한 결론적인 평가입니다. 아비멜렉의 죽음에 대한 논평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아비멜렉은 시스라처럼 여호와의 적으로서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후 각기 자신의 처서로 돌아갔습니다. 아비멜렉의 죽음 이후는 사사의 죽음 이후에 나오는 평안 도구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비멜렉이 사사가 아니란 것과 올바른 지도자가 없는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없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70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 기드온에게 행한 악행을 이같이 갚으셨고(56),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도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여룹바알의 이들 요담의 저주가 성취되었습니다(57). 다른 한편으로는 요담의 저주에 나타난 두 가지 요소가 차례로 성취된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보이시진 않는 하나님께서 배후에 계시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사건의 전환을 주도하시는 장본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악행과 세겜 사람들의 악행에 대해 심판하셨습니다. 특히 자신의 욕망을 위해 형제들을 가차 없이 죽인 아비멜렉의 악행을 갚아주셨습니다. 요담이 우화를 말하며 선포했던 저주를 성취하심으로 심판을 이루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심판입니다. 데베스의 한 여인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요담의 저주를 성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비멜렉과 공모한 세겜 사람들에게도 요담의 저주가 모두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세겜와 아비멜렉은 자신들의 죄의 인과응보적 결과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요담은 당시 세계관인 인과응보적인 관점에서 아비멜렉을 저주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은 그 인과응보조차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인과응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 원리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선한 자에게 상을, 악한 자에게 벌을 주겠다고 결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인과응보는 기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상과 벌을 주시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시행됩니다. 본문 그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아비멜렉 이야기에는 하나님께서 악한 영을 보내시는 것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 거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지, 해설을 통해 아비멜렉에 대한 사건에 하나님께서 밀접하게 관계하시며, 그를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다만, 등장 인물들은 하나님의 개입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살지 않을 때, 하나님의 하신 일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된 행위를 묵인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인간의 가식(8:22-32)이나 인간의 잔인함(9:1-55)도 왕 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결국, 아비멜렉의 자기중심적 야망은 하나님의 왕권에 양보해야만 합니다. 이것으로 기드온의 이야기가 완결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와 큰 영향력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선하고 가치 있는 일에 쓰임 받지 못한다면 결국 헛된 인생일 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말고 오직 주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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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9-03)

 


이기적인 욕망이 낳은 결과

사사기 9장 22-45절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심어 놓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농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삶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악을 심으면 악의 열매를 맺지만, 선을 심으면 선의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장차 좋은 열매를 거두길 원하신다면 지금 선한 열매를 심으시길 바랍니다.

 

  • 본문은 아비멜렉이 세겜에서 왕이 된 지 3년 만에,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는 내용입니다. 결국, 세겜과 아비멜렉은 전쟁을 하게 되었고, 이 와중에 가알은 도망가고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게 철저히 패배하게 됩니다. 이 단락은 아베멜렉의 왕권이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아비멜렉을 배신한 세겜 사람들(22-24)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의 소식을 들으면서 그것을 조롱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 속에 점점 멸망당해 갑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인식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의 예언을 전해 그들이 심판을 면하고 영생을 얻도록 힘써야 합니다.

 

22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삼 년에 23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24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에게 저지른 포학한 일을 갚되 그들을 죽여 피 흘린 죄를 그들의 형제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 그의 형제들을 죽이게 한 세겜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 25세겜 사람들이 산들의 꼭대기에 사람을 매복시켜 아비멜렉을 엿보게 하고 그 길로 지나는 모든 자를 다 강탈하게 하니 어떤 사람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알리니라(22-2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강하게 하시는 방법은 주변 나라들을 약하게 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나라들이 스스로 자중지란에 빠져 망하게 하셨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방법은 이스라엘을 약하게 하시기보다 주변 나라들을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중지란에 빠지게 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의 악행은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에게 치를 떨게 만듭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이, 약육강식에 힘의 논리, 간교한 외교술, 보복, 전쟁 등만 가득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3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스리다’라는 의미는 일반적인 단어인 ‘마샬’ 대신 ‘싸르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왕자(王子)로서 행동하다’ 혹은 ‘왕자로서 다스린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표현을 통해서 아비멜렉을 왕이 아닌 왕자 정도로 여긴 것으로 보입니다.

 

세겜 주민이 아베멜렉을 배반한 것에 대해,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을 죽인 것에 대한 피흘림의 복수를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에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악한 영을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23). 이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사사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보낸 것과 대조를 보입니다. 심판하실 때는 악한 영을 보내십니다. 이런 설명을 통해 세겜의 반란은 단순한 인과응보가 아닌 무제한 피를 흘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구체적 배반 행위를 설명하는 부분으로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엿보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도질을 하였습니다. 아비멜렉의 눈치를 보면서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것은 아비멜렉의 지도에 도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세겜 사람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있다는 사실이 아비멜렉에게도 알려집니다.

