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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3-01)

 


거룩한 총회를 원하시는 하나님

신명기 23장 1-18절


 

조직신학에서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로 분리합니다. ‘눈으로 보이는 교회’는 누구나 다 교회를 출입할 수 있고, 출석할 수 있습니다. 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무종교인이든지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는 누구나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방법대로 사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앙고백으로 바르게 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회생활에 관한 지침들이 계속해서 제시합니다. 본 장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지 배우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 점점 이방민족들과 교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방인들 중에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을 같이 믿으려는 사람들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총회에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총회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들은 백성다운 삶을 살도록 원하십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길 원하시겠습니까?

 

여호와의 총회에 회원의 자격(1-6)

교회 일을 하다보면 종종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꼭 직분자들만 의사결정권에 참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초신자들도 분명히 많은 지혜를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일은 인간의 생각과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분자들은 기도하는 사람이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뜻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1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2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3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4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6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1-6)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나안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거룩함을 유지하길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 올 수 없는 사람은 세 종류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1) 거세한 자(1)

 

신낭이 상한 사람이나 음낭이 베인 사람이며, 그들은 남자들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생식기가 전달되어 생산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왕궁에서 일하는 남자들은 거세해서 내시(內侍)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국사를 보게 했습니다.

 

(2) 사생아(2)

 

가나안 사람들이 행한 근친상간은 여호와께 가증한 행실로, 이스라엘 백성이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레 18장). 그런 행실은 그것을 행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땅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제의적 매춘으로, 또 잡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우상을 섬기는 양육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이방신들에게 속한 아이들은 여호와께 가증하기 때문에 십 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총회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 규정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런 아이들은 부모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고, 토라를 배우고 깨달은 것을 일상의 삶 속에서 실천하여 십 대에 이르기까지 순종하는 삶을 살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국가정책을 여호와 중심으로 새롭게 하기 위해서 언약을 갱신하기도 하고, 이스라엘이 나아갈 영적 방향을 제시해주는 임무를 띱니다. 따라서 총회의 각 구성원은 여호와 중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하므로 사생아와 그의 후손들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려면 여호와 중심의 삶을 구축해나가야 합니다.

 

(3) 암몬과 모압 사람들(3-6)

 

이 사람들은 자손 대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총회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 대한 영원한 배제는 3절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암몬의 잘못은 약한 자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채워주지 않은 것으로, 그것은 당시 윤리에도 벗어나는 행동입니다(참조. 잠 25:21), 암몬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갈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진로를 저지했습니다(4a). 모압은 발람을 고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저주를 내리려고 시도했습니다(4b). 그러나 모압의 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좌절되었습니다(5).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모압의 이러한 시도는 오히려 그들 자신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불러오게 했습니다(창 12:3a). 따라서 모압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들로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외는 있습니다. 룻과 같이 자신이 섬기던 신을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며, 경외한 사람입니다(룻 1:16). 따라서 이스라엘은 암몬과 모압 사람들과 정치적 동맹을 맺거나, 친분 관계를 맺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6).

 

(4) 삼대 후에 들올 수 있는 에돔 애굽 사람들(7-8)

 

만일 에돔 사람이나 애굽 이스라엘에 살게 되면, 이주자들의 삼대 후의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들이고 이스라엘의 형제입니다. 이들은 가나안 민족들처럼 혐오의 대상이 아닙니다. 또한 애굽은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체류하는 기간 동안 압박과 고난을 겪었지만, 그들이 신정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한 민족으로 성장하게 한 요람입니다(참조, 신 26:5). 따라서 에돔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은 암몬이나 모압과는 다르게 대해야 합니다.

 

진영을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한 규정들(9-14)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또한 정결해야 했습니다. 이제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들도 세상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십자가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면에서 정결함을 유지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9네가 적군을 치러 출진할 때에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갈지니 10너희 중에 누가 밤에 몽설함으로 부정하거든 진영 밖으로 나가고 진영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다가 11해 질 때에 목욕하고 해 진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요 12네 진영 밖에 변소를 마련하고 그리로 나가되 13네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볼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려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14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9-14)

 

본 단락은 군사 원정 동안에 진영을 정결하게 유지하기 위한 규정들을 제시합니다. 이 규정은 위생 문제와 연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영에 함께 계시므로 진영은 정결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따듯한 기후로 인하여 진영 가운데 전염병이 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돌발한다면 적군과 싸워보기도 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에 진영은 위생적으로 정결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정결 원칙(9)이 두 사례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1) 첫째 사례(10-11)

 

밤에 몽설하여 부정해진 자는 진영 밖으로 나아가서 해질 때에 몸을 씻고 해진 후에 진영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2) 둘째 사례(12-14)

 

진영이 위생적으로 정결하게 유지되지 않으면 따뜻한 기후로 인하여 군사들의 건강을 해치는 전염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배변 시 진영 밖에 땅을 파서 용변을 보고 배설물은 흙으로 덮어야 합니다(12-13). 이스라엘 군사 진영은 여호와께서 머무시는 장소이며, 적군과의 싸움을 진두지휘하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14a). 따라서 이스라엘 군사들은 진영 안에서 생활할 때 그들과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부응해 그들의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진영도 정결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또한 전승 후에 적의 금과 은을 탐하여 도금된 우상이나 우상숭배를 의미하는 장신구 같은 것들을 진영으로 가져온다든지, 또는 패전국의 약자들을 강탈하는 행동은 더욱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행실들은 이스라엘 군사들을 부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기타 규정(15-18)

세상에는 어디에나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성도들은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불법적인 행위는 절대로 묵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행위들을 금하시기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그들이 힘들지 않도록 긍휼을 베풀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바르게 세워가야 합니다.

 

15종이 그의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16그가 네 성읍 중에서 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 17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18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15-18)

 

율법의 기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라는 처원의 규례입니다. 다양한 규범들을 소개합니다.

 

(1) 도망친 노예에 대한 규정(15-16)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로 지냈던 다를 스스로 노무들을 압제해서는 안 됩니다. 본 규정은 히브리인 노예가 도망친 경우와 다른 나라에서 이스라엘로 도망쳤 온 좋은 모두 그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인 노예가 주인을 피하여 도망하였다면 그 도망친 노예는 그가 원하는 곳 어디서든지 살 수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을 종주국으로 섬기는 봉산국에서 도망쳐 온 노예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노예도 자신이 원하는 장소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가 그들 가운데 정착하게 하고, 그를 압제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도망친 노예는 이스라엘 땅에서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습니다. 이 규정은 고대 근등의 여느 법과 대조됩니다. “함무라비 법전 § 15-20”에 따르면, 도망친 종은 반드시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야 하고 그를 주인에게 돌려보낸 사람에게 주인은 은 2세겔로 보상해야 합니다(17). 또한 고대 근동의 봉신조약과 등위조약(parity treaty)에 보면, 정치적 이유로 도망친 자는 반드시 모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조항이 있습니다.

 

(2) 창기에 관한 규정(17-18)

 

이스라엘 백성 중 청춘 남녀는 몸을 팔거나 이방신들을 섬기는 제의적 창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행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그분의 경륜을 이루어갈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가나안 사람들을 본받는 삶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그런 행실로 얻은 소득은 어떤 서원 제물로도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에 가져와서는 안 됩니다. 그런 소득은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고 혐오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한 ‘신앙공동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세속적인 방법으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중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중심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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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2-02)


정결한 공동체를 위한 법규들⑶

신명기 22장 13-30절


오늘날은 성에 대해 너무 자유스러운 시대입니다. 역사적으로 성적인 타락은 나라의 멸망까지 가져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폼페이도, 위대한 로마제국도 방탕함으로 성적인 타락으로 멸망을 자초했습니다. 우려스러운 것은 오늘날 많은 성적 개방으로 혼란스러울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적인 모습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도덕적이고 순결한 삶은 극히 중요합니다. 한 가지 강력한 이유를 든다면 그것은 부도덕한 삶이 하나님의 피조물 중 으뜸인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언약 공동체는 성적인 측면에서도 정결해야 합니다. 부부의 정절은 두 사람의 관계뿐 아니라 가족의 결속, 나아가 공동체 전체에게 중요합니다. 고대 사회의 가부장적 한계로 인해 현재의 법규들은 여자의 처녀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들도 결혼 전에는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이 원칙입니다. 모세의 법은 결혼 후에 대두된 아내와 처녀성문제와 더불어 몇 가지 성관계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처녀성 문제(13-21)

성적인 순결은 유지하는 것은 가정의 질서를 지키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철저히 다르고 있습니다. 본문은 여성에 순결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날 여성들이 읽으면 기분이 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본문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3누구든지 아내를 맞이하여 그에게 들어간 후에 그를 미워하여 14비방거리를 만들어 그에게 누명을 씌워 이르되 내가 이 여자를 맞이하였더니 그와 동침할 때에 그가 처녀임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면 15그 처녀의 부모가 그 처녀의 처녀인 표를 얻어가지고 그 성문 장로들에게로 가서 16처녀의 아버지가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내 딸을 이 사람에게 아내로 주었더니 그가 미워하여 17비방거리를 만들어 말하기를 내가 네 딸에게서 처녀임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나 보라 내 딸의 처녀의 표적이 이것이라 하고 그 부모가 그 자리옷을 그 성읍 장로들 앞에 펼 것이요 18그 성읍 장로들은 그 사람을 잡아 때리고 19이스라엘 처녀에게 누명을 씌움으로 말미암아 그에게서 은 일백 세겔을 벌금으로 받아 여자의 아버지에게 주고 그 여자는 그 남자가 평생에 버릴 수 없는 아내가 되게 하려니와 20그 일이 참되어 그 처녀에게 처녀의 표적이 없거든 21그 처녀를 그의 아버지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할지니라(13-21)

 

성경이 기록될 고대근동 당시에는 심한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당시에는 남편들이 아내가 실증나면 아내에게 누명을 씌워서 쫓아내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남편의 의무를 끝까지 다하도록 권고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성의 억울한 상황을 베려해줄 수 있는 계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⑴ 처녀성의 증거가 있을 때(13-19)

 

어떤 이스라엘 남자가 결혼한 후 아내를 미워하여 이혼하려는 마음으로 아내의 처녀성을 구실로 삼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남자가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소문내고 아내를 비방함으로써 공론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혼인 관계를 깨뜨리고 고액의 신부 값을 돌려받으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이때 그 성읍 사람들은 아내가 누명을 쓰고 있는지, 아닌지 진상을 조사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남편은 이혼 사유로 당시에 치명적으로 중요했던 아내의 처녀성을 내놓았습니다.

15절의 ‘그 처녀의 부모’라는 표현은 원문으로 ‘그 소녀의 부모’입니다. 이것은 그 여인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애정이 식고 미운 감정이 가득 찬 남편은 ‘내가 그 여자가 처녀라는 증거(처녀인 표)를 보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처녀성의 표’는 신혼 첫날 밤 신부가 처녀막이 찢기면서 옷에 흘린 핏자국입니다. 그 옷은 당시 전통을 따라 부모가 준비해서 보낸 특별한 옷일 것입니다. 최근까지 이어지는 중동의 관습입니다. 이 증거는 신부 가족에게는 대단히 중요했기에 잘 간수해야 했습니다. 사건이 공론화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 공동체의 정결성을 보존하기 위해 둘 중 한 사람이 야기한 막을 속히 제거해야 했습니다. 입증의 책임은 그녀의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회집한 가운데 장로들이 성문에서 재판을 하였습니다(15). 부모가 자신들의 딸이 처녀인 것을 보관한 옷을 통해 증명한다면 딸은 무죄가 됩니다(17). 증거 조작의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나, 아마도 첫날밤 후 남편 자신이 그 피 묻은 옷을 자신의 아내의 것으로 보증하는, 가령 남편의 서명 같은 확실한 증거가 있었을 것입니다. 증거가 확실하면 그 남자는 무고죄로 큰 벌을 받습니다.

