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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4-02)

 


공동체를 위한 제반 규칙

신명기 24장 10-22절


교회가 공동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성도들 간에 참된 사귐이 있고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유무상통의 교회는 돌봄과 나눔의 원형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반영하는 실체적인 생태계를 만드는 곳입니다.

 

모세오경은 다양한 약자 보호법을 마련합니다. 자비로운 추수법은 대표적입니다(출 23:10-11; 레 25:22; 25:4-7; 신 24:24). 곡식을 거둘 때는 가난한 사람들이 식량을 삼도록 발의 모퉁이는 낫질을 해선 안 되며 바닥에 떨어진 이삭을 내버려둬야 합니다. 칠 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는 땅이 스스로 내는 소산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들짐승이 마음껏 즐기도록 내버려둬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베려(10-16)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존중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이 유지되는 일에 중대한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을 향한 사랑과 배려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특별히 청년들과 다음 세대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10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11너는 밖에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12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13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14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15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16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10-16)

 

가나안 땅에서 입성했을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지라도 기근과 가난한 자들이 생길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 사람들을 위해 말씀하십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이 땅에 현실일 뿐입니다.

 

⑴ 가난한 자에게 금지된 담보물(10-13)

 

6절에 이어 전당물에 대한 규례가 추가로 설명됩니다. 채권자는 돈이나 씨앗, 혹은 식량을 꾸어줬을 때, 채무자의 집에 무단으로 들어가 물건을 담보물로 가지고 나올 수 없습니다. 채권자가 주인 행세를 하며 빚진 자의 집에 침입하는 것은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한 모독 행위입니다.

채권자는 채무자가 물건을 밖으로 들고 나와 건네주도록 최대한 배려해야 합니다. 12절의 지침은 채무자가 극히 가난한 사람인 경우입니다. 출애굽기 22:26-27에서도 동일한 법이 발견됩니다. 그 사람에게서 담보물을 일단 취했다가 해가 지면 돌려줘야 합니다. 이 담보물은 ‘가지고 잘 수 있는’ 물건이므로 옷입니다. 이 겉옷은 잠을 잘 때 덮는 중요한 물건입니다. 여벌의 옷이 있을 만큼 넉넉한 사람이 그 웃을 가져간다면, 덮고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12) 자비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옷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유일한 덮을 것이니 해 질 때에는 돌려주어야 했으며, 채권자는 아침에 다시 그 옷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미드라쉬가 교훈하는 대로 이 옷 역시 단순히 그 외 여러 가지 생필품을 대표하는 물건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22:26은 채무자가 옷을 돌려받지 못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그 탄원을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채권자가 가난한 자에게 큰 자비심을 베푼다면, 하나님께서 그 의로운 행동을 꼭 기억하실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자신들을 배려해주는 채권자들을 축복했습니다(13). 이러한 약속과 경고는 하나님께서 힘없는 자들의 궁극적인 후견인이 되신다는 신념에 의존합니다.

 

⑵ 금지된 임금 체불(14-16)

 

언약 공동체는 극히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인 품꾼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비천하고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입니다. 마태복음 2장의 품꾼 비유는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되는데, 그들은 하루 일당으로 삶을 연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형제이든 거류민이든, 차별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선 안 됩니다. 비천한 일용직 노동자에 대한 ‘학대하다’라는 동사의 사용은 얼마나 그 행동이 잔인하고 비인간적 인지를 느끼게 합니다. 그는 ‘품삯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일당은 일한 그의 날에, 그의 품삯을 지급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날의 식량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문구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날 ‘해가 그의 위에서 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입니다. 품삯을 받지 못한 암울한 상황에서 해가 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처지가 잘 묘사된 표현입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며 간절히 도움을 청할 것입니다. 그 호소가 하나님께 상달될 것이고, 그 가혹한 고용주를 하나님은 문책하실 것입니다(15).

16절은 죄에 대한 사법 처리의 원론적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법 역시 문맥을 깨트리는 이질적인 요소로 보이나, 앞부분의 죄의 문책과 분명한 연관이 있는 징벌의 원칙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약자를 보살피지 않고 인명을 경시하며 생명마저 서슴없이 앗아가는 포악한 범죄 행위들, 결국 언약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이러한 중대한 죄를 하나님이 엄중히 물으십니다.

각 사람은 각자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고대 중동에서는 연좌제가 보편적이었습니다. 가족은 곧 자신의 살붙이라는 개념에 따라 가족 내 한 식구의 범죄는 모든 식구의 범죄로 간주되어, 다른 식구가 대신 처벌을 받았습니다. 예컨대, 함무라비 법전에 의하면 짓고 있던 건물이 무너져 주인집 아들이 죽으면 그 건축가의 아들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고는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는 이스라엘 사회에 전래되던 속담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예레미야 21:29-30; 에스겔 18:2). 그러나 동시에 일부 다른 관행들도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중기 앗수르 문헌에는 신성모독으로 어떤 여인이 중벌을 받았으나 자녀는 벌을 받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크레이는 이 두 가지 법이 상충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분명 일종의 연좌제, 대를 이은 죄책의 승계와 죄의 공동 책임 사상은 최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는 십계명의 경고이 기도합니다(신명기 5:9). 이것은 각자 자신의 죄로 죽는다는 현재의 원칙과 모순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을 통한 균형을 이룹니다.