 

가알의 선동과 스불의 전략(26-33)

불의한 성공을 부러워하지도 의로운 패배에 절망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진실한 의로움이 없는 악인들의 불의한 연합과 연대가 무너질 것은 예언의 성취이자 하나님의 보응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악인들에게 오늘의 번영은 위장된 심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성공을 부러워하지도 의로운 패에 절망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26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의 형제와 더불어 세겜에 이르니 세겜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니라 27그들이 밭에 가서 포도를 거두어다가 밟아 짜서 연회를 베풀고 그들의 신당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니 28에벳의 아들 가알이 이르되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신복은 스불이 아니냐 차라리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우리가 어찌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29이 백성이 내 수하에 있었더라면 내가 아비멜렉을 제거하였으리라 하고 아비멜렉에게 이르되 네 군대를 증원해서 나오라 하니라 30그 성읍의 방백 스불이 에벳의 아들 가알의 말을 듣고 노하여 31사자들을 아비멜렉에게 가만히 보내어 이르되 보소서 에벳의 아들 가알과 그의 형제들이 세겜에 이르러 그 성읍이 당신을 대적하게 하니 32당신은 당신과 함께 있는 백성과 더불어 밤에 일어나 밭에 매복하였다가 33아침 해 뜰 때에 당신이 일찍 일어나 이 성읍을 엄습하면 가알 및 그와 함께 있는 백성이 나와서 당신을 대적하리니 당신은 기회를 보아 그에게 행하소서 하니(26-33)

 

서로 미워하기를 그치고 사랑해야 합니다. 한때는 골육지친이라며 의기투합했던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이제 서로를 죽이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미움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했습니다(요일 3:15).

 

(1) 가알의 등장으로 구체화된 반란(26-29)

 

26절에서 29절은 가알을 신뢰하는 세겜 사람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때까지는 세겜 사람 일부가 아비멜렉을 괴롭히는 정도였지만 가알의 등장으로 반란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가알은 에벳의 아들로만 소개되며, 어느 지파인지 어느 민족인지 전혀 알려주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에벳’은 ‘종’이란 뜻이며 직역함은 ‘종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가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첩의 아들에 이어 이제는 종의 아들이 왕이 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등장하자마자 세겜 사람들은 그를 신뢰하였고, 그를 위해 새 포도주를 짜서 신당에서 먹고 마시는 연회를 열었습니다(27). ‘신당’이라는 말을 통해 바알과, 또한, 이방신을 섬기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세겜 사람들은 가알이 나타나자마자 그를 매우 좋아하고 신뢰합니다. 이런 행동은 아비멜렉의 몇 마디 말에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금방 가알의 편에 붙어 아비멜렉을 욕하였고 가알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이간질 합니다. 즉, 아비멜렉은 여룹바알의 아들이므로 세겜과는 관계가 없다라는 강조했습니다. 이전에 아비멜렉은 자신을 여룹바알의 아들 70명과 구별하여 자신의 어머니가 세겜 사람임을 근거로 친척과 곤욕이라는 끈끈한 유대감을 표시하며 왕으로 세움을 받았는데, 가알은 아비멜렉의 아버지가 여룹바알을 들어 세겜과 아비멜렉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합니다(28). 아비멜렉이 감추려고 애쓴 사실을 가알이 드러냈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필요에 따라 자신의 친척으로 여기기도 하고, 불리할 때는 남으로도 여기기도 한 것입니다.

간접적으로 이간질했던 가알은 이제 직접적으로 반역을 이야기합니다. 이 백성이 자신의 손에 있으면 자신이 아비멜렉을 제거하겠다고 하면서 아비벨렉에게 군대를 더 많이 만들어 자신에게 덤비라고 야유합니다(29). 이렇게 아비멜렉에 대한 도전과 비난을 통해 가알은 점차 세겜에서 자신의 세력을 얻어갔는데, 이것은 아비멜렉이 세겜에서 세력을 얻은 방법과 유사합니다.

