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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01-02)


그리스도의 영광과 성경의 예언

베드로후서 1장 12-21절


무엇인가를 배울 때 계속해서 읽고 쓰며 반복하는 것을 ‘반복학습’이라고 합니다. 공부할 때 한 번만 보고 알면 잊어버리기 쉽지만, 계속해서 반복하면 쉽게 잊어버리지 않게 됩니다. 기독교 교육은 항상 반복교육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그리고 구원 받은 성도들의 삶에 대해 교육되어진 것입니다. 베드로도 반복 학습 효과를 알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신자의 삶에 대한 가르침(3-11절)을 부연합니다. 2:1부터 거짓 교사들 문제를 다루기 전에 저자의 가르침의 권위와 확실성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의도입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2-15절은 독자를 향한 베드로의 태도와 마음을 전합니다. 16-18절은 예수님의 목격자임을 강조해 가르침의 권위를 확증합니다. 19-21절은 성경의 예언에 대한 태도를 다룹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기억(12-15)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후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베드로는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듯이 베드로는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고 천국에 가고 싶어 한 것입니다. 자신이 죽임당할 날이 임박했음을 알고서 성도에게 말씀을 일깨워 주려고 합니다.

12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2-15)

본문은 서신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베드로가 진단하는 소아시아 문제는 거짓 교사들이 교회 내에서 종말과 성도의 삶에 대한 왜곡된 가르침을 퍼뜨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성도의 삶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첫 권면으로 제시했습니다(3-11).

다음 과정은 종말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나 거짓 교사들에 대한 반박이어야 할 것 같은데, 저자는 대신 권면의 이유를 소개하고 자기 가르침의 권위와 확실성을 부연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영향력을 분별할 수 있도록 분명한 근거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크게 세 가지 영역을 추가합니다. 첫째, 12-15절은 독자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전해서 자기 가르침의 중요성을 각인시킵니다. 이런 의도는 여러 방식을 통해 전달됩니다. 첫째, 1인칭과 2인칭의 친밀한 대화 구도 설정입니다. 3-11절은 주로 신자의 삶이라는 객관적 주제에 대해 독자에게 명령하는 방식이었지만, 이 부분에서는 1인칭 단수 지시어를 사용해 ‘나와 너희’의 관계를 만듭니다. 어조도 명령법 대신자기 상황을 소개하는 다소 부드러운 방식을 사용합니다. 저자의 관심을 표현해 독자들 마음을 이끌어내기 위한 상황 설정입니다. 둘째, 독자들을 이미 진리 안에 서 있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12). 베드로는 편지 전체에 걸쳐 한 번도 독자들을 책망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 안에 있는 자로 인정하고, ‘그들’이라 부르는 거짓 교사들의 위험성을 경고할 뿐입니다. 3-11절도 명령법을 사용했지만, 책망은 아닙니다. 오히려 독자를 ‘형제’로 부르며 신자 삶에 대한 진리를 확인시켰습니다(10). 편지에서 거짓 교사들의 상황을 미래형으로 묘사한 것(2:1,2,3,12; 3:3)은 아직 그들의 영향력이 교회를 본격적으로 흔드는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영향력은 실재합니다. 이 상황에서 베드로는 독자가 여전히 진리 안에 있다는 신뢰를 전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영향에 대해 저자의 가르침에 계속 거하라는 간접 명령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양괄식 구조를 통해 전달합니다. 12절에서 항상 기억하게 하기 위해 3-11절 내용을 썼다고 말하고, 15절에서 다시 어느 때나 생각나게 하기를 힘쓴다고 합니다. ‘항상 기억하라’를 앞뒤에 배치한 반복을 통한 강조합니다. 저자의 가르침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넷째, 저자의 죽음에 대한 언급입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기억하라고만 해도 됩니다. 그럼에도 소개하는 것은 독자를 향한 저자의 강렬한 사랑과 의무감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저자는 임박한 죽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14). 자기가 죽더라도 독자들은 바른 진리를 기억해 그 안에 계속 머물게 하고 싶었습니다. 숨이 다하기까지 그 일을 계속하려 했고, 이제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진리를 확인시켰습니다(15). 저자는 독자들이 자신의 이 마음을 알아 자기 가르침에 집중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마치 자기 명령을 유언처럼 생각하고 항상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12-15절을 단순히 저자의 사역 변호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더 나아가 이 부분은 사역자와 성도의 관계도 잘 보여줍니다. 사역자는 성도가 진리 안에 계속 서기를 기대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고, 성도는 사역자의 그 마음을 헤아려 지속적 삶을 위해 진리의 가르침을 항상 기억하고 적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목격자로서 베드로 가르침의 확실성(16-18)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수많은 사람이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정리한 신학을 바탕으로 해석해야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 늘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16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16-18)

