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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7-02)

 


이스라엘 왕에 대한 규례

신명기 17장 8-13절


전직 대통령을 둘러싼 '다스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공방이 있습니다. 이러한 공공연한 질문에 교회는 얼마나 자유릅니까? 세상을 향해 '교회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정확히 대답할 수 있습니까? 대부분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가면, 하나님의 것인데도, 교단법을 어기며 가족에게 세습하고, 사고파는 일들이 있습니다. 물질도 하나님의 것이라면서 마음대로 유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지금 당신이 소유한 권력, 지위, 생명, 물질 등은 누구의 것입니가? 본문은 세움을 받은 지도자의 품격을 가르쳐줍니다.

 

재판관의 책무를 다른 모세의 강론은 왕의 규례로 이어집니다. 신명기의 왕의 규례는 모든 고대 제국의 왕 제도와 왕권 사상과 비교해 볼 때 혁명적인 사상입니다. 이 규례는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제도권 장처를 마련하지 많으며, 오히려 왕의 권리를 제한하고 지능을 축소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직접 싸우시며, 더 높은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늘 왕의 신하로서 지상의 왕 노릇을 해야 합니다.

 

왕의 규례: 왕의 자격(14-15)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은 여호와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하는 자보다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여야 합니다. 인간의 야망을 성취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여야 합니다. 또한 왕은 형제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세워야 합니다.

 

14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15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14-15)

 

신명기는 왕의 규례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왕의 자격, 둘째, 왕의 금기, 셋째, 왕의 의무입니다. 특이하게도 여기에는 왕의 권한과 특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런 것들을 최대한 견제하고 있습니다.

 

⑴ 왕의 왕립(14)

 

더구나 왕권은 특정인이 스스로 권력을 차지해서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14,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백성들에 의해 선택될 수 있었습니다(14). 이것이 이방의 왕정과 가장 다른 점입니다. 하늘 왕만으로 충분한 이스라엘에게 인간 왕은 불필요하며, 지상의 왕권 자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도가 아닙니다. 지상 왕권이 하늘 왕권의 통제 하에 있을 때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⑵ 왕의 자격(15)

 

우선 왕의 자격은 두 가지입니다(15). 그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를 성소로 택하셨고, 특정한 ‘인물’을 왕으로 택하십니다. 물론 형식과 절차는 선지자들을 통해 예고되고 기름 부어 세워지는 방식을 취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둘째, 그는 ‘네 형제 중에서’, 곧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동료이스라엘 백성을 ‘네 형제’라고 표현하는 것은 신명기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심지어 왕이 될 사람도 네 형제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동등한 신하의 자격을 가졌으며, 아무도 절대 권력자로 백성들 위에 군림해선 안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네 형제 중에서’라는 표현은 왕이 태생적으로 정해지고 특정한 권력가의 집안에서 선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으로 세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국인 왕이 허용되지 않는 이유는 기존 사회 질서와 체제의 안정성을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그가 언약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폐쇄적 순혈주의를 고수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언약 백성의 신앙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이방인이 왕이 된다면, 타국 종교와 신들의 유입은 불가피할 것입니다.

 

왕의 규례 : 왕의 금기(16-17)

이스라엘의 왕이 왕으로서 제 역할을 감당하려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세상의 왕들의 왕의 권력을 차지하고 유지하기 위해 동원하는 것들을 이스라엘 왕은 넘봐서 안 됩니다. 상식적인 수준의 통치와 권력 행사 자체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16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16-17)

 

왕의 자격에 이어 왕에게 명령된 몇 가지 금기 사항이 나열됩니다. 첫째, 많은 말을 두지 말 것; 둘째, 많은 아내를 두지 말 것; 셋째, 재산을 축적하지 말 것. 이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돈, 성, 권력에 대한 구약관 제약입니다. 왕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을 갖습니다(권력).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나라의 곳간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돈). 그리고 그는 원하는 대로 수많은 아내와 첩을 거느릴 수 있습니다(성).

 

⑴ 지나친 권력(16)

 

물론 고대 제국의 권력가들이 많은 아내를 둔 이유가 외교적 전략에 따른 측면이 많지만(솔로몬의 경우), 동시에 권력가의 본능에 따른 무차별적인 축첩 행위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방 여자와의 통혼은 종교적 타락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세 기준을 가장 극단적으로 위반한 왕이 솔로몬입니다.

왕은 많은 말을 소유해선 안 됩니다. 고대 이집트와 중동 지역에서 말은 기병대와 병거용으로 키웠습니다. 기병은 말을 타고 싸우는 군인을 말하고 병거는 말이 끄는 군사용 수레를 일컫습니다. 말을 많이 보유할수록 군사력이 강했으며, 제국은 경쟁적으로 말을 키우고 수입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왕이 군사력을 지나치게 강화하는 것은 불신의 표시합니다. 20:1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이러한 신학적 확신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여 시편 기자도 이사야도 이집트의 말과 병거를 의지하는 불신앙을 비난합니다(시편 20:7; 이사야 31:1; 36:6). 유비무환의 태세를 갖추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주요 말수출 국가였으며, 팔레스타인의 말들은 대부분 이집트에서 수입되었습니다. 따라서 왕의 규례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말을 얻으려고 사람을 이집트로 보내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16). 이러한 금지는 이어지는 과거의 약속에 의해 강화됩니다.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라.’ 이 진술은 경고라기보다는 출애굽 사건 당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임을 시사 합니다(출 14:13,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이미 이집트보다 더 크신 이가 그들의 파라오를 굴복시키고 구출해내셨습니다. 만일 그 이집트로 돌아가 그들을 의지하여 스스로를 안전케 하려 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큰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광야 40년 동안 수차례 이집트를 그리워하거나 노골적으로 우리가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동일한 말을 쏟아내면서 하나님께 반항하곤 했습니다(민수기 11:5; 14:3; 20:4-5; 21:4). 왕이 말을 수입하기 위해 이집트에 의존하는 것은 역사적 불신앙의 반복일 뿐입니다.

 

⑵ 지나친 아내(17a)

 

둘째 금지는 끊는 아내입니다. 이것을 왕의 일부일처 의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쿰란 문헌은 왕의 아내를 한 명으로 제한하는 반면, 미드라쉬는 18명으로 제한합니다. 이 원칙이 당대의 왕들에게 일부일처를 강제하진 않았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조의 결혼 규례인 일부일처를 ‘지향’하고 있음은 인식해야 한다.

많은 아내는 쾌락을 채우려는 목적도 있으나 다분히 정략적이었습니다. 왕은 많은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으며, 여기에는 양보하지 말아야 할 신앙적 정체성도 포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미 큰 교훈을 던져주는 사례들에서 증명됩니다. 솔로몬의 수많은 정략결혼은 물론이고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은 가장 악한 사례입니다. 왕으로 인해 국가 전체가 배교와 타락으로 물들었습니다.

 

⑶ 지나친 재산(17b)

 

셋째 금지는 많은 은금의 축적이다. 과도한 부는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업적을 성취했다는 망상에 빠지게 한다. 물욕에 사로잡힌 왕은 더 많은 재물을 축적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 심혈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러한 왕의 모습은 솔로몬과 이후의 여러 왕들에게서 발견되는데, 이스라엘에서 왕은 학정을 통해 백성들을 갈취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왕의 규례 왕의 의무(18-20)

왕의 의무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신명기는 단 한 가지만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가 되는 일, 그것이 이스라엘 왕의 가장 큰 의무입니다. 행함이 아니라 존재를 요구하시는 것은 노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으로 하나님과 깊은 사귐 속에 있는 것,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무는 없습니다.

 

18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20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18-20)

 

마지막으로 왕의 중요한 의무가 강론됩니다. 숱한 왕의 의무가 나열될 수 있지만, 신명기의 왕의 규례는 오직 한 가지의 의무만 부여합니다.

 

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연구(18-19)

 

하나님의 말씀 독서와 연구입니다. 왕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왕의 의무 조항들이 하나님의 율법서 안에 다 들어있음을 의미합니다. 흥미롭게도 왕의 규례에는 왕의 외교 전술, 인재 등용, 국가 조직의 운용 등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왕에게 불필요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왕에게 가장 중요한 통치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왕은 ‘율법서의 등사본’을 항상 옆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이 등사본은 히브리어 문장으로 볼 때 왕 자신이 제사장이 소지한 원본을 책에 베껴 기록한 책을 의미 합니다. ‘신명기’(Deuteronomy)라는 제목의 기원이 된 이 토라의 등사본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그것을 신명기의 율법 부분, 더 유력하게는 신명기 전체로 추정합니다. 어쩌면 앞선 모세의 책들을 포함한 토라(오경) 전체일 수도 있습니다. 이 등사본을 왕은 항상 옆에 두고, 읽어야 하는데, 원문의 의미는 ‘그의 곁에 두고’이며, 따라서 그것은 왕의 ‘휴대품’으로 어디서나 소지하고 다녀야 함을 암시합니다. 이 말의 취지는 항상 율법서를 소리 내어 읽고 연구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⑵ 하나님 말씀을 통한 축복(20)

 

① 좌우로 치우치지 않음(20a)

 

② 안정이 보장된 왕권(20b)

 


이스라엘의 왕은 세상의 왕처럼 권력이 왕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수요해선 안 될 것을 소유하고, 남용해선 안 될 것을 남용할 때, 그 끝이 어떠한지 예를 들지 않아도 매일 접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왕이 되려고 하다가 위태로운 왕으로 전략하지 않도록 지도자를 위해,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에 검열을 받아야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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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7-01)


참된 신앙을 위한 공정한 재판장

신명기 16장 18절-17장 7절


중세 시대에 ‘흑사병(黑死病)’이 발병할 때, 유럽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는 무서운 전염병이었습니다. 이 ‘흑사병’은 ‘페스트(pest)’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흑사병’과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흑사병에 걸린 사람을 격리시키는 것입니다. 병에 걸려 죽은 시체는 성 밖에서 불태우고, 환자의 옷이나 집까지도 태워 없애야 했습니다. 만약 이렇게 환자와 환자가 쓰던 물건을 격리하지 않으면 병균이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서 죄악은 무서운 흑사병과 같습니다. 우리 가운데 악을 제하지 않으면, 그 악이 온 무리를 병들게 하여 멸망의 길로 가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죄악을 징벌하는 것을 ‘권징(勸懲)’이라고 합니다. 현대 교회는 권징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권징이 사라진 만큼 성도들은 신앙이 은혜스러운 것이 아니라 점점 신앙의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16:16-18:22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의 자격과 의무에 대한 규정들입니다. 그들을 이끌고 다스리는 네 직책(재판관, 왕, 제사장, 장로)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장로가 누락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이고 관례적인 직책이기 때문이거나 혹은 18절의 ‘지도자’가 장로직의 별칭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견제를 받고 하나님의 권위 아래 복종하며 공동체를 섬겨애 했습니다.

 

공정한 재판을 하라(18-20)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에게 두 가지 책임을 스스로 부여하십니다. 하나는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이요(provider), 다른 하나는 그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는 일입니다(protector). 또한 강자와 권력자들로부터 약자들을 공정한 재판을 통해서 정의와 공의를 지키십니다.

 

18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19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20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18-20)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3대 절기(유월절, 초막절, 칠칠절)를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판할 때, 불의한 일을 쫓지 말 것을 말하며(18-20), 그리고 우상을 세우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를 잘 지킨다고 할지라도 사회정의 구현이 없으면 이스라엘의 신정국가로서 근간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재판을 책임지는 재판장과 지도자가 언급됩니다. ‘재판장’은 ‘사사’로도 일컫는데, 사사기에서 이들의 정치적 군사적 활동을 관찰할 수 있으며, 이들의 1차 임무는 사법적 지도 및 각종 소송들을 공정하고 현명하게 판정하는 일입니다. ‘지도자’는 1:15에서 언급한 대로 장로들 중에 세워진 관료들일 수 있습니다. 17:9에서는 백성들의 재판에 이 두 직책만 아니라 제사장도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재판관의 자격과 자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나, 지혜와 지식이 풍부하고, 많은 경험을 통해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들로서 공동체 지도자들에 의해 세워졌을 것입니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세 원칙이 제시됩니다. 첫째, 법정에서 판사가 사실 관계를 왜곡하여 불법적 판결을 내려선 안 됩니다. 둘째, 봐주기 재판이나 편파적 판결은 곤란합니다. 가난하다고 불쌍히 여기거나 부자라고 편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여론에 떠밀린 재판도 곤란합니다(출 23:2-3; 레 19:15). 근거 없는 소문이나 유언비어, 악담에 현혹되어서도 안 됩니다.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은 여론을 일으켜 다수결의 원칙을 악용하기도 하니 조심해야 합니다. 셋째, 재판관은 불법적인 뇌물을 수수하여 공의로운 판정을 뒤집는 일을 해선 안 됩니다(출애굽기 23:8), 뇌물은 증인과 재판장 모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율법은 재판의 공정성을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출애굽기 23:3,6-8; 레위기 19:15,35-36; 신명기 16:18-19, 25:1). 판결의 공정성은 인종과 신분, 외모, 귀천, 친분 등에 의해 훼손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외국인에 대한 사법적 차별이 엄히 금지되고, 권력과 돈의 힘이나 인간관계가 재판을 왜곡해선 안 됩니다. 한 사회에서 사법적 정의가 공동체의 질서와 평화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재판관은 사회의 질서나 정의를 세울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따라서 재판관은 내외적으로 닥쳐오는 어떠한 정신적 물리적 유혹이나 압력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진실을 밝히고 동의의 실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상의 금지와 가증한 제물(6:21-17:1)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어울리는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정하신 방식대로, 정하신 것을 드리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불법 제단과 우상을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나아와 경배할 분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으로 경외해야 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21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곁에 어떤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22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1흠이나 악질이 있는 소와 양은 아무것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6:21-7:1)

 

재판관의 공정한 책무에 대한 강론을 한 뒤 우상의 금지와 가증한 제물이라는 언뜻 보기에 전혀 이질적인 주제가 갑자기 끼어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법령 선포 후 처벌 규정을 설명하는 신명기의 논리 전개에 잘 부합합니다. 예를 들어, 12.2-13:1은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곳’에서의 합법적 예배를 명령하고 다른 곳에 서의 불법적 예배를 금지한 후 13:2-19에서 이를 위반한 죄에 대한 처벌 규정을 제시합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16:21-17:1이 우상숭배와 흠이 있는 제물을 금지한 뒤 17:2-7은 이에 대한 처벌 사례를 해설한 것입니다.