 

(2) 아비멜렉에게 가알의 공격을 알림(30-33)

 

30절에서 33절은 아비멜렉에게 가알의 공격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이런 세겜과 가알의 동향을 스불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줍니다(30). 스불은 30절에서 세겜의 방백이라고 소개되었는데, 가알은 28절에서 그를 ‘아비멜렉의 신복’이라 부르면서도, 그와 아비멜렉 사이를 이간질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연회에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 달리 스불은 아비멜렉에게 가알과 세겜의 동향뿐 아니라 어떻게 전쟁을 해야 할지 작전까지도 알려주면서 아비멜렉에게 가알의 전쟁을 준비하라고 조언합니다. 아비멜렉은 세겜의 전폭적인 지지로 왕이 되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세겜이 아비멜렉을 대적하여 전쟁을 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진압과 세겜성의 멸망(34-45)

누군가를 이용하는 관계의 끝은 비극적인 피해 보복과 파멸만이 남을 뿐입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서로 야합하고 악의 연대를 행했던 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오늘도 악의 연대가 아닌 선한 일을 위해 힘을 모으고 연대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34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밤에 일어나 네 떼로 나누어 세겜에 맞서 매복하였더니 35에벳의 아들 가알이 나와서 성읍 문 입구에 설 때에 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이 매복하였던 곳에서 일어난지라 36가알이 그 백성을 보고 스불에게 이르되 보라 백성이 산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도다 하니 스불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산 그림자를 사람으로 보았느니라 하는지라 37가알이 다시 말하여 이르되 보라 백성이 밭 가운데를 따라 내려오고 또 한 떼는 므오느님 상수리나무 길을 따라 오는도다 하니 38스불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전에 말하기를 아비멜렉이 누구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리요 하던 그 입이 이제 어디 있느냐 이들이 네가 업신여기던 그 백성이 아니냐 청하노니 이제 나가서 그들과 싸우라 하니 39가알이 세겜 사람들보다 앞에 서서 나가 아비멜렉과 싸우다가 40아비멜렉이 그를 추격하니 그 앞에서 도망하였고 부상하여 엎드러진 자가 많아 성문 입구까지 이르렀더라 41아비멜렉은 아루마에 거주하고 스불은 가알과 그의 형제들을 쫓아내어 세겜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더니 42이튿날 백성이 밭으로 나오매 사람들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알리니라 43아비멜렉이 자기 백성을 세 무리로 나누어 밭에 매복시켰더니 백성이 성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그들을 치되 44아비멜렉과 그 떼는 돌격하여 성문 입구에 서고 두 무리는 밭에 있는 자들에게 돌격하여 그들을 죽이니 45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마침내는 점령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34-45)

 

세겜 사람들의 배신으로 반역은 시작되고 가알의 등장으로 구체화되었다가 결국 전쟁 상황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신복인 스불의 조언에 따라 밤의 세계에 매복하였습니다. 아베멜렉이 세겜을 치기 위해 매복하는 모습은 25절에서 세겜 사람들이 아베멜렉을 엿보기 위해 매복하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이것은 둘의 상황이 역전되어 엿보고 공격을 하던 세겜 사람들이 오히려 매복과 공격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둘 사이의 갈등이 점점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마침내 가알이 전쟁을 위해 성문 앞에 나와 섰고, 아비멜렉은 군사를 움직였습니다. 가알이 이 사실을 알아채고 스불에게 산꼭대기에서 사람이 내려온다고 하였지만, 스불은 잘못 본 것으로 일축하였습니다. 그는 아비멜렉 편에 서서 아비멜렉이 최대한 가까이 와서 전쟁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알이 알아볼 정도로 아비멜렉의 군대가 가까이 오자 스불은 가알을 충동하여 전쟁하게 합니다. 스불은 가알이 아비멜렉을 우습게 여기며 한 말을 인용하며, “네가 전에 말하기를 아비멜렉이 누구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리요 하던 그 입이 이제 어디 있느냐 이들이 네가 업신여기던 그 백성이 아니냐 청하노니 이제 나가서 그들과 싸우라”(38)라고 조롱합니다.

스불의 말을 통해 가알이 도저히 물러설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가알이 물러서면 거짓말쟁이요 비겁자가 되는 상황이었다가 가알은 스불의 충동에 어쩔 수 없이 앞장서 나아가 아비멜렉과 싸웠지만, 결국 아비멜렉에게 패하여 도망하였고 스불은 이들을 세겜에서 쫓아내 버립니다.

 

40절에 나오는 “부상하여 엎드린 자가 많아 성문 입구까지 이른다”라는 표현은 아비멜렉이 세겜의 군대를 철저히 추격하여 그들을 모두 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동했던 가알을 쫓아낸 후, 아비멜렉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이 배신한 세겜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그 백성을 죽이고 그 성을 헐고 소금까지 뿌립니다.

 

44절에서 아비멜렉은 밭에 있는 자들을 공격하여 죽이는데, 이들은 무장하지 않는 민간인들을 의미하며, 이들을 죽이는 것을 통해 아비멜렉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무자비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왕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죽이고 있습니다.

