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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5-02)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

신명기 5장 11-21절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바라볼 때,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보면 얼마나 추악한지를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과는 반대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본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이유입니다. 말씀을 통해 완전한 죄성을 드러내시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출애굽의 능력을 맛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모세는 출애굽 2세들에게 두 번째 고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앞 본문에서는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토라)을 다시 들려준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십계명에서 3-10계명까지를 다룹니다.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 부분은 1-4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 사항들이고, 나머지 부분은 5-10계명은 인간에 대한 의무 사항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상 이 기준을 따라 십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로 요약하셨다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27; 마가복음 12:30; 누가복음 10:27).

 

십계명 : 제3계명과 제4계명(11-15)

율법(토라)의 정신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하나하나가 제각각이 아니라 모두 연결 되어 있습니다. 십계명 중에 하나만 없어도 안 되는 전체가 하나입니다. 굳이 둘로 나눈다면, 하나님에 대한 계명과 사람들에 대한 계명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란 명령으로 요약하셨습니다.

 

11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12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11-15)

 

앞에서 십계명 중 1-2계명을 소개했고, 계속해서 나머지 3-10계명까지를 소개합니다. 잘 알고 있듯이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 1-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하는 명령들입니다.

 

⑴ 제3계명 :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11)

 

여기서 이제 셋째 계명이 선포되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당연한 일지만, 개인의 욕망을 위해 찾고 부르는 망령되이 일컫는 상황이 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함부로 사용되어선 안 된다는 명령입니다.

 

‘망령되이’는 ‘무가치하게’, ‘헛되이’라는 의미이며 ‘이름을 일컫다/부르다’는 문자적으로는 ‘이름을 들어 올리다’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 올리다’는 특히 맹세, 예언, 기도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입술에 갖다 붙이는 행위를 지시할 수 있습니다. 헛된 목적으로 자신의 이익이나 이기심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거나 악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경배와 찬양의 대상이지 인간들의 이용하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특히 맹세와 서약에서 경솔히 사용하거나, 사악한 목적으로 악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레위기 6장).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멋대로’ 부른다는 의미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쩌면 그분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레위기 24:10-14에는 그런 사례가 나옵니다. 애굽인 아버지와 이스라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어떤 혼혈인이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고 모독하는 신성모독 죄를 범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백성들에 의해 투석형으로 죽음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⑵ 제4계명 : ‘안식일을 지키라’(12-15)

 

네 번째 계명은 안식일 준수의 계명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신명기 5장에서는 안식 준수를 출애굽의 구원사건에 연결시킵니다. 안식일을 창조사건의 맥락에서뿐 아니라 구원사건의 맥락으로도 연결하고 확대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준수를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14-15)고 합니다.

 

혼자만 노동하지 않고 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기 집에 거하는 종이나 짐승들까지도 안식할 수 있게 하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안식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 노동의 결과로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일하심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날을 잘 지키고 그날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안식일은 안식일의 주인이 여호와이심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마태복음 12:8; 6:5), 이는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시사합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특히 할 대상은 모든 남녀의 모든 계층과 신분의 사람들, 즉 종과 가축을 포함합니다. 여기에는 종들과 ‘성문 내에’ 장기간 머무는 타국의 거류민도 포함됩니다. 나아가 안식일 준수의 의무는 가축에게도 적용됩니다. 이것은 사실상 인간들이 안식일에 가축을 부리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현재의 십계명은 안식일에 노동을 금하고 쉬라는 명령을 출애굽의 구원 사건에 연결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십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이집트 땅에서 쉼을 얻지 못하고 학대 속에서 중노동에 시달린 노예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그들을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구해내시어 압제로부터 해방하셨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쉼 없이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본받아 기쁘게 노동을 한 뒤 안식일에 쉼을 가져야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출애굽기 20:8-11의 안식일 계명은 안식일 준수의 이유와 배경을 천지창조에 둡니다. 하나님께서 6일 창조 후 7일째 쉬었으니 사람도 이 규칙을 준수해야 합니다. 반면에 신명기 5장의 십계명은 안식일 계명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그것은 안식일 준수를 출애굽의 구원 사건에 결부시킵니다. 모순이 아닙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토대로 안식일 정신을 구원 사역으로 더 확대시킨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억해야 합니다!

헤럴드 맥밀러는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위대한 노동자 보호법’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십계명: 제5-10계명(16-21)

이웃 사랑은 자신의 몸처럼 사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권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려 듭니다. 그런 식으로 진행하다보면, 세상은 약육강식의 판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음을 인정하고, 타인도 자신과 똑같이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놓여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타인을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16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17살인하지 말지니라 18간음하지 말지니라 19도둑질 하지 말지니라 20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21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16-21)

 

십계명 중 처음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었습니다. 이제 나머지 계명, 5-10계명까지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지켜야할 계명들이었습니다. 모세는 다른 계명처럼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⑴ 제5-7계명 : 부모공경, 살인 금지, 간음 금지(16-18)

 

제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인간에 대한 의무 조항들입니다. 인간에 대한 여섯 가지 계명 중에 위의 세 가지를 어기는 행위, 곧 부모에 대한 패역과 살인과 간음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였습니다.

 

① 제5계명 : ‘부모를 공경하라’

먼저 제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모님에게 주신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반대로 부모를 멸시하는 행위는 부모님께 권위를 부여하신 하나님께 대한 반항과 거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경하라’는 ‘무겁게 하다’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21:17의 ‘부모를 저주하는 자를 죽일지니라’는 명령에 나오는 ‘저주하다’ 동사와 대조됩니다. ‘저주하다’는 ‘가볍게 여기다’입니다. 이 두 동사는 효도와 불효에 대한 매우 적절한 히브리식 표현인 셈입니다.

성경은 부모에게 반항하며 구타하고 멸시하는(원문의 의미는 저주보다 ‘멸시’가 더 낫습니다(출애굽기 21:17)) 패륜아는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할 만큼 효도를 크게 강조합니다(출애굽기 21:15,17; 신명기 21:18). 부모를 짓밟는 행위는 곧 부모님께 권위를 부여하신 하나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그런 패륜아에 대한 처형 방법이 신명기 21:18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패륜아는 성읍 모든 사람들이 돌로 죽여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반면에 사람이 부모를 공경하면 큰 복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은 장수의 복인데, 단순히 물리적으로 긴 수명만이 아닌 번영을 누리는 장수를 보장합니다.

 

② 제6계명 : ‘살인하지 말라’

여섯 번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소유인 인간의 생명을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살인에 사용된 동사는 고의적 비고의적 살인 모두에 사용 가능하지만, 도피성을 통한 면책이 가능했던 과실치사가 아닌 고살(故殺)이나 모살(謀殺)입니다. 교묘한 모살이거나 분노를 품고 죽인 고살은 용서의 기회가 주어 지지 않았습니다.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예외적으로 도피성으로 피신이 가능했습니다(신명기 4:42). 살인에는 생명을 훔치는 인신매매와 유괴도 포함될 것입니다. 인신매매 역시 부모에 대한 패역과 간음과 더불어 사형감입니다(출애굽기 21:16). 이런 극악한 인신매매범과 유괴범의 처벌 또한 신명기 24:7에 나오는데, 가장 일반적이었던 회중에 의한 투석형(投石形)이 집행되었습니다.

 

③ 제7계명 : ‘간음하지 말라’

 

일곱 번째 계명은 ‘간음하지 말지니라’는 명령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간음은 결코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치는 사회의 악이었습니다.

 

간음죄는 결혼한 사람에게만 해당합니다. 배우자를 배반한 성적 이탈을 금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말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다른 문화권에서도 유부남이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큰 죄’였습니다(창세기 20:9). 유부남은 물론 요셉을 유혹한 보디발의 아내의 사례와(출애굽기 39장) 민수기 5장의 소위 간음이 의심되는 아내를 시험하는 ‘시죄법’에서 확인되듯이, 이 법은 유부녀에게도 엄격히 적용됩니다.

 

⑵ 제8-10계명 : 도둑질 금지, 거짓말 금지, 탐욕 금지(19-21)

 

마지막 계명들은 도둑질, 거짓말, 그리고 탐욕의 금지입니다. 이 죄들은 오늘날 흔한 죄들이지만, 이 죄들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와해시키는 중대한 범죄들입니다.

 

① 제8계명 : ‘도둑질 하지 말지니라’

여덟 번째 계명은 ‘도둑질 하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도둑질과 거짓말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흔한 범죄 행위일 것입니다. 이런 행위들은 사형에 처할 만큼은 아니지만, 오늘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당시에도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와해시키는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율법은 절도죄를 범한 도둑은 원금에 서너 배를 더하여(즉, 총 네다섯 배) 배상하도록 명령합니다(출애굽기 22:1).

 

② 제9계명 : ‘거짓말하지 말라’

거짓말은 예를 들어 사실을 왜곡하여 소문을 퍼트리거나 위증을 하는 행위(출 23:1),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고 거짓 맹세를 하는 행위입니다(레위기 6:3). 특히 신명기 19:19에서 보겠지만, 재판정에서 위증은 심각히 다루어졌습니다.

 

③ 제10계명 : ‘탐심을 품지 말라’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탐심을 품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탐심은 모든 죄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탐심의 금지 대상들이 목록으로 나열됩니다. 이웃의 아내, 집, 밭과 종들, 가축과 모든 재산입니다. 그 욕심이 도둑질과 강도질, 간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탐욕은 약간 난해한 문제를 내포합니다. 이것은 어떤 행동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내적인 생각에 대한 금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내적 생각을 어떻게 통제하고 처벌할 수 있었습니까? 분명 이 계명이 주어진 이유는 히브리식 사고에서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창세기 2-3장에서 탐욕은 실천으로 옮겨졌습니다. 70인경(LXX)은 현재의 ‘탐내지 말라’를 ‘우크 에피투메세이’로 번역했습니다. 이 동사에서 나온 명사인 에피투미아(욕심)를 사용하면서, 야고보는 욕심이 죄를 잉태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야고보서 1:15). 이것은 마음의 생각이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해줍니다. 따라서 사람은 탐심과 탐욕을 품어서는 안 되며(누가복음 12:15), 탐심은 심지어 우상숭배입니다(에베소서 5:5; 골로새서 3:5). 탐욕을 품는 마음은 첫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품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는 알 수 없기에 처벌이 불가합니다. 물론 이 탐욕의 죄를 처벌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계명의 취지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내적인 충동을 사전에 막으려는 예방적 목적에 있다고 간주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모든 계명을 열 개로 줄이면 십계명이 되고 이것을 다시 둘로 줄이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됩니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것입니다. 단순히 ‘∼하라, ∼하지 말라’를 넘어서 십계명에 각각에 담긴 정신과 의미를 잘 살리고 지켜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멋진 인생을 살아가시길 축복하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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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5-01)

 

 

 


하나님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

신명기 4장 44절-5장 10절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듣고 배워합니다. 배워야할 때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 시간이 많아지면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젊을 때부터 성경을 보고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될 수 있는 데로 한 살이라도 어려서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평생도록 그 말씀을 가까이 하며 말씀으로 빚져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모세의 두 번째 설교가 시작됩니다. 이 설교는 여기 5장에서부터 28장에 이르는 길고 장황한 율법의 선포로 구성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 하는 역사적 회상과 더불어 하나님께 절대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설파한 모세는, 여기서 그들이 지켜야 하는 상세한 율법을 반포하기 시작합니다. 이 ‘율법’은 토라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 그리고 교훈이 반복해서 ‘토라’로 규정됩니다.

 

모세가 율법을 선포한 장소(4:44-49)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히 직접 보고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면, 모든 사람들은 재와 같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람은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할 새로운 창조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모세를 통해 중보자 역할을 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44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은 이러하니라 45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모세가 증언과 규례와 법도를 선포하였으니 46요단 동쪽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그리하였더라 이 땅은 헤스본에 사는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속하였더니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그를 쳐서 멸하고 47그 땅을 기업으로 얻었고 또 바산 왕 옥의 땅을 얻었으니 그 두 사람은 아모리 족속의 왕으로서 요단 이쪽 해 돋는 쪽에 살았으며 48그 얻은 땅은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의 아로엘에서부터 시온 산 곧 헤르몬 산까지요 49요단 이쪽 곧 그 동쪽 온 아라바니 비스가 기슭 아래 아라바의 바다까지이니라(44-49)

 

모세는 요단강 동쪽에서 강 건너편을 바라보면서 40년 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다시 선포합니다. 왜 언약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 능력의 역사를 회고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이 언약이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 즉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지나간 언약이 아니라 현재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맺은 언약이었다고도 설명합니다.

