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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5-01)


공동체를 위한 제반 법규

신명기 25장 1-19절


종종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신앙과 생활을 분리하려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간혹 교회 안에서는 충실한 모습인데, 세상에서는 지탄받는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참다운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과 생활을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공동체가 더불어 잘 살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공동체의 제반 법규들의 마지막 묶음들이 나열됩니다. 먼저 죄를 범한 사람을 매로 다스리는 태형에서 형제애를 고려한 적절한 형벌 기준을 제시하고, 타작을 할 때는 일하는 소를 베려하는 권면이 주어집니다. 공동체의 기반인 각 가문의 혈통이 존속되도록 계대결혼법이 설명되고, 싸움 중 외간 남자의 음낭을 잡는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 여인에 대한 처벌법이 등장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제반 법규(7)(1-4)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무리 법을 어긴 자라 할지라도 공동체는 죄를 미워해야지 사람까지 과도하게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범죄자의 권리와 존엄을 보장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과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배워야 합니다.

 

1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2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3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4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1-4)

 

재판장은 악인과 선인을 공정하고 명확하게 재판해야 했습니다. 재판장들에게는 철저한 사법 정의가 요구되었습니다. 태형을 집행할 경우에는 40대 넘게 때리지 말아야 합니다. 일하는 소에게는 망을 씌우지 말아야 합니다.  

 

⑴ 지나친 태형 금지(1-3)

 

민간에서 심각한 시비나 다툼이 생기면 재판이 열리고 사건을 조사해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때 유죄이면 사안에 따라 재판관은 태형을 선고하였습니다. 태형은 주로 채찍질이며 때로는 곤장질로 실행되었습니다.

앞서 자신의 아내를 모함한 사람은 태형에 처해진다는 법을 살핀 적 있습니다(22:18). 이 태형에 해당하는 죄의 종류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법정에서 사안 별로 결정하였을 것입니다(1).

죄질에 따른 태형의 횟수가 법정에서 결정되면 재판장 앞에서 즉시 실행되었는데, 재판장은 판결이 내려진 태장의 숫자대로 형벌이 집행되는지도 감독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40대로 제한하는데, 실제로 미드라쉬는 39대까지만 집행하도록 권했습니다. 이는 죄인에 대한 인권적 배려 때문입니다. 비록 그는 범죄자지만 여전히 존중받아야할 동족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은 인간에 대한 존엄을 표시하는 마지막 선을 설정해준 것입니다(3).

 

⑵ 일하는 소를 위한 배려(4)

 

인간에 대한 존엄을 지켜준 율법의 정신은 가축에 대한 배려로 이어집니다. 율법은 곡식을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도록 명령합니다. 소나 나귀와 같은 힘센 가축이 타작에 이용되었는데, 곡식 단을 깔아놓고 소가 발로 밟게 하거나 어떤 기구를 끌어서 낟알을 털어냈습니다. 이때 가축은 일을 하다가 배가 고프면 곡식을 먹었는데, 농부는 곡식을 아끼거나 일을 빨리 끝낼 목적으로 소가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입에 망을 씌우는 일을 해선 안 되었습니다. 이 법령은 신약에서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위한 생계 지원의 근거로 두 차례 인용됩니다(고린도전서 9:9; 디모데전서 5:18)

 

성경에서 죄인에게 그 죄 값을 정당하게 물을 것을 요구합니다. 지나친 관용을 베풀다보면, 본인만 아니라 공동체 내에 윤리의식이 약화되어지고 도덕적 해이해져 망칠 수 있습니다. 형벌을 가할 때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범죄자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무죄한 자를 정죄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심판에 대한 공정성을 기해야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제반 법규(8)(5-10)

‘취수혼’은 남편이 상속자 없이 죽으면 남은 형제 중에서 그 아내와 결혼해 재산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제도입니다. 미망인이 아들을 낳지 못한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하고, 땅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가족을 돌보아야 합니다.