 

45절에서 나오는 점령 순서는 고대 근동의 전형적인 순서이지만 마지막 소금을 뿌리는 행위는 구약의 다른 본문에는 나오지 않아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대 근동의 문헌에 따르면 더 이상 사람이 번성하지 못하게 하는 저주 행위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아비멜렉은 자신을 배신한 세겜에게 철저하게 복수하였습니다. 이렇게 폭력으로 일어선 지도자는 결국 자기 백성도 폭력으로 대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불의하게 일어선 지도자와 그를 지지하고 세운 사람들에게 그 죄를 물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악인들을 짓밟으실 그 날이 이제 곧 올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지도자를 세우며, 서로 보복하지 말고, 말씀대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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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9-02)

 

 

 


세겜 사람들을 향한 요담의 항변

사사기 9장 7-21절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히틀러가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악한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 악한 계획을 실행해 가면서 다른 민족을 멸시하고 또 멸망시키려는 시도도 하였습니다. ㄱ러나 그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의 마지막은 비극적으로 끝났습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히틀러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악인의 악한 계획은 처음에는 그들의 의도대로 성공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죄의 시작은 언제나 멸망과 비극으로 끝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 있기 떄문입니다.

 

 

  • 요담은 그리심 산에 올라가 세겜 사람들에게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이 옳으냐며 책망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 불사를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3년 후 하나님께서 악한 영을 보내시니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합니다.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들에게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을 내리시려는 것입니다.

 

요담의 우화(7-15)

지금 있는 자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리입니다. 자격이 없는 이들은 자리만 탐하지만, 자격을 갖춘 이들은 주어진 자리에서 제 소임을 다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부르신 자리와 주신 은사를 서로 견주어 자랑하지도 위축되지도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일이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에 자신의 소명과 역할도 소중히 여기기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7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그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 8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9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0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1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2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3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4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5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7-15)

 

아비멜렉에서 가까스로 요담은 아비멜렉이 형제 70명을 한 바위에 죽었고,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세겜 사람들에게 항변합니다. 그는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으로 올라가 세겜을 향해 외칩니다. ‘나볼로스’라는 도시를 가리는 두 개의 산중 좀 더 남쪽에 있는 산으로 신명기 27장 12절과 여호수아 8장 30-35절에 축복의 산으로 나타납니다. 세겜이 그리심 산(남쪽)과 에발 산(북쪽) 사이의 골짜기란 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요담은 축복의 산에서 세겜을 향해 저주하고 있습니다. 산꼭대기는 위급할 때 도망치기 유리하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쉽고, 목소리가 아래까지 잘 전달됩니다.

 

요담은 소리 높여 세겜을 향해, ‘내 말을 들어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7)라고 외칩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령처럼 전합니다. 이 외침은 아비멜렉의 말(2)에 넘어간 세겜인들을 넌지시 비난하면서, 이제 자신의 말에 주목하여 하나님의 호의적인 응답을 기대하라는 권유입니다. 세겜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지만, 그가 의미하는 하나님의 응답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하고 완전한 판결입니다.

 

요담은 이와 같이 형제들의 죽음이나 그들을 죽인 장본인을 왕으로 세운 행동에 대해 개인적으로 보복하거나 물리적으로 충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을 미루어 볼 때, 이복형제들에 대한 아비멜렉의 말(2)은 왜곡된 주장이며 억측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의 말만 듣고 그들에게 해 끼칠 맘도 없었던 무고한 자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호의적인 응답은 받을 수 없습니다.

 

8-15절은 요담이 우화를 통해, 여기서 세 종류의 유익한 나무와 가시나무가 나옵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이 크나큰 실수임을 깨우치려 합니다. 우화에서 나무들은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울 나무를 찾아다니느라 분주합니다. 실제로는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분주합니다. 나무들은 감람(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순으로 찾아가 왕이 되기를 요청합니다. 왕 후보가 된 세 나무는 모두 자기에게 주어진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로 각각 기름과 포도주와 단 과일을 제공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 만족합니다(9,13).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왕이 되기 위해 이런 귀한 가치를 버릴 수 없다며 거절합니다.

이때 ‘왕이 되는 것’은 ‘나무들 위에 흔들대는 것’(‘우쭐대는 것’, 9,11,13)으로 나와 왕의 직책과 아비멜렉이 왕 된 것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거절하자, 모든 나무는 가시나무를 찾아가 왕이 되라고 합니다.

위 세 나무와 달리 가시나무는 열매도 없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가치도 없으며, 가시로 고통만 줍니다. 이런 나무를 왕으로 삼으려 한 자체가 그들을 고통과 멸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주제를 모르고 반갑게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그는 나무들이 기름을 부어 자기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면, 자신의 그늘에 피하라고 호령까지 합니다. 게다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불을 내어 레바논의 백향목이라도 살라버릴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실상 가시나무는 그늘도 거의 없으며, 나무들이 그 덤불 아래에 들어갈 수도 없고, 가까이 갔다가는 가시에 찔리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 가시나무가 불을 뿜어 최상의 목재인 백향목까지 태워버린 다니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우화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현실에서는 세겜인들이 가시나무 같이 가치도 없고 해악만 불러올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이미 무고한 자기 형제들을 죽임으로써 그의 가시와 불의 위협이 실제임을 증명했습니다. 요담은 세겜인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으므로 그들에게 가시와 불만 남았음을 예고합니다.

