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03-01)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
베드로후서 3장 1-7절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입니다. 인간 이성의 능력은 매우 탁월해서 다른 피조물들이 누릴 수 없는 독보적인 지위를 확립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이성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말씀에 의해서 자신을 들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이해하는 데는 인간의 이성을 복종시켜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대부분 할애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을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주장이 왜 틀렸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다양한 이론보다 말씀으로 증명합니다. 말씀대로 세상이 창조되고 또 심판이 수행되었던 것을 역사가 증거한 것입니다.
저자가 편지를 쓰는 이유(1-2)
현대인들은 합리적인 이성을 앞세워 성경의 말씀을 취사선택하고 합니다. 하지만 이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이성은 결코 그것을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을 능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 앞에 겸손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1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1-2)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표현으로 거짓 교사들(‘그들’)에서 독자들(‘너희’)에게로 초점을 이동합니다. 이 부분의 역할은 두 가지 요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지금까지 보여준 논리 진행입니다.
베드로는 교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자들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 편지(‘둘째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1) 진리와 관련해 주의 재림과 심판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2) 세상을 좇아 자기중심적으로 방탕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저자는 바른 삶에 대한 가르침을 먼저 제시합니다(1:3-11). 이후 또 다른 문제인 진리 차원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저자는 잠시 다른 내용을 언급합니다. 자기 가르침을 소개한 이유와 자기와 구약 예언의 권위를 확인시키는 것입니다(1:12-21). 그러고 난 후, 거짓 교사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술합니다(2장). 주된 초점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그들의 존재와 삶입니다. 이제 드디어 진리 차원을 다룰 차례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자기가 편지 쓴 이유를 또 소개합니다(3:1-2). 이후 3:3부터 비로소 그들의 가르침을 반박합니다.
전체적으로 (A) 저자의 바른가르침 1(삶에 대해: 1:3-11) - (B) 가르침의 이유와 권위 확인(1:12-21) - (C) 거짓 교사들의 존재와 삶지적(2:1-22) – (B') 가르침의 이유와 권위 확인(3:12) - (A') 저자의 바른 가르침 2(진리에 대해: 3:3-18) 구조입니다. 이 속에서 3:1-2은 마치 한 박자 쉬고 다음 도약을 준비하는 느낌입니다. 둘째, 1:12-21과의 연관성입니다. 이 둘은 여러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독자를 일깨우기 위해 권면하고(1:13; 3:1), 독자를 기억하게 하며(1:12, 13, 15; 3:1-2), 사도의 가르침(1:16-18; 3:2)과 구약 예언의 권위 (1:19-21; 3:2)를 언급한 것 등입니다. 특별히 거짓 교사들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마다 이런 내용들을 언급한 점, 더 나아가 편지를 쓴 이유라고 소개한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 부분 내용에 집중해 교회 문제를 대하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게감을 가진 저자의 가르침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가르침의 출처를 분별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배우는가가 중요하다. 저자는 사도와 구약 예언자의 가르침을 잘 따르기를 요청합니다. 둘째, 기억하는 믿음을 놓치지 말라.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삶을 살아갑니다. 한 번의 믿음으로 끝나는 과정이 아니기에 지속적으로 진리를 기억해 그분과의 관계 안에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셋째, 신앙의 삶의 시작은 바른 생각입니다. 저자는 독자의 '순전한 생각'을 일깨우기 위해 편지를 쓴다고 합니다. 넷째, 진리를 삶으로 표현하며 사는 것입니다. 3:1-2에 언급되진 않았지만, 저자가 첫 번째 가르침으로 전한 내용입니다(1:3-11). 또한 자기가 죽기 전에 그 가르침을 상기시키고 싶다고 말한 것(1:12-15)도 이 요소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독자는 이 편지 전체를 읽고 거짓 교사를 조심해서 이런 요소들에 집중해 살아야 합니다.
