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신명기(06-01)


율법을 듣고 순종해야할 이스라엘

신명기 6장 1-9절


요즈음은 겨울철에도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 있습니다. 채소를 겨울에 먹을 수 있는 것은 비닐하우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닐하우스는 겨울의 찬바람을 막아주고 따뜻하게 해줌으로 식물의 성장하도록 돕습니다. 비닐을 걷어버리는 순간,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모든 식물을 얼어 죽어버린 것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고 성장하게 하는 비닐하우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호막입니다. 거추장스러운 혹이 아니라 자신들을 보호할 보호막입니다. 보호막 안에 있으면 안전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순종의 결과는 축복입니다.

 

본문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는 유일하신 함 하나님이시므로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계명들을 지키며 자손에게까지 가르치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순종에 따른 복의 약속(1-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서 복을 받고 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 자체가 풍요와 번역 그리고 장수를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만 복의 공간이 되어질 것입니다.

 

1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2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3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1-3)

 

본문은 앞 5장의 십계명 단락에서 이어지는 새로운 단락으로 보려고 합니다. 현재 1-3절까지는 그 서언적 강론의 ‘서론’ 부분입니다. 이 서언 부분에 이어 12장부터 본격적인 신명기 율법들이 반포된다는 생각입니다. 이 견해를 따라 본다면, 모세는 십계명에 이어 곧 선포될 제반 율법들에 대한 순종을 강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을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처럼 그들에게 앞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이미 거듭 약속한 바 있습니다. 처음부터 여호와만 예배하고 충성을 받으실 자격이 있는 유일하는 한 분 참된 하나님으로 공경해야 하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세대를 거듭하며 오래 살 것이며 큰 번성을 누릴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신명기 최초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젖이 흐른다는 것은 목축이 잘 된다는 것이고, 꿀이 흐른다는 것은 농사가 잘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은혜로 목축과 농업의 축복이 보장된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순간부터 다양한 이방 문화와 생활방식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경성하지 않으면 이방의 문화와 생활양식에 빠져들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과는 달리, 경외함과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가장 잘 공경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 20:20)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자신과 교제가 단절된 인간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로 인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과 약속된 축복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제정하시고 모세를 통해 반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축복을 깨달은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단 말씀으로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을 기록한 사람은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편 119:103)라고 말합니다. 주의 종들을 통해 공급되어지는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율법에 대한 태도(4-9)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으로 당신만이 유일하신 참 신이요 여호와이심을 입증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만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 내가 네게 명하신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4-9)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⑴ 하나님을 사랑하라(4-5)

 

모세는 후대에 그 유명한 ‘쉐마’라는 제목이 붙은 감동적인 권면을 내놓습니다. 처음 단어인 ‘쉐마(들으라)’는 뜻의 명령형 동사라는 말 때문에 이 제목을 붙었습니다. 명령어 ‘쉐마 이스라엘’(들으라 이스라엘아)은 4:1과 5:1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듣고 준행하라’와 ‘듣고 배우고 행하라’로 번역되어 ‘쉐마’가 서두에 등장해 ‘들으라’로 시작하는 강한 효과가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쉐마’는 이후에도 9:1; 20:3; 33:7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쉐마’는 신명기의 정신과 신학이 고스란히 함축되어 녹아 있기에 매우 특별하고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도 율법의 모든 요약을 이 ‘쉐마’ 헌장을 꺼내 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 12:29-31). 쉐마 헌장은 특별히 십계명 중 첫째와 둘째 계명에 대한 해설적 강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먼저 여호와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심을 인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분을 혼신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삼중적 표현은 전인적 사랑을 요구하는 어법으로 이해됩니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지.정.의가 수반된 사랑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사고에서 ‘마음’(레바브)은 내적인 상태, 즉 생각과 의도의 좌소인(지) 반면, ‘뜻’(네페쉬)은 생기 있는 혼의 작용, 즉 감정과 열정, 욕구의 좌소입니다(정), 그리고 힘을 다하는 것은 ‘베콜 메오드’, 곧 문자적으로 ‘모든 최고의 것으로’, ‘넘침으로’인데 최선을 다한다는 뜻의 의지의 영역으로(의) 볼 수 있습니다.