 

⑴ 선포된 율법의 근거(44)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 생활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율법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그 동안 역사적 회고는 이 율법 선포를 위한 준비 작업이었습니다. 광야 40년 자신들의 체험을 통해 이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를 깨닫게 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후에’라는 표현을 반복함으로써 모세가 선포하는 ‘율법’이 결코 새로운 언약이 아니라 옛 언약의 갱신이며, ‘가나안 정복’ 역시 그들에게 부여된 새로운 과업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변함없는 명령임을 보여줍니다.

 

⑵ 선포된 율법의 내용(45)

 

모세는 이 ‘율법’을 ‘증언과 규례와 법도’로 칭합니다. 여기서 ‘증언/증거’란 신격 보장과 더불어 주어진 변치 않는 법규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를 비롯하여 다른 책들에서 ‘에두트’는 좁은 의미로는 ‘십계명’을 가리키며(출애굽기 25:16,21; 레위기 16:13; 민수기 4:5,17:4,17:10; 참조 레위기 24:3),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두 돌 판을 자주 ‘증거판’(증거의 돌판들)이라 칭하셨습니다(출애굽 31:18; 32:15; 34:29). 앞서 말한 대로 ‘규례와 법도’는 단순히 율법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증언과 규례와 법도’란 단순히 ‘십계명’과 이어서 반포되는 제반 율법을 가리킬 것입니다.

 

⑶ 율법이 선포된 장소(46-49)

 

신명기 1:1에 이어 다시 한 번 율법이 선포된 장소가 상세히 묘사됩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요단 동쪽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곳은 나중에 모세가 죽은 뒤 묻힌 곳이기도 합니다. 넓은 목포지가 펼쳐져 있던 그 땅은 아모리 왕 시혼의 영토였는데, 시혼을 물리친 뒤 이스라엘의 땅이 되었습니다. 나아가 이스라엘은 역시 아무리 족속인 바산 왕 옥마저 물리치고 그 위쪽의 바산 땅까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47절에서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은 둘 다 아모리 족속이라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그들이 차지한 요단 동편의 범위는 남북으로는 모압의 북쪽 경계선인 아르논 골짜기 근처의 아로엘로부터(2:36) 멀리 북쪽의 헤르몬 산까지 약 230km에 이릅니다. 헤르몬 산은 시온 산, 다른 방언으로 시룐, 혹은 스닐로 불립니다(3:9). 동서로는 폭이 들쭉날쭉한 데 오른쪽에 암몬과의 국경선으로부터 아라바 바다, 곧 비스가 산지 아래쪽의 사해까지 이르는 범위입니다. 새로이 정복한 요단 동편의 벳브올 맞은 편 골짜기에서 모세는 지난 광야 40년을 회상하며 율법을 선포하는 마지막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호렙 산에서의 언약 체결과 십계명 반포(5:1-5)

기독교는 배움의 종교입니다. 실천의 종교입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새기고 감정적으로 사무치는 것에 따라서 행동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듣지 않으면 대신 다른 것을 듣게 됩니다. 그 들은 것에 영향을 받으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해서 율법(토라)을 전합니다.

 

1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2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4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5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1-5)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의도대로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모세는 온 이스라엘 회중을 향해 주로 율법으로 구성된 두 번째 설교를 시작합니다. ‘토라’라는 단어를 ‘율법’으로 단언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이곳에서는 근접한 단어인 ‘율법’으로 통칭합니다.

 

⑴ 율법(토라)의 실천성(1-2)

 

이제 모세가 선포하는 규례와 법도를 그들은 신중히 듣고 배우며 지켜야 합니다. ‘듣다’, ‘배우다’, ‘지켜 행하다’는 사람의 규범적인 학습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것들이 모두 명령으로 주어집니다. 들으라, 배우라 지켜 행하라, 특히 서두의 ‘들으라’는 이후로도 신명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강한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모세는 시내산 아래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상기 시키면서 이 율법의 강론을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렙 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출애굽기 24장).

 

⑵ 율법의 현재성(3)

 

이 언약은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3)고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아닌 현재의 모세와 회중, 곧 ‘우리와 세운 언약’이었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시내산 언약을 체결한 1세대가 이미 다 죽었기에 새로운 세대, 곧 제2세대가 이 언약의 주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언약의 항시적 ‘현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현재 세대에게 유효하므로 과거 조상들과 맺은 언약은 현재 그들과 체결한 언약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⑶ 율법의 중요성(4-5)

 

현재의 본문(1-4)은 그들이 언약을 체결한 뒤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백성에게 대면하여 말씀하신(즉, 십계명을 들려주실 것으로 설명하는 듯 보입니다. 이 율법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살고 죽는 것을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불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20-24장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언약에 앞서 십계명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선포되었습니다(출애굽기 20:1-17). 하지만 우리는 시간 순서를 자주 무시하는 신명기의 특징을 고려해야 합니다. 언약이 과거의 고리타분한 약속이 아닙니다. 그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늘 현재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한 절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십계명 : 제 1계명과 제 2계명(5:6-10)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많은 종류의 피조물이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다릅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짐승처럼 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 원리를 전해주셨던 것입니다.

 

6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7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8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9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6-1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십계명, 즉 삶의 원리를 가르치기 전에, 구원의 역사,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를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지켜야할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통해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과의 ‘은혜와 관계’를 잊고, ‘감사와 사랑’을 잃은 계명 준수는 자발적인 구속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속박입니다. 영광스러운 특권이 아니라 수고로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⑴ 제1계명 ‘다른 신을 두지 말라(6-7)

 

첫째 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주어로 하는 ‘나는’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을 단수 ‘너’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단수 ‘너’는 십계명이 공동체의 질서와 삶을 위한 규약이지만, 또한 이스라엘 각 개인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시사 합니다. 모든 백성은 각자가 이 계명을 준수해야 합니다. 십계명은 이처럼 나와 너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주어집니다. 그들은 애굽의 종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종들의 집’이라는 표현은 그들이 애굽 땅에서 당했던 고통을 잘 표현해 줍니다. 해방된 그들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과거의 고통스런 삶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십계명은 해방되어 자유민이 된 그들을 위한 새로운 헌장입니다! 첫째 계명은 한 나라에 두 왕이 존재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우주의 창조주 왕, 유일하신 창조주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어떤 신들도 거짓이며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땅에서 다신을 배했던 것 같진 않습니다. 고통당하던 애굽 땅에서 애굽의 신들은 그들에게 매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뒤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 땅의 신들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온갖 풍요로움과 때에 맞는 비를 내리는 다산의 신이요 번영의 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을 미리 아시고 첫째와 둘 째 계명을 엄중하고 단호한 어조로 선포하십니다.

 

⑵ 제2계명 ‘우상을 섬기지 말라(8-10)

 

모든 형상화된 신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우상을 섬기기 말라’는 히브리어로 수동태입니다. 이것은 우상들이 섬겨지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 즉 우상에게 현혹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의미와 별반 다르지는 않지만, 유혹당해선 안 된다는 뉘앙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 숭배를 질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속 좁은 느낌을 주는 단어 ‘질투’가 인간의 정서상 너그러우신 하나님께는 안 어울려 보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부부간의 정절을 파괴할 때 배우자의 분을 일으키는 질투에 사용됩니다. 많은 구약의 본문들이 우상숭배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간음이라고 비난합니다.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죄의 앙갚음과 순종에 대한 대가인 천대에 이르는 장구한 은혜가 크게 대비됩니다. 그러나 이 원칙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불변의 공식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은 죗값의 승계에 대해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를 동시에 이야기합니다. 먼저, 아버지의 죄의 대가인 징벌이 자동적으로 후손에게 가해지지 않는다는 명제가 나타납니다. 죄의 공동 책임 원리가 때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각 사람은 각자의 죄로 망합니다! 그것을 신명기 24:16이 분명하게 진술하고, 예레미야(예레미야 31:29-30)와 에스겔(에스겔 18:19-22)이 재차 확인해 주었습니다. 사실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 징벌을 받는 이유는 자신들도 아버지와 동일한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레위기 26:40). 그러나 아버지의 길을 거부하고 바른 길을 갔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아버지 아하스의 길을 떠난 히스기야; 아몬의 아들 요시야; 고라의 자손들, 고라의 후손들은 그리하여 큰 복을 받아 성전의 음악 맡은 자들이 되었으며, 많은 시편을 남긴 믿음의 가문으로 세워 졌습니다. 반대로 사무엘의 아들들과 같이 신문으로 세워 졌습니다. 반대로 사무엘의 아들들과 같이 신실한 아버지를 본받지 않고 패역의 길을 간 아들들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죄의 공동 책임의 원리는 구약 사상의 저변에 깔려 있다. 이 원리는 세대 간에도 적용되어 후손들은 조상의 죄를 고백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레위기 26:40). 그리고 당대의 범죄에 대해서도 이스라엘은 항상 공동 책임의 짐을 졌습니다. 여기에는 어린 아이라고 제외될 수 없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가혹해 보일 수 있으나, 죄의 독성은 모든 세대와 계층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후손들이 조상의 죄로 인해 3-4대까지 심판을 받는 이유는 결국 그들이 조상의 죄에 동참한 결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그 사슬을 끊는 자는 그 순간부터 믿음의 가문을 세워나감으로써 그 복이 대대손손 흘러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받은 자들로 주인이 바뀐 자들입니다. 구원과 해방은 새로운 주인을 통해 새로운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에 거리낀 것이 있으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도 영원한 중보자, 모세의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외하도 다른 진리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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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4-02)

 

 


우상 제작을 금하고 경배를 금함

신명기 4장 15-31절


과거에 술이나 담배를 했던 사람들은 그것을 끊기란 쉽지 않습니다. 끊었다가도 과거 비슷한 환경이 되면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만 섬기던 사람들은 우상 숭배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하나님만 섬깁니다. 하지만 타 종교를 섬겼던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면 과거 종교를 회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옛 종교로 다시 돌아간 경우들도 있습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의 체험을 상기시키고 하나님께서 가장 준엄하게 금지하신 십계명의 둘째 계명을 강조하면서 경고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첫째 계명은 각종 우상을 금지하는 둘째 계명에 의해 구체적으로 강화됩니다. 이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애굽에서 백성들을 구출하셨는지 요약해서 설명한 뒤 그 땅에 들어가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나안 땅의 우상들에 대한 금지입니다.

 

우상 제작과 숭배 금지(15-24)

진정한 앎은 개방하려는 마음, 배우려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자유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까지도 통제의 대상이 됩니다. 신앙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매번 거기서 거기인 하나님만 만나려고 합니다.

 

15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16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17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18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19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 20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풀무불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21여호와께서 너희로 말미암아 내게 진노하사 내게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은즉 22나는 이 땅에서 죽고 요단을 건너지 못하려니와 너희는 건너가서 그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니 23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24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15-2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조심해야할 것이 있는데 우상숭배라고 하십니다. 가나안에 널려있는 우상들을 하나님 대신이나 하나님과 함께 숭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바꾸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나무나 돌에 새긴다면 아무리 그 돌이나 나무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열심히 경배하고 열정적으로 예배한다고 해도 것은 우상숭배이니 절대 그것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가나안 종교의 차이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철저히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을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⑴ 인간, 생물, 자연물의 우상화를 금지함(15-19)

 

이스라엘 백성은 호렙 산에 머물며 하나님의 임재를 몸소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짙은 구름, 강한 불과 화염, 우렛소리와 신령한 나팔 소리와 같은 장엄한 현상들을 통해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으며 중요하게는 직접 자신의 음성으로 반포하여 십계명을 듣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다양한 신적 임재의 현상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어떠한 ‘테무나’도 보여주지 앓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을 이런 테무나로 표현하거나 제작하지 말 것을 경고하십니다. 모세는 당시 이스라엘 주변 세계에 존재하던 수많은 형상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나열합니다.

 

① 사람의 형상

이스라엘 백성은 남자의 형상이든 여자의 형상이든 우상으로 숭배하기 위해 사람의 형상물을 제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해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라거나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집트나 바벨론, 로마 제국과 같이 고대에는 제국의 군주들과 권력자들이 자신들을 신의 반열에 올려놓고 형상물을 전국에 세워 백성들이 숭배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인간 숭배도 금지하십니다. 특별히 ‘자기를 위해’(원뜻은 ‘너희를 위해’) 그런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즉, 우상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내적 위로와 평안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제작한 ‘만들어진 신’입니다.

