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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01-02)

 


심판 전에 회개를 촉구하는 요엘

요엘 1장 13-20절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모든 것에 때가 있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하루 중에도 때가 있습니다. 밥 먹어야할 때가 있고, 일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지금은 공부할 때이다’라고 훈육하기도 합니다. 인생에는 적절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때를 놓치면 두 배 세 배의 노력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지혜는 때를 놓지지 않는 것입니다.

 

심판하실 ‘여호와의 날’이 점점 가까웠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심판이 임하므로 육신의 양식이 끊어지고 영적 양식인 예배가 끊어져 그들의 기쁨과 즐거움이 애통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금식하고 함께 모여 회개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회개와 기도를 촉구(13-14)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연결고리가 되어 바른 길로 인도해야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할 수 없습니다. 무관심하면 할수록 이스라엘은 다른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점점 제사가 사라지고 제사장들의 삶도 피폐해졌습니다.

13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14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13-14)

요엘은 닥칠 메뚜기 재앙이 앞으로 유다 땅에 다가올 큰 심판의 예고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심판을 당하기 전에 금식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9절에서 제사장들 사이에 일어날 애통을 언급한 요엘은 13절에서는 제사장들을 향하여 애곡을 명령하고 그들이 취할 행동을 조언합니다.

먼저, 요엘은 제사장들에게 굵은 베 옷을 입고 금식하고 애통하며 회개의 밤을 보내라고 명합니다(13). 요엘은 제사장들을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과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로 지칭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주된 임무가 성전을 돌보며 자기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제사와 중보 역할을 하는 등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그리고 ‘너희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하나님께서 요엘 자신과 제사장들을 포함한 유다 백성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분, 바로 언약의 하나님임을 기억하도록 유도합니다.

한편, 굵은 베옷은 평상시 입던 옷을 벗거나 찢고 대신 입는 장례 의복이지만(삼하 3:31), 장례 때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회개하고 간구할 때 입는 옷이며(왕하 19:1; 사 37:1-2), 이런 옷을 입는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겸비함과 순복함과 애통함을 상징합니다. 요엘의 ‘베옷을 입으라’는 명령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그 옷을 입고 밤을 보내라는 데 있습니다(아합 왕, 왕상 21:21-29). 이처럼 밤까지 베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떤 상황의 심각함을 암시하며, 기도하는 자들의 진심과 진지함을 드러냅니다.

요엘이 제사장들에게 굵은 베옷을 입고 애통하라고 명하는 이유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메뚜기 재앙으로 작물이 다 소멸되어 소제와 전제를 드릴 때 필요한 고운 가루와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을 얻을 수 없어 제사가 중단되기 때문입니다. 기본 곡물을 준비하지 못할 만큼 그 땅에 폐허가 심각하다는 의미입니다. 제사의 중단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중단되었음과 백성들이 죄에서 분리되어 거룩함을 유지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의 제물을 원하신 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는 신 것은 호세아 선지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라고 하셨고, 신약에서는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 12:33)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보다 더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이 이것을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베옷을 입고 회개하며 밤낮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둘째, 요엘은 제사장들에게 금식일을 정해서 유다의 장로들과 모든 주민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모아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조언합니다(14). 영적 지도자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금식일은 대속죄일과 같은 절기나 국가에 위중한 문제가 일어났을 때 지정하여 지켰습니다. ‘금식일을 정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 절박하게 매달려야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금식과 기도는 굵은 베옷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굴복하고 그의 도움을 간청하는 행위로서 하나님께서 내리실 재앙을 거두고 그의 보호와 축복을 기대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요엘이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더불어 모든 이들의 금식을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르짖어 하나님이 내리실 재앙을 피하라는 요구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받은 예는 성경에 여러 차례 기록되었습니다(대하 20장), 유다의 여호야김 왕 5년(기원전 605년)에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 모든 백성에게 금식이 선포되고 유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크므로 회개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낭독되었습니다(렘 36:6, 9), 그러나 이때 여호야김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기록된 말씀을 모두 불에 태워버렸고,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재앙과 벌을 예고 받았습니다(렘 36:30-31; 22:19). 또한 이스라엘의 포로기가 끝난 후 에스라가 무리를 이끌고 바벨론에서 유다 땅으로 돌아올 때(기원전 458년), 에스라는 함께한 무리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라고 종용하며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까지 그들을 대적으로부터 건져 무사히 도착하도록 기도하라고 명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의 보호 속에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스 8:21, 31). 심지어 이방인인 니느웨 왕과 백성도 요나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듣고 금식을 선언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악한 행위에서 떠났고, 그 결과 하나님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3:5-10).

