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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서(01-01)


질투하시고 심판하신 하나님

나훔 1장 1-15절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좋으신 하나님’, ‘복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만, ‘심판하신 하나님’, ‘진노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증거하면 싫어합니다. 현대인들이 과거의 성도들보다 더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더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나서처럼 니느웨가 대표하는 앗수르 제국의 운명이 핵심 주제이지만, 그 전망이 매우 대조적입니다. 요나의 앗수르는 여호와의 은혜와 인애를, 나훔의 앗수르는 여호와의 진노와 보복을 경험합니다. 고대 근동을 두려움과 혼돈에 몰아 넣었던 앗수르가 자신의 속국에 불과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의해 멸망의 떨어집니다.

 

니느웨에 대한 경고(1)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오히려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입장에서 보복의 하나님께서는 곧 구원의 하나님이며, 진노의 주는 곧 은혜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1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1)

이중의 표제어는 나훔서에 기록된 말씀의 신적 기원을 강조합니다. ‘경고’는 신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주로 민족들의 신탁 표제어에 등장합니다. 앗수르 제국을 대표하는 니느웨가 신탁의 대상이 됩니다. 니느웨는 주전 701년 예루살렘을 침공했던(참조. 왕하 18:12-19:37; 사 36:1-37:38) 산헤립(주전 704-681)에 의해 앗수르 제국의 수도가 됐습니다.

문자적으로 ‘묵시의 책’을 의미하는 ‘묵시의 글’은 예언서들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예언자가 이상 중에 본 또는 받은 말씀임을 보여줍니다. 이 말에 근거해서 나훔이 처음부터 문서로 말씀을 전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예언자들처럼 나훔도 처음에는 공개적 장소에서 말로 신탁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나훔의 출생지만 언급하고 활동 시대와 집안에 관해서는 달리 말하지 않습니다. 예언자의 고향 엘고스는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 지명입니다. 후대의 전승은 그 위치를 갈릴리나 니느웨 근처에서 찾기도 했습니다. 이름 ‘나훔’은 ‘위로하다’의 동사 ‘나함’에서 파생한 단어로 ‘위로가 많은’을 의미합니다.

 

보복하러 오시는 여호와(2-8)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항상 두려움과 떨림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향해 얼굴을 붉히셨다면, 우리가 죄를 지을 때도 우리를 향해 얼굴을 붉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셔서 죄를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4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5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 6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7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8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2-8)

전통적 언어로 신현(新峴)을 묘사하는 이 단락은 여호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비유적 언어로 보여줍니다. 그분은 땅에서 벌어지는 일에 눈감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께로 피하는 자는 지켜주시고 악인은 진멸하시는 무한한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한마디로, 땅과 역사는 그분의 활동 무대로, 그분의 역사 의지가 구현되어 가는 시공간입니다.

나훔을 문학적으로 보자면, 각 행의 첫 자음이 ‘알랜’부터 ‘카프’까지 열한 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시(詩)입니다. ‘알랜’으로 시작하는 첫 행(2a)은 예외적으로 출애굽기 34:6-7을 인용하는 2b-3a절에 의해 확장됩니다. 특히 보복과 진노의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심판의 이미지가 처음부터 전면에 드러납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출 20:5; 34:14; 신 4:24; 5:9; 6:15; 29:19; 32:16,21; 수 24:19)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다’라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언약(결혼) 관계에 뿌리를 둔 표현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과의 독점적 관계가 무시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다른 신들을 향해 갈 때 그분의 질투는 징벌의 심판으로 나타나고, 대적이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는 이들에게는 파괴적 능력으로,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보복하시는 하나님’과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오늘의 감정적-사적 이해와 달리 고대 이스라엘의 사고에서는 사법적 공적 영역에 속한 표현입니다. 정의의 근원이시자 마지막 보루이신 여호와는 폭력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의 징계를 통해 이들에 의해 훼손된 당신 정의를 다시 바로 세우십니다. 질투와 보복과 진노는 불법과 불의의 승리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심판 의지의 극적 표현으로 의미상 동일한 범주에 속합니다. 여호와를 거스르고 대적하는 자의 정체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2-3장에 가서야 니느웨가 대표하는 앗수르로 드러납니다. 여호와의 보복과 진노는 인간의 행위에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분노에 더디시지만, 벌하지 않으시고 마냥 내버려 두지는 않으십니다. 그분은 권능이 크시기에 세상의 어떤 세력도 그분의 진노에 맞설 수 없습니다.

3b-5절은 여호와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를 그분의 현현에 수반하는 특별한 자연현상을 통해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창조 이후 흔들림이 없었던 피조세계의 질서가 뒤틀립니다. 이스라엘의 신학적 전통에 따르면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여호와를 직접 볼 수 없기에 그분의 출현은 동반하는 자연현상의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됩니다. 신현 묘사에 사용된 언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전통적인 것들입니다.