 

5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 하노라 하면 9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 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5-10)

 

현대인들에게는 조금 의아한 법이지만,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근동에서는 형이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게 하고 첫 아들을 죽은 형의 아들로 삼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언약 공동체는 후손이 잘 이어지도록 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⑴ 계대결혼(5-10)

 

언약 공동체의 가족들은 대대손손 후손이 이어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문의 가족 중에는 간혹 아들을 낳지 못해 대가 끊길 위험이 있는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대개 형제들은 가문의 땅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만일 형제 중 하나가 죽었는데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면 형제들이 미망인을 아내로 맞아 애를 낳은 뒤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의 가문이 이어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형사취수 제도인데, 형제를 넘어 삼촌과 친족까지도 이런 결혼이 가능하므로 ‘계대결혼 제도’라고 부르는 게 더 타당합니다.

5절의 ‘아들이 없거든’을 70인경과 미드라쉬는 딸을 포함한 ‘자녀’로 간주합니다. 민수기 27장과 36장에서 슬로브핫의 딸들의 사례를 통해 딸에게도 아버지의 땅에 대한 상속권이 있다는 법령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법을 따라 그 형제가 만일 딸이라도 있으면 일단 땅의 상속이 가능했고, 혈통의 보존은 고인이 된 형제의 아내가 아닌 딸의 계대결혼을 통해 충분히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딸은 민수기 36장에서 마련된 법을 따라 아버지의 땅을 가문 내에 보존하기 위해 가문 내의 남자와 결혼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당장에 그 홀로된 미망인과 형제들에 의한 계대결혼이 필요하진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 형제가 전혀 자녀 없이 사망했을 경우입니다. 이때는 현재의 규정을 따릅니다. 죽은 자의 아내에는 약혼녀도 포함됩니다. 약혼도 신부 값을 지불했기 때문에 부부로서의 법적 효력이 발생했습니다. 홀로된 아내는 다른 남자와 재혼해선 안 되며, 죽은 남편의 형제들 중 한 명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해야 했습니다(5).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면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 그 가 문의 대가 이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형제의 사망 직후 일단 집안 회의를 통해 합법적으로 형제들 중에서 죽은 형제의 대를 이어줄 사람이 결정되면, 현재의 신명기 계대결혼법이 적용되지만, 그 외의 미망인 형수/제수와의 자의적인 결혼 시도는 레위기 법에 따라 중형으로 다스려졌습니다.

만일 계대결혼의 책임이 있는 사람이 여러 핑계를 내세우며 계대결혼을 거부하면, 그 죽은 형제의 아내는 재판에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형제들이 존재했다면, 가족회의를 통해 연장자 순서를 따라 한 명을 결정했을 것인데, 현재의 상황은 단 한 명도 자처해서 그 의무를 지 겠다는 사람이 없는 경우입니다. 이때 역시 성문에서 장로들의 관장 아래 재판이 열렸고, 공식적으로 그 사람, 혹은 형제들 모두가 계대결혼의 포기를 선언하면 그 결정은 일단 존중되었습니다.

다만 그 형제의 아내가 그 사람들에게서 신발을 벗기고,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어 모욕과 수치심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집안은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는 부끄러운 별명이 붙어 다녔습니다. 신발을 벗기는 일은 아마도 더는 그 여인이 그 가문과 상관없다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명예의 상실을 가리키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만일 형제 중 아무도 계대결혼의 의무를 지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율법은 그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레위기 25장에 의하면 그 의무를 진 가족과 친척의 법위와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⑴ 그의 형제들, 2) 그의 삼촌, ⑶ 그의 사촌, ⑷ 그의 대가족의 근족(레위기 18:6, 41-42)까지 포함합니다. 가족 내에서 형제들 중 누군가 그 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장 가까운 친척들부터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어야 합니다. 자손들이 신앙의 가문을 이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혈통이 이어질 수 있도록 신앙을 계대(繼代)를 이루는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제반 법규(9)(11-19)

모든 경제적인 고통에는 영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도덕적 가치로 제어하지 않으면 강자 독식의 파괴적인 사회가 됩니다. 이기적 자유는 경제 활동을 속임수와 협잡(挾雜)으로 변질시킵니다. 교회는 맘몬의 노예가 된 사회를 향해 예언자적인 메시지를 나눠야 합니다.

