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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01-02)


각 지역에 심판자로 임하실 여호와

미가 1장 8-16절


당신은 어떤 친구들을 만나길 원하십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나 잘못된 선택을 하고 다른 길로 갈 때에 당신에게 틀렸다고 말해주는 친구들이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당신 편으로 잘못된 것도 잘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당신을 망치게 한 것입니다. 정말 당신을 사랑한다면 객관적으로 보아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실수를 말할 때에 마음이 아플 지라도 그렇게 말해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미가가 바로 그런 선지자였습니다.

 

  • 미가 선지자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재앙이 임할 것을 보며 애통하고 애곡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유다 성읍들이 입은 상처는 치유될 수 없고, 주민이 의지할 곳도 없습니다. 급기야는 이스라엘의 영광은 사라지고, 기쁨이었던 자식들도 포로로 사로잡혀 떠날 것을 예언합니다.

 

애통하는 선지자(8-10)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정치, 경제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자기 이득부터 먼저 챙기는 모습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르고 당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진실을 나타나게 됩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백성의 상처가 자신의 아픔처럼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8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 9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10가드에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 내가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렀도다(8-10)

 

본문은 슬픔과 애통의 감정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를 전합니다. 성읍의 파멸과 고통이 강조되며, 이는 회개와 경각심을 일깨우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세우기 위한 경고의 필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1) 도시의 황폐화로 인한 애통(8)

 

‘이러므로’라는 첫 단어는 8절 이하의 사건을 1-7절의 사건과 연결짓습니다. 이어 등장하는 일인칭 화자는 그 사건으로 인한 애통을 다섯 개의 동사를 통해 표현합니다. 이 동사들은 화자의 깊은 슬픔을 강조하며, 특히 ‘들개같이’와 ‘타조같이’라는 표현이 주목할 만합니다. 이러한 동물들은 황폐한 지역에 서식하는 야생 동물로, 이사야서와 욥기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사 13:21-22; 34:13; 43:20; 욥 30:29). 이들은 황폐해진 도시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슬픔과 고통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미가는 이 동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고통의 깊이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독자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며, 애통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황폐한 상황과 그로 인한 정서적 반응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2) 예루살렘까지 미친 심판의 상처(9)

 

‘그 상처’에서 ‘그’는 6-7절에 언급된 사마리아와 연결됩니다. 이는 사마리아의 상처가 치료 불가능함을 나타내며, 그 상처가 유다까지 이르렀다는 점이 두 번의 ‘진실로’로 강조됩니다. 전치사 ‘-까지’가 세 번 사용되어 유다의 성문과 예루살렘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이는 상처의 확산이 단순히 지역적이지 않고, 중심부로 확대됨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사마리아의 위기 상황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미치는 영향을 부각시킵니다. 결국, 이 구절은 사마리아의 상처가 유다의 안전과 안정성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상처의 심각성과 그 여파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 가드, 베들레아브라(10)

 

여기 언급된 성읍들은 미가의 고향과 인접한 지역으로, 그 중에는 르호보암이 건축한 ‘방비하는 성읍들’에 속하는 곳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 성읍과 연결된 명령이나 동작의 서술은 애통과 애곡의 감정을 담고 있으며, 이는 슬픔의 깊이를 더욱 강조합니다. ‘가드’와 ‘알-타기두(알리지 말라)’는 문자적으로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 가트의 김멜과 부정어가 역순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가드에 알리지 말라’는 표현은 가드가 방비하는 성읍임을 고려할 때, 예루살렘에 닥친 파멸에 대해 이미 조치를 취하기에는 늦었다는 탄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한, 베들레아브라는 ‘아프라를 위한 집’이라는 뜻을 지니며, ‘내가 티끌에 굴렀도다’와 연결됩니다. ‘아프라’는 ‘흙’이나 ‘먼지’를 의미하는 ‘아파르’와 동일한 어근을 갖고 있어, ‘내가 티끌에서 뒹굴었다’는 표현은 그 행위를 하는 장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8절에서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라는 구절을 ‘울어라, 그래 울어라’로 수정해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슬픔의 감정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며,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수치와 불명예의 성읍들(11-16)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태도는 개인의 영적 성장에 필수적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삶의 방향을 바로잡는 첫걸음이 됩니다. 외적인 행동은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슬픔이나 고통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고 치유의 과정을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공동체 내에서의 회복과 변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면의 변화를 외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진정한 회개와 성장의 중요한 요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1사빌 주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주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12마롯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13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14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을 속이리라 15마레사 주민아 내가 장차 너를 소유할 자로 네게 이르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16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가 크게 벗어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라(11-16)

 

미가 선지자는 성읍들의 이름을 이용한 언어유희를 통해 유다에 닥칠 심판을 상상하게 전달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를 통해 회개와 반성을 촉구합니다. 슬픔과 애통의 상징인 외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진정한 회개가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깨닫고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줍니다.