이 단락은 이렇게 해서 직전의 공정한 재판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16:21-17:1은 합당한 예배라는 한 주제로 묶어야 합니다. 먼저 앞서 강조했던 불법적 제단과 우상의 금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에 자신들을 위한 여호와의 제단을 쌓을 수 있는데, 이때 그 제단 주변을 이방 양식으로 꾸며서는 안 됩니다. 이방제단의 아세라상이 여호와의 제단 곁에 유입되어선 안 됩니다. 이것은 목상이거나 심어둔 나무일 수 있는데 버섯과 보호를 상징하는 특별한 나무와 우상숭배는 밀접히 결부되어 있습니다. 원래 나무 아래를 예배 처소로 삼는 것 자체는 사악하지 않았습니다. 족장들도 자주 나무 아래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2:6; 13:18, 18:1; 35:8). 그러나 이런 장소는 언제나 이방 신과 결부될 가능성이 컸기에 이제 전면 금지됩니다. ‘주상’ 또한 ‘우상’의 돌기둥이었습니다. 족장들이 종종 돌기둥을 세워 여호와를 예배하고 기념했던 사례를 볼 때, 이것 역시 그 자체로는 원래 악하지 않았으나 언제든 쉽게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금지됩니다. 이어서 흠이 있거나 병든 짐승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이 금지됩니다. 그것은 여호와께 가증한(역겨운)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2:22-24에는 제물로 합당치 않은 짐승의 흠과 질병들이 열두 가지로 목록화 되어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총독에게 흠이 있고 병든 가축을 선물하는 것이 악하다면, 하물며 여호와 하나님께는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이겠느냐고 백성들을 꾸짖습니다(말라기 1:8).

 

정말로 사회가 정의 구현되지 못하고 점점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더 힘들게 만드는 사회가 된다면, 국가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는 국가가 약자들 편에서 보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중대한 재판 사례들(17:2-13)

재판은 공의롭게 할 뿐만 아니라 엄정하게 해야 합니다. 특히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몰래 하는 경우라도 들키면 면밀하게 조사하여 단호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사적인 일로 치부하지 말고 그 영향력이 펴지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희 가운데에 어떤 남자나 여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3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령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4그것이 네게 알려지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조사해 볼지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5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 6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7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8네 성중에서 서로 피를 흘렸거나 다투었거나 구타하였거나 서로 간에 고소하여 네가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일어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 9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 나아가서 물으라 그리하면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지를 네게 가르치리니 10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의 뜻대로 네가 행하되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대로 삼가 행할 것이니 11곧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율법의 뜻대로, 그들이 네게 말하는 판결대로 행할 것이요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을 어겨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 것이니라 12사람이 만일 무법하게 행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에게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13그리하면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무법하게 행하지 아니하리라(2-13)

 

 

⑴ 우상숭배자들의 조사와 형벌(2-7)

 

우상숭배와 악한 제물을 금하는 명령에 이어 우상숭배 범죄에 대한 구체적인 징벌 절차가 설명됩니다. 이것은 앞선 공정한 재판의 주제와 관련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또 앞서 동료와 가족, 그리고 성읍 전체를 거짓 신으로 유혹하고 선동하는 사람들과 그 유혹에 넘어간 성읍에 대한 처벌 규정을(13장) 보완하는 지침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어떤 사람이 은밀히 우상숭배하다 발각된 사례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언제든지 우상, 특히 가나안 족속들에게 인기 있었던 일월성신에 이끌릴 위험이 컸습니다. 후대에 일월성신 숭배는 이스라엘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습니다(열왕기하 17:16; 그 외 열왕기하 21:3,5; 23:4,역대상 23:5; 대하 33:3; 느헤미야 9:6; 아모스 5:26; 스바냐 1:5). 특별히 해와 달과 별은 낡고 부서지고 없어지는 다른 모든 자연물과 달리 항구적인 불변의 존재로 하늘에 자리 잡고 있기에, 인간은 쉽게 그것이 신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바다와 높은 산, 큰 강과 거대한 바위를 신으로 섬기거나 신령한 존재로 간주하고 제물을 바쳐 숭배하곤 했습니다. 이런 우상숭배 행위는 그 성격상 지극히 개인적으로 은밀히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악한 언약파기 행위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사법 당국이 나서 소문의 진상을 조사해야 했습니다. 만일 그 일이 사실로 드러나면 즉결 심판해야 합니다. 당국은 그를 체포하여 성문 밖으로 끌어내 모든 남녀가 돌을 던져 사형시켜야 합니다(5). 범죄 사실을 확증하기 위한 증인 규정이 덧붙여 주어집니다. 최소한 증인 둘, 더 낫게는 셋이 확보되면 유죄가 확정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증언은 증거 능력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왜 증인이 둘이나 셋인지 알 수 없으나 필자의 견해로 두 사람의 증인이면 유죄가 확정되나 두 사람의 견해가 모호하게 나뉠 때는 추가적인 증인이 요구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증인들이 먼저 그 우상 숭배자에게 돌을 던져 사형을 집행하고, 이어서 백성들이 투석형에 동참했습니다.

 

⑵ 민감한 소송의 재판 절차(8-13)

 

공정한 재판의 절차를 위한 둘째의 사례는 판결이 매우 어려운 사안이 발생했을 경우입니다. ‘서로 피를 흘림’, ‘다툼’, ‘구타’로 번역된 히브리어들은 매우 모호합니다. 피의 문제는 ‘살인’일 수 있고, 다툼은 재산 다툼과 같은 법적인 소송, 구타는 폭행 사건일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하등 법원에서 처리하기 어려우면 고등 법원으로 가져갔는데(1, 2심의 개념이 아니다), 그곳은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 즉 성소 법정이었습니다. 거기서 재판관과 제사장이 함께 이 소송 건을 최종 판결했습니다. 법정은 몇 명으로 구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제사장이 재판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운데, 사실 제사장은 고등 교육을 받은 인재로서 충분한 추리력과 판단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떤 특별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제사장이 하나님으로부터 신탁을 받아(예 우림과 둠밈) 최종적인 판결을 내렸던 것으로 보이나, 그 외 제사장의 영적 분별력에 의해 절차를 거친 심사 판정이 내려지기도 했을 것입니다(19:17, 21:5). 이렇게 성소 법정에서 최종적인 판결이 내려지면, 모두가 그 판결을 따라야 합니다(11). 만일 누군가가 그 판결에 불복한다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그 제사장과 재판장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전달한 혹은 제사장의 신적 지혜로 결정된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뇌물수수, 횡령, 직권남용 등 권력자들의 비리 소식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기꺼이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 하나님과 달리,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돈과 권력의 추종자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공평하게 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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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6-01)

 

 


신앙의 이정표인 절기

신명기 16장 1-17절


예배는 성도들에게 주유소와 같아서, 예배를 통해 영적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예배를 실패하면 많은 것을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종종 예배를 방해하는 요소들을 많이 발생하게 합니다. 절대로 예배를 실패시키는 유혹에 빠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더라도 예배에 성공할 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소홀할 때, 타락하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본문에는 현 우리 시대와는 상관없는 듯한 절기 세 가지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1-8), 칠칠절(9-12) 그리고 초막절(13-17)입니다. 이 절기들은 이스라엘의 남자들이라면 해마다 중앙 성소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때를 말합니다. 이 내용은 이미 다른 성경(출 23:14-19;34:18-26;레 23:1-44)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절기
절기 히브리 명칭 날짜
(종교력)
기념 참고 구절
유월절
무교절
חשפ폐사흐
유월절
1월14일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 출 12:1-28;
레 23:5; 신 16:1-8
תוצם 마초트
무교절
1주간
1월15-21일
누룩 없는 떡을 먹음 출 12:15-20;
레 23:6-8
םירוכב비쿠림
맥추절-보리
1월16일 첫 수확한 일을 이삭 한 단을 제단에 바침 레 2:14; 레 23:9-14
칠칠절
=맥추절
=오순절
תובש샤부오트
(맥추절-밀)
3월6일 첫 수확한 밀을 성전에 바침.
초실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
신약의 ‘성령 강림절’
출 23:16; 출 34:22;
레 23:15-21;
민 28:26-31;
신 16:9-12; 행 2:1-4
나팔절 הנשה שאר
로쉬 하샤나
7월1일 신년절(설날)
민간력 1월1일
민 29:1-6; 레 23:23-25
속죄일 םירפכ םוי
욤 킵푸림
7월10일 민족적 대회개의 날 레 16장; 민 29:9-11
장막절
=초막절
=수장절
תוכס
수코트
7월15-21일
(1주간)
출애굽 후 광야의 천막생활을 기념
가을 추수 감사
출 23:16; 출 34:22;
레 23:33-43;
민 29:12-38;
신 16:13-17
הרצע
아차라
7월22일 장막절 주간 다음 날 안식일 레 23:36; 민 29:35-38
수전절 הכונה
하누카
9월25일-10월1일
(1주간)
성전 수복일
(기원전 165년)
요 10:22-23
부림절 םירופ
푸림
12월14일 에스더서에 오는 유대인 구원을 기념 에 9:17-32

 

이스라엘의 첫 해방, 유월절(1-8)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출애굽의 절정은 유월절 밤의 구원입니다. 그날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어린 양의 피의 희생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업신여긴 애굽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영적인 유월절은 항상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은혜로 살기를 구할 때, 오늘도 지켜지고 있습니다.

 

1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유월절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2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소와 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 절 제사를 드리되 3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4그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가운데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네가 첫날 해 질 때에 제사 드린 고기를 밤을 지내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며 5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6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질 때에 유월절 제물을 드리고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 먹고 아침에 네 장막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8너는 엿새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일하지 말지니라(1-8)

 

첫 번째 절기는 음력 1월(아빕 월) 14일의 유월절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원해 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한 봄 추수물인 보리 수확을 축하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유월절 절기는 다른 이름으로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이라고 해서 ‘무교절’이라고 합니다.

 

유대인 사용한 달력으로 1월 10일(현재 3,4월경)에 흠 없고 1년된 수컷의 어린 양을 택하여 14일 해질 무렵에 잡습니다. 이 때 그 피로 집의 문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릅니다. 그런 다음에 양고기는 누룩이 안 들어간 빵(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습니다.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고 먹어야 하는데, 만약 먹다가 남았다면 즉시 불에 태워 없애야 합니다. 유월절의 양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출 12:3-10).

신명기의 유월절 규례는 출애굽기 12장에 있는 유월절 규례와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나타납니다. ⑴ 출애굽기 유월절에서는 각자 처소에서 짐승을 잡아서 거기서 먹으나, 신명기 유월절에서는 성소에 올라와 짐승을 잡아 성소 근처에서 먹습니다. ⑵ 출애굽기 유월절에서는 흠 없는 1년생 숫양이나 숫염소를 잡으나, 신명기에서는 수소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7일 동안 계속해서 누룩 없는 빵(무교병)만 먹어야 하고 마지막 제 7일에는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를 기준으로 유월절 절차를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편의상 도살되는 짐승은 양입니다. ⑴ 각자 집에서 1월 10일에 양을 준비합니다(신명기에서는 성소로 올라감). ⑵ 1월 14일 해 질 때 뼈를 꺾지 않고 잡습니다. ⑶ 양의 피를 우슬초로 문지방과 인방에 바릅니다(신명기에서는 성소에서 잡으므로 불필요). ⑷ 그날 밤 고기를 구워 먹고(머리, 정강이, 내장까지) 무교병과 쓴 나물을 같이 먹음; ⑸ 남은 것은 아침에 소각 ⑹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무교절로 7일간 무교병을 먹고 7일간 성소에서 계속 많은 제사를 바침; ⑺ 1월 15일 첫날 모든 누룩을 집에서 제가 ⑻ 무교절의 첫날(15일)과 마지막 날(21일)은 성회로 안식함; ⑼ 유월절 참여 대상 본국인과 할례 받은 타국인 특별히 유월절에는 출애굽의 긴급함을 상징하는 발효되지 않은 무교병을 먹어야 했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34:25에서 볼 수 있듯이 부폐를 상징하는 누룩은 다른 제물과 섞여서는 안 됩니다.