저자 가르침에 대한 두 번째 부연입니다. 12-15절이 독자와의 관계에 근거했는데, 16절 구조에 의하면 이 부분에서 저자의 초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가르침의 내용입니다. 예수 메시아의 능력과 재림에 대한 것이며, ‘알게 하다’ 동사를 사용해 독자들에게 전한 내용입니다. 편지에서 처음 등장하는 주제입니다(참조. 3:4,12). 3-11절에서 신자 삶을 다룰 때 언급하지 않았기에 별개의 가르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의 재림은 어둠의 통치 영역을 끝내고 구원을 완성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에는 창조주로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자의 삶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로 새 언약 관계에 충실해야 하는 차원도 있지만, 최후 평가를 염두에 두고 조심해서 정성스레 살아야 하는 차원도 있습니다. 전자가 구원 과정의 과거(9)에 근거한 것이라면, 후자는 미래 완성(11)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두 요소 중 어느 한쪽을 놓치면 구원 과정과 신자의 삶은 사상누각이 됩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의 가르침은 구원의 과거와 미래를 함께 붙잡아 오늘을 바른 신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둘째, 가르침의 기원입니다. 두 분사절의 대조를 통해 전달됩니다. 독자에게 전한 주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은 교묘히 꾸며낸 신화를 따라 전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거짓 교사들이 이렇게 비방한 듯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의 위대함을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전했다고 합니다.

17-18절에서 그에 대한 설명을 추가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사역, 곧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과정에서 저자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거룩한 산에 올라갔을 때 경험한 사건입니다(마 17:1-8). 베드로는 예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16:마 17:2). 그분이 원래 소유하고 있던 것으로 부활을 통해 드러낼 영광이자 장차 다시 오실 때 보일 능력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17-18: 마 17:5). 예수님께서 구약(시 2:7; 참조. 삼하 7:12-14)에서 약속한 메시아라는 하나님의 확증이요 선포입니다. 이 두 경험은 주의 재림에 대한 저자의 가르침이 참이라는 것을 방증합니다. 장차 능력으로 재림할 영광의 예수, 하나님께서 친히 확증한 메시아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예. 마 24:44; 막 13:26). 이런 면에서 베드로의 가르침은 거짓 교사들이 폄하하듯 한갓 신화 속 허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기인한 진리이며, 그분들에 의해 반드시 실현될 실재입니다. 독자들은 이미 서 있는 그 진리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의 예언에 대한 확증(19-21)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절대 권위를 지닌 삶의 척도로 삼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계 22:7)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켜 행해야 합니다.

19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19-21)

저자의 가르침에 대한 세 번째 부연입니다. 재림에 대한 가르침은 구약 예언과 맥을 같이하고 있기에 권위와 확실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예언은 어두운 세상에서 버티고 살아가게 하는 소망의 등불과 같습니다(19). 문제는 신뢰성입니다. 성취함 없는 예언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신 18:22). 그렇다면 주의 재림에 대한 예언은 확실한 빛입니까?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열쇠는 예수입니다.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예언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확증을 들은 베드로의 경험은 예언의 확실성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재림과 심판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주의 날’(참조. 3:10)에 대한 구약 예언(예. 사 13:6,9; 겔 30:3; 욜 1:15; 2:11; 3:14; 암 5:18,20 등등) 역시 성취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구약의 예언은 확증된 예언이자 동시에 장차 성취될 예언이기도 합니다. 독자들은 그 예언이 온전히 성취되는 그날, 마치 새 날을 알리는 샛별이 마음에 떠오르듯 그때까지 예언의 말씀에 집중하고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19).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주의 날이 없다고 말하는 거짓 교사들처럼 되면 안 됩니다. 예언은 사람들이 말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기인한 것으로 성령을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성령 안에서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과정과 예수의 존재와 사역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 관점이 없습니다. 주를 부인하고(2:1) 탐심을 채우고자 성경을 아전인수로 해석해서 사람들을 이익의 도구로 삼습니다(2:3). 세상을 즐기는 삶을 포기하지 않아 미래 심판의 진리를 부인합니다(3:3-4). 성경과 삶을 대하는 동기와 태도가 복음과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실제 경험으로 복음의 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저자의 가르침을 따라 주의 약속을 담고 있는 구약 예언을 기억하고(3:2), 거짓 교사의 교훈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대로 예수님께서 오신 메시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가 가셨던 것처럼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고대하면서 영적 진보를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신 성경을 통해 날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데 힘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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