 

② 형상화하여 숭배

여기에는 세 영역으로 구분된 자연계의 모든 생물들이 포함됩니다. 구약의 우주관은 삼중적입니다(창세기 1장; 레위기 11장), 하늘, 땅(지상), 물(수중), 하나님께서 각자의 영역에 맞게 고유한 생물들을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창세기 1장). 하늘에는 각종 새, 땅에는 여러 육상 동물들과 곤충과 기는 것, 물속에는 각종 물고기와 기는 것.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수많은 생물들을 형상화해서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사람들은 우람한 짐승뿐 아니라 자그마한 벌레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신으로 격상하여 대접하곤 했습니다. 예컨대, 공중의 매는 이집트에서 호루스(Horus) 신의 형상이었으며, 육상의 소는 여신 하토르(Hathor)의 현현으로 숭배되었고, 이 것은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숭배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기는 것들도 신으로 숭배되었는데, 이집트에서는 뱀이 가장 보편적으로 신성시되어 수많은 벽화에 그려져 있고 부조로 조각되어 있으며, 수많은 뱀 장식들이 남아 있습니다. ‘땅 아래 물’이란 지하 세계의 물, 즉 지하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유명한 물고기 형상의 신은 블레셋의 바알이라 할 수 있는 다곤(Dagon)입니다.

 

③ 신격화된 자연물

특히 하늘의 천체들인 해와 달과 별은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서 태고부터 신으로 숭배되어 왔습니다. 태양은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신이었으며, 달은 갈대아 우르에서 도시국가의 신으로, 중요한 별들도 하급 신들로 숭배되었습니다(5장을 보라). 구약, 특히 창세기 1장은 세상의 모든 종교가 신으로 숭배하던 그런 자연물들은 피조물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 배정했다고 처음부터 선언합니다. 이런 천체의 비신화화는 종교학적인 관점에서도 놀라운 사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 자체로 구약의 여호와 신앙이 인간의 종교적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 계시에 따른 것임을 시사합니다.

 

⑵ 가나안 땅에서 우상숭배를 금지함(20-23)

 

애굽은 그들에게 쇠 풀무불과 같은 땅이었다. 풀무불이나 용광로는 성경에서 종종 고난을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됩니다(열왕기상 8:51; 이사야 48:10; 예레미야 11:4; 에스겔 22:20-2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낱 노예 민족이었던 미천한 백성을 선택하셔서 극적으로 구출해 내시고 축복의 땅인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는 정작 자신은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현실을 다시 한 번 아파합니다. 죽음이 임박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더 이상 그들을 지도하고 이끌 수 없는 운명이기에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그들이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신신당부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가장 강력히 금지하신 우상숭배를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상의 땅 애굽의 모든 우상들을 격파하여 구출해 주시고 언약을 맺으신 언약 백성입니다. 따라서 만일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가나안 민족의 풍습과 규례를 따라 그 땅의 온갖 우상들을 섬기고 형상들을 제작해서 하나님 자리에 놓는다면, 그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우상숭배로 인한 징벌과 회복의 은혜(24-31)

인간은 악한 존재라서 무엇이든지 통제하려고 합니다. 알려고 애쓰는 것도 사실 무엇인가를 알면 그것으로부터 휘둘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틀린 것으로 판명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하나님다우실 수 있도록 자유를 드리는 것이 인간이 할 최고의 경배입니다. 그 반대가 우상 숭배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신 것입니다.

 

24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25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26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27여호와께서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여러 민족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28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29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30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31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24-3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같이 열정적인 분이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고 싶지만, 정작 만나면 죽을 것 같은 무서운 분이십니다. 그분을 사람들이 소유할 수 없어서 놀랍니다. 품고 있으면 대단히 위험한 분입니다.

 

⑴ 그 땅에서 우상을 섬긴 대가(24-28)

 

모세는 하나님은 두려운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각인시킵니다. 그분은 ‘소멸하는 불이시며 질투 하나님’입니다. 이 불은 ‘삼키는 불’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은 또한 꺼지지 않는 불을 동반하시는 분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출현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구름 속에서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불이 타오르는 그런 일체형 구름이었습니다(출애굽기 40:38).

시내산 정상에서는 그 신령한 불이 구름을 뚫고 솟구쳐 나왔으며, 간혹 심판의 불로 뿜어져 나와 불순종한 백성들을 소멸했습니다(레위기 10장; 민수기 16장). 만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 백성들이 그 땅의 우상들을 섬기고 제작한다면 이 불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란 단순히 우상과 다른 신들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를 묘사하는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그 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그 땅에서 사느냐 입니다. 만일 그들이 타락과 부패의 길을 걸으며 각종 신상들을 제작하고 그것들을 섬긴다면, 그들은 즉각 망할 것입니다. 모세는 천지를 증인으로 삼아 이것을 확고한 사실로 못 박습니다. 그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그 땅에서 머지않아 전멸을 당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온 사방의 땅으로 그들을 쫓아내 남은 자는 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26). 더욱 두렵게도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이방 땅으로 끌려간 뒤, 생소한 그 민족들의 신들과 그것들의 우상과 신상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께로부터 내쫓긴 뒤 보지도 듣지도 먹지도 냄새도 맡지 못하는 죽은 돌과 나무로 만든 가짜 하나님을 섬기는 신세로 전락할 것입니다.

 

⑵ 회개와 약속된 회복의 은혜(29-31)

 

하지만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베푸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그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베푸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은 영속적이지 않으며 결국 그분은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충실히 지키십니다. 심판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이 영원합니다. 만일 끌려간 이방 땅에서 우상들의 울타리에 갇힌 그들이 하나님을 다시 절실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찾고 또 찾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은혜, 자비하신 그분의 회복의 은혜를 맛볼 것입니다. 모세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동사들을 나열함으로써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확증합니다.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멸하지 아니하시며 언약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호렙 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을 때의 상황을 되새기게 함으로 지금부터 모세가 말하려는 율법은 신성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부각 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율법의 신적인 권위를 강조하기 위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그것을 읽고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참 생명을 얻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누리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율법의 근본적인 목적인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예배와 섬김은 모든 인간에게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며, 따라서 잠언의 기록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언 1:7)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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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4-01)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신명기 4장 1-14절


학교에서 학생들이 가장 좋은 점수를 얻는 방법이 있습니다. 강의 첫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강의 계획서를 잘 듣고, 과목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무슨 과제인가, 그리고 시험이 어떻게 출제될 것인가란 사실들을 잘 알 때, 좋은 성적을 최고의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오리엔테이션 시간입니다.

 

신명기 1-3장에서 모세의 역사적 회상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지난 40년의 광야 회상은 사실 4장에서 시작되는 신명기 율법의 선포와 설교와 배경이 됩니다. 이제 그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에 들어가 율법의 백성은 그 땅에 들어가 율법의 백성으로서 순종하는 삶은 살아야 합니다. 이 교훈을 위해 모세는 직전에 있었던 바알브올 사건, 곧 모압 땅에서 행한 성적 타락이 수반된 집단적 배교 행위를 상기시킵니다.

 

율법에 순종하라는 명령(1-2)

부모들이 자녀에 대한 관심은 자녀들이 잘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서 자녀들에게 교훈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받은 땅을 주 안에서 누리는 방법은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와 법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신 풍성한 생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누리는 길은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1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2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1-2)

 

모세는 계속해서 광야 2세대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광야 40년 역경의 세월에 대한 역사적 회상을 마쳤습니다. 그 뒤에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율법을 준수해야할 중요성을 설파하기 시작합니다. 그 내용은 지극히 단순한 교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입성하여 실천할 내용을 ‘규례와 법도’라고 부릅니다. 이 둘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리키는 동의어로서 ‘규례와 법도’는 강조를 위한 동어반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규례와 법도’를 들어야 합니다.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두 번째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해야 합니다. 듣고도 준행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약 1:22).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면 만일 백성들이 지금 선포되는 하나님의 율법을 듣고 준행한다면, 그들에게 생명이 보장되어 있었으며, 또한 약속의 가나안 땅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 사실은 선포되는 율법을 자의적으로 변경하고 왜곡해선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의도와 생각이 삽입된 거짓 율법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게 되면, 그만한 합당한 벌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계 22:18-19).

이 말씀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성경적인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순종하면 나머지 것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바알브올 사건의 교훈(3-4)

오직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4).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모든 생명의 주제이십니다(창 1:1).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서 생존할 수 있습니다.

 

3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로 말미암아 행하신 바를 너희가 눈으로 보았거니와 바알브올을 따른 모든 사람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멸망시키셨으되 4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3-4)

 

모세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의 중요성을 실감나게 깨닫도록 광야 기간 막바지에 발생한 바알브올 사건을 끄집어냅니다(민 25장). 이것은 불과 몇 달 전에 발생한 비극적 사건입니다.

모세는 당시 불순종했던 백성의 뻔뻔스러운 민낯을 드러내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상기시킴으로써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합니다. 그 일로 범죄에 가담했던 백성들은 모두 멸망했고, 현재 모세의 설교를 듣는 회중은 여호와를 떠나지 않았기에 살아남았습니다. 모세의 말대로 생명의 길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민수기 25장에서 상세히 설명된 ‘바알브올의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뼈아픈 경험이었습니다. 민수기 22-24장에서 이스라엘은 큰 위기를 넘긴 바 있습니다. 발락이 메소포타미아의 선지자 발람을 초청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다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직후 이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바알브올은 지명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본문에서 ‘바알브올을 따르다.’란 표현에서도 확인됩니다. 바알이란 히브리어는 ‘주’란 뜻과 함께 고유명사 ‘바알’ 둘 다 가능합니다. 모압의 국가신은 바알이 아닌 그모스이며(민수기 21:29; 열왕기상 11:7,33; 예레미야 48:7,13,46), 따라서 그모스의 별칭이 바알브올이었을 수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어 바알이 일반적 의미의 ‘주인’이 아닌 가나안의 맹주 신 ‘바알’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이 경우 그들은 그모스가 아닌 바알을 별도로 숭배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견해는 바알브올은 브올에서 섬긴 모압의 우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들이 싯딤에서 모압과 미디안 여인들과 집단적으로 성적 음행을 범했는데(민수기 25:1), 그것은 브올의 신, 즉 모압 신과 연루된 제의적 성관계였을 것입니다. 발람이 꾀를 내서 주동한 사건이었습니다(민수기 31:8,16). 그 범행으로 하루 동안 24,000명이 죽었습니다. 민수기 2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두 무리의 책임자들과 주동자들을 즉시 처벌해야 재앙이 멈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민수기 25:4-5). 그들은 백성의 수령들(아마 지파장들이거나 주요 지도자들)과 그 일에 가담한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그 수령 나라들이 이 음행 사건을 주도했으며, 많은 백성들이 가담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집단 사망한 사람들이 모두 ‘바알브올을 따른 사람들’이라고 평가합니다.

 

민수기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상황이었는데,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주도하여 주요 책임자들을 처형함으로써 그날 염병이 그쳤다고 보고합니다. 모세는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은 견고히 ‘하나님께 붙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합니다(4). ‘붙어 있다’라는 동사는 하나의 덩어리를 구성하도록 견고히 결속된 상태를 의미하며, 부부가 한 몸을 이룬다는 동사로도 사용되었습니다(창세기 2:24). 이것은 살아남은 자들이 하나님과의 결혼 관계, 즉 언약 관계에 충실했음을 의미합니다.

 

순종하는 큰 나라의 백성이 되라(5-9)

역사를 잊으면 힘든 역사는 반복되어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다음 세대들에게 교육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시 어려움이 반복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우리들처럼 어려운 과정을 경험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 일입니까!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할 이스라엘을 규례와 법도를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5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6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8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9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5-9)

 

모세는 현재 자신의 설교를 통해 백성들에게 다시 반포되는 율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이미 자신이 그동안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규례와 법도를 가르쳐왔다고 밝힙니다. 그는 출애굽기 19장 이후로 여러 차례에 걸쳐 하나님께 율법과 계명을 전달받아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십계명(출애굽기 20:1-18); 언약의 율법(소위 ‘언약서’, 출애굽기 20:22-23:33); 성막법(출애굽기 25:1-31:18); 레위기법(레위기 1-27장); 민수기의 제반 율법들. 모세는 이 율법들을 하나님께 받은 뒤 기록했으며(출애굽기 24:4; 34:27; 참조. 신명기 27:3; 28:58), 율법의 훈련은 광야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제 들어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의 순종의 삶을 위해서입니다(5).