 

⑵ 말씀을 기억하고 가르치라(6-9)

 

이어서 모세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고 권면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곧 모세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권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 말씀’의 원문은 ‘말씀들’입니다. 우선 십계명은 ‘열 개의 말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들은 십계명을 포함한 제반 율법들, 시내산에서 선포되었던 율법들과 이제 모세가 갱신해서 다시 선포할 율법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해 선포된 이 말씀들을 우선 자신들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마음에 새기다는 문자적으로 마음에 둡니다. 사람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고 갖고 싶은 것을 언제나 마음에 둡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렇게 소중히 탐내야 할 보물입니다. 나아가 그들은 자녀들에게 그것 을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의 가르침과 기억의 강조는 매우 인상적인 연속적 총칭 어법(merism)을 통해 강조됩니다: 집에 앉았을 때에든 길을 갈 때에는 누웠을 때에든 일어날 때에는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해야 합니다(참고로 총칭 어법은 양극단의 대조되는 것을 열거하여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하늘과 땅, 남녀노소).

 

과거 출애굽 직전의 긴박한 유월절 밤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들에게 그들이 그날 밤 급히 지켜야할 유월절 예식을 알려주면서 그것을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애굽기 13:9). 지금 모압 광야에서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그 땅에 들어가기 직전인 이 백성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마음에 간직하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는 명령을 받습니다.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친다는 동사는 ‘샤난’인데, 이것은 반복과 되풀이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 되풀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설명과 해설을 통한 상세한 가르침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참고로 이 단어에서 ‘둘’이라는 숫자 ‘쉐나님’이 파생되었고, ‘미쉬나’라는 유대인의 구전 율법문집(구전 토라)을 지칭하는 용어가 만들어졌습니다. ‘미쉬나’는 ‘되풀이한 말씀’이라는 뜻의 율법 해설서이며 복음서에서 '장로들의 전통'이라 부른 책입니다(마가복음 7:3-15),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 즉 ‘표시’로 삼으라 했는데, 손은 가장 자신의 눈에 잘 띄는 신체 부위입니다. 말씀을 미간에 붙여 ‘표’(토타모트)로 삼으라는 것은 머리의 띠에 말씀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라는 뜻인데, 이마의 장식은 타인의 눈에 잘 띄는 신체 부위입니다. 이 권면으로 인해 훗날 유대인들은 ‘테필린’이라는 양피지 재질과 딱지 모양의 작은 성구함을 만들어 이마와 손목의 표로 달고 다니기 시작했으며, 그것의 오늘날까지 관행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의 ‘말씀을 네 집의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는 것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먼저 ‘네 집의 문설주’는 각 집의 출입구에 세운 ‘문설주’(메주조트)를 의미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어떤 주택은 ‘대문’(델레트)이 있었습니다(예, 롯의 집 문, 창 19:6; 그 외 신 15:17; 수 2:19; 삿 11:31). 출애굽기 12:7에서 좌우 문설주와 인방(문의 위쪽 틀)에 ‘피를 바르라’는 명령도 이 문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주택이나 천막집에는 문짝이 없는 출입구에 문설주만 세워놓고 커튼을 쳐놓았습니다. ‘바깥문’은 단순히 ‘샤아르’, 즉 ‘문’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성문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네 집의 문설주와 바깥문’은 개인집을 출입할 때에도 성읍을 출입할 때에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띄도록 그 입구에 말씀을 기록해 놓으라는 명령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앞서 말한 대로 오늘날까지 어떤 정통 유대교 신자들은 손목과 이마에 그 표를 장식해서 달고 다니며 집에는 ‘메주조트’라 불리는 토라의 어떤 중요한 말씀을 새겨놓은 문설주를 세워놓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3:9에서 하나님께서 유월절 예식을 기억하기 위한 명령, 즉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는 명령은 문자적이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 것은 분명 유월절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 적인 방법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쉐마 헌장에서 신체의 주요 부위와 주택과 성문에 기록하라는 명령은 언제나 말씀을 곁에 두고 기억하고 묵상하라는 상징적 권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듣는 것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순종해야 함을 시사해 주는 단어입니다. ‘하나인 여호와이시니’라고 합니다. 가나안 족속들의 다신교에 매혹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설교도 쉐마가 되어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학문이나 학설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가장 정도로 섬기는 법을 전합니다. 그리고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쉐마의 신앙, 말씀 중심의 신앙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의 유무에 따라 공동체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말씀의 실종은 공동체의 붕괴를 낳고, 말씀의 부흥은 교회의 살림을 이끌어냅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정녕 올바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말씀을 배우는 일은 신앙생활의 한 영역에 그치지 않고 전 존재와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