신명기의 유월절 규례는 ‘지정된 성소’로 가족들이 올라와서 바치며 먹을 것을 명령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합법적인 지방 성소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신명기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에서 귀환한 뒤, 중간기를 거쳐 신약에 이르러 제사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중앙의 예루살렘 성전으로 엄격히 제한되었습니다. 중간기 이후 다수익 기록에 의하면 최소한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는 모든 이스라엘 가족들이 제물을 들고 올라가야 한다는 신명기의 명령에 따라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제물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스의 치밀한 계산과 추론을 살펴보면 3대 절기라 할지라도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했던 것은 아니며, 그 숫자는 최대 12만 명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 대다수가 평상시에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철저히 지키지는 않았을 것이며, 먼 지방과 이국에서 마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올랐을 것입니다.

   

칠칠절(오순절) 규례(9-12)

유월절 이후 7주가 지나서 찾아오는 절기가 오순절입니다. 초실절은 밀의 첫 수학을 기념하고, 오순절은 보리의 첫 수확을 기념합니다. 밀의 첫 수확은 제사장이 바치고, 보리의 첫 수확은 농부들이 바칩니다.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추수할 수 있게 하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절기를 지킵니다.

       

9일곱 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 10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11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12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 지니라(9-12)

 

유월절 이후 7주 후에 칠칠절(오순절)이 옵니다.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일곱 주를’에서 그 첫날은 보리를 첫 수확하는 날인 ‘보리의 초실절’을 의미합니다(레 23:15). 이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은 무교절 기간 내에 들어 있는 초실절을 뜻합니다. 유월절(14일) 다음 날 15일부터 1주일간 무교절인데, 무교절 첫날(15일)은 안식을 하는 날이고(정규 안식일은 아님) 그 안식일 다음날(16일)이 초실절입니다. 이 초실절은 밀의 첫 수확을 기념하는 ‘맥추의 초실절’이 아닌(출 34:22) 보리의 첫 수확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16일)로부터 7주(-49일) 후를 칠칠절오순절, 맥추의 초실절)이라 부릅니다. 초실절에 수확한 밀을 제사장들이 바치고(레 23:15-21: 민 28:16), 칠칠절에는 농부들이 바칩니다. 칠칠절에는 각자 자원의 화목제를 원하는 만큼 바칠 수 있었습니다(10). 보리는 유대인들의 주식이 아니었기에 소규모로 경작되었고, 진정한 봄농사의 추수감사 행사는 칠칠절에 치러졌습니다.

 

초막절 규례(13-15)

초막절은 추수감사절의 성격이 강합니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지키는 절기라서 수장절이라고도 부릅니다. 풍요의 계절에 걸맞게 가장 성대하게 치러집니다. 하지만 가장 부요할 때에 초막을 짓고 지냄으로써 광야 생활을 상기합니다. 특별히 이 때는 사회적 약자들인 노예와 객, 고아와 과부, 레위인들도 함께 즐겼습니다.

 

13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14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1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13-15)

 

초막절은 일곱째 달(제7월) 15일(안식일)부터 22일까지의 8일을 말합니다. 가을의 과일 추수를 축하하기 위한 이 절기를 수장절이라고도 부릅니다(출 23:16; 34:22). 21일까지 1주일 동안은 매일 가을 추수물의 봉헌과 함께 많은 짐승들을 바쳤습니다(레 23:33-44; 민 29:12-16). 그 다음 날인 22일(안식일)은 거룩한 대회(장엄한 성회)로 모여 추수물의 소제와 함께 더욱 많은 짐승들을 바쳤습니다(민 29장 레 23:33-44). 첫날인 15일과 여덟째 날인 22일을 각각 노동이 금지된 성희의 날로 지켰습니다. 이 명절의 이름인 ‘수코트’(חופס)의 의미는 움막이나 오두막, 즉 ‘초막들’입니다. 백성들은 추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뒤에는 이 기간에 임시로 거주할 초막들을 짓고 그곳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과거 어려웠던 조상들의 광야 시대를 회상하기 위함이 분명합니다. 백성들은 가족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인 노비와 객, 고아와 과부, 성중의 레위인들과 함께 여호와 앞에서, 이날을 즐거워했습니다. 이러한 진술 또한 백성들이 지방의 특정한 레위인 도성의 성소에 모여 이날을 즐거워했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주요 세 절기의 성소 순례 의무(16-17)

무엇보다도 절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1년에 세 번 무교절과 칠칠절, 초막절에 성전으로 와서 하나님을 뵈어야 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매주일 예배와 절기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깁니다.

 

16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17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16-17)

 

위에 강론된 세 절기는 모든 남자들이 반드시 올라가서 지켜야 할 국가의 주요 명절입니다. 이때 가족들도 동반했으나 의무 사항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꼭 올라가야 했다. 이때 그들은 빈손으로 성소에 가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힘껏 봉헌을 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수확의 어느 정도를 감사의 제물로 바쳐야 하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랍비들은 형편이 넉넉한 농부에게는 1/40을 제시했고 샴마이학파(the House of Shammai)는 최대 1/30, 평균 1/50, 궁한 경우 1/60로 정했습니다.


구약 백성들에게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고난주관과 부활절, 성탄절, 성령강림절, 매주 돌아오는 주일 등이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와 공급의 은혜,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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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5-01)


모든 것이 여호와께로 왔음을 인정

신명기 15장 1-29절


하나님 나라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의 나라와 가장 분명한 차이가 있다면 이 나라는 안식을 누리는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은 그 안식을 누리고 창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복잡하고 미성숙하고 욕심이 많고, 폭력적이고 냉정하고 미워하기를 잘하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를 쉬게 해주기보다는 불안하게 하고, 자극하고 불편하게 만들기를 잘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나서 우리가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불안해하고 정말하고 낙심한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평화와 안식을 만드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신명기의 모세의 율법 강론은 십계명의 순서를 따라 진행한다고 주장합니다. 앞선 설교가 여호와께만 드리는 예배를 강조하기 위한 1-3계명에 대한 내용이었다면, 15장은 4계명인 ‘안식일’과 관련된 ‘안식년’의 강령입니다. 이어서 종의 해방에 대한 법이 이어지는데, 이는 마찬가지로 ‘쉼’과 결부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면제년의 규례와 목적(1-11)

오늘날 빚으로 인해 당대는 물론 자녀들에게까지 가난과 고통이 대물림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면제의 규례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십니다.

 

1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2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3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4-5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10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11)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노릇을 그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먹고 살기위해 노력한다고 착각에서 벗어나고, 하나님만이 모든 생명의 원천이심을 기억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생명의 원천이심을 기어가는 날, 모든 질서가 바로 잡히는 출발이 됩니다. 계속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할 규례에 대해 설명합니다. 본문은 면제에 대한 규례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⑴ 빚 탕감의 해(1-6)

 

매 7년째가 되면 이웃의 모든 빚을 면제해준 ‘면제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통치하는 방식입니다. 레위기에서는 이것을 ‘안식년’으로 불립니다(레위기 25:58; 참조, 역대하 36:21). 신명기에서는 ‘희년’이 다루어지지 않으나, 레위기 25장은 안식년과 더불어 희년을 상세한 설명과 함께 법제화합니다.

안식년과 희년은 7년 주기로 돌아오는 절기로, 농사를 중단하여 땅을 쉬게 함으로써 자연의 복원력에 따라 논밭과 과수원의 토지가 기력을 회복하게 합니다. 안식년은 7년 주기이고, ‘희년’은 7년을 일곱 번 보낸 뒤 돌아오는 매우 중요한 ‘대안식년’입니다. 레위기 25장의 안식년 법과 달리 신명기의 안식년 법은 빚의 ‘면제, 탕감’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것은 두 책의 역사적, 상황적 배경의 차이 때문이기보다는, 신명기가 레위기의 법과 규정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7년 주기 안식년의 일차적 취지는 땅의 ‘휴경’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신명기의 이 법도 그것을 알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레위기의 안식년과 희년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7년 주기 안식년의 토지 휴경; 50년째 희년에 토지와 주택 무르기; 희년 정신에 입각하여 일상에서 이자 면제, 고리대금 금지; 50년째 희년에 종의 사면, 신명기의 안식년 법에서는 그 해를 ‘면제년’이라 부르며 빚의 전면적 탕감이 핵심인데, 이것이 레위기의 안식년 법에는 빠져 있습니다. 레위기 희년법에서는 50년째 희년에 전면적 종의 사면이 선언되나, 신명기에서는 7년 주기로 개별적인 종의 해방을 규정합니다. 이 7년의 기간은 안식년 주기와 달리 종이 된 시점을 기준으로 7년을 말합니다. 면제년에는 모든 빚을 탕감해주어야 하고, ‘형제에게’ 독촉을 해선 안 됩니다.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의 해로 선언되었기 때문입니다. 면제는 여호와를 위한 것이 아니므로 이 번역은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적으로 몰락한 채무자를 ‘형제’라 표현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언약의 한 가족임을 말해줍니다. 이방인이 진 빚은 면제하지 않아도 되며, 빚을 독촉할 수도 있습니다(3). 파산한 사람에게 빚 독촉을 해선 안 되며, 나아가 면제년에 그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자비심을 베푼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에게 큰 복을 내리실 것이며, 결코 가난하여 빚을 지는 나라가 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⑵ 베풂과 나눔의 해(7-11)

 

하나님의 율법은 파격적인 빚의 탕감을 넘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자비를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가난한 형제를 보면 ‘못된’ 생각을 품고서 자신의 것을 거머쥐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의 필요에 따라 넉넉히 꾸어주어야 합니다. 단순히 구제를 위한 베풂이 아니라 돈이나 물건을 빌려주는 것이지만, 그가 갚을 것이란 확신과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사실상 재정적 손실을 각오하는 행동입니다.

자비를 베풀 때는 이기적인 계산을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면제년이 가까울 때, 누구든 빚을 내주고 싶어 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손을 내미는 그를 ‘악한 눈’, ‘거리는 눈’(ESV), ‘인색한 눈’(TNK: CIB)으로 보면서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이듬해는 면제년이니 거저 주는 마음으로 궁핍한 형제에게 빌려주어야 합니다. 그 형제가 박대를 당하면, 그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몰인정한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될 것입니다. 반대로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이 약속됩니다. 이 땅에서는 가난한 자가 끊이지 않을 것이니 하나님 백성의 자비심도 중단되어선 안 됩니다.

이 11절의 진술은 이 면제년 법을 잘 지키면 ‘그 땅에서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다’라는 약속과 상충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축복받은 공동체에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라는 약속에는 갖가지 이유로 가난한 자가 끊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서로 자비와 선을 행하여 가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백성의 의무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탕감의 규례를 지키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다른 이에 아픔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그 무게를 함께 짊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면제’가 빚진 자에게는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기는 하지만, ‘채권자’에게는 오히려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면제년에 가까울수록 이웃에게 빌려주는 일에 인색해지고 완악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것이 이 희년의 완성입니다. 그분의 은혜 안에서, 우리는 모든 차이를 넘어서서 서로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사랑으로 수고해야 합니다.

 

종의 해방(12-18)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갑질 문화를 넘어서 모두를 형제자매처럼 여긴다면 문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위 고하를 넘어서는 형제의 사랑으로 가정과 직장과 교회 안에서 보살펴갈 때, 세상은 성도들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볼 것입니다.

 

12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13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14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15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 16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17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구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그같이 할지니라(12-17)

 

고대에는 오늘날처럼 무책임한 과소비 때문에 빚을 지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흉년 때문에 많은 가족들을 굶주림에 빠지게 되면서 생활고 빠집니다. 부유한 가정이 열심히 일하던 남편이 갑작스레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머니는 어린 자녀들을 부양한 일이 너무나 힘겨운 생활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빚을 지는 것은 쉽습니다.

종의 해방 규례는 면제년 규례와 함께 묶여 있기에 일부 주석가들은 이 7년째의 종의 사면이 면제년에 실행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출애굽기 또한 7년째의 종의 석방이라는 동일한 법안을 제시합니다(예레미야 34:13-14). 이 종의 해방법은 7년 주기의 공통적 특징으로 인해 면제년법과 함께 묶여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언급된 일곱째 해는 연대 순서상 7년 주기의 ‘면제년’이 아닌,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종이 된 해부터 일곱째 해를 가리킵니다. 그 종이 6년 동안 주인을 섬겼다면, 이 법에 따라 7년째에는 자유롭게 풀려날 수 있습니다. 이때 주인은 그를 빈손으로 보내선 안 되며, 손을 넉넉히 채워서 보내야 합니다. 이는 현대의 퇴직금과 비슷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인은 그를 기쁘게 내보내줘야 합니다. 6년 동안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해 자신의 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종이 주인과 가족들을 사랑하여 종신토록 종으로 머물기를 원한다면(어쩌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자유인이 되길 두려워할 때에도), 주인은 그 종의 귀를 문에 대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종신 노비의 표식을 만들었습니다. 출애굽기 21:5-6에 동일한 법령이 발견되는데, 그 종신 노비가 될 사람을 ‘재판장에게 데려가 그를 문이나 문설주에 대고 송곳으로 뚫어야’ 합니다. 이 문이 성소의 문인지, 개인 저택의 문인지 논란이 있으나, 현재의 신명기 법안에 비추어 볼 때 후자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왜 문에 대고 귀를 꿇는지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으나, 아마 주인집에 영구적으로 소속된다는 상징적 행위로서 종신 노예의 표식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에는 두 종류의 종들이 있었다. 채무로 인한 ‘기간 노예’(7년)와 서약에 의한 ‘종신 노예’입니다. 종신 노예는 자신의 귀를 뚫고 주인에게 서약하는 경우만 해당됩니다. 기간 노예의 해방은 6년 후 7년째이며, 종신 노예는 어쩌면 레위기 25장의 노예 해방법의 적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즉, 희년은 아마 이런 종신 노예들이나 그들의 사후에 가족들에게 주어지는 해방의 기회일 수 있습니다.

