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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0-01)

 

   


두 번째 십계명을 주신 여호와

신명기 10장 1-22절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은 행복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 또한 모든 인류가 행복하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불행한 이유를 주변에서 찾으려 하지만,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환경이나 사람이 대부분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곳에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시내산 아래에서 광란의 금송아지 축제를 벌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필사적인 중재와 탄원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 표출한 모세는 십계명 두 돌판을 깨트려 하나님의 언약 파기를 선언하셨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다시 시내산 정상으로 부르십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두 번째 돌판들을 친히 준비해서 올라오라 명하셨습니다.

 

두 번째 십계명 돌판(1-11)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의 기업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으로 거룩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친히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교회의 기업이 되십니다. 친히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온 맘과 온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1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2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3내가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4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5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6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길을 떠나 모세라에 이르러 아론이 거기서 죽어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 7또 거기를 떠나 굿고다에 이르고 굿고다를 떠나 욧바다에 이른즉 그 땅에는 시내가 많았으며 8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9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10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1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하셨느니라(1-11)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은 번번이 그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행동들을 자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진노하시면서도 회복을 위한 손길을 먼저 내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⑴ 모세를 다시 부르신 여호와(1-5)

 

모세의 목숨을 건 중재와 탄원을 받아들여, 일단 황금 송아지 사건을 용서하신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정상으로 그를 재소환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두 돌판을 모세가 깎아서 준비해 와야 하며, 그 돌판들을 보관할 법궤를 조각목으로 제작해야 합니다. ‘나무궤’(아론 에츠)는 조각목으로 틀을 짠 궤(상자)를 뜻합니다. 조각목은 정확히는 중동 지역의 광야에서 자라는 싯딤 나무지만, 관례적으로 사용된 명칭인 조각목으로 부르기로 하자. 이 나무궤는 신명기에서 ‘언약궤’라 칭하는데, 구약 전반에서 이것은 ‘법궤’, ‘언약궤’, ‘증거궤’, ‘하나님의 궤’, ‘여호와의 궤’ 등으로 불립니다.

첫번째 돌판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고 십계명을 새기셨지만, 두 번째 돌판은 모세가, 즉 사람 편에서 준비합니다. 이것은 언약 파기에 대해 백성들이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한 요구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모세가 시내산 정상에 올라가 40일 금식을 하며 백성의 완전한 용서를 위해 기도하는 중이므로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돌판에 한 것처럼 두 번째 돌판 위에도 십계명을 새기신 뒤 모세에게 건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법궤 안에 두 돌판을 보관하라고 명하셨습니다(출애굽기 25:16). 법궤는 조각목으로 짠 나무 상자이며, 안쪽과 바깥쪽에 두꺼운 금을 입혔습니다. 그 위에 ‘속죄소’(카포레트)라 불리는 금덩어리로 제작한 비품을 얹어 놓았는데, 속죄소에는 두꺼운 금관 양쪽에 금덩어리를 부어서 조형한 뒤 세공해서 만든, 날개를 드리운 두 그룹(cherub) 형상이 놓여 있었습니다(출애굽기 25:10-23;37:1-9). 여기서 법궤 제작 시점이 문제가 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새로운 두 돌판을 들고 내려온 다음(출애굽기 34:1) 성막 건설과 법궤를 비롯한 비품 제작이 시작됩니다(출애굽기 35장). 그러나 여기서는 조각목 궤를 짜놓고 시내산으로 올라와 십계명 돌판을 새로 받은 뒤 그것을 거기에 두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읽힙니다. 출애굽기와 상이한 시간 순서에 따른 신명기의 설명은 다른 곳들에서도 흔하게 발견됩니다. 시간 순서를 중시하지 않는 신명기 특유의 기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출애굽기를 따라 실제 법궤 제작자는 브살렐이고 모세는 성막 건설의 총책임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법궤를 제작하라 한 것일 뿐입니다. 제작 시기도 엄밀하게는 출애굽기를 따라 시내산에서 하산한 후에 성막 건설이 시작될 때인데, 신명기는 뭉뚱그려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⑵ 시내산을 떠난 후 여정(6-9)

 

