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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8-02)


여호와를 잊지 말라

신명기 8장 11-20절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면,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잔소리하는 구나!’하는 부정적인 반응과 반대로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하는구나!’라는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신다면 무슨 의미를 담고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했던 약속도 잊어버리고 다시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분이시기 때문에 반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확인하신 것은 그 내용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잊지 말아야할 내용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다시 강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에 새기도록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넘치는 복을 누려 배가 부른 뒤에는 자칫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채 엉뚱한 생각을 품기 시작하곤 합니다. 모세는 인간의 이런 본성을 염려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특별히 축복 이후를 극히 조심하도록 신신당부합니다. 풍요가 은혜를 잊게 한다면, 그들도 결국 가나안 족속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우상숭배의 길로 빠져들어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은혜를 잊지 말라(11-14)

인생의 위기는 고난 중에 있을 때가 아니라 풍부해질 때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망각하면, 하나님의 축복도 상실하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고 감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11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2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11-14)

 

이스라엘의 모든 소유나 복은 그들의 손으로 이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결과이고, 그들의 능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모세는 거듭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 것을 권면하면서 은혜를 잊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⑴ 여호와를 잊지 말라(11)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로부터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말고 기억하며 살라’는 유언적 설교를 들었을 때, 그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반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입성한 지 얼마 안 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⑵ 풍부는 또 다른 유혹(12-13)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물로 배불리 먹고 좋은 집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앞서 모세는 그들이 건축된 성읍들을 점령할 것이며, 그 성읍들 안에는 그들이 짓지 않은 많은 가옥들이 있어 전쟁의 와중 에도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그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6:10-11). 그러나 여기서는 네가 아름다운 집을 지어 거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상호 모순된 진술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 이 진술은 거저 얻은 가옥에 더하여 그들이 필요에 따라 새로이 건축한 가옥들도 많을 것이라는 의미이며, 그 가옥들을 한층 더 아름답게 꾸며서 거기서 살게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좋은 집에서 배불리 먹고, 그들의 소와 양/염소 떼가 번성하고, 고대에 무게를 달아 현금으로 사용했던 은과 금을 풍부히 소유할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다량의 은금의 실제적인 소유를 의미하기보다는 재산 증식에 대한 비유적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풍요로운 삶이 자기 능력과 재주로 성취된 듯 여기는 자기도취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⑶ 교만하지 말라(14)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을 ‘망각’이라 표현하지 않고, ‘교만’이란 표현하고 있습니다(14). 교만한 사람을 목에 힘을 주고 사는 사람, 그는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며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교만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자신을 구원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은 건망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입니다.

 

성공했다고 생각할 때 위기의 시작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의지하고 순종합니다. 하지만 풍요로우면 변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정되고 부유해질 때, 하나님을 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변함없는 신앙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지속적으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하고 형통하고 일이 잘 풀려 나갈 때 경성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공급하신 하나님(15-16)

자신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들은 ‘광야 학교’를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그 광야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면 항상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살아갈 것입니다. 신앙에 가장 중요한 목적은 ‘축복’이나 ‘번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15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15-16)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이 교만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기억하고 사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광야 생활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사랑을 베푸셨던 것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출애굽시킨 뒤에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는 것은 그들을 낮추어서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3:20-22은 언뜻 에담에 장막을 쳤을 때 불구름 기둥이 나타난 것으로 읽히지만, 출애굽 직후부터 불-구름 기둥이 출현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출애굽기 13:21-22의 에담 정박에 이은 불-구름 기둥 출현에 대한 보고는 그들의 시내산까지의 광야 여정에 대한 개괄적 진술입니다.

광야 여정은 시내산을 기준으로 크게 두 장면으로 나뉩니다. 한 달 반의 짧은 시내 광야까지의 여정(출애굽기 13-18장)과 시내산 아래 일 년 정도 체류 후 출발한 뒤(출애굽기 19:1-민 10:10) 38년간 이어진 모압 광야까지의 오랜 여행입니다(민수기 10:11;신명기 1:1).

그들은 마지막 열째 재앙인 모든 장남과 짐승의 첫 새끼의 집단적 죽음의 형벌이 내려진 1월 14일 밤에 급히 유월절 의례를 치르고 다음 날인 1월 15일에 애굽 땅을 출발했습니다(민수기 33:4). 이후 시내산에 도착한 때는 ‘삼 개월이 되던 날’이었는데(출애굽기 19:1), 아마 3월 1일로 추정됩니다. 이 경우 1월 15일부터 3월 1일까지 도합 한 달 반 만에 시내산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 한 달 반의 여정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은 장차 40년 동안 광야에서 겪을 일을 축소해서 미리 경험했습니다.