 

악인들에 대한 심판 예언(16-18)

성도는 악한 세력이 권세를 얻고 의인을 박해하는 상황에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른 길로 행해야 합니다. 악한 자들이 잠시 동안 의인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므로 반드시 때가 되면 보응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16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의 손이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17우리 아버지가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위하여 싸워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냈거늘 18너희가 오늘 일어나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의 아들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그의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들 위에 왕으로 삼았도다(16-18)

 

요담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세겜 사람들을 저주함으로써 우화에서 말한 가시나무가 아비멜렉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세겜 사람들에게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우화를 통해 비유했습니다. 요담이 그리심 산에서 나무들의 비유를 하고 나서, 그 비유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이제 세겜 사람들의 잘못을 본격적으로 추궁합니다.

 

16절에서 3개의 질문을 통해 세겜 사람들의 잘못을 강하게 비난합니다. 첫째 질문에서 언급한 진실함과 의로운 문제를, 두 번째 질문에서는 그 대상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즉, 여룹바알과 그의 집에 대한 진실함과 의로움을 묻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에서 여룹바알의 행동에 대한 올바른 보담이냐고 묻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형식의 반복을 통해 내용을 점점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요담은 16절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을 통해 17-18절에서 설명해 가고 있습니다. 세겜 사람들이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을 다 죽이고,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은 결코 의로운 행동이 아니란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서 자신들을 위해 미디안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해 여룹바알에 대한 보훈이 아니라 배신이라고 비난합니다.

여기서 요담이 아비멜렉을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닌 ‘여종의 아들’이라고 부름으로서, 아비멜렉이 진정한 상속자가 아님을 강조합니다.

 

아비멜렉이 왕이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부당한 일입니다. 기드온 가문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러면서 요담은 세겜 사람들에게 선택을 촉구합니다. 그들이 만약 계속해서 아비멜렉을 지지한다면, 아비멜렉으로 인해서 오히려 그들이 피해를 당할 것이고, 결국 아비멜렉도 죽임을 당할 것을 예고합니다. 그는 아비멜렉을 두려워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담대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예언의 성취(19-21)

의로운 왕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높이고 성공의 열매를 그들과 나눕니다. 하지만 악한 왕은 자기가 왕이 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부터 숙청하는, 소위 ‘토사구팽’(兎死狗烹)의 행태를 보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탐욕과 악이 가득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고 해를 입히게 됩니다. 성도는 거룩하고 선한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야 합니다.

 

19만일 너희가 오늘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하고 의로운 일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려니와 20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 21요담이 그의 형제 아비멜렉 앞에서 도망하여 피해서 브엘로 가서 거기에 거주하니라(19-21)

 

요담은 2개의 조건문을 통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저주합니다. 만일 세겜 사람들의 행동이 진실하고 의로우면, 아비멜렉으로 인해 기뻐할 것입니다(19). 만일 그렇지 않으면 아비멜렉에서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세겜과 밀로 사람들을 태울 것이며, 그들도 아비멜렉을 태울 것이라고 말합니다(20).

그러나 이미 앞에서 이들의 행동이 여룹바알에게 진실하지 못하고 의롭지 않았다 라고 비난했기 때문에 첫째 조건이 이미 어겨졌습니다. 그러므로, 둘째 조건이 서로 불이 나와서 서로를 태우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언약 관계를 어겼고 범죄하였기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언약 관계를 맺은 대상을 하나님이 아닌 여룹바알로 바꾸고 있습니다. 즉, 세겜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여룹바알의 목숨을 건 헌신 때문이라고 해석하였고, 그래서 세겜 사람들은 여룹바알을 진심함과 온전함으로 대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이제 세겜과 여룹바알의 언약을 파괴한 거로 세겜 사람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여호와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지 않는 영향이 아비멜렉뿐 아니라 요담에게도 미쳤습니다.