모세의 연설이 끊긴 뒤 삽입된 설명부입니다. 이 삽입부는 시내산을 떠난 후 이스라엘의 여정을 요약해서 회상하면서 모세가 제작해서 두 돌판을 보관한 법궤를 누가 맡았는지 알려줍니다. 몇 군데 지명들이 우선 다음 순서로 나열됩니다(6-7): 브에롯 브네야아간-모세라-굿고다욧바입니다. 민수기 33:30-35에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의 지명이 나타난다 모세롯-브네야아간-홀하깃갓-욧바입니다. 두 책들 속의 이 지명들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점은 같은 장소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들로 인한 것이거나, 두 책의 여행 경로 보고가 정확한 순서와 상관없이 기록되고, 많은 지명들이 선택적으로 언급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광야의 이동 과정에서 법궤가 항상 선두에 섰으며, 법궤 위에는 하나님의 구름 기둥이 내려와 백성을 인도해갔습니다(민수기 10:11-36). 법궤는 하나님의 보좌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앉아 계신 비품이었으며, 행진 시 법궤의 선두 진행은 일종의 임금님의 가마 행차와 같습니다. 법궤의 가마꾼들은 레위 지파, 그중에서도 고핫 자손들입니다(민수기 4:5-15, 10:21). 신명기는 법궤 운반을 레위의 아들들인 제사장들이 맡았다고 설명합니다(31:9). 이것 역시 민수기와 신명기의 모순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막의 모든 비품의 관리와 운반 책임은 제사장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제사장들의 지휘 하에 법궤가 운반되었습니다. 또한 전쟁과 같은 비상한 상황에서는 고핫 자손이 아닌 제사장들이 직접 법궤를 메고 앞장선 사례들이 나타나므로(여호수아 2장; 4장; 6장) 모순된 보고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법궤 운반뿐 아니라 성막의 관리와 봉사라는 중책을 맡은 레위 지파는 땅 분배에서 제외되었는데, 대신 지정된 48개의 레위 도성에서 성전에 바쳐진 십일조와 각종 봉헌물에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이 삽입부는 그것을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라’고 표현합니다.

 

⑶ 모세의 설교(10-11)

 

다시 모세 연설의 재개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두 번째 금식과 더불어 시내산에 40일간 체류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시내산 꼭대기의 하나님 앞에서 40일간 금식하며 패역한 백성들을 위해 탄원의 기도를 계속 올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결국 받아들여졌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용서하시고 모세에게 백성들을 선도하여 시내산을 떠나 광야 여행을 시작하라고 명하십니다.

 

택함 받은 백성의 의무(12-2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물질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과 함께 다른 대상을 동급으로 생각한다면, 이미 하나님을 대처한 것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과 물질을 의지한다면, 사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숭배한 것입니다. 신앙에서는 회색지대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여호와가 되십니다.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14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16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17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19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20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21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22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12-22)

 

하나님께서는 과거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반역의 태도를 버리고 순종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근본 태도입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요구에 대한 답변과 이렇게 요구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떤분이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 언급됩니다. 

 

⑴ 하나님을 사랑하라(12-16)

 

모세는 다시금 하나님에 대한 절대 순종과 그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12장의 본격적인 율법의 재선포에 앞선 강한 권면이기도 합니다.

12-22절은 유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에 오늘날에도 그것을 요약한 내용이 ‘경외문’(the paragraph on reverence)이라는 제목으로 유대인들의 기도 책자에 나타나며, 거기서 발췌한 문구들이 앞서 말한 테필린과 메주자에 기록되기도 합니다. 12-13절에 걸쳐 절대 순종에 대한 요구가 여러 동사들을 통해 반복되면서 강조됩니다. ‘도를 행하고…사랑하고…섬기고…지킬 것이니라.’ 앞서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국제 관계에 빗대어 잘 이해되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봉주와 봉신의 관계는 일대일입니다. 어떤 속국이 구 제국의 봉주를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두 왕, 혹은 여러 왕을 하늘의 봉주로 섬길 수 없습니다. 여러 왕들에게 분산된 충성은 진정한 충성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사람이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6:24;16:13).

만일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대상을 그분과 동급으로 의지하고 섬기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그 대상이 하나님을 대체하고 있는 셈입니다. 만일 하나님도 믿고 돈도 의지하고 있다면, 그는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돈을 숭배하는 자입니다. 신앙의 세계에 회색 지대와 양다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여호와이십니다.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전형적인 총칭 어법 (merism)입니다. 그분은 모든 하늘의 주인이시고 땅 위에 있는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분이 그들을 사랑하시어 일방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택함 받은 백성은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굳은 목으로 하나님께 대항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마음의 할례’, 즉 내면에 대한 할례가 구약에서 최초로 등장합니다.

 

⑵ 약자를 사랑하라(17-22)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신들 중의 신이요 주들 중의 주’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백성을 인도하셨고 다른 신은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신명기 32:12). 그분만이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다’(열왕기하 19:19; 참조, 이사야 37:16). 그분을 사랑해야 하는 백성은 또한 마땅히 이웃을, 특히 약자를 보호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실천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계명의 순종으로 증명 되듯이 이웃사랑도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은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베푸는 행동으로 증거가 됩니다. 특히 나그네와 약자를 잘 돌보아야 합니다. 결코 가난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 무시하고 부자를 편애해선 안 됩니다. 그들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로 지내며 고통당했는데, 하나님께서 해방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큰 축복을 받아 70명의 조상에서 지금 하늘의 별처럼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졌습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연약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생명을 누리고 이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믿고 의지한다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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