 

맏배 짐승의 봉헌(18-23)

자신이 취하는 것들을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만 얻은 줄 생각하여 자신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 것을 드림으로 자신이 얻는 모든 수확물이 하나님 것임을 신앙고백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자신은 나머지로 살아도 자족하며 풍요롭기 때문입니다.

 

18그가 여섯 해 동안에 품꾼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9네 소와 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깎지 말고 20너와 네 가족은 매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을지니라 21그러나 그 짐승이 흠이 있어서 절거나 눈이 멀었거나 무슨 흠이 있으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잡아 드리지 못할지니 22네 성중에서 먹되 부정한 자나 정한 자가 다 같이 먹기를 노루와 사슴을 먹음 같이 할 것이요 23오직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지니라(18-23)

 

안식년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일과 같지만, 면제년과 종의 해방에 대한 법안은 갑자기 가축이 처음 난 새끼에 대한 규정으로 전환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법안은 여기서 보완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안식 및 해방을 위한 면제년 및 종의 사면법과 이 법안이 나란히 배치된 이유는 맏배를 ‘부리지 말고’ 바쳐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는 일을 시키면 안 되고 양/염소는 털을 깎아선 안 됩니다. 출애굽기에 의하면 첫 새끼의 수컷은 8일째에 바쳐진 뒤 제사장 몫으로 돌아갔습니다(출애굽기 22:30).

그러나 신명기의 이 법안에 비추어 볼 때 첫 새끼가 태어날 때마다 성소에 올라가 바친 것이 아니라, 각자 형편대로 날을 잡아 한꺼번에 가지고 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목축을 하는 사람이 첫 새끼가 때어날 때마다 가지고 올라가는 것은 비현실실적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8일 이후에는 언제든 그 맏배를 바칠 수 있었는데, 다만 결코 일을 시키지 않고 털을 깎지 않은 채 잘 보관해 두었다가 한 날에 그것들을 바쳤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그런 배경에서 살피면, 출애굽기의 법안에서는 맏배가 제사장 몫인데, 현재의 본문에서(20 또한 14:23) 여호와 앞에서 가족과 함께 먹으며 즐기라고 한 이유가 이해됩니다. 밑에 들을 가지고 올라가 일부를 제사장과 가족들이 나누어 먹은 뒤 남은 것은 모두 제사장 몫이 되었을 것입니다. 맏배가 만일 절거나 눈이 멀어 흠이 있다면 제물로는 바치지 못하며, 그것은 성 중에서 다른 짐승을 잡아먹듯이 피를 다 쏟은 뒤 이웃과 나누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청지기’라고 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데로 관리하고 원하신 방법대로 써야합니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물질을 가지고 시험을 받습니다. 과도하게 아끼다가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일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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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4-02)


하나님의 구별된 소유

신명기 14장 22-29절


어떤 한 사람이 부흥 집회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헌금하는 시간이 되었지만, 가난해서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을까하고 계속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헌금함이 자신의 앞에 왔습니다. 그는 서슴지 않고 일어서서 헌금함 위에 앉았습니다. 쑥스럽게 웃으면서 ‘나는 하나님께 드릴 돈은 없을 정도로 가난합니다. 드릴 돈은 없지만,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주의 종으로 쓰임을 받길 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선교사 훈련을 받고 훌륭한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모세의 율법 강론은 12장에서 유일하신 여호와께 예배드리기 위해 합법적인 성소에서의 예배와 축제를 먼저 다루고, 13장에서 우상숭배를 근절하기 위한 예방 조치를 무서운 심판의 경고와 더불어 내놓았습니다. 14장은 이렇게 여호와만 섬겨야 하는 백성은 장례 관행과 먹는 음식도 차별화되어야 한다고 설교한 뒤 십일조 문제를 다룹니다.

 

십일조 규례(22-23)

하나님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을 ‘구별된 사람’, 즉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공급을 받고 살아갑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찬양’입니다. 받은 은혜에 제사를 ‘예배’라 합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물질을 ‘헌금’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물질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22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22-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14장 전반부에서는 가나안의 방식과 섞기지 않는 음식 규정을 통해서 거룩한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22절부터는 십일조를 통해서 거룩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십일조를 종교적인 의무로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십일조는 단순한 종교적인 의무만은 아닙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인 온 땅과 만물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레위인과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땅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냈던 십일조를 가지고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었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에서 구별된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각자 해야 할 일을 구별된 사람들이 대신 담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소유가운데 일부인 십일조를 구별하여 자신들의 역할을 대신한 그들을 위해서 십일조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십일조는 의무감에 의해 받치는 것은 아닙니다. 빼앗긴 심정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드려야 했습니다. 왜 십일조를 내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입니까? 여호와께서 그 가나안 땅과 햇볕과 비를 주셨고, 열매를 맺고 수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 날마다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주셨던 다른 표현이고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광야와는 다르게 이스라엘 백성이 수고해서 수확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수고가 있을 때부터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 동안에 하나님의 완전한 공급과는 다르게 자신의 수고로만 얻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살아지기 시작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공급은 사라졌습니다. 자신들이 수고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공급해주시지 않으면 농사를 짓을 수 없습니다. 수확을 할 수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신 것이며 인간의 수고는 매우 작은 것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십일조는 당연히 드린 것으로 단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그 품목도 구체적으로 나열합니다. 매년 논밭과 과수원에서 수확한 추수물, 곧 모든 농산물의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고 권고하십니다. 이는 친히 하나님께서 농사하셨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곡식, 포도주, 기름 우선 곡식은 중동 지역에서 재배되는 보리와 밀이며, 기름은 그해 추수한 올리브 열매를 짠 감람유로서 새 기름입니다.

이것들을 모두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 즉 지정된 성소에 가족들과 가지고 올라가 함께 먹으며 기뻐해야 합니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몸소 배우기 위한 개인과 가족의 교육이기도 했습니다. 가축의 십일조가 누락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레위기 27장에 나옵니다. 농산물의 십일조를 들고 성소에 올라가야 하는데, 언제 올라가야 하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역과 논밭의 상황에 따른 수확기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날짜를 지정하지 않고 각자 성소로 순례를 했을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축제입니다.

성경에서 첫 번째 나오는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나옵니다(창세기 14:18-20). 전쟁에서 승리하며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의 사람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승리를 통해 얻어진 노획물 중에서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닥다리를 보았던 야곱은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서원합니다(창세기 26장).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물질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기쁘게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하나님과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고백일 뿐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으로 드립니다.

 

연약한 성도들이 가장 시험 받기 쉬운 부분이 물질입니다. 십일조는 그들에게 무거운 짐일 될 수 있습니다. 세상 기준은 물질의 다소(多少)에 따라 사람을 평가되어지기 때문에 무조건 움켜지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든 물질이 다 하나님의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 이상까지도 기쁨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성소에서 먼 곳에서 바치는 십일조(24-27)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 나온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림으로 신앙고백합니다. 하나님께 향한 감사를 하나님께 충성한 자들과 함께 나누게 하신 것이 십일조입니다. 오늘 우리의 헌금은 하나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일한 사람들을 잘 섬기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24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27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24-27)

 

십일조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표현이나 형식이 아니라 실천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가진 것을 드려야만할 수 있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렇게 십일조는 겸손한 신앙인 것과 동시에 적극적인 신앙의 실천입니다. 이러한 십일조는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성소에서 멀리 사는 이들에게도 십일조를 지킬 수 있도록 조치해 주셨습니다. 누군가 자신이 사는 곳이 성소에서 멀다면 십일조 물품을 옮기기가 어렵습니다. 필자는 현재 이 ‘택하신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나 특정한 장소에 국한된 성소라고 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성소’는 중앙 성소의 통제를 받는 여호와가 택하신, 지방의 합법적인 성소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자기 마을에서 성소까지 꽤 먼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멀다’의 기준은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어떤 유대 문헌은 3일 길로 제시하지만 근거는 없습니다. 이 역시 본인의 판단에 맡겼을 것입니다.

그해 십일조의 양에 따라 운반이 버겁다고 판단되면 ‘멀다’의 기준이 적용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경우 모든 품목의 십일조를 팔아 ‘은전’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봉헌자는 그 은전을 주머니에 잘 싸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성소’에 올라가야 한다 거기서 그 돈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사서 마음껏 십일조의 축복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구매품목들이 나열됩니다: 소나 양/염소, 포도주나 독주(곡주), 곡식과 포도주(포도 음료) 및 기름과 다른 품목들이 성소 주변에서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돈으로 다시 사는 품목에 소와 양이 있는 것으로 보아(26), 토지 소산물의 십일조는 대표적인 표현일 뿐 십일조 품목에는 정기적으로 바쳐야 할 가축의 십일조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나열된 물품들은 단순히 대표성을 지닌 것들로 보아야 합니다.

봉헌자는 이것들을 십일조 물품으로 구입해 가족과 더불어(또한 레위인들과) 축복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이 십일조 축제의 자리에는 가족들만이 아니라 레위인들도 동참시킬 것을 명령합니다(또한 12:17-19). 이것은 현실적으로 지방에 합법적 제의 중심지가 있었을 것이라는 필자의 ‘복수의 여호와 성소’ 이론을 뒷받침합니다. 십일조는 사제들의 몫이라는 민수기의 십일조 법을 따라 일부를 먹고 즐긴 뒤 남은 모든 십일조 품목은 전부 레위인들의 몫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날에는 자기 재산이 축 나는 날이 아니라 즐겁게 축제를 벌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나눌 수 있는 날이 되라고 하십니다.

 

오늘날도 자신의 소유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내놓은 사람들은 드리면서도 이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마음인지 알 수 있습니다. 헌금을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감사와 찬양할 수 있습니다. 헌금이 더 많은 것을 받는 것, 투자하는 마음으로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받치는 일 자체가 그에게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십일조(28-29)

공동체는 몸과 같이 하나입니다. 공동체는 하나로 연합을 이루어가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안에 연약한 지체가 모른 척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결국 공동체 스스로 병들어 가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물질로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28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 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28-29)

 

하나님께서는 생소한 다른 십일조를 명령하셨습니다. 이 십일조는 7년 주기의 매 3년째마다 특별하게 드립니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십일조와 별개의 십일조가 아닌 동일한 것인데, 3년 주기로 용도가 더 특별했습니다.

이 매 3년의 십일조는 ‘네 성읍에 저장해야’한다고 설명되는데(28), 이것으로 레위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인 객(이방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들을 먹이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을 실천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더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29). 매년 가족들이 즐거워하면 먹던 십일조를 사회적인 약자에게 나누어 먹으면 이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치는 것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우리들도 공동체 안에 사회적인 약자들을 배려하는 십일조를 잘 행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받은 헌금을 반드시 일부를 구별해서 약자들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을 잘 돌아보아 아름답게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십일조의 정신을 잘 실천하면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다른 것으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물질은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답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 ‘십일조’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시이며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사랑할 때, 물질로 사랑을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께 드려야할 것으로 표현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신의 주변에 연약한 이웃을 물질로 섬기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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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4-01)


성민으로서 장례와 음식문화

신명기 14장 1-21절


서구에서 살다가 오신 분들이 우리나라의 음식을 먹는 습성을 보면서 놀랍니다. 그 중에 찌개 문화는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온 식구들이 한 냄비 안에 숟가락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 비위생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점점 위생적으로 개인 국그릇에 나누어 담아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함을 유지하길 원했습니다. 그중에 장례나 음식에서도 거룩한 삶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본문은 이방 민족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구별하는 중대한 두 가지 표지를 다룹니다. 그것은 용모와 음식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몸을 고의로 상해하거나 머리털을 미는 행위를 금지해야 합니다. 또 이방 민족과 차별이 되는 음식의 기준이 마련됩니다. 그들에게는 이방인처럼 아무 것이나 허용되지 않고 규정된 정결한 것만을 먹어야 합니다. 모세는 예배 생활에서 앞 두 장에서 모든 이방 백성들과 구별되어야 할 필요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례규정(1-2)

하나님의 자녀로써 백성들이 사회적 생활에 있어서 거룩성을 지녀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의 관계입니다. 관계가 없다면 지켜야할 계명이나 규칙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1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2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1-2)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몸을 거룩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은 특히 가나안 민족들의 장례 관행을 따라 몸을 스스로 베거나 상처를 내는 행위를 해선 안 되고, 이마 위의 머리털을 밀어서도 안 됩니다(이방 민족의 몸을 학대하는 장례 관습은 다음을 보라. 사 15:2; 22:12; 렘 16:6:41:5; 겔 7:18; 암 8:10 등).