주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거짓 교사들의 조롱(3-4)
성도들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 성도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 대산 세상에 규칙과 방법을 비판 없이 따른다면 그것은 이미 거짓된 가르침에 현혹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깊이 믿으며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3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3-4)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 내용에 대해 다루기 시작합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1:20에서 예언을 사사로이 해석하면 안 된다고 말할 때 사용했던 것인데, 이 부분에서는 주의 재림과 심판을 거절하는 거짓 교사들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독자가 알아야 하는 내용은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조롱하며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주목할 표현이 있습니다. 첫째, 말세입니다. 직역하면 ‘마지막 날들에’입니다. 구약은 최후 심판을 수반한 구원이 완성되는 때를 의미하지만, 신약은 예수의 사역으로 종말이 시작된 것으로 여깁니다. 역사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부활(참조. 단 12:2)이 예수를 통해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들과 주의 재림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며, 그들의 존재가 임박한 주의 재림의 증거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재림이 없다는 거짓 교사들의 이해와 반대입니다. 둘째, ‘조롱하는 자’란 표현입니다. 꼭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거짓 교사들(2:2)이나 멸망의 종들(2:19)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표현을 쓴 것은 진리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저자는 조롱하는 거짓 교사들을 두 가지로 묘사됩니다. 하나는 자기 정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정적 심판 대상을 묘사한 2:10과 같은 표현입니다. 앞서 설명한 것의 요약이며, 주의 심판 대상임을 재차 확증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폄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대상들이 도리어 그분을 우습게 여깁니다. 그들에게도 논리가 있습니다. 조상들이 죽은 후 긴 세월 동안 심판의 경고는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은 창조 이후 지금까지 변한 게 없습니다. 내일도 그럴 것이니 주의 심판은 없다는 논리입니다. 자연 현상을 보면 그럴듯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대한 비판(5-7)
하나님계서는 시간을 초월하시고 영원히 현존하신 분입니다. 천년의 장구한 세월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하루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인간의 시간 개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의 천년이 하나님께는 하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 계산은 하나님께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5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5-7)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그 말씀대로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보존하신 그 말씀의 권능으로, 죄악 가득한 노아 시대의 땅을 물로 덮어 심판하셨던 그 말씀의 권능으로 마침내 말씀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세상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살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역사의 끝에 구원과 심판을 통해 그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1) 세상의 기원에 대한 설명(5)
‘왜냐하면’이란 접속사로 그들 생각의 이유를 설명하고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저자가 진단한 그들 주장의 1차적 문제는 방법론의 오류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헬라어 어순과 달라 번역 과정에서 순서가 바뀌었지만, 5절 원문은 ‘이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의 관심을 피한다’는 표현이 먼저 나옵니다. 대명사와 생략된 주어를 고려해 의역하면 ‘자신들의 주장(이것)을 원하기 때문에 저자가 제시한 내용(그것)이 거짓교사들의 관심을 피해간다’입니다.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다른 증거는 눈감는다는 말입니다. 논리와 이성을 중심으로 사도들과 예언의 진리를 비판했지만, 정작 스스로에게는 자신들의 방법을 일관성 있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계속해서 그들이 외면하는 세상에 대한 또 다른 진실을 소개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하늘과 땅의 항존성을 근거로 주장하기에, 저자 역시 하늘과 땅을 예로 들어 반박합니다. 거짓 교사들 논리에 세 가지 요소를 추가해 설명한다. 첫째, 성경과 예언의 권위 인정입니다. 저자의 반론 내용은 거짓 교사들이 무시한 성경 내용들입니다. 둘째, 하나님입니다. 세상은 그냥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을 물로부터 물을 통해 세우셨습니다(5). 물과 분리해 땅이 드러나게 한 둘 떠날 창조의 내용입니다(창 1:9). 창조주의 말씀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의도와 관계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말씀으로 시작된 세상은 또한 말씀으로 유지됩니다.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는 세상의 일관성도 말씀으로 드러난 그분의 신실성, 곧 의로움의 결과입니다. 셋째, 심판, 곧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평가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창조된 이후 늘 똑같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2) 과거 물 심판(6)
과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홍수로 멸망한 적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평가자입니다. 창조 과정에서 말씀에 대한 피조물의 긍정 응답에 ‘선하다’고 평가하셨고, 이후 부정적으로 응답하는 아담과 하와(창 3장)와 세상(창 6-9장)에 대해 부정적 심판을 보이셨습니다.
(3) 장차 올 심판(7)
하나님께서 과거에 불경건한 자들을 평가하셨다면, 지금 존재하는 불의한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 대한 심판 방법이 물에서 불로 달라지지만, 그분은 반드시 평가하신다는 것을 추론해야 합니다. 그 심판이 현재 진행되지 않음은 장차 있을 마지막 심판 때까지 그분이 세상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 점을 놓쳤습니다. 이성적이고 나름의 근거를 주장하지만, 중요한 진실에 눈감고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 없습니다. 저자의 이런 설명은 ‘무조건적 믿음’을 강요하는 것과 결이 다릅니다. 오히려 합당한 추론과 이성을 사용해 거짓 교사들 주장의 맹점을 납득 시킵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분이 계시한 것에 근거해 생각하고 기억하고 추론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말씀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십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이 죄악 가운데 살아갈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순간부터 붙들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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