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과 구별되는 백성이 되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참된 지혜와 지식으로 이끄는 삶의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온전히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만국 앞에서 복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도 나름 고도의 체계적인 법전과 윤리적 지침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민족들이 ‘이 큰 나라 사람들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라며 이스라엘을 칭송할 것입니다. 지혜(호크마)란 삶의 관조를 통해 깨달은 통찰력과 분별력을 의미할 것입니다. 지식으로 번역된 ‘빈’ 또한 단순한 정보의 습득을 의미하는 지식(knowledge)이 아닌 지식의 해석과 바른 판단력을 가리키는 단어로 지혜와 거의 동의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과 생명의 길을 분별하는 삶을 살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거짓된 죽은 신들과는 다른 참된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백성들이 기도할 때 가까이 계셔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신들 중 그 어떤 신도 여호와 하나님처럼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백성 가운데 가까이 계시지 않습니다. 지난 40년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면서 백성들은 신중히 그리고 힘을 다해 율법을 준수하고,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 지난 역사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아들들과 후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잊지 않게 해야 합니다. 모세는 무려 네 개의 동사를 연속적으로 나열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삼가며…지키라…잊어버리지 말라…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9).

 

호렙 산(시내산)에서 들은 십계명과 받은 말씀(10-14)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만 역사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만 약속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일 우리 자손들의 하나님도 되시고(9), 오늘 우리 하나님도 되십니다(10-13). 오늘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곧 오늘 우리를 통해 그분의 언약을 성취해나가십니다.

 

10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11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에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불길이 충천하고 어둠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12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13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14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가 거기로 건너가 받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0-14)

 

하나님께서는 호렙 산에서 백성의 귀에 직접 십계명을 선포하여 들려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직접 백성들의 귀에 선포된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모든 율법의 근간인 십계명이 이스라엘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시내산 정상 부근은 신령한 구름이 뒤덮인 채 하나님의 불이 타오르고 강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그곳에서 우렛소리가 들리고 신령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흔히 하나님의 임재에 동반되는 현상들입니다. 그들은 시내산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오직 음성만 들었으나 아무런 형상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반포하신 후 준수할 것을 명령하시고 친히 두 돌판에 새겨서 모세에게 건네주셨습니다. 이 십계명을 특별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13). ‘언약’은 약속입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약속이자, 동시에 백성 편에서의 약속으로 서로 간의 준수 사항을 지키겠다는 다짐입니다. 십계명이 요구하는 대로 백성은 순종을 약속하고, 하나님은 순종에 따른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유일하게 돌판에 새겨질 만큼 십계명은 가장 중요한 명령이었습니다(십계명 돌판에 대해서는 신 5:22와 9:9 이하를 보라). 십계명이 직접적인 하나님의 음성으로 백성들의 귀에 반포되어 그것이 두 돌판에 기록된 후, 하나님께서는 추가적인 규례들과 법도들을 모세에게 전달하여 교훈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서’라 일컫는 출애굽기 20:22-23:31의 언약 법전입니다.


십계명은 제국의 종으로부터 해방된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말씀의 종이 되어 풍성한 삶을 사는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따라서 십계명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돌아봅시다. ‘외형적으로 큰 것을 추구하는가,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을 추구하는가?’ 십계명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정치 행위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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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3-02)

 


이제 떠나야 하는 모세

신명기 3장 23-29절


하나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지만 얼핏 보면 차별하시는 듯 보입니다. 더 많이 누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고생만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한 복은 무엇이겠습니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차례로 격파한 뒤 드넓은 요단 동편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 땅은 나중에 논란 끝에 두 지파 반에게, 곧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해 줍니다. 우여골절 끝에 우선 르우벤과 갓 자손에게 모압과 국경을 이루는 남쪽의 아르논 골짜기 근처 아로엘로부터 북쪽으로 길르앗 산지 절반을 할당했습니다.

 

요단 동편 길르앗 땅의 분배(12-17)

아직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그 나라의 복락을 누리고 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주어졌으며, 이미 그 나라의 복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참 기쁨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무언가를 허락하신 복도 있습니다. 먼저 받은 사람으로서 책임감이 있습니다.

 

12그 때에 우리가 이 땅을 얻으매 아르논 골짜기 곁의 아로엘에서부터 길르앗 산지 절반과 그 성읍들을 내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 주었고 13길르앗의 남은 땅과 옥의 나라였던 아르곱 온 지방 곧 온 바산으로는 내가 므낫세 반 지피에게 주었노라 (바산을 옛적에는 르바임의 땅이라 부르더니 14므낫세의 아들 야일이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의 경계까지의 아르곱 온 지방을 점령하고 자기의 이름으로 이 바산을 오늘날까지 하봇야일이라 불러오느니라) 15내가 마길에게 길르앗을 주었고 16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는 길르앗에서부터 아르논 골짜기까지 주었으되 그 골짜기의 중앙으로 지역을 정하였으니 곧 암몬 자손의 지역 얍복 강까지며 17또는 아라바와 요단과 그 지역이요 긴네렛에서 아라바 바다 곧 염해와 비스가 산기슭에 이르기까지의 동쪽 지역이니라(12-17)

 

요단 동편 땅에서의 싸움과 승리는 이제 분배로까지 이어집니다. 분배 과정 속에 심각한 우려와 논쟁이 있었지만, 가축이 많았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 먼저 요단 동편 땅이 분배됩니다. 그러나 요단 동편 땅을 먼저 차지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요단 서편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일에 뒷짐 지거나 나몰라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요단 동편 땅을 우선 르우벤과 갓 지파의 몫으로 할당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받은 길르앗 산지 절반은 아마도 얍복 강 남쪽을 가리킬 것입니다. 앞서 2:36에서 살핀 대로, 길르앗은 넓은 의미로 요단 동편 전체를 가리키나, 좁게는 얍복 강 근처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분명 그것이 요단 동편 전체를 의미하면서 바산 들판도 포함합니다. 말하자면, 길르앗 산지 절반이 우선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 할당되고, 나머지 절반은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할당된 것입니다. 길르앗의 북쪽 절반은 바산 땅이며 중심 지역은 아르곱이었습니다(3:4). 르우벤과 갓이 각각 어느 지역을 할당받았는지는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21장에 의하면, 모세는 아모리 왕 시혼을 격파한 뒤 곧바로 야셀 지역으로 정탐꾼을 보내 탐문을 마치고 그곳의 모든 아모리 성읍들을 함락했으며(민수기 21:32) 여세를 몰아 바산까지 격파했습니다. 야셀은 암몬과 경계 지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길르앗에 포함된 야셀은 마찬가지 로 넓은 지역으로 좋은 목초지였습니다(민 32:1). 르우벤과 갓의 요구대로 갓은 야셀 지역을 중심으로 땅을 받았고 르우벤은 그보다 남쪽의 얍복 강 주변의 길르앗 땅을 분배 받습니다.

 

13절 하반절과 14절은 또 하나의 설명을 위한 삽입구입니다. 이것은 어떤 연고로 바산 일대가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할당되었는지 부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의 자초지종 또한 민수기 32:33-42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산 또한 과거에 ‘르바임의 땅’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기골이 장대한 바산 왕을 필두로 강력한 아모리 족속이 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므낫세 지파는 어떤 영웅적 혈족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산 왕 옥과 충돌할 때 독자적 인 대범한 군사 행동으로 북쪽의 바란 일대의 정복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므낫세 지파의 야일이란 인물과 마길의 자손들이었으며, 노바라는 인물도 이 공헌자들에 포함됩니다(민수기 32:39-42). 우선 야일은 최북단 지역을 점령하여 그곳의 지명을 자신의 이름을 따라 하봇야일(야일의 촌락들)이라 지었습니다(민수기 32:41). 모세는 마길에게는 길르앗을 주었습니다(15). 마길은 므낫세 지파에 속한 마길 혈족입니다. 므낫세 지파 중 마길 자손들이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것 같습니다. 민수기 26:29에서 확인된 바 마길은 아들 없이 딸만 남기고 사망한 슬로브핫의 조상입니다. 아마도 마길의 후손은 요단 동편의 길르앗에 거주하던 아모리 인들을 쫓아내는 업적을 남겼을 것입니다. 즉 마길 사람들이 주도해서 이스라엘은 길르앗을 침공하여 그곳을 빼앗았으며(민수기 32:39), 그 후 그들은 모세에게서 길르앗에 대한 합법적 점유를 승인받은 것입니다(민수기 32:40). 15-17절에서는 이 요단 동편의 땅 분배를 간략히 요약해서 총정리하는데, 여기서 는 다시 길르앗이 길르앗 북쪽, 즉 바산 땅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마길 가문으로 대표되는 므낫세 지파(사실은 반 지파)에게 ‘길르앗’이 할당되고(바산 지역을 가리킨다), 르우벤과 갓 지파에게는 길르앗으로부터 아르논 골짜기까지 주어지는데, 그 경계가 상세히 설명됩니다(16-17). 아르논 골짜기 중앙으로부터 북쪽 경계는 암몬 족속의 땅이 왼편에 펼쳐진 얍복 강이며(16), 그 일대의 아라바 광야와 서쪽의 가나안과 국경을 이루는 요단강까지 이른다. 더 남쪽으로는 긴네렛(갈릴리)에서 염해로 불린 아라바 바다(오늘날 사해)와 그 일대의 비스가 산기슭을 포함합니다. 이 범위 전체가 요단 동쪽 지역으로 불립니다.

 

두 지파의 요단 서편 전쟁 참여(18-22)

옛 사자성어에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새롭거나 값나간 물건을 보면, 가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욕망이나 욕심은 누구나 흔히 감정의 하나님이므로 크게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의미는 욕망보다는 절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8그 때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셨은즉 너희의 군인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이 되어 건너가되 19너희에게 가축이 많은 줄 내가 아노니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내가 너희에게 준 성읍에 머무르게 하라 20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쪽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땅을 받아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고 21그 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 눈으로 보았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 22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18-22)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을 향해 가면서 형제들과는 화친하고, 적들과는 싸우면서 통과했습니다. 헤스본 왕과 바산 왕을 격파하고 그곳을 통과하여 요단 강 동편에 도착했습니다.

 

(1) 가나안 동편을 차지한 두 지파 반(18-19)

 

요단 동편 지역을 정복한 후에 가나안 동편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한 가지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축이 많았던 르우벤과 갓 지파는 광활한 가나안 동편 땅, 목초지가 펼쳐진 그 땅을 자신의 터전으로 욕심내면서 모세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모세와 다른 지파들은 그들을 화를 내며 비난하고, 그 제안을 거부하게 됩니다.

모세와 다른 지파들이 거부한 이유는, 첫째는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 정복 전쟁에서 빠지려 한다는 의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그런 이기적인 욕심은 공동체의 결속력에 큰 해를 입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염려했던 것입니다(민 32:1-7). 지금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데, 내부에서 김을 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르우벤과 갓 지파는 결단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전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정복 전쟁이 다 끝날 때까지 선봉에 서서 싸우겠다고 다짐합니다. 모세는 모든 이스라엘 앞에서 공식적으로 그들에게서 약속을 받아냅니다. 르우벤과 갓 지파는 가나안 전쟁에 지파들의 연합군으로 참여하여 선봉에 서고, 가족들과 가축을 자신들이 차지할 요단강 동편 성읍에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자녀들과 아내, 그리고 가축이 요단 동편의 남은 잔당들에 의해 공격을 받지 않도록 충분히 안전 조치를 하고 전쟁에 출정하라는 지시입니다(민 32장). 이러한 안전 조치는 사실은 르우벤과 갓 지파가 먼저 내놓은 협상안이었습니다(민 32:16-17, 24-26). 모세는 다시 한 번 학실하게 집고 넘어간 갑니다.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먼저 전투에 설 것과 그들의 약속대로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충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 조건에 걸었습니다. 모세는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점유한 뒤 형제 지파들에게도 땅이 분배되어 안식을 얻게 되고 나서, 요단 동편의 기업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20).

 

(2) 이스라엘에게 용기를 준 모세(21-22)

 

다시 르우벤과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들로 인해 용기가 충천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로 위임식을 마친(민 27:18-23) 사령관 여호수아의 용기를 북돋습니다.