이스라엘 백성도 장례 시 애도의 표시로 어느 정도의 머리털을 밀거나 뜯고 수염을 깎는 관행과 더불어(스 93; 욥 1:20; 렘 7:29),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치는 행위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몸을 베는 것과 가나안 방식으로 이마 위쪽의 머리털을 미는 것은 금지됩니다. 칼과 창으로 몸을 베는 행위는 바알 선지자와 엘리야의 대결에서 볼 수 있듯이 특별한 이방제의에서 신에게 광적인 탄원을 올릴 때 시도되기도 했는데(왕상 18:28), 이스라엘에서는 이렇게 몸을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가 금지됩니다.

 

생명의 원천이며 주인이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경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사단이 손댈 수 없는 “여호와의 성민”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거부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음식 규정(3-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가지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는 하나님의 방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증한 풍속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에서만 구별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장례뿐만 아니라 음식에서도 구별되길 원하셨습니다.

 

3너는 가증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4너희가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 5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름한 사슴과 산 염소와 볼기가 흰 노루와 뿔이 긴 사슴과 산양들이라 6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7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낙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8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시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9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요 10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에게 부정함이니라 11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으려니와 12이런 것은 먹지 못할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13매와 새매와 매의 종류와 14까마귀 종류와 15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16올빼미와 부엉이와 흰 올빼미와 17당아와 올응과 노자와 18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며 19또 날기도 하고 기어다니기도 하는 것은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먹지 말 것이나 20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을지니라 21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스스로 죽은 모든 것은 먹지 말 것이나 그것을 성중에 거류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파는 것은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3-21)

 

음식에 대한 규례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한 태도입니다. 동시에 음식을 대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것을 정체성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음식을 먹는 순간에도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각하고 기억하길 원하십니다.

 

⑴ 육상 동물(3-8)

 

이 음식 강론은 자연을 육상, 공중, 수중의 삼중 영역으로 나눈 뒤, 각 영역별로 허용된 짐승과 금지된 짐승들의 기준과 종류들을 설명합니다. 육상 동물은 갈라진 굽과 새김질이 표준이고, 수중 동물은 지느러미와 비늘이 표준입니다. 그러나 공중 동물은 표준이 주어지지 않고 20가지의 새의 종류가 나열된다. 신명기에서는 레위기 11장에서 상세한 설명과 더불어 금지한 모든 기는 동물들은 반복해서 설명하지 않고, 모두 자동적으로 제외하고 있습니다. 허용된 네 발 달린 육상 동물들, 곧 정결한 가축과 야생 동물들의 이름들이 먼저 나열된 뒤 이들의 공통점인 두 표준이 주어집니다. 갈라진 굽과 새김질. 이어서 이 두 표준 중 하나만 지닌 금지된 네 가지 동물이 나열됩니다: 낙타, 토끼, 사반, 돼지, 사반은 오소리나 너구리로 추정할 뿐 어떤 동물인지 정확하진 않습니다. 현대의 동물학적 관점에서 토끼는 되새김질을 하는 반추동물로 구분되지 않으나, 고대인들의 눈에는 토끼의 먹이 활동의 입놀림이 새김질을 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한계와 지식의 한계 내에서 주어졌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동물은 이스라엘의 자연 환경에서 표준의 경계선에 놓인 동물로 특히 유의해야 했을 것입니다. 메리 더글러스(M. Douglas)는 경계선에 있는 동물들이 특별히 부정한 것으로 금지된 것처럼, 이스라엘은 이방과의 혼합을 일으키는 결혼이 금지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더글러스에 의하면 이방인보다 더 위험 스러운 사람들은 혼합된 혈통을 가진 사마리아인들입니다. 마지막에 거론된 돼지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대표적인 부정한 동물로, 신약에서도 개와 더불어 가장 더럽게 여겨졌습니다(마 8장 막 5장 눅 8장 벧후 2:22).

 

 ⑵ 수중 동물(9-10절)

 

수중 동물들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만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이것 들이 없는 모든 수중 동물이 금지되는데, 마찬가지로 둘 중 하나만 없어도 금지되는 적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허용된 어류는 우리에게 친숙한 잉어, 붕어, 숭어와 같은 어종이며 비늘이 없는 복어나 홍어, 장어, 상어 등은 금지됩니다. 그 외 금지되는 것은 지느러미와 비늘이 전혀 없는 해삼, 멍게, 낙지, 조개와 같은 종류들로서 모두 바닥에서 기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금지된 수중 동물들은 먹어선 안 되며, 그 사체도 접촉을 피해야 합니다.

 

⑶ 공중 동물(11-20)

 

새의 경우는 어떠한 신체적-생태적 특징에 의한 표준이 주어지지 않고, 다만 20종류의 새가 금지 목록에 포함됩니다. 이 금지된 새들 중 약 2/3는 정체가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대의 역본들을 비롯한 번역 성경마다 상이한 조류들이 나열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조류들이 육식과 잡식 조류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것 들이 금지된 이유는 사체를 뜯어먹고 피를 흘려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특징 때문이라고 확증할 수 있습니다. 19절의 날기도 하고 기어 다니는 것은 메뚜기 종류와 곤충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레위기 11:20-23에서는 네 종류의 메뚜기는 식용 가능한 것들로 허용되었습니다: 메뚜기: 베짱이 ; 귀뚜라미; 팥중이.

모든 곤충은 날개가 있지만 기어 다니기 때문에 부정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기는 곤충들 중에 뛰는 다리가 있는 위의 네 종류의 메뚜기는 먹도록 허용되는데, 아마도 뛰는 뒷다리를 가진 특성 때문에 기는 범주에서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⑷ 죽은 짐승의 금지와 고기 조리법(21절)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자연사한 짐승의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중에 체류하는 이방인인 객(게르 일종의 영주권자)에게 주거나 이방인들에게 팔수는 있습니다. 신명기는 스스로 죽은 짐승을 레위기 17:15은 그런 짐승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짐승의 사체가 음식으로 허용되지 않은 이유는 피 때문입니다. 쏟아내지 않은 피가 체내에 남아 있기 때문에 그 고기를 먹으면 결국 피도 함께 먹는 셈입니다. 이런 짐승을 섭취하면 옷을 빨고 목욕을 한 뒤 저녁까지 부정한 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레위기 17:15). 만일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 사람 역시 그것에 대해 중 대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레위기 17:16). 마지막으로 염소 새끼를 요리할 때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는 규정이 주어집니다. 이 금지 규정은 출애굽기 23:19과 34:26에 처음 나타납니다. ‘염소 새끼’는 아마도 다수의 번역본과 어근에 근거해서 염소 새끼보다는 짐승의 '새끼'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이것은 동물에 대한 존중이라는 인도주의적 취지에서 만들어 진법으로 이해됩니다.

음식법과 관련하여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러한 정-부정의 동물을 구분한 기준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보건-건강학적 설명입니다. 먹도록 허용된 것은 몸에 좋고 금지된 것은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금지된 짐승들이 건강에 탁월한 것들이 많고 반대로 허용된 짐승들에도 기생충이 많이 숙주하고 있거나 영양학적으로 뒤진 것들이 많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신약은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을 완전히 없앴습니다. 이런 폐지는 예수(막 7:14-20)와 사도들(행 10:9-16)의 가르침을 볼 때 명백합니다. 그외 상징적 해석과 이방 제의 기원설을 비롯하여, 가장 중요하게는 60년대에 제기된 후 지금까지 널리 수용되는 메리 더글러스(M. Douglas)의 인류학적 해석 등이 있는데,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는 생명죽음 이론입니다. 즉, 생명과 죽음이 정결과 부정 결을 가르는 두 축입니다. 생명에 속하거나 가까운 것은 정결하고 죽음에 속하거나 가까운 것은 부정합니다. 이것은 레위기 11-15장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육상 동물들은 대부분 뜯어서 피를 내 죽음을 일으키는 육식 동물(사자, 호랑이)이거나 청소 동물(하이에나)이므로 우선적으로 배제된 다음, 허용된 가축소/양/염쇠에서 신체 기준이 마련되어 자연계에 확대 적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공중동물도 모두 짐승의 사체를 뜯거나 피를 내는 먹이 활동을 하는 조류들입니다. 지표면을 배로 기는 것들은 짐승의 사체나 뼈가 지표면에 널브러져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수중 동물도 바닥에서 기는 것들은 같은 이유가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생명-죽음의 두 축은 레위기 12-15장에서도 가장 잘 적용된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로 살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모든 삶에서 특히 음식을 먹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 역시 끝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하길 원하십니다. 수많은 것들이 혼란스럽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존재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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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3-01)

   


우상숭배로 인한 대처하는 방법

신명기 13장 1-18절


개를 키우면서 안 사실인데, 개 사료가 같은 무게일지라도 성분에 따라 몇 배의 가격 차이가 납니다. 그 차이는 조단백질이라는 성분이 많고 적었습니다. 좋은 성분들로만 가득 담겨 있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한 가지만은 포함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독약(毒藥) 성분입니다. 독약 성분이 0.001%만 들어 있어도 그 사료를 먹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에게도 강력한 독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단의 교훈입니다. 이단의 교훈은 맛보는 순간 죽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모세의 연설을 가운데서 우상숭배와 관련한 세 가지 사례들에 대한 경고와 조치를 다룹니다. 첫째, 이교도의 길로 유혹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꿈꾸는 자들에 대한 경고와 그들의 사법적 처리, 둘째, 가족과 친구들이 우상숭배로 이끌 때의 대처와 유혹자의 사법적 처리, 셋째, 성읍 전체가 유혹자의 선동에 이끌려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그 성읍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상숭배로 이끈 자들 근절(根絶)(1-5)

성도들은 타인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죄 짓는 것도 도둑질하는 것도 심지어는 살인자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하나는 이단의 교훈입니다. 이단의 교훈이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은 과감히 대적해야 합니다.

 

1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 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3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4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5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1-5)

 

본 장에서 모세는 우상의 발본색원을 목표로 합니다. 이스라엘은 사회를 영적으로 어지럽히는 거짓 선지자와 꿈꾸는 자를 색출해야 합니다. 이들은 ‘영적 권위자들’로 사람들을 쉽게 현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⑴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출현(1-3)

 

구약의 참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그분의 미래 계획을 미리 알리고 경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 등장하는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이며, 또한 ‘꿈꾸는 자’는 꿈을 통해 징조를 전하는 전문적인 점술가를 말합니다. 그들이 전문적인 선지자와 나란히 배치되고 있고, 그들은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사를 일으키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등장은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집니다(1). 이들은 평소에 활동하던 하나님의 선지자라기보다 어느 날 나타나서 이적과 기사로 주목을 끕니다. 신명기의 특징적인 어구 ‘이적과 기사’는 앞서 항상 하나님께만 사용되었으며(4:34;6:22;7:19;11:3), 백성들에게 이적과 기사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징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용어들은 거짓 선지자와 점술가에게 사용됩니다. 성경에서 ‘이적과 기사’는 언제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백성을 타락으로 유혹하는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분명히 그들의 이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악령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때 백성들은 그들의 정체가 거짓 선동가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결정적으로 그들이 ‘우리가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자’고 말할 때 그들은 즉시 돌아서야 합니다. 모세는 그 신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이라 말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폄하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너무 잘 아십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신들은 알 수 없는 신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수도 없이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증명하셨으나, 거짓 신들은 한 번도 검증되지 않은 신들입니다. 이 순간 그들의 믿음이 시험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그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뜻을 다해 사랑하는지 를 이때 판가름하실 것입니다(3).

 

⑵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대처(4-5)

 

이스라엘은 거짓 선지자들을 생각하지 전에 그들은 하나님을 반드시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반드시 지키며, 그의 음성을 반드시 듣고, 그의 반드시 섬기며, 그분을 반드시 매달려야 했습니다. 의식적으로 이 방향으로 헌신하며 사는 백성이라면 영적으로 건강하고 활력이 있어 건강한 몸이 침투하는 세균은 처리하듯 우상숭배의 유혹을 인지하고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그런 거짓 선지자들과 점술가들을 죽이라고 명하십니다(5). 원문은 수동태, 즉 ‘(그런 자들은) 죽임을 당해야 한다’입니다. 이것은 사법적 사형 집행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혐의는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탈시키려 한 것입니다. 여기서 애굽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과 하나님에게서 ‘너를 떠나게 하는’ 선동자 사이에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5). 그들은 백성을 선동하여 여호와를 배반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사형의 중벌로 단죄되어야 하며, 이렇게 하여 공동체로부터 악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에 대한 문제는 18:9-22에서 더 상세히 논의됩니다.

 

우상숭배로 이끄는 가족과 친구의 근절(6-11)

가정과 집안이라는 개인적인 영역에서, 유혹은 더 미묘하고 찾아내기가 힘들입니다. 가까운 관계에서 발생하고 특히 자족의 권위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 본능은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의 배교를 드러내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강력한 부정 조항으로 이러한 본능을 다루어야 합니다.