 

세겜 사람들을 엄중한 경고하고 저주한 요담은 아비멜렉에 대한 복수를 위해 어떤 공격적인 행동이나 노력을 도모하지도 않고, 그저 모압의 경계에 있는 광야 브엘로 도망해 그곳에서 여생을 보냅니다(21). 즉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나안을 떠나 세겜이나 아비멜렉으로부터 먼 지역에 은신처를 찾고 그곳에서 평생 지내게 됩니다. 이렇게 여룹바알의 잘못으로 인해 자식 때 엄청난 비극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기드온의 집을 파괴한 죗값은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의 유산을 잘 지키고, 함께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하나 되기 위해 힘쓰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악인들이 흥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운 길을 가다 보면서 충성하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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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9-01)


야망과 이기심으로 왕이 된 아비멜렉

사사기 9장 1-6절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을 만큼 인간의 지배 욕망은 강렬합니다. 권력에서 나오는 전능감이 스스로 신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교적인 부패는 배교를 낳습니다. 기드온 시대에 종교적 부패가 자녀 시대에 배교를 낳은 것입니다.

 

 

  • 여룹바알(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자기 외가가 있는 세겜의 왕이 될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혈연에 호소하여, 주민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후원금으로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는 데 쓰고, 세겜의 왕이 됩니다. 아비멜렉의 죄와 이를 지지한 세겜 사람들이 죄가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아비멜렉(1-3)

부정적인 지도자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거짓된 정보와 과장된 말로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 사람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어리석은 국민들은 자신들의 살을 갉아먹는지도 모르고, 이러한 악한 선동에 설득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한 지도자 설 수 없도록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1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2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3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1-3)

 

에룹바알(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첩에 아들입니다(8:31). 아비멜렉의 이야기가 기드온 이야기 뒤에 이어지는 후속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첩에게서 나은 아들이며, 아들들 중 첫째를 제외하고(8:20) 유일하게 이름이 언급되었습니다(8:30-31). 특히, 이름이 ‘내 아버지는 왕이라’라는 뜻입니다. 그는 첩의 아들, 그것도 이방 여인의 아들이었기에 이복형제나 다른 가족에게 한 식구로 인정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 고향인 세겜에 등장합니다. 세겜은 기드온의 고향인 오브라에서 남서쪽으로 10km,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65km로 ᄄᅠᆯ어진 곳에 위치했습니다. 세겜은 에브라임 지파의 도시로 이스라엘 중심부에 위치하며, 상업적 종교적으로 매우 유명하며 중요한 도시입니다. 남쪽에는 그리심 산이 있고, 북쪽에는 에발 산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한 다음에, 그곳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한 곳이며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했던 곳입니다.

그곳에 사는 지파는 북쪽 이스라엘에서 가장 강력한 에브라임 지파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기드온이 에브라임 출신의 세겜 여자를 아내가 아닌 첩으로 들린 이유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운 점이 많지만, 이유가 무엇이든지 세겜 여자를 첩으로 맞아 들렸다는 자체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아비멜렉은 자기 어머니가 첩이며 이방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오브라에 있는 기드온의 집에서는, 정식 부인들의 아들들에 의해 신분상 낮은 위치에 있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는 기드온의 지위나 재산을 물려받는데, 매우 불리했습니다. 어쩌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처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은 ‘내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 자신의 아버지 기드온이 왕처럼 사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왕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웠습니다. 그는 오브라에서 정통적으로 자신이 기드온의 후계자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신을 지지해줄 사람들을 찾아 어머니의 고향 세겜으로 온 것입니다. 그는 세겜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자신 계획을 실행하여, 제일 먼저 외할아버지에게 가문 사람들을 모아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도록, 세겜 사람들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9장의 아비멜렉 서사는 그를 “여룹바알의 아들”로 소개하며 시작합니다. 이 서사에는 ‘기드온’이란 이름이 아예 나오지 않고 ‘여룹바알’로만 언급됩니다(2, 5[2], 16, 19, 24, 28, 57). 저자가 ‘바알이 그와 싸우라’는 뜻의 ‘여룹바알’만 고집한 것은 의도적인 전략인데, 바알 대적자인 기드온과 바알 숭배자들(세겜인들과 이들의 지지를 받는 아비멜렉)을 대조시키려는 목적입니다. 기드온은 바알 제단을 찍고 하나님의 제단을 세움으로써 바알과 다퉜습니다(6:27-31). 이제 아비멜렉은 바알 숭배자들과 손잡고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과 다투려 합니다.

