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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8-02)


랍사게의 회유와 협박

열왕기하 18장 17-37절


신앙의 오솔길에 우군은 드뭅니다. 마치 이리 떼 속에 던져진 양을의 처지와 같습니다. 주위를 들러봐도 아무도 없는 것같이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그 나라의 도래와 구현을 열망하는 교회는 매 순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합니까? 누그의 말을 들을 것입니까?

 

  • 앗수르의 산헤립이 국내의 혼란한 상황을 정비한 후 군사를 이끌고 다시 팔레스틴으로 침입하였고 블레셋 지역을 되찾았으며, 유다의 성들까지 정복하며 무서운 기세로 유다를 정복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요구하는 공물을 바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고, 예루살렘은 함락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공격함(17-18)

우리의 신앙적 결단은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서 줄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냐 다른 것이냐 사이의 선택일 뿐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우리를 아는 채하지만, 사실은 왜 여호와를 의뢰하는지에 대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반대로 조롱합니다. 항상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지를 점검하면 승리하게 됩니다.

 

17여호와여 앗수르 여러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18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17-18)

 

산헤립이 앗수르의 왕정을 정리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갖게 되자, 팔레스틴 정복에 나섭니다. 자신이 직접 출정하는 대신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로 하여금 대군을 끌고 라기스부터 예루살렘까지 정복하라고 보냅니다. 라기스 성은 강력한 수비성이거나 왕의 요새였습니다. 이곳은 르호보암이 요새화한 곳으로 유다 산지와 해안 평야 사이의 세펠라 기슭에 있으며, 사방으로 깊은 골짜기에 둘러싸인 천연 요새이고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라기스는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는 주요 관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산헤립의 명령을 받은 랍사게의 대군은 이런 견고한 요새인 라기스를 함락하고 예루살렘까지 진격합니다. 이 것은 당시 앗수르 군대의 전력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루살렘 성 근처까지 온 이들은 왕을 불러냅니다. 고대 전쟁에선 무력으로 싸우기 전에 먼저 말로 항복하라고 설득하거나 협박하는 말싸움을 먼저 합니다. 그러자 왕을 대신해서 왕궁 책임자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사관 요아가 대응하기 위해 나갑니다.

 

랍사게의 선동 Ⅰ(19-27)

세상은 하나님께서만 줄 수 있는 풍요와 번영을 자신들이 줄 수 있다고, 그리고 쉴 새 없이 ‘너희에게 풍요를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일종의 신성모독입니다. 오늘날 광고와 선전 문구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말을 진리인 양 제시하고 있습니다. 랍사게의 선동, 또한 그러한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19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20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21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22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비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23네가 사자들을 통하여 주를 비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여러 산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 깊은 곳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내가 그 가장 먼 곳에 들어가며 그의 동산의 무성한 수풀에 이르리라 24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강들을 말렸노라 하였도다 25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옛날부터 정한 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무너진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 26그러므로 거기에 거주하는 백성의 힘이 약하여 두려워하며 놀랐나니 그들은 들의 채소와 푸른 풀과 지붕의 잡초와 자라기 전에 시든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27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내게 향한 분노를 내가 다 아노니(19-27)

 

앗수르 왕의 사신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전의를 꺾기 위해 그가 의뢰하는 대상이 얼마나 미덥지 못한지를 지적합니다. 그러니 싸울 계교와 용력이 있다는 말도 입에 붙은 말뿐이라고 폄훼합니다.

 

⑴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19-25)

 

랍사게는 앗수르 왕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는데, 너희가 믿은 것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19절과 20절에서 반복적으로 질문하는 것은 너희가 누구를 믿고 반역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다 왕이 싸울 능력이나 계략이 있다는 말은 오직 말뿐이라고 하며, 유다 자체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전채합니다. 유다가 의지한다고 생각하는 대상들을 21절부터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21절에 따르면 앗수르 왕은 유다가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히스기야가 애굽과의 동맹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지자 이사야의 비난으로 이 동맹이 성공하진 못했습니다. 랍사게는 애굽을 상한 갈대 지팡이로 비유하면서, 애굽은 동맹국을 도울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동맹들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라고 조롱합니다. 당시 애굽은 이전의 힘을 어느 정도 회복한 상태이지만, 앗수르에 맞설 만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22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다의 믿음의 근간이 되는 여호와 신앙도 히스기야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비난합니다. 히스기야가 산당과 제단들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하라고 한 것이 여호와의 분노를 일으켜, 여호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유일신 종교인 여호와 신앙의 특징을 제대로 알지 못했거나, 설혹 알았더라도 그동안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 불만이 있거나 불안한 마음을 가진 백성들에게 히스기야에 대한 불신을 만들기 위해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기를 하자며 말 타고 싸울 수 있는 병사 이천 명을 세울 수 있다면, 자기가 기꺼이 말 이천 마리를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너희는 말 탈 병사 이천 명도 없는 주제에 무슨 전쟁을 하겠다고 버티느냐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이스라엘의 신학을 이용해 놀립니다. 자신이 이곳에 전쟁을 하러 온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며 자신은 유다를 멸망시키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허풍을 칩니다. 즉,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제대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여호와의 명을 받고 유다를 치러 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랍사게의 말은 매우 교묘하고 간교합니다. 이스라엘의 신학을 비틀어 자신의 공격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뜻을 바로 알고 있지 못하면 속아 넘어갈 만큼 랍사게는 탁월한 언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⑵ 유다 관리들과 랍사게의 협상(26-27)