 

임박한 여호와의 날(15)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파국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어느 누구도 어느 장소도 안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형벌의 심판이 임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상급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함께 찬양하며 영광을 돌릴 날입니다.

15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15)

요엘이 2-3절에서 언급한 ‘이것’이란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은 자주 언급되는 표현으로 심판과 구원이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므로 선지자는 애통해야 합니다. 그날은 구원의 날이 아니라 멸망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날이 전능자로부터 이른다고 예고하는 요엘의 말로 이날에 심판을 내리는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점이 명백해졌습니다.

‘여호와의 날’의 예고와 그날의 임박성 또는 여호와의 날이 전능자로부터 멸망의 날로 임한다는 소식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15절과 흡사한 내용은 에스겔서와 이사야서에도 나타납니다(겔 30:2; 사 13:6), 특히 스바냐 선지자의 경우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에 대해 가장 집중적으로 다루었는데, 그는 무엇보다 먼저 여호와의 날이 희생의 날이며 온갖 피조물이 멸절되는 날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습 1:2-8).

 

음식과 즐거움의 핍절(16-18)

하나님의 공동체는 합심 공동체입니다. 마치 몸과 같습니다. 몸 가운데 한 부분이 아프면, 전체가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픈 부분을 빨리 치료해야 합니다. 아픈 곳을 치료하지 않고 다른 곳을 아무리 치료한다고 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죄가 우리를 아프게 만들었다면, 다른 것을 치료한다고 해서 기쁘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죄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16먹을 것이 우리 눈 앞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17씨가 흙덩이 아래에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18가축이 울부짖고 소 떼가 소란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 떼도 피곤하도다(16-18)

이제 요엘은 죄의 영향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의 피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육적으로 영적으로 굶주림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메뚜기 재앙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눈앞에서 먹을 양식이 다 끊어질 것이므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배고픔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제사에 필요한 곡식과 기름을 얻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죄를 용서받고 거룩한 삶을 사는 데 지장을 받게 됩니다. 들판에서 곡식을 거두고 곡식을 창고에 거두는 기쁨도 끊어질 것이며, 성전에서 울려 퍼져야 할 찬양 소리와 기쁨의 함성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있던 곡식은 시들고 썩고 새로운 소산물은 얻을 수 없으므로 창고와 곳간이 황폐해지고 무너집니다.

인간의 죄로 인한 재앙은 땅과 들판만이 아니라 소나 양 등의 가축에게도 해를 입힙니다. 꼴을 먹을 수 없어 기진맥진한 가축의 울부짖음도 사람들의 애통 소리와 함께 커져갑니다.

사람이 지은 죄가 그 사람뿐만 아니라 피조물의 세계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모든 소망을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자기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모든 부분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함께 고통 가운데 빠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회복하는 운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선구자의 간구(19-20)

지도자의 중요한 역할은 선견지명입니다. 오늘날 근시안과 사리사욕, 감투싸움과 무사안일에만 빠져있는 지도자들이 문제입니다. 마지막 때, 재앙을 극복해낼 수 있는 준비된 역량을 갖춘 지도자가 요구됩니다. 극심한 춘궁기를 맞이한 한국교회의 유일한 희망은 거룩하고 신실한 지도자의 출현에 달려 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이여! 함께 이 지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낙타 무릎을 만들어갑시다.

19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목장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들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20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19-20)

위 13절에서 제사장을 포함한 유다 모든 자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명령한 선지자 요엘은 이제 자기 자신도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으며 구원을 간청합니다. 유다 백성에게 담대히 멸망의 소식을 전하고 그들에게 임박한 재앙에 앞서 회개를 명하며 스스로도 하나님께 간구하는 요엘의 태도는 선지자의 본분을 잊지 않는 헌신과 신실함을 보여줍니다.

한편, 요엘은 부르짖음의 원인으로 불과 기근을 들며, 불이 들판의 풀과 나무를 모두 사르고 시내가 다 말라 들짐승들조차 목말라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청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때 불과 기근은 재앙을 뜻하며, 실제로 일어난 불과 기근이나 메뚜기 재앙의 황폐함(욜 2:3), 또는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진노와 관련하여, 스바냐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의 진노와 질투의 불이 임한다고 언급하였습니다(습 1:16; 2:8). 예레미야는 인간의 행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불이 일어나 끌 자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였고(렘 4:4), 말라기 선지자는 그날에 용광로 같은 불이 교만한 자와 악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을 사를 것이라고 예고하며(말 4:1),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분노가 심판으로 이를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재앙은 절망이나 완전한 파멸이 아닙니다. 재앙은 새 출발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재앙은 정화와 회복과 부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직시하고 공동체가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응답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며 자신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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