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07-0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미가 7장 14-20절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영적 세계’, ‘신의 세계’가 내면적인 동기가 되어 종교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 영혼의 아버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어주신 분, 오늘도 그분과 말씀을 통해 교제하고 행복하게 동행하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친밀하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던 날처럼 주님이 이적을 보이시리니 사람들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며 돌아올 것입니다.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않으시는 주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깊은 바다에 던지시며,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성실과 인애를 베푸실 것입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14-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목자로 인도하시며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십니다. 비록 죄로 인해 고통받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세우고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회복의 약속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그 길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14원하건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 15이르시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이적을 보이리라 하셨느니라 16이르되 여러 나라가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러워하여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며 17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리이다(14-17)
14절에서는 선지자가 7-13절, 특히 7절에 표현된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직접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15-17절은 이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담고 있습니다.
(1) 선지자의 기도(14)
성경에서 종종 그렇듯이,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목자와 양 떼의 관계로 표현합니다(시 23:1-6; 28:9, 23; 80:1; 95:7; 100:3). ‘먹이다’라는 동사는 목자가 양 떼를 돌본다는 의미로 사용되며, 명사 ‘목자’도 동사와 같은 어근을 사용합니다. 또한 ‘기업’이라는 표현 역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입니다.
‘삼림’을 반드시 위험한 곳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으며, 개역개정처럼 ‘갈멜 속 삼림’으로 연결시켜 뒤에 나오는 ‘바산과 길르앗’과 병행구로 볼 수도 있습니다. ‘갈멜’은 초원과 포도원과 감람원이 있는 팔레스타인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 속합니다(사 35:2). ‘바산과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있는 곳으로 바산은 소로 유명하며(시 22:12; 암 4:1), 길르앗 역시 목축하기에 좋은 장소였습니다(민 32:1). ‘홀로 거하는’이라는 표현도 평안히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14절에서 심판으로 말미암은 황폐함과는 대조적으로 평화롭고 풍요로움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합니다. 어떤 경우든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께 구원을 베풀어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응답(15-17)
15절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에서 출애굽 때의 ‘이적’을 베푼 것을 상기시키며 구원을 약속하는데, 선지서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제2의 출애굽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렘 16:14,15). 뿐만 아니라 메시아를 통한 궁극적인 승리를 가리킬 것입니다(사 52장). 여기서 ‘이적’은 출애굽할 때의 놀라운 이적들(출 3:2; 시 78:4.11)을 떠올리게 합니다. 16절에서는 바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여러 나라’가 이 이적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 앞에서 ‘자기의 세력’은 부끄러운 수준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입을 막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사 52:15).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려고 임재할 때 ‘우레와 번개’를 동반하여 백성들이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출 19:6; 20:18).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임재할 때에 귀를 막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가 임할 그때에 온 민족이 여호와를 인정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을 묘사합니다. 이런 묘사는 당시의 상황과 대조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 특히 히스기야 왕이 통치할 때, 주전 701년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한 상황에서는 나라의 미래가 밝지 않습니다. 이미 앗수르에 패망한 북이스라엘의 운명이 남유다의 운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기서의 확신에 찬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신실하게 남은 자로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17절의 ‘티끌을 핥으며’는 정복당한 왕이나 백성의 굴복하는 자세를 묘사합니다(사 49:23). 또한 정복당하였으므로 ‘좁은 구멍’ 즉 자신들의 은신처나 요새에서 나와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15절에서 하나님께서 예전처럼 이적을 보일 때에, 16-17절에서처럼 온 민족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며 압도당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미가서의 마지막 부분에 다다르면서 구원하실 하나님에 대한 확신(7-13)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앞으로 펼쳐질 하나님의 구원과 그 구원의 결과에 대해 예언하는데, 무엇보다 이 단락의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라는 권고의 목소리를 점차 높이기 위함입니다. 이런 권고는 다음에 이어질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18)라는 신앙 고백에서 절정에 다다르게 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찬양)(18-2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덮어 주시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18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20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18-20)
18-20절의 찬양은 14-17절의 단락과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14절에서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서 간구하고 15-17절은 그 간구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집니다. 18-20절에서의 찬양은 이 하나님의 응답 속에 있는 약속을 확신하고 선지자 자신도 찬양하고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남은 자’가 되도록 촉구합니다. 여기서의 특이한 점은 2인칭(18)에서 3인칭(18b-19)으로, 다시 2인칭(20)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에서 ‘주’로 번역한 것은 원래 2인칭 ‘당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선지자 미가와의 친밀한 관계를 가리키며, 여기서의 찬양이 선지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중간에 여호와를 3인칭으로 표현한 것은 여호와를 객관화하여 청중에게 소개함으로써 청중도 여호와에 대한 찬양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18-20절의 찬양은 미가 선지자 개인의 찬양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여호와에 대한 확신 가운데 찬양하며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권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18절은 하나님의 성품, 곧 용서를 베푸시는 근원이 되는 인애에 대해 찬양하고, 19-20절은 그 인애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처럼 찬양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요소가 인애인데, 7장의 흐름에서 볼 때, 1-6절의 탄식에서 7-20절의 구원과 회복의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한 기도와 찬양으로 바뀌는 토대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인애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8절의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는 선지자 미가의 이름에 함축된 표현과 같습니다. 수사적 의문문을 사용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시 86:10). 특히 18절에서는 여호와는 인애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인애를 기뻐하시므로’는 원문상으로 18절의 가장 마지막 문장에 해당하는데,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고 진노를 오래 품지 않으시는 이유로(18) 마지막에 제시되며 강조됩니다. 18절에서 죄악과 허물을 용서받는 대상을 “그 기업에 남은 자”로 제한합니다. ‘남은 자’는 미가서에서 거듭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끝까지 신실한 자들을 가리킵니다(2:12: 4:7; 5:7,8). 이는 대부분의 백성들이 북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는 것과는 다르게 ‘남은 자’로서 하나님께 신실하도록 촉구하는 역할을 합니다. 비록 상황은 여의치 않아 보일지라도 하나님께 계속 신실하게 남을 때에, 결국에는 회복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찬양의 자리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19절에는 죄와 관련된 세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온갖 종류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마땅하지만(7:9), 하나님께서 죄를 해결하시고 용서함으로써 인애를 베푸십니다. 발로 밟는 행위는 정복을 당한 나라가 당하는 수치를 가리키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미 경험하거나 앞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죄악을 해결하고 구원을 베풀 때에는 그 상황이 역전되어 죄악이 짓밟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깊은 바다’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한 번 죄를 던지면 돌아올 수 없게 되어 죄를 완전히 해결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19절에서는 하나님의 인애로 말미암아 죄악을 완전히 해결하실 것을 강조합니다.
20절은 이스라엘을 회복할 예언이 이전 조상들과의 언약에 기초한 것이며, 그 언약을 성실과 인애로 행하기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창 12:23)은 이삭(창26:24)과 야곱(창 28:13-14)에게 확약된 바이며, 이를 기억하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었고(출 19장), 다시 다윗 언약(삼하 7장)을 통해 확증됐습니다. 포로로 끌려간다고 하더라도 언약은 취소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랜 역사 가운데 신실하게 행하셨던 그 하나님께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권고는 이스라엘에게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미가는 마지막으로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고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금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그분의 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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