 

랍사게의 교묘하고 탁월한 언변에 당황한 히스기야의 신하들은 랍사게에게 아람 말로 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으니 백성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히브리 말이 아닌 아람어로 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랍사게의 말을 듣고 백성들에게 히스기야 왕에 대한 불신이 생겨서 불만이 커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국제 통용어는 아람어있기 때문에 앗수르도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랍사계는 이런 요청을 무시하는데, 성에 있는 군인들이나 백성들도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의 소변을 먹고 대변을 먹는다는 말은 앗수르의 철통같은 포위로 식량이 떨어져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며, 예루살렘이 곧 이런 운명에 처할 것을 백성들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이 모든 책임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히스기야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열왕기하 6장에서 극심한 기아에 시달려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는 모습이 떠오르게 합니다.

 

랍사게의 선동 Ⅱ(28-37)

세상이 교회를 공격하고 세속화가 교회를 유혹할 때, 유일한 대응전략은 침묵입니다. 세상의 제안과 논리를 거부해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의 말을 들어줄 용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목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꾸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때로는 가장 큰 용기와 울림이 됩니다.

 

28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29또 네게 보일 징조가 이러하니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30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31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2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33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34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35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6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28-37)

 

랍사게는 간교한 회유와 협박으로 계층간의 불화를 조장하고 저항 의지를 꺾으려 했습니다. 항복하면 좋은 땅과 안전을 선물할 것이라고 회유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앗수르의 손에서 살아남은 나라가 없었던 역사를 상기시키며 여호와를 의뢰하라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고 위협합니다. 누구의 말을 따르시렵니까?

 

⑴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28-35)

 

하지만 랍사게는 이런 요청을 무시하며, 더 크게 유다 말로 위대한 앗수르 왕의 말을 들으라고 외칩니다. 이 형식은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형식과 동일한데, 이것은 앗수르 왕이 여호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말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과 상당히 유사한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히스기야의 말에 속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 이유는 히스기야가 너희를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믿으라고 해도 듣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여호와가 앗수르 왕의 손에서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해도 듣지 말라고 반복적으로 경고합니다. 대신 앗수르 왕의 말을 들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31절에서 앗수르 왕의 말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만일 항복하면 너희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각기 우물물을 마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함락 후 볼모로 끌고가고 성읍과 포도원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과 반대의 모습입니다. 또한 더 좋은 곳으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이 가득한 지역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8:78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실 때 하신 말씀을 랍사게가 인용하면서 여호와께서 주신 땅보다 더 좋은 땅으로 앗수르 왕이 인도해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앗수르 왕을 믿으라고 하며 반복적으로 여호와와 히스기야를 믿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33-35절에서는 앗수르 왕의 손에서 자신의 땅을 구한 신이 없다는 사실을 실제 예를 들어가며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이제 히스기야 대신에 직접적으로 여호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랍사게는 여호와가 앗수르 왕보다 무능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앗수르 왕이 정복한 땅의 어떤 신도 앗수르 왕의 손에서 자신의 나라를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경험적으로 보면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유다보다 강한 나라들과 도시들도 모두 멸망당했고 특히 같은 여호와를 믿은 사마리아도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상황 속에서 여호와께서 유다를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신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랍사게는 이렇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말로 예루살렘의 항복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논리와 통계와 합리적인 것을 넘는 일입니다.

나라가 흥하고 멸망하는 것이 여호와의 손에 있고, 전쟁의 승패가 여호와의 손에 있으며,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여호와를 의지하면 주께서는 결코 그런 믿음의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며, 이 모든 상황을 뛰어넘으실 것입니다.

 

⑵ 유다 백성의 반응(36-37)

 

유다 백성들은 이런 랍사게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왕을 신뢰하고 그 명령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랍사게의 이간질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기 때문에 신하들은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립니다.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느끼는 지성’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세상을 읽는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애통의 언어가 필요하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도도 필요합니다. 교회의 교회됨을 유지하고 살려내기 위해서 시대를 분별하고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영적 실력이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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