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01-02)
유익한 오네시모를 받아주길 원하는 바울
빌레몬서 1장 17-25절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이 시스템을 ‘가치관’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가치관은 과연 세속적인 가치관인지, 하나님 나라 가치관인지로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가치관과 시스템은 어떤 시스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길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빌레몬은 바울을 영접하는 것처럼 오네시모를 영접해야 합니다. 비록 오네시모가 종일지라도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종과 자유자는 하나입니다. 바울은 그를 사랑받는 형제로 인정할 뿐 아니라, 만일 그가 빌레몬에게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그것까지 배상하고자 합니다. 빌레몬 역시 오네시모를 영접함으로써 바울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오네시모에 관한 바울의 구체적인 요청(17-19)
자신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친 원수라고 합니다. 사극에 보면, 이 원수를 갚기 위해 평생을 찾아다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인간적인 가치관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17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17-19)
사도 바울은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의 집으로 보냅니다. 그는 빌레몬 집에서 도망하면서 부당한 짓을 했었습니다. 오네시모나 빌레몬은 좋은 관계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네시모를 이제는 믿음의 형제로 영접하라고 부탁합니다.
(1) 오네시모를 영접하라는 요청(17)
이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영접하라고 구체적으로 요청합니다. 빌레몬은 바울을 영접하는 것처럼 오네시모를 형제로 영접해 주길 요청합니다. 빌레몬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간 노예를 어떻게 사도 바울을 영접하는 것처럼 영접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바울의 요청은 빌레몬과의 긴밀한 관계에 근거한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깊은 영적 친교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함께 일하는 동료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동역자로서 자신의 영적 아들이 된 오네시모를 영접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빌레몬이 하는 역할을 오네시모가 감당했으며, 바울에게 있어서 빌레몬이나 오네시모는 동급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의 요청은 그리스도 안에서 종과 자유인이 하나라는 복음의 진리에 근거한 것입니다(갈 3:25). 빌레몬은 자신의 동역자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회심한 오네시모를 동료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고 그를 영접해야 합니다.
(2) 손해 배상에 관한 언급(18-19)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불의를 행한 것이나 빚진 것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기꺼이 담당하겠다고 말합니다. 18절에서 ‘불의를 행하다’와 ‘빚을 지다’라는 이중적인 표현은 오네시모가 자기 주인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그의 돈 얼마를 훔쳤다는 점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또는 그가 주인으로부터 부당하게 도망한 기간 동안 수행하지 못한 일에 대해 빚을 지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계산하다’라고 번역한 동사 ‘엘로게오(ἐλλογγέω)’는 ‘어떤 사람의 회계장부에 기입하다’를 의미하는 전문적인 상업용어이며, 19절에서 ‘갚다’라고 번역한 동사 ‘아고티노(ἀποτίνω)’는 배상합니다. ‘손해를 지불하다’를 의미는 전문적인 법률용어입니다. 이런 용어들을 사용함과 동시에 약속 어음에 서명하는 것처럼 “나 바울이 친필로 쓴다”라고 말함으로써, 바울은 오네시모가 끼친 손해들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들을 배상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입니다(새번역, “그가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거든, 그것을 내 앞으로 달아놓아 주십시오”).
이어서 빌레몬 자신도 바울에게 빚진 것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전도로 회심했을 것입니다. 그가 바울에게 진 영적 빚은 오네시모가 그에게 입힌 경제적 손해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큰 빚을 진 빌레몬은 상대적으로 작은 빚을 진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 사랑의 빛을 아는 자만이 모든 차별의 담을 허물고 진정한 형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빌레몬의 순종에 대한 요청과 확신(20-22)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을 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차별이나 판단하지 아니하고 가족으로 형제의식을 가지고 하나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 모습을 우리를 통해 세상에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서로를 돌아볼 때, 우리 안에 형제로서 지체의식을있어야만 사랑이 실천될 수 있습니다.
20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22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20-22)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한 자비를 호소하면서도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간과하지 않고, 만약 오네시모가 불의를 행했거나 경제적인 손실을 끼친 일이 있다면 자신이 배상하겠다고 제안합니다.