 

11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 한 사람의 아내가 그 치는 자의 손에서 그의 남편을 구하려 하여 가까이 가서 손을 벌려 그 사람의 음낭을 잡거든 12너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릴 것이고 네 눈이 그를 불쌍히 여기지 말지니라 13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14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15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16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17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9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11-19)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남편을 도우려고 부적절한 행동을 한 여인에 대한 처벌 규정이 제시됩니다. 이어서 공정한 상거래를 위해 무게가 같은 저울추, 크기가 같은 되를 둘 것을 권면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말렉 진멸 명령이 나옵니다. 과거에 아말렉이 뒤에 처진 이스라엘 사람들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⑴ 싸움 중 외간 남자의 음낭을 움킨 아내(11-12)

 

이 법령 역시 전후 문맥과 이질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형제들에 의한 계대결혼을 통해 자손이 이어진다는 법령과 한 남자의 음낭을 상해하여 자손이 끊어지게 할 위험이 있는 현재의 사례는 서로 느슨하게 연관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녀의 불미스런 행위는 남자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고, 또한 자칫 생식기를 다쳐서 후손을 못 볼 수 있게 만드는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 해석가들은 문자적으로 그 여인의 손을 잘랐다고 보지 않습니다. 손의 가치에 따라 벌금을 내야 한다고 해석합니다.

 

⑵ 공정한 저울추(13-16)

 

공정한 상거래는 한 사회의 안정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현재의 법은 정직한 상거래를 위한 양심적인 저울추와 됫박을 사용할 것을 명령합니다. 저울추는 돌로 만든 것이었고, 됫박은 사실은 항아리로서 에바 단위의 양에 맞추어 제작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두 종류의 저울추 사용법은 이렇습니다. 받을 때는 큰 저울추를 사용하고, 줄 때는 작은 저울추를 사용합니다(아모스 8:5).

 

⑶ 지워야 할 아말렉에 대한 기억(17-19)

 

모세의 긴 율법 강론은 이제 아말렉에 대한 저주와 더불어 일단 막을 내리고, 이어서 그 땅에 들어가 누릴 순종에 따른 축복과 불순종에 따른 저주를 선포하는 장황한 연설이 새로 재개됩니다.

아말렉에 대한 저주가 연설의 말미에 놓인 이유는 그들이 지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을 가장 잔인하고 야비하게 공격했던 민족이기 때문입니다(18). 모세의 의도는 연설 마지막에 가장 역겨운 민족을 끄집어냄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에게 순종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는지 모릅니다.

민수기 24장의 발람의 저주에서 아말렉은 ‘민족들 중의 으뜸’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민수기 24:20). 아말렉은 여호와의 ‘대대의 대적’입니다(출애굽기 17:16). 실제로 민수기에서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강력한 대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정탐꾼들에게 공포심을 주어 가나안 진입을 포기하게 만들었으며(민 13:29; 14:25), 그들과의 두 번째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패배한 적이 있습니다(민수기 14:45). 발람은 이 아말렉에 대한 멸망을 선포한 바 있습니다(민수기 24:20). 현재의 모압 평지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없애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법을 지키지 않고, 가진 자들이나 권력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사회 구조를 방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윤택해지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축복을 누립니다. 그들의 비극은 자신의 지난날을 잊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변의 가난한 자들을 보지 못합니다. 공감은 단지 감정적인 느낌만을 가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공감이란 불의에 밀려나간 사람들에 대한 올바른 파악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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