첫째는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 눈으로 보았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21)라고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ㅁ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라고 권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싸우는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전쟁관) 그래서 모세는 강한 어조로 연설합니다. 하나님께서 막강한 아모리인의 두 왕에게서 승리를 거두게 하신 것처럼, 요단 서편의 가나안에서 만날 여러 나라들(민족들)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23-29)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난 자리까지도 아름답게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많은 사람을 이끄는 지도자일수록,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을수록 적절한 시간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떠나기를 더욱 어렵습니다. 본문에는 모세에게도 그 일을 쉽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23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24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25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28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29그 때에 우리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거주하였느니라(23-29)

 

모세는 120세의 나이로 죽는 순간까지 기력이 쇠하지 않았고 심지어 눈도 흐려지지 않은 상태로 충분히 정상적인 직무를 수은 상태로 충분히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신 34:7)

모세는 요단 동편의 상황이 마무리된 직후, 자신이 드렸던 개인적 기도와 더불어 광야 40년 역사에 대한 회고를 마무리합니다. 그의 탄원 기도는 애절했습니다. 그토록 소망했던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제발, 제가 건너가게 하소서’는 그의 간절한 심정을 잘 반영합니다.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가서 아름다운 약속의 땅, 그곳의 산과 레바논의 들판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눈앞에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에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의 거듭된 불순종과 반역 행위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진노하여 가나안 입성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실이긴 하나, 민수기는 모세 자신의 잘못을 크게 부각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모세의 실수 또한 백성의 반역에서 비롯된 것이고, 백성의 죄에 대한 지도자로서의 책임 또한 컸기에, 신명기에서 모세의 대략적인 회고가 역사적 왜곡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혹하리만치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하셨습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는 내게 말하지 말라. 대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 희미하게나마, 그리고 일부나마 그 약속의 땅을 멀리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비스가 산은 아바림 산맥의 북쪽 산지를 총칭하는 명칭으로서 비스가 산 일대에 모세가 묻힌 느보 산이 존재합니다. 역설적이게도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나 그 땅을 바라봅니다. 아마도 ‘나로 건너가게 하소서’라는 모세의 탄원과 그가 죽음 직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땅을 바라보는 이 장면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비장하고도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모세를 대신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시 한 번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강하게 독려하고 용기를 북돋으라고 명하시며 대화를 마치셨습니다. 그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마도 모세가 연설하고 있는 현재도 벳브올에 머물러 있으며, 여기서 모세가 고별 설교를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결국 이곳에 모세가 묻힙니다(34:6).


많은 성도가 가난하고 힘들 때에는 주님을 잘 섬기다가 조금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 거기에 안주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잊곤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짖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그 사명을 더 잘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함임을 깨달아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은혜를 누리되 절대 안주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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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3-01)

 


바산 왕 옥과의 전쟁에서 승리

신명기 3장 1-11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훈련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시키신 훈련이 무엇입니까? 광야의 특징은 결핍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입니다. 그 훈련의 목적을 모세를 통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라고 하셨습니다. 즉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의 백성들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할 때, 삶의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단 동편에서 이스라엘이 벌인 전투의 마지막은 바산의 옥과의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담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행해지는 하나님의 전쟁은 승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산은 거인 민족인데 그들과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러한 전쟁을 통하여 크고 높은 사람들과 성벽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바산 왕 옥과의 전쟁(1-2)

사람들은 두려움 가운데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 실수로 인한 두려움, 현재 상황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예측 불허에 대한 두려움 등 두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두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지침이 되고 기준이 될 때, 그 두려움이 떠나게 될 것입니다. 삶에 자신감을 얻는 것은 사소한 승리는 지속적으로 해나갈 때 큰 승리를 만들어냅니다.

 

1우리가 돌이켜 바산으로 올라가매 바산 왕 옥이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에드레이에서 싸우고자 하는지라 2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모든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으니 네가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에게도 행할 것이니라 하시고(1-2)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일찍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을 두려워서 돌아서는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40년 동안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훈련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훈련이었습니다. 앞으로 가나안 땅에 점령하는데 싸워야할 적들 앞에서 두려워하면 전쟁을 시작조차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제 40년을 다 채우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데, 가나안 까지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1) 전쟁을 준비한 바산 왕 옥(1)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 싸워야할 대상과 화평을 이룰 대상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들 중에 싸워야할 대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민족들이었습니다. 이미, 헤스본의 시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 땅에서 얻은 길르앗은 여전히 전쟁터로 남아 있었습니다(신 2:26-37). 그것은 아직도 정복해야 할 땅이 시혼의 영토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아모리 족속인, 바산의 옥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인 바산으로 돌이켜 올라갔습니다(1). 그곳 왕인 옥은 이미 헤스본과의 전쟁 소식을 듣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인으로 지금까지 전쟁의 경험으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산 왕국은 서쪽으로는 갈릴리 호수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암몬과 접하고 있었습니다. 남쪽으로 헤스본의 시혼이 다스리고 있었던 미쇼르 지역(아르논 골짜기에서 얍복 시내까지)에 접해있는 길르앗(얍복 시내에서 야르묵 강까지)이 있었고, 북쪽으로 바산(야르묵 강에서 헤르몬산까지)이 있었습니다. 바산의 남쪽에는 살르가와 에드레이라는 국경도시들이 있었습니다. 에드레이는 갈릴리 호수로부터 남동쪽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살르가는 에드레이보다 더 북동쪽에 있었습니다. 북쪽으로는 헤르몬 산에 이르렀습니다(8). 옥의 바산 영토는 빽빽한 숲과 생산력이 강한 고지대로서 떡갈나무와 가축들로 유명했습니다.

 

(2) 두려워하지 말라(2)

 

바산 왕 옥은 전쟁에 능숙하고 늘 승리를 해왔던 왕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자신이 늘 전쟁에서 승리했던 능숙한 땅인 에드레이Edrei로 유인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노정을 통해 에드레이에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야셀이 바산과의 전투의 시작이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민 21:32). 그 다음 목표가 에드레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바산 왕 옥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그도 거인 족의 후예였던 것 같습니다.

 

시혼과의 전투에서 주셨던 확신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옥과의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에게 승리의 확신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모든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으니 네가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에게도 행할 것이니라’(2)는 말씀으로 격려하십니다. 시혼 왕을 물리쳤을 때와 같이 ‘담대하라’고 명하십니다.

전쟁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2장에서 헤스본에 거주한 마모리 족속 시혼을 처리한 것처럼, 이 옥에게도 동일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승리를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산의 옥에게도 동일한 전술을 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승리하고 다시 돌아보면서 이야기한 일이기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의 역사를 느끼겠습니까! 마음속으로 가나안을 향해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까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해왔던 전쟁의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전쟁의 과정(3-7)

전쟁은 무기와 전력에서 승패를 가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대로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승리의 보장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노력보다 더 크고 더 풍부한 것이 될 것입니다.

 

3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산 왕 옥과 그의 모든 백성을 우리 손에 넘기시매 우리가 그들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4그 때에 우리가 그들에게서 빼앗지 아니한 성읍이 하나도 없이 다 빼앗았는데 그 성읍이 육십이니 곧 아르곱 온 지방이요 바산에 있는 옥의 나라이니라 5그 모든 성읍이 높은 성벽으로 둘려 있고 문과 빗장이 있어 견고하며 그 외에 성벽 없는 고을이 심히 많았느니라 6우리가 헤스본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 성읍들을 멸망시키되 각 성읍의 남녀와 유아를 멸망시켰으나 7다만 모든 가축과 그 성읍들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3-7)

 

교만하면 건재할 수 없고, 하나님을 대적하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나가서 싸웠고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바산은 남김없이 무너졌고 허망하게 멸망했습니다.

 

(1) 바산 왕 옥을 승리케 하신 하나님(3-5)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산 왕 옥과 그의 백성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헤스본의 시혼의 경우처럼 똑같이 그들을 온전히 진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전쟁으로 아르곱의 전 지역에 있는, 60개의 성벽이 높은 성읍과 그 외에 성벽이 없는 마을들도 모두 정복하였으며(민 32:33; 수 9:10; 시 135:10-11; 136:18-22), 거주민들과 도시들이 진멸에 처해졌고, 그곳에 있던 가축들과 탈취물들은 이스라엘이 소유하였습니다.

 

이제 정탐꾼들이 두려워했던 두 가지(거인 족속과 하늘에 닿을 듯한 높은 성벽) 중 하나인 ‘높은 성벽’가진 도시들도 정복해낼 수 있는 담대함과 능력을 갖게 됩니다(3b).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두려워했던 대상은 전혀 없어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승리의 결과, ‘우리’의 사용, 이스라엘이 실제로 참여하는 진멸의 수행, 그리고 두려움의 소멸[‘우리에게 너무 높아 (정복하기 어려운) 요새는 없다’]과 같은 시혼과 옥과의 전투에서 나타난 병행적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시혼 이야기에서는 ‘요새화된 도시들의 수’에 대한 언급이 없고, 옥 이야기에서는 ‘선행적인 평화제의(提議)의 언급’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혼과 바산과의 전쟁해서 점점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거대한 사람들과 철옹성과 같은 성들, 그리고 이스라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군사력이 있었지만, 그들을 정복하면서 이기는 습관을 배워가고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승리하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2)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5-6)

 

바산 왕 옥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너무 심했고 악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심판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해렌 전쟁으로 심판하십니다. ‘그 성읍들을 멸망시키되 각 성읍의 남녀와 유아를 멸망시켰으나’(6b), 탈취한 물건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소유물로 삼았습니다(7).

 

하나님께서는 헤스본의 시혼의 경우처럼 똑같이 바산 왕 옥과 그 백성들을 온전히 진멸하였습니다. 바산 왕 옥의 나라는 남김없이 무너졌고 허망하게 멸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담대함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전초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와 기업이 아니면 그것은 잠깐의 영화일 뿐입니다.

 

전쟁의 결과(8-11)

세상은 많은 것을 준비해야만 안전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일을 기억할 수 있도록 증거를 남기며 후손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는 개인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공동체와 후손 대대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념하는 증거가 됩니다.

 

8그 때에 우리가 요단 강 이쪽 땅을 아르논 골짜기에서부터 헤르몬 산에까지 아모리 족속의 두 왕에게서 빼앗았으니 9(헤르몬 산을 시돈 사람은 시룐이라 부르고 아모리 족속은 스닐이라 불렀느니라) 10우리가 빼앗은 것은 평원의 모든 성읍과 길르앗 온 땅과 바산의 온 땅 곧 옥의 나라 바산의 성읍 살르가와 에드레이까지이니라 11(르바임 족속의 남은 자는 바산 왕 옥뿐이었으며 그의 침상은 철 침상이라 아직도 암몬 족속의 랍바에 있지 아니하냐 그것을 사람의 보통 규빗으로 재면 그 길이가 아홉 규빗이요 너비가 네 규빗이니라)(8-11)

 

모세는 헤스본과 바산을 점령한 후, 그 빼앗은 땅이 얼마나 되는지 정리해 백성에게 알렸습니다. 남으로 모압과 경계를 이루는 아르논 골짜기에서부터 북으로 다메섹 동편의 헤르몬 산까지, 요단 동편 땅이었습니다. 또한 바산 왕 옥이 사용하던 거대한 철 침상이 암몬의 수도 랍바에 승리의 기념품으로 남아 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동편에 있던 헤스본의 시혼과 바산의 옥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얻은 땅들은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 산까지, 즉 미쇼르, 길르앗, 바산 지역을 가나안 땅 동편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모든 땅을 망라하였습니다. 이 모든 땅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10).