벌은 삼중적이었습니다. 먼저 매질을 합니다. 채찍질과 같은 매질이 아니라 ‘훈육하다’, ‘타이르다’, ‘꾸짖다’를 의미한다고 말하나, 이 동사는 체벌이 동원된 꾸짖음을 가리킵니다. 보통 이 매질은 채찍이나 막대로 때리는 형벌로 이해되며 25:1-4의 40대의 태형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둘째 형벌은 은 100세겔의 벌금입니다. 남자는 아내의 아버지에게 벌금을 냅니다. 도움말에서 언급했듯이 이 돈은 당시 상당히 큰 액수였습니다. 이 사실은 또한 22:28-29에서도 확인됩니다. 남자가 처녀를 붙들고, 함께 동침한 것이라면, 남자가 은 50세겔을 배상하고 아내로 삼아야 한다고 규정하는데, 이 액수는 두 배이므로 매우 큰 벌금이었을 것입니다. 끝으로 그 남자는 그 여자와 이혼할 수 없습니다. 이 또한 남편의 이혼 권리가 매우 컸던 당시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큰 벌입니다.

이러한 삼중적인 중벌로 인해 남편이 함부로 아내를 모함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 법이 당시 고대에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⑵ 처녀성의 증거가 없을 때(20-21)

 

부모가 처녀성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그 여자에게는 가장 큰 형벌인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장로들은 그녀를 성문에서 아버지 집으로 끌고 갔습니다(한글개역은 오역), 그곳에서 투석형으로 처벌합니다. 이것은 그녀가 아버지의 집에 사는 동안 ‘창기의 행동’(21), 곧 극도의 수치스러운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며, 동시에 딸을 간수하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문책성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장로들과 성읍 사람들은 이스라엘 중에서 ‘수치스러운 일’, ‘어리석은 일’을 쓸어내야 했습니다.

 

불법적 성관계(22-30)

하나님께서는 결혼 관계 외의 모든 성관계에 대해서는 그 죄를 물어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성을 개인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것과 성을 터부시해 비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것 모두 성경의 원리에 위배됩니다. 성도는 말씀의 원리를 따라 영육을 성결하게 지켜 우리 몸과 마음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22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23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24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25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서 강간하였으면 그 강간한 남자만 죽일 것이요 26처녀에게는 아무것도 행하지 말 것은 처녀에게는 죽일 죄가 없음이라 이 일은 사람이 일어나 그 이웃을 쳐죽인 것과 같은 것이라 27남자가 처녀를 들에서 만난 까닭에 그 약혼한 처녀가 소리질러도 구원할 자가 없었음이니라 28만일 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동침하는 중에 그 두 사람이 발견되면 29그 동침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를 아내로 삼을 것이라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하리라 30사람이 그의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여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지 말지니라(22-30)

 

부부가 아닌 다른 이성과 성관계를 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과 결혼한 삶과 성관계를 갖는 것을 강경한 정죄입니다. 다섯 가지 유형의 성 범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⑴ 유부녀나 약혼한 여자와 동침한 경우(22-24)

 

이어지는 문제 또한 성적인 쟁점입니다. 만일 어떤 남자가(유부남이든 미혼남이든) 유부녀와 간통을 하면 둘 다 사형에 처하여 언약 공동체로부터 시급히 ‘악’을 제거해야 했습니다(레위기 20:10).

약혼한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식을 앞둔 여자가 성 안에서 만난 어떤 남자와 간통하면 둘 다 투석형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번에는 처형 장소가 정읍 문입니다. 약혼한 남녀는 아직 결혼식을 앞두고 있고 잠자리를 갖지 않았지만 신부 값을 다 치른 상태이기에 이미 법적인 부부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간통인 이유는 여자가 성 안에 있으면서 성관계를 막기 위해 도움을 구하는 아무 소리도 지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간통은 죄를 범한 남녀 모두를 더럽히는 행위이며(레위기 19:20; 민수기 5:20) 두 사람 모두 책임을 면치 못하고 사형을 당합니다.

 

⑵ 강간과 기타 불법적 성관계들(25-30)

 

만일 어떤 약혼한 여자가 들판에서 겁탈을 당했는데 그 남자가 체포되었다면, 그 남자만 사형에 처하였습니다. 그녀는 무죄입니다. 여자는 소리쳐도 소용없는 들판에서 그 일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몰래 그 이웃을 때려죽이는 행위처럼 갑자기 당한 범행입니다(26). 따라서 그 약혼한 남자는 그녀를 여전히 존중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야 했습니다. 다음 사례는 어떤 남자가(유부남이든 미혼남이든)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만나 그녀를 붙들고, 잠자리를 하다가 발각되는 경우입니다(28). 이때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50세겔의 벌금을 신부 값으로 지불하고 그녀를 아내로 삼을 수 있습니다. 추가적으로 그는 그녀와 평생 이혼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강간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2:16-17은 처녀를 ‘꾀어’ 동침을 한 사례가 나옵니다. 이때 남자는 상실된 처녀성을 대가로 ‘납폐금’(신부 값)을 물고 그녀를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 납폐금 액수는 명시 되지 않았는데, 남자의 재력에 따라 액수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만약 처녀의 아버지가 그 남자가 맘에 들지 않으면, 신부 값만 받아내고 딸은 주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남자의 책임은 무거웠던 것입니다. 현재의 신명기 법은 이것과 비슷하나 약간 다른 사례에 대한 법으로 보입니다. 남자가 처녀를 유혹한 것이 아니라 ‘붙들고’ 함께 동침한 것입니다. 이 경우 남자는 은 50세겔을 신부 값으로 배상하고 그녀를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 ‘붙들다’란 의미를 강간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으며, NⅣ도 강간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오류로 보입니다. 강간을 가리키는 단어는 분명 25절에서 강한 강제력을 가리키는 헤헤지크(קיזהה)동사가 사용됩니다. 분명 이것은 타파스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보통 ‘수치스럽게 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디나의 강간 사건에 비추어 볼 때, 구약의 세계에서도 처녀 강간은 큰 범죄였습니다. 현재의 사례에서는 처녀의 아버지가 신부 값을 받고 딸을 그 남자에게 시집보냅니다. 이것을 강간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남자 쪽에서 물리적 강제력은 있었을지라도 처녀 역시 어느 정도 동조한 듯 보이는 상황입니다. 출애굽기와 다르게 아버지가 그 딸을 남자에게 주지 않을 권리는 없으며, 신부 값을 받고 반드시 그녀를 줘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딸에게도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그녀를 반드시 데려가서 평생 살아야 하며 이혼도 금할 정도로 큰 책임을 져야 합니다. 유대 전통에서는 유혹이든 강간이든 처녀와 아버지는 그런 결혼은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느 정도 그 처녀의 합의가 개입된 성관계라고 보아야 합니다.

30절은 다시 한 번 이질적인 법이 갑자기 끼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성관계 법의 범주에 들어맞습니다. 아버지의 아내는 자신의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다른 아내나 첩인 경우입니다. 아버지와 이혼을 했거나, 아버지의 사망 이후 홀로 된 그 여자를 결코 아내로 맞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는 수치스럽고 역겨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음란한 상황에 빠져 있을 때,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3:16)라고 책망했습니다. 몸이 하나님의 계신 성전으로 거룩하게 보존해야 합니다. 오늘날 성적인 부분에서 너무 개방되어 도덕적으로 분별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만큼 질서가 파괴되고 가정이 파괴되는 화를 부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성도들은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서 깨어서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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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2-01)

 


정결한 공동체를 위한 법규들(2)

신명기 22장 1-12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게도 관심을 가집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찾고 찬양합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피조물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이 여기고 슬픔을 당할 때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기뻐할 일이 있으면 같이 기쁨을 나눕니다.

 

이어지는 공동체의 정결성을 간직하기 위한 법들은 이웃 간에 분실물로 인한 불화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지침과 창조 질서를 지키고 동물과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라는 법규들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설정하신 자연의 질서를 인간이 흘트려 놓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정결하고 거룩한 삶이란 이렇게 하나님의 질서에 부합하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이웃의 분실물(1-4)

하나님 나라, 언약공동체는 지체들의 형편에 매우 민감한 곳이어야 합니다. 지체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다가오고, 사람들이 가장 자기답게 삶아도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할 때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참 자상하게 상세한 법을 주셨습니다.

 

1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2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줄지니 3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4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1-4)

 

언약 공동체는 서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야 합니다. 물질 문제, 특히 분실물의 처리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을 잃고 돌아다니는 소나 양/염소(1), 나귀와 같은(3) 가축을 발견한다면, 일단 그 짐승을 다른 사람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급히 자신의 집으로 끌고 와 보관해야 출애굽기 23:4-5는 설사 그 주인이 자신의 원합니다.

수요 심히 불편한 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즉각 그 가축을 돌려줄 것을 명령합니다. 그가 그 가축을 몰래 감추기 위해 집으로 끌고 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주변에 소문을 내고 주인을 수소문하면서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상황 때문에 내린 보관 조치입니다. 먼저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만 너무 먼 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주인이 누군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2). 분실물을 습득한 당사자가 힘들여서 멀리 있는 주인을 찾아가 돌려줄 의무까지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물건을 잃은 사람이 물건을 찾으러 와야 하는 법입니다. 습득물을 보관하던 그 사람은 지체 없이 그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습득물이 가축은 물론이고 옷이나 다른 물건이더라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덧붙여 길을 가다가 과도한 짐을 부리던 나귀나 소가 넘어진 것을 목격한다면, 적극 도와주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타인의 상황에 민감한 공동체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공감하며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바울 서신에서는 교회 공동체를 한 몸으로 표현합니다(에베소서, 골로새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입니다. 성도들은 몸에 각 지체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가길 원했던 것입니다.    

