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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01-02)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함

스바냐 1장 14절-2장 3절


예부터 우리나라는 이름에 대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름에는 반드시 뜻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름의 뜻을 따라서 가치 있는 사는 사람들을 ‘이름 값하는 사람’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서 이름은 뜻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본 책의 ‘스바냐’라는 뜻은 ‘하나님이 숨겨 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뜻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숨기시고 보호하시길 원하십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여호와의 날에 임박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 날에 범죄한 유다에게 임할 심판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 날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고 여호와께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절대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회개의 자리로 모이라고 하십니다.

 

행하실 큰 날의 심판의 묘사(14-16)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날은 악인에게는 두려운 날이지만, 회개하고 돌아온 의인에게는 기쁨의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심판을 없는 것처럼 죄악은 만연해져 갑니다. 마치 죄에 대해서 무감각한 하나님처럼 무시하며 말하지만,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노아의 홍수의 심판처럼 있을 것입니다.

14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15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14-16)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출구가 없습니다. 괴로움을 받으며 소경처럼 헤매지만 피할 곳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디에도 안전한 곳을 찾지 못합니다. 그런 고난은 하나님께서 비인격적이고 잔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해서 범죄한 것에 대한 보응입니다.

(1) 여호와의 큰 날(14)

본문 14-18절은 여호와의 날을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에서는 ‘여호와의 큰 날’로 말하는데, 그날 유다 백성에게 나타날 크고 무서운 결과들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여호와의 큰 날이 BC 586년 바벨론 군대의 예루살렘 침공으로 성취되었다고 봅니다. 그날은 빠른 시일 내에 임할 것이고, 누구고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용사의 슬피 우는 소리’는 유다를 침공한 바벨론 군사들의 고함소리를 가리킵니다. 바벨론 군대의 준마들이 우는 소리에 유다 온 땅이 진도하고, 유다의 성읍과 주민은 삼킴을 당할 것입니다(렘 8:16-17).

(2) 환난과 고통의 날(15-16)

‘여호와의 큰 날’은 분노, 환난, 고통, 황폐, 패망의 날, 어둠, 구름, 흑암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요엘 2장 2절은 그날을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로 묘사합니다(암 5:18,20). 이는 그날이 기쁨, 소망, 생명의 빛이 전혀 없는 절망의 날임을 암시합니다. 그날에 여호와의 분노를 머금은 적국은 나팔을 불며 유다의 견고한 성읍을 치고, 높은 망대를 허물어뜨립니다. 유다 성읍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신랑과 신부의 소리가 끊어지고, 땅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렘 7:34).

스바냐 선지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심판에 대한 경고를 무시했지만, 심판의 날은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14a)라고 신속히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심판의 날을 묘사하면서 군인, 나팔, 성읍, 망대, 피, 시체, 불 등으로 묘사해서 전쟁터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는 심판의 날이 마치 전쟁터와 같이 비참하고 무섭게 임할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에도 불구하고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15)라고 기쁨의 날이 아닌 절망과 고통, 흑암과 완전한 멸망의 말이 될 것입니다. 노아시대 때 물로 심판하셨다면 이제는 불로 세상과 사람들을 완전히 멸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도 도적같이 임한다고 하셨습니다(살전 5:2). 준비되어 있지 않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과 같이 부끄러운 만남이 아니라 주님을 맞을 준비되어 있는 지혜로운 신부가 되길 바랍니다. 그 심판의 날을 스스로 피할 장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판의 날에 대한 결과(17-18)

세상의 은과 금은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 우리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재산도, 업적도, 명예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의 전체를 드리지 않으면 결코 만족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물에 빼앗긴 마음을 질투하신다고 하시는데, 당신은 계속 고집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여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길에서 떠나시길 바랍니다.

17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18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17-18)

여호와께서는 그 심판의 날에 유다 백성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같이 어둠 속을 헤매게 하실 것입니다. 맹인같이 행한다는 표현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심판받아야 하는 무기력함과 암담함을 내포합니다. 이처럼 참담한 심판이 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의 범죄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렘 7:24).