먼저 3b절은 여호와를 폭풍의 신으로 기술합니다. 폭풍과 회오리바람이 불고 구름이 자욱한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폭풍과 회오리바람을 막아설 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구름은 임재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보이지 않게 감춰주는 역할도 담당합니다. 그분은 바다와 강을 꾸짖어 물이 말라버리게 하십니다(4a).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의 조상이 홍해(출 14:21-25)와 요단(수 3:14-17)을 건널 때 이미 경험했던 이적입니다. 또 그분의 꾸짖는 소리에 바산과 갈델과 레바논의 초득이 시듭니다(4b). 레바논은 최상급의 목재로 인정받는 백향목이 자라는 울창한 산림지대로 유명했습니다. 진노하신 여호와의 출현에 자연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일어나 땅과 그 가운데 거하는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산의 바위도 깨집니다(5b). 견고함과 영원함을 자랑하는 자연도 속절없이 굴복하는데 누가 그분의 진노의 불을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진노는 대적들에게 국한됩니다. 그분은 선하시기에 당신을 의뢰하는 자들은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대적하는 자들은 넘쳐흐르는 홍수로 끝장내고 지하세계로 쫓아내십니다(7-8). 다음 단락에서는 여기에 관한 구체적 언급입니다.

 

유다와 니느웨에 관한 예언(9-15)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도록 겸손하게 하나님의 동행하며 말씀에 순종으로 삶,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와 가까이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9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0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11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12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13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14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15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9-15)

니느웨(앗수르)의 멸망과 유다의 구원에 관한 예언들이 모아져 있는데 청자의 신분이 달리 언급되지 않아 다양하게 해석됩니다. 9-10절은 여호와께 음모를 꾸미는 자들에게 주는 위협의 말씀입니다. 다시는 재난이 일어나지 않게 여호와께서 대적들을 모조리 끝장내실 것입니다. 한번 불이 붙으면 곧장 다 타버리는 마른 지푸라기처럼, 술에 취해 서로 뒤엉켜 곯아떨어진 주정꾼들처럼 이들은 모두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쳐 멸망합니다.

심판의 대상인 청자 “너희(남성)”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여호와의 구원 승리을 불신하고 계속 앗수르의 봉신으로 남기를 주장은 예루살렘 왕궁의 친 앗수르 세력 또는 앗수르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둘 다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는 세리이라는 점에서 함께 고려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11절에서는 청자가 여성 단수의 ‘너’로 바뀝니다. ‘여호와께 거슬러 악을 꾀하며 사악한 것을 도모하는 자가 너에게서 나왔다/떠났다.’ 청자 ‘너’로 예루살렘이나 니느웨가 다 가능합니다. 전자라면 앗수르의 이익을 위해 예루살렘에 주둔한 앗수르 세력의 철수를, 후자라면 니느웨 성을 나서는 앗수르 군대의 원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방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약속하는 12-13절의 청자 ‘너’(여성)는 예루살렘 또는 유다가 분명합니다. 앗수르 또는 그 군대가 아무리 막강할지라도 그분께서 반드시 멸망시키시고, 앗수르가 유다에 지운 멍에를 부러뜨리고 결박을 끊어주실 것입니다(참조. 사 9:4). 전에 유다를 앗수르의 손에 붙여 심판하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앗수르로부터 유다를 해방하십니다. 유다를 심판하신 분께서 유다를 구원하십니다. 14절의 ‘너’는 남성으로, 청자가 다시 바뀝니다. “네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없게 되었음이라”는 앗수르의 역할과 관련한 언급 같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심판하는 여호와의 도구였던 앗수르(참조, 사 10:5-6)의 역할이 다 끝났습니다. 한계를 넘은 앗수르가 심판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심판의 범위가 앗수르의 통치자를 넘어 그의 후손과 우상들로 확대됩니다. 15절에서는 청자 ‘너’가 다시 여성으로 바뀝니다. 앗수르의 멸망과 유다의 해방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이미 산 위에 이르렀습니다(참조. 사 52:7). 여호와의 구원 약속은 먼 미래에 속하지 않습니다. 유다의 구원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사건입니다. 악인(앗수르)이 다시는 유다로 통행하지 못합니다. 유다는 다시 축제를 즐기고 서원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유다는 정치적 주권을 되찾고, 여호와의 종교도 온전히 회복됩니다.


많은 성도가 죄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만 그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사랑의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떠나있고, 마음대로 방탕하게 살고 있다면 오히려 진노의 하나님에 더욱 가깝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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