 

창조 질서와 생명 존중(5-12)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질서를 보존하되 생명이 존중 받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은 보여주는 다양한 법들을 제정하셨습니다. 자연을 존중하면 그 혜택이 인간에게 돌아옵니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힌 경우나 심지어 생명을 잃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 조치를 잘 취하도록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5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 6길을 가다가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의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보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7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되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8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 에 돌아갈까 하노라 9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을 다 빼앗길까 하노라 10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11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12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5-12)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 질서를 존중하는 곳이 언약 공동체입니다. 남녀가 구별되고 동식물도 각기 고유한 종들로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남녀는 서로 복장을 구별하여 입음으로써 정체성을 잘 지켜야 합니다. 더는 문자 그대로 지킬 필요는 없지만, 그 취지를 따라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정하신 고유한 역할과 정체성을 잘 지켜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⑴ 의복의 성별 구분(5)

 

언약 백성은 정결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창조 질서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남녀가 구별되었고 동식물도 각기 고유한 종들로 창조되었습니다. 남녀는 구별된 복장을 입어야 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라는 명령에서 의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켈리’는 사실 옷이 아닙니다. ‘옷’, ‘복장’으로 사용된 사례가 없으며 언제나, ‘그릇’, ‘용기’, ‘장비’, ‘비품’, ‘도구’, 간혹 ‘무기’(창세기 27:3, 에서의 ‘기구, 곧 화살통과 활’; 창 49:5, ‘칼은 폭력의 도구’)라는 뜻을 지닙니다. ‘남자의 의복’은 이어지는 여자의 의복에 맞춘 번역입니다. 따라서 어떤 유대 문헌은 ‘무기’로 해석합니다. 아마 이것은 미드라쉬의 해석처럼 웃을 포함한 특수한 도구, 무기와 같은 ‘남자의 장비’일 수 있습니다. 남녀의 복장을 섞어 입지 말라는 것은 현대의 관점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우나, 이 법은 분명 남녀의 성역할과 정체성의 구별을 위한 취지에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⑵ 동물을 위한 생명 존중(6-7)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보존과 존중은 생태계와 인간 사회 속에서 생명 존중 사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나무 위나 땅의 수풀 속 새 둥지에 어미 새와 새끼 새들이 함께 있거나 어미가 알을 품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어미는 반드시 풀어주고 새끼 새들이나 알을 취해서 가져와야 합니다. ‘새와 새끼를’이란 말은 정확히 ‘어미와 새끼들’입니다. 어미와 새끼를 함께 취하는 것은 매우 잔인한 행동입니다. 이것은 어미의 젖에 새끼를 삶지 말라는 규정을 비롯하여(출애굽기 23:19, 34:26),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 잡지 말라는(레위기 22:28), 다른 인도주의적 법들과 그 정신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찮은 짐승에게도 그런 자비심을 베푼다면, 그는 하나님께 복을 받고 장수할 것입니다. 자연 법칙의 측면에서도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이러한 선행은 결국 인간에게 큰 혜택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⑶ 사람을 위한 생명존중(8)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히거나, 다른 사람이 생명을 잃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 조치 의무를 명령하는 법이 주어진다. 낙상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지붕에 난간을 만들라는 지침입니다(8). 고대 중동의 지붕은 평평했으며,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곳은 농산물을 말리고 보관하는 장소, 담소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고 낮잠을 자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 공간이었기에 자칫 추락 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난간을 만들어 사고를 방지해야 했다. 미드라쉬는 구체적으로 난간은 열 뼘(약 80-90cm)의 높이로 사람이 올라가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해야 합니다.고 규정합니다. 미드라쉬는 이 난간 설치 규정을 다른 모든 사고 방지를 위한 조치로 확대합니다. 구덩이, 결함이 있는 사다리, 사나운 개, 해롭거나 상한 음식과 음료 등, 만일 관리 소홀로 인해 인명 사고가 날 경우 그 피 값은 주인에게 돌아간다. 여기에 구체적인 배상 규정은 제시되어 있지 않으나, 출애굽기에 비추어 볼 때 유족에게 고액의 합의금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관리 소홀에 의한 사고와 그 배경에 대한 더 자세한 법규들은 출애굽기 21:28-36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인 경우, 웅덩이에 가축이 빠진 경우, 소가 다른 소를 받아 죽인 경우 등, 모세 율법의 안전사고와 배상법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준다. 사람들은 자기 주변의 안전 관리를 잘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⑷ 생물의 종별 구분(9-12)

 

앞서 창조 질서에 따른 남녀의 복장 구분에 대한 지침이 주어졌는데, 여기서는 동식물의 종자 혼합을 금지합니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서 재배해서는 안 된다. 아마 포도를 재배하면서 거기에 곡식을 동시에 재배하는 행위로 보인다. 이렇게 거둔 수확물은 결코 먹어선 안되며 몰수해야 합니다. 이 원리는 포도원이 대표로 예시될 뿐 모든 과수원과 논밭에 확대 적용될 것이다 또한 현실적으로 현대 농법에서도 이런 혼합 농사법은 생산량의 측면이나 수확 시기의 차이, 타작의 불편함 등으로 인해 효율성이 떨어져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 이전에 이 법은 생물을 종류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보존하기 위함입니다. 참고로 레위기 19:19은 짐승을 다른 종류와 이종교배를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 법의 본질은 창조 질서 교란을 금지하는 데 있을 뿐이므로, 현대에는 다른 종들 간의 인위적인 유전자 배합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와 나귀가 함께 쟁기질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10). 이 것은 두 가축의 힘의 불균형 때문에 약한 가축이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여기도 이질적인 것의 혼합 금지라는 취지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어선 안 됩니다(11). 요세푸스(Josephus)에 동의하여 티게 이는 제사장은 베실과 양털을 섞어 맞춘 옷을 입었으니, 이 규정은 일반인에게만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대제사장 옷은 베실에 청색, 자색, 홍색 실을 섞어 만드는데 이 색실들은 털실을 염색한 것들입니다. 관유와 향품이 그런 것처럼 제사장에게만 혼합 모직의 사용이 허용되었다는 주장인데 설득력이 있습니다. 12절 이스라엘의 복장규정은 역시 난데없이 끼어든 것으로 보이나, 11절의 혼합 직물로 짠 옷의 금지와 연결된 규정입니다. 언약 백성의 표지는 혼합 직물 옷을 입지 않는 것인데, 덧붙여 구별된 디자인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어 달아 입는 것입니다. 민수기 15:38-40은 그 귀의 술에 '청색 끈을 달 것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이 청색 끈이 달린 옷단 술의 목적을 설명하는데, 그것은 계명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청색 염료는 가장 비쌌고 고결한 상징성을 지녔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옷을 입고 다니면서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늘 기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생각하신 것은 창조질서입니다. 이 창조질서를 깨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만드는 피조물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피조물까지도 소홀하게 다루면 그것이 재앙으로 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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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1-01)

 


정결한 공동체를 위한 법규들

신명기 21장 1-23절


모세오경에 나타나는 율법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제사법’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바른 제사를 드리는 법이며, 다음으로, ‘도덕법’으로 십게명을 가르치며, 마지막으로 ‘사회법’으로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실제적인 부분을 다루는 율법입니다. 공동체 의식이 파괴되면 모두가 손해를 봅니다.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수수방관(袖手傍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그렇게 어려움을 당할 수 있을 때, 이웃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서로 돕고 협력해서 하나로 지역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21장에서부터는 논리적인 배열을 찾기 어렵습니다. 대략적인 공통분모를 찾아본다면, 21-22장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결을 유지하기 위한 제반 조치들로 볼 수 있습니다. 21장의 경우 범인을 알지 못하는 억울한 피살자로 인해 땅이 더럽혀지면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고, 포로로 데려온 여자와의 적법하고 정결한 결혼 조건을 제시하며, 장자권 문제에 이어 공동체 내의 폐륜아를 사형시킨 것을 설명합니다.

 

억울한 피살자를 위한 속죄(1-9)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억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목숨을 빼앗는 살인은 아닐지라도 인격 살인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근거 없는 말을 옮기는 것은 살인과 같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이 추측한 것이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인격 살인입니다. 자신도 언젠가는 그렇게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피살된 시체가 들에 엎드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 쳐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거든 2너희의 장로들과 재판장들은 나가서 그 피살된 곳의 사방에 있는 성읍의 원근을 잴 것이요 3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그 성읍에서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여 4그 성읍의 장로들이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골짜기에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을 것이요 5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갈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6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7말하기를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8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9너는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한 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1-9)

 

약속의 땅에서는 억울하게 살해당한 무고한 피가 그 땅을 더럽히는 일이 있어선 안 됩니다. 만일 그런 피살체가 발견되었는데 범인을 알 수 없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힘을 합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 피가 그 땅을 더럽히고 그 피 값은 공동체 전체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제 공동체의 문제로, 그들의 정결성을 회복하기 위해 인근 마을과 공동체 전체가 나서야 합니다. 모세는 지금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법제화합니다. 그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먼저 공동체의 대표로 장로들과 재판장들이 나서서 피살체가 발견된 지점에서 거리를 측정하여 가장 가까운 성읍이 어디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여기서 ‘장로들’은 성읍의 어르신들로서 특정한 직책이 아닐 것입니다. 앞서 형사 사건에서는 재판장과 ‘지도자’가 재판을 주도했는데, 여기서는 장로들과 재판장이 이 사건을 처리하는 데 앞장섭니다. 가장 가까운 성읍을 결정하는 이유는 범인이 그곳에 거주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상식적인 판단 때문일 것입니다.

 

②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나서서 아직 일을 시킨 적이 없는 어린 암송아지 한 마리를 준비합니다. 왜 암송아지를 취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비교되는 사례로서 민수기에서 어린 붉은 암송아지 전체를 태워 재를 만드는 의례가 발견됩니다(민수기 9장). 제사장이 사체 부정을 입은 사람들을 위해 그 재를 물에 타 ‘속죄의 물’을 입은 사람들을 위해 그 재를 물에 타 ‘속죄의 물’을 만들어 그 사람에게 뿌립니다. 여기서는 붉은 암송아지가 아닌 일반 암송아지이며, 다른 목적을 위해 목을 꺾어서 죽입니다.

 

③ 장로들은 그 송아지를 사람이 개간하거나 경작한 적이 없는 계곡의 물이 ‘항상 흐르는’ 하천으로 끌고 가 거기서 목을 꺾어 죽입니다. 이때 제사장들도 이 의례에 동참하는데, 이들은 분명히 마을의 법정 소송이나 폭행과 같은 형사 사건을 재판했던 성읍의 제사장일 것입니다(5). 그 하천은 항상 흐르는 하천이 아닌 거칠게, 흐르는 하천, 즉 우기에 거센 급류가 흐르는 계곡일 수 있습니다. 그런 골짜기의 물은 사람이 경작하지 않는 지역의 물이기에 그런 의례에 적합했을 것입니다.

 

④ 장로들은 이어서 그 골짜기 물에서 목이 꺾인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그 피살자의 흘린 피에 대해 자신들의 무고함과 또한 목격한 증인도 아님을 선언하고, 억울한 피 흘림으로 인한 죄로부터 완전한 죄 사함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합니다(8). 이 때 본문은 침묵하나 배석한 제사장의 모종의 역할이-이를테면 하나님을 대신한 ‘성읍 주민들의 무고함과 죄 사함의 선언, 축복의 기도’와 같은-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이 암송아지 도살은 제단에서 행하는 ‘제의적 희생’(ritual sacrifice)이 아니라 단순한 도살(slaughter)이며 피를 내지 않고 단순히 목을 꺾어서 죽이나 분명히 제사상 앞에서 이 의례를 진행한다는 점에서 그 짐승은 배상적 희생물로 죽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살인 사건이 발생한 죄의 더러움은 장로들이 백성들을 대표하여 자신들의 손을 물로 씻음으로써 씻기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힌 여자와의 결혼(10-14)

하나님께서는 약자를 무시하거나 갈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많이 사랑하고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약자를 위한 배려를 하십니다. 첫 번째 묶음은 억울하게 피살당한 후 범인을 알지 못한 상황에 대해, 그리고 포로로 잡혀온 여자와 결혼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0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울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손에 넘기시므로 네가 그들을 사로잡은 후에 11네가 만일 그 포로 중의 아리따운 여자를 보고 그에게 연연하여 아내를 삼고자 하거든 12그를 네 집으로 데려갈 것이요 그는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13또 포로의 의복을 벗고 네 집에 살며 그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의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요 14그 후에 네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 하거든 그의 마음대로 가게 하고 결코 돈을 받고 팔지 말지라 네가 그를 욕보였은즉 종으로 여기지 말지니라(10-14)

 

전쟁 포로로 데려온 어떤 여자와 이스라엘 남자의 결혼에 대한 지침입니다. 이런 관행은 고대 중동에서 보편적이었습니다. 여자 포로는 대부분 종이 되는데, 일부는 아내나 첩이 되었습니다.

 

⑴ 이방 포로 여인의 대상자(10-11)

 

분명히 이 여자는 비가나안족의 여인입니다. 가나안 족속은 모두 진멸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온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반한 한 남자가 그녀를 아내로 삼기 원한다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갈 수 있습니다.