이미 그 짧은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배고픔과 갈증으로 어려움 당할 때 만나와 메추라기, 물을 공급하시어 장차 40년간의 공급을 미리 맛보게 해주셨으며,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장차 여러 대적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실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출애굽기 17:8-16). 이런 이유로 시내산 도착 전에 신(sin)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 공급과 식수 공급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비슷하게 시내산 출발 후에 바란 광야와 그 북쪽 신(Zin) 광야에서도 동일한 사건들이 반복됩니다.

비슷한 사건들과 동일한 지명이 나오는 것을 어떻게 볼 것입니까? 그들은 오랜 광야 생활 기간 동안 얼마든지 여러 장소에서 동일한 식수 부족을 겪을 수 있었을 것이며, 상이한 장소에 같은 지명을 붙이는 것은 어디서든 흔한 일입니다. 모세는 이 모든 광야의 여정을 뭉뚱그려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나온 광야는 위험한 광야였습니다. 맹독성 불뱀과 전갈이 득실거렸고 물이 부족한 건조한 땅이었습니다. 광야의 불뱀과 전갈, 물 부족 등은 가나안 땅의 생명을 충만케 하는 소 떼와 양 떼, 많은 샘들과 비교됩니다. 이러한 양극의 이미지 비교는 다분히 의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위험하고 척박한 광야 길에서 백성들을 먹이시고 마시게 하시며 안전히 보호셨습니다. 그들이 식수난으로 도를 넘은 불평을 터트리며 아우성을 쳤을 때 반석을 갈라 물이 나오게 하셨으며(출애굽기 33:21 이하 민수기 20:10 이하), 출애굽 후 한 달 만에(2월 15일) 식량 문제에 봉착한 그들에게(출애굽기 16:1이하) 만나라는 비상식량을 공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이 고기를 먹지 못해 불평하자 메추라기를 원 없이 먹게 하셨습니다(출 16:13 이하 민 11:31 이하).

특별히 지팡이로 때린 반석에서 물이 나온 것은 물이 나왔던 바위는 매우 단단한 암반이었습니다. 민수기 20:8에서는 그 바위를 ‘셀라’라 ‘커다란 바위 암반(cliff)’을 의미합니다. 즉, 바위 자체가 쉽게 깨지기 어려운 단단한 암반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지팡이로 치라 하거나 말로 명령하여 반석을 가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만나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로 공급된 하늘의 식량입니다. 16절은 언뜻 만나를 주신 것이 그들을 고생시켜 겸손케 하기 위한 열악한 식량 공급인 것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15-16절은 광야 생활 전반에 대한 개괄적 묘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비상한 방법으로 필요한 음식과 물을 공급하시고 마침내 복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지나온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겸손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할 때는 궁핍할 때가 아니라 부요해 질 때였습니다. 그들은 부강하고 평강할 때에는 선지자들의 경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가 멸망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던 때였습니다.

 

은혜의 망각이 불러올 심판(17-20)

풍요로울 때 자칫 교만해져서 방종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청종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명령이 아니라 항상 반드시 청종해야 되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을 망각하면, 배은망덕할 수 있고, 그것은 죽음으로 길로 들어선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종은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17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9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20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17-20)

 

모세는 재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해질 것을 염려하여 미리 예방적으로 경고를 전합니다. 그들은 마음이 높아져 자신의 능력과 손으로 이 모든 복들을 성취하고 부를 이룩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신 분은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18).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했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이러한 부와 명성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모든 재물은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조상 아브라함이 보여준 신앙의 모범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왕이 연루된 사해 근처에서의 국제 전쟁에 참전해 승리를 거둔 후 정당한 권리인 전리품 소유권을 거절합니다(창세기 14장). 관행상 소돔 왕이 약탈당한 물품을 아브라함이 되찾아 왔다면 그 소유권은 승자인 아브라함에게 주어지는 것이 정당했습니다. 그러나 소돔 왕은 거만하고 뻔뻔하게 여전히 자신의 물건들로 간주하고 아브라함에게 큰 호의를 베풀기라도 하듯이 그 물건들을 하사품으로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아브라함은 정중히 거절합니다. 소돔 왕이 엉뚱하게 여호와가 아닌 자신이 아브라함을 부유하게 만들었다고 허세를 부릴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4:23).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승리와 전리품 획득이 자신의 능력과 군사적 행동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직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재산과 군사력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그의 모본을 따라 가나안 땅의 소유권을 넘겨받았을 때 동일한 고백을 해야 마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그 땅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급이 되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서 상속받은 것입니다. 땅 선물은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했던 언약의 약조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대로 ‘지금 그 일을 성취하실 것이다’(19). 그러나 그들이 만일 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들과 아무 상관없는 신들을 따라가 섬기고 예배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를 거두어들이실 것입니다. 강한 어조로 단호히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도 죄악과 우상숭배 때문에 멸망을 당한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과 동일하게 멸망당하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삶이 부유해지면 과거 어려운 중에 받은 은혜를 망각하기 쉽니다. 풍요는 언제든지 신앙의 덫이 되거나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복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말씀으로 마음을 지키는 것만이 자기 영혼을 잘 보존하는 길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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