아비멜렉이 모친의 고향(8:31)인 세겜에 온 목적은 이곳의 왕이 되기 위함입니다. 그는 왕이 될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장래에 거침돌이 될 수 있는 이복형제 70명을 제거할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아비멜렉의 ‘스스로 왕 만들기’ 작전은 혈연에 호소하여 세겜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겜의 사람들’(바알레 쉐켐)이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로 번역된 단어가 ‘바알’의 복수형(베알림)입니다. ‘바알’은 ‘주인’의 뜻도 있으나, 사사기에서는 줄곧 우상 신을 가리켰습니다(2:13; 3:7; 8:33). 여기서는 ‘세겜의 주인들’의 의미로서 세겜 성읍 주민들을 가리키며, 이들이 바알 숭배자임을 알려줍니다. 이 호칭은 9장에서 15회나 나와 ‘바알’을 계속 상기시키며 세겜에 바알 숭배가 편만했음을 부각합니다(2,3,6,7,18,20,23[×2],24,25,26,39,46,47, 51). 이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아비멜렉은 먼저 그곳의 외가 친척들의 지지를 얻어 그들을 조력자로 이용합니다. 그는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도록 세겜 사람들에게 자기를 선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세겜인들이 자기를 왕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자기 한 사람이 세겜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이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이 다스리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을 포함하여 기드온의 아들들이 왕 될 자격이 있음을 전제로 말합니다. 실상 기드온은 왕처럼 살았지만, 왕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서 왕이 되라는 요청을 받고 거절했지만(8:23), 그는 ‘내가 다스리는 게 어떻겠느냐?’며 스스로 왕의 자리를 구합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을 대적에게서 구한 업적을 세우고도 왕의 자리를 거절했지만, 공적도 없는 아비멜렉은 적극적으로 그 자리를 탐합니다. 기드온의 70명 아들들도 유명한 사사의 아들이란 명목으로 지역에서 실세 노릇을 했겠지만, 왕으로 다스리지는 않았습니다. 아비멜렉은 사실을 부풀려 70명의 형제들이 다 왕좌를 노리는 것처럼 설명합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여룹바알”로 부름으로써 바알 숭배자인 세겜인들로 하여금 기드온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일으키게 유도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의 자식들의 다스림에도 거부감을 느끼고, 그들 대신 아비멜렉을 지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아비멜렉이 ‘그들의 뼈와 그들의 살’이기 때문입니다. ‘뼈와 살’(골육)이라는 표현은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고 자신의 형질과 똑같음에 감탄하며 표현한 말입니다(창 2:23;참조. 창 29:14; 삼하 5:1). 골육을 내세우는 것은 자신을 왕으로 세워 서로 덕을 보자는 의미입니다.

아비멜렉은 외가 친척들의 연합과 열성으로 세겜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비멜렉의 회유에 말려들어 그의 충성스러운 대변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아비멜렉의 말은 세겜 모든 사람의 귀에 전달되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우리의 형제’라며 그에게 마음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혈연에 하소연하여 세겜의 왕이 되려 했던 아비멜렉의 작전이 제대로 맞아떨어졌습니다.

 

자기 형제들을 죽인 아비멜렉(4-5)

이방신, 즉 우상은 옳고 그름에 문제보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성취해 주는 역할에 그칩니다. 욕망은 탐욕을 만들고, 탐욕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성도들은 탐욕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욕망을 채워 줄 지도자를 따르는 것은 공멸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4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5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4-5)

 

아비멜렉을 지지하기로 결심한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70개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줍니다. 이것은 바알브릿 신전이 아비멜렉의 왕권을 지지한다는 표시인데, 바알브릿은 8장 33절에서 언급된 신으로 기드온이 죽은 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대신 따르던 배교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알브릿 신전의 후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비멜렉의 왕권은 처음부터 이방신의 지지를 받고 성립된 배교적인 정권임을 보여줍니다.

 

아비멜렉은 왕이 되는데 세겜에서 용병을 사서 물욕을 키웁니다. 그들을 데리고 오브라의 아버지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자신의 이복형제 70명을 한 바위 위에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 세겜 주민들은 ‘바알브릿’(‘언약의 바알’, 8:33) 신전에서 은 70세겔(798g)을 아비멜렉에게 후원금으로 줌으로써 말만(3)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를 왕으로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4). 이는 아비멜렉이 왕이 되는 데 바알의 동의와 지지를 얻었음을 함축합니다. 세겜인들의 물질 지원은 기드온의 무고한 아들들을 없애는 데 동의하고 공조하는 행동입니다. 기드온이 바알을 부수고 여호와의 제단에 수소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헌신을 보였을 때(6:25-27), 오브라의 바알 숭배자들은 그에게 보복하지 못했습니다(6:28-31). 이제 세겜의 바알 숭배자들이 그의 아들들을 죽여 보복함으로써 바알에게 헌신을 표현합니다.

 

아비멜렉은 은 70개 후원금으로 무모한 무법자들을 조력자로 구했습니다. 본문에서는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4)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고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없기에 그는 용병을 사서 세력을 키운 것입니다.