 

여기에서는 부연설명이 두 차례 등장합니다(3:9,11), 2:11에서 각 나라마다 한 족속(르바임 혹은 에밈)을 부르는 이름이 달랐던 것처럼 9절에서는 시돈 사람들과 아모르 족속이 헤르몬 산 지역을 각각 ‘시론’과 ‘스닐’이라고 부르던 상황을 언급합니다. 이는 아마도 두 종족 사이에 헤르몬 지역을 소유하기 위한 첨예한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명의 전환은 소유와 정복의 결과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결국 이스라엘이 이 모든 지역, 특별히 바산의 남쪽 국경도시들(‘살르가와 에드레이까지’)까지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바산 지역마저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요단 이쪽 땅, 곧 요단 동편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최남단의 모압과 경계를 이루는 아르논 골짜기부터 멀리 북쪽의 헤르몬 산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점을 언급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갖게 된 군사적 혹은 영토적 우월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이 모든 곳을 이스라엘에게 넘겨 주사 기업으로 삼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요단강 동편에서 생긴 몇 가지 선례들을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요단 서편에 위치한 일곱 개의 도시국가들과의 임박한 전쟁에서 확실히 승리할 것을 미리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들을 정복하고 분깃을 나누는 일도 동일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2:24-25에서의 약속처럼,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의 아모리 족속들 시혼과 옥과의 전쟁을 통하여 얻은 승리로 인해 많은 나라들(특별히 가나안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떨고 근심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압과 대면한 것은, 여기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요단 동편 아모리 족속들과 성공적으로 전쟁을 마무리한 후의 일이었습니다(민 22장 이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많은 일들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이제 장차 요단강 서편 또한 지금까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그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삼상 12: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을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해서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그대로 얻은 것입니다.

 

추가적으로 13절에는 아마도 당시에 이스라엘에게 우호적이었던 암몬 족속의 랍바라는 곳에 남아 있었던 르바임 족속의 생존자였던 바산의 옥의 철침대의 거대한 크기(“장이 아홉 규빗이요 광이 네 규빗”)가 언급됩니다. 거인족의 후예였던 옥의 유물의 재질과 크기는 그의 위대함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이 단락은 헤스본의 시혼과 바산의 옥을 제거함으로써 요단 동편에 거하던 크고 두려운 존재인 아모리 족속을 완전히 섬멸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한 자들이 바로 여호와의 영도 하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2:11, 20-23; 3:11,13).

 

하나님께서 함께 행하신 놀라운 경험을 과거로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에 대해 정리하고 남김으로써, 시련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기억하며 후대에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일을 기억할 수 있도록 증거를 남기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이는 개인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공동체와 후손 대대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념하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의 현실도 이와 같습니다. 돈, 권력, 폭력, 성(sex)이란 거인이 우리를 삼키려고 다가옵니다. 부조리한 현실에서 도무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을 것 같은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보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광야에서 훈련을 받은 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담대하게 살아가면, 항상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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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2-02)

 


새롭게 시작한 정복 전쟁

신명기 2장 26-37절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함께 살면서 이방인의 사상에 오염되지 않길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정결된 삶을 위하여 죄의 원인을 미리 제거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은 자신을 더럽히는 죄와 죄의 가능성에 대해서 단호하게 척결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삶에 진멸되어야할 죄의 요소들은 무엇입니까? 거짓말, 불평, 폭력, 도박, 게으름, 성적 탐닉 등이 있습니다. 친숙하게 동거하는 것들과 전쟁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코 진멸되어야할 죄의 요소들과 타협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이어서 그들이 모압 국경 아르논 계곡을 넘은 후 강력한 대적인 아무리 족속과 맞선 일들을 회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지 아래쪽 그레못 광야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사신을 보내 아모리 왕 시혼과 협상을 시도합니다. 그레못은 이미 아모리 족속의 영토로서 헤스본 왕 시혼의 실효적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헤스본 왕 시혼과의 협상(26-30)

하나님의 사역을 해나가면서 명분(名分)만으로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할 순 없습니다. 당사자의 동의나 합의 없이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라고 주장하며, 타인과 공동체에게 무리하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헤스본 왕 시혼과의 협상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갑니다.

 

26내가 그데못 광야에서 헤스본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평화의 말로 이르기를 27나를 네 땅으로 통과하게 하라 내가 큰길로만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 28너는 돈을 받고 양식을 팔아 내가 먹게 하고 돈을 받고 물을 주어 내가 마시게 하라 나는 걸어서 지날 뿐인즉 29세일에 거주하는 에서 자손과 아르에 거주하는 모압 사람이 내게 행한 것 같이 하라 그리하면 내가 요단을 건너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르리라 하였으나 30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26-3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모압과 암몬 자손들과 싸움을 금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자기 부인의 정도를 시험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비록 수적으로 우세했을지라도 그 부족들에 대하여 어떤 공격도 감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비옥한 영토를 조용히 통과하자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의 영토를 소유로 주심으로써 순종에 대한 보답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아르논 골짜기를 통과하여 아모리인들의 땅으로 진입했습니다. 이 아르논 일대는 모압과 접경 지역입니다. 국경 수비가 허술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통과한 뒤 북진하여 비스가 산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민수기와 상충하는 진술이 또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모세가 사신을 보낸 곳이 ‘그데못 광야’인 반면, 민수기에서는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비스가 산꼭대기’였습니다(민수기 21:20). 이 문제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비스가 산의 북쪽은 모압 광야인 반면 남쪽은 그데못 평지인데, 그곳이 넓은 의미로 비스가 산지로 간주되었을지 모릅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이 일단 그데못에서 사신을 보낸 뒤, 계속 여행하여 비스가 산에서 신신을 보냈다는 말이 충분히 성립될 수 있습니다. 민수기 21장 13-19절에 아르논 계곡 도하 이후의 여행 목록을 살피면 후자의 개연성이 더 큽니다. 그들은 일단 ‘아르논 강 건너편에 진을 쳤는데’(민수기 21:13), 그곳이 그데못 광야이고 거기서 시혼에게 사신을 보냈을 것입니다. 이후 14절 이하에 나온 대로 아르논 북쪽 일대의 몇 군데를 거쳐 마침내 비스가 산에 도착합니다(특히 18절의 ‘광야에서 맛다나에 이르렀고’에서 이 광야는 그데못 광야일 수 있다).

헤스본 왕 시혼과의 협상 과정 또한 민수기 21장 21절 이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돔과 모압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혼에게 평화적 협상을 위해 사신을 보내 영토를 지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26; 민수기 21:21). 에돔과 모압을 통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큰길로만’ 지나면서 어떤 재산상의 피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식량과 물을 사서 먹겠다고 제안했습니다(27-28; 민수기 21:22). 하지만 아모리 왕 시혼은 이스라엘의 통행을 거부했으며(30) 국경 방어에만 치중했던 에돔과 달리 공격까지 합니다(32; 민수기 21:23).

여기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진술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혼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시고 완고하게 하셨다는 발언입니다. ‘완강하다’와 ‘완고하다’는 이미 애굽에서 파라오에게 적용되었던 완고한 심리를 나타내는 동사들입니다.

앞서 2장 2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사람 시혼과 더불어 싸워서 그 땅울 차지하라’고 명령하신 반면, 곧바로 26절에서는 모세가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의 협상안을 제시합니다. 과연 모세가 제안한 협상은 하나님의 의도였겠습니까? 우선 평화로운 협상의 시도는 명백히 신명기 20장 10절 이하의 규정에 의해서도 정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성읍을 치려할 때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거부하면 전쟁을 개시하여 그들을 진멸해도 됩니다(신명기 20:10-13). 흥미로운 것은 파라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모리 왕 시혼의 거친 심리는 하나님께서 시혼 왕을 ‘완강하게, 그리고 완고하게 만드신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즉, 시혼 왕은 파라오와 같은 자임이 암시됩니다. 시혼 역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고하게 만드시는 이유 또한 동일합니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30).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대적들을 이스라엘에게 넘기시려고 그들을 완고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미리 전쟁을 명령하신 것이며, 아무리 족속과 그들의 왕 시혼은 단지 전쟁에 이르는 협상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완악한 마음을 드러내 진명의 대상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시호 격파와 헤렘 전쟁 수칙 준수(31-35)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 기울이고 순복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임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무단히 노력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31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시혼과 그의 땅을 네게 넘기노니 너는 이제부터 그의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으라 하시더니 32시혼이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야하스에서 싸울 때에 33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넘기시매 우리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을 쳤고 34그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그의 각 성음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35다만 그 가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31-35)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시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믿을 만한 존재인지를 증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 40년의 행보는 이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 얼마나 할 말 없는 악행이고 어리석음인지 보여줍니다.

 

⑴ 시혼을 격파함(31-33)

 

협상이 결렬되자 하나님께서는 즉시 시혼 왕과의 전쟁을 선포하십니다. 이제 시혼 왕의 영토는 이스라엘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32). 시혼이 먼저 공격을 해왔습니다. 시혼은 야하스에서 이스라엘과 격돌했습니다. 아마 이곳은 이스라엘이 아직 느보 산에 도착하기 전에 숙영을 한 비스가 산악 지역 아래쪽에 위치한 지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과 맞선 끝에 물리쳤는데, 앞서 건너온 아르논 골짜기로부터 멀리 얍복 강에 이르기까지 아모리 인의 땅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후대의 선지자 아모스의 회고적 기록에 따르면 이때 이 지역의 아모리 족속은 백향목처럼 장대하고 상수리 나무처럼 강했다(아모스서 2:9).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그 무적의 종족을 무찌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시혼 땅의 모든 성읍을 정복하고 또한 각 성읍에 살던 모든 사람을, 즉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심지어 유아까지 진멸했습니다.

 

⑵ 헤렘 전쟁(34-35)

 

하나님께서는 시혼 땅에 살던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은 무자비한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진멸하다’를 의미하는 단어의 의미는 ‘전적 봉헌’이며 명사는 헤렘(םרח)입니다. 특별히 ‘헤렘 전쟁’은 진멸 전쟁으로 인간이 그 전쟁으로부터 전리품이나 소유물, 나아가 포로도 사로잡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전쟁입니다(신명기 20:10-18). ‘헤렘 전쟁’의 규칙은 대상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가나안 족속의 경우 모든 사람을 죽이는 철저한 진멸이고 비(非)가나안 족속은 남자만 죽입니다. 현재의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의 대표 족속으로 전자의 기준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정서상 매우 불편하게도 헤렘 전쟁에서는 여성과 유아까지 모두 죽여야 합니다. 가나안 전쟁은 헤렘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헤렘 전쟁은 신학적 관점에서는 일종의 심판 전쟁이며, 마땅히 인간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징벌을 받는 셈이었습니다(창세기 15:16; 신명기 9:5). 아브라함 때에는 아모리 족속(가나안 족속)의 죄가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약 400년(창세기 15:13)을 기다려야 했습니다(창 15:16). 그 후 가나안 족속의 악이 가득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땅에서 쓸어내셨으며 이 것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셨던 맹세를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신명기 9:5). 그들이 진멸 당한 이유는 가중한 죄악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가 임계량을 넘겼을 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은 결국 심판을 실행하신다. 노아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 장차 있을 인류 최후의 심판도 하나님의 정당한 헤렘 심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죄의 대가를 치를 뿐이며, 이런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잔인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시혼 땅(길르앗)의 점령지(36-37)

항상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순종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나 고집스러운 사람은 어려움에 빠지고 패망하게 됩니다. 더 이상 두려워할 대적도, 정복하지 못할 성읍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36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에 있는 아로엘과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성읍으로부터 길르앗까지 우리가 모든 높은 성읍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37오직 암몬 족속의 땅 얍복 강 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들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가기를 금하신 모든 곳은 네가 가까이 하지 못하였느니라(36-37)

 

이스라엘이 점유한 헤스본 왕 시혼의 영토 범위가 대략적으로 묘사됩니다. 그것은 아르논 골짜기에서 가까운 아로엘과 그 골짜기 주변의 성읍들로 시작하여 길르앗에 이릅니다. 여기서 길르앗은 얍복 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넓은 평원을 의미합니다. 그 너머는 바산 평원으로 바산 왕 옥이 다스리고 있는 영토였습니다. 민수기 21장 25-32절에서 확인되듯이, 이스라엘은 아모리 족속의 성읍들을 모두 정복했으며 그들의 수도 헤스본과 위성 촌락들을 모두 빼앗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 곧 그 땅이 모두 그들의 수중으로 넘어왔음을 의미했습니다. 과거 헤스본은 원래 모압 왕의 영토였으나 아모리 족속이 모압을 물리치고 아르논까지 모압을 밀어내 그곳을 국경으로 삼았습니다(민수기 21:26).

그러나 그 지역이 이제 이스라엘의 수중으로 넘어왔습니다. 얍복 강 주변은 당시 암몬 땅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서 진격을 멈추었다. 민수기 21:25에서 보고하는 대로 암몬은 강력했고 국경 수비 또한 견고했기 때문이며, 그보다 중요하게는 하나님께서 그들과의 전쟁을 금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믿는 일에 완고하기에 그들의 저항과 방해는 반드시 수반됩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는 신앙은 없고 저항을 요구하지 않는 신앙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저항은 그분을 믿는 자들과 불신자들에게 모두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알게 하는 하나님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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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2-02)

 

 


아르논 시내 도하와 모압 땅 통과

 

신명기 2장 16-25절


인간에게 죽음은 끝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때가 이르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도 죽음이 끝이겠습니까?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세대의 죽음 이후에 시작된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보여 주십니다.