유다 백성은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소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출 19:5-6). 그러나 악한 꾀와 완악한 마음을 따라 범죄하고 여호와께 등을 돌리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이자 파괴자가 되셨습니다. 그때 그들의 피는 먼저와 같이, 그들의 살은 분토와 같이 사방에 흩날릴 것입니다. 백성이 믿고 의지하던 황금과 재력뿐 아니라 추구하던 명성과 권력도 그들을 구원하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 어떤 경쟁자도 용납하지 않으시고 질토하시는 여호와께서, 우상을 섬기고 범죄를 자행한 백성을 놀랍게 멸절하실 것입니다. 유다 백성의 파멸은 종말에 임할 우주적 심판을 아울러 예견합니다.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2:1-3)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길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여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1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3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1-3)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은 백성들로 절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두려움을 통해 회개하고 순종에 이르길 원하신 것입니다. 모든 우상과 무관심을 버리고 여호와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겸손과 공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에서 숨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수치를 모르는 백성(1-2)

스바냐는 이제 내용을 바꾸어 유다가 재앙에서 벗어나리라는 회복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간절한 권고로 시작합니다. 선지자는 유다 백성에게 ‘모일 것’을 요구합니다. 당시 유다 백성은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었습니다. ‘수치를 모르는’이라 뜻은 ‘훈련받지 않은’ 또는 ‘버림받은’이란 뜻입니다. 3:5에서 ‘수치를 모른다’는 표현은 ‘불의하다’와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그들은 언약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악을 자행함으로써 영적 수치심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 앞에 모일 것을 요구하십니다. 함께 모여 하나님께서 심판의 뜻을 돌이키도록 은혜를 간구하라는 것입니다(욜 2:16).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기 전,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진심으로 악에서 돌아서서 회개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2)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3)

여호와이 말씀을 따르고, 참된 회개를 이루는 자는 세 가지 본질적 요소, 즉 여호와를 찾음, 겸손, 공의를 이룹니다. 참된 회개란 ‘마음의 돌이킴’ 또는 ‘마음의 본질적 변화’를 의미함을 보여 줍니다.

먼저, 여호와를 찾는 것은 언약의 말씀을 통해 여호와의 뜻을 구현하는 삶을 내포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구현하는 제자도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전환은 영적 겸손에 달려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언약 백성이 추구해야 할 영적 가치의 근본을 겸손에서 찾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겸손을 구현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겸손하게 의지하는’ 영적 자세뿐 아니라 ‘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돌이킴을 포함합니다. 끝으로, 성도는 공의를 구현해야 합니다. ‘공의’는 ‘흠 없는 행동과 정직’, ‘의’, ‘(재판관의) 정의’, ‘(하나님의) 공의’, ‘의와 경건’,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의’,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 ‘신뢰할만한 진리’, ‘법률적 요청’, ‘사회정의’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구약성경에서 많은 경우 정의와 공의는 함께 등장하여, 어떤 존재의 행동 양식이나 관계에서 드러나는 올바름, 공평함, 정직함, 신실함, 죄 없는 상태를 내포하는데,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용례로 사용됩니다. (1)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 원리와 방식(시 97:2; 98:9; 사 32:16~17), (2) 세상 왕과 지도자들의 통치 원리(삼하 8:15; 왕상 10:9; 시 72:1~4), (3) 하나님 백성의 의로운 삶의 양식(사 5:7; 겔 18:5~9;암 5:24).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공의는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성품)과 통치 방식일 뿐 아니라 언약 백성이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구현해야 할 경건한 삶의 핵심가치 중 하나입니다. 이 구절에서 ‘공의’는 우상과 죄악을 벗어 버리고, 여호와와 맺은 언약 관계를 견지하는, 거룩하고 의로운 삶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영의 임재와 지혜를 구할 때, 삶을 통해 구현됩니다(사 61:1-3). 그렇게 될 때 그들은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숨김을 얻고(스바냐의 이름의 의미), 구원, 인자, 복을 누릴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 이름의 뜻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에서 안전하게 덮어주길 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죄악으로 만연한 땅에서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겸손히 여호와께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민족도 여호와께 돌아가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 다시 부흥의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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