 

⑵ 이방 포로여인과 결혼 절차(12-13)

 

이때 그 여자는 머리털을 밀고 손톱을 베고 포로복을 벗은 뒤 부모를 위해 한 달 동안 애곡할 기회를 부여받습니다. 그 후에야 남자는 그녀와 동침하여 부부가 될 수 있습니다. 여자의 이러한 특이한 행위에 대해 많은 해석들이 있습니다.

요세푸스와 람반(Ramban)은 이것을 그녀의 가족과 동포의 사망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보는 반면, 랍비 아키바(R. Akiba)와 그를 따르는 랍비들은 그녀가 자신의 매력을 없애 그 남자가 자신을 멀리하도록 만들기 위한 시도라고 봅니다. 메이스(Mays)는 그녀의 행위는 자기 가정의 생활방식과 습관을 모두 없애는 행위로 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신분의 변화를 상징합니다. 그녀는 이전의 삶을 버렸습니다, 그녀가 머리털을 밀고 손톱을 베고 포로복을 갈아입은 뒤 한 달 동안 부모를 애도한 것으로 보아 그런 행위는 애도의 표시일 것입니다. 30일의 애도기간은 매우 특별한 애도식을 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아론의 장례를 위해 30일간 애곡이 계속되고, 나중에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서 조상 야곱의 죽음에서는 이집트 사람들이 무려 70일 간이나 애곡 기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인물을 제외하고는 통상적으로 이스라엘이나 이집트는 일주일의 애곡 기간을 보냈던 것으로 추론됩니다(창세기 50:10; 사무엘상 31:13; 참조 민수기 19:11,16, 31:19). 따라서 이 규정에서 마련한 한 달의 애곡 기간은 매우 특별했으며, 포로로 잡혀온 그녀에 대한 큰 배려였습니다.

 

⑶ 이방 여인과의 이혼(14)

 

만일 그 남자가 결혼 후 그녀에 대한 애정이 식어 헤어지길 원한다면, 그녀를 자유인으로 풀어줄 수 있었습니다. 돈을 받고 매매하는 행위는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미 그녀를 비천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종으로 대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 중 가나안 여인을 제외하고 다른 민족은 아내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도 포로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특히 결혼 후 이혼할 경우에는 매매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약자일수록 더 존중하고 귀히 여겨는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보호받아야 할 장자권(15-17)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해주신 모든 규례의 이면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깔려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열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15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16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17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15-17)

 

요지는 아버지가 아무리 편애하는 다른 아들이 있더라도 장자권은 첫 아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장자는 ‘두 몫’의 상속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두 몫을 의미하는 피 쉐나임을 스가랴 13:8에 비추어 ‘2/3’로 해석하자는 견해가 있지만, 사실은 거기서도 세 부분 중에 두 몫이어서 2/3가 되는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만일 열 명의 아들이 있다면, 그 몫은 크게 줄어듭니다. 실제 정확한 분배 방법은 열 명일 경우 먼저 열한 명의 몫으로 공평히 나눈 다음 거기서 두 사람 몫을 장자가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적 인 랍비들의 해석입니다.

장자권은 무조건 첫 아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원칙이나, 성경에서 확인되듯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이 권리가 다른 아들들에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패륜아의 사형과 매장 지침(18-23)

속담에 ‘될성부른 나무를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했습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일꾼들은 어렸을 때부터 성령 충만하게 성장합니다. 위대한 지도자인 사무엘은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사무엘상 2:26)라고 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성장과정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18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22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18-23)

 

만일 어떤 패역한 아들이 부모의 말을 안 듣고 허랑방탕하게 생활하며 폭음을 일삼는다면, 부모는 공동체의 처분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 아들에 대한 재판을 정문에서 공개적으로 개최하고, 장로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합니다. 부모가 그 현장에서 사실을 확인해주면, 마을 사람 전체가 투석형에 참여하여 사형에 처합니다.

전통적으로 랍비들은 이 법이 실제로는 실현되지 않는 자녀 훈육을 위한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합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공개 재판에서 부모 그 불효자의 죄를 고발해서 그가 비참하게 죽을 상황이 되기 전에, 부모와 아들은 비극을 피하는 해결책을 찾고, 아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현재의 사례를 포함하여 어떤 극악한 범죄자를 처형한 뒤에, 때로는 성읍 전체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그 사체를 나무에 매달아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나무 위에 달거든’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단순히 당시 관행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구약에는 나무 위에 사체를 달아둔 사례들이 몇 군데 나타납니다(창세기 40:19, 여호수아 10:26, 에 9:6-14). 그러나 이 사체는 당일에 매장해야 했으며, 여기에 근거해서 탈무드는 장례 규정에서 모든 시신은 당일에 묻어야 한다는 지침을 만들었습니다.


범죄자의 처리에 있어서 사회 전체에 공동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무슨 일이든지 자기 개인에게 해가 미치지 않는데도, 불의한 일이나 사건이라도 수수방관하는 예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 모두가 책임을 공감하고 그 처리에 동참하는 것이 성경적인 교훈입니다. 세상 세계관과 함부로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임을 자랑으로 여기시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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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0-01)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전쟁

신명기 20장 1-20절


성도들의 생활은 항상 영적 전쟁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전전쟁에 눈을 뜨지 못했다면 아직 성령 충만을 경험했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군사도 신부도 아닌 그냥 성도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잃어버린 자를 찾아 당신의 거룩한 신부로 직접 부르시고 그중에서도 최고의 신부가 되도록 하기위해 이 땅에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은 곧 영의 눈이 열린 것을 말합니다. 하루하루 생활 속에 넘어지지 아니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모세의 율법 강론은 전쟁 수칙으로 이어집니다. 가나안과의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필수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이기에 제사장에 의해 전쟁이 선언되고, 대적을 두 부류로 나누어 각각 다른 전쟁 수칙이 주어집니다. 비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은 먼저 평화가 제의된 후 상대국의 응답에 따라 전쟁 여부가 결정되고, 이 경우 진멸(헤렘) 전쟁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나안 족속과는 진멸 전쟁이었습니다.

 

제사장을 의한 전쟁 선언(1-4)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성도에게 가장 큰 무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전쟁은 적군의 말이나 병거가 아무리 많아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장 큰 적은 마음을 녹이고 온몸을 떨게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이 불신을 야기하고, 불신은 불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의 뼈아픈 실패한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2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 3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4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할 것이며(1-4)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마치고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본문은 그 전쟁할 때에 대한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인도해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⑴ 하나님만 의지하는 전쟁(1)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하기 위해 진격해 들어가 싸울 때, 그들은 믿음의 무장이 필요했습니다. 과거 정탐꾼들의 보고를 통해 그 땅의 민족들이 얼마나 강한지 들은 바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기골이 장대한 아낙 자손들이 있었고, 성들은 견고했으며, 군사적으로 잘 무장되었습니다. 말과 병거라는 첨단 무기를 갖고 있었고, 군사도 이스라엘보다 많았습니다. 기병대뿐 아니라 특히 병거는 당시 블레셋을 중심으로 철기가 보급되면서 출현한 더욱 강력한 철갑 무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란 표현은 이스라엘의 모든 전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의 근원이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세계 최강의 애굽과 그들의 왕 파라오를 격파하셨기에 그들이 두려워할 적은 없습니다.

 

⑵ 전쟁을 선포한 제사장(2-4)

 

가나안 땅에서 전쟁을 시작할 때, 제사장이 선언하셨습니다. 이때 제사장들이 나서서 백성들을 격려하고 전쟁을 시작했습니다(2). 제사장에서 전쟁을 선언하라는 이유는 그들이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고 놀라지 말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고 그분이 너희를 위해 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전쟁이, 민족 대 민족의 전쟁이 아니라 그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의 전쟁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이 전쟁 역시 하나님과 이방신의 전쟁이기에 제사장이 전쟁의 시작을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적군의 많음을 볼지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신 강력한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신명기에서는 법궤가 십계명 돌판의 보관물로 언급되지만(10:1-8), 전쟁에서 법궤의 주도적 역할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령관으로 직접 나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최대의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애굽 군대도 여지없이 격파해 버리셨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이후에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해주시면 어떤 적과도 싸우더라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승리한 전쟁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병에서 제외되는 군인들(5-9)

신앙생활 자체는 영적인 전쟁입니다. 하지만 종종 이 사실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무방비 상태에서 사단에게 당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마가복음 13:33)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항상 군사들처럼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5책임자들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 6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7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 이 그를 데려갈까 하노라 하고 8책임자들은 또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하고 9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친 후에 군대의 지휘관들을 세워 무리를 거느리게 할지니라(6-9)

 

이스라엘에서는 전쟁에 더 많은 군사를 모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모병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전쟁에 걸림돌이 될 사람들은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각 성읍의 ‘책임자들’이 이 시행령을 따라 장정을 모병합니다. ‘책임자’는 앞서 지도자로 번역된 직급의 인물들인데, ‘쇼테르’라는 이 직책은 장로들의 직책으로 추론됩니다.

영적 무장을 독려한 모세는 이제 이스라엘 군대의 내적 무장을 갖추기 위해 구체적 지침을 내립니다. 군대의 사기를 떨어트릴 수 있거나 전력을 약화할 소지가 있는 군인들을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게 합니다. 복잡한 사정이 있는 네 부류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위의 순서에 따라 살펴보겠습니다.

 

① 집을 새 로 짓고 기공식을 못한 사람

먼저 집을 새로 지은 뒤 준공식을 거행하지 못하고 입대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가 전사하면 집이 어떻게 처분될지 알 수 없기에 입대한 사람의 걱정거리가 되어 사기를 떨어트릴 수 있으므로 전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② 과수원을 만들고 열매를 거두지 못한 사람

둘째,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를 재배한 뒤 수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포도는 단지 대표일 뿐 모든 과실수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과실을 먹다’라는 뜻은 사실 과실을 수확한다는 의미입니다. 문자적으로는 포도나무를 세속화한다는 의미입니다.

 

③ 약혼한 사람

셋째, 약혼한 남자입니다. 남자가 입대해서 전사하면 그 여자와의 약혼은 깨지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수 있습니다. 약혼할 때 예비 신랑은 신부 값을 지불합니다. ‘약혼했다.’ (betrothed) 대신 ‘신부 값을 지불했다’(paid the bride-price)로 번역합니다. 22:23-24을 보면 약혼한 사이는 법적으로 사실혼 관계입니다. 약혼한 남자는 신부 값을 지불한 약혼녀를 빼앗길까 노심초사하게 될 것이고, 불안한 심리는 전력에 도움이 되지 못하기에 집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한 규정이 24:5에 등장하는데, 이미 결혼을 한 사례입니다.

 

④ 심약한 사람

마지막으로 두려워하는 심약한 남자는 사기가 가장 중요한 전쟁에서 군대의 분위기를 저해하므로 모병에서 제외됩니다. 이렇게 군대가 조직되면 각 계급의 장교들(지휘관들)이 임명된 뒤 군대를 이끌고 출정합니다(9).

 

전쟁에는 많은 군사가 필요한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돌려보내신 것입니까? 그것은 전쟁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방 우상들에게 지지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사사기 기드온의 군대에서 잘 나타납니다. 불레셋과 싸울 때 군사를 모집할 때 32000명이 모집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300명의 용사로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사사기 7:2)

적군들과 말도 안 되는 군사로 전쟁에서 승리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군사로 전쟁해서 승리했다면, 스스로 자신의 능력이라고 자랑할 것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군사가 적고 무기가 형편없다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4)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전쟁 수칙(10-20)

교회를 이끌어감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가야 합니다. 서로가 격려하고 도와주면서 나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실수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헐고 자신이 세워지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다른 성도가 실패하면 같이 공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0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11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12만일 너와 화평하기를 거부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1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14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15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16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17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하라 18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19너희가 어떤 성읍을 오랫동안 에워싸고 그 성읍을 쳐서 점령하려 할 때에도 도끼를 둘러 그곳의 나무를 찍어내지 말라 이는 너희가 먹을 것이 될 것임이니 찍지 말라 들의 수목이 사람이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에워싸겠느냐 20다만 과목이 아닌 수목은 찍어내어 너희와 싸우는 그 성읍을 치는 기구를 만들어 그 성읍을 함락시킬 때까지 쓸지니라(10-20)

 

전쟁의 목적은 모든 족속을 진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방민족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영적, 내적인 무장을 한 군대의 조직과 더불어 가나안 땅에 진격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대상에 따라 두 가지 전쟁 수칙을 따라야 한다. 첫째는 비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이고, 둘째는 가나안 족속의 전쟁입니다.