 

모든 출애굽 세대가 사망한 후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날 때 암몬 족속과 싸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땅은 롯 자손에게 주신 기업이었습니다. 암몬 족속은 르바임의 땅을, 에서 자손은 호리 자손의 땅을 점령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헤스본 왕 시혼과 싸워 그 땅을 차지하려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정하심(16-19)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어떤 복을 주시고 어떤 사명을 주실 것인지 계호기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섬기는데도 불구하고 힘들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자신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데 왜 이렇게 삶이 힘들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주시지 않았을 뿐,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가장 좋은 것으로 곧 채워 주실 것입니다.

 

16모든 군인이 사망하여 백성 중에서 멸망한 후에 17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네가 오늘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리니 19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16-19)

 

하나님께서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자손을 광야 길로 들어가게 하셨고, 그 출애굽 세대 사람들을 모두 광야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죽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제거해야 할 죄악인 불순종이 있었습니다.

 

(1) 출애굽 세대의 전원 사망(16-17)

 

세렛 시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을 거역했던 자들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16). ‘모든 군인이 사망하여’에서 ‘모든 군인’은 출애굽 세대의 군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광야에서 모두 죽어 이스라엘은 이제 새로운 세대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에게 주어집니다. 모세는 계시의 통로이며 하나님의 대변인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말씀을 실행할 때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2) 암몬을 지날 때 주의할 사항(18-19)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에게 임했을 때 이스라엘은 모압 경계를 지나 암몬의 국경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를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암몬 자손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소유로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롯의 아들들에게 그 땅을 소유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각 민족에게 기업을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납니다.

 

르바임 땅을 암몬 족속에서 주심(20-23)

이스라엘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장대한 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그 여정 가운데 깨닫게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20(이곳도 르바임의 땅이라 하였나니 전에 르바임이 거기 거주하였음이요 암몬 족속은 그들을 삼숨밈이라 일컬었으며 21그 백성은 아낙 족속과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컸으나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 앞에서 그들을 멸하였으므로 암몬 족속이 대신하여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22마치 세일에 거주한 에서 자손 앞에 호리 사람을 멸하심과 같으니 그들이 호리 사람을 쫓아내고 대신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거주하였으며 23또 갑돌에서 나온 갑돌 사람이 가사까지 각 촌에 거주하는 아위 사람을 멸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거기에 거주하였느니라)(20-23)

 

앞서 설명한 대로 암몬 땅의 원주민은 ‘삼숨밈’이라 불린 거인족이었습니다. ‘삼숨밈’은 모압 사람들에게는 에밈 사람이라 불린 르바임(거인들)입니다. 더 나가서 여기서 해안을 점유하고 있던 갑돌 사람들의 유래를 덧붙입니다. 갑돌 사람은 블레셋 족속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들은 해안 지대 원주민이었던 아위 사람들을 격파하고 그곳을 차지했습니다.

 

(1) 암몬 땅을 지나면서(20-21)

 

모세는 암몬 땅을 지나면서 어떻게 암몬 사람들이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이전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암몬이 차지하고 있는 땅은 원래 강하고 많고 장대한 르바임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을 통해 그들을 멸하셨기에, 암몬 족속이 르바임 족속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20-21). 암몬은 그들을 ‘삼숨밈’이라고 불렀습니다(참조, 11). 르바임 사람들은 크고 강한 백성으로, 아낙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 앞에서 그들을 멸하셨으므로”라는 표현에 잘 나타납니다. 이 표현에 따르면, 르바임 사람들을 멸망시킨 것은 암몬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암몬 사람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암몬 사람들이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족속들이 강하다는 이유로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원망했던 이스라엘이 얼마나 어리석던가를 잘 보여 줍니다.

 

(2) 에돕 족속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22-23)

 

모세는 에돔(에서 자손)이 세일 산에 살던 호리 사람들을 멸하고 그 땅을 차지한 것이나 갑돌 사람이 아워 사람들을 멸하고 그 땅을 차지한 것이나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을 위해 행하신 일은 에서의 후손을 위해 행하신 일과 유사합니다. “호리 사람을 멸하심과”의 원어는 ‘그가 호리 사람들을 그들 앞에서 멸망시키셨다’라는 뜻으로, 주어는 ‘그’, 즉 여호와입니다. 여호와께서 호리 사람들을 에서의 후손 앞에서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후손들이 그 땅을 점령하고 정착해 살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역사 속에서 행동하십니다.

가사 지방에 살고 있는 ‘갑돌’은 전통적으로 지중해의 크레타 섬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70인역과 아람어 성경들, 탈굼 옹켈로스, 탈굼 네오피티, 탈굼 프쉬도 요나단은 갑돌을 소아시아 지방의 갑바도기아로, 갑돌 사람을 갑바도기아 사람들로도 해석합니다. 성경의 다른 본문들에서는 갑돌이 블레셋 지역으로도 나옵니다(창 10:14; 렘 47:4; 암 9:7).

 

아르논 강을 건넘(24-25)

고대 전쟁은 현대 전쟁과 달리 심리전이 중요합니다. 고대의 전투는 전적으로 백병전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보고 칼과 창으로 싸워 죽여야 합니다. 군인들의 사기가 전투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군인들의 심리 상태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단 동편의 땅 정복 전쟁에 함께하셔서 심리전을 펼치십니다.

 

24너희는 일어나 행진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은즉 이제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라 25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24-25)

 

이스라엘은 에돔, 모압, 암몬을 치지 말라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인내의 시간 후에 드디어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의 때를 기다린다면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1) 아르논 시내 도하(24)

 

드디어 이스라엘은 요단 동편에서 정복할 수 있는 땅에 이르렀습니다. 아르논 골짜기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이 다스리는 땅에 이르렀습니다. 세렛 골짜기와 더불어 아르논 골짜기는 중요한 국경선입니다. 아르논 계곡은 당시 모압의 북쪽 국경선으로 그 건너는 아모리 족속의 땅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헤스본 왕인 아모리인 시혼과 맞닥뜨립니다. 드디어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정복 전쟁의 전초전으로서 요단 동편 종족들과의 전쟁이 명령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너희는 일어나 행진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문장은 ‘일어나라. 여행하라. 그리고 아르논 골짜기를 지나가라’라는 명령형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개역개정에는 생략되었지만,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 뒤에 “보라”라는 명령형이 나옵니다. 이 말은 땅과 관련해서 계속 나옵니다(1:8,21; 2:24,31). 다시 번역하면 “보라 내가 아모리 헤스본의 왕 시혼과 그의 땅을 너의 손안에 주었다. 시작하라. 점령하라. 그리고 그에 대항해 전쟁으로 싸우라!”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실패한 이후로 지금까지 전투를 경험하지 못한 채 38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지 시혼이 둔데를 이김으로써 천하 만민이 두려워할 만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은 즉”에서 주어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네 손에 넘겼은 즉”의 원문은 ‘너의 손안에 주었다’라는 뜻으로, 시혼을 이스라엘의 세력 아래 두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손’은 ‘권세’,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혼을 이스라엘의 세력 아래 두셨기에 이스라엘이 시혼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시혼의 땅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형제 국가들, 즉 에돔, 모압, 암몬과는 싸우지 말라고 하셨지만, 아모리 사람 시혼과는 싸우라고 명하십니다. 이 명령으로 이스라엘의 요단 동편 전쟁이 시작됩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땅 정복은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에서 가나안 땅 정복은 요단강을 건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2) 두려움의 대상이 이스라엘(25)

 

하나님께서 이제 행하실 일을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전쟁을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라는 “내가 너의 공포와 너의 두려움을 모든 하늘 아래에 있는 그 백성들 앞에 두기 시작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라는 표현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너의 공포와 너의 두려움’은 전쟁 직전의 심리 상태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공포와 두려움을 아모리 사람들에게 옮겨 놓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심리전을 행하십니다. 아모리 사람들도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을 더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공포와 두려움은 사라진 반면, 아모리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은 배로 증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은혜를 베푸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 온 세상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때 우리는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와 복을 기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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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2-01)

 


과거의 승리를 회상

신명기 2장 1-25절


 

인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만 가질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 한다면 그것은 탐욕이요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해 주신 것 외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썩어질 것을 바라보며 욕심을 품기보다 하나님께서 그 풍성하신 은혜로 허락하여 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과 삶에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불순종에 대한 심판이 끝나자 하나님은 다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통과할 땅은 조심스럽게 지나가야 하지만 정복할 땅은 싸워서 차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에서나 모압 족속과 싸우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걸린 기간은 38년입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의 손이 치셔서 출애굽 1세대가 다 멸망합니다.

 

에돔 영토 진입과 그 원칙들(1-7)

하나님께서 잘 해주실 때는 찬양하고 헌금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잠깐이라도 불편하게 하면, 하나님을 모른 체하거나 뜻을 배반하기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평생 한다고 할지라도 남는 것은 마음의 거짓 위안을 뿐 진정한 신앙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성령이 없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강한 힘은 절제하고 조심스럽게 사용할 때 더욱 빛을 발합니다.

 

1우리가 방향을 돌려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여러 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다녔더니 2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너희가 이 산을 두루 다닌 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 4너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5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6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고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1-7)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힘들고 고달 푼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내온 광야 여정을 간략하게 회상합니다.

 

⑴ 여호와를 따라 순종한 길(1)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는 과정에서 불순종으로 지내왔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마지막 명령을 되돌리면서, 이스라엘이 더 순종적인 행위로 돌아가고 따라서 1장 19-46절의 파멸과는 대조적으로, 뒤이은 두 장의 긍정적인 향취에 이르는 길을 준비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만나는 세 나라, 에돔과 모압과 암몬은 결코 전쟁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형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이고, ‘모압’과 ‘암몬’은 롯에 후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방향을 돌려 아카바만으로 난 홍해 길을 통해 광야로 다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에돔 땅 변경의 세일 산 일대를 여기저기 떠돌며 유랑했습니다.

 

⑵ 에돔의 땅에 진입(2-7)

 

하나님께서는 북으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북으로 올라가라는 명령을 볼 때 우선 그들이 남쪽에 내려와 있다가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거기서 에돔 국경을 통과한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2장 8절에서 보듯이, 이후 그들은 분명히 에돔 변방의 국경선을 따라 다시 남쪽의 에시온 게벨 근처까지 내려왔다가 왕의 대로를 통해 에돔 땅 중앙을 관통하여 북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북으로라는 뜻은 세일 산 북쪽 방향이라기보다는 요단 동편으로의 전체적인 여행 방향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북으로’는 에돔과 모압 땅을 경유하여 요단 동편에 이르는 북쪽 여행을 시작하라는 출발 신호일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에돔 땅을 통과할 때가 되었지만,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초기에 에돔 통과를 시도하다 좌절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정탐꾼들의 선동에 동조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를 배회할 것이 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에돔을 통과하려던 그들 계획의 실패는 예견되어 있었습니다(참조, 민수기 20장). 이스라엘은 에돔과의 싸움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에돔을 우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명기 2장은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두 번째 에돔 통과를 위한 시도에 대한 회상입니다. 민수기 21:4-13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에돔을 통과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으나, 여기에 그 과정이 상술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자 이제 북으로 행진하기 위해 에돔을 통과하게 될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돔 통과를 위한 원칙이 제시됩니다. 첫째, 전쟁은 허용되지 않습니다(5). 둘째, 그들에게 식량과 물을 위한 충분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말아야 합니다(6). 하나님께서는 에돔이 국경 통과를 허용한다 해도 그들은 압도적 인구의 이스라엘을 두려워할 것이니 스스로 깊이 삼가서 절대 그들을 자극해선 안 된다고 당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에 부족함 없이 필요한 것을 늘 채워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부족함이 없다’는 다윗의 고백이기도 합니다(시편 23:1). 다윗에게처럼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따라서 에돔에게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고 해도 근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소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에돔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떠돌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을 도와서 애굽을 물리치고 그 대제국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역사하신 여호와 하나님 때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다가온다면 자신들의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들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면 세상은 우리를 보며 무서워 떨지 않습니다. 항상 우리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은 우리 앞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능력을 과시하고 증명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안전한 길이고 의미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 여정에서 첫 번째 부딪힌 상대는 세일 산을 중심으로 살고 있던 에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싸우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미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고 있고, 또한 그 땅이 에돔 사람들에게 주신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거쳤음에도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아 넉넉하게 살고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강한 군사력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윤택한 삶을 통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언제나 그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부드러운 배려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법입니다.