(1) 빌레몬의 순종에 관한 요청과 확신(20-21)
‘오 형제여’라는 표현에서 오는 확인, 동의 혹은 강조를 나타내는 불변화사 ‘나이’(ναί)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예’, ‘그래’, ‘진실로’, ‘분명히’ 등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와 함께 애정 어린 호칭인 ‘형제’는 바울의 요청을 강화시켜 줍니다. 그것은 한 형제를 위하여 다른 형제에게 하는 형제의 애정 어린 요청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의 요청을 들어줌으로써 바울 자신을 기쁘게 하고 그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길 기대합니다. 빌레몬이 사랑의 행위로 성도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었듯이(7), 이번에는 오네시모를 영접하는 사랑의 행위로 바울 자신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과 관대함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가 오네시모를 따뜻하게 영접해줄 것을 확신합니다. 빌레몬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도저히 받올 자격이 없는 오네시모에게도 사랑을 나눠야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신실한 믿음과 사랑의 사람인 빌레몬은 바울의 요청에 기꺼이 응할 뿐 아니라 바울이 요청한 것들보다 더 많이 행할 것입니다. 즉, 빌레몬은 단지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할 수 있도록 오네시모를 자유인이 되게 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의 방문을 위한 준비(22)
지금 바울은 로마에서 죄수의 몸으로 편지를 보내지만, 자유의 몸으로 풀려나 골로새를 방문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빌레몬에게 자신이 묵을 숙소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여기서 숙소라고 번역한 헬라어 명사 ‘크세니아(ξεία)’는 일반적으로 ‘환대’, 혹은 ‘대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손님이 투숙하는 장소, 곧 객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골로새를 방문하여 자신이 요청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직접 확인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풀려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과 그의 집에 있는 교회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바울은 자유의 몸이 되어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을 방문할 것입니다. 왜, 이런 방문 계획을 말했습니까? 빌레몬이 바울의 부탁을 들어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에게 자유를 줄 때 이 방문이 가능하고, 또 반가이 서로를 맞이하고 기다릴 수 있는 방문이 될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마지막 인사와 은혜의 축도(23-25)
복음은 자신의 편이와 이해를 위해 거리를 두는 사랑이 아니라 세상의 상식과 통념, 자신이 정한 기준과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을 요구합니다. 용서에는 허비도 없고 지나침도 없습니다. 지치지 않는 용서의 사랑, 지체와 이웃이 기대한 것 이상의 사랑을 베풀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3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24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23-25)
마지막으로, 바울은 편지를 끝내면서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인사를 빌레몬에게 전합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의 설립자이자 사역자입니다(골 4:12-13). 그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복음을 듣고 회심했으며, 그 후에 고향인 골로새에 교회를 설립했습니다(행 19:10; 골 1.17).
얼마 뒤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던 그는 아킵보에게 사역을 맡기고 로마에 있는 바울을 찾아갔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라의 보고를 듣고 골로새서를 썼습니다. 에바브라는 로마에 남아 바울을 섬기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그와 함께 옥에 갇히는 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언급한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사역했고(행 19:29; 20:40), 바울이 로마로 갈 때에도 그와 동행했습니다(행 27:2). 데마는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말년에 세상을 사랑하여 그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딤후 4:10).
동역자들의 문안 인사를 전한 뒤 바울은 은혜의 축도로 편지를 끝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빌레몬과 그의 집에 있는 교회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그가 여기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언급한 것은 편지의 문맥상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빌레몬의 심령에 역사하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영접하는 어려운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집에서 모이는 성도들 역시 오네시모를 영접해야 합니다. 신자들의 심령 속에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공동체 안에 진정한 화해와 교제가 이루어지게 할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빌레몬 개인에게만 보낸 서신이 아니라 공동체에 보내는 형식을 취한 것은 빌레몬이 가정 교회의 리더로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여 본을 보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서 곳곳에 묻어나는 바울의 진심 어린 호소는 개인의 한계와 사회적 관계의 벽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교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지배적 가치와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복음이 요구하는 사랑의 원리를 따라 ‘사랑의 사람’이 되고, ‘용서와 사랑의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큰 울림과 긴 여운을 안겨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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