 

6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7곧 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에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8너는 그를 따르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여기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9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10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 한 자이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 11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같은 악을 다시는 너희 중에서 행하지 못하리라(6-11)

 

우상숭배로 빠질 수 있는 두 번째 위험한 사례는 가족이나 친한 사람이 우상으로 이끌 때입니다. 이것은 ‘영적 권위자들’에 의한 선동보다 더욱 위험한데, 유혹자들과의 깊은 친분 때문입니다. 가족들은 곧 형제와 자녀, 아내가 포함됩니다. 직계 가족들인 형제와 자녀의 밀접한 혈연관계는 말할 것도 없으며, ‘네 품의’ 아내는 다른 집안에서 왔으나 이미 살붙입니다. 한 몸인 아내의 영적 유혹의 위험성은 성경에 여러 사례들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많은 이방 아내들과 아합의 아내 이세벨 등등. 그런데 이 목록에 부모가 빠져 있습니다. 주석가들은 이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데, 아마 자녀와 아내의 경우 가부장의 지위와 권리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나, 그 대상이 부모일 경우에는 자녀가 9절의 명령처럼 직접 부모에게 손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추론컨대 그 자녀는 부모의 영적 이탈로부터 벗어나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다른 가장들에게(예를 들어 삼촌과 같은) 이 사실을 전달하여 부모의 처분을 맡겼을 것입니다. 우리는 고라와 그 일당들이 몰살의 심판을 당할 때, 고라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 피신하여(민 26:10-11), 축복의 반전으로 후대에 성전의 음악을 담당하고 여러 시편을 남기는 등 영적 가문을 새롭게 구축한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대상 9:19, 20:9). 가족 외에 깊은 친분 관계에 있는 사람은 친구와 동료입니다. 사회적으로 친분이 깊은 친구와 동료의 유혹 또한 매우 위험합니다. 살붙이인 가족과 가장 친한 친구가 가만히, 곧 몰래 은밀하게, 우상숭배와 이방 종교의 길로 유혹할 때 뿌리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가족과 아내는 이미 한 살붙이로서 가장 깊은 육적인 친밀성을 지녔는데, 하나님과의 언약에 의한 영적인 친밀성으로 더욱 강하게 결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 내 이방 종교 신봉자의 등장은 이 언약에 의해 맺어진 가족 관계를 깨트릴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유혹자들을 뿌리 뽑으라는 명령으로 인한 큰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십니다. 우상숭배 문제는 가족이라는 인간 사이의 가장 밀접한 관계의 단절마저 요구합니다. 모세는 그들이 소개하는 신들이 어떤 신들이든, 그 땅의 민족들이 섬기는 모든 신들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7절). 살붙이 가족과 가장 친한 친구의 설득이라 할지라도 언약 백성은 결코 그들의 범행을 방관하거나 은닉해선 안 됩니다. 따르다, 듣다, 긍휼히 여기다, 애석히 여기다, 숨기다, 이 일련의 동사들은 선동자와의 친분으로 인한 동정심이 뒤로 갈수록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모세는 오히려 정반대로 증인된 그가 단호하게 가장 먼저 사형 집행에 나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5절과 마찬가지로 언약의 피붙이 가족과 친구를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게 하려 한 그들의 혐의는 용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지 않고 범인을 은닉하다 발각되면 사형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모세는 그를 용서 없이, 원문 그대로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인간적 관계에 연연하지 말고 오히려 증인된 그가 가장 먼저 그에게 손을 대야 합니다. 그 후에 모든 백성들이 그의 사형 집행에 참여해야 합니다. 범인들에 대한 자세한 처벌 절차는 17:2-7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런 우상숭배자와 선동가는 상세한 조사와 두세 사람의 증인을 통해 범행이 확실히 드러나면 남녀를 불문하고 정문으로 끌어내 돌로 쳐서 사형시켜야 합니다. 사형 방법은 투석형입니다. 투석형은 구약에서 중범죄를 위한 가장 대표적인 형벌이며 신명기에서도 여러 차례 나타납니다(신명기 13:10: 17:5; 21:21, 22:21, 24; 투석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21:21을 보라).

 

우상숭배로 넘어간 성읍의 심판(12-18)

신앙생활은 때로는 전쟁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단은 싸워서라도 단호하게 우상을 물리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으로 가득한 애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셨고 승리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영적 전쟁을 치를 것을 권면합니다.

 

1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주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13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14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 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15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가운데에 거주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16또 그 속에서 빼앗아 차지한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다시는 건축되지 아니할 것이라 17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를 그치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사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심 같이 너를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 18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서 정직하게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12-18)

 

세 번째 우상숭배의 문제는 성읍 전체가 유혹자의 주동으로 우상숭배에 연루된 사례입니다. 어떤 불량배가 주민들을 선동하여 우상숭배로 이끌어 성읍을 요란케 합니다. 이 불량자가 영적 지도자인지 정치적 지도자인지 알기 어렵고, 혹은 어떤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신분을 가졌는지 알 수 없으나 현재의 상황은 주동자의 선동에 마을이 이미 우상숭배에 빠진 상태입니다. 위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예방 조치로 그것을 막지 못한 결과인 것입니다. 이런 정황은 14절에서 확인됩니다. 이 소문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퍼지면서 책임자들이 사태의 전말을 조사합니다. 만일 이것 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그 성읍 전체가 진멸되어야 합니다. 보통 가나안 성읍을 정복할 때 사람은 진멸하고 모든 물건을 불사르나 금속류는 성전의 곳간에 바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탈취물을 불사르고 파괴하면서 어떠한 물건도 만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여호수아 6:18-19, 21). 전리품이 일절 허용되지 않는 정확한 기준은 바로 이와 같이 성읍 주민의 집단 배교로 더 이상 희망이 없을 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상과 거짓 신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은 가장 큰 죄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것을 지키기 위해 수고했습니다. 더욱 진리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린 선조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때만큼 상황이 거칠지는 않지만, 못지않은 단호함으로 오직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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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2-02)

 

 


이방인들과는 다른 생활

신명기 12장 20-32절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단순히 예배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생활이 행복합니다. 반대로, 생활이 행복하면 믿음 생활도 은혜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한국 기독교의 보수 교단들은 교회의 영적인 일과 사회의 세속적인 일로 분리했습니다. 그래서 신앙과 생활의 괘리가 생겨서, 본의 아니게 이중적인 생활을 강조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은 잘한 편인데, 세상에서는 지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본문은 일반 도살과 제의 도살의 세부 규정이 마련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지경이 넓어진 후에 이 짐승 도살법을 따라 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그들은 고기를 먹고 싶을 때 원하는 대로 어디에서든 마음껏 즐길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신분의 제한이 없으니 정결한 사람은 물론 부정결한 사람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피를 고기에서 모두 뽑아내 땅에 쏟아야 합니다. 고기를 피째 먹어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 도살의 세부 규정(20-25)

온전한 누림을 위해서는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어떤 공간에서 마음껏 놀면서 서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서로 넘어서는 안 되는 범위와 서로에게 해서는 안 되는 제한들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함을 누리길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그 풍성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규정을 주신 것입니다.

 

20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히신 후에 네 마음에 고기를 먹고자 하여 이르기를 내가 고기를 먹으리라 하면 네가 언제나 마음에 원하는 만큼 고기를 먹을 수 있으리니 21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멀거든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너는 여호와께서 주신 소와 양을 잡아 네 각 성에서 네가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먹되 22정한 자나 부정한 자를 막론하고 노루나 사슴을 먹는 것 같이 먹을 수 있거니와 23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24너는 그것을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으라 25너는 피를 먹지 말라 네가 이같이 여호와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면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누리리라(20-2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이 누릴 것과 금할 것을 알려 주십니다. 본문에서는 제한과 금지를 말하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짐승을 잡아먹는 규례를 언급합니다. 제물이 아닌 식용으로 짐승을 잡는 것을 말합니다.

 

⑴ 도살 장소와 고기의 섭취(20-2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히신 후에 네 마음에 고기를 먹고자 하여 이르기를 내가 고기를 먹으리라 하면 네가 언제나 마음에 원하는 만큼 고기를 먹을 수 있으리니’(20)라고 원하는 만큼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점유한 뒤에 집에서 기른 짐승이든 사냥한 짐승이든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서 ‘정결한 짐승’으로 분류된 모든 짐승을 원하는 대로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21).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즉 지정된 ‘성소’에서 먼 곳에 산다면, 각 성에서 마음껏 소와 양/염소를 도축해서 먹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소가 ‘네게서 멀거든’이라는 표현은 조금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지정된 성소에서 ‘멀다’가 어느 정도 거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문구와 더불어 더 큰 난제가 발생하는데, 이 표현대로라면 지정된 성소에서 먼 곳에서는 일반 도살이 허용되는 반면, 성소 근처의 주민들은 고기를 먹기 위한 일반 도살도 성소에서 실행해야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5절에서 본 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피를 제대로 처리한다면 성소와의 거리와 상관없이 어느 곳에서든 각 성읍과 거처, 들판에서도 짐승을 잡아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런 견해는 신명기 자체가 상호 모순된 명령을 내린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릅니다. 따라서 랍비들의 해석의 전통은(Rabbinic halakhah) ‘네게서 그곳이 멀거든’이라는 말을 15절을 따라 성소 바깥 백성들의 모든 거주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14:24의 동일한 표현은 이것을 지지하지 않으며 실제로 먼 거리를 의미합니다. 한 가지 가능한 견해는 ‘네게서 그곳이 멀거든’이라는 조건절이 27절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말하자면, 만일 성소가 네 거주지에서 다소 멀다면(21), 일반 도살은 명령한 대로 너의 성읍에서 피를 완전히 쏟아낸 다음 마음껏 먹을 수 있으나(21-25), ‘그러나’ 성물과 서원물과 번제물은 너의 성읍이 그 지역의 성소에서 다소 멀더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소’로 가지고 올라가라(26)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백성들은 각자의 처소에서 자신이 기른 가축인 소, 양/염소를 언제든 잡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잡다’는 ‘일반 도살’과 ‘희생 도살’ 모두에서 사용됩니다. 이 ‘일반 도살’을 통해 얻은 고기는 누구나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정한 자나 부정한 자’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레위기 법에 의하면 원래 부정케 된 사람은 성소에 출입할 수 없고, 성소에서 나온 거룩한 고기, 즉 화목제 고기의 식탁에 참여하여 먹을 자격이 없었습니다(레위기 7:19-21).

그러나 일반 도살의 고기는 부정한 사람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21). 또한 그들은 노루나 사슴, 즉 야생의 정결한 짐승도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고 사냥감을 먹을 때처럼 집에서도 가축을 똑같은 방식으로 잡아야 합니다(22; 레위기 17:13). 이것은 신명기가 레위기를 전제로 율법 강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랍비의 전통과 그것을 따르는 밀그롬은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잡아’라는 표현에 당시에 전수되어 온 가축 도살법이 압시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내가 네게 지시한(instructed) 대로’로 해석합니다. 즉, 모세는 당시 조상에게서 전수받은 가축 도살 방법대로 도살하는데, 탈무드에 그것이 다섯 가지 규칙으로 표준화되어 있습니다.

그 기법을 요약하면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아주 날카로운 칼로 짐승의 후두를 신중하면서도 빠르게 찌릅니다. 밀그롬에 의하면 칼날을 정기적으로 꼼꼼하게 검사하는 것 역시 짐승을 배려한 조치입니다.

 

⑵ 피는 먹지 말 것(23-25)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하는 데로 고기를 먹을 수 있었지만, 한 가지만을 금하셨습니다. 23-24절에서 ‘그 피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가축이든 사냥감이든 정결한 짐승들은(레위기 11장, 신명기 14장) 모두 도살해서 먹을 수 있습니다. 다만 피를 명령대로 가축의 몸에서 다 빼서 땅에 쏟고 아마도 레위기에서 명시하듯이 그것을 흙으로 덮어야 합니다(레위기 17:13).

‘피를 먹지 말라’는 경고는 레위기 17장에 여러 번 강조되어 있습니다. 피 섭취를 금지하는 이유는 피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피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동물의 생명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있으며 더 나아가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생명권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동물도 하나님의 소유임으로 인간의 탐욕을 위해 함부로 동물일지라도 학살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환경을 보호하고 동물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행동이라고 하셨습니다(25). 그래서 이 법을 지키면 이스라엘과 그의 후손이 대대손손 형통케 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돌봄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만 극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세워서 다른 피조물에게도 영향을 끼치도록 원하셨습니다.