 

⑴ 비가나안 족속과의 전쟁 수칙(10-14)

 

비가나안 족속은 대체로 가나안 땅 변방 먼 곳의 나라들입니다(15). 그들에게는 즉각 선전 포고를 통한 전쟁을 시작하지 않고 먼저 평화협상을 제안해야 합니다. ‘화평’(샬롬)의 선언은 평화로운 해결책을 의미합니다. ‘샬롬’은 완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근 ‘샬람’은 ‘완성’, ‘성취’, ‘통합’, ‘일치’를 의미합니다. 상대방과 어긋난 관계는 상호 조약이나 때로 필요한 경우 배상과 대속의 수단으로 샬롬의 상태로 회복됩니다.

평화를 위한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이스라엘은 그들을 속국으로 삼아 종주국으로서 그들의 조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평화의 제안을 부하면 전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정복하고 모든 남자를 진멸하되, 다른 사람들, 곧 여자와 유아들은 살려줘야 합니다. 성인 남자들만 진멸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가축을 비롯하여 성의 모든 물건을 전리품으로 거두어 올 수 있습니다. 비가나안족속과의 전쟁은 성인 남자들만 모두 죽이기 때문에 진멸(헤렘) 전쟁은 아닙니다.

민수기 31장의 미디안과의 전쟁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비록 미디안이 이스라엘에게 죄를 저지른 전력으로 인해(바알브올 사건을 주동함) 이보다 더 엄격한 규칙이 적용되긴 했지만 말입니다(이스라엘 군대는 미디안의 남자 아이와 처녀가 아닌 여자들도 모두 죽이고, 처녀인 여 자들만 살려주고 모든 전리품을 챙겨왔다).

 

⑵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 수칙(15-20)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은 ‘헤렘’ 즉 진멸 전쟁입니다(17). 이들에게는 평화 협상이 불필요하며, 사람은 모두 진멸하고 물품은 모두 파괴해야 합니다.

평화의 제안을 하지 않는 이유는 자녀마저 희생으로 바치는 가나안의 가증한 종교적 관행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서입니다. 헤렘 전쟁에서는 아무 전리품도 허용 않고 불태워 진멸하는 사례가 발견됩니다(신명기 13:12-16).

다른 사례에서는 불에 타는 것은 모두 태우고 가축도 칼로 전멸시키며, 다만 금속 제품은 전리품로 가져와 여호와의 성전 곳간에 보관합니다(여호수아 6:18-19, 21). 전리품이 일절 허용되지 않는 정확한 기준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아마 성읍이나 국가의 범죄가 심각할 때 지시되는 여호와의 전쟁 규칙으로 보입니다. 가나안 족속의 멸절은 여리고 성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사울이 아말렉을 동일한 방식으로 진멸한 바 있습니다(사무엘상 15장). 정복 후 거주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성읍이더라도 우상숭배에 빠진 경우에(신명기 13:12-16) 가혹하게 남김 없는 진멸을 명하십니다.

이런 진멸 전쟁은 모압 메샤 왕의 비문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여러 국가들의 관행이었지만, 여호와의 헤렘 전쟁에는 ‘죄로 인한 심판’이라는 중대한 신학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최후 심판도 인간의 죄에 대한 일종의 헤렘 심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멸’이 무조건 전적인 집단 학살을 가리킨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고대 전쟁에서 ‘진멸’은 전쟁에서의 살상과 더불어 언제나 전면적 추방의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바벨론과 앗수르의 정책이기도 합니다. 성경도 ‘내쫓았다’는 말을 수없이 동시에 사용하고 있습니다(출애굽기 23:28, 29, 30; 34:11; 레위기 18:24, 20:23; 민수기 32:2, 39, 신명기 2:22; 6:18; 신명기 7:1 등; 이후 역사서에서도 마찬가지; 신약에서는 사도행전 7:45). 이에 덧붙여진 추가적인 전쟁 수칙 하나는 쓸데없는 파괴의 금지입니다. 공격하는 성읍 주변의 나무를 베어내선 안 되며 과실수는 더욱 그러합니다. 랍비들은 나무만이 아니라 정복지의 가구, 비품, 옷, 건물 등도 파괴하지 않았다고 해석합니다. 예외적으로 과실수가 아닌 나무를 베는 것이 허락되는 경우는 그 포위된 성읍에 맞서 주변을 에워싸는 포위벽을 세울 때입니다. ‘성읍을 치는 기구’(siegeworks)는 무기가 아니라 포위벽, 혹은 공성벽인데, 이 벽은 성읍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여 그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게끔 유도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성전(聖戰)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나가서 싸우셨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전쟁터에 임하게 되면, 백발백중 패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거룩한 전쟁에 세상에 미련을 가진 사람들은 전쟁에 참가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도 다른 사람들을 세우는 성도와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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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9-02)


타인의 재산을 위한 보호

신명기 19장 14-21절


지금 우리나라는 ‘개인의 인격이 우선이냐?’, ‘공공의 이익이 우선이냐?’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국가에서는 성범죄자들의 신상명세의 공개를 놓고 ‘공개할 것인가?’를 고민 중에 있습니다. 선진국 특히 미국의 경우에는 성범죄자의 신원을 공개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전자 팔찌를 차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신원파악이 되도록 하였고, 그가 살고 있는 집 앞에는 “위험 성범죄자의 집”이라고 푯말을 붙여 놓았습니다. 어느 누구가 피해자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개인의 인격보다는 공공의 유익을 위해 표시를 해놓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인격을 보호하게 되면 다른 범죄로 다른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인격도 중요하지만 공공의 유익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조상이 정한 경계표를 옮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목숨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고의가 아닌 살인자에게 재판 때까지 피할 수 있는 도피성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이 중요한 만큼 재산도 중요합니다. 그것을 보호해 주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 증거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말합니다.

 

경계석을 대한 교훈(14)

건강한 사회는 구성원들의 재산과 권리를 보호하고, 구성원들이 서로를 인정하며 배려하는 사회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이웃의 재산이나 권리를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14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언제 하시는 땅 곧 네 기업 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찌니라(14)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을 공정히 분배해야 했으며, 이웃의 재산권을 존중해야 했습니다. 더욱 하나님께서는 약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경계석을 지정하셨습니다.

경계석은 재산권입니다. 각자의 땅을 구분 짓고 표시해 주는 것으로서 소유권을 상징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이동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땅을 탐내는 것입니다. 남의 소유나 재산을 탐내거나 침해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하는 도둑질입니다. 제 8계명에서 “도둑질하지 말라”(출애굽기 20:15)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경계석을 옮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 하십니까?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신명기 27:17)

경계석을 옮기기 시작하면 재산권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사회가 점점 험악해지고, 재산권 때문에 큰 싸움이 일어납니다. 스스로 자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자기 지파대로 땅을 나누어 받을 것입니다. 각 지파 사람들이 좋은 땅 쪽으로 경계석을 조금씩 옮기게 되면, 땅 때문에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끼리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경계석을 옮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 왕인 아합은 탐심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왕궁 주변에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탐낸 아합 왕은 나봇에게 처음에는 좋은 말로 부탁을 하지만, 나중에는 죽이고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증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죄악을 지적하고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인 권리를 멸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입니다. 결국 이웃의 것을 빼앗은 아합 왕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왕상 21:1-26, 22:37-38).

 

이러한 탐심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으로 채워 주심을 인정하고 살아간다면 만족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자신의 분량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마음이 바로 욕심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경고를 들어야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5)

욕심은 작은 것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생명까지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15)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해야 합니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의 권리를 빼앗기 위해 속임수나 사기 같은 행동을 멀리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산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재산도 중요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의 소유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오늘날 자신의 재산은 매우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재산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재산과 인격 정도는 쉽게 생각해버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한탄할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이웃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이웃의 재산이나 권리를 빼앗거나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것을 생각한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먼저 보호해 주는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거짓 증거자에 대한 처벌(15-21)

성도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공정하게 분쟁을 해결해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모든 상황에서 공평하고 정직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야 합니다.

 

15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16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17그 논쟁하는 쌍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18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19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20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21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15-21)

 

어떤 어려운 일이 발생되었습니다. 그래서 재판한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증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인 사건이 일어났거나 도둑질이 발생이 되었을 때, 증인은 그것을 혼자만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합니다. 그 현장을 같이 목격한 두세 사람이 같이 증인이 되어야합니다. 증인으로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증인으로써 나왔지만 그 증거가 거짓 증거일 때가 있습니다. 이들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처럼 악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이들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관용할 수 없습니다.

 

그 때는 거짓 증인에 대한 심판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짓 증거는 무고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일단은 엄격하게 ‘동해 보복법’으로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동해 보복법’이라는 것은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21)고 하는 것입니다.

 

재판장은 거짓 증거로 판단될 때, 남을 모함한 것이 사실인지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실로 판명되면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거짓 증거했던 사람에게 그 죄과를 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상대방에게 죄과를 물어야 합니까?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인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무함한 것이 판명되거든 19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20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 후부터는 이런 악을 너희 중에서 다시 행하지 아니하리라”(18-20)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그 거룩한 백성들에게 거룩한 질서를 파괴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악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질서를 잡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암 5:24).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땅의 교회들이 단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종교 집단이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여 억울한 자를 구제하는 참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망므을 이해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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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9-01)


살인자를 위한 도피성

신명기 19장 1-13절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성도(聖徒)’라는 ‘거룩한 도를 쫓는 사람’ 즉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이상적인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의 구성원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지만, 그 중에는 사업에 실패한 사람도, 실수로 범죄한 사람도, 심지어는 살인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자칫 실수할 수 있는 것은 정죄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포용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들을 사랑으로 안고 가는 교회는 은혜스러워지고 날마다 부흥해 나갑니다. 모든 성도들을 사랑으로 감싸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통해 살인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살인자는 마땅히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때, 완벽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실수 중에 가장 큰 실수로 살인입니다. 고의가 아닌 살인한 사람들에 대한 도피성 제도를 마련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피성 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놀라운 영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진 성도(1-3)

약속의 땅 가나안이라고 사람들이 완벽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서도 광야의 생활과 같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살다보면 실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다양한 실수가 있지만 가장 큰 실수는 다른 사람을 살인한 것입니다. 전혀 고의가 아닌 살인자들에게 무조건 사형으로 처벌한다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위한 재판을 받을 때까지는 잠시 피신할 수 있도록 한 곳이 도피성입니다.

 

1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열국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필경 그것을 얻고 그들의 각 성읍과 각 가옥에 거할 때에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 가운데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 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시는 땅의 전체를 삼구로 분하여 그 도로를 닦고 무릇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케 하라(1-3)

 

여호수아서 20장 7-9절을 통해서 보면 모두 6개의 도피성이 있었습니다. 이 성은 제사장 레위인들이 사는 48성 중에서 6개를 선택하여 도피성을 만들었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3개, 요단강 서편에 3개가 있었습니다(4:41; 수 20:7).