 

세렛 시내 도하와 모압 영토 진입(8-15)

중요한 것은 ‘말씀(약속)의 신실함’이지 ‘적들의 전력’이 아닙니다. 옥죄는 현실보다, 위협하는 세상보다, 더 크신 주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구해야 합니다. 오랜 기다림과 많은 고난을 통해 힘겹게 얻은 것일수록 더욱 값지게 여겨집니다.

 

8우리가 세일 산에 거주하는 우리 동족 에서의 자손을 떠나서 아라바를 지나며 엘랏과 에시온게벨 곁으로 지나 행진하고 돌이켜 모압 광야 길로 지날 때에 9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10(이전에는 에밈 사람이 거기 거주하였는데 아낙 족속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크므로 11그들을 아낙 족속과 같이 르바임이라 불렀으나 모압 사람은 그들을 에밈이라 불렀으며 12호리 사람도 세일에 거주하였는데 에서의 자손이 그들을 멸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같았느니라) 13이제 너희는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 하시기로 우리가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14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15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8-15)

 

전쟁에서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언제나 그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부드러운 배려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 여정에서 첫 번째 부딪힌 상대는 세일 산을 중심으로 살고 있던 에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싸우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미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고 있고, 또한 그 땅이 에돔 사람들에게 주신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⑴ 모압 땅을 통과 원칙들(8-12)

 

이스라엘은 세일 산 일대의 형제 국가 에돔을 통과한데 이어 모압 땅마저 통과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일단 그들은 에돔 땅에 진입한 뒤 동남쪽으로 홍해를 향해 남하하여 아라바 광야를 지나 남쪽의 엘랏과 에시온게벨 근처를 지나갑니다. 에시온게벨은 아카바 만에 위치한 항구 도시였는데, 그들은 그 위쪽을 우회해서 왕의 대로로 진입해 북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돔의 북쪽 국경을 넘어서 그들은 ‘모압 광야 길’로 진입했습니다. 에돔의 북쪽 국경은 아래 13절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세렛 시내’입니다.

여기서 ‘모압 광야’는 분명 모압 영토 너머 요단 동편의 넓은 평지인 모압 광야(당시 아모리 족속의 점령지)가 아닌 모압 영토 내의 들판을 의미합니다. 모압은 암몬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피붙이 민족이기 때문에 대적해서 싸우는 것이 금지됩니다.

 

10-12절은 모세의 말이 아닌 해설자가 모압의 역사를 간략히 묘사한 일종의 설명구입니다. 모압 영토는 원래 에밈이라 불리는 거인 족속이 거주하던 땅이었습니다. 에밈 사람은 역시 거인 족속으로 알려진 아낙 자손에 비견되었습니다(신명기 1:28). 에밈 족속을 20절에서 볼 수 있듯이 암몬 사람들은 ‘삽숨밈’이라 호칭했습니다. 당시 거인 족속은 아낙 자손 외에 르바임으로도 불렸습니다(11). 르바임(르파임)은 크고 힘이 센 ‘거인들’, ‘거인족’이란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편, 에돔 족속은 세일 산에 거주하던 토착민 호리 족속(거인족은 아니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점유했습니다(12). 여기서 땅과 관련된 중요한 신명기의 신학적 진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신 것처럼 모압과 에돔과 암몬에게 직접 땅을 하사하셨습니다(9,12,19). 이것은 모압과 에돔과 암몬에게 땅을 주시고, 그들이 그 땅의 거인족 원주민들을 몰아낼 수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⑵ 세렛 시내의 도하(13-15)

 

광야 여정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순간에 대한 회고입니다. 그들은 ‘세렛 시내’를 건넜습니다. 이 세렛 골짜기는 에돔의 북쪽 국경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3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모세는 세렛 시내 도하를 그들에게 참으로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특별한 사건으로 회고합니다. 아마도 에돔 국경 통과가 특별한 사건으로 회고합니다. 아마도 에돔 국경 통과가 좌절되어 오래도록 에돔 변방의 세일 산 일대와 인근의 바탕을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별히 1세대의 군인들 모두가 이 세렛 시대를 건너지 못했다는 것도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특이하게도 이스라엘의 장정들이 ‘군인들’(전쟁의 남자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의 행군은 일종의 군사적 대열의 이동이었기에 에돔과 모압은 그들을 크게 경계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손쉽게 선물로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으로 인해 38년이라는 세월을 더 방황한 후에야 비로소 다시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던 자들은 다 멸망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먼 길을 돌아서 마침내 에돔과 모압 사이의 경계인 세렛 시내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압 사람들과도 싸우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에돔도, 모압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들에게 주신 땅을 정복했지만, 이스라엘은 아직 땅 없는 백성이라는 사실이 서로 비교가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 기다렸으니 그들이 곧 얻게 될 가나안 땅의 선물은 더욱 소중할 것입니다.


광야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을 연단하고 양육시킨 은혜의 기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삶에 허락하신 고난의 의미를 돌아보고, 고통을 선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케 해야 합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민수기 13:33)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120세 모세가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 나이에 가나안 정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그가 사라져야 다음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소신껏 지도자로서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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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1-04)


잃어버린 기회를 회상

신명기 1장 34-46절


‘기록한 역사’는 의미 없이 문자로 기록해 보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록’을 통해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록을 소홀하게 다루면, 그 역사를 여지없이 되풀이 하고 맙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시대적인 환경은 달라져도 인간 자체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과거 사람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대하였고, 같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를 살펴보면서 역사를 통해 교훈을 삼기 위한 것입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불신에 노하셔서 여호수아와 갈렙과 어린아이들 외에는 아무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불신에 노하셨습니다. 방향을 돌려 광야로 들어가라고 명하시자 백성은 그제야 잘못을 깨닫지만, 반성하면서도 그들은 경솔하게 올라가지 말라고 명하신 산지를 올라갔다가 아모리 족속에게 패하고 맙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34-37)

살아있는 신앙은 소문으로 듣는 간접적인 누군가의 체험을 통한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살아 있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바라본 사람만 들어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34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35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36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37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34-37)
 
성경에서는 사람들에게 자의적인 선택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광야 사건을 기록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은혜로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하든지 약속하신 땅을 주신다면, 모세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신명기를 기록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모세는 광야 시대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2세대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 약속하신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축복뿐만 아니라 경고도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⑴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34-35)
 
열 두 명의 정탐꾼들 중에서 열 명의 보고는 그 땅에 기골이 장대한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세력들이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민수기 14장). 이스라엘 백성은 탄식하고 절망하며 밤새 울부짖으며 불평불만을 쏟아 냈던 것을 살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미워하셔서 광야에서 죽게 하시도록 출애굽 시켰다고 생각하고 해괴망측한 불신의 말들을 쏟아내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과 반역은 그들의 행동 지침에서 반영 됩니다. 그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다시 뽑아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하면서, 하나님의 대리 통치권을 지닌 모세와 아론을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무섭지 않고 만만했던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입니다.
이런 불신앙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격노하셨습니다(34).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도 잘 모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없고, 하나님의 은혜만 추구하는 자들은 사실상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우상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황금 송아지 하나님’ 즉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잊은 백성들에게 화를 내십니다. 그들을 향해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35)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기로 한 땅은 좋았지만, 그 땅에 거할 사람들은 좋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신앙을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출애굽 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⑵ 지도자인 모세(37)
 
가나안 땅은 불신앙으로 가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도자 모세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37)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 때문에 자신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민수기서에 보면, 모세 역시 그가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수기 13장). 그 이유는 두 가지 다 맞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때에 가나안 땅을 올라가기로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80세의 모세에게 맡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 때문에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민수기 13:3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나이가 120세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120세 모세가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 나이에 가나안 정복까지 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그가 사라져야 다음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소신껏 지도자로서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 않는 일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아니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신앙대로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겠다고 하면, 그 불신대로 될 것입니다. 반대로 믿겠다고 하면, 그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하는 일을 믿어야지 자신이 바라는데로 믿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갈 자들(34-37)

참다운 영성은 영향력 있을 때보다 영향력이 사라질 때 들어나는 것입니다. 때론 자신의 존재감이 사라져 주는 것을 견디는 사람이 진정한 기성인으로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진짜 실력입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다음 세대를 이어갈 지도자를 양육하고 세우는 일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38네 앞에 서 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리라 39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38-39)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하셨지만, 그런 가운데도 그 땅에 들어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선악을 분별치 못하는 어린 아이들은 예외였습니다.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고 신뢰한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약속의 땅에 허락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다음 세대를 책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온전하게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밥이라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데로 될 것이라고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36)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도 빛이 납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여호수아서 14:12)라고 간구합니다. 갈렙이 원했던 이 산지는 정복하기가 어렵기로 유명한 요지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하는 믿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차지하려고 엄두도 내지 않는 땅, 그는 그 땅을 요구했고 결국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받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네 앞에 서 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리라’(38)고 하였습니다. 다음 세대를 이어갈 지도자 여호수아와 갈렘을 키우는 일이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영광스러운 일을 모세가 감당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영광을 누릴 후계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어린아이들만 그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눈앞에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 없음으로 인해 그 땅을 밟아 보지도 못했습니다. 불순종과 불평불만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선물을 얻지 못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던 길도 멈추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취할 자와 취하지 못할 자의 차이는 믿음의 눈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차이와 같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고집한 백성들(40-46)

불순종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큰 단절을 만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들어내는 결정적인 순간에 고백하는 하나님과 너무나 무관하게 결정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뜻만 생각하고 고집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40너희는 방향을 돌려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하시매 41너희가 대답하여 내게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너희가 각각 무기를 가지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가려 할 때에 42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 하시기로 43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거리낌 없이 산지로 올라가매 44그 산지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에게 마주 나와 벌 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 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이른지라 45너희가 돌아와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 46너희가 가데스에 여러 날 동안 머물렀나니 곧 너희가 그 곳에 머물던 날 수대로니라(40-46)
 
이제 가나안 땅은 지금 건장한 부모 세대가 감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광야를 거친 다음 세대,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의지하는 자녀 세대가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부모 세대가 감당할 일은 이 자녀 세대를 가나안 땅을 차지할 만한 사람으로 양육하는 일입니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죄가 큰 잘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⑴ 자기 마음대로 나감(40-43)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처분에 반발했습니다.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할 때는 거부하더니 이제 하나님께서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니 그들은 고집을 부리며 올라가서 싸우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내게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너희가 각각 무기를 가지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가려 할 때’(41)라고 소개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행동을 경솔한 일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4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또 거역하고 고집 부리면서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보는 것입니다.
 
⑵ 고집으로 행한 결과(44-46)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모한 행동에 대한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뻔 한 것입니다. ‘그 산지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에게 마주 나와 벌 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 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이른지라’(44)고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이 싸움에서 패하여 벌 떼처럼 쫓기듯 모든 것을 버리고 호르마까지 도망해야 했습니다. 남는 것은 후회뿐이었습니다. 무엇인가 잘해서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만회는 말씀 앞에 순종이었습니다.
심판을 달게 받는 것이 회개이지 죄의 대가는 받지 않겠다는 마음은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되었으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피해자에게는 보상이나 사과하지 않고 여기저기 피해 다니면서 하나님께 회개했으니 용서 받았다는 사람은 거짓된 회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싸움에 나갔다가 패배하고 돌아와서 결과는 ‘너희가 돌아와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45)라고 통곡뿐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징계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 백성은 때늦은 순종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전에 주셨던 명령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싸움을 하겠다고 결의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말에 귀를 닫으시고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전투를 실행했습니다. 그 결과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하고 가데스로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내 맘대로, 내 필요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가감 없이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듣는 대로 순종하는 성도의 인생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함께 싸워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만 싸우면 패하지만, 자신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게시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고 자신 안에 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도록 해야 모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말씀대로 싸워야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싸움에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전략을 잘 세워야만 효과적으로 적과 대치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전략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지혜나 여론으로 이것을 대신하게 하는 것은 패배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좋은 작전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대적을 굴복시킬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붙들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므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돕지 않으셨습니다. 순종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삶을 방치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길 원합니다. 당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던 태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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