 

희생 도살의 세부 규정(26-2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원하십니다. 오늘날 인간의 탐욕 때문에 환경이 파괴되고 동물이 학대받고 학살이 자행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전 우주를 통치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 우주를 통치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라면 모든 피조에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모든 생명들을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26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26-28)

 

성경에서 나오는 모세의 열 가지 재앙에 나온 짐승이 또한 애굽의 신들입니다. 그 신들을 점점 정복해 나가는 것이 열 가지 재앙입니다. 이방 민족들은 짐승을 신(神)으로 섬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짐승을 잡는 것은 거룩한 제사장이나 아니면 아주 천한 백정들이나 짐승을 잡았습니다. 어떤 한정된 사람만 짐승을 잡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짐승을 잡아서 식량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도살’과 달리 ‘희생 도살’은 성물과 서원의 제물을 성소에 가지고 올라가듯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택하실 장소’, 곧 ‘성소’에서 실행되어야 합니다. 아마 ‘택하신 곳이 네게서 멀다면’(21)에 연결되어 거리가 멀다 해도 모든 봉헌물은 합법적인 성소로 가져가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소에 희생 제사를 드릴 때 피는 반드시 계단 위에, 부어야 하는데(28), 이것은 불판 위에 피를 붓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제사법에 의하면,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서 제단 주변에 뿌리고 뿔에 바르고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는 속죄제의 피를 제외하고는(레위기 4:6,11,25) 모두 양푼을 들고 제단에 가서 제단 사면 벽에(‘계단 사방에’라고 되어 있으나 벽을 의미함) 끼얹어 뿌립니다(레위기 1:5; 3:2; 7:2). 만일 피를 제단 위의 불판에 붓는다면, 여러 마리의 짐승을 바칠 경우 불이 꺼질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27절은 혼동을 주는 번역입니다. 하반절의 ‘네 제물의 피’가 번제를 의미하는 것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네 제물’은 앞의 ‘번제’와 다른 제사입니다. 더 나은 번역은 ‘다른 희생 짐승의 피’입니다. 레위기 1장에서 번제는 사람이 어떤 것도 먹을 수 없으며 모두 하나님께 태워서 올립니다(다만 가죽은 벗겨서 집례하는 제사장의 수고비로 돌린다). 그 외 다른 제사들은 짐승의 내장을 덮은 기름과 두 콩팥, 그리고 간의 일부를 자른 간엽(간 꺼풀은 오역임)을 제단에 태우고 나머지 고기 부위는 사람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제바흐’는 일차적로 가장 대중적인 제사였던 ‘화목제’로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신명기는 ‘번제와 희생제들’이라는 총칭어법으로 모든 제사를 포괄하여 지칭합니다. 따라서 화목제 외에 속죄제/속건제의 고기 섭취도 포함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화목제는 제사장 몫을 떼어주고(레위기에서는 오른쪽 뒷다리와 가슴이지만 신명기에서는 앞다리와 두 볼과 위로 변경된다) 나머지는 제사자가 가져가서 식구, 친족과 더불어, 아마 큰 짐승인 소의 경우 이웃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역시 동일하게 기름과 내장 일부를 태운 다음 독점적으로 제사장들만 먹었습니다. 다만 제사장 자신의 속죄제와 속건제 짐승의 피를 성소의 본당으로 가져와 향단에 뿌린 경우 그 고기는 반드시 진영 밖에서 태워야 했던 것만은 예외입니다.

 

가나안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29-32)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역겨운 음악과 미술, 또한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부끄러운 일들을 종종 봅니다. 이런 것들마저도 협오하지 말도록 요구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아름다움이란 것을 지나치게 주관화 시켜서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등, 성도들은 이 세상의 어리석은 일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방 종교와 문화에 대한 경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29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30너는 스스로 삼가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걸리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섬겼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31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께서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들의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자기들의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32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29-3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는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사는 방식을 얘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군사나 민족이 아니라 각 지방에 토착화된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 백성들처럼 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황을 마무리하고 가나안에 정착할 것입니다. 그들은 낫선 땅에서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오히려 그것이 현명한 방법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방법을 연구해서 노하우를 전수받는 것이, 그 땅에 빨리 정착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만을 철저히 지킬 것을 말합니다(18).

당시 이전에 가나안 사람들은 지역마다 마을마다 그곳을 수호하고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그 신들을 노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멸절하고 이러한 다른 종교와 문화를 따르지 말라고 촉구하였습니다. 그들의 삶의 양식은 그들이 섬겼던 가증한 신들과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방 종교의 유입을 막기 위한 일반 도살과 희생 도살 문제를 다루던 모세의 연설은 여기서 가나안 신들의 위험성에 대한 직접적인 주제로 되돌아갑니다. 이 주제는 13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청중에게 가나안 신들에게 호기심을 품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둡니다.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보고서 그 풍산을 주관하는 그 땅의 신들, 곧 바알과 아세라에 주목하여 그 신을 탐구해서는 안 됩니다. ‘탐구’는 ‘면밀하게 알아보다’라는 뜻으로 가나안 신들에 매료되어 심취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예배와 신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그 신들을 어떻게 섬겼는고’). 그러나 그것이 백성들의 올무가 될 것입니다. 덫에 걸리면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그 신들을 섬겼습니까? 심지어 그들은 인신 제사, 곧 자녀 희생마저 불사하면서 그 우상들을 섬깁니다. 과연 자녀를 불살라 바치는 것을 기뻐하는 신은 어떤 신입니까? 이것은 여호와께 가증한 일, 혐오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세속적인 생존번식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한 땅이 자신들의 정체성이라고 착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화 되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더럽고 악한 문화가 있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그 땅이 하나님 나라화되길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우리 정체성은 우리들이 어떤 땅에 속해 있는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며 삶의 양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자유를 허락하시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만의 특별한 제안을 두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누구든지 고기를 잡아 먹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는 성소에서만 잡길 원하시고, 피를 먹지 말도록 명하심으로서, 이방 종교의 난잡하고 협오스러운 피의 제사를 들리는 것과 구별되게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이방 종교들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고, 기교하고 비인간적인 제사에 동참하려는 유혹을 경계하라고 경고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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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2-01)

     


택하신 곳에서 드릴 제사

신명기 12장 1-19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고 그분을 따르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있었던 세상의 흔적을 아직도 아쉽다고 남겨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내려놓지 못해서 자신을 왕으로 군림한 부분은 없습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영역들을 발견하고, 그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역사적 회심과 더불어 계명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준엄한 결과인 축복과 저주를 상세히 경고한 다음, 모세는 12장에서 본격적인 율법을 강론하기 시작합니다. 이 강론은 12-26장에 이르는 기나긴 분량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할 ‘규례와 법도’입니다. 모세가 가장 먼저 꺼낸 주체는 십계명의 1,2계명입니다.

 

불법적 성소의 철거(1-3)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야할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은혜로 이스라엘이 선택을 받았지, 절대로 구원의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처럼 은혜로 구원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1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2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3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1-3)

 

하나님께서는 신명기를 통해서 가나안 땅에서 어떠한 생활을 살아야 할지 그 청사진을 보여주십니다. 모세는 이제 그들이 지켜야 할 ‘토라’을 12장을 시작으로 26장까지 장황하게 풀어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그들이 할 일들을 말씀하십니다. 그 땅의 곳곳에 설치된 우상의 제단을 파멸하고 그곳의 각종 우상물, 곧 주상과 아세라 상과 조각 신상들을 부수고 불사르는 일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힘써서 제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땅에서 없애야할 것은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신을 섬겼던 곳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겼던 모습을 철저히 없애길 원하셨습니다. ‘높은 산’과 ‘언덕’ 그리고 ‘무성한 나무 아래’와 같은 이방의 성소와 제단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가나안의 지방 제의 처소들은 대체로 돌이나 벽돌로 지은 건축물이라기보다 옥외에 있는 제의 시설을 의미합니다. 2절의 긴 명령문은 ‘파멸하라’가 가장 앞에 등장하면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3절의 연쇄적인 명령인 ‘헐라’, ‘깨트리라’, ‘불사르라’, ‘찍으라’, ‘멸하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얼마나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에 심으셔서 열방 가운데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되심을 보여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왕이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주인을 섬기는 반역과도 같은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땅에서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전에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흔적도 철저히 제거하므로, 그곳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영역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방신들의 제단들을 비롯하여 그곳에 세워진 주상(돌기둥), 아세라 목상, 조각된 신상들을 부수고 찍어 내고 불살라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우상의 이름들을 지워버려야 하며(3), 5절에서 보듯이, 오직 그 땅에 하나님의 이름만 남아야 합니다. 이것은 뒤에서 논의할 여호와 예배의 ‘중앙 성소화’를 위한 강력한 조치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이 주인 삼고 있는 것들을 ‘헐고’, ‘찍고’, ‘깨뜨리며’ 멸하라고 권면하십니다. 하나님보다 앞선 것들을 다 깨뜨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도록 해야 합니다.

 

합법적 성소의 지정(4-7)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배하는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많은 성취나 높은 직위 그리고 많은 군중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과 배려하고 긍휼히 여기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제사에서도 바로 그 섬기는 모습입니다.

 

4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5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6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7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4-7)

 

이방 민족들은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서 아무 곳이나 아무렇게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분명하게 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바른 예배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상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신 다음 이제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것인가를 말씀하시며, 그들이 제사드릴 것들을 언급하십니다.

 

⑴ 일정한 장소(5)

 

첫째는 일정한 정하신 장소에서 드려야 합니다(5). 하나님께서는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라고 말씀합니다. 이방 민족은 자신의 편의에 따라서 정해진 장소가 아니라 아무 곳이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아무 곳이나 드린 것이 아니라 지정하신 장소에서만 드려야 했습니다.

바른 번역은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곧 자신이 거기 거하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으로 나아가라’(5) 이러한 해석은 ‘자신의 이름을 거기 둔다’와 ‘자신이 거기 거하신다’를 같은 개념으로 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성소에 자신의 이름을 둠으로써 거기에 거하십니다. 어떤 형상이 있는 곳에 신이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법적인 예배 장소를 지정하십니다. 사람들이 지정한 곳은 불법적인 장소이며, 단지 그들이 만든 신들을 섬기는 우상의 신전일 뿐입니다. 모세는 그곳을 단지 여호와께서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이라 부를 뿐 특정한 곳을 적시하지 않습니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 지정된 성소를 예루살렘 성전이 유일한 합법적 성소로 허용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며, 가나안 땅 지방의 몇 곳에 합법적인 여호와의 성소가 허용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자신이 지정한 그 장소, 곧 성소에 자신의 이름을 두며 또한 자신이 거기 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⑵ 일정한 예물(6)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성소에서 바쳐야 할 제물들의 품목을 나열합니다. 그것들은 먼저 희생 제물들이며, 이어서 십일조와 거제, 그리고 서원제와 낙헌제, 또한 소와 양 첫 태생들입니다. 번제와 제물의 정확한 번역은 ‘번제’와 ‘희생제’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것을 ‘번제와 화목제’로 보면서 나중에 레위기에서 신설되는 속죄제와 속건제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앞선 책들의 내용을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이 트인 신명기에서 ‘번제와 희생제’는 모든 희생 짐승의 제물들을 가리키는 총칭어법(merism)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견해는 이어지는 품목들에서 별도로 ‘서원제와 낙헌 예물(낙헌제)’이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지지를 받습니다. 서원 제와 낙헌제는 다름 아닌 화목제의 품목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것들은 공동체의 나눔을 강조하는 신명기에서 특히 중시되는 제사이기 때문에 뒤에 별도로 나열된 것으로 보입니다. 십일조와 거제 또한 지정된 성소에 올라가 바쳐야 합니다. 거제는 사실 손으로 올리는 동작으로 바치는 제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성전에 ‘올려 바치는’ 봉헌물, 곧 자원해서 가져온 것,(출애굽기 25:2)으로 다양한 종류의 봉헌물들이 여기 포함됩니다. 서원제와 낙헌제(혹은 자원제), 곧 ‘네데르’와 ‘네다바’는 레위기에서 세 종류로 구성된 화목제의 품목들에 속합니다(레위기 7:11-21). 서원의 화목제는 서원 기도가 응답된 후 자신이 하나님께 약속한 서원기도가 응답된 후 자신이 하나님께 약속한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바치는 감사의 제물이며(삼상 1장에서 한나가 서원 기도의 응답 후 바친 화목제), 낙헌의 화목제(네다바)는 특별한 감사할 일이 없음에도 순전히 자원해서 바치는 감사의 제물입니다. 여기서는 레위기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찬양/감사’의 화목제인 토다가 빠져 있는데, 토다는 특별히 목숨과 관련된 감사한 일을 경험했을 때 바치는 가장 뜨거운 감사의 제물입니다. 신명기에서는 ‘토다’는 특별히 목숨과 관련된 감사한 일을 경험했을 때 바치는 가장 뜨거운 감사의 제물입니다. 신명기에서는 ‘토다’가 단순히 감사의 화목제인 ‘네다바’에 함께 같은 범주로 묶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와 양/염소의 첫 새끼는 자동으로 하나님의 소유로 분류되어 성전에 바쳐야 했습니다(출애굽기 13:2; 34:19-20).

 

⑶ 일정한 교제(7)

 

셋째는 일정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7)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제물들을 지정된 성소에 가지고 올라가 여호와께 드린 후에 온 가족이 나누어 먹으면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가족들만 아니라 남녀종들과 레위인들과 더불어 이 제물들을 나누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소외된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예배는 사람들의 임의대로 자기 목적과 편의대로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하신 방법대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편의와 목적에 따라 드려지는 것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단 공동체가 같이 모여 드리는 공예배 뿐만 아니라 개인의 예배라고 할 수 있는 기도시간과 말씀 묵상시간도 자기중심적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고 기다리게 하는 ‘인간중심의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합법적인 성소에서의 제사들(8-12)

아무리 화려한 제사이고 웅장한 예배이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다 종교의 제사들을 보면 때로는 헌신적으로 신을 부르고 웅장하게 종교의 위엄을 자랑하는 것에 기가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방법을 따라 제사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합법적인 제사를 지시하고 계십니다.