그는 오브라로 가서 한 바위 위에서 자기 형제를 다 죽입니다. 여기서 아비멜렉의 잔인성을 강조하기 위해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비멜렉의 형제 사실을 강조합니다. 자기 왕권을 위해 형제들을, 그것도 한 바위에서 한꺼번에 몰살시킨 무자비하고 패륜적인 인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 왕정 국가에서는 왕이 되기 위해, 혹은 왕이 된 후에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형제를 죽이는 일이 흔했습니다. 하지만 사사시대에는 권력을 위해 형제들을 죽이는 일들은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아비멜렉이 보여주는 고대 사회의 왕권 탈취에 모습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지도자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을 다스리다가 죽은 후, 그 왕권을 세습하지 않고, 새로운 지도자가 선택되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보다 얼마나 잔인하고 인륜을 저버린 채 욕망에 충실한 모습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왕들을 죽여 자기 형제의 죽음에 보복했으나(8:18-21), 그 아들 아비멜렉은 왕이 될 욕망을 위해 자기 형제를 죽입니다. 우상 하나의 제작비가 은 200세겔(2.28kg 인데(17:4), 이들을 처치하는 데는 은 70세젤(798g)이 들었으므로, 한 사람의 소중한 목숨이 은 1세겔(11.4g)의 헐값에 사라진 것입니다.

그가 죽인 자들은 ‘여룹바알의 아들’이자 ‘그의 형제’로 설명됩니다(5). 이는 그들이 바알 대적자 기드온의 자식들임과, 아비멜렉의 골육지친임을 강조합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자신이 ‘골육’임을 강조하여 세겜인의 환심을 샀으나(2), 정작 70인 형제의 목숨을 앗아갈 때는 그들이 세겜 주민들보다 훨씬 더 가까운 자신의 ‘골육’임을 무시했습니다.

이로써 기드온의 권세와 영화를 상징하던 아들들은 그의 한 아들로 인해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형제 모두가 살육당해 핏물을 이루었을 현장은 아비멜렉의 대담함과 폭력성과 잔인성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기드온의 장자인 여델이 두려워하며 적장을 감히 죽이지 못했던 것(8:20)과는 아주 대조적인 장면입니다. 바위 위에서 형제들을 처단한 아비멜렉은 후에 맷돌 짝에 머리가 부서져 죽게 됨으로써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54).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제들이 당한 폭력과 흘린 피를 기억하고 계십니다(24).

한편, 이 순간에도 70명의 아들 중 막내 요담은 살아남았습니다. 자기 형제들이 살해당할 때 가까스로 숨어,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요담은 아비메렉의 정권이 붕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아비멜렉이 형제들을 잡는 중에 몸을 숨겼고, 5절에서 아비멜렉의 형제 70명이 죽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요담 대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종이나 다른 자가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세겜의 왕이 된 아비멜렉(6)

욕망의 노예가 된 자에게 사람은 존중에 대상이 아니라 자기 이해에 따라 얼마든지 이용하거나 제거될 수 있는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통제되지 않는 지도자의 야망과 자기 욕망을 채워 줄 지도자를 거절하지 않고 따르는 맹목적인 추정은 위태로운 공생이고 공멸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의 멸망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6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6)

 

마침내 아비멜렉은 세겜의 왕이 됩니다. 그를 왕으로 추대한 자들은 세겜의 모든 사람들과 “밀로 모든 족속”입니다. ‘밀로 족속’은 직역하면 ‘밀로의 집’이므로 밀로 가문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세겜인들에 버금가는 권세가일 것입니다. 아니면 대부분의 번역본처럼 ‘벧밀로’라는 지명일 수 있습니다. 이들을 ‘세겜 망대 사람들’(46)과 동일한 집단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편, 왕을 세운 장소로 세겜의 상수리나무 기둥이 소개됩니다. 기둥은 ‘세워진 것’이란 뜻으로서 기념비나 기념물을 뜻합니다. 이곳은 세겜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같은 곳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세겜의 상수리나무는 아브라함(12:6-7)과 야곱(창 35:4)과 연관되어 등장했습니다. 특히, 오늘 왕을 세운 장소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할 때 상수리나무 아래에 큰 돌을 세운 것을 상기시켜(수 24:25-26), 큰 대조를 이룹니다.

이렇게 아비멜렉은 이방 신전에 후원을 받아 자신의 형제 70명을 죽이고, 이방신을 섬기는 곳에서 이방 신 보호를 받으며 이스라엘의 최초 왕이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왕이 되는 과정은 하나님이 철저히 무시되었고 오직 자기 욕망과 이방신만을 충실하게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아비멜렉의 모습은 아버지 기드온이 품고 있던 욕망을 실현한 것으로, 아버지의 부정적인 모습이 자식에게 얼마나 악영향을 미칠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은 잘 사용되면 백성을 압제에서 구원하고 평화로 이끕니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은 권력은 폭력성을 드러내어 공동체를 위기로 몰아갑니다. 결국, 분별력과 올바른 시민 정신이 짐승을 통제하고 길들여 보호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지혜와 통찰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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