죄의 성격상 아비의 죄악은 필연적으로 자녀와 손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결코 아버지의 죄로 인해 필연적 인과응보 적으로 아들과 손자가 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아들들도 결국 아버지와 동일한 길을 걷기 때문에 징벌을 받습니다(레위기 26:40). 구약성경은 죗값의 승계에 대해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합니다. 먼저, 아버지의 죄의 대가인 징벌은 자동적으로 후손에게 가해지지 않습니다. 각 사람은 각자의 죄로 망합니다!

그것을 예레미야(31:29-30)와 에스겔(18:19-22)이 재차 확인해 주었습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망했으나 아들은 아버지와 별개로 바른 길을 갔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고라의 아들들; 아버지 아하스의 길을 떠난 히스기야; 아몬의 아들 요시야 반대로 아버지는 신실했으나 아들은 패역의 길을 간 아들들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동시에 죄의 공동 책임의 원리는 구약 사상의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이 원리는 세대 간에도 적용되어 후손들은 조상의 죄를 고백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레위기 26:40). 당대의 범죄에 대해 이스라엘은 공동 책임의 짐을 졌습니다.

 

공동체에서 고아와 과부와 객과 같이 약한 자들은 희생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 빚이 있으면 함부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이 없는 채무자의 인권과 인격을 존중받아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무를 떠나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직원들에게 불이익을 주어서도 안 됩니다. 직장에서 등위를 나누어서 차별하고 갑질해서도 안 됩니다.

 

약한 자를 위한 배려(17-22)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든 성도들이 부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교회는 부자들만 차고 넘쳐날 것인데, 현실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 때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마음이 필요하고, 곁에 있는 지체들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과 사랑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관계가 돈독해지고 신앙도 정결해질 것입니다.

 

17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18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19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20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21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22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17-22)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와 모자람이 더욱더 생생하게 주님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같이 연약한 자들에게 대한 자비는 추수할 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서 만나는 다른 지체들의 어려움을 도와주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더 설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⑴ 객과 고아, 과부를 위한 배려(17-18)

 

가난한 품꾼에 이어 여러 사회적 약자들을 잘 돌보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객, 고아, 과부는 전형적인 사회적 약자들로서 헐벗었을 뿐 아니라 언제나 착취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참고. 이들을 공동체가 돌보라는 권면은 1:16: 10:18). 특히 객(거류민)과 고아는 재판에서 쉽게 편파 판정의 희생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의로운 언약 공동체에서 이러한 불의한 재판은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공정한 재판에 대해 이미 16:19에서 자세히 논의한 바 있습니다. 경제를 뒷바라지 해줄 남편을 잃은 과부는 의지할 곳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빚을 졌을 때 앞서 가난한 사람들의 사례와 달리 가혹하게 겉옷을 담보물로 가져오는 일마저 금지됩니다.

 

⑵ 자비로운 추수법(19-22)

 

객과 고아 그리고 과부는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이 전혀 없거나 부양해줄 가장이 부재하여 생계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을 위한 자비로운 추수법이 마련되었습니다.

추수기에 논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이삭줍기가 허용되었으며, 포도원에서는 주인이 수확하고 남은 포도를 따 먹을 수 있었습니다. 동일한 법이 레위기 19:9-10과 23:22에도 나옵니다. 만일 밭에서 보리나 밀 한 단(한 뭇)을 두고 왔다면, 가난한 사람들 몫으로 남겨두도록 권합니다. 레위기에서는 추수하면서 밭에 흘린 이삭들과 네 모퉁이도 낫질하지 말고 남겨두라 합니다. 아마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에 남아 있는 감람나무(올리브) 열매도 막대기를 이용해 따긴 했지만(20), 그것을 과일로 먹지는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밭주인은 밀과 보리의 이삭까지 훑어가선 안 되며, 포도원 주인도 남아 있는 포도열매까지 샅샅이 거두어선 안 됩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했습니다. 룻과 나오미를 돌본 보아스처럼 주인은 밭에 이삭을 넉넉히 남겨둘 뿐 아니라, 낫질을 하지 않는 모퉁이 구역을 넓게 산정하며, 가지에 많은 포도송이를 남겨두는 자비심을 품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자비로운 추수법은 안식년에는 밭과 과수원에서 저절로 자란 것은 그들 몫으로 남겨두라는 명령에서도 발견됩니다(출애굽기 23:10-11; 레위기 25:2-7).

 

이렇게 아량을 베풀고 살아야할 이유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2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합당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객과 과부와 고아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셨고 추수도 하게 해셨습니다.


매튜 아놀드는 ‘불평등은 탐욕을 채워줌으로써 해악을 끼치며, 약자에게는 비참하게 하고 위축시킴으로써 해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동물의 세계처럼 약육강식의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처럼 공정한 경쟁이 이뤄질 수 있는 곳이 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이제 은혜를 나누는 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와 불우한 이웃들을 섬기며 배려하는 성도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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