 

8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9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10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주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너희 주위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주하게 하실 때에 11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12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8-12)

 

모세는 ‘너희 소견대로’ 여호와의 제단이라 불린 곳에서 봉헌물을 바치는 관행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막이 아직 없던 애굽에서 오래도록 그런 전통을 유지해왔던 것입니다.

성막 완성 직후 반포된 레위기는 17장에서 그런 사적인 제단의 불법적 운용을 강력히 금지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레위기 17:14). 그것은 가나안의 거짓 신들과 그들의 우상들을 따라갈 큰 위험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시 한 번 조상들의 오랜 관행을 금지하면서 ‘지정된’ 성소에서만 그런 제물을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위에서 열거한 모든 제물들과 봉헌물들을 ‘각기 소견대’로, 아무데서나 바쳐 선 안 되며, 그 땅의 정복을 완료한 후에는 ‘지정된 성소’에 가지고 올라가야 합니다.

‘너희의 가족이 그것을 즐기라’고 했는데, 12절에서 상세하게 그 가족 범위를 넓힙니다. 아내(암시됨)와 자녀가 동반되어야 하고, 심지어 노비(정확히 는 남종과 여종)와 더불어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들도 참석해야 합니다. 여기서 분명 정중의 레위인의 동석은 이 봉헌물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각 지방의 여호와의 ‘택한 성소’가 있는 레위인의 성읍에서 드려졌을 가능성을 강력히 암시합니다. 어떤 기준으로 각 지방의 어떤 레위인을 동석시켰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매번 봉헌물을 바칠 때마다 전국 48개 도성에 퍼져 사는 레위인들까지 그 먼 거리를 갔다는 것도 비현실적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가까운 택한 성소에서 이 법규를 지켰다고 결론 내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레위인들은(제사장 포함) 성막 봉사라는 특수한 임무를 받은 지파로서 땅을 전혀 할당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생계를 책임져줘야 했습니다(12).

 

오늘날에는 예배는 개인적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항상 ‘예루살렘의 중심’인 ‘교회 중심’으로 예배가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기도원이나 기타 단체를 찾아가서 집회 참석하는 것도 담임 목회자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실수에 빠지는 수가 있습니다.

 

희생 도살과 일반 도살의 구분(13-19)

하나님께 나올 때는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예물을 위한 예물이 아니라 예물에 담긴 믿음을 보시기 위합니다. 성도들이 헌금을 준비할 때 믿음으로 준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신앙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드릴 재물들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13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14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15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복을 따라 각 성에서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축을 잡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나니 곧 정한 자나 부정한 자를 막론하고 노루나 사슴을 먹는 것 같이 먹으려니와 16오직 그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 것이며 17너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과 네 서원을 갚는 예물과 네 낙헌 예물과 네 손의 거제물은 네 각 성에서 먹지 말고 18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19너는 삼가 네 땅에 거주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13-19)

 

소위 일반 도살과 희생 도살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희생 도살은 반드시 ‘택하실 성소’에서 실행되어야 하지만 고기를 먹기 위한 일반 도살은 가축이든 사냥감이든 어느 곳에서든 가능했는데, 피는 반드시 모두 땅에 쏟은 뒤 먹어야 합니다. 일반 도살의 고기는 마음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17-19절은 앞서 강조한 바 성소에서 바치는 각종 봉헌물들을 가족과 레위인들이 함께 나누라는 명령의 반복입니다. 이러한 강조는 나눔을 통한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이 법의 실천이 대단히 중요했음을 시사합니다. 마지막으로 12장이 다른 신의 추종과 우상숭배의 문제를 다루다가 일반 도살과 희생 도살의 문제를 심각히 다루는데, 이는 희생 도살을 지정된 성소로 제한하여 불법한 성소의 우상숭배가 유입되지 못하게 철저히 막기 위함입니다.

 

믿음은 아는 것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을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실천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일단 가나안 족속들이 전통적으로 섬기던 우상 종교가 있습니다. 이 우상들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윤리적 타락해 있었습니다. 이처럼 거짓 종교들은 결국 가정과 사회 그리고 나라까지도 망치는 역할 합니다. 거짓은 아무리 꾸며도 거짓일 뿐입니다. 거짓 종교는 아무리 거룩하게 꾸며도 거짓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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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1-02)

    


축복과 저주를 상징한 산들

신명기 11장 18-32절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 쫓아다닙니다. 성공의 비결을 듣기 위해 강연회나 세미나도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찾아다닙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처럼 하면 성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 한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의 기준을 들으면서,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그들의 성공적인 삶을 분석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어떻게 성공했는지 장단점들을 분석해보고, 장점은 받고 단점은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람들보다 더 성공적인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12장에의 율법 강론에 앞서서 마지막으로 그들 앞에 축복과 저주의 선택지를 내놓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사실 신명기 신학의 요체라 할 수 있습니다. 순종하면 복을 누리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이 역사의 교훈은 많은 용사들과 왕들이 불순종의 길로 이탈함으로써 심판을 받았고, 일부지만 신실한 영웅들과 그를 따른 백성은 신명기가 보장한 복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축복과 저주의 양자택일 앞에 서 있습니다.

 

반복된 쉐마 강론(18-20)

불순종한 자들은 목숨은 부지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참다운 생명은 누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성경의 원리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의지하고서야 참다운 길이 열립니다. 이 원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8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19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20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18-20)

 

위의 말씀은 세 번째 나오는 말씀입니다. 어디든 언제든지 그 말씀을 떠나서 의미 있고 생명 있는 말씀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일한 명령으로 반복하는 이유는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규례와 율법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삶에 모든 역영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고 동행하라는 뜻입니다.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을 향해서 열려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모세는 12장의 본격적인 율법 강론을 위해 서론 부분에서 결론적인 권면을 전합니다. 본문은 6:4-9절의 쉐마 헌장의 반복입니다.

21절에 나오는 새로운 표현인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는 ‘땅 위에 하늘이 있는 날 동안에’ 혹은 ‘땅 위에 하늘이 있는 한’이 가장 적절합니다(ESV, NIV). 이것은 그들이 만일 쉐마의 훈시대로 순종의 삶을 산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에서 세대무궁토록 잘 지낼 것이라는 약속하셨습니다. 쉐마 헌장이 강조하고 또한 신명기 전체에서 모세를 통해 설교되는 신명기의 핵심 주제이자 단어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분의 율법을 순종하여 지키며, 그분의 율법을 순종하여 지키는 자는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한 국가에 속한 국민은 그 나라의 헌법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국민이며 그 분의 법이 곧 그 나라의 ‘헌법’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쉐마 헌장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헌법은 다른 신들의 나라의 헌법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과 애굽의 헌법과 문화적 관행, 즉 그들의 규례와 풍속을 따라선 안 됩니다(레위기 18, 20장). 그들의 문화와 전통은 사악하고 가증하며 사람을 더럽히는 것들입니다(레위기 18:3,30, 20:23).

 

항상 주어진 말씀을 영적으로 자기 체질화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성도들의 주변에 있어 상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시험에 들 때나 힘들 때나 기도할 때 어떤 경우도, 항상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사단은 성도들이 말씀에 무장되어 있을 때 함부로 넘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은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 얻을 땅의 경계(21-25)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찾아할 땅의 경계는 생각보다 넓지 않지 않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힘의 통치가 아니라 사랑의 통치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힘의 나라가 아니라 섬김과 사랑의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차지할 경계를 지정해 주십니다.

 

21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의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 22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의지하면 23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인즉 24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25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21-25)

 

이스라엘이 말씀을 순종하며 산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세세토록 잘 지낼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며 살고 있는 모든 족속들을 모두 쫓아내고 그 땅을 점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더 크고 강한 나라들을 제압할 것이며,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영토의 경계선을 확보할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이라는 표현과 ‘너희가 밟는 모든 땅’이라는 익숙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제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으며 진정한 이스라엘인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영토 개념이 없으며, 이제 영적인 영역, 개념만 있을 뿐입니다. 이 영역은 주권이 행사되는 범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왕이시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왕국의 시민이며 그분의 영토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영적인 ‘땅 밟기’가 필요하지만 실제적인 어떤 이방 종교의 사찰이나 종교 시설에 들어가서, 혹은 이방 종교를 믿는 선교지에서 하는 구약적 개념의 ‘땅 밟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바울도 신약의 전도자들도 그런 행위를 한 적이 없으며 오직 영적인 싸움을 벌이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통치에 맞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영적인 ‘땅 밟기’를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차지할 약속의 땅의 범위가 간단히 설명됩니다(24). 그것은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입니다. 이러한 간략한 묘사로는 정확한 약속의 땅의 경계 설정이 힘듭니다. 이것은 아마도 남쪽 아라바 광야동쪽 레바논; 북쪽 유브라데 강; 서쪽 지중해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1:7에서 모세가 이미 설명한 범위인데 요약하면 현재의 24절과 일치합니다. 북쪽으로 유프라테스 강 상류, 동쪽으로 요단 동편의 길르앗과 레바논 지역, 남쪽은 아라바 광야 너머 아카바 만까지, 동쪽은 지중해 해안 이 화장된 국경선의 약속의 땅의 범위는 이미 출애굽기 23:30-31에서 예고되어 있습니다. 또한 분명 이 국경선은 훗날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성취된 경계선들과 거의 일치합니다. 사실 오경에서 약속의 땅은 두 단계로 나뉘어 설정됩니다. ‘최초의 약속의 땅’과 ‘확대된 약속의 땅’입니다. 애초에 약속의 땅은 단지 요단강 서편이었습니다. 따라서 첫 단계에서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할당된 요단 동편의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민수기 34:1-15에는 이 일차적 약속의 땅인 요단 서편의 경계가 동서남북을 따라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됩니다. 요약하자면, 북쪽으로는 하맛 어귀은 요단강, 남쪽은 가데스 바네아, 그리고 서쪽은 중해 연안입니다. 따라서 요단 동편 땅은 포함되지 않으며 북쪽은 유브라데 강이 아닌 하맛 어귀까지로 제한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장차 약속의 땅의 범위를 확대해서 그들에게 주겠다고 출애굽기 23:30-31에서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을 때까지 내가 그들 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 내가 네 경계를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강까지 정하고 그 땅의 주민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네가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낼지라’ 이 진술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국경이 홍해에서 블레셋 바다(지중해)까지, 광야(아마도 남방 광야)에서 그 강(구약에서 그 강은 유프라테스 강을 말하며 여기서는 그 강의 상류다)까지 이른다는 것으로 신명기의 진술과 일치합니다. 이 국경선은 훗날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성취된 경계선들과 거의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땅을 다 얻을 때까지 대적들을 ‘조금씩 쫓아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애굽기 13:30).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요단 동편은 넓은 의미의 ‘약속의 땅’의 범위에 들어갑니다. 신명기는 현재 이 확대된 약속의 땅의 경계를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땅에 선택이 아니라 이미 약속되어진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약속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선포: 그리심 산과 에발 산(26-32)

땅을 정복하는 일도 믿음으로 얻는 선물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도 그 약속의 땅을 누리는 길이 됩니다. 성도의 성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서 순종할 때, 자연스럽게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26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29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30이 두 산은 요단 강 저쪽 곧 해지는 쪽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 31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할지라 32내가 오늘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26-32)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복을 누릴 것이나 그분의 ‘도’를 떠나 알지도 못하던 그 땅의 신들을 따라간다면, 저주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27-28). 모세는 이 양자택일 앞에서 백성들이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특별한 의식을 진행하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은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반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는 행사입니다. 모세는 이 두 산이 요단 강 저쪽 곧 해 지는 쪽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심 산은 세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산들입니다. 세겜은 현대의 나블루스(Nablus) 동쪽에 소재한 성읍이었는데, 그리심 산은 남쪽, 에발 산은 북쪽에 위치합니다. 구약의 세계에서는 동쪽을 기준으로 오른쪽인 남쪽이 더 선호되는 방향이고, 왼쪽인 북쪽은 열등한 방향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남쪽과 오른편의 그리심 산이 축복 선포의 산, 북쪽과 왼편의 에발 산의 저주 선포의 산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나중에 27장에서 더 구체적인 축복과 저주 선포의 의례 절차를 설명합니다(27:11f). 각 지파는 다음과 같이 자리를 배치해야 합니다. 그리심 산-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 에발 산-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 레위 사람들이 가운데 서서 다양한 금지 계명들을 나열하면서 그것을 어기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하나씩 선언할 때마다 모든 백성은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훗날 여호수아는 아이 성을 정복한 후에 모세의 이 명령을 따라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앞에서 이 의례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성도들의 주변에도 그리심과 에발 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순종하여 축복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그리심 산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불순종해서 저주와 형벌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보고 신앙의 경종을 울려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주셨고, 그 언약에 따라 순종하면 복을 누릴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복을 쫓아가지 않아도 복은 자연스럽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도 이스라엘처럼 끝도 없는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을 만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자라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믿음을 붙들어 주신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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