 

세상을 살면서 살인하고 싶어 살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뜻하지 않게 실수로 사람을 죽이면 피해를 입은 가족들이 분노해서 보복을 받습니다. 이들을 잠시 피해 재판을 받을 시간까지 피해 있어야할 곳이 ‘도피성’입니다. 피신할 때는 신속히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도피성들은 이스라엘 전국 어디서나 하루 안에 들어갈 거리인 48km 안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3절에서 “그 도로를 닦고 무릇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케 하라”고 말씀합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도로를 잘 정비해야 합니다. 도로에 장애물이 있거나 다리가 파손되면 피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피를 흘리게 되고, 이스라엘 전체에 피의 보복으로 얼룩지게 됩니다. 피하는 사람들을 위해 항상 정비되어야 합니다. 도피성으로 피신하는데 길에 장애물이 있으면 잡히고 도피성이 아무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도피성으로 가는 도로를 매년 아달(Adar)월(12월)에 일제히 보수 하여 길 위에 장애물이나 무너진 다리를 보수하였습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길에는 어느 정도의 간격으로 “도피성, 도피성”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래서 부지중 살인자들이 도피성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도피성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도피성을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영원한 도피성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1-7)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긍휼을 도피성인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났습니다. 누구나 도피성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오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 밖에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올 때, 어느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구원의 방주인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데 여러 장애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은 항상 살펴봐야 합니다. 성도들의 입장에서 살피는 것이 아니라 도피성으로 오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발에 거친 장애물들이 있으면 빨리 치워야 합니다. 누구나 쉽게 현대의 도피성으로 나올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그 길을 교회들이 잘 정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흥시키시는 교회의 특징이 있습니다. 새신자들이 도피성인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데 부담이 없는 교회입니다. 도피성에 들어온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살펴 주는 교회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치는 것이 있다면 빨리 치워주는 교회가 날마다 부흥할 것입니다.

 

도피성으로 피신할 사람(4-10)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만한 경위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혐원이 없이 부지중에 그 이웃을 죽인 일, 5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춰 그로 죽게함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4-5)

 

4-5절에서는 도피성으로 피할 자의 자격을 말합니다. 도피성으로 피신해서 생명을 보호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원래 아무 원한도 없고 전혀 고의가 아니게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에 해당됩니다.

 

고의적인 살인은 아니지만 아무나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사람들과 싸우다가 죽지는 않았지만, 중상(重傷)을 입힌 후에 그 사람이 죽었다면, 이 살인자는 도피성으로 피할 수 없습니다. 또 누군가를 골탕 먹기 위해 웅덩이를 파놓았는데, 그곳에 빠져 사람이 죽게 되었다면, 그 사람 또한 도피성에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웅덩이 파는 것은 같지만, 예를 들어서 오물을 묻기 위해 웅덩이를 팠는데 사람이 빠져 죽으면 그 사람은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다.

정리해보면,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을 주려다가 살인하게 되면, 이런 사람들은 도피성으로 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의도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7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7)

9또 네가 나의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10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게 하라 이같이 하면 그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9-10)

 

도피성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구별된 곳입니다. 이 성은 하나님을 위한 성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 도피성을 만들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분별한 보복이나 무조건적인 살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곳입니다. 이 도피성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통치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신 것, 즉 신정정치(神政政治)를 보여준 것입니다.

 

도피성으로 피할 수 없는 사람(11-13)

만약 고의적으로 살인한 사람은 도피성으로 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도피성으로 피한다고 용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도피성이 사악한 범죄자들 은신처로 소굴이 되어 버립니다.

 

11그러나 만일 사람이 그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쳐서 그 생명을 상하여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거든 12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수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13 네 눈이 그를 긍휼히 보지 말고 무죄한 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11-13)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던 성의 장로들은 사람을 보내어 도피성에 숨어 있는 사람을 체포해서 보수자의 손에 넘겨서 복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무조건적으로 복수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판을 통해 심판 후에 살인자를 법적으로 처벌함에 있어서 보수자로 하여금 먼저 손을 대게 한다는 뜻입니다.

 

고의적으로 범죄하고 자비를 바랄 수 없습니다. 종종 믿지 않는 사람들이 빈정대는 말로 ‘기독교인들은 죄를 짓고 하나님께 나가서 사죄 기도만 하면 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핑계로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고 용서함을 빈다고 용서한 것은 아닙니다.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시지만 아울러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로마서 6:1-2)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맛보기 위해 고의적으로 죄를 범할 순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브리서 10:26-27)고 무서운 경고를 합니다. 구원을 받고 나서도 고의적으로 죄를 범한 것은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강력히 경고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으로 어쩔 수 없이 범죄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용서를 빌면 사함을 받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을 빙자해서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범죄를 용서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사악한 범죄입니다. 하나님은 사악한 자들의 피난처는 아닙니다. 사람들의 무책임한 행동까지도 용서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악과 싸우되 피흘리까지 싸워야 합니다(히브리서 12:4). 언약함으로 어쩔 수 없이 범죄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속죄소(贖罪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의로 범죄한 자를 “네 눈이 그를 긍휼히 보지 말고 무죄한 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13)고 말씀하십니다. 공동체 안에 공의가 하수같이 흘러야만 복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공동체는 더욱 더 모든 사람이 공평해야 부흥이 있습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도피성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최고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타락한 사람들에게 피할 곳인 도피성만이 구원의 성입니다. 이 성은 장차 모든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신 메시아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나가면 모두 구원함을 얻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도피성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당신도 세상에 갈증 나서 무엇인가를 찾고 계십니까? 도피성으로 피하시길 바랍니다. 도피성을 찾았다면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도피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도피성인 십자가 안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참된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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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8-02)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선지자

신명기 18장 15-22절


목회를 하다 보면, 종종 가슴 아픈 일을 많이 만납니다. 성도들 중에 이단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찾아가서 권고하고 기도해 주지만 변화가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단에 빠져간 사람들을 살펴보면, ‘신령한 성경공부다’, ‘성령의 체험을 했다’, ‘은사를 받았다’,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다’ 등이 있지만, 큰 이유는 ‘병이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 질병의 고통에서 시달리던 사람이 치유가 되어버리면 맹신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모든 치유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닙니다. 마귀도 하나님의 능력을 흉내를 낸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18장 두 부분으로 1-8절까지 정식적인 제사장직과 9절부터 비정기적으로 보내신 선지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첫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평생 동안 제사를 감당하는 레위 제사장은 ‘응식(삯)’에 대해 거론했습니다. 다음으로 대부분 ‘선지자(先知者)’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 선지자를 보냅니다. 진짜 선지자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도 일어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강력히 척결하고, 참 선지자들에게 대한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예고(15-16)

성도들은 하나님의 복을 자신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있어 주변이 밝아지고, 평화와 안식이 많아지는 천국과 같은 세상을 만드는 복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이유는 그 축복의 통로(대리인)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며 살면, 우리가 하는 일과 관계에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1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16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15-16)

 

지금까지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했던 지도자들을 살피고 있습니다. 구약의 지도자들인 ‘왕’, ‘제사장’, ‘재판장’, ‘선지자’들입니다. 이러한 역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성취하셨습니다. 그 역할을 교회에게 맡기고 예수님을 떠나셨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사악한 신비 술사들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다양한 이방 점술가와 마법사들이 하늘의 뜻을 전달받으려 온갖 가증한 수단과 방법들을 사용하지만, 그들이 받는 말씀은 거짓된 영들에게서 온 신탁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장중한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와 계획을 예고하셨습니다.

 

⑴ 신실한 선지자의 계통(15)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지상 최고 권세인 왕과 대척점에 서서 하늘 왕의 뜻을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왕보다 더 높은 권세를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앞으로 이스라엘에서 자신과 같은 선지자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내 형제 중에서’ 세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선지자 역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합당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알고 기억한 사람’ 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⑵ 모세와 같은 선지자(16)

 

모세는 선지자를 ‘나와 같은 선지자’란, 문자적으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며, ‘선지자’는 집합명사로서 선지자들을 계속적으로 세우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하나’는 특정한 선지자를 지목한 듯한 번역이므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 것은 앞으로 모세 이후에 하나님께서 연이어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계속 등장할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수 집합명사, 즉 ‘선지자들’로 해석해야 합니다. 실제로 앞서 재판장과 제사장은 복수였으나, 그 외 왕(17:14-20)과 레위인(18:6)은 집단을 대표하는 단수로 나타납니다. 여기서도 이것을 단수 집합명사, 즉 ‘선지자들’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단어가 복수로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계속 일으키실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전통적으로 이 구절의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 또한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어야’ 하는 선지자로 이 땅에 오셨으며, ‘사무엘 이후 모든 선지자들이 가리켜 말했던’ 바로 그 선지자입니다.

모세는 왜 자신이 최초의 선지자로 세워졌는지 설명합니다. 바로 호렙 산(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백성이 언약을 체결했을 때, 그가 맡았던 역할 때문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당시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사실을 상기시킵니다(5:24-25). 출애굽기 20:18-19에 의하면, 십계명이 선포될 때 백성들은 구름 속에서 우렁차게 들려온 신적 음성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압도적인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모세에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애굽기 20:19). 죽음의 공포를 느낀 백성들은 모세에게 말씀의 중재자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5:27). 그래서 자신이 최초의 선지자가 되었노라고 소개합니다.

 

선지자의 사명과 참 선지자의 분별(17-22)

주술행위는 미래의 일들을 먼저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인간들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불안으로 기인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불신앙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종교들을 본받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밝혀 줄 참 선지자를 세우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17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19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20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21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22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17-22)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대언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생각과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전해서도 안 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⑴ 선지자의 대언의 사명(17-20)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청원을 옳게 여기시고 모세에게 17-20절의 말씀을 건네주셨습니다. 이 부분은 모세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답변하셨습니다. ‘내가 백성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를 그들을 위해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라’. 선지자직의 신적 기원의 근거가 바로 이 말씀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출애굽기 시내산 이야기에서 뿐만 아니라, 신명기 모세의 회고 부분에서도 언급되지 않고 여기에 최초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다분히 중의적입니다. 즉, 이것은 당장 모세를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 곧 선지자로 위임하신다는 것이며 동시에 앞으로 모세와 같은 말씀의 대언자 역할을 하는 선지자를 계속 일으켜 세우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선지자직의 기원과 선지자의 역할이 확인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이며,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입니다. 최초의 선지자로서 모세는 ‘여호와의 종’으로(출애굽기 33:11; 민수기 12:6-8; 신명기 34:10-12)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언약의 중보자이자 종말론적 선지자로서(18:15, 18) 예수그리스도를 예고합니다. 주인의 대언자인 여호와의 종은 자신의 말을 해선 안 되며, 또한 주인의 말에 자신의 말을 섞어서도 안 됩니다. 흔히 사악한 독재 정권을 대변해서 그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대중에게 전하는 사람을 ‘정권의 나팔수’라 비꼽니다. 부패한 인간 권력자의 나팔수는 악하지만, 선지자는 주인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하나님의 나팔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십니다. 만일 선지자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19). 말하자면 참된 선지자의 말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그 대가를 치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선지자 행세를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말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하거나 다른 신의 이름으로 거짓된 신탁을 중재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로서 반드시 죽음의 형벌을 당해야 합니다(20).