 

(1) 사빌, 사아난, 벧에셀(11)

 

여기서 지명과 행위의 연결은 대조적인 연관성을 드러냅니다. ‘벗은 몸에 수치’는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의 ‘샤피르’(사빌)와 대비되며, ‘나가라’라는 명령은 수치를 무릅쓰는 행위를 전제하므로 아름다운 곳의 주민에게는 혹독한 의미를 지닙니다. ‘나오지 못하고’와 연결된 사아난(차아닌)은 ‘나가다’라는 뜻의 야차와 관련이 있어, 아름다운 사빌의 주민은 벗은 몸의 수치로 인해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반면, 사아의 주민은 ‘잘나가는/출전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나가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겪습니다. 이는 2:13의 성문에 이르러 ‘그리로 나갈 것’이라는 구절에서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어, 여호와께서 선두에서 길을 여시며 거침없이 전진하시는 모습과 비교됩니다. 마지막으로, ‘벤에셀’은 ‘제거의 집’이라는 의미로, 의지할 곳이 없게 된 매우 곤란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슬픔과 고통의 깊이를 더욱 부각시키며,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2) 마롯(12)

 

‘마롯’의 어원은 ‘마라르(쓰다)’로 추정되며, 이는 마롯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는 상황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이러한 바람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성문에 임한 재앙의 성격을 더욱 강조하게 됩니다. ‘야라드(임하다, 내려오다)’와 ‘예루살렘’에서 두 글자가 겹치는 것처럼, 이들 사이의 연결은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그라아(재앙)’와 ‘샤아르(성문)’에서 아인과 레쉬가 역순으로 겹치는 현상은 ‘재앙’과 ‘샬롬’의 대조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언어적 유비는 마롯 주민의 고통과 그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슬픔과 희망이 얽혀 있는 복합적인 감정을 전해줍니다.

 

(3) 라기스(13)

 

‘라기스’는 병거성과 마병의 성(왕상 9:19) 중 하나로 유다의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산헤립이 정복한 성읍 중 하나(왕하 18:14,17)였는데, 그가 라기스 정복 자신의 전승 기록 벽화에 그려 넣을 정도로 중요한 요새였습니다. 그러나 라기스는 다른 곳들과는 달리 ‘딸 시온의 죄의 근본’으로 정의되고, 이스라엘의 허물이 그곳에서 보였다고 지적됩니다. 따라서 준마에 병거를 메우라는 명령은 아이러니 혹은 비난과 조롱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그들의 강함에서 비롯된 교만에 있음을 상기시키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4) 가드모레셋, 악십의 집들(14)

 

‘작별하는 예물’은 시집가는 딸 편에 보내는 ‘혼수’의 개념으로 이해됩니다. ‘모레셋’에 포함되어 있는 어근 ‘야라쉬’(유업으로 주다)라는 점을 고려하면, 혼수를 주어 낯선 곳으로 보내라는 명령이 지명의 뜻과 대조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악의 집’은 이스라엘 왕궁에 토기를 만들어 바치던 곳인데, 이들이 이스라엘의 왕을 속인다는 것은 그들을 실망시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모두는 유다의 패망과 연결됩니다.

 

(5) 마레사, 아둘람(15)

 

마레사 주민은 그들을 장차 ‘소유할 자’에게 넘어갈 것입니다. 마레사의 어근이 ‘야라쉬’(유업으로 주다)임을 감안할 때 지명과 행위가 대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아둘람과 이스라엘 두 성읍이 라기스와 함께 방비하는 성읍들에 속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본절의 ‘소유’와 ‘영광’은 먼 장래의 일이거나, 현재의 맥락에서 역설적 표현이라 볼 수 있습니다(참조, 16).

 

(6) 대머리 같게 하라(16)

 

슬픔과 애통의 감정을 담고 있는 구절로, 이스라엘의 백성이 겪는 고통과 그로 인한 비통함을 표현합니다. 이 구절에서 “너는 네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고, 애통하는 자처럼 너 자신을 가꾸라”는 명령은 심각한 경고를 의미합니다. 이는 그들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회개와 반성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함을 촉구하는 메시지입니다.

머리털과 수염을 밀고 깎는 행위는 전통적으로 슬픔과 애통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이러한 모습은 그들의 고통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이는 또한 그들이 겪고 있는 재앙이나 심판, 즉 하나님의 의도된 심판에 대한 깊은 슬픔을 나타냅니다. 결국 이 구절은 백성이 자신들의 죄와 잘못을 깨닫고, 진정한 회개와 변화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독자에게도 영적 각성과 회개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경고로 다가옵니다.


미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그는 백성이 듣기 거북한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기 원하십니다. 말씀을 겸손히 받아 들려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죄의 유혹에서 이기게 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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