특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된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거짓 예언을 하면서 우상숭배를 선동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점쟁이들이 원래 하나님의 선지자였는데, 가나안의 신앙에 심취하여 배교의 길을 걷게 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선동은 여호와를 섬기면서 다른 신들도 섬길 수 있다고 설득하고 유혹하여 이스라엘을 종교다원주의로 이끌기 함입니다. 결국 이러 사상은 다시 로(polytheism)이라는 비판을 모면하면서 교묘히 다신론적 여호와 종교(polytheistic Yahwehism)로 가는 길을 여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점술가의 특징은 부족적이고 국가적이며 매우 국수주의적인 예언 활동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국가 속에서 권력의 정점에 서 있지만, 세계정세를 파악하거나 그런 흐름을 감지하여 국가의 운명을 예언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국가만이 선이고 최고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자신의 부족과 국가를 저주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국가의 전복과 왕의 죽음, 그리고 백성의 멸망을 선언하기를 망설이지 않습니다.

 

⑵ 참 선지자의 징표(21-22)

 

분명 백성들 편에서는 어떤 선지자의 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정확히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의 진위 판정은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의 역사는 인간의 제도를 뛰어넘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400명의 선지자로부터 만장일치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지만, 유일한 참선지자였던 미가야가 경고한 패배의 예언만이 참되었습니다(왕상 22장). 모세는 거짓된 예언에 대한 분별의 기준을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그 말씀이 ‘증험’이 없을 경우이고, 둘째, 그 말씀이 ‘성취’되지 않을 때입니다.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다'의 원문의 의미는 모호합니다. 가능한 해석은 ‘그 말씀이 사실이 아니고 그 말씀이 성취되지 않으면’입니다. 물론 때로 말씀이 즉각 성취되기도 했으나, 대체로 말씀의 검증은 다소 시간이 필요했고, 때로는 참과 거짓의 정확한 관정을 위해 오랜 시간이 경과되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참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이 사실로 판명되기까지 그는 한동안 옥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열왕기상 22:26-27).

결국 미가야의 예언이 성취되어 아합은 전쟁터에서 사망했습니다. 예레미야도 그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언하자 거짓 선지자라는 모함과 비난을 받았으나,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예언이 참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예레미야 26장). 이상에서 이스라엘의 참된 선지자의 기준은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 이스라엘 사람(네 형제 중에서)이어야 합니다. ② 뚜렷한 소명이 있어야 한다. 3) 성령의 권능을 입어야 합니다. 4)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입니다. 5) 하나님의 권위를 입은 자입니다. 6) 선한 목자입니다. 7) 분명한 표적(이적과 기사)과 말씀의 성취를 보여줍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요상한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모두가 하나님의 사역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사역들 속에서 마귀의 궤계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그들의 삶을 살아보면 분별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영적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동서고금, 어떤 종교든지 거짓 선지자의 가장 두드려진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적인 유익, 즉 개인의 욕심을 밝히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거짓 선지자들을 정리해 보면,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지 않고, 다른 교훈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지 아니면 자기 유익을 위해 가르치는 살핍니다. 마지막으로, 시간이 지나면 전해진 말씀들이 진짜와 가짜가 밝혀집니다. 그 말씀들이 성취되어 가는지 험증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검증해 보면 진리의 진위를 알 수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이단 사슬을 막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굳게 서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살면서 항상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길 원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주술과 같은 악한 사상에 물들지 않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타락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져 갈 때였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들도 선지자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질 때 세상은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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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8-01)

 

 

이스라엘 제사장에 대한 규례

신명기 18장 1-14절

 

성도들은 하나님의 복을 많이 잘 누려야 합니다. 또한 그 복을 자신만 누릴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있기 때문에 주변도 밝아지고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천국이 되어 집니다. 이것은 공연한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시는 이유로서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면, 우리 일과 관계 속에 축복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세상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러한 사명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하신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제사장을 보내주셨습니다.

 

전 강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의 직분을 제시하시고, 이번에는 영적인 지도자들 및 그들과 같은 가문인 레위인과 관련된 규정들이 설명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땅을 분배받지 못하기 농사로 생계를 꾸밀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부양하시는데, 백성들의 소득의 십일조와 첫 소산물과 첫 태생의 제물과 같은 봉헌물이 그들의 분깃이 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소유로 바쳐진 예물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의 분깃(1-5)

오늘날 성도들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물질에 대해 많이 접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할 것은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므로 직장은 자신의 생계 수단이 아니라 제사장처럼 하나님께서 먹여 살리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을 통해 누군가를 먹이실 때, 성도들은 제사장 하나에게 몫을 준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1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2그들이 그들의 형제 중에서 기업을 가지지 않을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으니라 3제사장이 백성에게서 받을 응식은 이러하니 곧 그 드리는 제물의 소나 양이나 그 앞다리와 두 볼과 위라 이것을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4또 네가 처음 거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네가 처음 깎은 양털을 네가 그에게 줄 것이니 5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택하여 내시고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서 섬기게 하였음이니라(1-5)

 

모세는 왕에 이어 제사장 및 레위인과 관련된 문제를 강론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신명기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고 말하며 사실상 양자를 함께 다루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신명기와 달리 앞선 책들은 레위인의 역할에 있어 여러 가지 차이를 보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미 밝혔듯이 신명기가 앞선 책들을 매우 잘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신명기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1-5절은 민수기 법안에 비추어 서 제사장에 대한 것으로 이해되고 6-8절은 레위인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⑴ 레위인들의 공급된 양식(1-2)

 

이스라엘 각 지파들은 각자 자신들의 분배받은 기업(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사장 지파인 레위인들은 분배 받은 기업이 없었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해 마땅한 생계 수단이 없습니다. 오직 그들은 여호와의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여호와의 화제물’(엄밀히는 음식 봉헌물과 그분의 기업)과 ‘그분의 기업’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 자신이 그들을 부양하시며 친히 그들의 기업이 되셨습니다(민수기 18:20). 이 원리는 제사장이 백성들에게서 일정한 몫을 받는 방식으로 실현됩니다.

레위 지파도 이스라엘인데, 왜 지분을 주시지 않는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집례하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르게 섬기는 데만 관심을 두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농사나 목축까지 하면, 사람의 마음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합니다. 점점 하나님의 사역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⑵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원함(3-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레위 지파 사람들이 얻어야할 분기에 대해 ‘제사장이 백성에게서 받을 응식은 이러하니 곧 그 드리는 제물의 소나 양이나 그 앞다리와 두 볼과 위라 이것을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3)라고 하셨습니다. ‘응식(應食)’을 오늘날 표현으로 바꾸면 ‘몫’ 또는 ‘보수’입니다. 레위지파 사람들의 몫으로 하나님께서는 특정 부위를 주셨습니다. 가장 좋은 부위를 레위 지파 제사장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동역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이었습니다. 이것은 분깃은 변함없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물질적인 생필품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을 통해 제공되었습니다. 그들이 드릴 때, ‘또 네가 처음 거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네가 처음 깎은 양털을 네가 그에게 줄 것이니’(4)라고 합니다. 필요 없는 물건이나 남은 물건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최상의 것을 드립니다.

신명기는 해당 품목으로 단순히 화목제 짐승에서 받는 고기 부위와 첫 소산물과 첫 태생, 그리고 첫 번째 깎은 양털만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제사장 가문이 이런 품목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분명 신명기는 이미 민수기의 규정을 전제로 간단한 예시만을 내놓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민수기는 사제들의 생계 지원 수단, 곧 제사장이 받는 분깃과 레위기이 받는 분깃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제사장 몫은 다음의 여섯 가지입니다. ① 제단의 제물들 ② 여러 봉헌물(거제물) ③ 첫 소산물 ④ 헤렘(전적으로 바친 헌물) ⑤ 첫 태생들 ⑥ 십일조의 십일조 등이 있습니다. 레위기의 분깃은 민수기에서 백성들의 십일조만 언급됩니다. 현재의 신명기의 화목제 고기 분배 규정은 레위기와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신명기는 오른쪽 앞다리, 두 볼과 위를, 레위기는 오른쪽 뒷다리와 가슴을 제사장에게 할당한다(레위기 7:32-33). 이에 대해 필로(Philo)는 신명기에 맞추어 레위기 법의 히브리어 쇼크를 앞다리로 보았습니다.

웬한(Wenham)도 조심스럽게 그것이 앞다리일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는 라기스에 있는 가나안 신전에 여러 짐승들의 오른쪽 앞다리가 제단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근거 중 하나로 듭니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대부분 레위기는 오른쪽 뒷다리, 신명기는 오른쪽 앞다리를 제사장에게 할당한다고 봅니다. 이에 대해 비평주의 학자들은 제사장 문서와 신명기 문서의 상이한 전통으로 인해 발생한 차이라고 봅니다. 반면 미드라쉬는 신명기의 규정 그 드리는 제물의 소나 양이나 그 앞다리와 두 볼과 위(3절)를 화목제 희생 도살이 아닌 일반 도살로 해석하면서 이 문제를 피해 가려 하는데, 이 표현이 일반 도살로 이해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일반 도살된 짐승은 성소에 바치지 않으므로 수용될 수 없습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광야의 성막법에서 가나안 땅의 성전 중앙화로 인한 규정의 개정이라 봅니다. 광야에 적용된 몇 가지 율법들이 가나안 땅의 지리적 배경과 사회적 정황에 맞춰 변경된 점에 비추어 보면 가능한 해석입니다. 신명기의 제사장 몫의 화목제 고기는 레위 기의 그것보다 축소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장차 전체 인구가 증가할 가나안 땅의 사회적 정황에 따라 화목 제물을 나눠야 할 사람의 수가 늘어나 평민에게 돌아갈 몫을 늘리기 위한 변화일지도 모릅니다. 신명기에서 앞선 책들의 법들이 가나안 땅의 상황에 맞춰 변경된 사례들이 수차례 발견되기에, 이것을 억지스런 해석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외 제사장에게 할당되는 분깃은 첫 수확물과 포도주(포도즙), 감람유, 그리고 처음 깎은 양털입니다. 마지막 양털의 봉헌은 신명기에서 차음 언급되는데 아마다 레위인에게도 분배되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이것은 그들의 옷과 천을 위한 필수품이었을 것입니다.

 

⑶ 사명에 대한 제사장의 책임(5)

 

레위 지파 사람들은 당연히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서는 받는 의미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레위인 사역의 책임도 소개합니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택하여 내시고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서 섬기게 하였음이니’(5)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서 일용한 양식을 공급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권을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세워진 제사장 직분입니다. ‘서서 섬기게’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항상 준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것들 때문에 사역에 방해가 된다면 무엇이 되었던지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현대 목회자들에게도 권고합니다. 다른 것이 신경을 쓰지 않고 양 떼에만 마음 두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이중직(二重織)을 반대합니다. 목회자는 목양에 관심을 두고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다른 곳에 신경 쓰면 목양이 풍성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영적으로 점점 피폐(疲斃)해져 갑니다. 성도들을 돌아볼 시간이 없게 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공동체는 무너집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물질주의에 휩싸인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픕니다. 목회자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물질이 아니라 영혼입니다. 목회자들은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항상 준비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첫 수확물과 생산품이 어느 정도의 양인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서 16:16-17절에서 말한 대로, 랍비들은 형편이 넉넉한 농부에게는 1/40을 제시했고 샴마이 학파(the House of Shammai)는 최대 1/30, 평균 1/50, 궁한 경우 1/60로 정했습니다.

 

거처를 옮기는 레위인의 권리(6-8)

사람이 모인 곳에는 특권의식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먼저 믿은 성도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특권의식이 있는지 항상 살펴야 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지는 않는지 돌아봄으로 항상 형제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6이스라엘 온 땅 어떤 성읍에든지 거주하는 레위인이 간절한 소원이 있어 그가 사는 곳을 떠날지라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 이르면 7여호와 앞에 선 그의 모든 형제 레위인과 같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섬길 수 있나니 8그 사람의 응식은 그들과 같을 것이요 그가 조상의 것을 판 것은 별도의 소유이니라(6-8)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공급 받는 레위인들은 자칫하면 특권의식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당시 삶의 ㄱ정황의 단편을 엿보게 합니다. 민수기에 따르면, 레위인들은 각 지파가 봉헌한 전국 48개의 레위 도성들에서 삽니다. 레위 지파는 세 가문으로 나뉘는데(고핫, 므라리, 게르손), 오경은 말해주지 않으나 가문별로 지정된 레위 도성들에 분산되어 살았을 것입니다.

이 상황은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의 성막 시대에는 성막 동편에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민수기 3:38).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인구가 크게 늘어났을 모든 제사장 가족들이 여전히 성막 곁에 살았는지 의문입니다. 분명 실로에 세워진 성막을 섬긴 엘리 가족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중앙 성소 주변에 제사장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확인되지는 않으나 정황적 추론에 따라 더 많은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은 레위 도성들에 흩어져 살면서 지방의 여호와 성소에서 중앙 성소의 통제를 받으며 레위인들을 거느리고 제의 활동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레위인들과 함께 순번을 따라 중앙 성소에 올라와 직무를 감당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봉헌물과 예물을 관리하고(역대하 31:12) 성전의 곳간을 관리하고 지켰습니다(역대상 9:26, 26:20). 성막을 수리하고(대하 24:5) 청소를 했으며(대하 29:16), 아마도 율법서를 필사하는 일을 하고(대하 34:13) 율법을 가르치는 일(신 33:10)과 율법을 기준으로 재판하는 일도 맡았습니다. 인간의 삶의 현실이 그러하듯이 사제들도 자신이 원했거나(6), 때로는 불가피 한 상황 때문에 주거지를 이동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때 새로운 주거지인 ‘여호와의 택하신 곳(성소)’에 이르면 거기 사는 다른 형제 레위인들처럼 계속 사제로서 직무를 감당할 권리가 있습니다(7). 그가 팔고 온 부동산은 그의 재산으로 남아 있습니다(8). 중앙 성소 예배를 명령한 후에도 여전히 지방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합법적인 성소가 아마도 어떤 레위 도성들에서 운용되고 있었으며, 레위인들의 이사 문제는 그런 정황을 배경으로 설명되고 있다고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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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7-02)

 


이스라엘 왕에 대한 규례

신명기 17장 8-13절


전직 대통령을 둘러싼 '다스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공방이 있습니다. 이러한 공공연한 질문에 교회는 얼마나 자유릅니까? 세상을 향해 '교회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정확히 대답할 수 있습니까? 대부분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가면, 하나님의 것인데도, 교단법을 어기며 가족에게 세습하고, 사고파는 일들이 있습니다. 물질도 하나님의 것이라면서 마음대로 유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지금 당신이 소유한 권력, 지위, 생명, 물질 등은 누구의 것입니가? 본문은 세움을 받은 지도자의 품격을 가르쳐줍니다.

 

재판관의 책무를 다른 모세의 강론은 왕의 규례로 이어집니다. 신명기의 왕의 규례는 모든 고대 제국의 왕 제도와 왕권 사상과 비교해 볼 때 혁명적인 사상입니다. 이 규례는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제도권 장처를 마련하지 많으며, 오히려 왕의 권리를 제한하고 지능을 축소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직접 싸우시며, 더 높은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늘 왕의 신하로서 지상의 왕 노릇을 해야 합니다.

 

왕의 규례: 왕의 자격(14-15)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은 여호와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하는 자보다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여야 합니다. 인간의 야망을 성취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여야 합니다. 또한 왕은 형제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세워야 합니다.

 

14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15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14-15)

 

신명기는 왕의 규례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왕의 자격, 둘째, 왕의 금기, 셋째, 왕의 의무입니다. 특이하게도 여기에는 왕의 권한과 특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런 것들을 최대한 견제하고 있습니다.

 

⑴ 왕의 왕립(14)

 

더구나 왕권은 특정인이 스스로 권력을 차지해서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14,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백성들에 의해 선택될 수 있었습니다(14). 이것이 이방의 왕정과 가장 다른 점입니다. 하늘 왕만으로 충분한 이스라엘에게 인간 왕은 불필요하며, 지상의 왕권 자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도가 아닙니다. 지상 왕권이 하늘 왕권의 통제 하에 있을 때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⑵ 왕의 자격(15)

 

우선 왕의 자격은 두 가지입니다(15). 그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를 성소로 택하셨고, 특정한 ‘인물’을 왕으로 택하십니다. 물론 형식과 절차는 선지자들을 통해 예고되고 기름 부어 세워지는 방식을 취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둘째, 그는 ‘네 형제 중에서’, 곧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동료이스라엘 백성을 ‘네 형제’라고 표현하는 것은 신명기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심지어 왕이 될 사람도 네 형제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동등한 신하의 자격을 가졌으며, 아무도 절대 권력자로 백성들 위에 군림해선 안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네 형제 중에서’라는 표현은 왕이 태생적으로 정해지고 특정한 권력가의 집안에서 선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으로 세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국인 왕이 허용되지 않는 이유는 기존 사회 질서와 체제의 안정성을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그가 언약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폐쇄적 순혈주의를 고수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언약 백성의 신앙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이방인이 왕이 된다면, 타국 종교와 신들의 유입은 불가피할 것입니다.

 

왕의 규례 : 왕의 금기(16-17)

이스라엘의 왕이 왕으로서 제 역할을 감당하려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세상의 왕들의 왕의 권력을 차지하고 유지하기 위해 동원하는 것들을 이스라엘 왕은 넘봐서 안 됩니다. 상식적인 수준의 통치와 권력 행사 자체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16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16-17)

 

왕의 자격에 이어 왕에게 명령된 몇 가지 금기 사항이 나열됩니다. 첫째, 많은 말을 두지 말 것; 둘째, 많은 아내를 두지 말 것; 셋째, 재산을 축적하지 말 것. 이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돈, 성, 권력에 대한 구약관 제약입니다. 왕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을 갖습니다(권력).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나라의 곳간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돈). 그리고 그는 원하는 대로 수많은 아내와 첩을 거느릴 수 있습니다(성).

 

⑴ 지나친 권력(16)

 

물론 고대 제국의 권력가들이 많은 아내를 둔 이유가 외교적 전략에 따른 측면이 많지만(솔로몬의 경우), 동시에 권력가의 본능에 따른 무차별적인 축첩 행위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방 여자와의 통혼은 종교적 타락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세 기준을 가장 극단적으로 위반한 왕이 솔로몬입니다.

왕은 많은 말을 소유해선 안 됩니다. 고대 이집트와 중동 지역에서 말은 기병대와 병거용으로 키웠습니다. 기병은 말을 타고 싸우는 군인을 말하고 병거는 말이 끄는 군사용 수레를 일컫습니다. 말을 많이 보유할수록 군사력이 강했으며, 제국은 경쟁적으로 말을 키우고 수입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왕이 군사력을 지나치게 강화하는 것은 불신의 표시합니다. 20:1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이러한 신학적 확신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여 시편 기자도 이사야도 이집트의 말과 병거를 의지하는 불신앙을 비난합니다(시편 20:7; 이사야 31:1; 36:6). 유비무환의 태세를 갖추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주요 말수출 국가였으며, 팔레스타인의 말들은 대부분 이집트에서 수입되었습니다. 따라서 왕의 규례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말을 얻으려고 사람을 이집트로 보내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16). 이러한 금지는 이어지는 과거의 약속에 의해 강화됩니다.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라.’ 이 진술은 경고라기보다는 출애굽 사건 당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임을 시사 합니다(출 14:13,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이미 이집트보다 더 크신 이가 그들의 파라오를 굴복시키고 구출해내셨습니다. 만일 그 이집트로 돌아가 그들을 의지하여 스스로를 안전케 하려 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큰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광야 40년 동안 수차례 이집트를 그리워하거나 노골적으로 우리가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동일한 말을 쏟아내면서 하나님께 반항하곤 했습니다(민수기 11:5; 14:3; 20:4-5; 21:4). 왕이 말을 수입하기 위해 이집트에 의존하는 것은 역사적 불신앙의 반복일 뿐입니다.

 

⑵ 지나친 아내(17a)

 

둘째 금지는 끊는 아내입니다. 이것을 왕의 일부일처 의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쿰란 문헌은 왕의 아내를 한 명으로 제한하는 반면, 미드라쉬는 18명으로 제한합니다. 이 원칙이 당대의 왕들에게 일부일처를 강제하진 않았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조의 결혼 규례인 일부일처를 ‘지향’하고 있음은 인식해야 한다.

많은 아내는 쾌락을 채우려는 목적도 있으나 다분히 정략적이었습니다. 왕은 많은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으며, 여기에는 양보하지 말아야 할 신앙적 정체성도 포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미 큰 교훈을 던져주는 사례들에서 증명됩니다. 솔로몬의 수많은 정략결혼은 물론이고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은 가장 악한 사례입니다. 왕으로 인해 국가 전체가 배교와 타락으로 물들었습니다.

 

⑶ 지나친 재산(17b)

 

셋째 금지는 많은 은금의 축적이다. 과도한 부는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업적을 성취했다는 망상에 빠지게 한다. 물욕에 사로잡힌 왕은 더 많은 재물을 축적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 심혈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러한 왕의 모습은 솔로몬과 이후의 여러 왕들에게서 발견되는데, 이스라엘에서 왕은 학정을 통해 백성들을 갈취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왕의 규례 왕의 의무(18-20)

왕의 의무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신명기는 단 한 가지만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가 되는 일, 그것이 이스라엘 왕의 가장 큰 의무입니다. 행함이 아니라 존재를 요구하시는 것은 노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으로 하나님과 깊은 사귐 속에 있는 것,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무는 없습니다.

 

18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20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18-20)

 

마지막으로 왕의 중요한 의무가 강론됩니다. 숱한 왕의 의무가 나열될 수 있지만, 신명기의 왕의 규례는 오직 한 가지의 의무만 부여합니다.

 

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연구(18-19)

 

하나님의 말씀 독서와 연구입니다. 왕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왕의 의무 조항들이 하나님의 율법서 안에 다 들어있음을 의미합니다. 흥미롭게도 왕의 규례에는 왕의 외교 전술, 인재 등용, 국가 조직의 운용 등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왕에게 불필요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왕에게 가장 중요한 통치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왕은 ‘율법서의 등사본’을 항상 옆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이 등사본은 히브리어 문장으로 볼 때 왕 자신이 제사장이 소지한 원본을 책에 베껴 기록한 책을 의미 합니다. ‘신명기’(Deuteronomy)라는 제목의 기원이 된 이 토라의 등사본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그것을 신명기의 율법 부분, 더 유력하게는 신명기 전체로 추정합니다. 어쩌면 앞선 모세의 책들을 포함한 토라(오경) 전체일 수도 있습니다. 이 등사본을 왕은 항상 옆에 두고, 읽어야 하는데, 원문의 의미는 ‘그의 곁에 두고’이며, 따라서 그것은 왕의 ‘휴대품’으로 어디서나 소지하고 다녀야 함을 암시합니다. 이 말의 취지는 항상 율법서를 소리 내어 읽고 연구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⑵ 하나님 말씀을 통한 축복(20)

 

① 좌우로 치우치지 않음(20a)

 

② 안정이 보장된 왕권(20b)

 


이스라엘의 왕은 세상의 왕처럼 권력이 왕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수요해선 안 될 것을 소유하고, 남용해선 안 될 것을 남용할 때, 그 끝이 어떠한지 예를 들지 않아도 매일 접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왕이 되려고 하다가 위태로운 왕으로 전략하지 않도록 지도자를 위해,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에 검열을 받아야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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